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勝俊의 중국 바로보기]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 주목해야 할 점 : 월간조선

지난 3월 7일 봉황(鳳凰)TV는 중국 정부의 한반도문제특별대표 우다웨이(武大偉)로부터 조금 특이한 코멘트를 따냈다.

“김정일(金正日)의 중국방문을 환영한다. 그러나 현재 구체적으로 결정된 일정은 없다.”

우다웨이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주한(駐韓) 중국대사를 지낸 사람이다. 이후에 주일(駐日) 중국대사,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거쳐 ‘중국정부조선반도사무특별대표(中國政府朝鮮半島事務特別代表·한반도문제특별대표)’를 맡고 있다. 이전에는 없던 이 자리는 우다웨이를 위해 ‘위인설관(爲人設官)’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총괄한다. 올해 64세인 우다웨이는 외교부의 정년 60세를 4년이나 넘겨가며 6자회담 실무총책을 맡고 있다. 원래 6자회담 실무는 양허우란(楊厚蘭) ‘조선반도사무대사(朝鮮半島事務大使·한반도문제전담대사)’가 맡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다웨이가 지난 2월 10일 외교부 부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특별대표’라는 자리가 만들어졌고, 양허우란은 그 아래 ‘부대표’가 됐다.

중국 외교부에서 우다웨이만 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는다. 한마디 한마디를 심사숙고 끝에 결정하는 학습과정을 충실히 거쳤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중국 방문이 가까운 장래에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데도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환영한다”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중국과 조선(북한) 지도자들 간의 상호방문은 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중국은 김정일 위원장이 언제 중국을 방문하건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쪽 관련 업무를 맡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공개할 정보는 없다.”

김정일 방중을 둘러싼 미묘한 여운

항상 그렇지만 중국 외교관들의 말은 듣고 나면 두 가지 방향의 판단을 모두 가능하게 만드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첫째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둘째는 뭔가를 시사한 말이므로 그 시사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중국 외교관들은 항상 이쪽저쪽 다 가능한 듯 말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우다웨이의 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중국외교관들 가운데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 관해 외국기자들이 묻는 말에 “김정일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불쑥 말한 다음에 “그러나 현재 정해진 일정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일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 추측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첸치천(錢其琛) 전 외교담당 부총리가 자신의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밝혀놓은 부분을 보면 절대로 그런 추측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첸치천은 회고록에서 한중(韓中) 수교가 이뤄진 해인 1992년 3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나가, 당시 한창 땅속 비밀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한중 수교에 관해 외국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중국과 한국의 수교는 아직 시간표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 이전에 내가 하던 대답은 항상 ‘한국과 어떤 공식관계도 맺지 않는다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라는 것이었다”라고 쓰고 “민감한 외국기자라면 내 말의 어감 변화를 알아차렸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중 수교는 그로부터 5개월 뒤에 발표됐다. 첸치천이 전한 중국 외교관들의 어법에 따른다면 우다웨이가 “김정일의 방문을 환영한다. 하지만 아직 정해진 일정은 없다”고 한 말은 우다웨이가 이 코멘트를 한 머지않은 미래에 김정일의 방중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우다웨이가 홍콩의 위성TV, 봉황TV에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하기 사흘 전인 3월 4일 외교부 대변인 친강(秦剛)이 한 말도 참고로 기억해둘 만하다. 친강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중국외교부 브리핑룸에서 하는 정례회견에 나와 “일본과 한국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조선 지도자 김정일이 이번 달에 방중한다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은 고위층 상호방문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우량한 전통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다음 “그러나 방금 귀하가 말한 그런 (3월) 방문 일정에 관해서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대답 구조가 우다웨이의 대답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중국 외교관들의 말을 뭐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서 들어야 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첸치천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연히 신경을 써서 들어야 하는 것이 중국 외교관들의 말이다. 또 그런 화법을 즐기는 것이 중국 외교관들이다.

5차례 이뤄진 김정일의 訪中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왼쪽)이 1992년 11월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 북한국가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베이징 외교가에서 조그만 낌새라도 알아차리면 바로 기사를 써야 하는 슬픈 경쟁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과 일본 언론들이라고 해서 근거 없이 김정일의 3월 말 방중설을 확산시킨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 2월 25일 중국공산당 톈진(天津)시 위원회 기관지 톈진일보가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김영일이 이끄는 대표단이 중국공산당 정치국원 겸 톈진시 당위원회 서기 장가오리(張高麗) 일행을 예방한 사실을 보도했다. 조선노동당 국제부장이 중국을 방문해서 베이징으로 톈진으로 돌아다녔다면, 당연히 조선노동당 총비서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사전 답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소련공산당과 동유럽 공산당이 몰락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살아 움직이는, 오로지 2개의 공산당인,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에서 당 국제부장이 무슨 산업시찰을 위해 상대방 국가를 방문할 일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중국과 북한 사이에 항상 비밀의 보자기에 싸여 베이징과 평양을 왔다갔다하는 김정일의 방중 건은 지금까지 5차례 이뤄졌다. 김정일의 맨 처음 방중은 37세 때인 1983년 조선노동당 서기 자격으로 진행됐다. 김일성이 살아 있던 때인 당시 김정일의 중국 여행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된 지 5년이나 지난 해이기는 했으나, 미디어들의 개방은 별로 진행되지 못하던 터라 김일성의 황태자 김정일의 중국여행 사실에는 온 세계가 깜깜 무소식이었다. 이때 김정일의 방중에는 외교부 신입 직원으로 나중에 주평양 중국대사관 공사급 참사와 주한 중국대사를 지낸 리빈(李賓)이 수행했다.

1983년 당시만 해도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지역은 허허벌판이어서 밤이면 깜깜한 어둠에 잠겨 있었으며, 당시 황푸(黃浦)강 동쪽 기슭의 고층 호텔에 투숙한 젊은 김정일은 창밖으로 어두운 푸둥지역을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나중에 2001년 세 번째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상하이에 들러 푸둥지역을 내려다보며 “천지개벽을 했군”이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리빈 대사가 나중에 전한 말에 따르면, 김정일은 18년 사이에 엄청나게 달라진 상하이 푸둥지역을 보고는 1983년에만 해도 평양 시가지보다도 못해 다소 내려다보던 중국 도시가 짧은 시간에 크게 바뀐 것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상하이를 방문해서 “천지개벽을 했군”이라는 말을 신음 토해내듯 한 다음 이듬해인 2002년 7월에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단행하고,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지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김일성의 생일 잔치를 망친 한중수교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 김정일이 37세 되던 1983년 조선노동당 서기 자격으로 방중했을 때 리빈 전 대사는 외교부 신입 직원으로 수행했다. 그는 나중 주평양 중국대사관 공사급 참사와 주한 중국대사를 지냈다.

김정일은 지금까지 5차례 중국을 방문했지만, 김정일의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은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모두 13차례 중국을 공식방문한 것으로 중국 외교부 공식 기록에 나와 있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 공식기록에는 없지만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열린 직후인 1990년 10월 김일성은 랴오닝(遼寧)성 선양(瀋陽)을 화급히 방문했다고 첸치천 전 부총리가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해 놓았다. 당시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경기장에서나마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Republic of Korea)’라는 우리의 정식국호를 경기장 내에서 방송하는 분위기를 개막식에 참석한 이종옥 국가부주석으로부터 전해들은 때문인지 김일성은 동북지방의 선양으로 전용열차를 타고 달려왔고, 막 당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에 오른 장쩌민은 선양으로 달려가 김일성의 불평을 들어야 했던 것으로 첸치천은 기록했다. 이 자리에서 장쩌민은 중국이 한국과 무역사무소를 상대방 수도에 개설할 것이라는 사실을 김일성에게 통보해 주었고, 김일성은 이에 대해 “중국 측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로 동의해 주었다고 첸치천은 기록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때 선양 방문은 중국 외교부 공식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데다가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김일성은 자신보다 어린 장쩌민을 상대로 중국 측에 대해 여러 가지 불평을 쏟아놓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한중수교가 논의되기 이전 김일성의 중국방문은 말 그대로 외국 국가 수반이나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해서 베이징 서쪽의 국빈관 조어대(釣魚臺)에 묵으면 항상 가장 조건이 좋은 건물이 제공됐고, 김일성이 중국 지도자들과 만찬을 할 때는 중국 남부에서 나는 금황색 호박조각을 이어붙인 거대한 용이 만찬장을 압도했다고 한다. 또 두부를 즐기는 김일성의 식성에 맞추기 위해 북한 인민군 영관급 장교들이 며칠 전부터 조어대로 와 투숙하면서 두부를 만들어 맛을 보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잘나가던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썰렁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1992년의 한중수교 때문이다. 1990년 10월 김일성이 선양으로 달려가 장쩌민과 만나 불평하면서도 ‘무역사무소 개설’이라는 경제관계 수립선에서 마지못해 양해했던 한중관계가 마침내 1992년 4월에는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이 나서서 평양에 통보를 하는 사태로 전개되고 말았다. 양상쿤 주석은 그해 4월 김일성의 생일잔치에 가서 생일잔치 분위기를 깨놓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양상쿤은 “국제정세와 우리 중국의 대외관계를 감안해서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려고 한다”고 통보했고, 이에 대해 김일성은 “현재 조선반도는 미묘한 시기에 처해 있으며, 중국은 조미(朝美)관계까지 고려해서 신중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는 볼멘소리를 한 것으로 첸치천의 회고록에 기록돼 있다.

북한과 중국 간 ‘10년 냉전’과 김정일의 방중

1992년 8월 한중수교가 발표된 이후 김일성의 베이징 여행은 없었다. 북한과 중국 사이의 냉랭한 관계는 7년 넘게 계속됐다. 한중수교로 악화된 북한과 중국 관계에 처음으로 다리가 놓인 것은 2000년 3월 5일이었다. 그날은 음력으로 정월 그믐날이었다.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에 돌연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총비서 자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주평양 중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중국 외교관들에 따르면, 김정일은 오후 3시쯤 중국대사관에 도착해서 밤 8시까지 5시간 넘게 머물렀다.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이 국제법상으로 중국영토라고 본다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또 다른 형태의 중국방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은 당시 공사급 참사 리빈을 상대로 술을 마셨다. 김정일은 리빈 참사에게 “당신은 빼갈을 마시라우, 나는 포도주를 마시갔다”라고 하고는 다섯 시간 가까이 리빈 참사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 개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열정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런 해프닝 같은 일이 있은 두 달 뒤인 2000년 10월, 김정일은 비공식 중국방문 길에 나섰고, 김정일은 그해 10월 25일 평양 시민 18만명을 모아놓고 ‘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전쟁 참전 5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속되던 북한과 중국의 ‘10년 냉전’은 이것으로 끝났다.

김정일의 중국 방문 행태는 김일성과는 다르다. 김일성은 베이징을 공식 방문하면 반드시 국빈관 조어대에 투숙하고, 양상쿤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과 회담도 하고 만찬도 한다. 김일성이 중국지도자들과 만나는 회담 장면은 중국 관영 중앙TV가 주요뉴스로 보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과의 ‘10년 냉전’ 끝에 중국 방문을 다시 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국빈관 조어대에 투숙한 것으로 발표된 일은 없다. 대체로 베이징 근교 어딘가에 정차해 놓은 자신의 전용열차에 머물면서 만찬장으로 승용차를 타고 가서 만찬을 하는 일은 있으나 만찬 장소는 발표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방문 일정을 보면 김정일은 거의 열차에서 숙식을 하면서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으로,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로, 상하이로 돌아다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나중에 보면 김정일이 중국의 어느 도시를 방문하기 전에 반드시 북한의 기업시찰단이라는 명목으로 그 도시를 돌아보고 간 흔적이 지방도시의 신문에 조그맣게 실리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김정일의 가장 최근 중국 방문은 2006년 1월 10일부터 18일까지 이뤄진 비공식 방문이었다. 김정일의 이 방문은 광둥성 광저우의 한 호텔 로비에서 김정일의 모습이 일본 TV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돼 북한과 중국 사이에 또 한 차례 외교문제가 됐다.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때 북한 측은 “TV 카메라에 잡혔다는 것은 소총의 직사거리가 확보됐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거칠게 항의했다. 광둥성 광저우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막 호텔을 나서는 모습의 김정일이 일본 취재진 TV 카메라에 잡힌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사건 이후 얼마 뒤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시 부시장으로 행정경험을 쌓고 있던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가 공안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직위를 박탈당했다. 리빈 전 대사는 김정일과 가장 가까웠던 중국 외교관이라는 점에서 그의 수난은 김정일 주변 정보의 유출 관련설이 가장 유력하다. 중국 외교부 고위층들은 북한과의 관계를 위해 리빈 대사를 이른바 ‘고육지책(苦肉之策)’의 희생물로 삼았을 개연성이 크다.

북핵 사태와 북·중 냉전관계의 해빙 무드

그러나 남북한(南北韓)과 중국이 세 개의 꼭짓점이 돼 벌이는 삼각관계를 좀 더 큰 흐름에서 볼 필요가 있다. 1948년과 1949년 사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북한 정권 수립,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1992년의 한중수교에 이르는 40여 년간 중국과 북한은 밀월관계였고, 남북한 관계와 한중 관계는 냉전구조 아래 있었다. 한중수교 이후 2000년 3월 5일 김정일이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깜짝 방문하기까지 10년 가까이는 한중 밀월관계에 북·중(北中) 냉전, 남북한 냉전 관계였다.

그러나 이후 최근까지는 북·중 냉전관계가 해빙이 돼 차츰차츰 양국 관계가 개선되는 사이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중수교 이후 고립에 빠졌던 김정일은 두 차례의 핵실험으로 고립을 해소하고 핵 카드를 흔들면서 중국과의 관계에서 발언의 수위를 높이는 한편, 대미관계에서도 차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국면이다. 김정일은 지난 2월 초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의 구두메시지를 휴대하고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王家瑞)를 지방도시 시찰을 구실로 함흥으로 불러 후진타오의 메시지를 듣는 여유를 보여주었다.

우리 정부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김정일이 언제 중국을 방문하느냐가 아닐 것이다. 김정일이 지금 경제개혁 실패와 식량난으로 궁지에 몰려 중국에 경제원조를 청하러 갈 것으로 예상되지도 않는다. 한국전쟁 이후 장기적인 시각에서 남북한과 중국관계를 파악할 경우, 현재는 김정일의 북한이 핵 카드를 통해 중국에 여유를 갖게 됐다. 대미관계에서도 뭔가 개선의 단서를 발견하려는 비교적 유리한 국면을 맞고 있다. 우리 정부의 외교 통일 당국이 고민해야 할 것은 단기적인 전망보다 장기적인 한반도 주변 형세에서 우리의 성적표가 결코 좋지 못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때인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중국이 말하는 ‘조선반도무핵화(朝鮮半島無核化·한반도 비핵화)’가 김정일의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비핵지대화’와 같은 의미라는 점이다. 왕자루이가 지난번 김정일과 만났을 때도 김정일이 “조선반도비핵화는 선대 김일성 동지의 유훈”이라고 말한 이유도 우리가 말하는 의미와 북한·중국이 말하는 한반도비핵화는 다른 뜻의 말이라는 점이다. 북한과 중국이 말하는 ‘조선반도비핵화’는 정확히 북한 핵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한국 내 미군의 비핵화까지 포함한 개념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6자회담 회복을 위해 한국과 중국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언제 서로 언성을 높일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