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거지 木浦에서 서울 진출 3~4년 만에 全國 시장 1위 달성한 파워 브랜드
⊙ “‘DJ 지원설’은 市中에서 지어낸 얘기, 三鶴은 운영을 잘못해서 망했다”
⊙ “정통 삼학소주 생산하면 시장점유율 5% 이상도 가능할 것”
⊙ “‘DJ 지원설’은 市中에서 지어낸 얘기, 三鶴은 운영을 잘못해서 망했다”
⊙ “정통 삼학소주 생산하면 시장점유율 5% 이상도 가능할 것”

- ‘삼학소주 사기단’은 지난해 11월 전남 영광에서 전직 국회의원, 연예인 등을 동원해 성대한 기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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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모씨 일당이 피해자들에게 “곧 완공돼 소주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던 공장 조감도. |
향수 자극해 1360명으로부터 총 8억원 가로챈 사기단
김씨 일당은 의도적으로 노인들이 자주 왕래하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한약(韓藥)상가 부근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들은 지난해 6월 ▲(주)삼학양조 ▲(주)삼학도 ▲(주)뉴삼학 ▲(주)삼학 등 4개 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금융위원회의 인가를 받지 않은 채 ‘비(非)상장 주식’에 대한 투자금 명목으로 1360명으로부터 총 8억원을 거둬 가로챘다. 피해자 중 돈이 없다는 사람들은 강남의 사채업자에게 대출받게 했다. 피해자의 80% 이상이 60대 이상 노인이었다. 모인 돈은 더 큰 사기극을 위한 ‘쇼’를 연출하는 데 탕진했다.
김씨 일당은 지난해 11월 전남 영광에 2만5785m²(7800평) 규모 부지에 계약금 3000만원을 지급하고, 복토(覆土)작업 등을 한 뒤 노인 1500여 명을 관광버스로 동원해 성대한 기공식까지 열었다. 당시 현장에는 전북 지역에서 12·13·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최모(74)씨도 참석해 “공장 자리 제대로 잡았다. 뜨거운 박수 부탁한다”며 축사를 했다. 최 전(前) 의원은 “기공식을 한다고 초청장을 가지고 와서 축하하는 의미로 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의 문답이다.
―기공식에 참석한 이유는 뭡니까.
“명예회장이 옛날 삼학양조 창업주의 차남인데,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대표도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기공식 얼마 전에 초청장이 왔어요. 70년대에 없어진 전라도 소주를 다시 만든다고 하니까 흔쾌히 간 겁니다.”
―상임고문 겸 이사로 돼 있던데요.
“이사는 기공식이 끝나고 며칠 후에 그만뒀습니다. 지금은 그냥 ‘고문’으로 돼 있습니다. 이사직에 있을 때도 회의에 참석하는 등 업무에 관여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쪽에서 저한테 무슨 보고를 한 적도 없어요.”
―현장에 초청한 것은 피의자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난 지금도 그 사람들이 진짜 사기를 치려고 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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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영광 우평리 공장 부지. 기공식때와는 달리 황량하다. |
이들의 사기행각은 피해자 김모(85)씨의 아들이 노모(老母)의 대출 및 투자가 의심스러워 삼학양조의 사무실로 찾아가 사기라는 것을 눈치채고 경찰에 신고해 막을 내렸다. 피해자 김씨는 “반년쯤 되면 2000만원이 1억원이 된다고 해 캐피털에 집을 담보로 잡히고 대출받아 4000만원을 투자했다”며 “우리 아들들이 사기에 걸렸들었다고 야단치는 바람에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경찰이 김씨 일당을 검거할 당시,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투자금’ 8억원 중 남은 돈은 30만원. 피의자들은 사무실 임차료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결국 피해자 1인당 쌈짓돈 58만원씩만 날린 셈이다. 경찰은 “김씨 일당의 범행은 노인들의 삼학소주에 대한 향수(鄕愁)를 자극하고, 가짜 공장 기공식을 갖는 등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진 지능범죄”라고 결론지었다.
“三鶴은 현재 참이슬 같은 대한민국 대표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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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학소주는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술이다. |
60대 이상 연령층에게 ‘삼학소주’는 밤을 같이 지새운 친구이며, 향수의 아이콘이다. 특히 광주·전남 출신에게는 더욱 그렇다. 호남향우회의 한 인사는 “타향의 밤거리 곳곳에서 번쩍이는 ‘삼학’ 간판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주류 전문가 정헌배(鄭憲倍·57)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학소주는 현재 참이슬과 같은 대한민국 대표 소주였다”며 “당시 삼학의 시장점유율은 40%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삼학은 브랜드파워가 있던 상태에서 갑자기 사라져 줄곧 재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며 이렇게 예측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단기간에 전국 1등으로 자리 잡은 것은 기적적인 일이죠. 급속한 성장에는 브랜드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솔직히 소주 맛은 별 차이 없잖아요. 브랜드파워를 유지하고 있던 상태에서 돌연 망했으니까 계속 재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이를 악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는 겁니다. 이번 사기사건에서 피의자들이 시장점유율 5%를 얘기했는데, 정통 삼학소주를 생산할 수 있다면 저는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국내 소주 시장에 큰 충격을 몰고 올 겁니다.”
삼학양조는 1947년 목포를 기반으로 설립한 회사다. 목포 유지 차남진(극작가 차범석의 부친), 김철진(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한 김우진의 형), 김문옥(가수 남진의 부친)씨 등이 ‘목포양조주식회사’로 시작했다가, 김문옥씨의 동서 김상두씨가 인수해 전성기를 누렸다. ‘삼학’은 목포 삼학도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래 삼학양조는 주정(酒精)과 청주(淸酒)만을 생산하던 곳으로 ‘대왕표 청주’가 주력상품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주는 증류주여서 생산량이 적었고, 영세업체들이 난립해 경쟁이 치열했다. 1964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국 소주 생산 공장이 565곳으로 큰 매력이 없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양곡(糧穀)관리법’을 시행한 1965년부터 급변했다. 쌀로 술을 만들 수 없게 됐다. 자연히 소주 제조법은 기존의 증류식이 아닌 ‘희석식’이 채택됐다. 희석식은 주정을 물에 타는 것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따라서 전국 시장을 상대로 하는 대규모 소주기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삼학은 희석식을 채택하면서 재빨리 서울에 대량생산 시설을 구축했다. 이후 시장공략에 나서 불과 3~4년 만에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전성기 시절 삼학의 월(月)평균 소주 생산량은 250만병(720mL 기준)이었지만, 쇄도하는 주문을 충족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심지어 무허가 영세업체들이 삼학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가짜’를 유통시켜 자체적으로 단속반을 꾸릴 정도였다. 당시 삼학은 삼학산업(서울), 삼학양조(목표), 삼원물산(광주) 등의 계열사에서 소주를 생산했다.
삼학의 매출은 그 시절의 법인세 납부 실적으로도 추정이 가능하다. 삼학은 ▲1967년 4억1200만원 ▲1968년 8억2500만원을 냈다. 1969년에는 11억원의 법인세를 납부했다. 5억9000만원을 낸 경쟁업체 진로주조의 2배였다.
삼학소주의 가도(街道)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건 1971년 11월. 삼학은 ‘납세증지 위조’ 혐의로 돌연 검찰 수사를 받았다. 지금은 세입(稅入) 부문에서 주세(酒稅)의 비중이 2%가 채 안되지만, 1960~70년대 당시는 술이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주요 세원(稅源)이었다. 술에는 10~200%라는 고율의 세금이 붙었고, 국세청은 탈세를 막고자 술병에 납세증지를 부착하게 했다. 따라서 탈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제조업자들이 가장 흔하게 이용하는 수법이 ‘증지위조’였다. 신문 지상에는 위조증지 사건이 빈번하게 등장했지만, 삼학의 경우는 규모가 달랐다.
검찰 수사 후 거액 추징당하고 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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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두 사장은 1969년부터 건강이 악화돼 회사 업무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사진은 검찰 조사 당시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에 가는 김 사장의 모습이다. |
1972년 5월 1심 재판부는 김 사장에게 징역 4년·추징금 3억원, 삼학양조 대표 박수호(朴守鎬·49)씨 등 관련자 7명에게 징역 10월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3월 2심 재판부는 김 사장이 양조업을 경영하면서 다년(多年)간 거액의 세금을 낸 점을 참작해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삼학산업과 삼학양조는 탈세한 3억2000만원을 추징당했다. 하지만 두 회사는 결국 주세 1억4000만원을 체납해 73년 9월 주조시설 및 회사 자산을 공매처분으로 잃고 최종부도 처리됐다. 삼학의 명맥을 이은 것은 광주에 있는 삼원(三元)물산이었다. 이곳에서 소량이나마 ‘삼학소주’를 생산했지만, 1980년 제조면허가 취소돼 맥이 끊겼다.
한편 미국에서도 1978년부터 ‘삼학’이란 상표로 소주가 생산됐다. 이 소주는 1991년 국내에 처음 들어왔는데, 시판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검찰은 “관세가 수입가의 80%인 일반 증류주를 관세율이 50%인 소주로 위장수입했다”며 수입업체 대표를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했기 때문이다.
93년 9월 대법원은 미국산(産) 소주가 일반증류주가 아니라고 최종 판정했다. 미국산 삼학소주는 국내 희석식 소주와 달리 증류주여서 알코올 도수가 높고 가격도 비쌌지만, 세 마리의 학이 나는 모습과 ‘삼학’이라는 상표만은 옛날과 같았다.
국내에 미국산 삼학소주 판매가 본격화할 무렵, 이번에는 김상두 사장의 장남 김용환 변호사가 “삼학소주라는 상표명과 세 마리 학이 그려진 로고는 특허청에 등록된 고유 상표”라며 고발 의사를 밝혔다. 이후 양측이 합의를 통해 국내에 유통됐지만, 시장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국내 소주 1병이 500원쯤 하던 시절에 도매가가 1500원이고, 소매가는 4500원이었다고 한다. 갈수록 순해지는 국내 소주 시장의 흐름과도 맞지 않아 미국산 삼학소주는 수년 내에 자취를 감췄다. 그 후로 ‘삼학’은 상표로만 살아 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현재 상표권은 동생이 대표이사로 등기돼 있는 삼원물산이 소유하고 있다. 삼원물산의 본점 주소는 광주 남구 소재 아파트다. 과거 호남재벌 삼학의 법통을 증명해 주는 것은 오로지 등기부등본 1장뿐이란 얘기다.
‘三鶴 납세증지 위조’ 수사는 政治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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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당시 삼학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김형표 변호사. |
1971년 4월 7대 대선 과정에서 김상두 사장이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정권 차원의 보복을 당했다는 얘기다. 당시 언론들도 “검찰 주변에서 ‘정치적 수사’ ‘청부 수사’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후 “‘삼학 부도’는 ‘DJ 지원’의 결과”라는 의혹이 세간에서 정설(定說)인 것처럼 굳어졌다. 삼학의 최후를 얘기할 때 ‘비운(悲運)’ 등의 수식어가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사자들에게 의혹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괘씸죄’가 아니라는 의견을 내놨다.
‘정치자금 지원설’의 당사자인 DJ 측은 20년 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삼학으로부터 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DJ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은 “(정치보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도와준 기업들의 명단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지만, 삼학은 아니다”고 못 박았다. 권노갑 전 의원도 “만약 삼학 김 사장이 김대중 선생을 지원했다고 한다면 6대 국회의원 선거 때 표 찍어 준 것이 유일한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1971년 삼학특별수사반에 참여했던 김형표(金炯杓·75) 변호사도 ‘정치보복’ 의혹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는 40년 전 ‘삼학 납세증지 위조사건’ 수사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수사 당시에 그런 소문이 있었던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진로에서 청탁을 받고서 수사했다’ ‘정권의 보복’이라는 말들은 사실무근이에요. ‘삼학 납세증지 위조’ 수사는 제보에 의해 시작됐고, 혐의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다 나온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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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학은 19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무너졌다”는 의혹이 40년째 계속되고 있다. |
“엄씨를 만났는데 설명이 매우 상세했습니다. 그 사람은 ‘○요일 ○시에 광주에서 김상두 사장 자택으로 위조증지가 배달되니까 그 앞에서 기다리면 잡을 수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제보를 받고서도 외부 시선이 두려워 수사를 접는다면 검사 자격이 없는 것 아닙니까.”
김 변호사가 말한 내용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른 것이 없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시장 1위 기업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을 리 없다” “목포에서 존경받는 기업인 김상두 사장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이 관련 주장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다르다. 삼학의 실적은 1970년부터 하향세를 나타냈다. 1970년 법인세 납부실적을 보면 진로는 10억원인데 비해 삼학은 6억9000만원이다. 사건이 터진 1971년은 상황이 더 악화돼 진로(14억6200만원)의 4분의 1도 안되는 금액을 법인세로 냈다. 가장 큰 원인은 김상두 사장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9년 김 사장은 신병(身病) 치료차 일본에 머물렀다. 경영자 부재(不在)는 이내 부실(不實)로 나타났다. 회사 재무 상황이 악화됐고, 간부 몇몇은 자금을 멋대로 유용했다. 결국 삼학은 1970년초 세금을 체납해 부도를 맞았다. 삼학은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으로부터 2억6000만원의 특혜융자를 받아 연명(延命)했다. 이미 사건이 터지기 2년 전부터 삼학의 사세가 많이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삼학이라는 브랜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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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학양조 창업주 고(故) 김상두 사장 장남 김용환 변호사는 “DJ지원설은 시중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이라고 의혹을 일축했다. |
“당시 김 사장은 건강이 안 좋아 회사 업무에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질적인 경영자는 김 사장의 부인 장씨였어요. 엄밀히 말하면 김 사장은 위조증지 사용에 대해 개입하지 않았지만, 대표이사니까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김 사장과 부인 장씨 중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부부를 모두 구속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명의상 대표였던 김 사장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어쨌든 그가 DJ에게 정말 정치자금을 제공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리 수사는 정치와 무관했습니다.”
고(故) 김상두 사장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장남 김용환(金容煥·70)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다음은 그와의 통화 내용이다.
―최근 벌어진 ‘삼학소주 사기사건’을 들었습니까.
“보도를 접하고 당황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삼학’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도 안타까웠고요. 한편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어요. 회사가 부도난 이후 회한의 세월을 보냈는데….”
―삼학 부도의 원인이 DJ에게 정치자금을 줬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사실입니까.
“그건 시중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 정치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운영을 잘못해서 망한 거지요.”
―그렇다면 ‘회한’이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뭔가요.
“그때 제가 공직에 있어서 회사 일을 챙기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잘못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 사전에 알았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40년간 쌓인 한이 많습니다.”
―이번 사건에 동생이 연루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동생은 피의자들과 ‘상표권 양도계약’을 맺은 겁니다. 자세한 금액은 말하지도 묻지도 않아서 모르지만, ‘약정금액’이 입금되면 상표권을 넘겨 주기로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이 터지니까 동생이 혼자 끙끙 앓고 있습니다.”
―보도 이전에는 사업진행 과정에 대해 들은 게 없나요.
“제가 변호사이기 때문에 ‘도장’ 찍는 일에는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저랑 상의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일이 터지고 동생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영광에서 기공식을 했다는 것도요.”
―창업주 가족으로서 직접 삼학을 부활시킬 생각은 없습니까.
“이번 사기사건이 일어난 것은 유감스럽지만, 그만큼 삼학이라는 브랜드가 아직 힘이 있기 때문에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동안 여러 차례 삼학소주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만들어 역수입도 했고요. 돈만 있다면 직접 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됩니까. 어떻게든 죽기 전에 ‘삼학’이란 이름으로 생산되는 소주를 보는 게 소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