역사로 세계 읽기

을사조약과 일본의 아시아주의

‘아시아 민족 연대’와 ‘일본 국수주의’ 사이에서 흔들려

  • 글 : 임명묵 작가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아시아주의를 한국인의 시선에서 해석
⊙ 다루이 도키치, 《대동합방론》에서 한중일 연대 주장
⊙ 아시아주의 영향 받은 이용구, 흑룡회와 손잡고 친일 활동
⊙ 쑨원 “일본, ‘서양 패도의 번견’이 될 것인가,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
⊙ 시진핑, ‘一帶一路’ 내세워 ‘아시아 연대’ 주장하지만…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1930년대 초 일본 정치인·종교인 및 외국 이슬람교 지도자들과 만난 도야마 미쓰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도야마 왼쪽 인물은 총리를 지낸 이누카이 쓰요시. 사진=퍼블릭 도메인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5년 11월 일본 천황의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을 찾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을사조약은 1910년 한국 병합의 예고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태동기에 있던 한국 민족주의가 각성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항일(抗日)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자 정점(頂點)이었다. 안중근의 전설은 계속되어 오늘날까지도 뮤지컬 〈영웅〉, 영화 〈하얼빈〉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영웅 안중근’에 대해 탐구하면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 선뜻 와닿기 힘든 흥미로운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사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저술한 〈동양평화론〉이다.
 
 
  “일본의 大義가 청천백일보다 밝았다”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무력(武力)을 앞세워 동양을 침략하는 유럽 세력, 그중에서도 특히 러시아를 비난하며, 동양 황인종의 대표로서 백인종 러시아를 무찌른 일본의 ‘업적’에 찬사를 보낸다. 안중근에 따르면 러일전쟁 당시 한국과 청(淸)나라 국민이 일본을 응원하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했던 이유는 “일본의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밝았던” 데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이러한 동양 평화의 대의를 저버리고 을사조약을 필두로 유럽 제국주의 열강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니 그 실망감과 분노에 하얼빈 의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국 병합과 식민화의 역사를 아는 오늘날의 한국인의 눈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순진한 이상주의(理想主義)’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미 강화도조약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노골화된 일본의 침략 야욕을 러일전쟁 때까지 모른다는 게 이상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구한말의 시점에서, 〈동양평화론〉에 드러난 안중근의 세계관이 특별히 유별나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문명의 압도적인 힘을 앞세워 서양이 침입해 오자 한중일(韓中日) 동양 삼국은 서로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더 많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대 한중일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중에서도 일국(一國) 단위의 정치보다 지역과 문명 단위의 연대(連帶)를 더욱 추구한 사상이 부상(浮上)했으니 바로 ‘아시아주의’였다. 안중근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일반적 정치 구상 중 하나였던 아시아주의를 한국인의 시선에서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긴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안중근의 아시아주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어떤 인물들이었고, 그들은 조선을 놓고 어떤 구상을 가졌을까? ‘동양의 단결’을 주장한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어떻게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으로 귀결되었을까?
 
 
  동양의 화이관
 
  사실 일본이 당초부터 조선, 중국과 정체성(正體性)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전통시대 동아시아는 중국이 중심이 되는 ‘천하(天下) 질서’로 운영되었다. 중국과 중화(中華) 문명을 받아들인 조선과 베트남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고, 그 바깥은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일본의 세계 인식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태양신(太陽神) 아마테라스로부터 이어져 오는 ‘신국(神國)’이며 천황은 그 아마테라스의 후손이었다. 일본에서 ‘천하’는 일본 열도를 의미했고, 조선이나 중국이 반대로 천황을 따르지 않는 ‘오랑캐’였다. 전통시대에는 동양도 아시아도 없었고 화이(華夷)만 있었던 셈이다.
 
  상황은 에도(江戶)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도래(到來)였다. 일본이 아무리 중국과 조선과 다른 정체성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이 두 이웃을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같은 서양 세력과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한자문화, 불교, 건축과 음식 등 수많은 문화적 기반은 오히려 중국과 조선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 구미(歐美) 열강의 존재감이 극동에서도 뚜렷해지자, 유럽과 구분되면서도 화이관(華夷觀)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역 정체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무렵부터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 유럽과 구주(歐洲)에 대응되는 아시아 혹은 아주(亞洲)라는 말이 한중일 삼국을 묶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전개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유교(儒敎)의 대대적 수용이었다. 에도 막부 수립 직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의 유교 서적은 물론이고 강항(姜沆)과 같은 유학자들이 일본에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전국(戰國)시대가 마무리되며 에도시대에 250년에 걸친 평화의 시기가 펼쳐지자 유교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하여 안정적 사회 질서를 창출하는 이념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막부 시기 각 번(藩)에는 번교(藩校)가 설립되었고, 사무라이 계급은 무도(武道)를 수행함과 동시에 유교 경전 소양을 쌓았다.
 
 
  메이지유신도 유교화 과정의 일부
 
  유교는 불교와 달리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를 기본 바탕에 깔고 있었기에, 유교 교육을 통해 형성된 일본의 식자층은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도 매우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18세기의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일본에 중국 중심의 유교가 지나치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하며, 일본 고유의 전통에 기초한 ‘국학(國學)’의 필요성을 주창하기까지 했다.
 
  근래의 역사 연구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과정도 이러한 ‘유교화’의 일부로 해석한다. 학당에서 유교를 배우고, 학파를 형성하며 현실 정치에 관해 논쟁을 벌인 ‘붓을 든 사무라이들’이 서양 세력의 도래와 막부 정치의 위기를 맞이하여 봉기한 결과물이 메이지유신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막부 말기 일본은 주자학(朱子學)과 퇴계학(退溪學)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자생(自生)한 소라이(徂徠)학과 진사이(仁齋)학, 모토오리의 국학과 미토(水戶)번의 미토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공의여론(公議輿論)의 장(場)이었다. 이러한 지적(知的) 풍토는 사무라이가 각자가 근거한 번이라는 ‘상자’를 넘어서 하나의 민족이자 국가로서 ‘일본’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유교의 충효(忠孝)사상은 막부에 대한 천황의 우위를 확고히 해주었고, 막부 통치를 불의(不義)로 여기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유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사대부(士大夫)는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는 지사(志士)를 이상화했다. 그리하여 유교를 내면화한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사무라이들은 하나하나가 지사가 되어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이러한 유교적 기풍은 1868년 유신을 통해 등장한 메이지 신(新)정부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메이지시대의 유학자들은 이제 서양문명이야말로 고대(古代) 주(周)나라와 유교문명의 이상을 더 정확하게 구현한 모델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서구화(西歐化)를 정당화했다. 고등문관시험으로 대표되는 능력주의 관료제는 과거제의 회복이었고, 중앙집권화 개혁인 폐번치현(廢藩置縣)은 고대 군현제(郡縣制)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보편문명으로 동일시되던 ‘유교화’와 ‘서구화’는 결국 이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문명개화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개정되지 않는 불평등조약에 대한 불만이 구미 열강을 향해 팽배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입된 새로운 풍속들이 일본 고유의 전통과 미덕을 해친다는 반감도 사회 각계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정한론과 아시아주의
 
  메이지시대 말기에 이르자, 일본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는 서양 열강이 겉으로는 문명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무력만을 숭상하며, 백인종의 인종주의는 비(非)서구인의 근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적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러한 정서는 당대 지식인들에 의해 두 방향의 관념으로 발전했다. 하나는 서양이 물질문명에서 앞설지라도 정신적 가치에서는 동양이 더 고결하다는 믿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력과 자본을 앞세운 서양의 침략에 고통받는 다른 ‘동양 민족’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연대의 중심에는 동양 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문명개화를 이룬 일본이 서야만 했다. 이처럼 ‘화혼양재(和魂洋才)를 통해 동양의 가치를 지키며 문명개화에 나서는 솔선자’로서 일본의 역할을 상정한 생각이 바로 초기 아시아주의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초기 아시아주의는 메이지 신정부 수립 이후에도 혁명적 정치운동을 추구한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868년 이후 신정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서구화 정책에 매진하였으나, 유신에 참여했던 지사 중 많은 이는 급진적인 혁명정치가 계속되기를 원했다. 이들에게 메이지유신을 국경을 넘어 동양의 이웃 국가, 특히 조선에 전파해야 한다는 구상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메이지시대 초기의 화두였던 정한론(征韓論)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정한론은 열강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관념과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동양이 서양에 의해 위기에 처해 있는 천하 대세에서, 문명개화의 ‘형’인 일본이 여전히 수구(守舊)정치에 매몰된 ‘동생’ 조선을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은 당대에 매우 중요했다. 정한론은 메이지유신이 지닌 급진성을 국경 바깥으로 수출함으로써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일종의 ‘영구(永久)혁명론’이기도 했던 셈이다.
 
  정한론은 정부 내 대표적 지지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치투쟁에서 패해 낙향하고, 1877년에 일으킨 반란인 세이난(西南)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잠시 기세가 꺾였다. 하지만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일본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활동은 이후 더 활발해졌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開港)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며 조선 내부에서도 국가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대대적 문명개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도 있었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
 
《대동합방론》의 저자 다루이 도키치.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조선이 청의 영향력 하에서 수구정치에 매몰된 것을 개탄하며 조선의 개화파와 접촉하였는데, 그중 대표적 단체는 1880년에 설립된 흥아회(興亞會)였다. 이 흥아회에는 조선의 개화파 승려 이동인(李東仁)이나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저자 유길준(兪吉濬)이 참석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1884년에 김옥균(金玉均)이 주축이 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끝나고, 주동자였던 주요 개화파들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滅族)의 화(禍)를 입자,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문명개화 지식인의 대표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역시 조선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해 그 유명한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주축이 되어 조선, 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부흥을 도모해야 한다는 흥아론은 일본의 국력이 신장되며 계속해서 힘을 얻었다. 대표적인 논자로 1885년에 초고를 써 1893년에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으로 출간한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가 있다. 다루이는 《대동합방론》에서 한중일 삼국이 인(仁)·화(和)·덕(德)과 같은 유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연대할 필요성을 주창했다.
 
  다루이의 책은 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뒤에 본격적으로 부상한 근대화 추진 세력인 무술변법파(戊戌變法派)의 지지를 받았다. 이 시기 청의 대표적 지식인인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는 1898년에 《대동합방론》을 청에서 출판하며 자신이 작성한 서문에서 ‘공자의 사상을 실현할 방안’이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도야마 미쓰루의 현양사
 
현양사의 지도부. 뒷줄 가운데가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 사진=현양사기념관 홈페이지
  다루이 도키치는 더 광범위한 일본의 아시아주의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는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1881년에 설립한 현양사(玄洋社·겐요샤)였다. 세이난전쟁 이후 메이지 정부에 불만이 많은 사족(士族)을 중심으로 결성된 현양사는 국수주의(國粹主義)부터 자유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급진주의 정치를 추구한 단체였다. 그리고 이들의 급진론에는 당연히 세이난전쟁기에 표출된 정한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양사를 통해서 조선과 중국을 떠돌며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민간 차원의 공작을 추진하는 대륙낭인(大陸浪人)이 본격적으로 결집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낭인 집단은 1895년에 조선이 개화와 흥아에 반한다는 명분으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 주축을 맡기도 했다.
 
  대륙낭인을 통한 현양사의 대외 활동은 이후 1901년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주도하는, 대륙 공작만을 담당하는 현양회의 지부 격인 흑룡회(黑龍會·고쿠료카이)의 창설로 더욱 활발해졌다. 흑룡회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를 흐르는 흑룡강(헤이룽장·아무르강)에서 그 이름을 따온 데서 나타나듯, 극동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대하는 러시아를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흑룡회뿐 아니라 일본 조야(朝野) 전체가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 증대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흑룡회는 조선에서 뜻밖의 협조자를 찾았는데, 바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동학(東學) 세력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도운 이용구
 
일진회장 이용구.
  1894년에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이 관군의 진압으로 막을 내리고, 1898년에는 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마저 처형당하면서 동학은 창도(創道)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동학 조직 재건을 꾀한 손병희(孫秉熙)와 이용구(李容九) 등 지도부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손병희 역시 러일전쟁 발발 뒤 일본을 지원하였는데, 전쟁 이후에 한국에서 동학의 입지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이 일환으로 손병희는 이용구를 파견하여 과거 동학 조직을 바탕으로 한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게 했고, 진보회는 당시 일본군 통역을 맡았던 송병준(宋秉畯)과 결합하여 유명한 친일 단체 일진회(一進會)로 거듭났다.
 
  일진회의 전국 조직을 이끌던 이용구는 이미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은 물론이고, 메이지시대를 풍미한 자유민권 사상도 그에게 큰 영감(靈感)을 주었다. 이용구는 군주권(君主權)의 제약과 민권(民權)의 신장이 문명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학운동을 가차 없이 진압하고 러시아에 손을 내민 고종에게서 그러한 문명의 진보를 바랄 수는 없었다.
 
  흑룡회와 우치다 료헤이의 후원을 받으며 이용구는 일진회를 통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결심했다. 전쟁 시기 10만 명이 넘는 일진회 회원들이 일본군 수송과 병참, 특히 철도 건설에 협조했으며, 일진회 회원들이 문명화 및 일한일체화(日韓一體化)를 서약하며 집단적으로 단발(斷髮)을 결행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한국인들이 러일전쟁의 ‘대의’에 공감하며, “일본 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고 언급했는데, 그 중심에 아시아주의자 이용구와 일진회가 있었다.
 
 
  이토, 아시아주의와 거리 둬
 
  이용구는 여기서 더 나아가 1905년 11월 5일에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12일 뒤에 있을 을사조약을 지지하는 여론 작업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조선 안에서 동학을 인정받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손병희는 을사조약까지 먼저 찬성하는 이용구의 행동에 경악, 교명(敎名)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며 그와 관계를 단절했다.
 
  그렇다면 을사조약 이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한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은 어땠을까?
 

  막부 말기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유교를 배운 이토는 한학(漢學) 소양이 출중했으나, 유교나 동양정신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을 많이 보냈다. 이토는 대신에 프로이센과 영국을 바탕으로 한 서양화가 문명개화의 기본이 된다고 판단했으며, 청과 조선의 수구적 유교정치를 비판했다. 이토도 일본이 동양의 맹주(盟主)로서 이웃한 ‘동생’인 조선에 문명을 전파한다는 나름의 사명감을 지녔지만, 그 내용은 아시아적 가치를 바탕으로 서양에 대항한다는 아시아주의와는 사뭇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본국에서 자유민권운동 및 급진파 정객들과 투쟁해야 했던 이토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운동이 분출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한국의 일진회나 일본의 현양사·흑룡회나 이토에게는 모두 마뜩잖은 ‘정치 과잉’이었다. 이토는 초기에 한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때는 흑룡회를 비롯한 아시아주의 정객을 충분히 이용했지만, 을사조약 이후에는 한일병합의 속도를 높이라는 우치다의 주장에 골머리를 썩이기도 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 본인은 물론이고, 일본도 을사조약과 아시아주의가 만들어 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아시아주의와 국수주의의 결합
 
오카쿠라 덴신.
  일본에서 아시아주의는 ‘아시아 제(諸)민족 연대’의 사상으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매우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과 훗날의 안중근은 맹주를 두지 않는 ‘한중일의 평등한 연대’로서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주창하기도 했으나, ‘동양의 먼로 독트린’을 원했던 일본이 이를 수용할 리 없었다. 인도·중국·일본에서 동양미학(美學)의 공통된 정수(精髓)를 발굴하고자 한 사상가이자 문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조차도 한국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경한 병합론자였다는 사실이 일본 아시아주의가 지녔던 난맥을 보여 준다.
 
  일본도 아시아주의라는 강렬한 이념을 언제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참여정치가 억제된 메이지 체제에서 일본의 급진파는 아시아주의의 대의를 해외에서 추구하며 일본 본토의 정책 변혁을 이루고자 끝없이 노력했다. 이후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나 기타 잇키(北一輝)와 같이 1930년대 일본의 급진화를 주도한 인물들도 조선과 중국에서의 강렬한 경험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아시아주의에 영향을 받은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은 그 세계관을 역으로 이용하여 일본을 압박하곤 했다. 〈동양평화론〉에 근거하여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은 그 시발을 알리는 인물이었다.
 
 
  쑨원의 경고와 오늘의 중국
 
쑨원(가운데)은 1922년 11월 13일 고베에서 현양사의 우두머리 도야마 미쓰루(앞줄 오른쪽)를 만났다.
  1924년에는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1911년)의 지도자인 쑨원(孫文)이 일본 고베(神戶)를 방문하여 유명한 ‘대(大)아시아주의 연설’을 했다. 쑨원은 러일전쟁에서 황인종을 대표해 승리를 거둔 일본을 우선 칭찬하고, 동시에 분열한 중국에 침투하는 일본을 비판했다. “일본이 ‘서양 패도(覇道)의 번견(番犬·집 지키는 개)’이 될 것이냐, 아니면 ‘동양 왕도(王道)의 간성(干城·방패와 성채)’이 될 것이냐”는 그의 유명한 질문이 이 연설에서 나왔다.
 
  하지만 아시아 해방이라는 강렬한 이념과 일본 세력권의 추구라는 권력정치가 결합한 결과, 일본은 자제력을 상실하고 1937년에 중일전쟁,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100년 전 일본에 패도의 길을 걷지 말 것을 당부했던 쑨원의 중국이 걷고 있는 행보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린 이래로 중국은 유교에 근거한 고유의 문명 담론을 강조하고 있으며, 옛 시대의 실크로드가 지나는 중동,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 걸친 아시아 문명 간 교류와 연대를 근거로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3년 한중일 삼국협력 국제포럼에서 중국의 왕이(王毅) 전 외교부장이 “아무리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코를 뾰족하게 다듬어도 서양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100년의 세월을 지나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 서양 패권에 맞서는 아시아 연대를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시아주의와 일본주의의 긴장 속에서 통제력을 상실했던 일본의 기억이 여전한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아시아 연대론은 엄청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발 아시아 르네상스’를 위하여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두 갑자(甲子)가 지난 2025년,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에 보낸 다음의 경고도 마치 오늘날 중국을 두고 하는 이야기로 들린다.
 
  “만약 일본이 정략(政略)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청 두 나라 사람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白人)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서유럽의 정치경제적 약화와 트럼프 시대 미국의 자국(自國) 우선주의가 겹치며 탈냉전(脫冷戰) 이후 ‘보편문명’으로 자리매김했던 서양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 그렇기에 아시아 연대론의 설득력과 필요성은 높아지고 있지만, ‘동양 삼국’의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어쩌면 한중일 삼국이 역사 속에 켜켜이 쌓인 은원(恩怨)을 풀고 김옥균과 안중근이 논했던 삼화주의의 이념을 말할 수 있게 해줄 나라는 지금의 한국 아닐까.
 
  일본 동양학의 대가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김지하(金芝河) 시인에게 했다는 말은 을사조약 120주년을 맞은 오늘에도 울림이 있다.
 
  “한국이 그런 아량을 갖고 있다면 우리 일본도 중국과 함께 한국을 좇아갈 것이다. 아무래도 아시아 르네상스는 서울발(發)일 것 같다. 일본은 죄 많은 과거라는 시간 때문에, 중국은 거대한 인구와 공간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다. 고맙게 김지하를 좇겠거니와, 사실은 세계사적 상황을 볼 때 이 길밖엔 없다.”
 
  미조구치의 바람을 실현하려면 필요한 일이 하나 있다. 앞으로는 ‘친일(親日)’과 ‘침략 야욕’이라는 일국적(一國的) 틀을 넘어서는 지역적·국제적 시야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