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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보낸 11박 12일 여행

엘 그레코·고야·마네, 몽생미셸에서 몬세라트까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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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晩鐘〉과 〈이삭 줍는 여인들〉… 저 그림이 누군가의 삶을 집약시키고 있었다
⊙ 성당 벽에 걸려 있는 賢者들 나타나 구멍 난 양말을 보여줄 것만 같아
⊙ 스페인은 여전히 가톨릭의 엄숙한 분위기가 밴 나라고, 프랑스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나라
⊙ 알람브라 궁전… 아랍의 왕은 어떻게 匠人을 움직여 황홀한 경지를 연출시켰을까
⊙ 바르셀로나 聖가정성당 중앙 제대 맞은편에 적힌 한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 기암괴석의 몬세라트… 산 위 하늘을 보고 다시 아래 길과 강, 나무를 보며 사람들은 조물주 顯現하심을 확인
가우디 최고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태어나 처음으로 유럽에 갔다. 1월 18일부터 29일까지 프랑스 파리와 노르망디, 스페인 마드리드와 톨레도, 세비야, 론다, 바르셀로나, 몬세라트 등지를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자연과 사람, 예술작품을 만났다.
 
 
  火災 후 올해 말 완공 예정인 노트르담 대성당
 
올 연말 완공 예정인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모습이다.
  파리 센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겨울 강바람에 우뚝 선 노트르담 대성당이 보였다.
 
  2019년 4월 화재로 불탄 대성당이 어느덧 위용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수난(受難)’과 그리고 오랜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성전이 오곡백과처럼 영글고 있었다. 햇과일, 풋감 같은 싱싱한 기도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던 솔로몬 왕의 경구가 생각났다.
 
  1345년 완공된 고딕건축 최고의 걸작으로 유명한 대성전은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잔다르크 시성식 등이 열렸을 만큼 유서 깊은 장소다. 에펠탑과 함께 파리의 아이콘 중 하나.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년)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다. 노트르담(Notre-Dame)은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오는 12월 8일 공사를 끝내고 대중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2024 파리올림픽 기간(7월 26일~8월 11일) 중 개방될 가능성은 현재로선 적다고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4월까지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코로나19 때문에 공사가 지체(遲滯)되고 말았다. 현재 매일 1000명의 근로자가 대성당 복원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지난 1월 24일 한국의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막을 올렸다. 2018년 이후 6년 만의 한국어 공연이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에서 밀레(Jean François Millet·1814~1875)의 그 유명한 〈만종(晩鐘)〉과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보았다.
 
  책에서 보던 작품을 가까이, 아주 가까이 그 실핏줄까지 느끼며 바라보았다. 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왔다. 델 것 같은 뜨거운 붓의 물결이 보였다. 그 물결로 그린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늘을 보았다. 한 땀 한 땀 수(繡)놓았다는 문어적 표현이 이 그림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구름 속에서 아주 자그마한 검은 새들이 보였다. 사진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구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새가 석양의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운명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지평선의 끝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그림이 인생을, 삶을 집약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의 일생이 성당의 자선 주일처럼 은혜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내뱉는 호흡이, 심장이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그림이 우리의 손을 덥석 잡아끌고서 영적인 식탁 앞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문득 땅에 떨어진 우리의 이삭은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경숙 작가의 산문집 《세상, 그물코의 비밀》(2019)에서 읽었던 문장처럼, 생의 단면을 포착한 아슬아슬한 감정의 경계들이 실핏줄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목조 성당의 영성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림 앞에 모여 있었다. 마냥 그림을 바라보았다. 지긋한 나이의 교사가 그림 앞에서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뜻은 알 수 없었으나 너무나 진지해 보였다. 몇몇 아이는 그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청했다.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프랑스 센강 하구에 위치한 노르망디 지방의 작은 항구 옹플뢰르(Honfleur)를 굳이 찾은 것은 낡고 오래된 목조 성당을 보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는 이 영토를 지키지 못했다. 1357년과 1419~1450년 당시 영국 땅이었다.
 
  이후 프랑스 노예무역의 5대 항구로 발전할 정도로 번성했다. 이 마을에서 초라한 인물상을 보았는데 주인공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1567~1635년). 프랑스보다 캐나다에서 더 유명한 인물로 캐나다 퀘벡을 처음 발견해 개척한 항해인이자 탐험가다. 퀘벡은 아직도 불어를 쓰고 있단다. 옹플뢰르와 퀘벡의 도시 분위기가 비슷한 이유다.
 
  2세기에 처음 지어졌다가 파괴되어 다시 짓고 증축하기를 반복하다 1887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된, 아마도 목조로 지은 성당 중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성 카트린 성당(L’église Sainte Catherine)을 찾아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프랑스의 국가지정문화재다.
 
  겸손한 고딕 양식의 성당 내부는 특이했다. 성당 천장이 배의 선체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내부와 같았다. 실제로 조선소에서 만든 배를 가져다 성당 지붕으로 얹었다고 한다. 옛 바이킹의 후손답게 배를 멋지게 만들던 노르만 조상들의 흔적이 느껴졌다. 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이 아름다운 구조를 만들었다고 하니….
 
  나무로 만든 우아한 타원형 곡선이 성당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성당의 배를 타고 먼 항해를 떠날 것만 같았다. 종착지는 먼 하늘나라일지도….
 
  성당 외부와 달리 내부는 어두웠고 넓었으며 아득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성당을 찾았다는 표시가 보였다. 세련된 양복을 입은 프랑스인이 성당에 들어와 기꺼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성녀 소화 데레사를 추모하는 공간 앞에 다가갔다. 시공을 초월한 성녀의 눈빛이 오늘따라 간절하게 느껴졌다. 성당 신자석에 앉았다.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을 실눈으로 떠 주위를 보았다. 배를 타고 먼 항해를 떠나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성당 벽에 걸려 있는 현자(賢者)들이 나타나 자신의 구멍 난 양말을 보여줄 것만 같이 성당 안은 겸손하되 정적이고 우아해 보였다.
 
 
  바다의 반석 위에 솟은 몽생미셸
 
유럽의 대표 순레지로 꼽히는 몽생미셸 수도원. 몽은 산(마운틴), 생은 성(聖), 미셸은 미카엘 대천사를 뜻한다.
  유럽의 대표 순례지인 몽생미셸 수도원(Le Mont-Saint-Michel)을 보았다. 바다 위에 솟은 수도원. 바다의 반석 위에 세운 서구의 경이(驚異). 709년에 세워졌다. 대천사 미카엘의 이름을 땄다.
 
  군사 요새(要塞), 혹은 형무소와 같은 닫힌 공간. 외로운 고딕 첨탑. 금언과 침묵의 공간. 멀리 바다 물새 소리만 들렸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으나 하늘은 맑았다. 전투기가 흰 선을 그으며 하늘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터로 향하는 것일까.
 
  두건을 쓴 수도사가 거닐었던 수도원 산책로를 걸었다. 그들이 걸어 다녔던 돌계단에 올랐다. 돌계단과 수도원 성채가 세월의 흔적으로 반들반들했다.
 
  매일매일 수도사들은 신과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얼마나 소리 높여 찬미의 노래를 불렀을까. 얼마나 행복했을까. 때로 불행하다고 느꼈을까. 기도 하나로 생목숨을 꺾을 결심을 했을까. 이곳에서 인생의 고비를 예고 없이 겪었을까. 새벽미사를 드릴 때 몸이 심장이 머릿속이 떨려왔을까. 강렬하고 신들린 파토스로 결국 미쳐버렸을까.
 
  수도사들 중에 한때 굴뚝 청소부가 있던 걸까. 수도원에서 굴뚝 청소를 기꺼이 했을까.
 
  수도사가 죽으면 사흘간 장례미사를 한 후 주검을 수도원 내에 두었다고 한다. 주검을 두었던 공간 앞에 피에타상이 있었다. 몸속에서 죽음이 빠져나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도사들은 주검을 땅에 매장하지 않았다. 그대로 방치해 시체 썩는 냄새가 수도원에 진동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잊지 않으려는 간절함이었다. 수도사들은 그 지독한 냄새로 편두통을 달고 살았으리라. 소름이 쫙 돋았다.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몽생미셸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미 별이 빛나고 있었다.
 
 
  톨레도 대성당의 천장화와 ‘엘 트란스파렌테’
 
톨레도 대성당의 천장화. 루카 조르다노가 그렸다.
  스페인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톨레도(Toledo)에 갔다. 안동의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처럼 타호강이 톨레도를 감싸고 있었다. 물빛은 탁했고 거칠었다. 겨울철 건기인데도 며칠간 계속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런 모습으로 마드리드까지 유유히 흘러간다.
 
  바로 이곳에 중세의 손길이 젖어 있는 톨레도 대성당이 있었다. 톨레도는 요새라는 뜻이다. 이슬람, 유대인, 가톨릭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모습이었다.
 
  대성당이 큰 궁전 같았다. 거대하고 화려한 모습에 압도되었다. 주눅이 들어 고개가 숙어졌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용서의 문〉 〈지옥의 문〉 〈심판의 문〉이 있다는데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 기억에 없다. 〈지옥의 문〉과 〈심판의 문〉으로 들어갔다면 되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 엄청난 기둥, 긴 주랑까지 중세 장인(匠人), 예술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예수와 마리아, 동방박사, 천사와 성인, 성녀의 조각, 그림들이 곳곳에서 성당을 수놓고 있었다.
 
  예수의 수난 과정을 상징하는 장식들이 차례차례 조각되어 있었는데, 글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될 만큼 정교하고 감동을 주었다.
 
  ‘정교하다’는 단어 이상의 표현을 찾기 어려웠다. 천장 일부를 뜯어 자연 채광(採光)을 끌어들인 솜씨 그 너머에 정신의 신비, 번쩍임이 느껴졌다. 이를 엘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te)라고 부른다고 한다. 직접 햇빛을 성당 안으로 넣기 위해 천장을 뜯는 방식의 실험은, 스테인드글라스와 다른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주었다.
 
  화려하고 진귀한 작품들로 장식한 스페인 왕들은 이 대성당이 신께서 좋아하시리란 믿음, 기대, 혹은 불안으로 온갖 열정을 다 바쳤으리라.
 
  가장 압권은 이탈리아 화가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34~1705년)가 그린 천장화였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비교해도 못지않을 것 같았다. 입이 떡 벌어졌다. 위용에 할 말을 잃었다.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아기 천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천사들의 통통한 다리가 보이고, 하늘 저 끝에 희미하게 신과 신을 둘러싼 성인들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천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힘이 되어줄 것이란 기대, 믿음, 확신을 말해주는 듯했다.
 
  천장화 바로 아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년)가 그린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1579)이 있었다. 군중과 로마 병사들에 둘러싸인 붉은 튜닉(tunic)을 입은 예수가 있고 한 병사가 예수의 손목을 끌어당기고 있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있는 예수의 다섯 손가락, 친친 감긴 손목 밧줄, 예수의 빨간 튜닉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이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피, 곧 당신의 피조물을 위해 흘린 희생과 사랑을 상징한다.
 
  예수가 가슴에 손을 대는 모습은 ‘언약’ 혹은 ‘맹세’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이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약속, 믿음이 느껴졌다.
 
  어느 늙은 여행객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감히 따라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예수의 다섯 손가락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붙어 있다. 엘 그레코의 작품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1580)도 가슴에 손을 얹고 있고 역시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붙어 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작품 맨 아래 왼쪽에 여인의 손이 나오는데 역시 세네 번째 손가락이 붙어 있다. 엘 그레코의 붓이 닿았음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세계 3대 聖畵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과 만나다
 
세계 3대 성화인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톨레도 산토 토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e)에 갔다. 그곳에 오르가스(Orgaz)라는 백작의 작은 경당이 있는데 그곳엔 들어가지 못하고 성당 입구에 자리한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1586)만 만났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성화(聖畵)로 꼽히는 인류 문화유산이다. 이 작품 또한 엘 그레코가 그렸다.
 
  작품은 생각보다 컸는데 가로 360cm, 세로 480cm에 달했다. 눈이 환해지는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었다.
 
  지옥의 문 같은 무시무시한 상징도 아니었다. 담백한 사(死), 죽음의 실록 같은 장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금빛 두루마기 제의(祭衣)에 그려진 화려한 수와 옷 주름의 표현은 미술적 테크닉의 절정(絶頂)을 보여주었고, 흑백의 대조적인 빛깔과 노란색, 빨간색의 조화는 작가의 완숙미를 보여주었다.
 
  오르가스 백작은 카스티야 왕국의 수석 공증인(公證人)이었으며 톨레도 지방의 귀족이었다. 생전 성당에 많은 헌금을 하고 이웃들을 도운 의인(義人)이었다. 1323년 사망하자 하늘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스테파노 성인이 내려와 시신을 친히 매장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림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천상의 모습이 양분되어 있다.
 
  우선 시신의 등을 받치고 있는 이가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 다리를 감싸고 있는 이가 스테파노 성인이다. 왼쪽 횃불을 든 검은색 옷을 입은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 그림 속 소년의 작은 손수건에 1578년이라 적혀 있다. 아들이 태어난 해다.
 
  엘 그레코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는데 스테파노 성인의 머리에서 정확히 수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장례식장 위의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마리아, 오른쪽에 세례자 요한이 있다. 영(靈)의 세계가 마치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듯하다. 죽음 이후 새로운 생명(삶)의 시작을 알려준다. 자세히 보니 마리아의 붉은 치마 바로 아래 노란 머리의 천사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죽어서 새롭게 태어난 오르가스 백작.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앞에서 옆에서 멀리서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 갔다. 도로는 넓었고 스페인어는 정겨웠다. 얼마나 말이 빠른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해발 667m. 3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만사나레스강(Rio Manzanares)이 흐르는 곳. 해 질 녘 스페인 왕궁 주변을 거닐어 보았다. 낮에는 프라도 박물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를 찾았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무슨 이야기를 건네도 들어줄 것만 같았다.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 프라도는 ‘초원’이라는 뜻이다. 옛날 귀족들이 초원에 저택을 세워 자신의 수집품을 전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술관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피카소가 스페인에 머무를 때 프라도 미술관에 들러 이 작품 앞에 의자를 갖다 놓게 한 다음 자주 머물렀다고 전한다)이었다.
 
  그리고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1746~1828년)의 〈1808년 5월 3일〉(1814)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몇 번 봤는데 이 그림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힘차고 대담한 붓 터치가 실물 그림으로 보니 더 생동감 있고 놀라웠다. 268cm x 347cm.
 
  그림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군이 봉기한 스페인 민중을 처형하는 장면이다. 그림 가운데 노란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놀란 눈동자가 오래 여운을 주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청년의 양 손바닥에 상처가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컴컴한 밤, 총살당하는 민중을 등불이 비추고 있다. 마치 무대 조명처럼.
 
  이 그림은 선한 민중과 살인하는 군대로 양분해 선악의 판단을 민중의 시각에 맡겼다. 훗날 독재자에 저항하는 전 세계 민중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이 두 작품은 들라크루아(Ferdinand-Eugéne-Victor Delacroix·1798~1863년)의 기념비적 작품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영감을 주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나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으로 갔다. 이 미술관에서는 20세기 다양한 현대 미술을 접할 수 있었다. 프라도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18세기 종합병원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1986년 개관했다고 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압도당해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
  많은 작품 중 피카소(Pablo Pica sso·1881~1973년)의 〈게르니카(Guernica)〉(1937)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무엇보다 그림 크기에 압도당했다. 349cm x 777cm의 대작.
 
  이 큰 그림 앞에 수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그 앞을 점령했다. 앞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보고 또 보고, 또또 보는 것이었다.
 
  기자도 관람객들을 따라 그림 옆과 앞, 멀리서도 보고 곁눈질로도 보았다. 또 또 보았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1936년 스페인 정치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2월 좌파 정권이 탄생하자 우파 반란군인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 주둔하던 부대를 이끌고 스페인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파시즘 정권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프랑코 군부를 도왔다. 소련은 좌파 정부군을 지원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독일 콘도르 군단 폭격기가 나타나 무차별 폭격을 가해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이 폭격의 주된 임무는 무기 성능 실험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그날은 장날이어서 많은 사람이 광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림에는 거대한 폭격기도 사람을 죽인 폭탄도 없었다. 절규하듯 입을 벌린 사람, 부러진 칼을 쥔 손, 전등을 쥔 손, 소리치는 말, 눈동자와 같은 백색 전구, 퀭한 황소의 눈(황소는 ‘투우의 나라’ 스페인을 의미한다. 황소에게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입을 다문 죽은 아이의 자그마한 손과 발,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죽은 군인, 나동그라진 말 등을 회색과 검은색만으로 채색했다. 암담한 분위기, 무의식 속 혼돈이 느껴졌다. 그림 속 사람과 동물의 ‘눈’과 ‘귀’가 오랜 여운을 주었다.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니…
 
  다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1795~1800년 사이로 추정)를 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입가에 살짝, 정말 살짝 미소를 띤 젊은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림이었다. 묘한 느낌을 주었다. 작품 속 모델이 누구냐에 따라 예술이냐 외설이냐로 나뉘는데 당대 스페인에서 외설 논란이 불거져 스캔들이 일었다.
 
  지금도 이 그림은 프라도 미술관 1층 제일 깊숙한 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이 1층 전시실의 가장 중심에 있었고 왼쪽으로 루벤스와 무리요의 작품, 오른쪽으로 엘 그레코와 리베로, 타치아노의 작품이 있었다.
 
  고야의 작품을 보려면 벨라스케스를 지나, 무리요와 루벤스 작품들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고야의 컬렉션만 모은 전시실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벌거벗은 마야〉가 위치하고 있었다. 숨기고 싶은 것일까. 관객들을 전시실로 유도하기 위해 이런 배치를 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전시된 루벤스의 작품 〈미의 세 여신〉도 벌거벗은 여인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신화 속 여신들이다. 〈벌거벗은 마야〉의 작품 속 주인공은 종교적 인물이나 신화적 여성과 무관했다. 그런데 그림 양식이 신화에 어울릴 법한 르네상스의 고전 형식의 화풍을 따르고 있어 말썽을 빚었다.
 
  나신(裸身)의 주인공이 이교도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기독교도였다는 점, 실존 인물(알바 공작 부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이라는 점, 일설로 고야의 내연녀로 알려져 있다. 결국 스페인 귀족 사회에서 큰 논란이 일었음은 물론이다. 재판관 소릴라데 벨라스코가 당시 궁정화가였던 고야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고 전한다.
 
  결국 이 그림은 1900년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고 약 100여 년 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지금도 미술관의 제일 구석에 놓여 있었다.(〈벌거벗은 마야〉의 주인이 한때 재상(宰相) 고도이였고, 그는 이 그림을 개인 방에 걸어놓고 즐겼다고 한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문화 비교
 
  〈벌거벗은 마야〉를 보고 있자니 며칠 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마네(Edouard Manet·1883~1932년)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가 떠올랐다. 이 그림은 오르세 미술관의 5층 전시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다소 얼굴이 화끈거리는 외설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많은 사람이 이 그림 앞에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기자도 덩달아 사진을 찍었다.
 
  이 그림 역시 고야의 그림처럼 벌거벗은 여성 두 명이 나온다. 역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자유분방한 프랑스에서조차 논란과 조롱이 있었다. 전통적인 누드화의 배경을 깨는 것은 물론이고 작품 속 여인이 신화적 인물도 귀족도 아니었다. 일상 속 나체였다. 외설 논란이 불거졌다.
 
  상상력을 보태 얘기하자면 작품 속 두 여성은 매춘부다. 한낮 한적한 공원에서 관계를 가진 뒤의 모습이다. 지팡이를 든 남자가 여성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 다른 남성과 여성은 그림을 관람하는 감상자를 빤히 쳐다본다. “볼 테면 보라”, 아니 “보긴 뭘 봐” 하는 식이었다. 한 여성은 개울가에서 몸을 씻고 있다. 마네는 그림 감상자들이 여성의 눈길을 보는 순간 이 뻔뻔하고 자유분방한 상황의 공범자처럼 느끼도록 표현했다. 당대 프랑스 사회가 이 그림을 두고 분노한 이유는 바로 이 ‘공범자 느낌’ 때문이었다고 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리기 때문?
 
  그러나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는 프라도 미술관 제일 깊은 전시실에 있었지만, 이 그림은 오르세 미술관 5층 넓은 전시관의 한 벽면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많은 관람객이 그림 앞에 머물렀다가 사진을 찍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게 느끼는 이는 없었다. 어린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약하자면 스페인은 여전히 가톨릭의 엄숙한 분위기가 밴 나라고, 프랑스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비야 대성당과 콜럼버스의 무덤, 98m 높이의 히랄다 탑
 
140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여 년 동안 지어진 세비야 대성당.
  마드리드에서 오랜 시간 달려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 도착했다. 지친 몸으로 심약한 마부(馬夫)처럼 마차에 올라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마차 옆으로 과달키비르(Guadalquivir)강이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세비야는 이 강을 따라 황금 시절을 구가한 적이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 1506년)와 그의 아들 무덤이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콜럼버스가 탔던 항해선도 이 과달키비르에서 출발, 저 미지의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던 것일까.
 
  세비야에 있는 성(城)인 알카사르(Real Alcazar de Sevilla)를 보았다. 이슬람과 스페인 양식(樣式)이 결합된 무데하르 양식의 건물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리드 양식이다.
 
  단아하면서 화려한 장식, 한껏 멋을 내면서도 정적인 양식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안뜰엔 오렌지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나무엔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여기서 잠깐! 10세기 중반 이후 가톨릭 세력이 남하하면서 이슬람 지역을 재정복했을 때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을 모리스코(morisco), 기독교 문화는 받아들이지만 이슬람교를 견지한 이들을 무데하르(mudejar)라 불렀다.
 
  세비야는 서기 1010년에서 1248년까지 아랍인들의 중심 무대였다. 그러던 이곳이 1248년 기독교 세력이 들어오면서 권력 중심부가 교체되었다. 이슬람 사원을 부수고 그 폐허 위에 1401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지었다. 바로 세비야 대성당(Catedral de Sevilla)이다. 본관 건물이 높이 126m, 폭 83m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Papal Basilica of St. Peter), 런던의 성 바오로 대성당(St. Paul’s Cathedral)과 더불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고 중요한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69개의 궁륭(아치 모양으로 지어진 지붕 혹은 천장)과 25개의 작은 경당(經堂)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짓는 데만 200여 년이 걸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온갖 보화(寶貨)로 대성당 곳곳을 채웠고, 중앙 제단(祭壇)에다 금을 쏟아부었다고 전해진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 후원을 받아 신대륙을 개척한 때가 1492년. 마지막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1504년까지 모두 네 차례 항해를 떠났었다.
 
98m에 달하는 히랄다 탑(Torre De La Giralda)이다.
  대성당 곳곳에 두 자매, 성 유스타(Santa Justa)와 루피나(Santa Rufina)의 성상과 성화가 자리해 있었다. 이교도들이 배교(背敎)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 언니 유스타(268~287년)는 불에 달군 쇠로 살을 지지는 고문을 당하다 먼저 순교했다. 동생 루피나(270~287년)는 원형 경기장에 던져져 사자밥이 될 운명이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사자들이 온순해졌다고 한다. 결국 목이 부러진 뒤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 이후 세비야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504년 세비야에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도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98m에 달하는 히랄다 탑(Torre De La Giralda)이 건재하자 두 성녀가 탑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세비야 사람들은 믿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탑은 12세기에 아랍인들의 솜씨로 만들었다.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나선형의 회랑이 넓다. 기독교인들의 고딕식 성당이 옆에 들어서면서 종탑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랍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섞인 흔적이었다. 탑의 제일 상부는 16세기 기독교 양식의 첨탑을 덧붙인 것이라고 했다.
 
  첨탑에 있는 16세기 청동 풍향계 엘 히랄디요(El Giraldillo)는 진정한 신앙(faith)을 의미하며 세비야의 상징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참고: 김창민 편 《스페인 문화 순례》)
 
 
  론다와 누에보 다리
 
높은 절벽, 깊은 계곡의 높은 다리인 ‘푸엔테 누에보’.
  안달루시아의 꽃, 해발 723m에 자리한 론다와의 만남은 ‘푸엔테 누에보(Puente Nuevo)’에서 이뤄졌다. 푸엔테는 다리[교(橋)]란 뜻이다.
 
  누에보 다리 위에서 입이 떡 벌어졌다. 기괴한 성채 같은 공간, 주렁주렁 구전하는 전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상상력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밤이면 유성(流星)이 저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연의 침식이라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內戰)을 다룬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쓸 당시 이곳에 머물렀고 작품 속 암반과 절벽, 다리가 묘사될 만큼 누에보에 매료됐다. 다음은 소설 속 한 장면.
 
  〈늙은이가 툭 튀어나온 암반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늙은이는 오르는 것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더듬어 찾는 일도 없이 손으로 잡을 곳을 쉽게 찾았다. 젊은이는 그 늙은이가 여러 차례 이곳을 기어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누가 올라가든 그들은 매우 조심성이 있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중략)
 
  그는 손에 쥔 와이어와 하나가 되었고 다리와도 하나였으며 잉글레스가 설치한 폭약과도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다리 아래에서 아직도 일하고 있는 잉글레스와도 하나였고 모든 전투와 공화국과도 하나가 되어 있었다.〉

 
  기암절벽, 아치형의 굽이치는 높은 다리, 그 옆으로 창문을 내어 만든 파라도르(고급호텔), 위태롭게 선 하얀 집들, 절벽 외부에 설치된 전망대가 오금을 저리는 관광객을 사로잡았다.(이 누에보 다리와 론다 전망대까지 이어진 작은 오솔길은 ‘헤밍웨이 산책로’로 명명되었다.)
 
  푸엔테 누에보는 ‘새[新] 다리’라는 뜻이다. 그 밑으로 ‘푸엔테 비에호’ 말하자면 ‘헌[舊] 다리’도 있고 더 아래로 ‘푸엔테 아라베(아라비아 다리)’도 있었다. 까마득한 로마 시대를 거쳐 아랍 시대에도 론다가 군사 도시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계곡 바위들이 겹겹이 쌓인 편지처럼 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외부 침략에서 지키기 위한 천연 요새. 지킬 수 없다면 아래로 몸을 던졌으리라.(반대로 포로들을 골짜기 아래로 내던져 사형시키는 잔혹한 장소였다고 한다.) 그 피가 저 아래 계곡으로 흘렀을지 모른다.
 
  론다는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투우가 시작되었다는 명성과 더불어 붉은 천을 흔들며 투우를 하는 현대 스페인 투우의 전형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론다 사람들은 기질과 의협심, 죽음과 맞설 수 있는 모험심을 가진 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
 
알람브라 궁전의 안뜰 모습. 사진=게티이미지
  스페인의 남쪽 지중해안 피카소가 태어난 태양과 바다가 반반씩 뒤섞인 체취의 그라나다(Granada)라는 도시가 있다. 그라나다, 석류 열매라는 이름의 도시엔 이슬람 문명이 남긴 흙빛 전갈 같은 색채의 궁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주에 있다. 이베리아 반도 내에 아랍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을 가리켜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알람브라(Alhambra), 붉은 거리라는 뜻의 성. 고도 740m에 위치해 그라나다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정갈하며 단순하게 보이는 여느 중세의 성(城)처럼 보이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15세기 말까지 이어졌던 이슬람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간직한 아름다운 성채였다.
 
  알람브라는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이 이미 있던 성채를 확장해 1238년경부터 건설해 오랜 개보수를 거쳐 1358년, 그러니까 딱 120년 만에 완성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의 공간이었다. 장인의 손길이 닿으면 돌들이 생명으로 응답하였고 마치 밤하늘 별자리만큼 천장은 아라베스크 문양과 아라비아 서체의 코란 글귀들로 빈틈없이 장식되어 있었다. 준궁(俊宮)들이 줄지어 늘어선 ‘하렘’의 벽에도 기하학적 문양과 무늬들이 가득했다. 마치 플라밍고 춤이라도 추는 듯했다.
 
  이 글귀, 이 모양이 무슨 함의를 담았는지 알 순 없지만 신(神)에 대한 경배, 자연에 대한 경탄을 담았으리라. 아랍의 왕은 어떻게 장인의 마음을 움직여 황홀한 경지를 연출시켰단 말인가. 백성들의 살과 피를 쥐어짜서 만든 결과일까.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곳에는 영화 〈닥터 지바고〉(1978)를 촬영했던 흰 눈이 1년 내내 머무는 높은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이 있었다. 시에라 네바다는 글자 그대로 눈 덮인 산맥이라는 뜻. 미국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같은 이름이다. 미국 서부에 처음 도착한 스페인 군대가 만년설의 산맥을 보고 자기네 땅의 시에라 네바다를 떠올리며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뒤로 산맥이 있고 앞으로는 높은 절벽이 있는 천혜의 요새가 바로 이 궁전이다.
 

  정원을 거닐었다. 줄지어 선 정원수를 보고 관광객들이 탄성을 쏟아냈다. 척박한 곳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치밀한 수학적 지능을 발휘했으리라. 그 결과, 물이 풍부한 궁이 되었다.
 
  이 궁전을 보며 아랍의 한 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묻느냐? 바로 여기 있다.”
 
  그러나 1492년 아랍인 국왕 보압딜은 이 천국을 포기하고 이사벨 여왕에게 왕궁의 열쇠를 넘기고 말았다. 이후 오랜 기간 폐허 상태에 있던 알람브라 궁전은 1823년 미국의 낭만주의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 무어인의 전설을 모아놓은 《알람브라 이야기》를 출판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한국외대 스페인어과 신정환·전용갑 교수가 쓴 《두 개의 스페인》(2011)에 따르면, 현재 쓰이는 스페인어의 약 4분의 1, 단어 숫자로는 약 4000개의 단어가 아랍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캐러밴(carabana), 대수학(algebra), 시장(alcalde), 설탕(azucar), 오렌지(naranja), 수박(sadia), 알코올(alcohol), 커피(cafe), 기타(guitarra), 쌀(arroz), 물레방아(noria), 올레(Ole!) 등등.
 
 
  바르셀로나 聖가정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내의 스테인드글라스. 맨 아래 왼쪽 원형 창(점선)에 한국인 최초의 순교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를 뜻하는 영문 이름 ‘A. KIM’이 적혀 있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년)가 26세에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미친 놈 아니면 천재에게 졸업장을 수여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해답을 알 것이다.”
 
  그 해답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가우디는 1926년 세상을 떠났다. 꼭 100년 뒤인 2026년, 앞으로 2년 뒤 완공될 예정인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 즉 성(聖)가정성당이 완성되면 그 해답의 진위(眞僞)가 증명될 것이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짓기 시작한 것은 31세 무렵. 원래 스승인 비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가 설계와 건축을 맡았으나 1년 만에 가우디로 교체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1883년부터 사망한 1926년 6월까지 40여 년간 모든 것을 쏟아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처럼 말이다. 그의 시신은 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경당에 누워 있다. 하지만 영(靈)으로 남아 잠들지 않고 밤이면 깨어나 성당 곳곳을 누비거나 건축가의 마음에 간섭하며 이렇게 외칠 것만 같다.
 
  “신은 곡선을 만들고 인간은 직선을 만들었다. 직선은 곡선을 이길 수 없다. 더 굽히고 더 누이고 더 낮춰라. 다 내어줘라.”
 
  많은 사람이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사진을 찍었다. 찍는 마음은 한결같으리라. 성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어떤 젊은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셀카를 찍었다. 두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벽에 400여 개 언어로 쓰인 주기도문이 적혀 있었다. 가운데 한글로 새겨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문구가 보인다. 조금 의아했다. 한국 천주교의 ‘주님의 기도문’에 저 문장을 쓰지 않는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로 쓴다. 종결어미를 써서 ‘주옵소서’라고 했을 테지만 ‘필요’라는 단어는 쓴 적이 없다. 또 ‘우리’→‘저희’로 오래 전에 바뀌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가우디의 계획에 따라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3개의 파사드로 나눠져 있었다. 스페인어 파사드(facade), 영어 프런트(front)는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正面部)라는 뜻이다.
 
  탄생의 파사드, 수난의 파사드, 영광의 파사드 등 각 파사드는 예수의 탄생, 십자가의 죽음, 최후의 심판을 상징한다고 했다.
 
  가우디의 손으로 완성된 탄생의 파사드를 보았다. 성당 정면에 옥수수를 닮은 4개의 첨탑이 우뚝 서 있었다. 첨탑은 4명의 사도(使徒) 마태오(기독교에선 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누가), 요한 등 신약(新約)의 복음사서(四書) 저자들을 상징해 만들어졌다.
 
  탄생의 파사드에는 예수가 태어나는 장면, 목동들이 경배를 드리는 장면, 헤롯 왕의 병사들이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 성가정(요셉, 마리아, 아기 예수)이 헤롯 왕의 병사들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가는 장면, 마리아가 천상모후의 관을 쓰는 장면, 생명의 나무 등이 조각돼 있었다.
 
  또 다른 수난의 파사드는 호세프 마리아 수비라치(Josep Maria Subirachs)에 의해 1976년 완공됐다. 딱 26년이 걸렸다. 최후의 만찬, 유다의 입맞춤, 에케 호모(Ecce Homo·로마 총독 빌라도가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를 가리키며 군중에게 외친 말로 ‘이 사람을 보라’라는 뜻이다),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드는 장면이 형상화되어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성당이 완공되면 1만3000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볼 수 있는 크기였다. 중앙 제대(祭臺) 앞 신자석인 장의자에 앉았다. 다양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 물결이 성당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초록에서 파랑, 파랑에서 빨강, 빨강에서 다시 노랑으로 바뀌는 장엄한 빛의 축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성인 김대건(金大建·1822~1846년) 신부를 뜻하는 ‘A.KIM’이란 영문 글씨가 적힌 스테인드글라스도 보였다. ‘A’는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인 안드레아를 뜻한다.
 
  영광의 파사드가 완공되기까지 2년이 남았다. 그때 다시 올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바람을 품어보았다.
 
 
  기암괴석에 앉은 몬세라트 수도원
 
기암괴석 중턱에 자리 잡은 몬세라트 수도원의 모습이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할 당시 몬세라트(Montse rrat)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몬세라트. 기암괴석이 곡선을 이루는 곳. 1000여 개의 작고 큰 바위 봉우리. 둥글게 마모된 치아 같은, 옥양목 버선발 같은 바위…, 왜 가우디가 ‘신은 곡선을 만들었다’고 했는지 몬세라트에 와서 알게 되었다.
 
  몬세라트가 없었다면, 신이 몬세라트의 바위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모습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해발 1300m에 위치해 있는 바위산. 산의 생김새가 톱니 모양(Mons serratus)을 닮았다고 해서 로마인들은 몬스세라투스(톱니 모양의 산)라고 불렀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등산기차를 타고 올라갔다. 다시 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 푸니쿨라라는 밧줄 케이블카를 타야 하지만 밑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기암괴석의 곡선 아래 11세기에 세워진 성 베네딕도회 산타마리아 데 몬세라트 대수도원(Abadia de Santa Maria de Montserrat)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도원이 저 괴석을 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카 성인과 검은 성모마리아상
 
  이 수도원에 ‘라 모레네타(La Mo reneta)’라고 부르는 검은 성모마리아상이 모셔져 있다. 나무로 만든 검은 마리아상은 루카(누가) 성인이 조각한 것을 베드로 성인이 스페인으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오랜 세월 북아프리카 무어인의 박해를 피해 몬세라트 동굴 깊은 곳에 숨겨두었었는데 880년경 우연히 발견됐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토요일 오후 몬세라트산에서 어린 목동들이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빛과 함께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그다음 주 토요일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렇게 4주간 신비한 체험을 한 목동들이 산속의 한 동굴에서 이 마리아상을 발견했다.
 
  가톨릭 주교가 이곳을 방문해 마리아상을 옮기려고 했으나 너무 무거웠단다. 주교는 기이하게 여겨 산타마리아 예배당을 세웠고 훗날 몬세라트 수도원의 주춧돌이 되었다. 지금도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 머물고 있다.
 
  1811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검은 성모마리아상을 지켜냈다고 전한다. 교황 레오 13세는 이 성모상을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다. 기념품 가게로 가서 조그마한 검은 성모마리아상을 샀다.
 
  수도원 맞은편 산봉우리 자락에 대형 십자가가 보였다. 사람들은 그곳이 성지(聖地)가 아님에도 걸어갔다. 그곳에서 마치 방언(方言)을 하듯 다양한 인종의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마다 새로운 한 해를 꿈꾸고 서로를 격려했다. 산 위 하늘을 보고 다시 아래 굽이치는 길과 강, 숲을 보며 사람들은 조물주의 현현(顯現)하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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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프랑스조아    (2024-03-19) 찬성 : 0   반대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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