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인가.
꼭 그런 것도 아냐”
- 문재인
⊙ 부모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 흥남철수 때 월남해 경남 거제에서 출생
⊙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진저리, “모멸감과 반항심 생겼고 세상의 불공평 느껴”
⊙ 고3 때부터 술·담배, 별명은 ‘문제아(問題兒)’
⊙ 대학 시절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읽고 큰 감화, 운동권의 길로
⊙ 대학 3학년 때 첫 시위 주도, 4학년 때 시위 주모자로 구속
⊙ 석방 후 강제 징집… 타의(他意)로 공수부대 가. 당시 상관이 전두환·장세동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동원… 미루나무 자르지는 않고 외곽 경비
⊙ 1980년 ‘서울의 봄’ 때 경찰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소식 들어
⊙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 탈락… 노무현과 만나
⊙ 부산 미 문화원 점거, 부산 상공회의소 점거자 변론 등 시국 사건 도맡아
⊙ 釜民協·國本·民辯 등 재야단체 설립 초창기 멤버
⊙ “동의대 사건 주모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고 해서 순직 경찰관에게
모욕이 되는 것은 아냐”
⊙ “반기문은 관운(官運) 타고난 사람… 유엔사무총장 된 것은 노무현 정부 덕”
⊙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대통령제에 맞지 않아”
⊙ “수사권은 경찰, 기소권은 검찰에 분리 귀속…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만들어야”
⊙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조건 미국 먼저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이제 극복해야”
⊙ 민정수석 2번 하면서 “제일 아쉬운 건 국가보안법 폐지 못 한 일”
⊙ 민정수석 재임 시 통진당 이석기 이유 없이 2차례 사면받아
⊙ “대북 경제제재 풀고 개성공단 재가동해야…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서 결정”
⊙ 조갑제 “문재인의 노선을 요약하면 친북(親北), 친중(親中), 반미(反美), 반일(反日),
반한(反韓), 반법(反法)”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인가.
꼭 그런 것도 아냐”
- 문재인
⊙ 부모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 흥남철수 때 월남해 경남 거제에서 출생
⊙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진저리, “모멸감과 반항심 생겼고 세상의 불공평 느껴”
⊙ 고3 때부터 술·담배, 별명은 ‘문제아(問題兒)’
⊙ 대학 시절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읽고 큰 감화, 운동권의 길로
⊙ 대학 3학년 때 첫 시위 주도, 4학년 때 시위 주모자로 구속
⊙ 석방 후 강제 징집… 타의(他意)로 공수부대 가. 당시 상관이 전두환·장세동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동원… 미루나무 자르지는 않고 외곽 경비
⊙ 1980년 ‘서울의 봄’ 때 경찰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소식 들어
⊙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 탈락… 노무현과 만나
⊙ 부산 미 문화원 점거, 부산 상공회의소 점거자 변론 등 시국 사건 도맡아
⊙ 釜民協·國本·民辯 등 재야단체 설립 초창기 멤버
⊙ “동의대 사건 주모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고 해서 순직 경찰관에게
모욕이 되는 것은 아냐”
⊙ “반기문은 관운(官運) 타고난 사람… 유엔사무총장 된 것은 노무현 정부 덕”
⊙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대통령제에 맞지 않아”
⊙ “수사권은 경찰, 기소권은 검찰에 분리 귀속…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만들어야”
⊙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조건 미국 먼저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이제 극복해야”
⊙ 민정수석 2번 하면서 “제일 아쉬운 건 국가보안법 폐지 못 한 일”
⊙ 민정수석 재임 시 통진당 이석기 이유 없이 2차례 사면받아
⊙ “대북 경제제재 풀고 개성공단 재가동해야… 사드 배치는 차기 정부서 결정”
⊙ 조갑제 “문재인의 노선을 요약하면 친북(親北), 친중(親中), 반미(反美), 반일(反日),
반한(反韓), 반법(反法)”

- 1988년 총선에 출마한 노무현 변호사는 “노무현과 함께 사람 사는 세상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워 당선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 길목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나를 변호사가 되게 한 그 모든 과정이, 결국은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미리 정해진 운명적 수순처럼 느껴진다.”
“나와 노 변호사를 연결시켜 준 건, 내 사법고시 동기이자 후임 민정수석을 하기도 한 박정규였다. 그 과정과 인연이 묘하다. 박정규는 사시에 늦게 합격했다. 우리 동기들 가운데 나이가 몇 번째로 많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수원 마치면 변호사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옛날 김해 장유암에서 노 변호사와 고시공부를 함께했던 인연이 있었다. 당시 먼저 고시에 붙어 판사를 마치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노 변호사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터였다. 노 변호사는 연수원을 마치고 합류할 박정규를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 방과 책상까지 모두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려오기로 한 박정규가 검사로 임용된 것이다. 노 변호사가 준비했던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허사가 됐다. 그러니 박정규는 노 변호사에게 미안해하다가 마침 내가 변호사를 하게 되자 자기 대신 나를 소개한 것이었다. 한번 만나보라고 해 노 변호사를 찾아갔다. 나는 그때까지 노 변호사를 전혀 몰랐다. 생판 초면이었다.”
32. 첫 대화
“차 한잔을 앞에 놓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학창 시절 데모하다 제적당하고 구속됐던 얘기, 그 때문에 판사 임용이 안 된 얘기…. 노 변호사는 자신이 변론했던 ‘부림사건’ 경험을 얘기하면서 그런 일로 판사 임용이 안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함께 분노해 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꿈을 얘기했다. 인권변호사로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깨끗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했다. 특히 ‘깨끗한 변호사’는 해보니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라고 고백했다. 나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되면 그걸 계기로,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따뜻한 마음이 와 닿았다.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무실을 둘러봤다. 정말이지 나는 몸만 들어가도 될 정도로 준비가 돼 있었다.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에서 내 변호사로서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33. 선배와 친구
“노 변호사는 나를 편하게 대해줬다. 그분은 나를 ‘친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 표현에는 사연이 있다. 대선을 치르던 2002년 나는 부산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았다.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노 후보가 후보연설에 그 표현을 쓰셨다.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선대본부장이라는 체질에 맞지 않는 직책을 맡아준 후배에게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는 나이도 여섯 살 차이가 나고 고시도 5년 위면 대선배다. 그런데 그 말씀 덕분에 나는 지금도 과분하게 ‘노무현의 친구’라는 호칭을 듣고 있다.”
34. 인권변호사, 운동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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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 시절의 문재인 전 대표(왼쪽)와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 1년에 두 번 사무실 전 직원이 가족 동반 야유회를 가곤 했다. |
“부산 재야를 이끈 분이 송기인 신부님과 작고하고 지금은 안 계신 부산중부교회 최성묵 목사님이었다. 소설가 요산 김정한 선생은 연로하셨지만 늘 우리를 격려해 주고 중요할 때엔 직접 나서주기도 했던 정신적 지주였다. 이분들을 중심으로 1984년 무렵부터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와 인권 단체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석방된 부림사건 멤버들이 주로 실무 역할을 맡았다. 1984년에 처음 복원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가 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부였다. 공해문제연구소는 정호경 신부님이 이사장을 맡았고 최열씨가 실무 일을 꾸렸다. 부산에선 그 이름만 빌렸을 뿐 실제로 그쪽과 연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주화운동을 직접 표방하기가 두려웠던 시기라 에둘러 반공해 단체를 표방한 것이다. 물론 부산의 재야인사들이 거의 다 모인 단체였다. 송기인 신부님이 대표를 맡았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발기인으로 참여를 했다. 정식 출범할 땐 노 변호사도 함께 참여했다. 같이 이사직을 맡았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가 설립됐다. 서울의 민통련과 같은 성격이었다. 부산의 모든 재야를 망라하는 조직이었다. 부산 민주화운동의 구심체를 마련한 것이다. 후에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도 부민협이 중심이 됐다. 부민협 대표도 송기인 신부님이 맡아주셨다. 탄압을 각오해야 했던 시기여서 3·1운동 식으로 33명이 비장하게 대표 발기인으로 나섰다. 나는 노 변호사와 처음부터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나중엔 상임위원도 맡았다. 노 변호사는 노동분과 위원장을 맡았고 나는 민생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그것으로 둘 다 재야운동에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노 변호사나 나나 개신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부산NCC인권위원회에도 인권위원으로 함께했다. 사람이 많지 않으니 민주화운동 단체나 인권 단체에 두루 발을 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변호사로서의 의무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노 변호사는 마치 운동에 처음 뛰어든 대학생처럼 열정이 넘쳤다. 또한 헌신적이었다. 당신의 삶 자체를 민중적인 삶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전의 생활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식사도 비싼 음식을 피했고 술도 비싼 술을 피했다. 좋아하던 요트 스포츠도 그만뒀다. 그런 모습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골프를 치지 않는다. 그 시절 골프장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골프를 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술도 마찬가지다. 양주나 와인보다 소주나 막걸리가 편하다. 술은 1차에서 끝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 폭탄주도 마시지 않는다.”
35. 1987년 6월 항쟁
“나는 6월 항쟁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운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4·19나 광주항쟁은 다분히 우발적이거나 자연발생적이었던 측면이 있다. 반면 6월 항쟁은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국본’이라는 연대투쟁기구가 결성돼 그 지휘하에 직선제 개헌의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시종일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우리 민주화운동사에서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또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었는데, 나는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6월 항쟁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 부산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서울 지역 중심으로 서술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울 중심 사고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 시민들의 책임도 없지 않다. 3당 합당 이후 부산 시민들 의식이 보수화함으로써 6월 항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부산 시민 스스로가 소홀히 하게 됐기 때문이다. 3당 합당 이전의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유신독재를 끝내고 6월 항쟁으로 5공 독재를 끝냈듯이, 부산이 일어서면 역사를 바꾼다는 시민들의 자부심이 충만했다. 그런 전통 야도(野都)였던 부산이 3당 합당으로 하루아침에 여도(與都)로 바뀐 후 오늘날까지 한나라당 일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36. 정치인 노무현에게 변호사로 돌아올 것을 권하다
“노 변호사는 당선되자마자 국회 청문회 스타가 돼 우리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광도 컸지만 좌절과 고통도 많았다. 나는 그의 좌절과 고통을 볼 때마다 그의 정치 입문을 찬성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도 힘들 때는 ‘당신들이 정치로 내보냈으니 책임지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에게 변호사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도 두어 번 있다. 국회의원에 낙선해 원외에 있을 때였다. 정치를 영 그만두라고 권유한 것은 아니다. 고생하며 원외활동을 하느니 변호사로 돌아와서 인권변호사 활동과 지역 활동을 하면서 지역 기반을 더 닦고 선거 때가 돼 해볼 만하면 그때 다시 선거에 나서면 되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치를 그만둘 기회가 한 번 있긴 했다. 종로를 버리고 부산 강서에서 출마해 낙선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내게, 이번에 낙선하면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낙선하자 오히려 원칙의 정치인, 바보 노무현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힘으로 재기했고 끝내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비운의 일을 겪고 나니 역시 처음부터 정치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렸어야 했다는 회한이 남는다.”
37. 부산 동의대 사건과 용산참사
“(동의대 사건) 진압에 투입돼 목숨을 잃은 경찰관이나 그날 농성 중에 사건이 발생해 구속되고 형을 살았던 학생들이나 모두 시대의 피해자들이었다. 가해자가 있다면 그런 상황을 만든 독재정권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그 경찰관들을 학생들에 의한 피해자로 부각시키면서 증오와 적대를 키우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동의대 사건) 재판 과정에서 명확히 확인된 것은 경찰의 작전 책임이었다. 사망한 7명의 경찰관 중 4명은 소사(燒死·불에 타죽음)가 아니고 추락사였다. 사고장소는 7층이었다. 고층건물 진압 작전은 투신이나 추락에 대비해 반드시 건물 주변에 매트리스와 안전그물을 설치하게 돼 있다. 그날 경찰은 매트리스와 안전그물을 가져가긴 했으나 건물 입구에 쌓아만 두고 설치는 하지 않은 채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상의 안전소홀 책임은 또 있었다. 농성 학생들이 7층에서 화염병을 제작해 다량의 화염병과 유류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학교 당국도 경찰도 모두 알고 있었다. 어쨌든 경찰이 지극히 기본적인 안전수칙에 따라 화염병 불꽃을 끈 다음 수색에 들어가기만 했으면 화재 발생도 인명피해도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와 같은 경찰의 무반성이 최근의 용산참사를 낳았다. 용산참사 역시 고층 망루 안에 인화성 유류가 잔뜩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에 대한 대비 없이 진압을 서두르다 경찰관까지 포함해 아까운 인명을 잃게 된 점이 동의대 사건과 똑같다.”
“다행히 (동의대 사건) 피고인들 모두 복역 중에 형집행정지로 순차적으로 석방됐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때인 2002년, 그중 46명이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고 해서 순직 경찰관에게 모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찰관은 경찰관대로 직무에 충실하다가 순직해 국가유공자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이 순직 경찰관들을 모욕하는 것인 양 오도하면서, 증오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38. 노무현-정몽준 간의 단일화 과정
“후보단일화에서 극적인 반전드라마가 다시 연출됐다. 그러나 난관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정몽준씨가 ‘연합정부’ 사실상 ‘권력의 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그걸 명문화해 달라고 했다. 그냥 반이 아니라 내각의 어느 자리를 나누자고 특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민주당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그렇게 하자고 했다. 어차피 ‘정치적 약속’이니 나중에 상황에 따라 대처하면 된다는 논리로 노 후보를 설득했다. 설득 정도가 아니라 압박이었다. 노 후보는 버티는 것을 대단히 힘들어했다. 내게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원칙’ 얘기를 했다. ‘우리가 쭉 살아오면서 여러 번 겪어봤지만 역시 어려울 때는 원칙에 입각해서 가는 것이 가장 정답이었다. 뒤돌아보면 늘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땐 힘들어도 나중에 보면 번번이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 후보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외로우셨던지 당신 생각을 지지하자 매우 기뻐했다.”
39. 청와대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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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는 노무현 당선자. 노 당선자 뒤에 문재인 변호사의 모습이 보인다. |
당선인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정치를 잘 모르니 정무적 판단이나 역할 같은 것은 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켜나가는 일이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를 쓰십시오.’ 그러면서 두 가지 조건을 말씀드렸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당선인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러자고 했다.”
40. 반기문
“당선인은 외교보좌관을 안정적인 인물로 임명해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나는 외교부 고위관료들을 검토한 끝에 반기문 유엔본부 대사를 외교보좌관으로 추천했다. 당선인은 외교안보 분야 자문팀 의견까지 들어본 다음 그를 외교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사실 그는 문민정부 때 이미 외교안보수석을 했고 국민의 정부에서도 차관을 해서 이미 차관급 자리를 두 번이나 거쳤다. 차관급인 외교보좌관을 할 ‘군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외교보좌관 자리를 수락했고 결국 외교부 장관까지 하게 됐다. 그런 다음 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유엔사무총장이 됐다. 문민정부에서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3개 정부에서 정무직을 하고 유엔사무총장까지 됐으니 그는 참으로 관운을 타고난 분이다.
어쨌든 그가 유엔사무총장이 된 첫 출발선이 외교보좌관이었다. 그 후 한 번 더 결정적인 기로가 있었다. 외교부 장관 재임 때 발생한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었다. 야당과 적대적인 언론 등에서 장관 사퇴 요구가 거셌다. 민정수석실 조사 결과 문책할 일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나는 두 번 모두 관여한 셈인데 나중에 그가 유엔사무총장이 됐으니 큰 보람이 됐다.”
“2006년 10월 13일 밖에서 쉬고 있을 때 반가운 소식이 뉴스로 흘러나왔다. 반기문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이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부터 반 총장을 염두에 두고 외교적 노력을 했던 건 아니다. 당초엔 홍석현 주미대사가 그 자리를 꿈꿨다. 차기 사무총장은 아시아 몫이라는 공감대가 있을 때여서 본인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안기부 X파일 도청 테이프 사건이 생겨 돌연 낙마했다. 그 바람에 반기문 장관이 후보가 됐다. 참여정부는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 대통령은 모든 순방외교에서 그의 지지를 부탁했다. 대통령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을 주요국에 특사로 보내 지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임박해서는 다른 국가원수들에게 전화도 많이 했다. 대통령은 반 총장 선출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축하전화로 따뜻한 덕담을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당신이 그렇게 공을 들여 빛을 본 일이라 생색을 낼 법도 한데 청와대나 부처에 그리 못 하도록 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기울인 그간의 노력이나 비사(秘史)도, 정부가 생색을 내거나 자축하는 일정도 절제토록 지시했다. 심지어 KBS가 나라의 경사라며 마련한 〈열린음악회〉조차도 정부는 함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그가 국제 지도자로서 소신껏 일을 하도록, 편하게 놔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41.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한 문재인의 시각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실질 총리제를 위해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제대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헌법에 규정돼 있는 이상 준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대통령제에 맞지 않는 제도일 뿐 아니라 대단히 위선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제 아래에선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정치적, 정책적 정체성에 따라 내각을 구성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임명에 관여할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도 연립정부가 아닌 한 대통령의 뜻과 다른 인물의 제청을 고집할 국무총리가 있을 수 있을까? 이는 결코 민주적 제도인 것 같지 않다. 총리의 내각 통솔에 필요하다면 총리에게 국무위원 해임건의권을 주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헌법을 전면적으로 손볼 때가 되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2. 치아의 직무연관성
“보통 직장은 직책이 높아질수록 일에 여유가 생기는 법인데, 청와대는 행정요원, 행정관, 비서관, 수석비서관 순으로 직책이 높을수록 거꾸로 일이 많았다. 나는 첫 1년 동안 치아를 10개쯤 뽑았다. 나뿐 아니라 이호철 비서관과 양인석 비서관을 비롯해 민정수석실 여러 사람이 치아를 여러 개씩 뺐다. 웃기는 것은 우연찮게도 나부터 시작해서 직급이 높을수록 뺀 치아 수가 많았다. 우리는 이 사실이야말로 직무연관성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43. 대북 송금(送金) 특검
“김대중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사전에 (대북 송금 사실을) 몰랐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김 대통령께서 그 일을 직접 지시하시거나 허용하셨다고 해도 당신께 조금도 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어쨌든 김 대통령의 마지막 기자회견으로 그분의 결단에 의한 통치 행위임을 주장할 여지가 없어졌다. 안타까웠다.”
“(대북 송금 특검) 이 문제로 김대중 대통령이나 동교동 측에선 꽤 오랜 시간 서운해했다. 내가 나중에 시민사회수석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김 대통령께서는 내게 섭섭함을 토로하셨다.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의도와 진정성을 설명드렸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이란 정치상황 때문에 민주당 쪽 정치인들은 두고두고 이 문제를 비난했다.”
44. 문재인의 검찰관(觀)
“문제의 행사(평검사와의 대화)가 결정될 때 나는 없었다. 장관들과 청와대 수석들이 워크숍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워크숍에 참석하지 않고 천성산 터널 문제 때문에 1차 단식을 하고 있던 지율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부산에 가 있었다. 대통령이 워크숍 자리에서 전화를 했다. 그런 행사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행사는 좋은데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사전에 조율해서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발표하고 전격적으로 날짜를 잡았다.”
“행사가 시작됐는데 이건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젊은 검사들은 끊임없이 인사 문제만 되풀이해 따지고 물었다. 한 사람이 인사 문제에 대해 질문해서 대통령은 충분히 설명했는데 다음 발언자가 이미 정리하고 넘어간 문제를 똑같이 반복했다. 대통령은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인사불만 외에 검찰개혁을 준비해 와 말한 검사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검사스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참석한 검사들은 각 지역별 또는 그룹별 대표처럼 선출되면서 각자 주문받은 질문이 있었다. 그게 천편일률 인사불만이었다. 게다가 ‘대통령 앞에서 절대 기죽지 말고 인사 문제를 단단히 따지라’는 요구를 받아온 모양이었다.”
“부임했을 때 민정수석실에 검찰과의 핫라인이 있었다. 청와대엔 일반 부처와 연결되는 공용전화 회선이 있다. 유일하게 검찰과의 전용회선이 민정수석실에 연결돼 있었다. 바로 끊도록 했다. 민정수석실엔 검찰이 제공한 차량도 있었다. 청와대 업무차량이 부족해 과거부터 검찰이 편의를 제공해 오던 것이다. 사소한 일 같지만 그런 것들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한꺼번에 퇴행해 버린 것이 어이없고 안타깝다.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정치검찰의 행태에 대한 확실한 청산을 하고, 그 토대 위에서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했어야 했다. 집권자의 선의로서, 정치권력이 검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수준에 머무른 나이브한 자세, 그리고 정권의 교체와 더불어 곧 정치검찰의 폐습으로 역행한 사태는 반성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검찰은 세계에서 유례없이 많은 권한을 함께 다 가지고 있다. 이 문제를 여기서 소상히 전부 다룰 수는 없다. 단지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수사권은 경찰에, 기소권은 검찰에 분리 귀속시킴으로써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둘째,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공수처)라는 독립기관을 만들어, 검찰을 포함한 모든 고위공직자를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45. 국정원 개혁
“나는 (대통령에 대한 국정원장의) 주례 대면보고와 독대보고를 없앤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조치가 국정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정원장의 조직 장악력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염려됐다. 국정원 내부에서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정보보고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동요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정원의 탈정치·탈권력 의지가 강한 나머지 거의 강박감을 가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청와대 내부에서 일부 사람들이 나를 국정원장으로 추천하고 대통령께 직접 건의까지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충성심이나 애정이 강한 사람이 국정원 조직을 이용해 대통령을 도우려는 욕심을 혹시라도 갖게 되면 그게 바로 망하는 길이라는 판단이었다.”
46. 고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벼르기만 하다 못한 경우가 많아 늘 아쉬웠다. 서해해전 희생 장병 가족들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만나보려고 하다가 아예 대통령께 말씀드려 대통령이 직접 만나도록 한 적이 있다. 그중에 누군가는 형편이 어려워서 취업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대우건설 고 남상국 사장 가족도 그렇다. 실명이 거론된 후 자살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임기 내내 미안했다. 그 가족들을 꼭 한 번 만나 위로하고 싶었는데 끝내 못 했다. 청와대 나오고 나서까지 못 찾아간 게 아쉬웠다. 얼마나 우리를 원망할까 싶어 늘 마음이 무거웠다. 나중에 그분 딸이 조기숙 수석의 학교 제자여서 우리 쪽이 갖고 있는 미안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47. 참여정부와 노동계의 충돌
“참여정부 초기 정부와 노동계의 충돌로 노정(勞政)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면이 있었다. 노동계가 참여정부에 대한 기대 때문에 처음부터 서두르거나 과욕을 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노동 분야에 있어서 참여정부 개혁을 촉진한 게 아니라 거꾸로 개혁역량을 손상시킨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이스 문제 때문에 만난 전교조 지도부는 풍모나 자세에서 참으로 헌신적인 분들이었다. 그런데 참여정부가 해야 할 근본적 교육개혁 과제가 산적해 있는 과정에서 어찌 보면 기술적 과제라고 할 만한 나이스 문제에 어찌나 비장한 태도로 임하는지 내가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하시는 분들 같다’고 화냈을 정도였다. 첫 조각 때 파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임명했던 교육부 장관은 개혁역량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그 후엔 점차 안정적 인사로 가게 마련이다.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을 기대만큼 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48. 문재인의 대미관(對美觀)
“(이라크에 대한 국군 파병은) 나도 반대였다.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파병했다가 희생장병이 생기게 되면 비난여론 또한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훗날 대통령은 파병에 대해 ‘나도 개인이었다면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불가피했다’고 술회했다. ‘옳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도 했다.”
문재인은 2016년 12월 26일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2차 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조건 미국 먼저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이제 극복해야 합니다.”
49. 안희정
“내부적으로 가장 아팠던 사건은 나라종금 사건과 대선자금 수사였다. 안희정씨 등 대통령 측근들은 물론, 대통령 선거를 함께 치렀던 집권의 일등공신들이 줄줄이 십자가를 져야 했다.
당시 검찰의 소환 과정은 정말 문제였다. 안희정씨의 경우 처음에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나중에 영장이 발부돼 수감될 때까지 거의 한 달 가까이를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 망신 정도가 아니고 마녀사냥을 하듯 했다. 나는 지금도 안희정씨가 검찰에 출두하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희대의 파렴치범이 드디어 검찰청사에 등장이라도 한 듯, 당사자를 한가운데 두고 수많은 기자가 밀고 당기고 그를 누추하고 끔찍한 지경의 처지로 만들었다. 국민들 눈에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그는 만신창이가 됐다.”
“사법 처리된 분들의 처지는 모두 딱하고 억울했다. 특히 안희정씨는 더욱 그렇다. 어쨌든 대선 과정에서 본인이 자금을 책임졌던 데다 나라종금 건도 있고 해서 언젠가는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통령에게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 아예 청와대에 안 들어왔다. 누구는 그에게 당분간 외국에 나가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했다. 그러나 본인은 닥쳐올 상황과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했다. 그러곤 정면으로 부딪쳤지만 정말로 가혹하게 당했다. 심지어 본인 책임이 아닌 일까지도 본인이 안아 버렸다. 안희정씨뿐 아니라 강금원, 염동연, 정대철, 이상수, 이재정 등 고초를 겪은 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