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에 넘긴 최초의 백인 여자 피의자 辯論記

美軍 장갑차가 한국 여중생 두 명을 치어 죽게 한 사건을 재판한 美軍군사법원은 운전병에게 無罪(무죄)를 선고했다. 그로 인해 여기저기서 反美 촛불시위가 있었던 2002년 말 어느 날이었다. 나의 법률사무소 컴퓨터로 낯선 한 통의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저는 필리핀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오영철이라는 사람입니다. 한 가난한 미국 여자의 딸이 엄청난 고난에 빠져 들었습니다. 지난해 이태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 FBI는 한 여대생을 범인으로 몰아 한국으로 인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나 그 어머니는 절대로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재판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어떻게 된 건지 그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변호료를 지불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초면에 연락을 올립니다. 그녀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6·25 전쟁 후 미국의 구호 물자 덕을 보고 큰 세대다. 미국인 하면 구원의 주체로만 인식하고 컸던 나에게 보상과 자존심 회복의 기회였다. 나는 먼저 인터넷을 통해 그때까지 나온 자료들을 검색했다.

2002년 5월16일자 AP통신發 이런 기사가 있었다.

〈지난해 한국에서 동료 교환학생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켄지 스나이더(20·女·前 마셜大 학생)에 대한 범죄인 인도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리가 오는 6월11일로 예정돼 있다고 한 치안판사 대변인이 14일 밝혔다. 이 대변인은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 스나이더는 헌팅턴에서 모리스 테일러 2세 치안판사 입회下에 열리는 범죄인 인도심리에 출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스나이더는 지난해 3월18일 대구 계명대학에서 연수 중 동료 제이미 린 페니치(21·피츠버그大 재학생)씨를 살해한 뒤 미국으로 도주했다가 지난 2월28일 체포됐다. 스나이더의 어머니 히스 보조니는 『내 딸은 아무 죄도 없으며 무고하다』고 주장한 반면 숨진 제이미의 부모들은 스나이더가 『한국에 인도돼 극형을 선고받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달 24일 美 국무부에 스나이더씨에 대해 범죄인 인도를 공식 요청했다〉

그 다음으로 켄지를 한국 정부로 보내기로 했다는 결정이 보도됐다.

〈美 헌팅턴 연방지법의 모리스 테일러 주니어 판사는 11일 켄지를 재판 관할국인 한국으로 인도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켄지가 FBI요원들의 강압에 못 이겨 자백했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기각했다. 변호인이 내세운 한 심리전문가는 지난 주 스나이더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하는 수사기법을 사용한 수사관들의 강압에 못 이겨 자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봄 마셜 대학을 자퇴한 스나이더는 한국에서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살해 자백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켄지의 한국 인도여부에 관한 최종결정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내리게 된다〉

『9·11 테러 후 미국은 FB I 독재체제』

그 며칠 후 오후 5시쯤 빛 바랜 낡은 머플러를 두른 50代의 뚱뚱한 백인 여자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초조한 표정으로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딸이 용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데도 조사관들은 거짓으로 알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녀가 내게 사정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분은 붉어진 눈시울에서 나온 물방울로 절실함을 대신 표현했다. 인도된 켄지 스나이더의 엄마 히스 부인이었다.

―켄지가 미국으로 돌아와 처음에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일단 살인여부의 정확한 진실에 대해 먼저 알고 싶었다.

『처음 딸을 봤을 때 놀라고 불안해했어요』

―죽은 제이미 사건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던가요.

『죽기 2週 전에 알았는데 남자 친구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제 끝났다고 슬퍼하더래요. 같이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여관방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다음날 새벽에 죽어 있는 걸 같은 방에서 자던 학생이 돌아다니면서 알리더랍니다』

―FBI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의문을 가지고 그녀에게 물었다. 나는 미국 콴티코에 있는 FBI 아카데미에 가서 심포지엄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FBI에 대한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기관에서 잘못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FBI를 많이 믿어 왔어요. 영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딸 켄지 문제를 닥쳐 보니까 전혀 아니었어요. 특히 9·11 사태 이후 미국은 FBI 독재인 나라예요』

―켄지가 정말 살인을 자백했나요.

『조사했던 사람은 전문수사관이 아닙니다. 전혀 믿을 수 없어요. 켄지가 수사받는 도중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했는데도 못 하게 했대요』

서울 용산경찰서 구석의 별관은 낡은 벽돌건물이었다. 나는 강력4반이라는 팻말이 붙은 끝쪽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창문 앞에 놓인 긴 의자에서 백인 여자와 형사들이 자장면을 배달시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백인 여자가 켄지였다. 그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변호사시죠. 전 FBI의 한국지부장입니다. 사건 개요를 잘 모르시죠』

그는 호의가 담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것 같았다.

『아직 전혀 내용을 모릅니다』

변호사는 기소가 되기 전에는 수사기록을 볼 권한이 없다. 그는 나를 데리고 건물 1층 앞으로 내려왔다.

『그러니까 2001년 3월15일쯤 미국 대학생 7명이 이태원으로 와서 여관에 방을 네 개 잡았어요. 이 아이들이 서울관광을 하다가 3월17일 밤 바에 가서 술을 마시게 됐죠. 다른 아이들은 먼저 돌아갔고 켄지와 죽은 제이미만 밤 2시까지 남아 있다가 여관으로 돌아갔어요. 두 사람은 다른 방이었는데 각자의 방에는 다른 학생들이 이미 들어와 자고 있었어요. 죽은 제이미는 켄지보다 더 취한 상태라 켄지가 제이미가 자는 걸 도와주고 자기 방으로 갔다고 해요. 켄지가 돌아와 잔 시각은 밤 3시경이라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제이미 방에서 자던 학생이 일어나 보니까 제이미가 죽어 있더라는 겁니다』

―시신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목뼈가 부러져 있었어요. 누군가 강한 악력으로 목을 비튼 거죠. 그리고 귀도 한쪽이 떨어져 나갔어요. 이마와 한쪽 눈은 누가 강하게 밟았는지 함몰된 상태였구요. 시체는 등을 바닥에 대고 똑바로 천장을 향해 있었죠.

당시 여관주인의 진술은 새벽 3시경 미군같이 머리를 짧게 깎은 백인 남자가 나가는 걸 봤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입은 바지에 피가 묻어 있더래요. 미군이 관련된 사건으로 보고 미군수사기관인 CID가 조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영 범인이 잡히지 않아 영구미제 사건으로 될 뻔했지요』

정치적 고려로 켄지를 한국에 보내

―그런데 어떻게 이 사건이 다시 수사가 됐죠.

『죽은 여대생 부모의 항의가 대단했어요. 범인을 잡아 사형시켜 달라고 독을 품고 달려든 거죠. 그런 민원으로 제가 미국으로 건너가 켄지를 조사했어요. 처음에는 켄지가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죠. 일단 확인은 해 나가자는 입장이었죠. 가장 마지막까지 죽은 제이미와 있던 아이니까요. 美 육군수사관과 거짓말 탐지기 전문요원을 데리고 버지니아로 찾아가 켄지를 만났어요.

우리는 일단 「켄지 너를 용의자로 본다」라고 말했더니 켄지가 몹시 흥분했어요. 그리고는 방을 나가 버리더라구요. 증거도 없고 영장도 없는 상태에서 켄지가 사실 그 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죠. 그런데 얘가 그래도 아직 순진한지 몇 시간 후에 우리에게 돌아왔어요. 그러면서 한 말이 「내가 살인잡니다」라고 자백을 하는 거예요.

예상 외의 결과였죠. 우리들은 바로 그 아이의 집에 가서 수색을 했어요. 켄지가 살인사건 당시 입었던 옷을 수거해서 FBI 실험실로 보냈어요. 그렇지만 범죄지가 미국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은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범죄인 인도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기기로 하고 그걸 근거로 켄지를 감금하고 조사를 계속했어요. 대개는 담당판사가 관할에 관해 판단하기 때문에 서류만 심사하는 게 보통인데 이 사건의 경우는 범죄의 실제내용까지 판사가 꼼꼼히 챙겼어요. 마지막 결론이 한국에 모든 증거가 있으니 거기서 재판을 받는 게 낫겠다고 했어요』

―왜 죽였다고 자백하던가요.

『샤워하라고 술취한 여대생을 욕조에 넣어 줬는데 동성애를 하려고 손을 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발적으로 손목을 뻗었는데 상대방이 목욕탕 안에서 기절했답니다. 그래서 제이미를 들어 방으로 끌고 나와 죽였다는 거죠』

―미국 법정에서 켄지는 뭐라고 말했어요.

『법정에서 켄지는 자기가 수사관들에게 속았다고 진술했어요. 그리고 일종의 최면을 당해 그런 황당한 진술을 했다고 번복했죠. 사실 켄지가 자백을 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어쩔 수 없는 거였는데』

그는 켄지의 순진성을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이면에는 그런 순진성을 이용한 자책감 비슷한 걸 느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FBI가 한국 경찰서에 왜 이렇게 와 계시는 거죠.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美 연방수사국요원 자격으로 와 있는 게 아니고 미국 대사관 소속의 외교관으로서 와 있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외교관으로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스무 살 된 한 여자아이가 무죄라고 발버둥치는데 미국 정부는 그 아이를 잡아서 한국으로 던진 거죠』

이 사건의 핵심 의미를 그는 불쑥 던졌다. 그가 팔짱을 낀 채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던졌다.

『요즈음 한국에서 美軍 장갑차가 여중생을 죽게 한 걸 가지고 촛불시위가 대단한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자국민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해당국가로 보낸다는 입장을 한국인들도 알았으면 합니다. 그게 미국과 우리 대사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목욕탕 물을 조절해 줬다

강력4반의 허형사는 켄지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켄지와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지금부터 변호사인 내게 솔직히 얘기해 봐요.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간을 모르겠는데 하여튼 다섯 명이 바에 갔다가 그 중 세 명이 먼저 여관으로 돌아갔어요. 제이미하고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나왔죠. 바에서 나와서 제이미와 나는 작은 골목길을 지나갔어요. 여관에 도착해서 제이미 방인 103호실로 갔어요. 그 안에서 애널루스가 먼저 자고 있었는데 문은 잠그지 않았더라구요. 제이미는 애널루스가 자고 있으니까 조용하라는 뜻으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어요』

그 정도면 두 명의 여대생은 다 취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제이미가 침대 옆 작은 탁자 아래에다가 신발을 벗고 벽에 기대서 셔츠를 벗었어요. 브래지어와 바지는 입은 채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어요. 그때 내가 따라 들어가 찬물을 틀어서 온도조절을 해줬어요. 제이미가 좀 취한 것 같았거든요.

그때 제이미가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손을 제 어깨에 대고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었어요. 그러면서 저보고 「괜찮니」 하고 물었어요. 그래서 「괜찮다」고 하고 나왔죠. 저는 바로 그 방을 나와 제 방인 104호실로 갔어요. 그 방에는 제 룸메이트 예런쿨먼이 자고 있었어요. 저는 두 개 껴 입었던 셔츠 중 하나를 벗고 물을 한 잔 마셨어요. 그 다음은 룸메이트 옆 벽 쪽으로 가서 누웠어요. 그렇게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전 다시 일어나 룸메이트를 넘어 문을 열고 103호실로 갔어요. 제이미가 제대로 자는지 궁금해서 간 거죠. 그 방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안심하고 돌아와서 잤어요』

욕실 안에서 뭔가 그들만의 의사를 교환한 사실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자기 방으로 갔다가 다시 친구의 방으로 간 것도 자연스럽지는 못했다.

『다음날 아침 8시 노크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103호실 제이미의 룸메이트 애널루스였어요. 화장실에 제이미가 죽어 있더라는 거예요. 일어나서 그 방으로 갔어요. 경찰에 연락하고 102호실에 모두 모여서 조사를 받았어요』

―왜 수사 도중에 미국으로 도망갔어요.

『바로 저 책상 뒤에 앉아 있는 형사가 가도 된다고 그랬어요. 도망 안 갔어요』

켄지는 검은 조끼를 입은 형사를 가리켰다. 그는 1년 전 담당형사였다.

『저 형사가 여권을 돌려줘서 내가 묵었던 대학교 기숙사로 가서 짐을 싸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함께 있었던 아이들을 데리러 대부분 부모들이 오고 저도 엄마가 와서 데려갔어요』

―왜 FBI에 자백을 했죠.

『사실대로 얘기해도 믿지 않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사건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과 행동을 집요하게 물었어요. 그런데 사실대로 말해도 그건 들어주지 않고 내 기억까지 흐트러뜨리는 거 같았어요. 그러면서 계속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라고 했어요』

그녀는 FBI의 불법수사 절차를 항의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불법수사 절차를 재판의 핵심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동시에 한국 경찰은 철저히 적법절차를 따르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의 간단한 대화가 끝났다.

『감옥이 춥고 무서워요』

2003년 1월7일 오전 11시. 쌀쌀한 겨울 아침이었다. 나는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딸 정아를 통역으로 데리고 영등포 구치소로 향했다. 정아보다 한 살 어린 켄지는 검찰로 송치된 후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켄지는 한국의 죄수가 되어 있었다. 겨울인데도 때 묻은 연두색 홑겹의 재소자복과 그 속에 입은 얇은 셔츠 한 벌이 전부였다. 내가 켄지에게 통역인 딸을 통해 물었다.

―감옥생활이 어때요.

『미국 감옥에서도 독방에 있었어요. 음식이나 시설이 좋았는데 여기는 추워요. 그리고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요』

―식사는 어떻게 나오죠.

『밥, 국, 김치하고 그외에 반찬 두 개가 더 나와요. 내가 먹기 힘들어하니까 교도관이 샌드위치를 가져다 줄 때도 있어요』

―기다리는 시간 동안 뭘 하죠.

『교도관이 영어로 된 오 헨리의 단편소설을 넣어 줬어요. 그걸 읽어요』

―미국이 당신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그녀는 최초로 미국이 한국 재판에 넘긴 백인 범죄인이었다.

『왜 이렇게 감정이 북받치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걸 FBI가 계획하고 공작했어요. 전 판사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미국을 이제는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상황을 만들다니요.

『부시 대통령 비서가 이런 걸 모두 계획하고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사인해서 저를 한국으로 보냈어요』

―그게 무슨 의미죠.

『미국은 저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려는 거예요. 저와 미국이 싸우는 게 이 재판의 본질이죠』

나이답지 않은 이상한 소리였다. 그녀가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미국 정부의 속죄양입니다. 범인인 미국 군인을 보호하려고 저를 희생물로 삼았어요. 저는 그런 미국을 이제 싫어합니다』

―왜 자백했습니까.

『FBI가 저의 기억을 흐트러뜨리고 최면을 걸었습니다. 그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어요. 이런 소리 터무니없이 들릴 거예요』

같이 술을 마신 두 명의 美軍

―眞犯(진범)은 누구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태원의 바에서 미국 남자 두 사람을 만나 같이 춤추고 놀았어요. 한 사람은 이름이 「닉」이라고 했어요. 하와이 출신 같은 느낌이 들었죠. 검은 머리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였으니까요. 키는 175cm 정도 될까. 파인애플 무늬가 있는 셔츠에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었죠. 미군이라고 했는데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았어요. 또 한 사람은 「맥」이라고 했어요. 키는 닉과 비슷하고 짧은 군인머리에 청바지를 입었어요. 그리고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왜 스케이트장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이 입는 점퍼를 입고 있었죠.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미군의 간호사라고 했어요』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또 남자 간호사라고 하면 마약을 구하기 쉬운 입장이었다. 동료학생들의 집단 마약흡입 가능성도 있었다.

―클럽에서 만난 미국 군인인 닉과 맥의 태도 중에 이상한 건 없었어요.

『잔이 빌 때마다 술을 따라 주곤 했어요』

내가 별 의심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할 때 통역이었던 딸이 끼어들었다.

『아빠, 켄지가 나보다 한 살 어린데 우리또래 미국 아이들의 습관은 남에게 술을 따라 주지 않아. 각자 자기가 알아서 마셔. 그런데 미군이 잔이 빌 때마다 술을 따라준 건 이상해』

―제이미와 동성애를 했어요.

『그런 일 없습니다. 그건 FBI가 제 머리 속에 넣은 거예요』

―어떻게요.

『단계적으로 넣었어요. 수사관들이 주입시키는 게 처음에는 머리 속에서 검은 구름 덩어리 같다가 다음에는 회색이 됐다가 그 다음에는 하나의 영상이 되고 그림이 됐어요. 제가 못 들었다, 못 봤다 하는데도 그 사람들이 하나하나 확인을 해 가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어떤 사실이 만들어졌어요』

법원에서 사건기록을 복사해 왔다. 매일 새벽 나는 조금씩 기록분석 작업을 했다. 사진이나 감정서 진술조서 한 장 한 장을 재검토하고 다른 각도에서 분석 평가해 보는 것이다. 1350쪽 가량의 방대한 분량의 기록은 실질적으로 여관방에서 나체로 죽어 있는 미국 여대생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켄지는 2003년 1월16일 상해치사죄로 기소됐다. 이태원의 K여관 103호실에서 제이미와 동성애를 나누던 중 격분해서 손으로 때리고 발로 밟아 질식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게 공소사실이었다. 처참하게 죽은 상황을 보면 살인의 고의가 추정되는 사건이었다. 과실로 죽은 상해치사죄와는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먼저 담당경찰관의 진술서와 수사보고서를 토대로 신고를 받은 파출서의 초동대처부터 재구성해 보았다.

2001년 3월18일 오전 8시30분경 이태원 파출소의 M순경은 소內에서 아침을 먹고 현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외국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다급하게 그에게 뛰어왔다.

『우리 친구에게 문제 있습니다. K여관으로 빨리 가야 합니다』

여관은 파출소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잠시 후 M순경은 여관 103호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피범벅이 된 20代 여자가 나체로 바닥에 있었다. 이미 체온이 식어 있었다.

파출소의 Y경장이 뒤이어 현장에 달려왔다. 그는 증거물을 찾는다고 103호실에 들어가 옷가지와 가방들을 들어 침대 위에 놓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찾았다. 그 뒤에 현장감식반이 왔다. 초동수사에서 파출소 경찰관들의 현장 변경이 뒤에 수사 장애가 됐다.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과학수사계 현장감식반이 찍은 사건현장 사진들과 상황들을 기재한 서류들을 근거로 본 사건현장은 이랬다.

여관의 103호실은 2평의 좁은 방으로 좁은 욕실을 갖춘 곳이었다. 벽 아래에는 피가 뿌려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죽은 여대생의 이마와 목에 군화 바닥 같은 자국이 나 있었다. 화장실에는 바지가 팬티와 함께 놓여 있었다.

상처 흔적은 군화 바닥과 비슷해

죽은 여대생의 우측 뺨 광대뼈와 우측 귀 사이에서 가격된 물체의 문양으로 보이는 것이 멍으로 새겨져 있었다. 범인이 신고 있는 구두로 짓밟는 과정에서 피부에 멍자국이 난 것이다. 살해된 여대생은 아래턱 뼈 두 군데가 부러져 있었다. 위턱에서도 중절치가 바깥쪽에서 부러져 있었다. 엄청나게 강한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상처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죽은 시신을 처음 검시했던 의사는 뭔가 둔기에 의해 살해됐다고 추정했다. 죽은 여대생의 시체가 발견된 시각은 오전 8시였다. 그리고 발견 당시 시신의 직장온도는 33.4도. 의사들은 살해된 시각을 직장 체온 측정시간으로부터 5시간 플러스 마이너스 2.8시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은 제이미는 전날 밤 12시 조금 지나서부터 3시 사이에 살해된 것이다. 법의학과 의사들은 죽은 제이미의 얼굴과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멍자국의 모양이 군화 밑바닥과 아주 유사하다고 했다.

죽은 여대생의 혈액과 위 내용물을 조사한 부검 감정서 결과를 보면 특기할 약물 내지 독물성분은 추출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화학분석담당자의 시험결과를 보면 혈중 알코올 농도 0.11%로 그 정도면 약간 취하고 안면에 홍조, 말이 좀 많아지고 기분이 좋은 상태로 침착성이 없어지는 상태라고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액반응은 음성으로 나와 있었다. 생리기간이었고 정액은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강간은 아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부 생물학과 요원들은 살해현장에서 수집한 물건들에 대해 혈액을 감정했다. 죽은 여대생의 혈액형은 B형으로 반응했다. 사건 현장에 흩어진 여러 물건들에 대해 혈액 감정 및 유전자 감정이 이루어졌다. 거의 대부분이 죽은 제이미의 혈액형인 B형이었고 유전자 검사결과도 그녀의 것과 일치했다. 범인의 지문과 혈액 그리고 유전자가 담긴 타액 한 점도 없었다.

2001년 4월2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부 생물학과에서 작성한 유전자 감정결과를 보면 여관 바깥 출입문 손잡이에서 채취한 혈흔의 유전자가 XY(남자)이고 HumT01형7-10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혈흔의 유전자만이 죽은 제이미의 것이 아니었다.

수사당국은 함께 관광을 했던 미국 대학생들의 혈액을 채취해서 마약성분을 조사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마약분석과는 그들의 혈액에서 메스 암페타민, 코카인염 및 모르핀염 성분을 검출하지 못했다.

한방서 잔 여대생: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2001년 3월18일 용산파출소의 최경장은 여관에 함께 투숙했던 미국인들에 대한 조서를 작성했다. 먼저 켄지의 진술을 보니까 내가 들은 것과 거의 일치했다. 다음날인 2001년 3월19일 용산경찰서의 형사과 신경사에게 한 제2회 진술 중 이런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었다.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닉과 춤을 추다가 켄지는 빈센트라는 또 다른 미군과 어깨가 부딪쳤다. 사과를 하면서 서로 현장에서 알게 됐다. 빈센트는 그 자리에서 조금 있다가 켄지 스나이더에게 제안했다.

『제주도에 가는데 함께 가자. 경비는 내가 대고 너는 나와 잠만 자면 된다』

켄지는 그 말이 미군의 섹스요구라고 했다. 그리고 단호히 거부한 내용이 나왔다. 켄지의 진술서를 보면 그가 제이미를 불러 나올 당시 제이미는 조쉬라는 남자와 댄스플로어에서 키스를 나누던 장면이 나왔다. 켄지는 춤추던 제이미를 데리고 함께 바를 나와 소방서 골목으로 해서 숙소로 향했다.

국제식품 앞을 지나갈 무렵 빈센트와 다른 한 명의 남자를 만났다. 서로 『하이』하고 미국식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빈센트는 키가 6피트 1인치에 넓은 어깨를 가진 근육질의 남자였다. 또 긴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군인 스타일의 머리에 미국 남부 사투리였다고 했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 대학 경제학과 4학년인 24세의 여대생 애널루스는 죽은 여대생과 여관방에서 함께 잤다. 그리고 처음 시체를 발견한 당사자였다.

그녀는 새벽 2시에 돌아와 곧바로 잠들었는데 아침 8시경에 일어나 보니 한방을 쓰는 제이미가 죽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잠만 잤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담당 경찰관의 어떤 질문에도 거의 답변을 하지 않았다. 형사는 자다가 일어나 죽은 제이미를 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묻고 있었다. 애널루스는 자다가 일어나 바닥에 누운 제이미를 보고 머리를 손으로 몇 번 흔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피를 보지도 못했다고 또 진술서에서 덧붙이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대답은 『기억이 안 납니다』로 일관했다.

애널루스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철처히 입을 닫았다.

옆방 여대생: 『여자가 얻어맞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난 옆방인 102호에 묵었던 21세의 핀란드인 마리아는 남자친구 토머스와 자고 있었다. 그녀의 진술엔 이런 것이 있었다.

『4시 무렵입니다. 옆방에서 누군가 「아-아」 하고 얻어맞고 아픈 신음 소리를 냈어요.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것같이 「쿵-쿵」 하는 소리가 몇 번 났죠. 또 「레츠 고」라고 미국인 억양으로 말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용산경찰서에서 진술한 제2회 조서를 보면 더 자세한 내용이 나왔다. 그녀가 들은 소리 중에는 『유 아 히어 나우(You are here now)』라는 『그렇지만 넌 여기 있잖아』라는 화가 난 미국인 악센트의 말이 들려오고 그 다음에 「쿵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후 『레츠 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리는 약 5분 동안 계속됐다고 하고 있다. 그녀는 같은 방에 자고 있던 남자친구인 토머스를 흔들어 깨웠다고 했다.

『분명한 건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두들겨맞는구나 생각했어요. 「레츠 고」라고 말한 걸 보면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리는 없고 두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같은 방의 남자 토머스의 진술도 마리아와 일치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피 묻은 낯선 백인 남자 봤다』

52세의 여관 여주인 박 모씨는 사건당일인 2001년 3월18일 새벽 3시30분 여관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평소 밤 11시면 남편이 교대하게 돼 있는데 그날 따라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독촉 전화를 3시30분경에 했다. 여주인 박씨는 카운터에서 나와 남편을 기다렸다. 그때 벽에 걸려 있는 대형거울로 문득 시선이 갔다. 누군가 103호실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작은 체격의 백인 남자였다. 계란형의 얼굴에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밝은색 점퍼 안에 체크무늬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하의는 베이지색 계통의 면바지였고 신발은 황토색 랜드로바 같았다. 그 사람은 문을 닫고는 슬그머니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발목부터 무릎 사이에 단추 크기의 핏자국이 여러 군데 묻어 있었다.

이 결정적인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범죄심리과 검사관은 여관 여주인에게 최면을 걸어 대답을 하게 하는 신문을 했다. 목격자의 인상착의가 최면 상태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왔다. 최면 중에도 그 백인의 오른쪽 바지 하단부의 혈흔을 회상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렇게 의견을 제시했다.

「목격한 인물이 입고 있던 밝은색 계통의 바지에 혈흔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 피검사자가 목격한 전체 내용 중 가장 특출한 자극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확신성이 높았으며 당시 사건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감정의 개입이 전혀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2003년 3월6일 오후 3시경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303호 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켄지의 엄마 히스 부인과 FBI 한국지부장도 앉아 있었다. 재판장이 신분을 확인하고 바로 검사의 신문이 시작됐다.

―3월18일 밤 2시45분 제이미가 있던 103호실에 간 적이 있죠.

『시간은 정확히 모르지만 간 적이 있어요』

―그러면 언제 제이미가 죽은 걸 알았죠.

『아침 8시경 애널루스가 우리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그때 알았어요』

―피고인 켄지는 죽은 제이미가 있던 방에 두 번 갔죠? 처음에는 바에서 놀고 와서 들어갔고 그리고 나서 피고인이 묵던 옆방인 104호실에 왔다가 다시 죽은 제이미가 있던 103호실에 갔죠. 왜 다시 갔죠.

『제이미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갔어요. 103호실의 문을 열었더니 욕탕에서 물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제이미를 봤나요.

『못 봤어요』

―다시 갈 때 신발을 신고 갔나요.

『그냥 맨발로 갔어요』

―피고인 켄지가 당시 신고 있던 신발은 어떤 거죠.

『브라운색 구두였습니다』

경찰은 그녀의 구두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법정에는 FBI가 받은 결정적 증거인 켄지의 자백서가 제출됐다. 그녀 스스로 쓰고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이제 더 많은 것들이 기억이 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 격자무늬셔츠를 벗겨서 방 한쪽 구석에 놓았다. 그녀는 애널루스의 상태를 체크하고 우리가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신발과 셔츠를 벗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가 불을 켰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욕조 옆에 있었다. 그녀는 브래지어와 청바지 그리고 속옷을 벗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으며 우리는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를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배를 따라 키스해 내려갔다. 그녀는 서 있는 상태였고 나는 그녀의 성기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나를 약간 뒤로 밀쳐냈다. 그녀는 자기 팔로 내 몸을 감싸고 내 허리를 애무했다.

『회유와 협박에 의한 자백이었다』

그녀가 욕조에 있었다. 다친 것 같았다. 조용했다.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불편해 보였다. 나는 그녀를 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났다. 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무겁다. 나는 비틀했고 그녀는 넘어졌다. 그녀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바닥에 있는 무엇인가에 발이 걸렸다. 나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서 다시 움직였다. 내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아프고 화가 났다. 나는 그녀가 나를 보는 것이 싫었다.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한쪽 발을 들었다. 무거웠다. 나는 그녀를 몇 번이나 쳤는지 모른다. 몇 대나 그녀를 쳤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녀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쳐다보았다. 재킷을 집어들었다. 재킷인 줄도 몰랐으나 그걸로 그녀의 머리를 덮었고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쳐다보았다. 나는 셔츠를 집어들고 모든 문을 잠갔다. 나는 문을 잠갔다. 나는 그럴 의도는 없었다>

검사의 신문이 끝나고 변호인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고인 켄지는 그런 자백서를 쓴 사실이 있나요.

『있습니다』

―자백한 대로 진짜 그런 행동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썼나요.

그녀는 나의 질문에 뭔가 북받치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은근한 회유와 협박에 의해 그런 자백을 받게 된 경위가 적힌 자료를 법정에 제출했다. 미국에서 켄지를 담당했던 와이스 변호사가 보내온 것이었다.

와이스 변호사가 준 자료 중 녹취서에는 켄지가 어떻게 자백을 하고 진술서를 쓰게 됐는지의 상황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와이스 변호사는 그 내용을 심리학 교수에게 보내 허위자백의 심리적인 요인을 분석해 달라고 했었다. 결론은 최면 등 심리적 압박에 의한 자백이었다는 것이다.

녹취서 중 중요내용은 이렇다.

<1981년 7월8일 켄지는 공군에 있는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 이탈리아의 브린디市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동하는 군생활로 켄지는 여러 나라로 옮기면서 성장했다. 벨기에, 자이레, 방글라데시, 쿠웨이트를 전전하며 크다가 미국의 헌팅턴으로 가서 마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 한국의 계명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갔었고 이태원에서 제이미가 죽은 사건이 발생하자 엄마가 한국으로 와서 켄지를 헌팅턴으로 데려갔었다.

2002년 학기 초 무렵 FBI 요원이라는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FBI가 아직도 죽은 제이미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하면서 정보를 더 얻었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켄지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약속장소인 라마다 인 호텔로비로 들어갔다. 거기 FBI 요원과 CID 소속 남자가 있었다.

조금 후에 그 사람들이 회의실로 올라갈 수 있느냐고 했다. 그들은 켄지만 가기를 제안했다. 켄지는 그 사람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226호실로 갔다. 그 방에 들어갔더니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창문 옆 코너 의자에 켄지를 앉게 했다. 그리고 나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수사관들의 유도 심문

한 수사관이 켄지에게 이렇게 권했다.

『이태원에서 제이미가 죽기 전날인 17일부터 한국시간으로 다음날 저녁까지 있었던 일을 적어 주겠어』

그날 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 진술서를 썼다. 다음날 오후 3시 켄지는 수사관들이 있는 호텔 방으로 갔다. 켄지가 가지고 간 진술서를 수사관들이 검토했다.

―우리들이 미군인 빈센트에 대해 다 조사해 봤는데 그날 밤 빈센트는 거기에 없었는데 어떻게 켄지가 볼 수 있었지.

거짓말을 한다는 힐문조였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할 순 없지만 저는 그날 밤 빈센트를 봤어요』

켄지가 대답했다.

―여관 103호실 안으로 제이미와 같이 들어가 욕실에서 물을 누가 틀었지? 온수였나 냉수였나.

켄지는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제이미의 몸이 여관방의 욕실문으로 반쯤 가려진 정도였다. 어떤 방향으로 문이 열렸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그 여관방을 찍은 비디오 필름을 보여 줄까.

수사관 중 한 사람이 디지털 레코드에 비디오 테이프를 넣고 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여관방의 흐린 장면이 치직거리며 나오기 시작했다.

―저걸 보면서 죽은 제이미가 자기 셔츠를 어디다 벗었는지 바지는 어디 뒀는지 다시 생각해 봐.

한 수사관이 명령조로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사진첩을 가지고 와서 켄지 앞에 펼쳤다. 사건 현장사진들이었다. 그가 펼친 장에는 욕실바닥에 있는 바지와 팬티가 보였다.

―이렇게 욕실 바닥에 옷들이 놓여지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모르겠습니다』

―켄지 너는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욕조에 물을 틀지 않았어. 욕조에는 물이 없었거든.

그들이 협공을 시작했다. 이미 몇 마디 인터뷰하자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제이미를 죽였다는 말이에요』

켄지가 그들을 보면서 되쏘듯 물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아무데도 가지 않고 금방 올게요』

그들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허락했다. 켄지는 잠시 방을 나와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을 살인자로 보는 것 같았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그들이 자신을 범인이라고 진짜 생각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엄마에게 얘기해서 변호사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호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제이미를 죽였다는 겁니까. 변호사를 입회시키고 말해야 하나요』

켄지가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지.

예쁜 여자를 보면 흥분이 되나?

한 수사관이 달래는 표정으로 말했다.

―협조만 해주면 일이 잘 될 수 있게 우리가 해줄 건데. 그리고 편하게 만들어 주지. 몇 개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면 돼.

『알았어요.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켄지는 그들에게 필요한 말만 해주면 모든 게 끝나는 걸로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는 CID 대신 FBI 요원이 질문을 주도했다.

―일을 쉽게 갈래? 아니면 어렵게 갈래? 그리고 이 사건을 행위로 몰아갈 수도 있고 정서로 몰아갈 수도 있는데 정서로 가는 게 더 쉬운 방향이지.

아마도 살인죄의 동기와 고의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살인도 1급 살인, 2급 살인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수사관이 물었다.

―켄지는 같은 여자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지? 여자들이 예쁘게 느껴지지 않아? 그리고 예쁜 여자애들을 보면 흥분이 돼?

『여성으로의 예술성은 느껴지지만 흥분되지는 않아요』

―제이미가 여관 욕실에서 옷을 벗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

『모르겠어요』

―흥분이 느껴지지 않았어?

『그 애가 옷을 벗었을 때 좀 충격이었어요. 난 내 앞에서 여자가 옷을 벗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요』

―이제부터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말해 봐.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바에서 빈센트를 만났을 때 느낌이 어땠고 덫에 걸렸을 때 기분은 어땠는지? 화가 났었는지 무서웠는지.

켄지는 사건이 일어난 날 밤을 더듬어 보려고 애썼다. 잘 되지 않았다. 수사관은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그가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너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우리에게 협조하는 게 아니야. 다시 말해 봐. 얼마 동안 욕조 안에 제이미와 있었어?

『기억이 나질 않아요』

켄지는 겁을 먹었다.

―누가 먼저 욕조 안에서 키스를 했어? 제이미가? 아니면 켄지 네가?

―얼마 동안 키스했지?

질문은 계속됐다.

『그 애가 먼저 했어요』

―그게 다야? 네가 제이미의 가슴에 손을 얹지 않았어?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 애가 버튼을 만졌어요』

―켄지 너도 잘 생각해 봐. 네 머리 속에 어떤 계기만 되돌아오면 모든 게 생각날거야. 도대체 욕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지?

켄지가 울음을 터뜨렸다. 수사관은 달래는 어조로 켄지에게 물었다.

―거기서 왜 그런 일이 있었지? 누가 먼저 만져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제이미가 손으로 내 허리를 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애가 어떻게 했길래 화가 났지.

『내 버튼을 만지는 것 같았어요』

미국 소녀들이 쓰는 은어에 「버튼」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클리토리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사관은 이상한 질문을 했고 더러는 알 수 없는 말을 시켰다. 켄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수사관이 질문하기 전에는 머리 속에 아무런 그림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말에 따라 서서히 구름이 생겼다. 그 구름의 색깔이 점점 밝아지면서 결국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이 생겼다. 켄지는 그걸 수사관에게 말해 주었다.

―제이미가 버튼을 만졌을 때 어땠어.

『그 애를 때렸어요』

―그 아이는 타박상을 입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때렸는지 보여 줘.

『오른손으로 때렸어요』

켄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때리는 흉내를 냈다.

―그때 기분은 어땠어? 화가 났었나? 아니면 슬펐나?

『모르겠어요』

―그 애가 무슨 말을 했지? 그리고 다른 뭐가 있었나? 물 소리는 들었어?

『모르겠어요』

켄지의 혼란스런 상태를 증명하듯 횡설수설하는 말들이 녹취서에 가득했다.

FBI 수사관들은 그들이 의도하는 방향의 말들로 사건들을 이끌고 가는 인상이었다. 켄지는 반은 이해하고 반은 그들의 뜻에 부응하는 심리인 것 같았다. 켄지가 정말 그런 일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맞춰 주려고 그렇게 따라간 것인지 의문이었다.

얼마 전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형사가 지하실에 용의자를 데려다 놓고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어떤 사실을 주입했다. 그 얼마 후 용의자는 혼란된 정신 속에서 마치 자신이 숲에 여자를 데려가 강간을 한 듯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전혀 진범이 아니었다. 인간은 의외로 세뇌되기 쉬운 동물이었다.

―이 사건에 지난 열한 달 동안 매달렸고 잠도 못 잤어. 네가 많은 도움이 됐어. 고마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켄지 너는 좋은 사람이야. 내일 마지막으로 와서 공식진술서를 써 주겠니?

『그럴게요』

그들이 입력해 준 대로 진술서를 쓰다

그녀는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사관들에게 말했던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그것들에는 아직도 빈 구멍들이 많았다. 그녀는 그 틈들을 생각해 내거나 채워서 완성하려고 애썼다. 켄지는 다음날 오전 11시경 그들이 있는 호텔 방으로 다시 찾아갔다.

켄지는 그동안 머리 속에 입력된 그림 같은 사진을 떠올렸고 그걸 순서대로 배열해서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한 수사관이 침대를 책상 삼아 진술서를 쓰고 켄지에게 서명하라고 펜을 주었다. 켄지는 거기에 서명을 했다.

한 수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미국인 관광객은 한국으로 인도되지 않아. 그리고 여기 온 FBI 한국지부장도 너를 한국으로 넘길 수 없어. 단순한 중개인 정도지. 그렇지만 만약 재판을 받는다면 미국보다 한국으로 가는 게 나을 거야. 한국의 매춘부를 살해한 미군이 한국에서 징역 5년 정도만 받았거든. 한국으로 가면 미국에서 살인죄로 재판받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형을 받지.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경우 한국 죄수들보다 좋은 대접을 받아. 한국인은 하루 3달러의 식사인데 미국인은 5달러짜리 특별대접을 받는다고 그래』

노회한 수사관 세 명과 아직 어린 처녀와의 싸움이었다. 치밀한 논리와 비논리의 토론장이었다. 켄지는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몰든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과연 범행의 동기가 동성애인가였다. 켄지는 제이미의 성격을 미국의 구치소를 찾아온 와이스 변호사에게 이렇게 묘사했다.

『제이미는 사건이 일어났던 18일까지 처녀였어요. 그 애는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문을 닫았고 잠잘 때도 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했어요. 그 애는 누군가가 자기를 보는 것을 싫어했어요. 우리가 한번은 빵집 밖에 있었을 때 제이미의 의치 일부가 조금 깨졌어요. 그 애는 항상 그게 떨어질까 봐 걱정했어요』

동성애라는 동기를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그들 수사관들의 밀실수사와 불법행위들을 법정에서 따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켄지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그녀의 한국 인도의 배경을 확인시켰다.

―피고인 켄지는 구치소에서 본 변호인에게 자신을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미국 군인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보낸 속죄양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에 방청석과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미국 변호사가 파월 장관에게 보낸 편지

미국에서 이상한 서류들이 DHL로 전해져 왔다. 첫 번째는 와이스 변호사가 美 국무장관 콜린 파월에게 보낸 서한의 복사본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스펙터 상원의원을 포함한 미국의 관료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해당기관들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스펙터 상원의원과 그 외 압력을 가한 사람들은 죄인을 지명했고 그 사람만이 재판에 회부됐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스나이더가 살해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본인의 자백뿐입니다. 테일러 판사가 주재하는 범죄인 인도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맨스필드 수사관은 살해할 만한 동기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충돌이나 질투의 증거도 없습니다. 또한 강도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 외 켄지 스나이더를 의심할 만한 DNA나 지문 또는 과학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살해 목격자도 없습니다. 자백에 따르면 죽은 제이미의 동성애 요구에 대한 반응이 살해동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레즈비언이었다는 증거나 그 관계를 가졌다는 뚜렷한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수사관의 동기에 대한 추론일 뿐입니다.

수사관들은 성관계나 레즈비언 관계에 대한 생각을 심문에 끌어들였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피투성이였습니다. 살해자는 분명 자신의 구두나 양말, 바지에 혈액이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켄지의 자백에는 시체가 발견됐던 2001년 3월18일 아침에 자신이 전날과 같은 바지를 입고 신발을 신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켄지는 이 옷과 바지를 혈흔검사를 위해 수사관들에게 넘겨 줬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옆방에 묵었던 교환학생들이나 한국인 수사관 누구에게서도 켄지의 옷이나 신발에서 혈흔을 봤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켄지는 예런과 동숙했습니다. 또 애날루스는 죽은 제이미의 방에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애널루스는 그날 켄지와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고, 켄지는 질문을 받고 신발을 검사받을 때까지 경찰서에서 애널루스와 동행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3월18일 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증인들이며 이 두 사람이 켄지의 옷에 피가 묻어 있거나 그녀에 대한 이상한 것이 있으면 목격하기 쉬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술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켄지의 옷에 혈흔이 묻어 있었느냐는 질문조차 받은 일이 없습니다. 테일러 판사가 주재하는 범죄인 인도공판에 버클리 대학의 리처드 교수가 나왔습니다. 그는 거짓자백의 현상과 원인들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그는 자백한 사실이 현실의 조건과 맞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백을 보면 켄지는 어깨 밑에 제이미를 잡고 작은 욕실 밖으로 끌어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도중에 켄지는 제이미를 넘어뜨리면서 그녀 자신도 욕실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맨스필드 수사관은 증인으로 나와 죽은 제이미의 등 부분에 깊은 타박상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내리친 높이가 2와 2분의1 내지 3피트 높이였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맨스필드 증인은 죽은 제이미의 사체로부터 약간의 타액이 발견됐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켄지가 그게 자신의 타액이라고 자백했다고 인도공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법의학적 증명이 있어야 자백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한국 법원으로 하여금 켄지를 판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증거를 수집해야 합니다. 또 네덜란드와 핀란드의 증인들의 증언을 얻어야 합니다. 동시에 켄지 스나이더를 한국에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필요한 방어자료들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미국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유죄판결을 받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묘한 의미가 담긴 자료였다. 증거도 없이 한국으로 내던져졌다는 얘기였다. 변호사가 왜 굳이 콜린 파월 美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내야 했을까. 미국을 위한 희생양이라는 켄지의 말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미국이 꽃놀이 패 던진 거네』

와이스 변호사가 입수해서 내게 보내 준 중요문서가 하나 더 있었다. FBI의 내부 보고서였다. 2002년 2월5일 켄지를 조사한 요원이 2002년 2월7일 FBI 본부에 보낸 것이었다. 그 중요내용은 이랬다.

<처음 수사는 미군과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니콜비스 바의 손님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美 범죄수사대는 소파협정 아래 한국 경찰을 초청해서 수사를 추진했다. 군 수사대와 한국 경찰의 엄청난 수사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미결로 남아 있었다. 언론과 FBI 피터스버그 본부와 국무성 및 미국 상원의원들 앞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서 희생자의 가족은 압력을 계속했다. 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 스펙터는 한국 방문기간 중 김대중 대통령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이미 수사는 상부에서 어떤 윤곽이 형성되어 하명된 식일 수도 있었다. 그 이후로는 켄지가 자백했다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두 건의 문서를 통해 이 사건 수사의 배경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경찰이 아닌 미국 수사요원들이 주체가 되어 켄지를 지목했고 자백을 얻어 냈다. 미국은 자백서만을 만들어 켄지를 한국으로 인도했다. 그 형식도 한국 측이 요청한 형식으로 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될 가능성을 알고 미국은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美 국내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민원을 동시에 해결하고 게다가 한국 측이 요청하는 형식으로 해서 한국의 사법주권을 존중하는 듯한 정치적 목적, 즉 反美감정을 해소하는 일석 사조의 효과라는 생각이었다. 이 사건을 예민하게 지켜본 한 기자는 이렇게 내뱉었다.

『쳇, 미국이 꽃놀이 패를 던진 거네』

2003년 4월3일 오후 4시30분 서부지원 303호 법정의 증인석에 FBI 한국지부장이 나와 앉았다. 단정한 양복을 입은 그는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먼저 검사의 신문이 시작됐다.

―이 사건으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사실대로 말하고 서명날인했죠?

『그렇습니다』

이 한마디의 답변으로 그가 경찰이나 검찰에서 진술한 모든 것이 법정증언으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법정증언과 경찰관 앞에서의 진술은 법상 그 평가가 달랐다. 용산경찰서 형사과에서 한 그의 진술내용은 이랬다.

그는 2001년 5월경 한국주재 미국대사로부터 이태원 미국 여대생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지원을 하라는 명령을 받게 됐다. 죽은 제이미의 부모가 엄중 수사를 요구하는 진정이 여러 차례 있었고 美 국무성에서도 대사관에 한국 경찰과 CID 수사를 지원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의 주요업무는 한국 경찰과 CID 간의 통역이었다.

그 다음으로 켄지로부터 자백을 얻어 낸 과정이 언급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이 사건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끌어 간 지휘자로 짐작했다. 그는 한국 내의 FBI 책임자였다. 다만 한국의 주권문제를 고려해서 외형적으로 겸손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그의 역할과 임무는 복잡성을 띠고 있을 것이었다. 난 먼저 자격을 가지고 시비했다. 한국의 증거법을 잘 이용하면 그는 검사도 사법경찰관도 아닌 정체가 모호한 개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한 개인이 여대생을 호텔 밀실에 잡아 놓고 자백을 받고 진술서를 받은 모습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물었다.

―증인은 어떤 자격으로 이 사건에 임했나요?

『용산경찰서의 요청으로 美 연방수사국 요원으로 켄지에게 인터뷰를 했죠』

묘한 대답이었다. 한국의 경찰권, 미국의 경찰권을 모두 언급하고 동시에 인터뷰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자격시비를 빠져나가려는 기교적인 말 같았다.

―용산경찰서의 누가 요청을 했죠?

『황과장이 켄지를 자세히 인터뷰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국 경찰에서 법상 대외적인 대표자격은 서장이었다.

『駐韓 미국 부대사가 수사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서류로 했나요 아니면 구두로 요청했나요?

한국 경찰은 평범한 조회 하나에도 서류로 만들어 근거를 남기는 게 관례였다.

『말로 부탁했습니다』

그의 말은 근거가 희미하다는 얘기였다.

―인터뷰와 조사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나요?

조사는 체포영장을 필요로 하고 미란다 법칙 등 엄격한 법률이 적용됐다.

『특별한 차이는 없습니다』

그가 불쑥 내뱉었다.

―FBI 내부에는 여러 부서가 있는데 증인은 어디 소속입니까?

『테러, 국가안보, 조직범죄, 마약수사를 했습니다』

―증인은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대사관 내에서 수사기능도 수행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FBI지만 이 사건에서 수사자격이 없으면서 수사했다는 자백이 됐다.

―그러면 한국 내에서 수사권을 가지고 있나요?

『없습니다』

―FBI가 켄지에 대해 수사권을 가지고 있나요? 있다면 헌팅턴市를 관할하는 지부에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경찰서마다 관할싸움이 있듯이 본부와 전국을 지부로 나눈 FBI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가 굳이 헌팅턴市로 CID군 수사관을 데리고 가서 조사를 한 게 의문이었다. 그는 법적근거나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다.

―증인은 이 사건 수사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았죠?

『주한미국 부대사 에븐스 윌비어가 한국의 수사를 통역으로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그의 일은 통역이나 아니면 수사 이외의 무슨 일이었다. 그리고 주체는 한국 경찰이어야 했다.

―증인이 군 수사관인 맨스필드와 함께 헌팅턴市로 간 이유는 뭡니까?

군 수사요원인 맨스필드의 수사대상은 미군이었다. 민간인 켄지가 아니었다.

『맨스필드는 한국 경찰의 수사를 돕기 위해 간 겁니다』

결국 그나 맨스필드나 다 한국 경찰의 보조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한국 경찰에서는 그러는 경우가 없다. 직접 경찰관들이 가야 했다. 아니면 미국에 파견된 검사의 도움이라도 받아 조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들이 실제로 다 해놓고 法上 옷만 한국의 것을 슬쩍 갈아 입히려는 행동 같았다.

―그렇다면 맨스필드는 부탁으로 간 겁니까 명령으로 간 겁니까?

맨스필드의 출장 근거를 따졌다. 상관의 명령이 아니라면 문제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CID 총책임자의 명령을 받고 간 것으로 압니다』

미국의 고위간부 사이에 이미 업무협조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증인은 켄지를 처음 만났을 때 FBI 요원인 디비티스도 동행했지요?

『그렇습니다』

―알아보니까 디비티스는 켄지가 사는 웨스트버지니아州 헌팅턴과는 관계없는 오하이오州 소속이던데 왜 다른 지역의 FBI가 동원됐나요?

『제가 거짓말 탐지기요원을 요청했는데 그 부근에 없어서 오하이오州에서 거짓말탐지기 요원인 디비티스가 오게 된 겁니다』

범행동기가 사건에 추론됐다

나는 얼마 전에 「살인사건의 마법사」라는 FBI 간부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FBI 내부에는 심리전문가들이 있어 범죄현장만 보면 범인이 흑인이냐 백인이냐 나이는 얼마쯤인가 범행의 동기는 무엇인가를 미리 추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였다. 최고참 전문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쓴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도 먼저 동성애가 원인일 것이라는 FBI 본부의 사전예측이 있었다.

―증인은 FBI 본부 살인수사 전문가들에게 미리 의견을 받은 적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범죄현장을 보고 범인의 연령, 동기 등을 점쟁이같이 추론하는 범죄심리 전문가라고 하는데 맞나요?

『그렇습니다』

―증인은 그 사람들로부터 동성애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어떤 것이 일어나면 그런 범행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경찰의 조서에는 그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심리전문가에게 질문한 것은 만일 켄지를 살인자로 본다면 현장의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동성연애자이어야만 하느냐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범행동기가 일단 사전에 추론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왜 변호사의 도움을 못 받게 했는가?

―증인 일행은 호텔방에서 켄지에게 변호사를 선임해서 그 참여下에 정당하게 조사받을 수 있는 권리를 고지하지 않았죠?

『고지하지 않은 게 사실이고 그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 켄지는 자신이 변호사를 선임하겠다고 했는데 못 하게 했다면서요?

『사실이 아닙니다. 켄지가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말과 변호사를 선임해야 되는지를 수사관에게 묻는 것이 다른데 켄지가 「내가 변호사를 지금 필요로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만약 변호사를 원한다면 우리가 인터뷰를 계속할 수 없다」라고 얘기했지만 피고인 켄지는 변호사를 원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묘하게 핵심을 피해 미끄러지는 대답이었다. 켄지의 법률지식 부족을 이용하고 형식논리에 치우친 대답이었다.

―증인은 켄지에게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걸 말해 줬나요?

『진술을 안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살인을 했다고 자백하던가요?

『예』

―당시 증인 일행은 강제수사를 할 수 있는 자격도 없고 영장도 없었지요?

『없었습니다』

―켄지가 자백을 하지 않고 호텔방을 나간다면 잡을 수도 없었지요?

『사실입니다』

―호텔방을 켄지가 나가는 걸 막는다면 그거야말로 불법체포 내지 감금이죠?

『그렇습니다』

―만약 켄지가 엄마나 변호사에게 얘기했더라면 조사는 불가능했죠?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켄지는 호텔방으로 스스로 왔지요?

『그랬습니다』

―켄지가 호텔방으로 일부러 되돌아와서 증인일행에게 「나를 살인자로 보느냐」고 여러 차례 따진 사실을 알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그건 켄지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행동이고 부인의 의사표시가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디비티스 요원이 여러 시간 자백을 유도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살인을 했으면 고백하라고 달래고 설득했습니다』

미국인끼리의 사건을 한국에 보낸 이유는?

―켄지는 FBI가 자기의 머리 속에 동성애를 입력시켰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켄지가 자백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켄지는 못 들었다, 못 봤다고 하는데도 디비티스 그 사람이 말하면 순차적으로 하나의 그림이 되고 영상이 되더라고 당시의 느낌을 얘기하는데 어떻습니까?

『어떻게 대답할 수가 없네요』

―미국인이 미국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인데 굳이 한국으로 이송한 이유는 뭔가요?

『한국에서 살인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법에 따른 겁니다』

―그렇다면 아랍이나 아프리카에서 미국인들 사이에 범죄가 발생하면 모두를 그 나라로 보냅니까?

도둑질을 하면 손을 자르기도 한다는 종교적 성향이 강한 후진국으로 미국민을 보낼 것 같지 않았다.

『당연히 아랍이나 아프리카로 보내 재판을 받게 합니다』

―켄지 엄마인 히스 부인이 사건 직후 데리러 와서 켄지를 봤는데 사건 당일 입은 옷이나 신발을 빤 흔적이 없었다는데 증인은 사전에 국제적인 협조를 통해 그런 증거물들을 확보했었나요?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저도 안타깝습니다』

―죽은 제이미와 같은 방에서 자던 애널루스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계속 완강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에 대해 의심을 가져 봤나요?

『의심을 많이 했습니다』

―여관 102호에 있던 핀란드인 마리아와 토머스가 한밤중에 여자가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낸 것과 쿵쿵 바닥을 구른 소리의 정체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했었죠?

『수사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핀란드인들은 살해장소인 103호실에서 「레츠 고」라는 남자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수사결론을 내렸나요?

『수사방향이 남자가 아닌가 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네덜란드인 예런 쿨먼은 104호실에서 피고인 켄지와 함께 묵었던 남학생입니다. 그가 여학생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 채 아침까지 있었다는 진술을 어떻게 분석했죠?

『그런 말을 했다면 그냥 수사관이 받아 들여야죠. 제가 말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제이미의 등에 깊은 타박상이 있던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그런 타박상이 나기 위해서는 내리친 높이가 2.5피트 내지 3피트라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해 법의학적 검사를 받은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 타박상에 대한 감정은 피고인 켄지의 자백이 진실한 것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중요한 사항이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한국 경찰이 主體고 FBI는 도왔을 뿐

―미국의 스펙터 상원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건의 수사를 부탁했죠?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상부에서는 한국 경찰이 美 연방수사국을 적극지원하라고 명령을 한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美 연방수사국이 한국 경찰을 도와준 겁니다』

―당시의 상황을 녹화나 녹음을 했나요?

『우리들은 인터뷰를 할 때 녹화나 녹음은 하지 않습니다』

변호인의 증인에 대한 신문이 끝났다. 이번엔 검사가 나섰다.

―증인은 사건 후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켄지와 같은 방을 사용했던 한국 학생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지요?

『2002년 12월경 무렵 켄지를 의심했습니다. 경찰과 회의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켄지가 사건 직후 3일 동안 기숙사에서 같이 있었던 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켄지가 그 학생에게 뭐라고 했다던 가요?

『귀국할 때까지 거의 3일간을 계속해서 켄지가 흐느껴 울더라고 하면서 「미국애가 어떻게 그렇게 슬퍼할 수 있느냐. 자기 엄마가 죽어도 그렇게 울 수 있을까」라고 했습니다』

증언이 끝났다. 나는 그와의 대화 중 많은 거리가 있는 걸 느꼈다. 미국에서 중학교 부터 공부하고 FBI가 됐다는 그는 미국 재판에 익숙하고 사고방식도 다른 것 같았다. 한국법의 증거법 조문을 이용해 자격시비를 하는 내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엉뚱한 대답들은 거기서 오는 것이다. 증언이 끝날 무렵 그의 대답들은 일부러 피하거나 기교를 부리는 느낌은 사라졌다. 그는 정직하고 켄지를 동정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맨스필드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전출명령을 받아 미국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럼 법정에 증인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비행기 요금하고 숙박비 같은 출장비만 주면 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법원에서는 맨스필드에 대한 소환장을 어디로 보내면 되죠?

『주한 美대사관으로 보내 주십시오』

검찰 측 다음 증인으로 맨스필드가 결정되었다.

단순함과 강인함을 함께 갖춘 켄지

2003년 5월22일 오후 2시경. 지하철 애오개역에서 내린 나는 서부지원을 향해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나는 켄지의 자백에 대해 생각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나는 정신과 전문의에게 그 증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신과 전문의는 많은 피의자들의 경우 상대방이 수사관일 때 자신에게 위협적이면 그가 원하는 바에 따라 상황을 맞추어 얘기를 지어 내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조직폭력배라든가 수사관들에게 겁을 먹으면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맞추어 진술하는 게 보통인간에게서 얼마든지 발견된다는 것이다.

켄지는 극단적인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단순하고 정직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인한 면이었다. 켄지의 엄마인 히스 부인은 내게 켄지에 대해 여러 가지 글을 보내 주었다. 그 중에는 미국 감옥 안에 있을 때의 얘기도 들어 있었다. 나이 많은 여자 하나가 유독 켄지를 괴롭혔다. 어느 날 식당에서였다. 켄지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싶어?』라고 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켄지를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가 버린 뒤로 다시는 켄지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미국 감옥에서의 일이다. 감방에 있는 사람 중 한 여자가 아파서 아침식사를 들지 못했다. 옆의 여자 죄수가 얼른 그 음식접시를 집어 들었다. 다른 여자가 그 접시 든 손을 잡고 싸움이 벌어졌다. 켄지는 그들을 단숨에 평정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독방에 있는 벌을 받았다고 했다. 반면 그녀는 철저히 정직했다. 재판 도중에 자신에게 불리한 말들도 그대로 인정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단순한 모습이었다. 미국 교도소의 간수들은 감옥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그 중 켄지에게 진실을 물어야 한다는 평가를 했다고 한다.

검사는 동성애의 거부에서 비롯된 살인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에게 어린 시절 경험을 얘기하게 했다. 그런 공격적인 질문의 취지를 알면서도 켄지는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얘기했었다. 그녀는 호텔방의 수사관들 앞에서 한 자백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의 요구에 맞춰 준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는 계속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문이 활짝 열린 법정 앞은 적막했다. 몇 시간 전부터 와 있었는지 켄지의 엄마 히스 부인이 법정 문 앞바닥에 털퍼덕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자식에 대한 강한 집착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변호사인 나를 보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군 수사관이 민간 사건을 다룰 수 있나?

재판이 시작됐다. 각진 얼굴을 가진 강인해 보이는 30代 중반의 CID 요원 맨스필드가 증언석에 올라와 앉았다. 검사가 묻기 시작했다.

―켄지가 조사를 받을 때 당황했습니까?

『어떤 행동보다는 설명을 못 하는 것에 대해 당황했습니다』

―켄지는 자백한 다음날도 호텔에 왔었죠?

『호텔에 왔을 때 머리에 물기가 젖은 상태였는데 몇 달 만에 잠을 잘 잤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백을 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다는 취지였다. 자백의 신빙성을 알리기 위한 대답이었다. 다음은 변호인인 나의 신문차례였다.

―이 살인사건의 수사 주체는 누구인가요?

그의 무자격을 시비하기 위한 첫 질문이었다.

『한국 경찰입니다』

―그렇다면 켄지에게 조서를 받는 것도 한국 경찰관이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켄지가 미국에 있기 때문에 제가 수사하고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자격요건보다는 실질적인 필요성을 언급했다.

―증인은 군 수사관이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법상 민간인인 켄지를 조사할 수 있나요?

『있습니다. 저는 스페셜에이전트로 할 수 있습니다』

―같이 헌팅턴市로 간 FBI 한국지부장은 어떤 자격으로 켄지를 호텔방에서 대했나요? 외교관인가요? 수사관으로서 인가요?

『제가 느끼기로는 그는 한국 경찰관을 협조하는 수사관이었고 또 켄지를 대할 때 외교관 이상의 자격으로 대했습니다』

FBI 지부장은 자신이 외교관이지 수사기능은 없다고 했었다. 말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한국 경찰의 협조자라고 하는 말은 공통됐다.

―만약 중요한 사항이 나오면 한국 경찰과 상의를 하기로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켄지가 자백할 때 한국 경찰에 연락을 했나요?

『저는 한국말을 몰라 못 했고 같이 간 FBI 한국지부장이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가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협조나 보고는 수사기록이나 증거상 흔적이 없었다.

인터뷰와 조사의 차이

―켄지를 처음 불러 조사할 때 왜 정식의 조사실이 아니고 굳이 호텔방을 선택했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켄지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나는 계속 형식과 절차를 따지고 그는 그 저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켄지를 만나 처음에 인터뷰하자고 했죠?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인터뷰와 조사의 차이는 뭡니까?

『인터뷰는 그 사람을 만나 뭐라고 하는지 얘기를 듣는 거고, 조사는 예를 들면 켄지가 제이미를 죽였다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 들어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할 때는 조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조사가 시작된 시점은 자술서를 받은 2002년 2월5일 18시경부터입니다』

―증인은 죽은 제이미와 같은 방에서 자던 애널루스라는 사람에게 혐의를 둔 적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애널루스가 그날 밤 계속 잠을 잤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확실히 잤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미군 21CID에서 작성한 조서를 보면 애널루스는 아침에 일어나 죽은 제이미에게서 피를 보지 못했다는 진술을 한 부분이 나오는데 알고 있나요?

『그렇게 진술했는지는 모르고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번역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애널루스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등 여러 가지 비논리적인 거짓말을 했는데 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나요?

『첫날이나 다음날까지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며칠 후에는 믿었어요』

―그러면 옆방인 102호실에 있었던 마리아가 새벽녘 여자가 얻어맞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어떤 수사결론을 내렸나요?

『그렇게 들은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제이미가 죽은 103호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고 하는데 수사관으로서 그 사실을 어떻게 분석했죠?

『그런 말을 듣기는 했는데 옆방이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2층이나 복도에서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범인이 남자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나요?

『남자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켄지에 대해서만 강하게 혐의를 두고 조사한 이유는요?

『켄지의 자술서에서 너무 많은 모순점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직접 한 여자가 폭행을 당하면서 신음하는 소리와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옆방 사람들의 진술보다 켄지를 더 의심했다는 사유가 석연치 않았다.

―켄지로부터 받은 범행 당시 입었던 옷에서 죽은 제이미의 혈액이나 DNA를 발견했나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인 신문이 끝났다. 아마추어 통역을 통해 질문한다는 것이 불편했다. 즉시 묻고 그 뉘앙스까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해야 하는데 그게 토막토막 중단됐다. 변호인의 질문취지가 제대로 전달되는지도 의문이었다. 맨스필드 역시 질문의 핵심을 놓치고 동문서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률용어를 공부한 전문통역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형사소송법 제312조

사무실 창 밖에서는 하루 종일 이른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형사소송법교과서를 책장에서 꺼냈다. 증거법에 대해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은 경찰관이 작성한 조서와 검사가 작성한 조서의 자격에 대해 엄격한 구별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 범인으로부터 자백을 받은 조서를 받았다고 하자. 그게 증거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으려면 법정에서 조서를 받았던 당사자가 그 내용이 모두 맞는다고 인정해야만 증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안의 것이 어떤 가치가 있더라도 판사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게 형사소송법 제312조의 취지였다.

한번은 주심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진술서나 외국 수사기관의 조서에 대한 의견이 어떠십니까』

주심판사는 변호사의 의견을 보다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었다.

『외국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나 그 사람들이 받은 진술서에 대한 논문이나 자료를 더 공부해야 하는데 아직 못 했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나는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FBI나 미군 수사기관인 CID가 작성한 조서나 수사보고서를 어떤 자격으로 보아야 할지 아직 선례가 없었다. 켄지의 자백을 적은 진술서에 대해서도 어떤 법적 취급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판사도 솔직한 대답을 했다. 재판부도 외국 수사기관이 작성한 서류들에 대해 어떤 취급을 해야 할지 명확히 결론이 서지 않은 듯했다. 판사가 덧붙였다.

『하여튼 내용은 부인하시는 취지시죠』

형식적인 증거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뜻이 그 말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서류로 다시 써 내겠습니다』

나는 반갑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실 나는 딜레마에 빠졌었다. 변호사로서는 당연히 내용을 부인해서 증거로서의 자격이 없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수사기록과 관련자료를 읽으면서 자백의 상당부분은 진실일 수 있다는 의심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용을 단숨에 부인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의」란 피해자의 입장도 한번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재판장은 형식적인 증거능력에 대한 것인데 왜 자꾸만 틀리게 써 내느냐고 나를 질타하기도 했다. 진실이냐 허위이냐에 대한 내용판단을 사실은 재판장에게 넘기고 싶었다. 나는 무자격자의 밀실수사에 브레이크를 걸려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의사를 감지했다. 미국 정부에 대해 적법한 절차를 지키라는 첫 판결이 될 것 같았다.

미국 파견 검사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한 검찰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호텔 방에서 켄지 스스로 쓴 진술서는 증거가치와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켄지는 그 스스로 자필로 진술서를 호텔방에서 썼다. 자필인 경우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었다(형사소송법 제313조). 그러나 세 명의 전문수사관 어른이 한 명의 어린 여대생을 호텔방에 끌어다 놓고 얼르고 협박한 게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하기에는 무리였다.

선고 하루 전날인 2003년 6월18일 오후 담당 검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내일 선고를 하는데 만약 켄지가 석방되면 묵을 곳이 있나요』

켄지의 석방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묵을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왜그러시죠』

켄지의 가난한 엄마는 사실 재판 때마다 와서 고시원에서 며칠씩 묵다가 가곤 했다. 한 달 숙박비 26만원이라는 돈도 내기 벅찬 형편이라고 했다. 요즘 고시원은 여관보다 못한 쪽방 숙박업소였다.

『석방이 되면 바로 미국으로 모녀가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검찰에서는 출국정지를 시키고 항소를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켄지가 어디 있는지 소재를 알아두어야 법정에 출두시키거든요』

출국정지가 되면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치는 오랜 기간 먹고 자는 걸 스스로 해결하면서 사실상 한국이라는 공간에 잡혀 있어야 한다. 담당검사의 말 속에는 내가 그녀를 그동안 보호해 줬으면 하는 뜻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걸 알고 전화했는지도 모른다.

『재판기간 켄지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면 검찰에서 호텔이라도 얻어 줘야 하지 않나요』

내가 말했다.

『우리도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전화기 저편에서 검사가 난감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남을 봐주려면 3년상까지 봐주라는 속담이 있다. 필요하다면 고시원이라도 얻어 주자는 결심이 섰다.

『그러죠. 그러면 당분간 켄지를 우리 집에 있게 하면서 어디 묵을 곳을 알아볼게요』

불법 절차로 인한 수사결과는 無效

『피고인 켄지 스나이더는 무죄』

재판장의 판결선고였다. 판결문에 나타난 켄지의 무죄이유는 예상대로였다.

자백을 받아 내고 싶어하는 수사기관의 열망보다 공정한 절차가 더 중요하다는 사법적 정의를 천명한 것이다. 다음은 켄지가 스스로 범행을 인정한 듯이 쓴 진술서에 대한 판단이었다.

<피고인 켄지 작성의 진술서는 FBI 한국지부장, CID 수사관 맨스필드, FBI 거짓말 탐지기 요원 디비티스로부터 인터뷰 형식으로 조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점에 비추어 보면 실질적으로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로 본다. 그렇지면 피고인 켄지가 이 법정에서 그 내용을 부인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FBI의 편법 밀실수사에 대한 한국 법원의 일격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보충하기 위해 증인으로 나왔던 FBI 한국지부장과 맨스필드의 증언은 재판부가 어떻게 보았을까.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은 이랬다.

<맨스필드, FBI 한국지부장의 각 법정진술, 검사 작성의 FBI 한국지부장에 대한 진술조서의 진술기재, 사법경찰관 작성의 맨스필드에 대한 진술조서의 진술기재는 모두 피고인의 자백경위에 관하여 진술한 내용으로서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위 수사기관에서의 진술내용을 부인하는 이상 모두 그 증거능력이 없다>

법원은 밀실수사로 얻은 증거를 뺀 나머지 증거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켄지가 결백한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불법절차로 인한 수사결과는 법원이 아예 받아들여 판단할 가치조차 없다는 선언이었다. 한국 법원이 미국 정부에 가한 일격이었다.

밤 10시에 구치소에서 나오다

점심시간 무렵부터 켄지의 엄마 히스 부인은 영등포 구치소 앞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앉아 딸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구치소 앞 식품점에서 두부와 달걀, 소금을 사서 옆에 놓고 있었다. 그것들을 먹이면 다시는 한국의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준비한 것이다. 나는 히스 부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땅 구치소 앞에서 혼자 딸을 기다리는 여자의 고독과 두려움을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딸 정아를 구치소 앞마당으로 보내 켄지가 나오면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오후 3시경 딸 정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도대체 언제 켄지가 나오는 거야? 날씨는 덥고 지쳐서 뚱뚱한 켄지 엄마도 완전히 파김치가 됐어』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선고해도 구치소마다 나오는 시각이 일정치 않다. 딸아이의 항의가 계속됐다.

『아빠 석방될 사람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구치소 담 아래서 눈치보고 웅크리고 있어야 하잖아? 무죄를 받았는데도 이래야 돼?』

석방된다고 하면 감지덕지해서 다른 불평을 하지 못하는 게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몇 시간 빨리 내보내느냐 아니냐는 교정공무원의 배려였다. 나는 담당검사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석방지휘서를 구치소에 보냈는지 물어보았다.

『법원에서 서류가 늦게 왔습니다. 오면 바로 석방지휘서를 만들어 보낼게요. 일단 석방이 되면 켄지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데려가는 걸 검토하느라고 회의 중인 것 같습니다』

켄지의 출소가 지체되는 이유인 듯했다. 내가 그 말에 항의했다.

『그건 석방이 아니라 또 다른 사실상의 구속이 아닙니까? 외국인이라고 그래도 되는 건가요? 법적 근거가 있나요?』

『그래서 지금 회의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법적 근거는 없어요. 기다리세요』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기나긴 6월의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졌다. 딸 정아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아빠 난 완전히 지쳤어. 정말 너무해. 왜 어떤 절차를 밟아서 몇 시에 나갑니다라고 통보를 않고 사람들을 마냥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거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차가 와서 바로 구치소 안으로 들어갔어. 켄지 엄마가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딸을 보지도 못하게 한다고 그래. 왜 그러지? 한국 사람은 다 자기 가족을 만나 집으로 가는데 켄지는 엄마도 못 보고 바로 또 끌고 간대. 켄지 엄마가 딸을 한 번이라도 보고 포옹하게 해 달라고 교도관들한테 지금 부탁하고 있어』

밤 10시경 켄지는 구치소 정문을 나왔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데려간다는 것은 오해였다. 오히려 그 직원들이 직접 나와 국내 체제에 필요한 서류를 정리해 주었다고 했다. 그동안 방청을 했던 케인 목사가 켄지 모녀를 며칠 자기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했다. 변호사로서 나의 임무가 모두 끝났다.

카렌족에게서 온 편지

사건을 처음 부탁했던 전도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날씨가 덥다는데 평안하셨는지요.

조금 전에 히스 부인이 보내 준 이메일을 받아 보았습니다. 최고의 소식이라는 제목답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변호사님에 대한 감사표현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검찰의 항소도 남아 있지만 히스 부인은 낙관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한 가정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님까지 귀한 시간을 내서 도와주심은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혹시 제가 사역을 하는 카렌족에게 오실 기회가 되시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카렌족은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볼 때면 압도당하곤 합니다. 그들은 저를 스승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진정한 저의 스승입니다. 카렌족들이 변호사님을 만나면 참 좋아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귀한 헌신과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