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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와 추모 사이

야구전설 장효조·최동원의 10주기

야구 천재도 못 이겨낸 스트레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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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롯데 최동원 삼성으로 트레이드, 한 달 뒤 삼성 장효조는 롯데로
⊙ 장효조, 내성적인데다 지고는 못 배기는 외고집, 늘 긴장하며 자신을 채찍질해
⊙ 최동원 “혹사 논란… 아쉬운 것도 원망도 없어요”
장효조와 최동원의 영정 사진. 장효조는 2011년 9월 7일, 최동원은 그해 9월 14일 눈을 감았다. 사진=조선일보DB
  한 해의 마지막 달, 잊히지 않는 두 전설이 떠오른다. 타격 달인 장효조(張孝祚)와 무쇠팔 최동원(崔東原). 두 전설의 10주기도 저물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장효조는 2011년 9월 7일 55세에 세상을 떠났고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은 그해 9월 14일 53세에 눈을 감았다. 일주일 사이다.
 
  두 전설은 묘한 인연이 있다. 장효조는 1956년 7월 6일 부산 동래구 안락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로 전학 가서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최동원은 경남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가 고향이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만날 수야 없었겠지만 구도(球都) 부산의 한 하늘에 잠시 함께 머물렀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나 두 사람은 그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출전 때문에 1년 늦은 1983년 프로에 입문했다.
 
  롯데 최동원이 선수협 파동으로 1988년 11월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자 얼마 후 삼성 장효조가 롯데로 갔다. 딱 한 달간 대구의 한 하늘에 머물렀다. 당대 최고의 투타(投打) 스타가 서로 유니폼을 맞바꾼 것은 운명치고 얄궂다.
 
  은퇴 이후 두 전설 모두 선수 시절만큼 화려하지 못했다. 지도자 장효조가 삼성 2군 감독과 코치를 맡은 기간은 짧다. 최동원은 지방선거 출마, 의류 사업,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한화 투수코치와 2군 감독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챗살 타법’과 ‘강철어깨’
 
2008년 7월, ‘삼성 85년 우승멤버 홈 커밍’ 행사에서 장효조가 어린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전성기 시절, 두 전설은 너무 화려했다. 그러나 은퇴 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며 안타까워했다.
 
  장효조. 보내고 싶은 쪽으로 타구를 날려 보내는 ‘부챗살 타법’을 구사할 만큼 정교한 타격이 자랑이었다. 1983년 프로에 들어와 1992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4차례 타격왕에 올랐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기록한 3년 연속 타격왕은 오직 장효조만이 가지고 있는 불멸의 기록이다. 물론 양신(梁神) 양준혁(삼성)도 4차례 타격왕에 올랐지만 띄엄띄엄(1993, 96, 98, 01년) 차지했다. 혹자는 “3년 연속으로 타격 1위의 고감도 타율을 유지하는 것은 현미경 야구인 현대 야구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역 최고의 타자인 롯데 이대호도 2010년과 2011년 2년 연속 타격왕에 불과했다. 레전드에 속하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해태 타이거즈) 역시 타격왕은 딱 한 차례(1994년, 0.393)뿐이었다.
 
  ‘안타 제조기’ ‘한국의 장훈’ ‘영원한 3할 타자’ 장효조는 8번이나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통산 타율 0.331도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이다. 1982~2020시즌까지 3000타석 이상 타자들 중 타율 1위가 장효조, 2위 NC 박민우(0.330), 3위 롯데 손아섭(0.325), 4위 LG 김현수(0.322), 5위 기아 최형우(0.321)다.
 
  안타깝게도 장효조는 롯데로 트레이드된 첫해(1989년) 0.303이었지만 1990년 0.275로 무너졌다. 절치부심 이듬해 0.347로 타격 2위(1위는 빙그레 이정훈 0.348)로 반등했으나 1992년 0.265로 다시 2할대로 떨어졌다. 그러고 그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최동원. 그는 선동열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힌다. 국내 아마대회를 휩쓸고 1978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81년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캐나다 애드민턴),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등 국제대회에서도 맹활약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주목받았지만 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무쇠팔’ ‘철완(鐵腕)’ ‘황금팔’ ‘강철어깨’ ‘금테 안경’으로 불렸으나 무엇보다 뱃심이 두둑했다. 위기 상황에서 발휘하는 배짱이야말로 최동원의 진짜 마구(魔球)였다.
 
  역대 한국 시리즈 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1984년 한국 시리즈를 잊을 수 없다. 7차전 중에서 다섯 게임에 등판해 4승 1패를 거뒀다. 원맨쇼, 불멸의 기록이었다. 혹사로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은퇴 후 인터뷰에서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기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첫해인 1989년 방어율 2.10을 기록했으나 1990년 22게임 출장 6승 5패, 방어율 5.28로 삼성에서 방출당하며 은퇴했다. 프로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 방어율 2.46. 대단한 기록이었다.
 
 
  은퇴 후의 삶… 스트레스와 미운털
 
2011년 7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장효조가 프로야구 레전드올스타 화보촬영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1992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은퇴한 장효조는 롯데에서 타격코치로 6년간 선수들을 길렀다. 1999년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의 마이너리그팀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다. 돌아와서는 2000년 삼성의 2군 타격코치로 친정으로 복귀했다. 꼭 12년 만이었다. 그러나 재계약에 실패했다.
 
  내성적인데다 지고는 못 배기는 외고집, 직설적인 어투, 늘 긴장하며 자신을 채찍질한 대가였을까? 그러나 조금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장효조는 야구계 주변을 맴돌았다. 국내외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5년 만인 2005년 스카우트로 삼성에 복귀했다.
 
  진심이 통했을까? 2009년 삼성 2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현장에 복귀했고 이듬해 2군 감독이 되었다. 최형우, 박석민, 배영섭, 김상수 같은 선수를 조련해 2011년 삼성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간암·위암이 발견됐고, 투병 1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참, 생전 인터뷰에서 장효조는 가장 아쉬운 경기로 1984년 롯데와의 한국 시리즈 7차전을 꼽았다. 자신의 실책으로 삼성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선수협 파동으로 미운털이 박힌 최동원은 은퇴 후 야구 현장에 얼씬도 못 했다. 1991년 부산 시의원에 출마, 놀라움을 주었다. 민자당과 민주당 양쪽에서 구애를 했지만 최동원의 선택은 야당이었다. “나는 젊어서 야당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선거 구호는 ‘민주 자치의 선발투수,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였다. 6000표 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방송계로 뛰어들었다. 1992년 SBS 〈남편은 요리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이 즐겨 먹는다는 콩나물 쇠고기 국을 끓였다. 입담이 좋아 1993년 SBS 야구 해설가로 데뷔했고 이후 부산MBC 야구 해설위원(2000), KBSN스포츠 해설위원(2003~2004)으로 지냈다.
 
  SBS와 KBS의 프로그램 〈슈퍼TV 세계가 보인다〉 〈이경실의 세상을 만나자〉 〈서세원쇼〉 〈가족오락관〉 〈체험 삶의 현장〉 등 TV 오락 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비쳤다. 1994년에는 스포츠 캐주얼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폭삭 망하고 말았다.
 
  긴 공백 이후 2001년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으나 불과 1년 정도였다. 다시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은 것은 2005년. 이후 2008년까지 한화 투수코치와 2군 감독이 되었으나 대장암이 발병하고 말았다. 늘 꿈꾸었던 친정 롯데로의 복귀를 이루지 못하고, 3년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두 인터뷰
 
  2000년 여름, 삼성 2군 감독 시절 장효조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 1988년 1월 스포츠 신문의 가장 큰 이슈는 올림픽이 아니라 ‘장효조 방출 발표’였죠.
 
  ‘장효조 재계약 불가, 방출 발표’는 그가 1987년 리그 MVP를 받은 직후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해 삼성이 한국 시리즈에서 해태에 또다시 패하자 장효조를 트레이드해서라도 좋은 투수를 영입하겠다는 삼성 구단의 극약 처방이었다. 물론 논란만 낳고 ‘없던 일’이 되었지만, 장효조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고 1년 뒤 진짜 삼성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거지요. 당시에는 그저 ‘기분 나쁘다. 섭섭하다’ 생각했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우리 기업의 생리였던 거예요. 우리가 지금 있는 사회를 나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나뭇잎인 거죠. 나무의 주인인 뿌리는 회사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런 상황이 되면 둘 중에 선택해야죠. 참고 살든지, 안 그러면 나오든지. 그렇더라도 나뭇잎은 바람 불면 떨어지지만, 나무는 절대로 안 쓰러진다고요.”(2012년 간행된 《타격의 달인 장효조》 일부 인용)
 
  ‘철완’ 최동원도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중앙일보》 2008년 7월 4일 자 인터뷰에서 혹사 논란에 대해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놨다.
 

  ― 혹사 때문에 너무 빨리 지고 말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1984년 한국 시리즈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은 1, 3, 5, 6,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때 강병철이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라고 하자,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함 해보입시더”라고 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긴 침묵 끝에) 맞는 말이지만, 이제는 아쉬운 것도 원망도 없어요. 단지 흘러간 과거일 뿐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시대적으로 볼 때 하지 않으면 안 됐죠. 원래 지도자는 성적 지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면 자리보전이 안 되거든요. 그 시대에는 또 그 시대의 논리가 있는 것이죠. 저는 그 시대의 선수였고요, 이제는 흘러간 과거고 원망도 후회도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후회는 있겠지만 빨리 털어야죠. 그래야 앞으로 가죠.”
 
  장효조는 구단의 어처구니없는 횡포, 최동원은 가혹한 혹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해 리그 MVP를 받은 선수를 뒤흔들고 ‘재계약 불가’ 통보를 내린 구단은 정상이 아니었다. 감독의 무리한 연투 지시가 없었다면 최동원의 은퇴 시점도 훨씬 늦춰졌을 것이다.
 
 
  공 1개에 천당과 지옥
 
2009년 7월 4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SK의 경기에 앞서 최동원이 시구를 했다. 1991년 은퇴 후 처음으로 마운드에 섰다. 전성기 때의 날카로운 공을 던지며 밝은 모습으로 퇴장했다. 사진=스포츠조선
  기자는 뉴욕 양키스와 LA 다저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다 2012년 한 시즌을 두산 베어스에서 뛰었던 스콧 프록터 선수를 기억한다. 외국인 투수는 대개 선발인데 두산에서 마무리로 뒷문을 든든하게 지켰던 프록터는 방어율이 1.79로 꽤 준수했다. 국내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이듬해 두산이 선발진을 보강한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포기하는 바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프록터는 연습이 끝나면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즐겨 읽는 책의 대부분은 야구 관련 서적. 매일 밤낮으로 야구를 하고도 야구 서적을 읽는 모습에 몇몇 야구인은 갸우뚱했다. 프록터는 이런 말을 했다.
 
  “야구는 멘탈이 중요한 스포츠다. 나는 멘탈을 다잡고 마음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특히 야구 선수들의 멘탈에 관련된 책들을 주로 읽는다.”
 
  야구는 멘탈 스포츠다. 프록터처럼 마무리 투수는 특히나 긴장과 싸워야 한다. 공 1개에 잘하면 소방수, 못하면 방화범이라 비난받기 일쑤다. 경기 중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프록터는 멘탈 서적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블론세이브가 더러 있었다. 통산 국내 기록은 4승 4패 35세이브.
 
  장효조의 통산 타율은 역대 1위인 0.331. 뒤집어 말해 100타석 중 67타석은 아웃이었다. 타격 천재가 이 정도인데 2할, 혹은 1할대 평범한 타자가 느끼는 압박감은 어떨까? 생전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일설에 따르면 감독이나 코치가 아닌 삼성 스카우트 시절, 상당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고 전한다. 숨은 진주를 찾기 위해 전국 고교와 대학, 젖은 땀과 먼지로 가득한 야구장을 찾아다녔다. 화려한 스타의 부침을 두고 수군거렸지만 장효조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밝게 웃으려 했다.
 
  몸을 꽈배기처럼 꼬았다가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며 던지던 최동원. 그의 역동적 투구만큼이나 철저한 자기관리도 따라 하기 힘들었다. 술과 담배를 멀리했고 육식 대신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지켰다. 그런 그에게도 은퇴 후 암이 찾아왔다. 단정할 수 없으나 지속적으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됐으리라.
 
  프로야구 초창기 홈런 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전 해태 선수 김봉연은 이런 말을 했다.
 
  “최동원이 야인(野人) 시절 광주구장에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보내는데 그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혼자 울었다. 최고의 선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후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해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최동원과 장효조 10주기 온도차
 
부산 사직구장 앞에 세워진 고 최동원 선수 동상 모습. 어머니 김정자씨가 동상의 손을 잡고 있다. 사진=스포츠조선
  최동원 10주기를 맞아 롯데는 지난 9월 12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추모 행사를 가졌다.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와 롯데 이석환 대표이사, 성민규 단장, 래리 서튼 감독, 주장 전준우가 참석했다. 이들은 사직구장 광장에 설치한 최동원 동상 앞에서 헌화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사직구장 전광판 아래에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이 부착돼 있다. 롯데의 유일한 영구 결번이다. 2020년 11월 11일 최동원의 1984년 한국 시리즈 활약상을 그린 영화 〈1984 최동원〉이 개봉됐다. 그해 가을, 열흘간 기록한 610구 무쇠팔의 ‘라스트 댄스’를 다큐 형식으로 극화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장효조를 기억하기 위한 상징물은 없다. 대구 지역 일간지인 《매일신문》은 9월 2일과 10월 3일 ‘최동원은 기억되지만… 장효조는 잊혀간다’ ‘삼성은 왜 아직도 장효조, 이만수를 미워하나’라는 기사를 통해 최-장 두 전설에 대한 10주기 추모 열기의 온도차를 전했다.
 
  〈고 장효조의 10주기였던 지난달 7일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는 조용했다. 장효조의 10주기를 앞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삼성 구단은 이를 외면했다. 경기장 어디에서도 장효조와 관련된 흔적은 없었다. 몇몇 팬이 장효조 유니폼을 챙겨오고, 또 중계방송에서 장효조를 추억하는 영상을 내보냈을 뿐이다.〉(10월 3일 자 《매일신문》)
 
  안타깝게도 전설 장효조는 마음으로 추모할 수밖에 없다. 추모할 만한 상징물이 없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생길 무렵인 2016년 당시 장효조를 기억하고 기리는 흉상 건립 제안이 있었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만수 전 감독의 말이다.
 
  “10주기를 계기로 장효조라는 대선배와 대스타를 우리 후배들과 야구팬들이 한 번 더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처럼 레전드들을 더 기억할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저도 메이저리그 코치 생활을 해봤지만, 메이저리그 야구장엔 과거 레전드들을 기리는 공간과 경기 전 스토리 영상도 정말 자주 나온다. 젊은 야구팬들이 그런 이벤트를 통해서 계속 구단 레전드들을 접하고 기억한다. 동상 건립과 타격상 제정 등에 팬들이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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