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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취재] 鄭東泳 통일부 장관 가족의 現代史

위암 투병 중인 鄭東泳 장관의 叔父 鄭鎭燁 증언

백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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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어떤 이유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親日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세대가 가장 슬픈 세대가 아닌가 싶어. 우리말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가 끝나고 나니까, 민족이 左와 右로 갈라져 서로 싸우다 결국 서로 죽이고 죽는 同族相殘이 벌어졌잖아』

● 父親 鄭鎭徹씨는 일제 때 순창郡 구림面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 美 군정下에서 면장 지내. 6ㆍ25 전쟁 때 대한청년단 구림面 단장 맡아
● 鄭장관의 堂叔 鄭鎭浩 선생은 일제 때 抗日운동. 6ㆍ25 때 25세의 나이로 좌익에게 피살
● 鄭장관의 曾祖父는 천석꾼, 祖父는 지역에 소학교 세워 인심 얻어
● 鄭장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교 때까지 叔父 집에 살아
● 叔父, 鄭장관 부친 사망 후 자신의 유산까지 포기하며 도와줘. 현재 22평 임대아파트 거주
인터넷上에 떠도는 鄭장관 부친의 親日의혹
  열린당 辛基南(신기남) 前 의장이 부친의 일제시대 憲兵 근무 전력으로 당 의장에서 물러났다. 그 직후 現 정권의 실세로 꼽히는 鄭東泳(정동영) 통일부 장관 부친의 親日(친일) 의혹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鄭장관의 부친 鄭鎭徹(정진철ㆍ1921~ 1969)씨에 대해 제기된 親日 의혹은 이렇다.
 
  <鄭東泳 장관 아버지 鄭鎭徹은 일제시대 말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식민지 수탈기구였던 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전북 순창군 구림면 소재)의 서기로 5년 동안 근무했다. 적극적 親日행위 여부를 떠나 금융조합에 근무했다는 사실은 親日 행위자에 해당한다. 鄭鎭徹은 광복 이후 면장까지 지냈다>
 
  鄭東泳 장관은 이런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지난 9월5일 전북 전주市에 거주하는 鄭장관의 叔父(숙부) 鄭鎭燁(정진엽ㆍ74)씨를 만났다. 鄭씨는 건립된 지 15년 된 한 임대아파트(22평)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지난 7월 전북大병원으로부터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거동이 불편한 鄭씨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세월 일어났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鄭씨는 『重病환자의 사진을 찍는 게 아니다』며 사진촬영을 거절했다.
 
  鄭씨로부터 東萊(동래) 鄭氏 안산공파인 鄭장관의 中始祖(중시조)부터 일제시대를 살았던 증조부, 조부, 부친까지의 家族史를 들을 수 있었다. 鄭장관 집안 역시 한국 현대사의 激浪(격랑)에 따라 요동쳤다.
 
  ─위암 말기라고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전북大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위암 末期(말기)라고 하더군요. 의사가 수술을 받아도 성공률이 40%라고 해. 이 나이에 수술해서 얼마나 살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퇴원해 버렸지. 위암이라는 걸 알기 전에는 아무 거나 잘 먹었는데 위암이라고 하니 오히려 더 신경이 쓰여. 병을 얻은 셈이야』
 
  ─수술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이 아파트 한 채가 全재산인데 수술은 무슨 수술이야』
 
  ─자녀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지. 딸 둘은 일찍 시집보냈고, 큰아들은 전주에서 조그마한 이동통신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
 
  ─鄭장관의 부친이자 형님인 鄭鎭徹씨에 대해 親日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전에 우리 할아버지 그러니까 東泳이의 증조할아버지(鄭寅平)부터 이야기 하지.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20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나도 집안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
 
  東泳이 증조부는 일제시대에 「천석꾼」으로 불렸어. 순창에서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지주였다고 해. 그분은 손수 땅을 개간해 지주가 되었어. 옷이 해질 때까지 열심히 땅을 일궜다더군. 증조부는 아들 여섯을 뒀어. 돌아가실 때 아들에게 땅을 골고루 나눠주셨어. 우리 아버지(鄭賢謨)가 장남이었어. 東泳이로서는 조부가 되지』
 
 
 
 鄭장관 祖父가 학교 세우고, 부친은 「아기 면장」 지내
 
   ─아들이 여섯이어서 나눠받은 땅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겠습니다.
 
  『東泳이 할아버지가 물려받은 땅이 대략 30마지기(약 6000평) 정도 돼. 일제시대 그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니 작은 지주인 셈이지. 東泳이 할아버지는 내가 열 살 때인 1940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어. 壽命이 짧은 집안인가봐. 東泳이 증조부나 할아버지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평가는 대단했어. 베풀고 사셨던 거지. 東泳이 아버지가 나중에 면장, 도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東泳이 할아버지의 음덕을 입은 거야.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鄭장관의 할아버지가 학교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東泳이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순창郡 구림面에 2년제 간이학교를 세웠어. 해방 후 東泳이 아버지가 면장을 하면서 주변 부지를 확보해 그 학교를 초등학교로 승격시켰지. 그 학교에 東泳이도 다녔어. 초등학교 5년 때 전주로 전학가기 전까지 말이야』
 
  ─鄭장관 아버지 代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3남 3녀야. 장남이 東泳이 아버지인 내 형님이고, 내가 차남,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어. 나하고 東泳이 아버지하고 아홉 살 차이가 나. 東泳이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東泳이 아버지가 할아버지 땅을 물려받아 관리해 왔지. 그런데 東泳이 아버지가 1969년 나이 마흔아홉에 간경화로 일찍 돌아가셨어. 형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자신이 관리해 오던 땅의 일부를 나와 동생에게 물려주셨지』
 
  ─鄭장관 집안이 일제시대 때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鄭장관이 경제적인 궁핍은 겪지 않았겠군요.
 
  『그렇게 봐야지.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땅의 대부분을 사실상 몰수당했어. 국가로부터 토지증권을 받긴 했지만, 그 증권은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휴지조각이 돼 버렸지. 그래서 東泳이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땅이 많지 않았어』
 
  ─鄭장관의 부친이 일제시대 때 금융조합 서기로 일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맞아. 우리 형님이 어려서부터 똑똑했어. 특히 셈에 밝았어. 중학교 졸업 후 당시로서는 명문학교인 남원고보를 졸업했지. 東泳이 아버지는 고교를 졸업하기 전에 실습차 구림面 금융조합에서 일했어.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정식으로 일하게 된 거지. 농협의 前身이 금융조합인데 東泳이 아버지는 예금ㆍ대출 업무를 맡았지』
 
 
 
 
 
 
 『그걸(금융조합 근무) 親日이라고 하면 親日 아닌 사람이 있나』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했다는 사실로 인해 親日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전라북도가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일제시대 당시 금융조합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일본으로 공출하는 농민착취 기관으로 돼 있습니다. 열린당이 국회에 제출한 親日진상규명법에 따르면, 鄭장관의 부친이 금융조합에 근무했다는 사실 자체가 親日反민족행위 혐의자로 조사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지. 그런 것을 親日이라고 얘기하면 대한민국 천지에 과거사로 문제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기준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 모두가 친일파야. 일제시대 때 만주벌판으로 독립운동하러 떠난 사람말고는 조선에 남아 있던 사람은 모두가 친일파야. 그것에 자유로울 사람이 없어』
 
  ─금융조합이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채 사업을 한 것 아닙니까.
 
  『당시 금융조합은 하나의 은행이라고 보면 돼. 착취기관은 동양척식주식회사였어. 고리대금業을 하면서 농민들이 이자를 못 내면 다 몰수해 갔어. 다른 곳은 잘 모르겠지만 東泳이 아버지가 다녔던 금융조합은 금융기관 역할을 했어. 일제시대 때 면서기했다고 해서 모든 면서기를 친일파라고 하면 어떡해? 일반 농민들을 상대로 예금ㆍ출납을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反민족 친일파라고 하면 참으로 할 말이 없네』
 
  ─鄭장관 부친이 금융조합에서 얼마나 근무했습니까.
 
  『東泳이 아버지가 다녔던 금융조합에 서너 사람이 직원으로 일했어. 東泳이 아버지는 해방 직전까지 4~5년 근무했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근무했어. 그러다가 美 군정 시절인 1946년 12월 官選(관선) 면장이 된 거야. 똑똑하니까 당시 순창군수가 면장으로 임명한 거지. 전국에서 가장 어린 면장이었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아기 면장」이라고 불렀지. 東泳이 아버지는 정부 수립 이후 民選(민선) 면장을 또 했어. 그러다가 6ㆍ25를 맞았던 거야』
 
  ─금융조합 서기의 월급은 얼마 정도였습니까.
 
  『면서기보다 형편이 나았지. 해방 이후에 내가 순창 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형님이 월급을 타서 학비에 보태줬어. 고마운 형님이었지. 중학교 졸업 후 나는 순천농고를 다녔어. 형님처럼 나도 당시로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셈이지』
 
  ─鄭장관 부친은 어떤 사람입니까.
 
  『돈을 모르고 산 사람이야. 숫자에는 밝았지만 재산을 탐내지 않았어. 형님이 일제시대 때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면서 농민을 착취했다면 官選ㆍ民選 면장이 되었겠어? 어림 없지. 아직도 그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고향에 살고 있으니 가서 알아봐』
 
  ─그렇게 떳떳하다면 왜 鄭장관 부친의 묘비에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빠져 있습니까.
 
  『금융조합장을 지냈으면 묘비에 새겼겠지. 말단 서기로 근무한 걸 새길 이유가 어디 있어. 면장 지낸 사람이 자기 비석에 면서기 한 걸 안 써넣는 거나 마찬가지지』
 
 
 
 鄭장관 堂叔, 日帝 군수물자 실은 열차 폭파 기도
 
   鄭鎭燁씨는 자신의 형님에 대해 親日의혹이 제기된 데 대해 『어이가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면서 일제시대 당시 순창에서 抗日운동을 했던 자신의 사촌 형으로 화제를 옮겼다.
 
  『東泳이 아버지보다는 어리고 나보다는 손위인 사촌 鄭鎭浩(정진호ㆍ1926~1950)라는 분이 있어. 항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지. 그 형님도 같은 고향(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서 나고 자랐는데 일제시대 말기에 전주농고를 다녔어.
 
  1945년 2월의 일이야. 전주 하숙집에서 친구들과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어. 당시 여수에서 화약 등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가 전주 한벽루 터널을 통과하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던 거야. 그런데 이 사실을 조직원 중 한 명이 일본 헌병대에 密告(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어. 사촌 형님은 擧事(거사)의 주동자로 체포돼 부산 형무소에서 손톱·발톱이 뽑힐 정도로 고문을 당하고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선고 직전 해방이 돼 살아남았던 거야. 東泳이 아버지도 그 사촌 형님을 도와줬어』
 
  ─鄭鎭浩씨는 좌익에게 학살당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던데, 어떻게 죽었습니까.
 
  『사촌 형님(鄭鎭浩)은 정부 수립 후 방위군에 입대해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했어. 그러던 중 6ㆍ25를 맞았지. 당시 고향 순창에는 빨치산들이 기승을 부렸어. 사촌 형님은 1950년 9월 고향에서 좌익들에게 잡혔어. 지방 좌익들이 지주, 면장, 면 서기, 우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갔어.
 
  좌익들이 마을 청년 30여 명을 구림면사무소 창고에 엿가락 엮듯 밧줄로 묶어 놓고 돌로 쳐 죽였어. 처형 직전에 사촌 형님(鄭鎭浩)은 밧줄을 풀고 산으로 도망을 갔어. 그 형님은 힘이 아주 셌거든. 그런데 뒤따라오던 좌익들에게 산 중턱에서 잡힌 거야. 그래서 처형당한 거지. 그때 형님을 죽였던 사람이 바로 초등학교 친구야. 사촌형을 죽였던 친구가 나중에 그 사실을 동네 사람에게 털어놨어. 사촌형님은 돌아가실 때 스물다섯이었고, 세 살, 생후 5개월 된 두 아들을 남겼어』
 
  鄭鎭浩 선생은 2002년 항일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독립유공자로 추서돼 현재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인민위원회 위원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鄭장관 부친
 
  ─일제시대에 금융조합에서 일했고, 美 군정下에서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下에서 면장을 지낸 鄭장관 부친은 어떻게 학살을 면했습니까.
 
  『우리 형님은 당연히 죽었을 사람이지. 좌익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있나. 살아난 데 기막힌 사연이 있어. 사촌형과 마을 젊은이들이 잡혀가던 그날 새벽, 우리 형님 집에 누군가가 찾아왔어. 우리 동네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거야. 張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東泳이 아버지하고는 「형ㆍ아우」하는 사이였어.
 
  張씨는 「형님, 조금 있으면 누가 찾아올 거요.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절대 안 되니 어서 피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얼른 가버렸어. 그 말을 들은 형님은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한 후 바로 산으로 도망을 쳤어.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거야』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張씨라는 사람이 왜 鄭장관 부친에게 몸을 피하라고 귀띔해 준 겁니까.
 
  『張씨 집안과 우리 집안은 선친 때부터 같은 마을에 살았지. 東泳이 아버지랑 그 집 어른이랑 형제처럼 지냈던 거야. 東泳이 아버지가 금융조합에 다닐 때 먹고 살기 힘들었던 張씨를 금융조합 임시직으로 취직을 시켜 줬어. 그 때문에 張씨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어. 이 사람이 해방 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좌파가 된 거야. 전쟁이 터지고 그 사람이 인민위원장이 됐어. 그 사람은 형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어. 張씨가 형님에게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테지. 東泳이도 태어나지 못했을 테고. 면장은 당시 좌익들에게 체포 1순위였거든』
 
  6ㆍ25 전쟁 직후 낙동강 선까지 진군했던 인민군은 국군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충청 이남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들은 우익인사와 양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月刊朝鮮이 최초로 공개한 「6ㆍ25 피살자 명부」에 따르면, 당시 피살자 5만9964명 중 전라남도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했다. 두 번째로 피해자가 많은 전라북도 지역은 5603명이 학살됐다.
 
  지리산 인접지역인 남원, 순창에서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1950년 7~9월 순창에서 학살된 사람은 총 71명이었다. 이들 중 구림面에서 피살된 인원이 27명에 달했다. 鄭장관의 堂叔인 鄭鎭浩 선생도 피살자 명부에 포함돼 있다.
 
  피살자 명부에 의하면, 학살된 이들의 직업은 면장, 면서기, 경찰, 區長(구장), 대한청년단원, 除隊군인, 형무관 등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많았고, 농업 등 일반 양민들도 적지 않았다.
 
  鄭鎭燁씨의 증언에 의하면, 피살자 명부에 기록된 이들 외에도 많은 우익인사ㆍ양민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赤治下에서 살아남은 鄭장관의 부친 鄭鎭徹씨는 국군이 진주하자, 이번에는 부역 혐의자로 조사를 받게 됐다.
 
  『좌익들에게 살해돼 시체로 발견되어야 할 사람이 살아남았으니 의심을 받은 거지. 순창 읍내에 주둔했던 국군 11사단 정보과에서 東泳이 아버지를 잡아간 거야. 軍이 형님을 철저히 조사를 했어. 어떻게 살아남았고, 좌익에 연루된 것은 아닌지를 심문했어. 당시 좌익이다 싶으면 모조리 잡아다가 죽이곤 했지. 전쟁통이니까 적과 아군이 명확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때였어.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의 시대였단 말이야』
 
 
 
 대한청년단 구림面 단장으로 국군에 협력
 
  ─무사히 풀려났습니까.
 
  『東泳이 아버지는 軍의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지만 언제 잡혀갈지 몰라 불안한 처지였지. 그냥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 국군에 협조하기로 했어. 대한청년단 순창郡 구림面 단장을 맡은 것이 그 무렵이었지』
 
  ─鄭장관 부친의 일생만 봐도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정치인들이 어떤 이유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親日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세대가 가장 슬픈 세대가 아닌가 싶어. 우리말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가 끝나고 나니까, 민족이 左와 右로 갈라져 서로 싸우다 결국 서로 죽이고 죽는 同族相殘(동족상잔)이 벌어졌잖아』
 
  鄭鎭燁씨는 鄭장관 부친의 親日행적 논란에 대해 『東泳이 아버지가 親日 반민족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東萊 鄭家 집안을 먹칠하는 일』이라고 흥분했다. 鄭씨는 순창郡 일대에 있는 조상의 묘 40여 基(기)의 위치를 지도上에 상세히 기록해 보존할 정도로 家門에 대한 자부심이 특별했다.
 
  『東萊 鄭家의 中시조인 鄭光佐(정광좌) 선생이 이곳 순창에 터를 잡으셨어.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鄭光弼(정광필)의 동생이지. 鄭光佐 선생의 선산이 있는 곳은 조선 8大 명당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곳이야. 東泳이가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까지 하는 게 어찌보면 祖上 덕이라고 할 수 있어.
 
  東泳이는 우리 집안의 12代 宗孫(종손)이야. 장남의 장남의 장남… 물론 東泳이 위로 형들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다 죽었어. 병으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했지. 셋째가 아주 똑똑했는데 군용 전차에 치어 죽었어. 어째 됐든 東泳이는 우리 집안의 장남이야. 12대 宗孫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남다르지』
 
  鄭씨는 鄭장관을 「집안의 대들보」라며 치켜세우면서도 그에 대한 섭섭함을 내비쳤다. 鄭장관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주에 살고 있던 숙부 鄭씨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鄭씨는 鄭장관의 부친이 사망하자 자신의 유산까지 포기하며 鄭장관 집안 일을 돌봤다고 한다. 이로 인해 鄭씨가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鄭씨가 한때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어려움을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한다.
 
  『어느 날 형님이 전주로 올라와 5학년인 東泳이를 맡아 달라고 하더군. 東泳이가 시골학교에 다니기에는 너무 똑똑했던 거야. 당시 나는 전북도청에서 토목기사로 근무하고 있었어. 월급이라고 해야 뻔한데 형님의 부탁을 받고 東泳이를 받아들였어. 당시 두 칸짜리 전세집에 우리 내외가 한방을 쓰고, 東泳이와 내 자식 넷이 같은 방을 썼지』
 
 
 
 애증이 교차하는 叔姪
 
  ─鄭장관 부친이 재정적으로 도와줬을 것 아닙니까.
 
  『1956년 자유당 시절 형님이 道의원을 한 후 빚을 졌어. 형님은 道의원 시절 道의회 예결위원장을 했지만 돈에 관한 한 깨끗하다는 평을 받았지. 고향에 뽕나무 밭이 조금 있었는데 그 땅은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우리 삼형제 모두 힘들었지』
 
  ─鄭장관 부친은 道의원을 지낸 후 사망 전까지 어떤 일을 했습니까.
 
  『196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형님은 농사만 지었어. 형님은 술을 너무 좋아했는데 결국 간경화로 고생했던 거야. 1969년 전주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희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후 고향으로 모셨지. 그러고 난 후 이틀 만에 돌아가셨어. 형님이 돌아가신 후 집안 형편은 말도 아니었어. 갚아야 할 돈이 꽤 됐던 거야. 일찍 남편을 잃은 東泳이 어머니로서는 살 길이 막막했어.
 
  형님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6개월 동안 순창에 내려가 형님 집을 수습했지.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 고생을 했지. 내가 형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빚 갚으라고 포기했어. 이후 東泳이가 서울大에 들어가면서 고향에 있던 형수는 재산을 팔아 서울로 올라가 아들 뒷바라지를 했던 거야』
 
  ─1996년 鄭장관이 처음 정계에 입문할 당시 叔姪 간 사이가 좋지 않다는 내용의 기사가 지역신문에 보도된 걸로 압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그게 東泳이한테 흠이 될 일은 아니지. 叔姪 간에 사이가 안 좋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집안 재산에 대해 금전적으로 욕심을 가졌더라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고 살았을 거야. 요즘은 내가 이렇게 죽는 게 東泳이한테는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東泳이 출세에 내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거든.
 
  그런데 한 가지만 말해야겠어. 순창 출신 鄭氏 집안에 국회의원, 장관이 나온 게 얼마나 영광이야. 하지만 옛말에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어. 東泳이는 修身齊家하고 난 후 治國해야 돼』
 
  鄭東泳 장관 측은 「부친의 親日 행위說」, 「숙부와의 불화說」에 대해 이런 해명을 했다.
 
  『鄭장관 부친이 일제 때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했지만 주민들의 원성을 산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분이 광복 후 官選ㆍ民選 면장을 한 번씩 하고, 道의원에 당선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鄭장관은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를 세운 할아버지, 면장을 지내면서 인심을 얻은 아버지의 음덕」이라고 얘기한다. 전북 순창 인근에 있는 회문산이 빨치산의 본거지였다. 鄭장관의 부친(鄭鎭徹)은 6·25 전쟁 와중에 좌우 양측에 의해 피의 보복이 진행되는 가운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을 뿐이다.
 
  숙부와의 불화설은 지방 언론에 잘 알려진, 오래된 얘기다. 鄭장관이 1996년 지역에서 첫 출마했을 때, 鄭장관의 작은아버지가 鄭장관의 선거 캠프에서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당에서 내려온 사무처 요원들과 심각하게 감정싸움이 벌어졌다.
 
  성격이 직선적인 鄭장관의 숙부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고, 鄭장관을 비난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집안 재산문제로 鄭장관이 어린 시절에 숙부 집안과 鄭장관 집안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鄭장관이 정치를 안 했으면 알려지지도 않았을 집안 일이다. 鄭장관은 그동안 숙부를 꾸준히 돌봐 드렸고, 올해 초에도 숙부 댁에 세배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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