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행태의 뿌리

좌익은 이념 자체가 소시오패스다

  •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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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의 이익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양심과 동정심, 죄책감이 없고, 지속적으로 타인을 속이고 무책임하게 잘못을 떠넘기는’ 소시오패스는 내로남불과 통해
⊙ 4·7보궐선거 패배 후 반성의 뜻을 표한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공격은 집단적 소시오패스
⊙ 한 좌익 지식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자로 살아가다 보면 위선은 불가피하다”며 조국 옹호
⊙ 좌익이념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고 무조건적 당파성을 합리화… 본질적으로 내로남불이자 소시오패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現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2019년 10월 9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조국 지지 집회의 이름은 ‘우리가 조국이다’ 였다. 사진=조선DB
이것도 한류(韓流)의 하나라 하면 욕먹을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든 한국을 알리는 새로운 기록이 하나 추가됐다. 한국의 신조어 ‘Naeronambul(내로남불)’이 미국에 소개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를 통해서였다. 《뉴욕타임스》는 4월 7일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의 참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Naeronambul’을 핵심 키워드로 꼽았다. 해석도 덧붙였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If they do it, it’s a romance; if others do it, they call it an extramarital affair).”
 
  언젠가는 영어사전에 등재될지도 모르겠다.
 
  ‘내로남불’이란 용어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정치권에선 1996년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 말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문장이지 약어(略語) 형태는 아니었다. 그 말을 내로남불이라 축약해 사자성어(四字成語)처럼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2010년 국회 교육과학위원회에서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에 의해서였다 한다.
 
  이후로 정치권에선 종종 정치적 공박 용어로 이리저리 쓰이곤 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이제 정치권을 넘어 완전히 전(全) 국민적 관용구가 되었다. 이제는 한국인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 덕분이다.
 

  작년 12월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한 바 있었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자 어원(語源)이 있는 용어는 아니었다. 내로남불을 한자성어로 옮긴 신조어였다. 참여 교수들은 2020년을 ‘내로남불의 해’로 규정했다. 그런데 2위를 기록한 사자성어도 그에 못지않았다. 후안무치(厚顔無恥)였다. ‘낯이 두꺼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이다.
 
  내로남불 후안무치! 이번 4·7재보궐선거는 문재인 정권의 그 같은 행태에 대한 심판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앞으로 역사에 확실히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내로남불 정권’으로 그 시대는 ‘내로남불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문 정권 패거리의 그간 행각은 이런 표현으로도 부족함이 느껴진다. 일찍이 취임사에서 그 자신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권이었다. 그 추종 패거리는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 했다. ‘대깨문’은 반대편에서 붙인 조롱의 명칭이 아니었다. 자칭한 것이었다. 정상(正常)이 아니다.
 
 
  사이코의 사보타주
 
‘사이코’를 다룬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와 〈사보타주〉.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앨프레드 히치콕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사이코(Psycho)〉(1962)라는 영화가 있다. 안소니 퍼킨스라는 매우 깔끔한 용모의 젊은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초반부 이 젊은이는 친절한 모텔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친구가 ‘또라이’다. 그냥 정신이상도 아니다. 살인마다. 〈사이코〉는 ‘멀쩡해 보일뿐더러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한 사람’이 기실은 ‘광기를 감추고 있는 극히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히치콕 영화에 인물이 아닌 서사(敍事) 구조를 통해 ‘위험’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었다. 〈사보타주(Sabotage)〉(1936)다. 조지프 콘래드의 〈비밀 첩보원(The Secret Agent)〉(1907)이 원작이다. 영화는 런던 시내가 갑작스레 정전(停電)이 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발전소에서 원인을 조사하니, 장치 일부에 모래가 투입된 것이 발견된다. “사보타주다!” 대사가 이어진다. “극렬분자로군.” “고의적인 거야.” “누가 한 짓이지?” “배후세력은?”
 
  런던 경찰청은 한 인물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감시요원을 투입시킨다. 용의자는 시내에서 극장을 경영하는 ‘멀쩡해 보이는 인물’이다. 곧 배후가 모습을 드러낸다. ‘테러집단’이다. 이 테러집단은 범인에게 더 큰 거사를 주문한다. 지하철역을 폭파하라는 것이다. 감시를 눈치챈 범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의 어린 동생에게 필름으로 위장한 폭탄 운반을 맡긴다. 폭탄은 도중에 버스에서 폭발하고 만다.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건실한 남편이 숨겨진 범인이었다. 그 남편 때문에 어린 동생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말았다. ‘겉으로 보이는 정상’이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숨은 위험’이었다.
 
  일상 이면(裏面)에 잠복된 위험이 있으리라 항상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늘 그러면 피해망상증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 진짜로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럴 때면 우리는 흔히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
 
 
  문재인의 기괴한 언사
 
  문재인 대통령은 ‘멀쩡해 보일뿐더러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다. “잘생겨서 찍었다”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국정(國政)을 파탄 수준의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국정 전 분야가 어디 한 곳도 멀쩡한 데가 없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도무지 미안해하는 기색조차 없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는 기이한 언행까지 보였다.
 
  이번 4·7 재보궐선거 민심 폭발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이 된 것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집단적인 부동산 투기 행각이었다. ‘LH사태’라고까지 한 이 사건을 계기로 새삼 문재인 대통령의 양산 농지 보유도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대응이 기가 막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12일 페이스북에 직접 글을 올려 반박했다.
 
  “선거 시기라 이해하지만, 그 정도 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트럼프 흉내를 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소셜미디어(SNS)에 직접 글을 올린 것부터가 통상적이지 않았다. 내용은 더 놀라웠다. 파탄 난 부동산정책으로 전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공사(公社)인 LH 직원들의 집단적 부동산 투기 비리가 터졌다. 명색이 국정 최고책임자라면 가장 먼저 그에 대한 사과를 하고 수습에 나서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건 다 젖혀두고 자기 문제에 대해 “좀스럽고 민망한 일” 운운의 언사를 보였다.
 
  대통령답고 아니고를 떠나 기괴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문재인의 이런 행태는 갑작스러운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의 국정운영 행태 전반이 다 그랬다. 인사정책은 특히 가관이었다. 하필이면 법무부 장관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썽과 흠결의 인물을 연속으로 임명했다. ‘애써 이러기도 쉽지 않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부산 지역 여성단체들은 2020년 11월 9일 당헌을 개정,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자를 내기로 한 더불어민주당을 규탄했다. 사진=조선DB
  그런데 이것은 문재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권 패거리의 전체적인 행태가 다 그런 식이었다. 대통령이 그런 인물들을 연이어 계속 임명했으니 그런 분위기가 만연(蔓延)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정권 패거리의 행태는 그 속성이 본래 그렇다고 여길 수밖에 없을 만큼 한결같았다. 원인과 결과의 선후(先後) 차원이 아니었다. 똑같은 부류들이 ‘더불어’ 가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었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그런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의 원인은 모두 그 당 소속 시장의 성추행(性醜行) 문제 때문이었다. 그들의 원래 당헌·당규대로면 후보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것을 뜯어고쳐 기어이 후보를 냈다. 선거전 과정에선 “사람 냄새” 운운하며 성추행 가해자를 미화했다. 여성 의원이라는 자들이 성추행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는 말로 모욕하더니 바로 그들이 자당(自黨) 후보 선거운동을 한다며 나섰다. “당선되면 10만원씩 돈을 주겠다”고도 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그랬다.
 
  그러면 이길 수 있다고 여겼을까? 만약 진짜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면 이건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질환에 가깝다. 히치콕 영화의 제목을 빌려 표현하자면 ‘사이코’다. 실제로 이들의 행태는 정신병리학 차원에서 헤아려 보는 게 더 잘 이해될 듯 여겨지기도 한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라는 게 있다. 반복적인 반(反)사회적 행동과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등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장애인데, 선천적(先天的)인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아직 의학계 공식 용어는 아니지만 ‘소시오패스(Sociopath)’라는 것도 있다. 사이코패스와 마찬가지로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하나인데, 후천적(後天的)인 것으로 간주된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이코패스는 선(善)과 악(惡)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고, 소시오패스는 선악을 알긴 하지만 그에 대해 부담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로남불과 소시오패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의 정책뉴스에 게재돼 있는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의 ‘차이점’〉이라는 글은 소시오패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없고 충동적인 성향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관계없이 즉흥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흔적 등 결정적 증거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소시오패스는 양심의 가책이 없고 지배욕과 정복욕이 강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주위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운 듯해도 이는 계획의 성공을 위한 것일 뿐,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이나 큰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소시오패스는 스스로의 이익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양심과 동정심, 죄책감이 없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지속적으로 타인을 속이고 험담하며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몹시 기만하고 무책임하게 잘못을 떠넘기기도 한다. 또한 타인의 안전과 건강에 대해 몹시 가볍게 여기지만 자기애가 강해 스스로의 상처에 대한 연민이 크며 타인을 해친 후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행동의 원인을 사회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등 사건을 포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리화한다.”
 
  국민들에게 “무책임하게 잘못을 떠넘기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남 탓으로 일관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걸 사자성어로 표현해보라 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아마 ‘내로남불’이라는 답이 가장 많을 것이다. 내로남불도 따지자면 결국 소시오패스다.
 
 
  조스트라다무스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은 4·7보선 참패 후인 지난 4월 9일 반성을 다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대깨문’의 욕설이었다. 사진=조선DB
  “부정과 부패를 투표와 법률로 심판하지 않으면 그것은 능력과 특권이 되고 만다”고 한 이가 있었다. 이번 4·7선거의 의의에 대한 매우 명징(明澄)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것은 조국(曺國) 전 법무부 장관의 어록이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능가하는 예언자 조스트라다무스”라는 얘기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대상을 뒤집어야 딱 맞다. 다른 이가 아니라 그 자신과 이 정권에 대해서라야 확실히 조스트라다무스다. 그러나 물론 그는 그러지 않았다.
 
  조국은 갖은 비리가 다 터져 나와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보여주지 않고 남 탓으로 일관했다. 이 정권의 내로남불의 상징으로 등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 또한 조국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를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촛불소동 때부터 그에게 바람잡이 노릇을 맡긴 그 패거리 전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국사태 당시 그를 지키겠다며 나섰던 극성 패거리는 “우리가 조국이다”고 했다. 그들 전체의 문제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그런데 4·7선거가 끝난 뒤에도 또 조국 소동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골수 친문(親文) 도종환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일부 중진과 초선의원의 반발이 일었다. 이들은 반성의 뜻을 표하며 갖은 물의를 빚었던 조국·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곧바로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등에 칼을 꽂느냐?” 운운하며 그 의원들의 전화번호를 공개하며 항의전화를 하자는 선동이 벌어졌다. 이 의원들에게 협박과 욕지거리의 문자폭탄이 쏟아졌다. 광기(狂氣)다. 집단적 소시오패스다.
 
  이 정권 패거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용어가 “감성, 소통”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앞세우고 떠들어댈수록 실상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들의 “감성, 소통” 운운이 딱 그렇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박영선 의원은 선거운동 도중 20대 지지율이 낮은 것에 대해 “역사 경험치가 낮아서”라고 했다. 실소(失笑)할 얘기다. 지금 난장판의 주범인 ‘586 민주팔이’들은 20대 시절 역사 경험치가 높아서 데모를 하며 날뛰었나?
 
 
  소통인가 스토킹인가?
 
  이들은 소통을 전매특허마냥 떠들지만 사실은 근대적 소통에 대한 이해는 근원적으로 결여돼 있다. 그들이 소통이라고 여기는 것은 단지 전근대적 감성의 주고받기일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정(情)이다. 그런데 정(情)의 논리는 근대적 합리성을 그저 차가운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합리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끼리끼리의 관시(關係)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아파트에서 이웃끼리 모르고 지내는 게 행복일 수 있나”고 한 바 있다. 이게 그들이 이해하는 소통의 수준이다. 이들은 모른 척해주는 예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근대 도시문명의 본질은 ‘정중한 거리 두기’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한 거리 두기를 비인간적 소외(疎外)라고 여긴다.
 
  이들이 그런 식으로 감성에 몰두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좌익적 가치관이 사실은 진보적인 게 아니라 전근대적이기 때문이다. 도시적 거리 두기, 근대적 익명성은 결코 불행한 소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그런 이해 없이 정(情)을 앞세워 감성적으로만 엉겨 붙는 건 소통이 아니라 사실은 스토킹(stalking)이다. 스토킹의 심리는 “왜 나를 몰라주나, 나를 알아달라”는 식이다. 그러다 여의치 않다 여겨지면 거짓말도 다반사에 난폭해지기도 한다. 저들은 자신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떠들며 엉겨 붙는 스토킹을 소통이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튼 그렇게 소통에 집착하고 떠들어대던 자들이 지금은 코로나19를 이유로 ‘사회적 거리 두기’에 기를 쓰고 있다. 물론 조심을 해야 한다. 만용을 부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강제적 캠페인이 아니라도 적절한 거리 두기는 근대 도시문명 시민 간에는 이미 예의의 기본이다. 그런 캠페인보다는 백신을 제대로 확보하는 게 정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여야 했다. 그러나 이 정권은 그 임무는 방기(放棄)하고 거리 두기 캠페인만 떠들어댔다. 그 결과 한국은 지금 코로나19 백신 확보 세계 최하위권으로 전락했다.
 
 
  쿨(cool)한 것은 매정한 게 아니다
 
  한때 한국은 코로나19 방역의 모범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는 이 정권의 공로가 전혀 아니다. 코로나19 문제의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알아서 다 마스크를 썼다. 강요하지 않았어도 발휘된 시민적 양식이었다. 한국인이 모든 점에서 훌륭하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인, 특히 신세대들은 더 이상 전근대 농경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한국이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하고 발전시킨 성숙한 현대 도시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세대다. 이들은 강요하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서 지킬 것은 지킬 줄 안다. 쿨(cool)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쿨은 오랫동안은 그저 핫(hot)의 반대되는 의미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쿨은 ‘침착, 자제’의 의미를 거쳐 이제는 ‘멋있다, 훌륭하다’를 대표적 의미로 갖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선 근대문명의 현대적 성숙을 보여주는 상징의 하나일 수 있다.
 

  현대인은 이제 ‘차갑고 서늘함’에 섭섭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시원하고 그래서 오히려 멋있고 훌륭하다’고 여긴다. 근대 도시문명과 그것을 지탱하는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로운 개인의 면모가 바로 그렇다. 우리의 신세대도 이제 확실히 그러하다. 그리고 이들 신세대는 이번 선거에서 정치적으로 그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한때 저들을 찍었던 많은 20~30대 청년이 쿨하게 돌아섰다. 코로나19 탓에 집회도 시위도 없이 그저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지만, 투표에서 칼날 같은 서늘함으로 저들을 징벌했다.
 
  좌익이념에 젖은 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원리를 자본가 계급 부르주아의 기만이요 허위의식이라 여긴다. 그런데 바로 이게 그들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원리는 결코 차가움과 매정함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의 생생한 관철이다. 그리고 달리 말하자면 쿨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좌익은 당연하게도 이같이 ‘손을 보이지 않게 삼가는’ 쿨함의 자세가 없으며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저 어떻게든 생색을 내고자 뜨겁게 쇼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게 안 통하면 배신감을 느끼고 난폭한 수단을 동원할 궁리를 한다.
 
  어느 40대 대깨문은 선거 결과가 여당의 참패로 나오자 한 인터넷 사이트에 “20대 투표권 박탈, 일리 있는 얘기”라는 글을 게재했다. 얼마 전까지 선거연령을 더 낮추자던 패거리가 이런 말을 뇌까리는 것이다. 이 같은 언사는 단순한 몰상식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좌익적 이념의 감염으로 인한 심리적 파탄이 있다.
 
  하나의 체제는 정치적 제도와 구조 이상이다. 체제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생활방식에도 근본적 영향을 끼친다. 도덕적 가치, 종교적 관행, 사회적 관습에서 개인적 습관과 정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에토스(Ethos·성품)라고 한 인간적 특성을 키워낸다. 그런데 어떤 체제든 그 바탕에는 이념이 있다. 이념은 결코 공허한 추상이 아니다. 이념적 가치관은 체제를 지탱하면서 동시에 독특한 인간적 특성을 빚어낸다.
 
 
  좌익은 이념 자체가 내로남불 소시오패스
 
  사회주의 체제는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주의적 인간형의 구현을 지향한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서는 체제의 실현과 동시에 파산을 향해가기 마련이다. 인간적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좌익의 그 이념적 속성은 체제 실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패거리의 에토스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국 전 장관의 위선적 행태에 대해 어떤 좌익 지식인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자로 살아가다 보면 위선은 불가피하다”고 옹호한 바 있었다. 일견 궤변(詭辯)스럽게 느껴지지만 어떤 점에서 이것은 진실의 고백이다. 좌익이념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고 자신들 패거리에 대한 무조건적 당파성(黨派性)을 합리화한다. 그래서 그들은 내로남불이 된다. 좌익은 이념 자체가 내로남불이고 소시오패스다.
 
  이 정권 패거리는 한편으로는 좌익이념에 집착하고 평등을 앞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은 전혀 평등하지 않은 특권층(特權層)이 되려 한다. 괴이하기까지 한 정신분열적 위선이다. 그런데 이것은 좌익적 에토스가 맞게 되는 보편적 숙명이다.
 
  이념과 에토스는 불가분(不可分)이다. 에토스는 달리 표현하자면 윤리이며 인격이다. 좌익이념은 결국에는 그에 젖은 인간을 인격적 파탄으로 치닫게 만든다. ‘위선은 불가피’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며 ‘당파성’을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그 이념 자체에 예정돼 있는 파탄이다. 이번 4·7선거에서의 문재인 정권의 패배는 이러한 인격적 파탄에 대한 심판이었다.
 
 
  정상화를 위한 회복의 시작
 
  한국은 지난 5년여를 거치며 그야말로 희대의 경험을 해야 했다. 무능할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기 짝이 없는 무리가 만드는 난장판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무능과 아집으로 빚어낸 국정파탄으로 전 국민에게 고통을 안겼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정의팔이’ ‘공정팔이’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사익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방자하고 독선적이기까지 했다.
 
  그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2030 청년세대, 특히 청년 남성이었다. 부동산정책의 파탄은 이들 청년세대에게서 미래를 박탈하고 있다. 일자리도 줄어들뿐더러 취직을 해도 월급쟁이 생활로는 ‘내 집 마련’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집 장만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남성은 결혼도 어렵다. 그런데 광적인 페미니즘의 위세로 인해 남성 역(逆)차별을 강요당한다. 2030세대 남성 청년층이 전례(前例) 없는 압도적인 표 쏠림으로 이 정권을 심판한 것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2030세대의 이 같은 기류는 일과성(一過性) 분노에 그치지 않고 도도한 흐름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피해의 상처가 깊어서만이 아니라 저들의 민낯에 대한 목도가 결정적이다. 이제 2030청년들은 정치적 기치가 그럴듯하다고 그것을 그냥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민주·진보·정의 등과 같은 좌익적 레퍼토리를 품은 구호에 대해선 더욱더 그럴 것이다. 정치적 사기꾼, 위선자에 대한 경계도 기본적 정치 성향의 하나로 굳힐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선 ‘해방공간에서 6·25까지’의 역사적 경험과 비견할 만한 것일 수 있다. 당시 압도적 다수 국민은 그 과정을 거치면서 반공(反共)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답으로 간직하고 이어가게 됐다. 바로 그처럼 이번에 면모를 드러낸 신세대의 정치 성향도 과거 6·25체험세대가 그랬듯 상당기간 이어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번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국민의힘 등이 ‘뻘짓’을 하면 정상화를 위한 회복의 본격적 시작은 또다시 미뤄져 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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