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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5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蔣介石과 面談하고 洛陽軍官학교에 韓人특별반 설치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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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嘉興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金九는 中國軍事委員會 위원장 蔣介石과의 회견을 계기로 中國정부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蔣介石은 金九가 洛陽軍官학교 분교에 韓人특별반을 창설하도록 지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上海事變〔1·28戰爭〕 뒤에 日本세력의 급격한 진출에 따라 上海한인사회에도 친일파가 많이 생겼다. 金九는 無정부주의자들과 손잡고 본보기로 대표적인 친일파 玉觀彬을 처단했다. 金九는 1934년 1월에 실시된 임시의정원의 국무위원 선거에서 배제되고 의정원 의원직도 내놓았다.
 
 
  金九는 滿洲에서 활동하던 韓國獨立軍 총사령 李靑天과 李範奭 등을 초빙하여 1934년 2월에 洛陽軍官학교 분교에 훈련생 92명으로 韓人특별반을 개교했다.
 
  金九는 어머니 郭樂園 여사와 麟·信 두 아들을 中國으로 오게 했다. 郭樂園 여사는 극적으로 安岳을 탈출하여 大連에서 중국기선을 타고 威海衛를 거쳐 上海에 도착했다. 金九는 嘉興의 嚴恒燮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아이들을 만났다. 9년 만의 상봉이었다. 郭樂園 여사는 이 때부터 金九를 「자네」라고 불렀다.
 
 
  (1) 滿洲에 騎兵學校 설립 제의
 
 
  金九는 가흥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중국의 농촌 사회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가흥의 남문 밖에 운하로 10리 남짓 떨어진 곳에 嚴家浜(엄가빈)이라는 농촌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金九의 피신생활을 도와주고 있는 陳桐生(진동생)의 농토가 있었다. 金九는 진동생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농부 孫用寶(손용보)의 집에 가서 한동안 묵었다. 金九는 시골 늙은이가 되어 날마다 식구들이 농삿일을 나가고 나면 혼자 빈집에 남아서 집을 보았다. 아이가 울면 우는 아이를 안고 일하는 아이 엄마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면 아이 엄마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中國 農村 둘러보고 감탄해
 
   오뉴월은 양잠철이었다. 金九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누에치는 것과 부녀자들이 실 뽑는 광경을 살펴보았다. 예순가량이나 되어 보이는 노파가 일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물레 곁에 솥을 걸어 놓고 물레 밑에 발판을 달아서 오른발로 눌러 바퀴를 돌리고, 왼손으로 장작불을 지펴 누에고치를 삶으면서 오른손으로는 물레에 실을 감는 것이었다. 그것은 金九가 어려서부터 보아 온 한국 농촌 아낙네들의 실 뽑는 방법보다는 훨씬 생산성이 높았다. 金九는 노파에게 「나이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다. 「예순이 좀 넘었다」고 했다. 金九는 그녀에게 다시 「몇 살 때부터 이 기계를 사용했느냐」고 물었다. 「일곱 살 때부터」라고 했다. 그렇다면 60년 이전에도 고치 켜는 기계가 있었단 말인가. 金九는 적이 의아스러웠다. 노파는 기계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金九는 실제로 일여덟 살쯤 된 아이가 고치 켜는 것을 보고 노파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누에고치를 켜는 기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농기구의 사용법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구식 농기구라도 한국의 농기구에 비하면 퍽 진보된 것 같았다.
 
  논밭에 물 대는 일만 보아도 그랬다. 나무 톱니바퀴를 소나 말에 걸고 남녀 여러 사람이 밟아 굴려서 한 길 이상이나 호숫물을 끌어올려 물을 대었다. 모내기는 한국 농촌의 모내기보다 훨씬 합리적이었다. 모 심는 날에 미리 벼 베는 날짜를 계산했다. 올벼는 80일, 중간 벼는 100일, 늦벼는 120일이라고 했다. 金九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사용하는 줄모를 일본사람이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줄모를 심었다는 것을 김매는 기계를 보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선진적인 중국 농촌의 영농방법을 둘러본 감회를 金九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국 농촌을 둘러본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당·송·원·명·청 각 시대마다 우리나라의 冠蓋使節(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그런데 북쪽지방보다도 주로 남쪽지방 명조(明朝)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조들은 거의가 장님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계책과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도 못 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文永이라는 조상은 면화씨를, 文勞라는 조상은 물레를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하나, 그 나머지는 언필칭 오랑캐라 지칭하면서도, 명대에 의관문물을 모두 중국제도를 준행한다 하고서는 실제로 아무 이익도 없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예를 들면 망건이나 갓과 같은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다.〉
 
  「관개」란 높은 벼슬아치가 타던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를 말한다. 그처럼 권위를 과시하면서 중국을 내왕한 사절들이 중국의 앞선 문물을 제대로 들여오지 못한 것을 통탄한 것이었다. 고려 말에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文益漸(문익점)이었고, 문영은 문익점의 손자로서 무명 짜는 법을 고안한 인물이다. 金九는 문익점과 문영을 혼동한 것이다. 그리고 문로는 물레를 처음 만든 문익점의 아들 文來를 뜻하는데, 물레라는 말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전해진다.
 
 
  韓人共産主義者들의 事大思想 비판
 
  그러면서 金九는 한국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는 참뜻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히려 朱憙(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의 것 이상으로 더 강고한 이론을 주창했다. 그리하여 四色의 파당이 생겨서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가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존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金九는 중국의 농촌을 둘러보고 난 소감으로 공리공론에 빠져서 실용주의를 외면했던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폐풍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청계동에서 그에게 평생의 교훈이 된 의리의 철학을 가르쳤던 화서학파 高能善(고능선)의 「尊中華攘夷狄主義(존중화양이적주의)」도 포함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金九가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사대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이고 있는 점이다.
 
  〈통탄스럽게도 오늘날을 두고 보아도 청년들이 늙은이들을 가리켜 노후(老朽)니 봉건잔재니 하는데, 긍정할 점이 없지 않으나, 사회주의자들은 강경하게 주장하기를 혁명은 피를 흘리는 사업이므로 한 번은 가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하더니,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뒤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한번 떨어지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程朱[程子와 朱子]가 방귀를 뀌어도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고 할 듯하니, 청년들이여 좀 정신을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程朱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만일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1)
 
  金九는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교조주의와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소련 볼셰비키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같은 사대주의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우리나라의 국민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었다. 이처럼 金九의 민족주의 내지 애국사상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과 함께 중국인들의 실용주의적인 생활양식과 한국인들의 허례허식과의 비교, 그리고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정치행태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식을 통하여 심화되었다.
 
 
  國民政府의 본격적인 支援 시작
 
  金九가 周愛寶(주애보)의 배를 타고 피신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朴贊翊(박찬익)·嚴恒燮(엄항섭)·安恭根(안공근) 세 사람은 활발히 움직였다. 중국국민당 당원인 박찬익은 주로 국민정부와의 교섭을 담당했고, 안공근은 상해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자들과 프랑스공무국의 연락과 정보수집 및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엄항섭은 가흥에 머물면서 정세분석과 선전활동에 주력하면서 金九의 앞으로의 활동계획 구상을 도왔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정책도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이 두사건을 통하여 과시된 한국인들의 용맹성과 항일투쟁 역량을 그들의 反滿抗日(반만항일) 투쟁에 연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蔣介石(장개석)이 金九를 지원하기 시작한 사실과 관련하여 ?傑(등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32년 7월15일 밤에 蔣公이 無漢(무한)에서 나에게 전보로 〈속히 3인을 貢沛誠(공패성)에게 파견하여 근무케 하고 그의 지휘를 반드시 받도록 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전보명령문은 장공의 그날 일기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나는 즉시 청년장교 세 사람을 貢선생에게 파견하여 그의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듣기에 이 세 사람은 그 뒤에 金九 선생이 동북[만주]에 보내어 지하공작에 종사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써 蕭(소)선생의 공작도 역시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2)
 
  등걸은 이때에 三民主義力行社의 5인상무간사의 한 사람이자 서기였다. 흔히 藍衣社(남의사)로 통칭되는 삼민주의역행사는 장개석이 초대교장이었던 廣東의 黃軍官學校 출신들을 중심으로 1932년 2월29일에 결성된 중국국민당안의 특무조직이었다. 남의사라는 이름은 옛 중국의 평민복장이 남색 옷이던 점을 감안하여 남색 옷을 삼민주의역행사의 예복으로 정한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창설 때에 정식명칭 자체를 남의단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3)
 
 
  金元鳳이 朝鮮革命幹部학교 개설
 
金元鳳이 설립한 朝鮮革命事政治幹部학교의 제3기생을 훈련하던 南京市 江寧區 上坊鎭 天寧寺〔독립기념관,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2002)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 가운데에서 중국국민정부의 본격적인 지원을 먼저 받은 사람은 義烈團(의열단)의 金元鳳(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1926년 3월에 다른 여러 의열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4기생으로 입학했었는데, 등걸도 이때에 동기생으로 같이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김원봉은 남의사의 실무를 맡은 등걸에게 「중한합작에 관한 건의」, 「조선혁명계획서」 등을 제출하여 反滿抗日을 위한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지원을 요청했고, 중국군사위원회는 1932년 6, 7월경에 이를 승인했다.4) 그러면서 국민정부는 김원봉에 대한 지원업무를 남의사가 담당하도록 했다. 남의사는 1932년 4월에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과 월남, 인도 등 아시아 被압박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을 전담할 기관으로 민족운동위원회를 설치했는데, 때마침 4월29일에 윤봉길의 홍구공원폭파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9월에 제6차 정기대표대회를 열고 〈한-중 합작으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조선혁명당조직에 필요한 전위투사를 양성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5) 10월20일에 남경 교외 湯山에 있는 善壽庵이라는 절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표면적으로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로 하여 중국의 군인교육기관인 것처럼 꾸몄다.6)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간부들이 연고를 통해 모집한 훈련생 20명과 교관 12명으로 개교한 혁명간부학교는, 뒤에 6명이 추가로 입학하여, 6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치고 1933년 4월20일에 제1기생 26명이 졸업했다.7)
 
  간부학교의 운영은 교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주관했으나 운영경비와 소요물자는 전적으로 국민정부에서 담당했다. 남의사의 민족운동위원회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을 위한 경상비로 매달 2, 3천원, 수시 필요경비로 1,000원에서 1만원, 의열단 운영비로 매달 400원에서 1,000원을 지급하고, 입교생 교육에 필요한 총기, 탄약, 피복, 식품 등 일체의 물자와 장비도 지원했다. 입교생들은 보안유지를 위해 학교 안에서 합숙했고, 교관들은 남경성내 胡家忠園 안에 있는 김원봉의 집에서 집단 기거했다. 입교생과 교관에게는 매달 3, 40원의 급여가 지급되었다.8) 이렇게 교육받은 제1기 졸업생들은 상해·북경 등 중국관내지방과 만주 및 국내와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 보내어 공작활동을 전개하도록 했고, 이들의 공작금으로 3만원을 보조했다는 기술도 있으나,9) 이는 부정확한 것 같다.
 
 
  滿洲에 騎兵학교 설립 제의
 
  국민정부에서 金九의 지원을 담당했던 것은 중국국민당의 핵심세력인 陳果夫(진과부)와 陳立夫(진입부)형제를 중심으로 한 CC단이었다. CC단은 남경정부가 수립되고 석 달 뒤인 1927년 7월에 조직된 비밀정치결사였다.10) CC는 진과부 형제를 가리키는 「Chen Chen」의 약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Central Club」의 약자라는 설도 있다. 진과부를 도와서 金九를 지원한 책임자가 蕭錚(소쟁)이었고, 소쟁을 협조하던 사람이 공패성이었다. 소쟁과 공패성은 함께 독일에 유학한 사이였다. ?輔成(저보성)에게 부탁하여 그의 고향집으로 金九를 피신하도록 주선한 것도 소쟁이었다. 절강성 당부의 주임위원을 지낸 소쟁은 자신이 金九를 만나러 저보성의 집을 자주 드나들 경우 金九의 신변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패성으로 하여금 金九와 접촉하게 하고 있었다.11)
 
  중국군사위원회는 김원봉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설치안을 검토하면서 金九에 대한 지원책도 함께 배려했던 것 같다. 소쟁은 1932년 7월 무렵 金九에게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장래계획을 제출하라고 했다. 金九는 구체적인 계획은 제출하지 않고 장개석과의 면담과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만주에 기병학교 설립이라는 두 가지 사항을 요망했다. 金九가 만주지역에 기병학교 설립을 제안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시기에는 기병부대가 매우 기동성 있는 전투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金九는 한국 노병회 이사장으로 활동할 때부터 어려운 재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몇몇 청년들을 중국무관학교에 입교시키는 등 청년장교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月刊朝鮮」 2005년 7월호, 「金九, 內務總長되어 國民代表會議에 해산명령」 참조). 그는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만주지역에서 동포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리하여 박찬익을 통하여 이 문제를 자주 소쟁에게 건의했었다.12)
 
 
  蔣介石 만나서 대규모 暴動 제의
 
金九와 會談했을 무렵의 蔣介石.
  金九가 장개석 면담을 요청했을 무렵 장개석은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하남성·호북성·안휘성의 戰匪[공산당소탕전투] 총사령관으로서 漢口(한구)에 가 있었다. 소쟁은 공패성에게 한구에 가서 장개석에게 金九의 제안을 직접 보고하게 했다.13) 공패성의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비서실을 통하여 8월10일에 남경에 있는 진입부에게 다음과 같은 극비 전보를 쳤다.
 
  〈남경 진입부 선생이 蕭靑萍[靑萍은 소쟁의 호] 형에게 전하십시오. 7234 총사령[장개석]께서 말씀하시기를, 金九가 기다리는 것은 可하며 남경에서 기다려 만날 것. 기병학교 일은 논하지 말 것.〉14)
 
  장개석은 金九의 기병학교 설립계획이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5) 그리하여 金九의 기병학교 설립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장개석과의 면담은 그가 남경으로 돌아온 뒤에 이루어졌다. 소쟁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金九 선생이 남경에 와서 蔣총통과의 만남을 기다린 것은 그해(1932년) 9월인지 10월인지 잘 기억되지는 않으나, 그 일도 진과부 선생의 주선하에서 박찬익 선생이 金九 선생을 모시고 가흥으로부터 남경에 왔던 것입니다. 접대는 나와 공패성이 맡았습니다. 「백범일지」에 蔣총통과 만날 때에 국민당 요인 진과부선생, 소쟁, 공패성 등도 동석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확실하게 기억되지 않으나, 蔣총통이 9월 어느 날 남경으로 돌아오고 金九 선생도 가흥으로부터 와서 만난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16)
 
  소쟁의 증언에 따르면, 金九가 장개석을 만난 것은 이처럼 1932년 9월이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백범일지」에는 金九가 장개석을 만난 날짜가 적혀 있지 않다.17)
 
  「백범일지」에 따르면, 金九와 장개석과의 면담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金九는 진과부로부터 장개석의 면담통지를 받고 안공근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소쟁과 공패성 등 국민당 인사들이 진과부를 대신하여 마중을 나와서 중앙반점에 숙소를 정했다. 다음날 밤 金九는 박찬익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진과부의 자동차를 타고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의 숙소로 갔다. 박찬익은 남경에 머물고 있었다. 장개석은 중국옷을 입고 온화한 낯빛으로 金九를 맞이했다.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자 장개석이 말했다.
 
  『동방 각 민족은 孫中山(孫文) 선생의 三民主義에 부합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金九는 장개석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대륙침략의 마수가 시시각각으로 중국에 침입하고 있습니다. 좌우를 물리쳐 주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 올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진과부와 박찬익이 밖으로 나간 뒤에 장개석이 붓과 벼루를 가져다 주었다. 金九는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선생께서 100만원의 돈을 허락하시면 2년 이내에 일본·조선·만주 세 방면에서 대폭동을 일으켜서, 대륙침략을 위한 일본의 교량을 파괴하겠습니다. 선생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비밀사항이 있을 수 없는 진과부마저 물리친 뒤의 제안으로서는 너무나도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물론 金九의 조심성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장개석이 붓을 들었다.
 
  『자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金九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 물러나왔다.18)
 
  그런데 이때의 金九와 장개석의 면담내용에 대해서는 「백범일지」보다 소쟁의 증언이 훨씬 자세하다. 장개석은 金九에게 주로 일본 군대의 인원과 활동에 대한 정보를 탐지해 달라고 부탁했고, 金九는 경상비의 지원과 대규모 군사학교 설립의 두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고 한다. 자금에 대해서는 金九 자신은 100만원을 요청했다고 했으나, 소쟁은 金九가 200만원을 요청했다고 회고했다.19) 장개석은 자금지원은 허락했으나 독자적인 군사학교를 설립하면 일본에 노출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대신 중국의 군관학교 안에 한 개의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개석은 金九에게 구체적인 공작계획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20)
 
  다음날 金九는 간략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이 계획서에는 천황을 비롯한 일본정부 요인들과 군간부들의 암살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같다.
 
 
  洛陽軍官學校 분교에 韓人靑年 입교시키기로
 
國民政府에서 金九 지원을 담당했던 陳果夫.
  金九와 장개석의 면담이 있은 뒤에 진과부는 소쟁을 자기 집으로 불러서 金九에 대한 지원방침을 논의하고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했다.
 
  1) 金九에게 경상비로 매달 5,000원을 지급한다.
 
  2) 사업비는 金九의 계획 가운데에서 장개석의 비준을 받은 것에 한하여 진과부가 별도로 마련해 준다.
 
  3) 金九의 안전문제 및 그의 집무실은 소쟁이 책임지고 마련토록 한다.
 
  4) 金九의 한국독립운동 계획은 소쟁이 서명한 뒤에 진과부에게 올려 장개석의 결재를 받는다.
 
  5) 공패성으로 하여금 소쟁을 도와 한국관계 사무를 처리하게 한다.
 
  진과부는 金九를 그의 별장으로 초청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진과부는 장개석을 대신해서 말했다.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습니까? 장래에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감히 부탁할 수 없었으나 사실은 그것을 바라던 바이올시다. 문제는 장소와 물력(物力)입니다』21)
 
  이때에 진과부는 소쟁과 결정했던 지원방침을 말했다.22)
 
  매달의 경상비 5,000원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金九는 매우 만족했다. 소쟁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때의 5,000원은 매우 큰 금액입니다. 내 기억에 한때에 金九 선생은 매우 기쁜 심정으로 李承晩 선생이 미국에서 약간의 모금을 보내왔다고 알려 주기에,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200달러라고 했습니다. 이 200달러가 金九 선생을 그렇게도 기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비한다면 5,000원이라는 액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23)
 
  당시 달러화와 원화의 환율은 2대 1 정도였다.
 
  국민당의 원조금은 소쟁이 金九에게 지급했다. 金九는 박찬익을 소쟁에게 보내어 자금을 받아 오도록 했고, 소쟁은 金九의 인감을 확인하고 지불했다. 경비는 1933년 2월부터 진과부의 자금으로 지급하다가 1934년 이후에는 중앙당부 특별예산에서 지급되었다.24)
 
  이렇게 하여 마침내 金九는 하남성 洛陽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되었다.
 
 
  (2) 無政府主義者들과 손잡고 親日派 처단
 
 
  가흥에 피신해 있으면서 독자적인 행보를 취하고 있는 金九와 상해의 독립운동자들, 특히 한국독립당과 교민단을 장악하고 있는 宋秉祚(송병조), 李裕弼(이유필), 崔錫淳(최석순), 車利錫(차이석) 등 서북 출신의 興士團(흥사단) 그룹과의 알력은 1933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흥사단 그룹은 연말연시를 계기로 망년회 또는 신년회 명목으로 차이석의 집과 金奎植(김규식)의 동서 金弘敍(김홍서)의 집 등에서 모임을 가졌다. 1월4일 저녁에 김홍서의 집에서 열린 신년회는 부부동반이었다. 같은 날 저녁에 프랑스조계의 한 음식점에서 玉觀彬(옥관빈)의 주동으로 열린 신년회에는 30명이나 모였는데, 이들은 일정한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었다.25) 이 무렵 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 그는 1월2일에 김홍서의 집에서 열린 신년회에도 참석했다.
 
 
  韓國獨立黨 대표회가 金九세력 배제
 
  이러한 일련의 준비모임을 가지고 나서 1월15일에 중국인 거리에 있는 少年宣講團 안에서 在상해 한국독립당대표회가 열렸다. 이날의 대회에는 송병조와 이유필을 비롯하여 趙尙燮(조상섭), 金枓奉(김두봉), 차이석, 김홍서, 최석순, 安敬根(안경근), 朴昌世(박창세) 등 간부 18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대부분 서북파 인사들이었다. 이날의 대회는 金九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회의는 이사장 송병조의 개회사로 시작되어 李奉昌과 尹奉吉에 대한 묵도에 이어, 지난 기간의 수지가 1,500원이라는 최석순의 재무보고와 7개구(상해의 5개구와 남경구 및 특구)의 제안을 듣고, 대민중운동방책·군사·외교·경제의 네 문제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했다. 내밀히 추진하던 당의 민중운동방책을 차제에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열띤 토론이 있었으나, 그 구체적 결정은 이사장에게 위임했다.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재정의 확대가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경제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회의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金九와 박찬익, 안공근, 엄항섭 등 金九직계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갑론을박으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金九는 당의 원로이자 독립운동에 공헌한 바가 큰 인물로서 부득이한 이유로 상해를 떠났고, 또 지난번의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을 때에도 즉석에서 직임을 다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임을 신청했으나 한국독립당에 대해서는 도리어 당적을 보유하겠다고 특별히 희망해 왔던 사정 등이 고려되어, 예외적으로 그 지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사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時事新報」를 통한 安昌浩의 명예훼손 문제와 그것과 관련된 임시정부판공처 습격문제에 대해서는 趙素昻과 金澈에게 책임이 없음을 천명했다. 이렇게 하여 金九는 한국독립당의 이사직은 계속 보유하게 되었으나 그의 심복들이 모두 배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독립당과 결별하게 되었다. 대회는 송병조를 다시 이사장으로 하고 李東寧과 金九를 포함한 10명의 이사를 선출하고, 이유필을 총무주임, 최석순을 재무주임, 조소앙과 文逸民을 감사로 선임했다.26)
 
 
  議政院의 臨時會議 열려
 
  독립운동자들 사이의 알력과 일본경찰의 집요한 추적 속에서 상해 정국은 또다시 혼미에 빠졌다. 1932년 11월에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조직으로 결성되었던 대일전선통일동맹도 그 주도자인 金奎植이 1933년 1월 하순 미국으로 떠나고 난 뒤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임시정부의 기능도 중단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의 기능이 중단된 것은 1932년 11월28일의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의 국무위원 선거에 대해 국무회의 주석인 조완구가 임시약헌에 위배되는 조치로서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27)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월 중순이 되어 북경에 가 있던 崔東旿(최동오)가 그곳에서 활동하던 曺成煥(조성환·일명 曺煜)과 함께 상해로 오고, 廣東에 가 있던 의정원 상임의원 金朋濬(김붕준) 등도 상해로 와서 일련의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2월 하순에 항주로 가서 이동녕, 金九, 조완구, 조소앙 등과 회합하고 임시정부 정상화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의 기능 중단에 대한 위기의식과 단합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가운데 尹琦燮(윤기섭) 등 의원 7명의 요청에 따라 3월6일에 임시의정원 임시회의가 열렸다.28)
 
  차이석, 윤기섭, 김붕준, 金玄九(김현구), 朴震(박진) 등 9명의 의원이 출석한 이날 회의는 저녁 6시에 개원하여 다음날 새벽 2시에 폐회된 마라톤 회의였다. 의장 이동녕이 출석하지 않아서 부의장인 차이석이 사회를 보았다. 회의는 먼저 1932년 11월28일의 정기회의가 1) 국무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되지 않은 것을 만기로 오인하여 국무위원들의 사면을 사면으로 처리하지 않고 개선의 절차를 행한 것, 2) 국무위원 선거가 법정수 미달이었던 것, 3) 의장사면청원을 처리한 것이 법정수에 미달이었던 것, 4) 상임위원을 사면한 것은 과거 의회결의안에 위반되는 것이었으므로 네 가지 처리가 모두 무효임을 선포했다.
 
 
  李承晩과 金九를 國務委員으로 선출
 
임시정부가 上海를 떠나서 杭州에 머물던 때에 쓰던 청사. 항주市 長生路 湖邊村 23호에 있다〔독립기념관, 「국외항일운동유적(자지)실태조사보고서」(2002)에서〕.
  임시회의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무위원 보선이었다. 그에 앞서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국무위원들의 사표를 처리했다. 또한 보류하고 있던 의정원 의장 이동녕의 의장직 사면청원안을 준허하기로 가결하고 새 의장 선출은 의원이 보결되기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조완구·조소앙·金澈 세 국무위원의 사표는 수리하고, 이동녕과 金九의 사표는 반려하기로 했다. 이어 국무위원의 수를 11명으로 늘리기로 하고 李承晩, 김규식, 조성환, 송병조, 윤기섭, 申翼熙, 최동오, 차이석, 이유필의 9명을 새로 선출했다.29) 이 국무위원들은 정기회의까지의 원임기의 잔여임기만 채우는 조건으로 선출되었다.30)
 
  11명의 국무위원은 그동안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다양한 정치세력 가운데 이러저러한 경위로 중국관내를 떠난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정파를 망라한 인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항주판공처습격사건의 당사자였던 조소앙과 김철은 배제되었다. 이때의 국무위원 선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25년 3월에 임시의정원의 탄핵결의로 임시대통령직을 면직시킨 李承晩을 다시 국무위원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때에 제네바에 가서 국제연맹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조소앙의 주선으로 李承晩에게 신임장을 보냈던 임시정부로서는 그의 활동이 임시정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와 아울러 미주와 하와이의 李承晩 지지자들이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을 것이다.
 
  기존의 국무위원 가운데 金九와 이동녕만 유임시킨 것도 흥미롭다. 초창기부터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켜 왔고, 특히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국내외 동포들 사이에 높은 성가와 신뢰를 받고 있는 金九와 그의 후견인 격인 이동녕을 배제했다가는 임시정부의 권위에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金九가 지니고 있는 자금에도 관심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金九는 이동녕과 함께 임시의정원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국무위원직도 수락하지 않았다. 金九는 전년의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선출되었을 때에도 안공근을 통하여 제명해 줄 것을 요망했었다. 이때에 새로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신익희도 金九와 마찬가지로 제명해 줄 것을 요망했었다.31) 일본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던 金九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교민단과 한국독립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송병조·이유필 등 서북파와 김규식·최동호 등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주도자들이 임시정부에 대거 참여하게 된 것도 통일동맹을 반대하고 있는 金九로서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金九와 이동녕이 국무위원직을 수락하지 않자 임시정부는 3월22일에 국무회의를 열고 2개월 이상 계속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임시약헌 제34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군무장 金九와 법무장 이동녕을 해임했다. 그리고는 3월21일에 송병조를 재무장에 선임한 데 이어, 22일에는 차이석을 내무장에, 신익희를 외무장에, 윤기섭을 군무장에 선임함으로써 조각을 완료했다.32)
 
 
  하와이同胞들이 金九에게 편지 보내
 
  이무렵에 하와이 동포들이 金九에게 李承晩과 관련된 편지를 보냈다는 상해주재 일본총영사의 보고가 있어서 눈길을 끈다. 하와이에서 안공근의 집으로 부쳐 온 이 편지는 李承晩이 제네바의 국제연맹회의에 가서 한국임시대통령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놓고 2월7일에 「하와이 임시정부」 총회에서 논란을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 李承晩의 행동에 따를 것인가, 2) 李承晩이 자기의 주의를 버리고 우리에게 귀순해 오면 우리는 종전대로 그를 따를 것인가, 3) 「하와이 임시정부」의 관계자는 모두 상해에 근거한 임시정부를 절대적으로 믿고 그 정부 지휘에 따라 동일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 하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토의를 거듭한 결과 세 번째 방안을 따르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일본총영사의 보고는 또한 의경대원 李秀峰이 교민단 기관지 「上海韓報」에 李承晩이 제네바에서 대한공화국대통령이라고 자칭했다고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일본총영사의 이러한 보고 내용은 「新韓民報」 등 현존하는 다른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흥미 있는 것은 하와이 동포들의 편지가 다른 사람이 아닌 金九에게 송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와이 동포들에게는 金九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하와이 임시정부」란 李承晩의 반대파가 장악하고 있던 하와이교민단이 해체하고 2월1일부로 복설한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지칭하는 것 같다.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복설되자마자 李承晩의 대통령 자칭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보고서의 초점은 이러한 내용보다는 金九의 행방이었다. 보고서는 이 편지가 3월17일에 金九에게 전달된 것 같다고 말하고, 그것을 통해서 金九의 소재를 예의 내탐 중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보고서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金九는 상해에 잠복 중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33) 金九가 얼마나 철저하게 일본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金九의 행방에 대해서는 1933년 8월까지는 일본의 어떤 기관의 정보보고서에도 보이지 않는다.
 
 
  李裕弼을 〈敵에게 귀순했다〉고 파면
 
  1933년 3월9일에 교민단 정무위원장 이유필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항주의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유필이 일본경찰에 체포된 것인지 어쩐지도 불확실했기 때문에 상해 동포사회는 더욱 뒤숭숭했다. 교민단 간부들이 모인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20여 일이나 지나서였다.
 
  3월28일에 최석순·박창세·이경산과 그밖의 네댓 사람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최석순은 사건의 경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春山이 누구의 손에 잡혔는지 아직 판명되지 않았으나 극비리에 조사해 보았는데, 일본관헌에 체포된 것 같지는 않소. 춘산이 피포된 지 사나흘 뒤에 어떤 중국사람으로부터 춘산 부인에게 1만원을 청구하는 협박장이 송부되었는데,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 부랑자가 민단에 상당한 자금이 있는 줄 알고 이를 탈취하기 위해 인질로 납치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구출은 용이할 것이오. 중국인 유력단체로부터 인질보상금은 지급하겠다는 언질을 얻었소이다』
 
  이 보고에 따라 대책을 협의한 결과 중국인 유지와 중국 쪽 각 단체에 대해 이유필이 부랑자의 손에 의해 납치되었음을 성명하고 그를 구출하기 위한 청원서를 각 기관에 제출하는 한편 그 사실을 널리 선전하기로 했다. 한편 4월13일자 한자신문 「民報」는 일본이 불법으로 이유필을 체포한 것에 항의하는 동시에 구출을 요구하기 위해 시정부에 제출한 이유필의 가족들의 진정서 전문을 게재하고 사건경위의 개략을 상상적으로 보도했다.34)
 
  이유필은 3월9일 새벽 6시에 상해 중국인 거리에서 상해 파견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었는데, 그가 체포된 것은 여러모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유필은 3월31일에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송치되었다가 4월3일에 평안북도 경찰부에 이송된 다음,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고 하여 4월30일에 석방되었다. 앞으로 절대로 해외에 가지 않을 것과 본인 또는 가족 등으로부터 일절 해외에 통신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조선총독부 경찰이 기소를 보류한 것이었다.35)
 
  이유필의 체포로 상해의 한인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교민단은 4월 중순에 이유필의 후임으로 차이석을 정무위원장에 선출했으나 그는 이내 사임했다. 그리하여 4월27일에 다시 열린 이사회는 송병조를 정무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송병조는 기독교 목사이며 상해의 한인민족주의자 가운데에서 비교적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일본총영사는 교민단이 송병조를 이유필의 후임으로 선출한 것은 일본경찰의 단속을 완화하려는 목적에서 취한 조치일 것이라고 분석했다.36)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이유필이 일본에 귀순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6월30일자로 된 「公報」 제55호를 통하여 〈국무위원 이유필은 적에게 귀순한 증거가 있는 바 차기 의회때까지 기다릴 사태가 아니므로 국무회의에서 그의 직을 파면한다〉라고 공포했다.37) 임시정부의 「公報」가 말하는 이유필의 〈적에게 귀순한 증거〉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프랑스租界 工務局에 진정서 제출
 
  이유필의 親日행적 논란과 관련하여 金九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안공근이 7월23일에 프랑스공무국에 제출한 「한국인사회의 현상에 관하여」라는 러시아문 진정서에 잘 드러나 있다. 안공근은 진정서에서 홍구공원 폭파사건을 계기로 한국 혁명가들은 14년 동안 활동하던 상해를 떠났고, 아직까지 상해의 외국조계에 거주하는 자는 일본에 충실한 자이거나 일본옹호자인 밀정들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상해의 한인사회는 늘 新·舊 두 혁명 당파로 확연히 구분된다고 전제한 다음, 수십 년 동안 反日투쟁을 해온 金九와 같은 老혁명가가 진정한 혁명가이며, 1919년의 3·1운동 이후에 혁명운동에 뛰어든 新혁명가는 오늘날 적에게 투항하여 독립운동을 포기한 부류라고 말하고, 이유필도 바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안공근은 홍구공원 폭파사건 이후의 이유필의 행동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전혁명당원이 외국조계에서 중국영내로 피신한 뒤에도 이유필은 조계 내에 잔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무런 위험도 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한국혁명운동의 수령이라 자칭하고 홍구공원사건은 그가 계획한 바라고 자찬했다. 홍구공원사건은 그와 그 일당이 특히 중국인 사이에서 금전을 모으는 데――물론 자기 사용으로 쓰기 위해――이용되었다.…〉
 
  안공근은 이유필이 5년 동안이나 프랑스조계 증권거래소에서 증권거래업을 하면서도 한 번도 일본인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며, 이번의 납치사건은 이미 그가 상해에서 거류할 수 없게 된 결과 일본인과 공모한 계획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안공근은 상해에 있는 이유필 일당은 모두 표면적으로는 혁명가를 가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명령에 따라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金九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金九 그룹은 현재 상해에서 아무런 혁명운동도 행하고 있지 않다. 또 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이 운동의 전부는 중국 오지로 옮겨져 있다. 테러행동에 대해서는 金九는 작년의 사건으로 일본인 및 우리 혁명운동과 그 공작의 능력을 믿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 앞에 우리의 공작능력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회를 통하여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한국혁명기관의 활동과 실행력을 확인시킬 수 있었으며 일본인들에게 한국혁명운동은 그들의 폭력으로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만약 또 일본인들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다면 그것을 나타내 보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상해에서는 아니다. … 홍구공원의 폭탄사건 뒤에 金九는 상해를 떠나서 거의 상해에 있지 않았다. 그의 부하는 때때로 단기간 상해에 왔으나 그것은 특히 상해에 잔류하는 가족과의 연락을 위해서이며 혁명운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안공근의 진정서는 마지막으로, 상해에 있는 한국혁명가의 가족은 일본의 자금과 지시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이유필 일파의 선전에서 벗어나기가 불가능한 착잡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따라서 한국혁명가는 프랑스경찰 당국이 한인동포들과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그것이 일본인의 선전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면밀하고 공평하게 규명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38)
 
  안공근의 이 진정서는 이무렵 金九가 안공근을 통하여 무정부주의자 그룹과 함께 추진하고 있던 친일파 옥관빈의 암살계획에 대하여 사전에 프랑스경찰의 이해를 촉구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구증가로 韓人社會 판도 달라져
 
  중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진출이 급격히 증대하고 특히 상해사변[1·28전쟁]으로 일본군이 상해에 진주함에 따라 상해 한인사회의 판도도 크게 달라졌다. 많은 독립운동자들은 상해를 떠났고, 경제활동이나 그밖의 목적으로 상해로 유입되는 일반 동포들의 인구가 늘어났다. 한인기업체도 급격히 증대하여, 1924년에 14개에 지나지 않던 것이 1930년에는 91개로 증가했다. 한인동포들이 종사하는 직업도 다양해져서 이전에는 전차나 버스의 차표검표원이나 부두노동 등이 고작이었고 화이트 칼라 직종은 아주 드물었으나, 1930년 현재 40개 업종에서 일하고 있었다.39)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한 단체도 생겨났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경제적 혁명단체」를 표방하면서 1930년 2월에 조직되었던 同人互助社(동인호조사)는 같은 취지의 단체조직을 계획하고 있던 애국부인회와 함께 1931년 3월25일에 公平社(공평사)를 발족시키고, 1년 동안의 자금모집 끝에 1932년 10월1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40) 이유필과 같은 서북파인 조상섭이 이사장대리, 張德櫓(장덕로)가 경리를 담당했다.41)
 
  친일단체도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다소 여유가 있는〉 한인들이 〈친일과 동족상애〉를 표방하면서 1931년 3월에 결성한 상해조선인친우회였다.42)
 
  이 무렵 대표적인 친일파로 독립운동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던 인물은 옥관빈이었다. 그는 일찍이 국내에서 金九와 함께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었고, 3·1운동 뒤에는 상해로 건너와서 안창호의 측근으로서 임시정부활동에도 참여했다가, 임시정부활동이 쇠퇴해지자 임시정부를 떠나서 「慈藥敞(자약창)」이라는 제약회사와 「三德洋行(삼덕양행)」 등을 운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아 상해의 유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돈으로 신문사를 포섭하고, 상해정부의 고급관리는 물론 경제계와 종교단체와도 교분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호화주택을 가지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렸다.43) 그는 독립운동기관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일본군대를 위하여 2만원 상당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정보를 밀고하는 등 밀정행위를 하고 있었다.44)
 
 
  親日派로 변절한 옥관빈 처단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떠나고 없는 상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南華韓人靑年聯盟(남화한인청년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만주사변 이후에 상해로 집결한 무정부주의자들이 鄭華岩(정화암), 柳子明(유자명), 李康勳(이강훈), 白貞基(백정기)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31년 9월경에 조직한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고 조선을 해방시킨 뒤에 무정부 공산주의사회를 실현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여 1931년 11월 중순에 「抗日救國聯盟(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의 주요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을 실행할 연맹의 행동대로 「黑色恐怖團(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1932년 12월16일에 천진의 일본 주둔군 병영과 일본총영사관 관사와 상해의 일본총영사관 관사에 폭탄을 던지고, 1933년 3월17일에는 駐中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가 사전에 계획이 폭로되어 실패했다.45)
 
  金九는 중국인들과 국민정부의 지원으로 자금은 확보했으나 일을 수행할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사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金九의 자금과 남화한인연맹의 인력이 합작하여 옥관빈을 처단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일은 金九와 안공근·정화암 세 사람만 알고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46)
 
  金九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정화암은 자전거 몇 대를 구입하여 옥관빈의 신원추적에 착수했다. 두 달 동안 추적한 끝에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옥관빈은 프랑스조계 공무국 경찰로 근무하는 그의 종형 玉成彬(옥성빈)의 집 뒤쪽 정자칸 방에 사는 흥사단원 이아무개의 부인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 집에 드나들었다. 이아무개는 漢口에서 소규모의 세발자전거 공장을 차리고 있어서 집을 비우고 있었다.
 
  옥관빈 암살은 金九의 심복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있는 吳冕稙(오면직)과 엄형순이 맡았다. 8월1일 저녁 9시 무렵 옥관빈이 옥성빈의 집에서 나올 때에 기다리고 있던 엄형순이 자동차로 접근하여 권총 세 발을 쏘았고, 옥관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47)
 
  옥관빈의 피살은 한인동포사회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옥관빈을 암살한 뒤에 金九 쪽에서는 8월8일에 「韓人除奸團(한인제간단)」 이름으로 「역적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함」이라는 「斬奸狀(참간장)」을 작성하여 프랑스조계에 있는 한인신문과 중국신문에 배포했다.48) 옥관빈이 암살되자 옥성빈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 역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있던 친일파였다. 옥성빈도 넉 달 뒤인 12월18일 오후 6시에 프랑스조계 金海山(김해산)의 집 입구 길가에서 암살되었다.49)
 
 
  金九 추적하던 密偵은 義警隊가 처치
 
  옥관빈이 암살되고 나서 2주일이 지난 8월17일에는 밀정 李珍龍(이진룡)이 상해 교민단 의경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진룡은 羅南헌병대 茂山헌병분대 소속의 헌병보로서, 홍구공원 폭파사건 직후에 상해에 파견되어 주로 金九의 소재 수사를 하고 있었다. 이진룡은 「石鉉九(석현구)」라는 가명을 쓰면서 1933년 1월부터 공동조계에서 인삼장사나 서적판매상으로 위장하고 프랑스조계와 중국인 거리를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것이 밀정 혐의를 받기 쉽고 정탐활동에도 불리하다고 생각되어 8월8일에 프랑스조계 하비로에 있는 林得山(임득산)의 빈집을 지키는 金廣鎭과 같이 있기로 하고 그곳으로 옮겨 와서는 송병조, 차이석, 박창세 등 교민단과 독립당 간부들에게 접근하여 내밀히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17일 새벽 5시에 의경대원 李景山(이경산)과 李雲煥(이운환)에게 사살되었다.50)
 
  의경단이 이진룡을 처단한 것은 金九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에 교민단은 의경대의 강화를 위해 3,900달러의 예산을 책정하고 자금조달과 행동대원 모집을 하고 있었다.51)
 
  옥관빈과 이진룡의 피살로 한인동포사회는 말할 나위도 없고 프랑스공무국과 일본총영사관 경찰들이 아연 긴장해 있는 속에서 다음 차례는 상해조선인친우회 간부들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두 사건이 독립운동단체와 조선인친우회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친우회 위원장 柳寅發(유인발)은 앉아서 암살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8월27일 밤에 권총을 숨겨 가지고 프랑스조계로 갔다. 그는 독립운동자로 지목되는 사람들을 집집마다 방문하여 조선인친우회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하여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유인발에게 위험하다고 속히 돌아가라면서 만나기조차 꺼렸다. 마침내 유인발은 암살계획의 핵심인물로 알려진 의경대장 박창세를 찾아갔다. 마침 李秀峰(이수봉)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최근에 프랑스조계의 한인들이 친우회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나를 암살하겠다는 말을 지껄인다기에 그 이유를 따지려고 왔소』
 
 
  朝鮮親友會 위원장 柳寅發도 義警隊 총맞아
 
  두 사람은 손을 저으면서 자기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유인발도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런데 이때에 박창세와 이수봉은 유인발에게 金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곧, 옥관빈 암살사건은 안공근·박찬익·엄항섭 등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손잡고 감행했다는 것, 중국공안국에 재직하는 裵天澤(배천택)이 金九와 안공근 등의 활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金九는 항주에 잠복하여 남경에는 자주 왕래하는 모양이나 상해에는 오는 일이 없다는 것, 현재 金九파는 상해의 반일구국회가 제공한 자금 3만 달러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 金九파는 옥관빈 암살사건으로 반일구국회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고 다시 제2의 계획으로 중국인을 매수하여 홍구 방면에서 암살을 결행할 계획인데, 제일 먼저 유인발이 그 대상이라는 것 등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유인발에게 자기네와 함께 金九일당을 처치해 버리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선생은 미국 군인으로 유럽대전에 참가한 경험도 있고, 자동차운전도 잘 하고 권총도 잘 다루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유인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金九와 안공근 일파를 암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당장 비용으로 5,000달러가 필요해요.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하고, 안공근 등의 소재를 파악하여 암살을 결행하는 동시에 자동차번호를 바꾸어야 돼요. 당신들은 이런 자금이 있습니까? 자금이 없다면 그 말은 쓸데없어요』
 
  자정이 넘어서 박창세의 집을 나온 유인발은 그 길로 옥성빈의 집을 찾아갔다. 옥성빈은 유인발을 근처 중국요리점으로 데려갔다. 반 시간 남짓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옥성빈도 박창세와 이수봉이 했던 것처럼 金九 등을 암살할 뜻을 비쳤다. 유인발은 박창세 등과 옥성빈이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을 감지했으나, 모른 척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옥성빈과 헤어졌다.
 
  나흘 뒤인 8월31일 새벽 6시경에 스물네댓 살쯤 되는 청년이 유인발의 집에 뛰어들어 그에게 총을 쏘았다. 총알은 왼쪽 가슴을 관통했으나 유인발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서 목숨은 구했다. 사건현장에서 압수한 탄피를 확인한 결과 이진룡 암살에 사용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52) 의경대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日本領事館은 安恭根 등 6명을 犯人으로 지목
 
  8월 한 달 동안에 세 건의 암살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자 상해한인사회는 공포분위기에 싸였다. 유인발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시 습격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잠자리를 전전하면서 피신했다. 다른 조선인친우회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총영사관이 대응에 나섰다. 일본총영사는 9월2일에 프랑스총영사 대리를 찾아가서 빈발하는 흉폭행위는 프랑스조계 안에 있는 한인독립운동자들의 소행으로 판단되므로 철저히 조사해 줄 것과 우선 암살사건의 원흉으로 인정되는 자들의 체포인도를 요구했다. 프랑스영사 대리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일본총영사는 9월4일에 안공근·엄항섭·박찬익 세 사람을 살인 및 강도피의자로, 박창세·이수봉·이경산 세 사람을 살인 및 살인미수자로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구인장을 프랑스총영사 대리 앞으로 송부했고, 그날로 프랑스총영사의 집행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먼저 거처가 판명된 박창세와 그와 함께 있는 이수봉을 검거하기로 하고 일본영사관 경찰 6명이 프랑스공무국 경찰의 협조를 얻어서 9월6일 오전 6시40분경에 박창세의 집을 덮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53)
 
  일본경찰이 이진룡과 유인발 저격사건의 배후로 교민단 의경대를 지목하고 간부들에 대한 검거에 나서자 정무위원장 송병조를 비롯하여 교민단의 주요 간부들은 상해를 떠났다. 혼자 상해에 남아 있던 이수봉은 10월12일에 프랑스조계 하비로 백제약방에서 체포되었고, 이수봉에 이어 11월26일에는 상해한인청년당 이사장인, 김철의 조카 金晳(김석)도 체포되었다. 이수봉과 김석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교민단 사무소도 폐쇄되었다.54)
 
 
  (3) 韓人특별반 설치하고 9년 만에 家族再會
 
 
  일본경찰의 정보보고서에 金九의 동향에 대한 내용이 보이는 것은 이무렵부터였다. 홍구공원 폭파사건이 있은 지 1년 3, 4개월이나 지난 때였다. 그것은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입교시킬 청년들을 모집하느라고 金九 휘하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한인청년들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周愛寶 데려다가 古物商 행세
 
  9월16일자의 일본총영사관 경찰의 정보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북경에 갔던 밀정이 돌아와서 안공근을 접촉하려고 했으나 안공근은 상해를 떠나고 없어서 金東宇(김동우)에게 연락했다. 그와 동행하여 항주에 가서 金九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동우는 8월20일쯤에 혼자서 항주를 다녀왔다. 김동우는 밀정에게 金九 선생은 최근에 건강이 나빠져 있다고 말하고, 만주에 가서 梁瑞鳳(양서봉)을 만나 그 단체조직의 상황과 앞으로의 연락에 관해 협의하고, 아울러 「만주국」의 시정, 만주 원주민들의 정황 등을 조사해 올 의사가 없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김동우는 『金九 선생은 형에 대해 마음이 좋은 사람이면 앞으로 동지로서 밀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소』라고 말했다. 밀정은 만주행을 결심하고 9월14일 밤에 김동우를 다시 만났다. 김동우는 金九의 건강이 조금 좋아졌다고 말하고, 만주에 가면 어떻게 해서든지 양서봉을 꼭 만나 보고, 또 돌아올 때에 동지 몇 명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다.55)
 
  양서봉이란 1929년 12월에 조선혁명당의 당군으로 조직되어 이무렵에는 남만주 일대에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梁世奉(양세봉)56)을 지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김동우는 물론 이 밀정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9월26일에 열린 상해 일본인들의 관계 각 기관 협의회에서 金九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보고가 있었다. 金九는 9월15일에 安敬根(안경근)과 함께 배편으로 항주를 떠나 남경으로 갔는데, 그의 밀정인 중국인 여자가 우연인 것처럼 함께 배에 올라 남경까지 같이 갔다는 것이었다. 남경에 도착한 金九와 안경근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호텔로 옮겨 이틀을 묵었는데, 그동안에도 그 여자는 같이 있었다. 金九가 정양을 구실로 적당한 병원을 찾자 그 여자는 친구 남편이 경영하는 三民醫院(삼민의원)이라는 병원을 소개했다. 金九는 크게 감사하면서 그 병원으로 옮겼고, 여자는 간호원 경험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서 金九의 신변을 돌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상해영사관 경찰은 9월29일에 밀정을 남경으로 보냈으나, 金九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57)
 
  이러한 일본경찰의 정보보고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문제의 여성은 金九와 함께 선상생활을 하고 있던 주애보였을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金九가 언제 가흥에서 남경으로 옮겨 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金九는 남경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적어 놓았을 뿐이다.
 
  〈나의 남경생활도 점점 위험해졌다. 왜구가 나의 족적이 남경에 있다는 냄새를 맡고 상해에서 암살대를 남경으로 파견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공자묘 근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시찰해 보니 과연 사복 일본경찰 7명이 대오를 지어 순찰하더라고 하였다.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淮淸橋(회청교)에 방을 얻어 동거하였다. 나는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여전히 광동 海南島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경찰이 호구조사를 와도 애보가 먼저 설명하고, 나는 직접 말하는 것을 삼갔다.〉58)
 
  이무렵 국민정부는 남경의 호구조사를 철저히 시행하고 있었다. 金九의 남경생활과 관련하여 소쟁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는 金九 선생이 남경에 거주하는 것만 해도 위험성이 매우 컸습니다. 중국 쪽에서는 일본 浪人들이 각 지방에서 정찰하고 있는 것이 불안하여 호구조사를 엄하게 했던 것입니다. 金九 선생은 중국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호구조사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에 강소성 주석으로 있던 진과부 선생과 상의한 바 강소성 관할하에 있는 江寧實驗室의 현장을 불러 金九 선생과 기타 중요한 사람들의 안치를 분부한 결과 모두 강녕현 경내 향촌에 거주하게 되어 남경시내에 거주하는 것보다 안전했습니다』59)
 
 
  14년 9개월 만에 臨時政府 떠나
 
  1933년도 임시의정원 정기회의는 10월3일에 항주에서 의원 네 사람이 모여 부의장 차이석의 사회로 개원했다. 의장 이동녕이 사임한 뒤에 의원보직이 되지 않아서 후임 의장도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원을 대표해서 김철이 의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인사말을 하고, 국무위원을 겸하고 있는 차이석이 이번 국무위원들의 임무는 전임자들의 임기를 보충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현상유지에 치중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렇게 개원한 임시의정원은 계속 성원이 되지 않아서 해가 바뀌도록 회의를 열지 못했다.
 
  송병조가 교민단장을 사임하고 상해를 떠난 뒤에 사실상의 후임자로 활동하고 있던 차이석은 항주·가흥·남경·鎭江(진강)을 왕래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문일민·김홍서 등을 파견하여 각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60)
 
  임시의정원이 정상화된 데에는 10월4일에 다시 상해로 온 원로 梁起鐸(양기탁)의 영향도 컸다. 일찍이 만주에서 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활동했던 양기탁은 1930년 12월에 상해에 와서, 이듬해 2월에는 安昌浩, 金奎植 등과 함께 남양의 보르네오섬에 한국인 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파사건으로 안창호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강소성 漂陽縣에 있는 樓雲寺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상해지역 각파 독립운동자들의 요청으로 상해에 온 것이었다.
 
  1934년 1월2일에 진강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다시 열렸다.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의원보선을 실시하여 16명을 선거해 보냈으나 이날의 회의에서는 회의에 참석한 9명에 대해서만 자격 심사를 하여 모두 적격자로 판정했다. 이들 9명을 포함한 15명의 의원 참석으로 회의가 성립된 것이었다. 먼저 송병조를 의장으로 선출한 다음, 정무보고, 예산보고, 국무위원 사표 수리 등의 안건을 처리하고, 앞으로 3년 동안 임시정부를 맡아서 일할 국무위원 선거에 들어갔다. 우선 국무위원 수를 11명에서 9명으로 줄이기로 하고 후보자 12명을 전형하여 무기명연기식으로 투표한 결과 송병조, 윤기섭, 조소앙, 양기탁, 김규식, 김철, 조성환, 최동오, 성주식이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무위원 선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동안 본인들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던 金九와 이동녕이 후보자 명단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었다. 李承晩의 이름도 빠졌다. 반면에 항주판공처 습격사건 이후 국무위원직에서 제외되었던 조소앙과 김철이 다시 국무위원에 선출되고, 독립운동의 원로 양기탁이 처음으로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金九·이동녕·엄항섭 세 사람은 임시의정원 의원직에서도 해임되었다.61) 이로써 金九는 1919년 4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한 지 14년 9개월 만에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美國에 外務行署와 財務行署 두기로
 
  1934년 1월20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행정부서장을 호선한 결과 내무장에 조소앙, 외무장에 김규식, 군무장에 윤기섭, 법무장에 최동오, 재무장에 송병조가 선임되었다. 이들은 같은 날 국무위원 아홉 사람의 연명으로 일종의 시정방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례적인 「就職誓辭(취직서사)」를 발표했다.
 
  「취직서사」는 임시정부의 당면한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을 모두 對日 전쟁준비에 집중할 것을 천명했다. 외교정책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우방은 역사적인 관계나 지리적 조건이나 정치체제의 같고 다름에 있지 않고 원수 일본의 침략적 무력과 직접 충돌이 불가피한 모모국으로 상정하여 이들 나라와의 교섭과 협조를 강화해 나가고 또 약소민족과의 연대를 촉진시키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군사정책과 관련해서는, 특수적 직접행동을 고무하고 집단적 무력전쟁을 전개하며 민중운동의 무장적 조직화와 동시에 장교양성과 기술교련, 무기확보 등 구체적인 사업을 최고속도로 추진하여 실전시기로 돌진하게 하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했다.62)
 
  그러나 그러한 「취직서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가는 이때의 임시정부의 재정규모를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1933년도 세입·세출을 보면 하반기 총수입이 양은 663元 4角, 총지출은 양은 525元 9角이었고, 잔액이 135元 9角이었다.63) 이러한 재정규모는 金九나 김원봉이 국민정부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자금에 비하여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국무위원들의 「취직서사」에서 천명한 외교 및 군사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임시정부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外務行署와 財務行署를 설치하기로 했다. 4월2일에 열린 국무회의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에서 마련한 「외무행서규정」과 「재무행서규정」을 심의하여 의결했다. 국무회의는 국무위원 조소앙·최동오와 前 국무위원 이승만·신익희의 네 사람을 외무위원에 선임하는 한편, 미국에 외무행서를 설치하기로 하고 李承晩을 駐美 외무행서 외무위원에 선임했다. 재무행서는 미국의 5개 지역에 설치하기로 했다. 제1, 제2행서는 하와이에, 제3행서는 샌프란시스코에, 제4행서는 로스앤젤레스에, 제5행서는 뉴욕에 두기로 하고, 李正健(이정건: 제1행서)·李元淳(이원순: 제2행서)·白一圭(백일규: 제3행서)·宋憲澍(송헌주: 제4행서)·張德秀(장덕수: 제5행서)를 각각 재무위원에 선임했다. 이러한 규정은 임시정부의 재정수입을 미주동포들의 인구세와 애국의연금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미동포들의 징세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이어 임시정부는 국무위원 연서로 「국내외의 단체와 민중전체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과 재정지원을 호소하는 「재무부포고」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1934년 1월에서 10월까지의 임시정부의 재정지출이 2,300여 원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거의 빚으로 충당되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64)
 
 
  「新韓民報」가 金九체포설 報道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군사훈련을 맡았던 李靑天.
  金九가 낙양에 있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을 개교한 것은 1934년 2월에 이르러서였다. 교관과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시일이 그만큼 걸렸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金九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적어 놓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장소는 낙양분교로 하고 학교발전에 따라 자금을 지원한다는 약속 하에 1기에 군관 100명씩을 양성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동북3성[만주]에 사람을 파견하여 옛 독립군들을 소집하니, 李靑天·李範奭·吳光鮮·金昌煥 등 장교와 그 부하 청년 수십 명, 중국관내 지역의 북경·천진·상해·남경 등지에 있던 청년들을 총집결하였다. 100명을 제1차로 학교에 진학케 하고, 이청천과 이범석은 교관과 영관으로 근무케 하였다.〉65)
 
  金九는 처음에 한인특별반 운영을 金弘壹(김홍일)에게 맡기고자 했다. 이무렵 김홍일은 중국공병학교 부관처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홍일은 자신이 중국정부요인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일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사양했다.66) 그리하여 金九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만주에서 한국독립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던 李靑天(본명 池大亨, 일명 池靑天)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로 했다. 金九가 만주에 사람을 보내어 이청천과 접촉하고 있던 사실과 관련하여,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독립당 군사위원장 김구씨는 최근에 자기가 조직한 극비밀 폭력단체인 독립단을 약 7대로 나누어 만주 방면으로 파견하야 그곳에 있는 동북의용군 특무대대장 리청천씨 일파와 연락하야 전만 요란의 책동을 진행 중인데, 최근에 함경북도 국경지방에서 수비대와 충돌한 군대는 곧 리청천 부하라 한다. 김구씨 일파가 속속 만주 방면으로 잠입한다는 정보에 의하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부는 만주와 조선 방면 경찰 당국에 전보하여 상해 방면으로 들어가는 자를 엄중 취체케 하였다. 金九 부하는 조선을 목적하고 들어간 단원들도 다수에 달하는데, 그들의 행동은 절대 비밀이므로 알기 어려우나, 金九 일파의 만주와 조선에 대한 모종 계획이 있다 하야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는 여러 가지로 활동을 지시하는 동시에 만주와 조선경찰과의 연락에 노력 중이라 하였더라.〉67)
 
  이러한 기사는 아마 金九 쪽에서 보낸 정보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같은 날짜 「新韓民報」가 중국신문의 기사라면서 金九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설이 있다는 「別報」를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홍구공원 폭파사건 이후 金九의 안위에 대해 재미동포들이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滿洲에서 李靑天부대 이동해 와
 
  金九는 이청천을 초빙하기 위해서 서너 차례나 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무렵 이청천은 중국군과 합작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근거지를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했다.68) 이청천은 1930년 7월26일에 길림성 葦河(위하)에서 洪震(홍진), 申肅(신숙), 吳光鮮(오광선) 등과 함께 「韓國獨立黨(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1931년 11월에 독립당의 군대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자신이 총사령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의용군과의 연합작전으로 1932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雙城堡(쌍성보)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북만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1933년 1월에는 鏡泊湖(경박호)전투, 四道河子(사도하자)전투 등을 치르고, 6월 말에서 7월 초에는 大甸子嶺(대전자령)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수송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륙침략이 날로 강화되고, 게다가 이청천은 중국 구국군 대리총사령 吳義成(오의성)과의 알력으로 한동안 구금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69)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된 이청천은 한국독립군의 관내 이동을 결정하고 1933년 전반기에 오광선, 李宇精, 金尙德 등을 남경에 파견했다. 이청천의 밀사로 남경에 온 오광선은 金九를 만나고 만주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관내이동문제를 협의했다. 金九는 『이제야 조국광복의 날이 왔구나』하고 기뻐하면서, 오광선에게 한국독립군의 이동비용으로 4,000원을 지급했다. 오광선은 만주로 가서 이청천에게 金九의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총사령 이청천을 비롯하여 오광선, 趙擎韓, 公震遠, 김창환 등 한국독립군 간부들과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등 50여 명은 중국인 복장으로 위장하고 북경을 거쳐 남경으로 왔다.70)
 
 
  學生 92명으로 韓人특별반 개교
 
洛陽軍官학교 분교사령부 건물 내부(사진 위)와 사령부 안에서 본 군관숙소와 사령부 건물(사진 아래)〔독립기념관,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2002)에서〕.
  만주에서 이동해 온 이들 한국독립군 청년들과, 金九와 그 측근들이 상해·북경·천진 등지에서 모집한 청년들을 합쳐서 1934년 2월에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개교했다.
 
  한인특별반이 개교한 뒤에도 金九는 훈련생 모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에서 주목되는 것은 4월 초순에 안공근을 대동하고 김원봉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찾아간 일이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제2기생 55명이 4월20일에 졸업할 예정이었는데, 이 졸업예정자들을 낙양군관학교의 한인특별반에 입교시키기 위해서였다. 金九는 김원봉의 소개를 받고 학생들에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자신은 지난 30년 동안 「正義」 두 글자를 염두에 두고 고투를 해 왔는데, 최후의 승리와 안락은 머지않아 반드시 있을 일-소의 개전 때에 달성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졸업하면 여러분이 혁명을 위해 끝까지 분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그러고는 학생 일동에게 태극마크가 새겨진 클립이 달린 만연필 한 자루씩을 선물했다. 그리하여 조선혁명간부학교의 2기생 졸업예정자 가운데에서 20명이 낙양군관학교 분교로 파견되었다. 이때의 金九의 조선혁명간부학교 방문은 사전에 김원봉과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곡절 끝에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은 학생 92명으로 교육훈련을 시작했다.71)
 
  낙양군관학교 분교는 낙양시가에서 북쪽으로 약 60리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16대까지는 모두 중국인들이었는데, 한인특별반도 중국인들의 훈련반의 하나인 것처럼 편성한 것이었다. 한인특별반은 그 운영과 교육훈련이 구분되어 있었다. 운영은 金九가 고문자격으로 총괄하고 실무는 안공근, 안경근 등이 맡았다. 운영비는 국민정부에서 金九에게 직접 지급되었다. 대원들에게는 피복 등을 지급하고 봉급으로 한달에 12원씩이 지급되었다. 교육훈련은 총교도관 이청천과 교관 오광선, 이범석, 韓憲(한헌, 일명 宋虎·宋弘萬) 등이 맡았다. 이범석은 학생대장을 겸했다. 흑룡강성 주석 겸 제1군사령관 馬占山부대의 참모로 활동했고 시베리아에서 러시아군에 억류되기도 했던 이범석은, 독일에 갔다가 상해로 돌아와 있었다.
 
  교육은 地形學(지형학)·전술학·병기학·통신학·정치학 등의 학과와, 체육·무술·검술·사격 등으로 각종 포와 기관총을 다루기까지의 術科(일반군사교육)로 나누어 학습을 받았다. 특수한 것은 한인특별반에만 군마 40필을 배치하여 한인훈련생들에게 기마훈련을 시킨 것이었다.72) 이것은 기병학교의 설립을 제의했던 金九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한인특별반 교육내용을 두고 낙양분교 교장 祝紹周(축소주)가 三民主義정치교육을 주장하여 이청천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73) 훈련생들은 대체로 한인교관들이 주도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한인특별반 졸업자들은 몇 년 뒤로 예상되는 대규모의 對日戰이 발발하면 만주와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의 군사시설과 교통·통신기관의 파괴, 중요건물의 폭파, 고관의 암살 등의 공작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본국의 연락을 교란하고 일본을 패전시킴으로써 마침내 만주의 탈환과 한국의 독립을 실현시킨다는 목표였다. 그리고 졸업생 가운데에서 자격 있는 청년들을 선발해서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보병·기병·포병·항공의 각과에 편입시키고 소정의 과정을 마친 졸업자는 중국군장교로 임명하여 한·중합작의 핵심으로 對日戰에 대비하기로 했다.74) 이러한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에 金九가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인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어머니에게 中國에 오도록 연락
 
9년 만에 다시 만난 가족들. 金九의 왼쪽이 큰아들 麟, 오른쪽이 信, 앞에 앉은 이가 郭樂園 여사〔「白凡金九全集(11)」(1999)에서〕.
  金九는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개교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에 고국에 있는 어머니와 두 아들을 다시 중국으로 오게 했다. 이봉창의 동경사건이 터지자 일본경찰이 곽낙원 여사의 집 주변을 포위하고 며칠 동안 감시했고,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파사건이 있고 나서는 감시가 더욱 심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金九는 곽낙원 여사를 중국으로 모셔오기로 결심하고, 〈어머님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에 오셔도 이전과 같이 굶지는 않을 테니, 나오실 수 있으면 오십시오〉하고 연락했다.
 
  곽낙원 여사는 안악경찰서에 가서 출국허가를 신청했다. 너무 늙어서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생전에 두 손자를 제 아비에게 맡기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녀는 일흔여섯이 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안악경찰은 순순히 곽낙원 여사와 두 아들의 출국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집을 처분하고 살림살이도 정리했다. 그녀를 돌보던 김씨네 집안에서는 전별금을 거두어 주었다. 그러나 곽낙원 여사가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서울의 총독부경무국에서 안악으로 형사가 파견되어 그녀를 위협하고 설득했다.
 
  『상해에서 우리 일본경관들이 당신 아들을 체포하려고 해도 찾지 못하는 터에 노인이 말할 수 없이 고생할 것 없소. 상부 명령으로 당신 출국은 허락지 않으니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서 안심하고 지내시오』
 
  곽낙원 여사는 격노했다.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그대네 경관보다 나을 것이다. 언제는 출국을 허가한다기로 집과 살림살이를 다 처분했는데, 이제 와서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니, 남의 나라를 빼앗아 이같이 정치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곽낙원 여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절했다. 일본경찰은 그녀를 김씨네 집에 맡겼다. 이때가 1933년 11월1일이었다.75)
 
  우선 金庸震(김용진)이 곽낙원 여사를 맡아 안악읍 小川里에 있는 이전의 공립학교 분교 교실에서 거처하도록 했다. 그리고 1934년 2월18일에 집안회의를 열고 곽낙원 여사의 생활보장책으로 김용진과 金庸鼎(김용정), 金鴻亮(김홍량) 등 다섯 사람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는 논에서 생산되는 벼 가운데에서 열 섬을 그녀의 식량으로 제공하고, 잡비와 땔감은 김용진의 장남 金元亮(김원량)이 부담하며, 두 아이의 학자금은 金庸濟(김용제)의 장남 金善亮(김선량)과 金九의 옛 제자 禹基範(우기범)이 부담하기로 했다.76) 일본경찰은 수시로 곽낙원 여사의 동정을 살피러 왔다.
 
  『여전히 출국할 뜻이 있으시오?』
 
  『그같이 말썽 많은 출국은 하지 않겠소』
 
  그녀는 목수를 불러 집을 수리하고 살림살이를 새로 준비하는 등 마치 오래 살 것처럼 꾸몄다.77) 일본경찰의 허락을 얻어 출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비밀리에 출국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김씨 집안의 약속도 잘 지켜지지 않아서 살림살이는 주로 우기범과 교회 신도들에게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김선량과 상의했다. 김선량은 1920년에 상해에 유학하는 동안 金九를 자주 만났었고, 1923년에 안악에 돌아온 뒤에는 곽낙원 여사를 가장 열성적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생 김근량과 진남포에서 곡물과 비료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뒤로는 그녀의 살림을 돌보기가 어려운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곽낙원 여사의 중국행을 적극 권했다. 김선량은 그가 중국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朝鮮中央日報」 사장 呂運亨(여운현)과 「朝鮮日報」의 朱耀翰(주요한) 등에게 부탁하여 인천에서 중국으로 떠나는 선편 제공을 부탁해 보기도 하고, 「東亞日報」에도 협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보기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78)
 
 
  上海에서 돌아온 마을 청년에게서 아들 소식 들어
 
  곽낙원 여사가 낙심하고 있을 때에 중국에 갔던 마을 청년 崔昌漢(최창한)이 돌아왔다. 안악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창한은 南京金陵大學 부속중학교에 입학할 뜻을 품고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출국하여 1933년 12월16일에 남경에 도착했으나, 동향인 白樂七(백낙칠)로부터 입학시기가 맞지 않고 남경어를 하지 못하면 입학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듬해 1월8일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최창한은 곽낙원 여사에게 金九의 최근상황을 자세히 알려 주고, 평양의 숭실학교에 재학 중인 金九의 큰아들 金麟(김인·후에 金仁으로 改名)에게도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중국행을 권유했다.79) 김인은 숭실학교 교장 매쿤(George S. McCun: 한국명 尹山溫)의 배려로 입학 때부터 학비면제생으로 3학년까지 다녔으나, 3학년을 끝내고는 학자금 때문에 퇴학할 예정이었다. 김인도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곽낙원 여사는 3월17일에 안악예수교 예배당에서 김선량을 만났다. 김인이 3월19일까지 평양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면서 19일에 출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튿날 곽낙원 여사는 예배당으로 가서 목사 丁一善(정일선)에게 내일 信川온천에 갔다오겠다고 말했고, 정일선은 여비 1원을 보태 주었다. 이날 밤 그녀의 집으로 김선량과 최창한이 와서 함께 탈출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의했다. 최창한이 길안내를 하기로 했다. 김선량은 곽낙원 여사와 최창한이 같이 안악을 떠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위험하다면서 최창한을 먼저 載寧(재령)으로 떠나보냈다. 곽낙원 여사는 김원량에게 맡겨 두었던 집판 돈과 김씨네의 전별금 등 240원을 찾아가지고 이웃 마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문단속도 하지 않은 채 김선량의 집으로 가서 우기범의 어머니와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 5시40분에 열두 살 난 손자 金信을 데리고 안악읍 남단의 인적이 없는 곳에서 김선량을 기다렸다가 같이 신천으로 갔다. 신천에서 6시7분발 열차를 탄 세 사람은 재령에서 최창한과 합류하여 사리원을 거쳐서 오후 11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9시에 김선량이 숭실학교 기숙사로 가서 김인을 일행이 묵은 여관으로 데려왔다. 김인도 침구와 책 등을 그대로 둔 채 가방 하나만 들고 나왔다.
 
  정오쯤에 평양역에 도착했다. 최창한은 김선량에게 자기는 大連(대련)까지 동행하여 일행을 배에 태우고 바로 돌아올 생각인데, 곽낙원 여사가 억지로 상해까지 동행하자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선량은 곽낙원 여사에게 열차 안에서나 신의주 또는 안동현에서 검문을 받을 때에 경우에 따라서는 최창한과 따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면서 지닌 돈 240원 가운데에서 30원을 최창한에게 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창한에게 안동현을 무사히 통과하면 〈송금 바람〉, 관헌에게 발각되면 〈돈 도착하지 않아 곤란〉이라고 타전하고, 대련에 무사히 도착하면 〈돈 받았으니 안심하라〉, 만일 발각되었을 때에는 〈돈 도착하지 않아 곤란〉이라고 타전하라고 말했다.80) 김선량은 평양역에서 일행을 배웅하고 안악으로 돌아갔다.
 
 
  大連에 도착하자 즉시 威海衛로
 
  일행은 3월21일 아침 7시에 대련에 도착했다. 대련은 일본군의 군사기지였으므로 경계가 삼엄했다. 배편이 있는 대로 상해가 아닌 곳으로라도 떠나야 했다. 일행은 동포가 경영하는 여관에서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고, 변성명을 하고 오후 7시에 떠나는 제36 共同丸 편으로 威海衛(위해위)로 떠났다. 상해 직행 선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창한도 같이 떠났다. 떠나면서 김선량에게 〈돈받았으니 안심하라〉는 전보를 쳤다.81)
 
  대련에서 검문을 당했을 때에는 김인이 나서서 위기를 모면했다.
 
  『어린 동생과 늙으신 할머니를 위해위의 친척 집에 맡기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잘 가라면서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82)
 
  3월22일 오후 2시에 위해위에 상륙한 일행은 곧바로 천주교당으로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찾았다. 마침 그곳에서 발동기선 어업을 하고 있는 안정근의 사위 趙世勳(조세훈)의 열네 살 난 딸을 만났다. 곽낙원 여사는 조세훈에게 안정근의 소재를 물었으나 그는 3개월 전에 상해로 떠난 뒤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곽낙원 여사는 안정근을 만나면 아들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행은 조세훈의 안내로 공원 앞에 있는 중국여관에 들어가서 변성명을 하고 쉬었다가, 그날 밤 8시에 상해로 가는 중국 招商局(초상국) 기선 「新豊(신풍)」호에 갑판객으로 승선했다. 갑판객에게는 음식물도 제공되지 않았고, 승객명부에 이름을 기재할 필요도 없었다.83)
 
 
  『지금부터 「너」라 하지 않고 「자네」라고 하겠네』
 
  어렵사리 상해에 도착한 일행은 안공근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가흥에 있는 엄항섭의 집으로 갔다. 기별을 받자마자 金九는 남경에서 곧바로 가흥으로 가서 어머니와 두 아들을 만났다. 9년 만에 더욱 주름이 진 어머니의 얼굴을 대하는 金九는 만감이 교차했다. 큰아들 인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훤칠한 미남으로 성장해 있었다. 金九는 어머니에게서 고국에서 지낸 형편을 자세히 들었다. 고향에서 지냈던 일을 대강 설명하고 나서 곽낙원 여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고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들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 주자는 것일세』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서, 金九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라고 적었다.
 
  金九는 어머니를 남경으로 모셔다가 따로 집을 마련해 드렸다. 김인은 안악의 김선량에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고, 안악 김씨 일문이 베푼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특히 김선량의 가세가 기우는 것이 마음 아프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4월13일에 김선량에게 배달되었다. 곽낙원 여사도 안악읍 예수교회 교우들 앞으로 극진한 편지를 썼다.84) 그리고 김인과 최창한은 곧바로 낙양군관학교 분교의 한인특별반에 입교했다.●
 
 

  1)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51~352쪽 ; 「金九自敍傳 白凡逸志」(親筆 影印本), 1994, 集文堂, 198쪽.
 
  2) ?傑, 「三民主義力行社의 韓國獨立運動에 대한 援助」,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1983, 博英社, 65쪽. 3) 波多野乾一, 「中國國民黨通史」, 1943, 大東出版社, 463~466쪽. 4)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1971, 韓國史料硏究所, 705쪽. 5) 朝鮮總督府警務局, 「軍官學校事件ノ眞相」, 韓洪九·李在華編, 「韓國民族解放運動史資料叢書(3)」, 京沅文化社, 145쪽. 6)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1997, 창작과 비평사, 299쪽. 7) 한상도, 「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 1994, 문학과 지성사, 264~265쪽.
 
  8) 한상도, 앞의 책, 264~265쪽 ; 김영범, 앞의 책, 300쪽. 9) 干國勳, 「朝鮮義烈團員의 軍事敎育(1932~1936)」, 「軍史」(제5호), 1982,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44쪽. 10) 波多野乾一, 앞의 책, 460~463쪽. 11)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1983, 博英社, 150~151쪽. 12) 蕭錚,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 1985년 1월호, 427쪽. 13)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앞의 책, 151쪽 및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1985년 1월호, 425~426쪽. 14)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앞의 책, 162~163쪽 ;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3)」, 1973, 延世大出版部, 268쪽. 15) 蕭錚,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 1985년 1월호, 426쪽.
 
  16)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앞의 책, 151쪽. 17) 지금까지의 연구는 金九가 장개석을 면담한 시점을 1933년 초, 1933년 봄, 1933년 5월, 1933년 8월 등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착오일 것이다. 18) 「백범일지」, 355~356쪽. 19) 蕭錚,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 1985년 1월호, 427쪽. 20)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앞의 책, 152~153쪽 및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 1985년 1월호, 427쪽. 21) 「백범일지」, 356쪽. 22) 蕭錚,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 1985년 1월호, 426쪽.
 
  23)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앞의 책, 152쪽. 24) 蕭錚, 「蔣介石, 金九 그리고 나」, 「月刊朝鮮」 1985년 1월호, 426쪽. 25)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767~768쪽. 26)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967, 原書房, 502쪽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768~769쪽.
 
  2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임시정부사」, 1972,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620쪽. 28)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01쪽. 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005, 국사편찬위원회, 278~279쪽. 3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80쪽. 31)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 臨政篇 Ⅱ」, 1971, 探求堂, 282쪽.
 
  3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 臨政篇 Ⅱ」, 283쪽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7쪽. 3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2쪽. 3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3쪽.
 
  35)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1쪽. 36)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3쪽. 3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헌법·공보」 175쪽. 3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8~780쪽.
 
  39) 孫科志, 「上海韓人社會」, 2001, 한울아카데미, 115쪽. 40) 위의 책, 87~88쪽. 41)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 臨政篇 Ⅱ」, 562쪽. 42) 孫科志, 앞의 책, 84~87쪽. 43) 鄭華岩,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나의 回顧錄」, 1982, 자유문고, 159~160쪽. 4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11) 의열투쟁사자료집」, 1976, 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 834쪽. 45) 朴, 「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성과 그 활동」, 「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探求堂, 953~981쪽 참조. 46) 鄭華岩, 앞의 책, 160~161쪽.
 
  47) 鄭華岩, 위의 책, 162~163쪽. 48)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503~504쪽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80쪽. 49)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11) 의열투쟁사자료집」, 127쪽. 5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81쪽, 825쪽. 51)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85쪽.
 
  52)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782~785쪽. 5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85~786쪽. 5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87~789쪽, 800쪽. 55)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51~452쪽. 56) 張世胤, 「조선혁명군총사령 梁世奉연구」, 「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Ⅱ 韓國民族運動史硏究」, 1997, 나남출판, 619~652쪽 참조.
 
  57)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56~457쪽. 58) 「백범일지」, 360쪽. 59) 蕭錚, 「中國國民黨과 金九」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앞의 책, 155쪽. 6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802쪽.
 
  6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80~283쪽. 6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 헌법·공보」, 177쪽. 6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 임시의정원Ⅰ」, 281쪽. 64) 「독립운동사(4) 임시정부사」, 638쪽. 65) 「백범일지」, 356~357쪽.
 
  66)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297쪽. 67) 「新韓民報」 1932년 9월22일자, 「遠東消息: 전만에 혁명계획으로 비밀활동」. 68) 池憲模, 「靑天將軍의 革命鬪爭史」, 1949, 三星出版社, 157쪽. 69) 張世胤, 「韓國獨立軍의 抗日武裝鬪爭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집, 198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17~374쪽 참조. 70) 池憲模, 앞의 책, 163~168쪽 ;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 2000, 한울아카데미, 150~160쪽.
 
  71) 朝鮮總督府警務局, 「軍官學校事件ノ 眞相」, 213~214쪽, 379~380쪽. 72)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496~497쪽 ; 朝鮮總督府警務局, 「軍官學校事件ノ 眞相」, 382쪽. 73)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217쪽. 74)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十)」, 858~859쪽.
 
  75)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35쪽. 76)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35~536쪽. 77) 「백범일지」, 365~366쪽. 78)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39~540쪽. 79)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22~523쪽, 541쪽.
 
  80)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37~538쪽. 81)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45~550쪽. 82) 「백범일지」, 367쪽. 83)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58~559쪽. 84)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八)」, 545~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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