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神이기를 요구하는 사회, 절대로 잘못을 인정해선 안 된다고 다짐하는 의사들
의료사건 조정실
2000년 10월 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언덕 위의 웅장한 법원건물의 20층. 넓은 통유리창 밖으로 서울의 전경이 파노라마 같이 펼쳐졌다. 납색의 넓은 한강물이 다가오다가 슬쩍 휘어서 잠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층의 한구석은 억울한 사람들의 상황을 살펴주며 부드러운 결과 쪽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의료사건의 조정실이었다.
S의과대학 산부인과 과장인 金박사가 판사로부터 넘겨받은 두툼한 사건기록을 들춰보고 있었다. 학계의 元老인 그는 바쁜 시간을 내서 의료사건의 실질적인 재판장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뇌성마비나 지체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부모들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해마다 늘어났다. 분만시 아이의 뇌 低(저)산소증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이유였다. 아이의 평생을 책임지는 금액이 청구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아직 뇌성마비의 원인이 의사의 과실인가를 밝히기에는 과학이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아이의 부모가 의사가 잘못했다는 증명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의사가 無(무)과실을 증명하기도 불가능하다. 전문지식이 부족한 법원은 그렇다고 판결을 회피할 수는 없다. 어떤 결과든 내야 했다. 최근 법원은 의료계 권위자를 조정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들이 사실상 의사 재판 담당자였다.
『羊水(양수)에 胎便(태변)이 보였으면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했어야죠』
産母(산모)측 변호사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 옆에는 눈동자에 초점이 없이 머리가 흔들리는 아이를 안은 엄마가 분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 옆의 담당의사가 죄인같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다고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의사를 믿으셔야죠
조정위원 金박사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産母측 변호사는 다시 문제점을 지적했다.
『저는 프린트된 心音(심음) 그래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었습니다. 병원측은 그걸 내놓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마지못해 아주 일부분만을 내놨습니다. 게다가 그래프 용지에는 누구의 것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요. 다른 아이 것인지 조작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어떨까 모르겠는데요…』
조정위원 金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있는 대학병원에서도 産母의 心音 그래프를 프린트해 놓지 않습니다. 그 종이가 한 롤에 2만원씩 하는데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안 합니다. 의사는 心音만 잘 들으면 되는 겁니다. 의사를 믿으셔야지 그렇게 불신하면 어떻게 합니까?』
조정위원인 金박사는 불신받는 의사들의 최전선에 끌려나와 전투를 치르는 셈이었다. 産母측 변호사는 의사인 그의 말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草綠(초록)은 同色(동색)이라는 의심에서라고 할까. 조정위원 金박사는 사실상 재판장 자리를 떠나 산모측 변호사에게 의학강의를 시작했다.
『태아 困難症(곤란증)은 사전에 철저히 모니터링을 해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心音 그래프가 정상으로 나오는 경우에도 태아 곤란증인 때가 있었어요. 뇌성마비의 원인도 분만시의 뇌 低산소증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의학은 과학분야 중에서도 아직 발달이 덜 된 분야입니다. 결과보다는 의사가 순간순간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 못했느냐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요』
神(신)이 아닌 인간인 의사가 닥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지 모든 책임을 지라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의료계 전체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기형아가 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 무릎 위에서 히죽거리며 의사를 보고 있었다. 金박사와 담당의사의 눈길이 아이에게 머물렀다. 내 옆에 있던 그 아이를 분만시킨 담당의사가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분만시킨 아이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이상하네요…』
잘못이 있건 없건 그는 의사로서 마음이 무거운 것 같았다.
『의사측에서 약간의 위자료를 부담하시고 이 사건을 마무리지으시죠』
조정위원인 金박사가 중간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잠시 의사측 변호사인 나와 담당의사 간의 작전타임을 가졌다. 우리는 법원 복도 쪽 자판기 앞으로 나왔다.
『얼마 주고 빨리 끝내는 게 어때요?』
내가 담당의사에게 물었다. 그래야만 의사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진료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책임한 의사 태도가 정말 싫었어요』
『원장이 절대로 조정에 응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요?』
『잘못한 게 없고 양보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대요』
이런 때 대응태도는 여러 종류였다. 잘못이 없다고 무조건 버티는 경우와 적정선에서 일정액의 돈을 주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경우였다. 변호사인 나는 그들의 기본방향을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나중에 다가올 수 있는 위험은 그쪽 책임이었다. 나와 담당의사는 다시 조정실로 들어와 앉았다. 내가 조정위원에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담당의사에게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조정위원이 순간 멈칫했다.
『과실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조정위원인 金박사가 대답했다.
『과실이 없는 의사가 왜 돈을 내야 합니까?』
내가 되물었다. 그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위자료라도 주고 빨리 끝내고 말지」라는 그의 답답해 하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병원측에서 전부 아니면 全無(전무)라는 결투를 하자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金박사는 같은 의료인으로서 어떤 잘못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산모측의 병원에 대한 근본 불만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재판 사유는 여러 개라도 파고들어가 보면 근본 원인은 단순하고 엉뚱한 감정인 경우도 많았다. 나는 조정실 구석에 있는 아이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점이 소송까지 하도록 그렇게 한 맺히게 했습니까? 』
엄마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배가 아파서 새벽 3시 반쯤 병원으로 갔어요. 간호사들이 저를 보면서 양수색깔이 이상하다고 태아가 변을 먹는 게 아니냐고 저희끼리 수근거렸어요. 그런데 의사선생은 해가 뜰 때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다가 오전 11시쯤에야 나타나 자연분만을 할 건지 제왕절개 수술을 받을 건지 결정하라는 거예요. 그건 의사가 아니에요. 책임이나 회피하려는 뻣뻣한 관청의 공무원 태도였어요』
그녀는 울분에 찬 어조로 내뱉었다.
『잠깐만요』
조정위원인 金박사가 끼어들었다.
『간호사도 없었어요?』
『간호사는 있었어요』
『보통 간호사들이 일상적인 일을 하고 의사는 다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도록 일이 나뉘어 있어요. 게다가 요즈음은 기계를 설치해 놓고 맥박과 심장박동이 어느 수치 이하로 내려가게 되면 자동적으로 알람이 울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金박사가 열심히 설득했다. 결국 의사와 환자 간에 심정적인 교류의 결여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아이 엄마가 계속했다.
『설명도 기계적으로 하고 수술동의서만 형식적으로 받는 무책임한 의사의 태도가 정말 싫었어요』
하버드 의대의 傳說
하버드 의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다. 파라다이스에서 온갖 즐거움에 취해 5000년을 지낸 히포크라테스가 지구로 돌아와 자신이 잠깐 떠나 있던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버드 의대에 지원했다. 그를 인터뷰한 교수는 정형외과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다울링 박사였고 질문은 『의료의 첫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자신만만한 히포크라테스는 자기가 했던 말을 인용했다. 인체에 해로운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낙방했다.
정답의 결정은 의사끼리도 쉽지 않았다. 어떤 부류는 현대의료의 원칙은 환자가 사례비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냉소적인 답변이었다. 정말 의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의료철학은 일부 利他的(이타적)인 변절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지만 『자신의 실수를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에릭 시걸이 쓴 「닥터스」라는 의료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미국에서도 의사그룹의 자기방어는 그렇게 철저하다.
『잘못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배워』
서울 강남에서 20년간 산부인과를 해온 50代 중반의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다. 그는 의료 과오에 대한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부터도 의과대학에서 잘못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의료사고가 나면 우리 산부인과 의사들은 자기의 실수를 속으로는 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남한테는 절대로 말 못해요』
산부인과 운영도 여러 형태였다. 그 산부인과 원장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소수의 환자만 받으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병원이 있어요. 그렇지 않고 마구잡이로 환자들을 끌어들이는 산부인과도 있어요. 그런 경우 돈은 벌죠. 그렇지만 사고의 위험성이 많아요. 10 년을 열심히 벌어도 한 번만 소송이 걸리면 다 털어넣는 건데…』
이미 의사들의 직업관도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환자들한테 항의를 받으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내가 물었다.
『제 경험으로는 먼저 환자가 어떤 質(질)의 인간인가 먼저 조심스럽게 살펴요. 트집을 잡는 폼을 보면 돈을 뜯어내려고 시비를 거는지 진짜 억울한지 알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내 잘못을 생각해 봐요. 만약 버티다가 법정에서 잘못이 인정되면 의사로서 얼마나 망신입니까? 그래서 일단은 얼마 정도의 액수를 주고 합의를 보고 끝내지요. 법정까지 가는 의사는 벌써 그 자체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봐요.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이 돈은 법디다』
솔직한 노년의 여의사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어렸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의사들의 방어 행동은 어떻습니까?』
『의사들의 행동요령은 차트부터 흠이 잡히지 않도록 정리하는 일이에요』
공식적인 의사들의 대답은 항상 無오류였다.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이렇게 정직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단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부담 때문이다. 다음은 한 젊은 수련의의 고백이다.
『저는 의사로서는 병아리지만 수술을 구경하다 보면 이상한 게 많아요. 선배의사들은 책임 문제 때문에 그런지 절대로 수술베드에서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들을 가지고 있어요. 수술중에 죽은 환자를 봤어요. 그런데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산 사람처럼 봉합을 해서 일단 회복실로 보냈어요. 그리고 중환자실로 옮겨서 숨을 쉬는 것처럼 만들었어요. 요새는 기계가 좋아서 그런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환자가족이 보면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죠. 그때 의사가 가족에게 임종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거예요』
죽을 권리조차 빼앗긴 중환자실 구석의 靜物
나는 「법과 의료」라는 제목으로 보건대학원에서 마련한 몇 달의 짧은 과정을 이수한 적이 있었다. 각 병동을 견학하면서 의료계의 현실을 보는 과정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중환자실 한쪽 구석에 홀로 떨어진 철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에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누워 있었다. 움푹 들어간 볼에 초점 없는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여보세요. 김민자씨!(가명)』
안내 의사가 그 여자의 팔을 꼬집었다. 나무토막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산소호흡기와 링거 병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액체만이 그녀의 가냘픈 생명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 여자 환자는 얼굴만 빼놓고 전신마비예요. 산부인과에서 애를 낳다가 이렇게 마비가 왔답니다. 원래 硬骨(경골)에 이상이 있었는데 氣道(기도) 삽관을 하다가 목의 신경을 건드린 거 같아요. 확실한 것은 모르겠어요. 중환자실에서 이렇게 벌써 여러 해를 지냈어요. 앞으로도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구요』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천형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중환자실 구석에 붙은 가구 같은 靜物(정물)이었다. 더 잔인한 것은 머리만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안내의사가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남편도 해가 지나니까 발길을 끊더라구요. 다음에는 친정식구가 와서 얼마 동안 돌보았죠. 결국 친정도 항복을 하고는 언제부터인가 오지 않았어요. 결국 환자를 병원에 버린 셈인데 우리 병원 입장 역시 어렵습니다. 치료를 중지시키면 살인죄의 형사책임을 져야 하죠. 치료비는 나오지 않죠. 저런 환자들에 대해서 법에서 어떤 제도적 조치를 해줘야 할 것 같아요』
그녀를 보면서 안락사가 떠올랐다. 죽을 권리조차 빼앗긴 그녀는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1975년 4월15일 미국의 뉴저지에 식물인간상태에 빠진 카렌 퀸란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 부모가 보다 못해 법원에다 인공호흡 장치를 떼게 해달라고 청구했다. 법원은 그것은 주치의가 결정해야 할 사항이지 법원의 권한이 아니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사이케비츠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 67세에 IQ가 10, 정신연령은 두 살 정도였다. 重症(중증)의 박약아였다. 말을 전혀 못하고 단지 동작으로 욕구를 전달하는 정도였다. 그 사람은 50년 이상을 州 정부의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불치병인 백혈병에 걸렸다. 그의 후견인이 되는 수용소장이 가정법원에 치료를 중단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신청했다. 그 청구를 받은 법원은 치료중단을 명령했다.
인간은 비참하게 죽지 않을 권리도 있다. 환자가 의식이 잠시라도 회복되어서 치료를 거절하면 의사는 거기에 따라야 할 것이다. 환자와 의사들에게 한계를 명확히 그어줄 기준들이 없어 방황하는 게 우리 의료계의 현실이었다.
한 剖檢醫의 증언
서울대 법의학 교실의 李박사는 의료과오를 밝히기 위한 病理(병리)부검의 전문가였다. 그로부터 이런 경험담을 들었다.
『의료사고가 났다고 생각하면 병리부검하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환자가 사망한 상황을 들어보고 부검을 해보면 사고의 원인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화장을 해버린 경우가 많아요. 의사는 사건을 덮고 싶은 심리에서, 그리고 환자측은 두 번 죽는 걸 싫어해서 부검들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메디컬 이그재미너(medical examiner)가 수술 도중이나 마취 도중에 환자가 죽으면 당연하게 부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사지만 확고한 엄정 중립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병리부검을 하는 의사는 의사편을 드는 편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잘못한 의사를 잘못했다고 해야 정당한 의사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산부인과나 마취과에서 의료사고가 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어요. 심지어 수술 도중 산소를 공급하는 튜브가 빠지거나 기관으로 들어가야 할 관이 식도로 들어가 사고가 난 경우도 있어요. 그렇지만 현장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튜브나 주사바늘을 다 빼고 깨끗이 屍身(시신)을 닦은 후에 병리부검의에게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부검에서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산소가 부족한 현상만 발견되는 거죠』
현장을 변경시키면 원인은 영원한 미궁 속에 빠지는 것이다.
『한번은 건강한 여자인데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 수술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수술 후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어요. 수술 도중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심이 생겼지요. 수술기록지를 내가 아는 마취과 의사에게 보여줬더니 당장 「기록을 고쳤구만」 하고 말하는 거예요. 전문가들은 맥박 호흡 등을 적어놓은 것을 보고 당장 파악하지요. 그렇지만 담당 마취과나 외과의사를 불러 물어볼 수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부검의가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는 진료기록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대학병원은 진료기록이나 간호기록 그리고 경과기록을 비교적 자세히 적습니다. 기록이 있으면 환자가 죽기 전의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개인병원의 경우 기록이 부정확하거나 손을 댄 듯한 의심이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국의 검시관은 필요하면 마음대로 의료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런 권한은 검시관도 없고 부검의도 없습니다. 영국의 경우는 의료사고를 판단하는 법원이 따로 있을 정도죠』
그가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점은 로비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 의료사고를 낸 의사에게 연락을 하면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케이크와 돈봉투를 가지고 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의문점을 알기 위해 연락도 못합니다. 또 환자 가족측에서는 같은 의사끼리 짜고 검사를 했다고 불신을 합니다』
그는 정직한 의사였다. 의사 입장에 대해서도 용기 있게 설명했다.
『의료행위 도중에 사고가 난 경우 의사에게 과실이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환자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과연 의사의 과실인지 아닌지 한계적인 상황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 중상 환자의 경우 사망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의사들은 그때도 달려들어야 하는데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의사가 쇄골 밑에 있는 중심정맥의 압력을 재려다가 바늘이 관통해서 한쪽 폐에 피가 고였어요. 결국 胸腔(흉강)내 血胸(혈흉)으로 죽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의사에게 얼마의 잘못을 물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원래의 상황이 죽지 않을 것이라면 의료사고이지만 두개골 골절 등 이미 사망이 필연적인 경우인데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의사의 책임은 과감히 면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또 이런 사례를 들었다.
『수술 도중 대동맥 벽이 약해져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취행위가 혈압을 높여서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위궤양을 치료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이런 때 담당의사들이 그런 것들을 의심할 수 있었는지의 상황을 판단한 후 과실을 묻는 게 필요합니다』
위험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도 방지에 게을렀던 의사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神에서 人間으로 내려온 의사들
무조건 버틴다고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의 무과실 주장에 대해 법원의 판결은 오히려 더 가혹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한 병원 소아과로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가 있었다. 專攻醫(전공의) 2년차인 의사가 아기를 진찰했다. 아기가 항생제를 넣은 정맥주사를 맞게 되었다.
『아기가 10분 전에 우유를 먹고 트림을 했어요』
엄마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 말에 간호사가 수련의를 보며 『음식물 섭취 직후라 찝찝하네요』라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수련의가 간호사의 걱정을 무마시켰다. 주사 준비를 한 간호사가 침대 위에 눕힌 아기의 정맥을 찾았다. 솜으로 만든 베개를 아기의 목에 받쳤다. 정맥이 제대로 찾아지지 않았다. 근 15분 동안 애를 먹은 끝에 아기의 왼쪽 발등 정맥혈관에 간신히 주사바늘을 꽂게 됐다. 3분 후 아기의 호흡이 정지되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청색증이 왔다. 급히 심폐 소생술을 할 때 아기의 입에서 우유 찌꺼기 같은 이물질이 나왔다. 다시 5시간이 흐른 후 아기가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출생 후 21개월이 되는 아기는 그후 심한 정신지체와 경직성 사지마비를 동반한 뇌성마비가 되었다.
법원은 병원측에 3억4000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우유를 먹인 직후 주사를 놓으면 그 자극으로 먹은 게 역류해서 기도로 들어가 막힐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정맥주사를 놓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과도한 자극을 피했어야 했다고 책임의 원인을 말했다.
절대안정을 지시하지 않은 잘못으로 1억원 배상판결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한 큰 병원에서 금식환자가 처치실로 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웠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卵巢管(난소관) 절제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의사는 禁食(금식)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옆에 있던 동생이 링거병을 들고 보조했다. 그녀가 몇 걸음 걷다가 쿵 하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쓰러졌다. 뇌挫傷(좌상)의 진단이 나오고 그녀는 식물인간상태로서 정신신경기능의 황폐화, 四肢(사지)운동 기능의 마비와 강직의 증상을 일으켰다.
법원은 병원을 경영하는 학교법인에게 2억2000만원의 배상판결을 선고했다. 금식환자면 이동식 침대나 휠체어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게 책임을 묻는 근거였다.
연휴중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병원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급성폐렴에 걸린 열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입원해 있었다. 과장이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휴가를 갔다. 다음날 내과 專攻醫가 여자아이의 병실을 돌아보았다. 전신상태가 쇠약했지만 혈압이 110에 70이고 체온과 호흡상태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과장이 휴가 가기 전 아이의 검사결과표를 보고 抗(항)결핵제의 經口(경구)투여와 폐렴치료 조치를 이미 다 해놓은 상태였다. 전공의도 퇴근했다.
다음날 새벽 2시경 간호사가 그 여자아이의 방에 들어갔을 때 환자아이는 그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간호사는 링거액이 정상적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입원실을 나왔다. 다음날 아침 7시경 여자아이는 죽은 채 간호사에게 발견되었다. 담당 전문의는 아이의 사망원인을 급성폐렴으로 발생한 농과 분비물이 갑자기 기도를 폐쇄한 결과 급성 호흡부전으로 사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법원은 내과 전문의와 병원에 1억원의 배상판결을 내렸다. 내과 전문의가 담당 간호사에게 환자의 절대안정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십 년 전만 해도 흰 가운의 의사선생님들은 神이었다. 복잡한 의학분야는 성역이었고 한마디 묻기도 조심스러웠다. 현재 의학지식은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의료전문방송에서는 의사들도 미처 따라잡기 힘든 새로운 이론들을 대중들에게 쏟아내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엘빈 토플러 박사는 지식의 대중화로 이제 의사들은 神에서 인간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흐르는 물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이 의사들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前職 의사의 고백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30년 동안 신경정신과를 하는 70代의 의사선생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의료사고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의사와 환자 간의 정신적인 교류나 신뢰가 점점 없어지고 상업화되고 있어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분쟁이 생기죠.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나는 인간의 半도 알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어떤지 아세요? 환자가 죽으면 다 의사책임이래요. 산부인과에서 나온 아이가 20년 후에 죽어도 그 아이를 분만시킨 산부인과 의사 책임입니까? 어떻게 그 원인을 다 알겠어요? 이건 완전히 의사를 神으로 취급하는 거죠』
그의 말은 의사들의 가슴속에 앙금으로 남은 공통된 불만이었다.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요. 제가 실수한 거 한번 자백해 볼까요.
25년 전 정신분열증 환자였는데 제 의원에 온 지 사흘 만에 죽어버렸어요. 그 가족이 제게 찾아왔어요. 제가 잘못을 스스로 먼저 시인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제 잘못이 뭔지 모르지만 일단은 관리소홀 책임은 인정해야 할 거 아닙니까? 제가 장례비랑 돈을 줬더니 유족들이 오히려 미안해 하더라구요』
명문고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찌감치 의원 문을 닫고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주유소를 하는 의사가 있었다. 그를 찾아갔다. 주유소답지 않게 사장실의 책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의학서적들이 꽉 차 있었다. 의사를 그만둔 사장은 회의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고백했다.
『의료보험료 때문에 환자 한 사람에 몇푼 받지 못해요. 요새 커피숍에 가보쇼. 커피 한 잔도 의사의 치료비보다 많아요. 그 가격으로 솔직히 의원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설사 그렇게 몇 년을 갔다고 합시다. 요즈음같이 환자들이 매사 의심의 시선으로 보는 세월에 의료소송 한 번 걸리면 그걸로 망하는 거죠. 의사가 神입니까? 어떻게 실수를 안 할 수 있어요?
물론 환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보면 되지요. 죽든 말든 숫자만 채우면 되고 사고가 나면 역시 돈으로 때우면 된다는 장사꾼이 되면 말이죠. 그러나 정말 자존심 있고 진정한 의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의원을 꾸려갈 형편이 안 됩니다. 병아리 의사하고 30년 경력의 의사하고 의료수가가 똑같은 게 우리 현실이에요. 사회적으로야 남보다 잘나 보이던 의사를 때려잡으니까 모두 속이 시원하겠지. 누가 나서서 의사를 변호해 주겠어요? 정부는 의사의 손해 아래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만 결국 의사들이 문을 닫고 폐업을 하면 그 손해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어요. 국민에게 가는 거 아닙니까?』
슈바이처 대신 목수를 택하다
그렇다면 성공한 의사의 속은 어떨까? 국내 최대의 재벌병원에서 책임자로, 또 교수로 성공했다는 K박사와 만났었다. 친구인 그는 이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하루에 100명씩 외래환자를 보고 다른 날에는 일곱 건에서 여덟 건 정도 수술을 하지. 회진을 돌고 학생지도에 연구에, 게다가 연구소 직원들 벌어먹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연구비 구걸하는 게 의과대학 교수야』
그가 自嘲的(자조적)으로 내뱉었다. 그는 솔직한 성격이었다.
『학생들에게 의사가 돈을 따라가면 그날로 의사로서의 생명은 끝난다고 가르쳐. 그런데 그게 씨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 거야. 학생들 중 상당부분이 醫術(의술)은 돈버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의사만 되면 변두리에 환자가 많을 곳을 골라 서너 명이 자본을 합쳐서 돈을 벌기 위해 무섭게 뛰지. 그런 경우는 의료윤리도 없고 그저 장사꾼이 되는 거야』
그는 재벌병원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나 정도 되는 간부들이 정기검진을 많이 유치해야 돼. 거기에는 상업적인 속셈이 많지. 병원수입 때문에 마구잡이로 필요 없는 검사를 시켜. 솔직히 2000베드 이상 되는 종합병원이 흑자를 낸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런데도 우리 병원은 정기검진 이익만 금년에 55억원이 넘더라구. 그렇다고 그게 의사에게 오는 것도 아니야』
그 교수도 역시 가장 겁을 내는 분야는 의료사고였다.
『의대 교수 입장인데도 심심치 않게 피의자가 돼서 조사를 받아. 말로는 의사를 존경하는 척하지만 막상 조사받아 봐. 세상이 의사에 대해 얼마나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나를 당장 알게 돼. 툭하면 환자 가족들이 병원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고 고소를 하니까 방어진료를 하게 되는 거지. 위험한 중환자나 응급환자, 노인환자를 기피하고 진료 중 발생하는 몇만분의 일도 안 되는 합병증이나 부작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검사를 남발하지. 난치병에 대한 도전은 이제 하면 안 돼. 그게 요새 의사들의 태도야』
그는 또 의사로서 다른 고충을 늘어놓았다.
『내가 대통령 주치의 팀에 있었던 일이 있어. 어느 날 아침에 테니스를 치고 나서 대통령이 머리에 드라이를 하다가 손등을 홀랑 덴 일이 있어. 시중을 드는 사람이 뜨거워진 드라이를 대통령에 줬던 모양이야. 그날 맞이할 사람이 많은데 악수 못하면 큰일이라고 비서실에서 난리를 치는 거야. 주치의를 비롯해서 온 서울의 의사들에게 비상이 걸렸어. 어떤 연고를 발라야 흉터가 남지 않느냐, 그리고 낮에 당장 악수를 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통증을 안 느끼느냐가 토의됐지. 나는 옆에서 보조의사로 대통령의 손에 연고를 바르고 위로 아래로 호호 불고 별짓을 다했어』
의사생활을 그만두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는 친구가 있었다.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한 지방 병원 방사선과를 책임지며 15년 가량을 근무했었다. 그는 뉴질랜드로 가서 목수가 되겠다고 목공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슈바이처를 존경하던 그의 의사로서의 회한은 이랬다.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돈에 젖어 있으면 그건 끝나는 거야. 그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어. 그리고 자기가 정말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면 다른 모든 걸 제쳐놓고라도 그 환자를 봐야 돼. 그런데 현실은 나를 포함해서 그렇지 못한 의사들이 많아. 그게 우리 의사들의 현주소라고 자아비판을 해』
그의 표정은 의사들을 대변하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의사의 고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설령 가슴이 열려 있는 판사라고 하더라도 그걸 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확률은 작지만 의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환자가 덜컥 하고 가버리는 경우 그 의사한테 돌을 던질 줄은 알아도 이해해 줄 사람이 지금 어디 있어? 정성을 다하는 의사의 판단 미스에 대해 어느 누가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 의사는 결코 神이 아닌데 말이야』
의사들끼리의 「개싸움」
의사들 중 비난대상은 서울 근교의 목 좋은 곳을 잡아 환자의 숫자와 돈에만 집착하는 개업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또다른 분명한 논리가 있었다.
1999년 11월 말 어둠이 짙어질 무렵. 서울 근교 A시의 중심가 함석담장에 둘러싸인 장방형의 넓은 땅 앞에서였다. 담장 한가운데에 흰 페인트 칠로 「산부인과 신축부지」라는 글자가 보였다. 건평 2500평의 병원이 들어설 그 땅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K원장이 입을 열었다.
『제 평생의 꿈이 큰 전문병원을 설립하는 거였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의료소송을 당한 그의 핏발 선 눈에는 집념이 어렸다. 그는 소송을 개의치 않고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병원을 키워온 또다른 모습의 의사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나이 50이 되도록 화장실 한번 마음 편하게 다녀온 적이 없어요. 마취과 의사인 집사람하고 병원 구석방에 처박혀 잠자고 진찰하고 수술하고 그렇게만 살아왔어요. 전문병원만 완성되면 그때부터 저도 인간답게 살 겁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또 살아남는 사람은 있는 것이다. 일부러 변두리 공단을 찾아간 그는 위기를 또다른 기회로 만들었다.
『의사끼리 진흙밭에서 개싸움 하는 경우를 한번 얘기해 드릴까요? 제 병원이 잘된다는 소문이 나니까 제가 세든 건물의 같은 층과 아래층에 산부인과가 개설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같은 의사끼리 저한테 오는 환자를 빼앗아요. 직업윤리고 뭐고 없는 게 우리 의료계의 현실이에요』
나는 그의 성공과정이 궁금했다. 명문의대를 나온 친구들이 회의를 하는 데 반해 그는 좋은 학벌은 아니었다. 선망받는 병원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정부에 있는 병원에 취직해 다녔어요. 통근버스 안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는 마취과 의사였죠. 통근차가 서울로 들어서면 길거리에 산뜻하고 세련된 산부인과의원 건물을 보면서 언젠가 우리도 저런 병원을 가져보겠다고 꿈을 꿨습니다. 저나 아내나 둘 다 집안이 여유 있는 형편이 못 됐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아주 늦었어요. 오십 가까운 지금에야 애가 여섯 살이거든요』
병원부지 주위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신도시의 건물들에서 밝은 불빛들이 명멸했다. 그가 계속했다.
『여기가 처음 개발될 때 저희 부부는 조그만 건물의 한 층을 빌려서 산부인과를 차렸어요. 저하고 아내는 무지무지하게 열심히 일했죠. 인건비가 아까워서 마취과 의사인 아내가 직접 모든 일을 보조해 왔어요. 마취과 의사에, 간호사에, 환자들 밥해대고 빨래하는 일을 다 했어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였어요. 집사람은 늦은 임신인데도 과로 때문에 유산을 여러 번 했어요. 그제서야 저는 돈이 다가 아니구나 하고 간호사를 두기 시작했어요』
우리들은 밤거리를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수시로 허리가 아픈 듯 몸을 비틀었다. 배가 나오고 걸음걸이가 무거워 보였다.
『운동은 안 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지금까지는 운동을 할 틈이 없었는데 앞으로 전문병원이 완성되면 해야지요…』
그가 씩 웃었다. 그는 수시로 의료소송에 걸렸다. 환자의 가족들이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해도 견뎠다. 방송사에서 카메라를 들고 와서 찍어 뉴스에 방영해도 끄떡도 안 했다. 경찰이 불러도 또 법원에서 소환해도 그는 늠름하게 몇 건의 수술을 하면서 버티는 강철이었다. 그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의료분쟁의 본질이 마음속에 정리되고 있었다. 분쟁의 배경은 낮은 보험수가 속에서 의료의 상업화였다.
『제가 소송 걸린 이유를 보니까 제가 그 옆에 꼭 붙어 있지 않았다는 걸 흠으로 삼았는데요,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 산부인과 의사의 경우 어떤 사람이 그 돈 받고 한 産母 옆에 몇 시간이라도 붙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해요. 외래환자를 보다가 수술실로, 또 분만실로 정말 다리 사이에서 요령소리가 나게 뛰어다녀야 병원을 유지할 수 있어요. 저의 경우 개업을 하고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꿈도 꿔보지 못했어요. 그나마 수술이 있으면 굶을 때도 많아요』
産母의 입장은 정반대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기대감은 절대적이다. 수요자들은 의사의 계속되고 자상한 보호 속에서 분만이 완벽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분만이 원만치 않을 경우 그 분노와 좌절감은 엄청나다. 특히 장애아를 낳았을 경우 양육비는 엄청나고 사회적 도움은 없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해서라도 재정적인 보조를 얻으려는 게 아이 부모들의 심리다. 産科 의사의 경우 두 생명을 취급해야 하고 진단으로 뱃속의 태아를 완전하게 판단하는 것을 산모들은 원한다.
의사의 설명 의무
2년 전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대강의실에서 토의가 있었다. 서울 인근의 주요병원 병원장이나 기조실장, 의료전문 변호사, 담당판사의 자유로운 토론장이었다. 병원장이자 의과대학 총장인 전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사고가 났을 때 더 잘할 수 있지 않았냐는 각도에서 보면 20~30% 더 향상시킬 수도 있다고 솔직히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공장의 어떤 물품에도 불량품이 있는데 병원은 절대 완벽하라는 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원로급 의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3분 진료로 완벽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라는 건 무리라는 의견들이었다. 전박사가 계속했다.
『보상한도가 커질수록 진료가 위축되고 과잉검사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피해는 국민들이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 다음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기획실장의 발언이었다.
『의사들이 불가항력을 어떻게 기본 상식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습니까? 환자나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멀쩡하게 걸어서 병원에 왔다가 죽어나가는 걸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의사 입장에서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법적인 과실책임을 쓰는 건 억울합니다. 그리고 현행 의료수가 체제에 비해 손해배상액이 너무 커요. 5만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수술준비도 그만큼밖에 하지 못합니다. 완벽하게 하려면 30만원 정도 든다고 가정할 때 수술준비의 미흡을 과연 의사측의 책임으로만 돌려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분쟁비용이 의료코스트에 산입되지 않고 있어요』
참석한 의사들 중 상당부분은 손해배상은 치료비로 받은 것만 되돌려 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왜 의사가 아이의 평생을 책임질 돈을 내야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참석했던 원로의사들은 그 자리에 참석했던 판사를 보면서 법원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판사가 소송을 진행하면서 느낀 감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심리를 하다 보면 의사의 감정서에 대한 신뢰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편들어 주기 감정이라는 뜻이었다.
『전문성이 약한 우리 판사들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의사한테 묻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말 감잡기 식으로 판단할 때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꼬투리가 책임의 근거로 나오기도 하고요. 어쨌든 공정하고 객관적인 의료감정이 있어야 공정한 판결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 현상은 독일 등 외국에서 먼저였다. 밀실 같은 수술실 내부에서 발생한 일은 관련자들이 입을 닫으면 규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법은 의료인들의 공모를 눈감아주고 피해를 방치할 수 없었다. 여기서 태어난 법이론이 설명 의무다. 구체적인 의사의 잘못을 꼬집지 못한 법원이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을 제대로 못했으니까 배상해야 된다고 판결이유를 만든 것이다. 의사가 아무리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주장해도 법원이 부족했다고 판단하면 그만이었다. 설명 의무 탄생의 저변을 모르는 의사들이 어디까지 설명해야 완벽하게 면책되는지 우왕좌왕하는 게 당연하다.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 구별하기
그에 대해 환자측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나섰다.
『소송에서 첫 재판이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환자측에서는 진료기록부를 입수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평가 분석을 못하게 됩니다. 감정을 신청해도 나오는 결과는 병원측의 어려운 입장만 그대로 반영해주는 결과가 나오는 게 상당수 있어요. 환자측에서는 난공불락의 그 결과를 뒤엎기가 힘들어요』
그런 의견에 대해 뒷줄에 앉았던 연세대학병원 기조실장이 이렇게 항의했다.
『유수병원의 의사들은 그래도 감정을 공정하게 합니다. 저도 감정하라는 법원의 부탁이 들어오면 주말에 집에 앉아서 모든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고 최소한 저의 양심에 어긋나는 감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앉아계시는 선생님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의료계의 원로 황박사가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의료행위가 불법행위라는 법률용어로 평가된다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의사들은 책이나 저널대로 못합니다. 똑같은 병을 똑같이 치료해도 다 다릅니다. 통계라는 건 하나의 가이드 라인이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법에서는 절대적 기준을 추궁합니다. 의료사건 기록을 보면 그게 재판인지 최첨단의 메디컬 컨퍼런스인지 구별하지 못하겠어요.
모든 의사가 백점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사건기록들을 보면 의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솔직히 현실에서 어떤 환자를 보면 이 환자는 글렀구나, 희망이 없구나 하고 판단했는데도 나중에 완쾌해서 멀쩡히 걸어나가는 수도 있어요. 의사도 왜 그런지 모르죠. 또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치료했는데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환자도 봤어요. 사람이 죽으니까 환자 가족들은 우선 소송을 걸고 보죠. 법원은 의사가 돈 많다고 생각하고 조지죠』
결국 각자 판단하는 잣대가 구구 각색이었다. 실력 있고 성실한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많았다. 문제 중의 하나는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를 구별하는 객관적인 심판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법이 색출해야 할 대상은 과실을 은폐하고 의료윤리를 팽개치는 의사였다. 부정한 의사를 퇴출시킬 때 진정한 의사가 대접받을 수 있다. 경제학자 그레셤의 법칙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를 보던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손교수의 주장은 이랬다.
『미국에서는 의료사고가 나면 담당변호사가 녹음기를 들고 의사를 찾아와 현찰 600달러를 주고 인터뷰를 해요. 양복을 깨끗이 받쳐입은 의사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인터뷰에 정직하게 임해요. 또 미국에서는 의사에게 불리한 감정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소송에서 져도 의사가 그 배상액을 부담하지 않고 보험에서 지불합니다. 의사의 잘못이 공정하게 드러나고 합당한 배상이 지불됩니다. 우리 의료제도도 그런 점을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00년 10월 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언덕 위의 웅장한 법원건물의 20층. 넓은 통유리창 밖으로 서울의 전경이 파노라마 같이 펼쳐졌다. 납색의 넓은 한강물이 다가오다가 슬쩍 휘어서 잠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층의 한구석은 억울한 사람들의 상황을 살펴주며 부드러운 결과 쪽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의료사건의 조정실이었다.
S의과대학 산부인과 과장인 金박사가 판사로부터 넘겨받은 두툼한 사건기록을 들춰보고 있었다. 학계의 元老인 그는 바쁜 시간을 내서 의료사건의 실질적인 재판장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뇌성마비나 지체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부모들이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해마다 늘어났다. 분만시 아이의 뇌 低(저)산소증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이유였다. 아이의 평생을 책임지는 금액이 청구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아직 뇌성마비의 원인이 의사의 과실인가를 밝히기에는 과학이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아이의 부모가 의사가 잘못했다는 증명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의사가 無(무)과실을 증명하기도 불가능하다. 전문지식이 부족한 법원은 그렇다고 판결을 회피할 수는 없다. 어떤 결과든 내야 했다. 최근 법원은 의료계 권위자를 조정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들이 사실상 의사 재판 담당자였다.
『羊水(양수)에 胎便(태변)이 보였으면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했어야죠』
産母(산모)측 변호사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 옆에는 눈동자에 초점이 없이 머리가 흔들리는 아이를 안은 엄마가 분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 옆의 담당의사가 죄인같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다고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의사를 믿으셔야죠
조정위원 金박사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産母측 변호사는 다시 문제점을 지적했다.
『저는 프린트된 心音(심음) 그래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었습니다. 병원측은 그걸 내놓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마지못해 아주 일부분만을 내놨습니다. 게다가 그래프 용지에는 누구의 것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요. 다른 아이 것인지 조작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어떨까 모르겠는데요…』
조정위원 金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있는 대학병원에서도 産母의 心音 그래프를 프린트해 놓지 않습니다. 그 종이가 한 롤에 2만원씩 하는데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안 합니다. 의사는 心音만 잘 들으면 되는 겁니다. 의사를 믿으셔야지 그렇게 불신하면 어떻게 합니까?』
조정위원인 金박사는 불신받는 의사들의 최전선에 끌려나와 전투를 치르는 셈이었다. 産母측 변호사는 의사인 그의 말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草綠(초록)은 同色(동색)이라는 의심에서라고 할까. 조정위원 金박사는 사실상 재판장 자리를 떠나 산모측 변호사에게 의학강의를 시작했다.
『태아 困難症(곤란증)은 사전에 철저히 모니터링을 해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心音 그래프가 정상으로 나오는 경우에도 태아 곤란증인 때가 있었어요. 뇌성마비의 원인도 분만시의 뇌 低산소증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의학은 과학분야 중에서도 아직 발달이 덜 된 분야입니다. 결과보다는 의사가 순간순간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 못했느냐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요』
神(신)이 아닌 인간인 의사가 닥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지 모든 책임을 지라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의료계 전체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기형아가 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 무릎 위에서 히죽거리며 의사를 보고 있었다. 金박사와 담당의사의 눈길이 아이에게 머물렀다. 내 옆에 있던 그 아이를 분만시킨 담당의사가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분만시킨 아이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이상하네요…』
잘못이 있건 없건 그는 의사로서 마음이 무거운 것 같았다.
『의사측에서 약간의 위자료를 부담하시고 이 사건을 마무리지으시죠』
조정위원인 金박사가 중간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잠시 의사측 변호사인 나와 담당의사 간의 작전타임을 가졌다. 우리는 법원 복도 쪽 자판기 앞으로 나왔다.
『얼마 주고 빨리 끝내는 게 어때요?』
내가 담당의사에게 물었다. 그래야만 의사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진료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책임한 의사 태도가 정말 싫었어요』
『원장이 절대로 조정에 응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요?』
『잘못한 게 없고 양보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대요』
이런 때 대응태도는 여러 종류였다. 잘못이 없다고 무조건 버티는 경우와 적정선에서 일정액의 돈을 주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짓고 싶어하는 경우였다. 변호사인 나는 그들의 기본방향을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나중에 다가올 수 있는 위험은 그쪽 책임이었다. 나와 담당의사는 다시 조정실로 들어와 앉았다. 내가 조정위원에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담당의사에게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조정위원이 순간 멈칫했다.
『과실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조정위원인 金박사가 대답했다.
『과실이 없는 의사가 왜 돈을 내야 합니까?』
내가 되물었다. 그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위자료라도 주고 빨리 끝내고 말지」라는 그의 답답해 하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병원측에서 전부 아니면 全無(전무)라는 결투를 하자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金박사는 같은 의료인으로서 어떤 잘못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산모측의 병원에 대한 근본 불만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재판 사유는 여러 개라도 파고들어가 보면 근본 원인은 단순하고 엉뚱한 감정인 경우도 많았다. 나는 조정실 구석에 있는 아이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점이 소송까지 하도록 그렇게 한 맺히게 했습니까? 』
엄마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배가 아파서 새벽 3시 반쯤 병원으로 갔어요. 간호사들이 저를 보면서 양수색깔이 이상하다고 태아가 변을 먹는 게 아니냐고 저희끼리 수근거렸어요. 그런데 의사선생은 해가 뜰 때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다가 오전 11시쯤에야 나타나 자연분만을 할 건지 제왕절개 수술을 받을 건지 결정하라는 거예요. 그건 의사가 아니에요. 책임이나 회피하려는 뻣뻣한 관청의 공무원 태도였어요』
그녀는 울분에 찬 어조로 내뱉었다.
『잠깐만요』
조정위원인 金박사가 끼어들었다.
『간호사도 없었어요?』
『간호사는 있었어요』
『보통 간호사들이 일상적인 일을 하고 의사는 다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가도록 일이 나뉘어 있어요. 게다가 요즈음은 기계를 설치해 놓고 맥박과 심장박동이 어느 수치 이하로 내려가게 되면 자동적으로 알람이 울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金박사가 열심히 설득했다. 결국 의사와 환자 간에 심정적인 교류의 결여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아이 엄마가 계속했다.
『설명도 기계적으로 하고 수술동의서만 형식적으로 받는 무책임한 의사의 태도가 정말 싫었어요』
하버드 의대의 傳說
하버드 의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다. 파라다이스에서 온갖 즐거움에 취해 5000년을 지낸 히포크라테스가 지구로 돌아와 자신이 잠깐 떠나 있던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버드 의대에 지원했다. 그를 인터뷰한 교수는 정형외과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다울링 박사였고 질문은 『의료의 첫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자신만만한 히포크라테스는 자기가 했던 말을 인용했다. 인체에 해로운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낙방했다.
정답의 결정은 의사끼리도 쉽지 않았다. 어떤 부류는 현대의료의 원칙은 환자가 사례비를 줄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냉소적인 답변이었다. 정말 의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의료철학은 일부 利他的(이타적)인 변절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지만 『자신의 실수를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에릭 시걸이 쓴 「닥터스」라는 의료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미국에서도 의사그룹의 자기방어는 그렇게 철저하다.
『잘못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배워』
서울 강남에서 20년간 산부인과를 해온 50代 중반의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다. 그는 의료 과오에 대한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부터도 의과대학에서 잘못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의료사고가 나면 우리 산부인과 의사들은 자기의 실수를 속으로는 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남한테는 절대로 말 못해요』
산부인과 운영도 여러 형태였다. 그 산부인과 원장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소수의 환자만 받으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병원이 있어요. 그렇지 않고 마구잡이로 환자들을 끌어들이는 산부인과도 있어요. 그런 경우 돈은 벌죠. 그렇지만 사고의 위험성이 많아요. 10 년을 열심히 벌어도 한 번만 소송이 걸리면 다 털어넣는 건데…』
이미 의사들의 직업관도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환자들한테 항의를 받으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내가 물었다.
『제 경험으로는 먼저 환자가 어떤 質(질)의 인간인가 먼저 조심스럽게 살펴요. 트집을 잡는 폼을 보면 돈을 뜯어내려고 시비를 거는지 진짜 억울한지 알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내 잘못을 생각해 봐요. 만약 버티다가 법정에서 잘못이 인정되면 의사로서 얼마나 망신입니까? 그래서 일단은 얼마 정도의 액수를 주고 합의를 보고 끝내지요. 법정까지 가는 의사는 벌써 그 자체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봐요.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이 돈은 법디다』
솔직한 노년의 여의사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어렸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의사들의 방어 행동은 어떻습니까?』
『의사들의 행동요령은 차트부터 흠이 잡히지 않도록 정리하는 일이에요』
공식적인 의사들의 대답은 항상 無오류였다.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이렇게 정직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단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부담 때문이다. 다음은 한 젊은 수련의의 고백이다.
『저는 의사로서는 병아리지만 수술을 구경하다 보면 이상한 게 많아요. 선배의사들은 책임 문제 때문에 그런지 절대로 수술베드에서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들을 가지고 있어요. 수술중에 죽은 환자를 봤어요. 그런데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산 사람처럼 봉합을 해서 일단 회복실로 보냈어요. 그리고 중환자실로 옮겨서 숨을 쉬는 것처럼 만들었어요. 요새는 기계가 좋아서 그런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환자가족이 보면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죠. 그때 의사가 가족에게 임종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거예요』
죽을 권리조차 빼앗긴 중환자실 구석의 靜物
나는 「법과 의료」라는 제목으로 보건대학원에서 마련한 몇 달의 짧은 과정을 이수한 적이 있었다. 각 병동을 견학하면서 의료계의 현실을 보는 과정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했다. 중환자실 한쪽 구석에 홀로 떨어진 철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에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누워 있었다. 움푹 들어간 볼에 초점 없는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여보세요. 김민자씨!(가명)』
안내 의사가 그 여자의 팔을 꼬집었다. 나무토막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산소호흡기와 링거 병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액체만이 그녀의 가냘픈 생명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 여자 환자는 얼굴만 빼놓고 전신마비예요. 산부인과에서 애를 낳다가 이렇게 마비가 왔답니다. 원래 硬骨(경골)에 이상이 있었는데 氣道(기도) 삽관을 하다가 목의 신경을 건드린 거 같아요. 확실한 것은 모르겠어요. 중환자실에서 이렇게 벌써 여러 해를 지냈어요. 앞으로도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구요』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천형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중환자실 구석에 붙은 가구 같은 靜物(정물)이었다. 더 잔인한 것은 머리만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안내의사가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남편도 해가 지나니까 발길을 끊더라구요. 다음에는 친정식구가 와서 얼마 동안 돌보았죠. 결국 친정도 항복을 하고는 언제부터인가 오지 않았어요. 결국 환자를 병원에 버린 셈인데 우리 병원 입장 역시 어렵습니다. 치료를 중지시키면 살인죄의 형사책임을 져야 하죠. 치료비는 나오지 않죠. 저런 환자들에 대해서 법에서 어떤 제도적 조치를 해줘야 할 것 같아요』
그녀를 보면서 안락사가 떠올랐다. 죽을 권리조차 빼앗긴 그녀는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1975년 4월15일 미국의 뉴저지에 식물인간상태에 빠진 카렌 퀸란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 부모가 보다 못해 법원에다 인공호흡 장치를 떼게 해달라고 청구했다. 법원은 그것은 주치의가 결정해야 할 사항이지 법원의 권한이 아니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사이케비츠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 67세에 IQ가 10, 정신연령은 두 살 정도였다. 重症(중증)의 박약아였다. 말을 전혀 못하고 단지 동작으로 욕구를 전달하는 정도였다. 그 사람은 50년 이상을 州 정부의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불치병인 백혈병에 걸렸다. 그의 후견인이 되는 수용소장이 가정법원에 치료를 중단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신청했다. 그 청구를 받은 법원은 치료중단을 명령했다.
인간은 비참하게 죽지 않을 권리도 있다. 환자가 의식이 잠시라도 회복되어서 치료를 거절하면 의사는 거기에 따라야 할 것이다. 환자와 의사들에게 한계를 명확히 그어줄 기준들이 없어 방황하는 게 우리 의료계의 현실이었다.
한 剖檢醫의 증언
서울대 법의학 교실의 李박사는 의료과오를 밝히기 위한 病理(병리)부검의 전문가였다. 그로부터 이런 경험담을 들었다.
『의료사고가 났다고 생각하면 병리부검하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환자가 사망한 상황을 들어보고 부검을 해보면 사고의 원인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화장을 해버린 경우가 많아요. 의사는 사건을 덮고 싶은 심리에서, 그리고 환자측은 두 번 죽는 걸 싫어해서 부검들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메디컬 이그재미너(medical examiner)가 수술 도중이나 마취 도중에 환자가 죽으면 당연하게 부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사지만 확고한 엄정 중립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병리부검을 하는 의사는 의사편을 드는 편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잘못한 의사를 잘못했다고 해야 정당한 의사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산부인과나 마취과에서 의료사고가 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어요. 심지어 수술 도중 산소를 공급하는 튜브가 빠지거나 기관으로 들어가야 할 관이 식도로 들어가 사고가 난 경우도 있어요. 그렇지만 현장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튜브나 주사바늘을 다 빼고 깨끗이 屍身(시신)을 닦은 후에 병리부검의에게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부검에서 전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산소가 부족한 현상만 발견되는 거죠』
현장을 변경시키면 원인은 영원한 미궁 속에 빠지는 것이다.
『한번은 건강한 여자인데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 수술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수술 후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어요. 수술 도중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심이 생겼지요. 수술기록지를 내가 아는 마취과 의사에게 보여줬더니 당장 「기록을 고쳤구만」 하고 말하는 거예요. 전문가들은 맥박 호흡 등을 적어놓은 것을 보고 당장 파악하지요. 그렇지만 담당 마취과나 외과의사를 불러 물어볼 수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부검의가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는 진료기록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대학병원은 진료기록이나 간호기록 그리고 경과기록을 비교적 자세히 적습니다. 기록이 있으면 환자가 죽기 전의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개인병원의 경우 기록이 부정확하거나 손을 댄 듯한 의심이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국의 검시관은 필요하면 마음대로 의료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런 권한은 검시관도 없고 부검의도 없습니다. 영국의 경우는 의료사고를 판단하는 법원이 따로 있을 정도죠』
그가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점은 로비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 의료사고를 낸 의사에게 연락을 하면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케이크와 돈봉투를 가지고 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의문점을 알기 위해 연락도 못합니다. 또 환자 가족측에서는 같은 의사끼리 짜고 검사를 했다고 불신을 합니다』
그는 정직한 의사였다. 의사 입장에 대해서도 용기 있게 설명했다.
『의료행위 도중에 사고가 난 경우 의사에게 과실이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환자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과연 의사의 과실인지 아닌지 한계적인 상황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 중상 환자의 경우 사망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의사들은 그때도 달려들어야 하는데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의사가 쇄골 밑에 있는 중심정맥의 압력을 재려다가 바늘이 관통해서 한쪽 폐에 피가 고였어요. 결국 胸腔(흉강)내 血胸(혈흉)으로 죽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의사에게 얼마의 잘못을 물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원래의 상황이 죽지 않을 것이라면 의료사고이지만 두개골 골절 등 이미 사망이 필연적인 경우인데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의사의 책임은 과감히 면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또 이런 사례를 들었다.
『수술 도중 대동맥 벽이 약해져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취행위가 혈압을 높여서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위궤양을 치료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이런 때 담당의사들이 그런 것들을 의심할 수 있었는지의 상황을 판단한 후 과실을 묻는 게 필요합니다』
위험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도 방지에 게을렀던 의사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神에서 人間으로 내려온 의사들
무조건 버틴다고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의 무과실 주장에 대해 법원의 판결은 오히려 더 가혹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한 병원 소아과로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가 있었다. 專攻醫(전공의) 2년차인 의사가 아기를 진찰했다. 아기가 항생제를 넣은 정맥주사를 맞게 되었다.
『아기가 10분 전에 우유를 먹고 트림을 했어요』
엄마가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 말에 간호사가 수련의를 보며 『음식물 섭취 직후라 찝찝하네요』라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수련의가 간호사의 걱정을 무마시켰다. 주사 준비를 한 간호사가 침대 위에 눕힌 아기의 정맥을 찾았다. 솜으로 만든 베개를 아기의 목에 받쳤다. 정맥이 제대로 찾아지지 않았다. 근 15분 동안 애를 먹은 끝에 아기의 왼쪽 발등 정맥혈관에 간신히 주사바늘을 꽂게 됐다. 3분 후 아기의 호흡이 정지되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청색증이 왔다. 급히 심폐 소생술을 할 때 아기의 입에서 우유 찌꺼기 같은 이물질이 나왔다. 다시 5시간이 흐른 후 아기가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출생 후 21개월이 되는 아기는 그후 심한 정신지체와 경직성 사지마비를 동반한 뇌성마비가 되었다.
법원은 병원측에 3억4000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우유를 먹인 직후 주사를 놓으면 그 자극으로 먹은 게 역류해서 기도로 들어가 막힐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정맥주사를 놓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과도한 자극을 피했어야 했다고 책임의 원인을 말했다.
절대안정을 지시하지 않은 잘못으로 1억원 배상판결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한 큰 병원에서 금식환자가 처치실로 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웠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卵巢管(난소관) 절제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의사는 禁食(금식)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옆에 있던 동생이 링거병을 들고 보조했다. 그녀가 몇 걸음 걷다가 쿵 하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쓰러졌다. 뇌挫傷(좌상)의 진단이 나오고 그녀는 식물인간상태로서 정신신경기능의 황폐화, 四肢(사지)운동 기능의 마비와 강직의 증상을 일으켰다.
법원은 병원을 경영하는 학교법인에게 2억2000만원의 배상판결을 선고했다. 금식환자면 이동식 침대나 휠체어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게 책임을 묻는 근거였다.
연휴중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병원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급성폐렴에 걸린 열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입원해 있었다. 과장이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휴가를 갔다. 다음날 내과 專攻醫가 여자아이의 병실을 돌아보았다. 전신상태가 쇠약했지만 혈압이 110에 70이고 체온과 호흡상태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과장이 휴가 가기 전 아이의 검사결과표를 보고 抗(항)결핵제의 經口(경구)투여와 폐렴치료 조치를 이미 다 해놓은 상태였다. 전공의도 퇴근했다.
다음날 새벽 2시경 간호사가 그 여자아이의 방에 들어갔을 때 환자아이는 그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간호사는 링거액이 정상적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입원실을 나왔다. 다음날 아침 7시경 여자아이는 죽은 채 간호사에게 발견되었다. 담당 전문의는 아이의 사망원인을 급성폐렴으로 발생한 농과 분비물이 갑자기 기도를 폐쇄한 결과 급성 호흡부전으로 사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법원은 내과 전문의와 병원에 1억원의 배상판결을 내렸다. 내과 전문의가 담당 간호사에게 환자의 절대안정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십 년 전만 해도 흰 가운의 의사선생님들은 神이었다. 복잡한 의학분야는 성역이었고 한마디 묻기도 조심스러웠다. 현재 의학지식은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의료전문방송에서는 의사들도 미처 따라잡기 힘든 새로운 이론들을 대중들에게 쏟아내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엘빈 토플러 박사는 지식의 대중화로 이제 의사들은 神에서 인간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흐르는 물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이 의사들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前職 의사의 고백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30년 동안 신경정신과를 하는 70代의 의사선생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의료사고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의사와 환자 간의 정신적인 교류나 신뢰가 점점 없어지고 상업화되고 있어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분쟁이 생기죠.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나는 인간의 半도 알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어떤지 아세요? 환자가 죽으면 다 의사책임이래요. 산부인과에서 나온 아이가 20년 후에 죽어도 그 아이를 분만시킨 산부인과 의사 책임입니까? 어떻게 그 원인을 다 알겠어요? 이건 완전히 의사를 神으로 취급하는 거죠』
그의 말은 의사들의 가슴속에 앙금으로 남은 공통된 불만이었다.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요. 제가 실수한 거 한번 자백해 볼까요.
25년 전 정신분열증 환자였는데 제 의원에 온 지 사흘 만에 죽어버렸어요. 그 가족이 제게 찾아왔어요. 제가 잘못을 스스로 먼저 시인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제 잘못이 뭔지 모르지만 일단은 관리소홀 책임은 인정해야 할 거 아닙니까? 제가 장례비랑 돈을 줬더니 유족들이 오히려 미안해 하더라구요』
명문고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찌감치 의원 문을 닫고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주유소를 하는 의사가 있었다. 그를 찾아갔다. 주유소답지 않게 사장실의 책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의학서적들이 꽉 차 있었다. 의사를 그만둔 사장은 회의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고백했다.
『의료보험료 때문에 환자 한 사람에 몇푼 받지 못해요. 요새 커피숍에 가보쇼. 커피 한 잔도 의사의 치료비보다 많아요. 그 가격으로 솔직히 의원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설사 그렇게 몇 년을 갔다고 합시다. 요즈음같이 환자들이 매사 의심의 시선으로 보는 세월에 의료소송 한 번 걸리면 그걸로 망하는 거죠. 의사가 神입니까? 어떻게 실수를 안 할 수 있어요?
물론 환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보면 되지요. 죽든 말든 숫자만 채우면 되고 사고가 나면 역시 돈으로 때우면 된다는 장사꾼이 되면 말이죠. 그러나 정말 자존심 있고 진정한 의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의원을 꾸려갈 형편이 안 됩니다. 병아리 의사하고 30년 경력의 의사하고 의료수가가 똑같은 게 우리 현실이에요. 사회적으로야 남보다 잘나 보이던 의사를 때려잡으니까 모두 속이 시원하겠지. 누가 나서서 의사를 변호해 주겠어요? 정부는 의사의 손해 아래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만 결국 의사들이 문을 닫고 폐업을 하면 그 손해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어요. 국민에게 가는 거 아닙니까?』
슈바이처 대신 목수를 택하다
그렇다면 성공한 의사의 속은 어떨까? 국내 최대의 재벌병원에서 책임자로, 또 교수로 성공했다는 K박사와 만났었다. 친구인 그는 이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하루에 100명씩 외래환자를 보고 다른 날에는 일곱 건에서 여덟 건 정도 수술을 하지. 회진을 돌고 학생지도에 연구에, 게다가 연구소 직원들 벌어먹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연구비 구걸하는 게 의과대학 교수야』
그가 自嘲的(자조적)으로 내뱉었다. 그는 솔직한 성격이었다.
『학생들에게 의사가 돈을 따라가면 그날로 의사로서의 생명은 끝난다고 가르쳐. 그런데 그게 씨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 거야. 학생들 중 상당부분이 醫術(의술)은 돈버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의사만 되면 변두리에 환자가 많을 곳을 골라 서너 명이 자본을 합쳐서 돈을 벌기 위해 무섭게 뛰지. 그런 경우는 의료윤리도 없고 그저 장사꾼이 되는 거야』
그는 재벌병원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나 정도 되는 간부들이 정기검진을 많이 유치해야 돼. 거기에는 상업적인 속셈이 많지. 병원수입 때문에 마구잡이로 필요 없는 검사를 시켜. 솔직히 2000베드 이상 되는 종합병원이 흑자를 낸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런데도 우리 병원은 정기검진 이익만 금년에 55억원이 넘더라구. 그렇다고 그게 의사에게 오는 것도 아니야』
그 교수도 역시 가장 겁을 내는 분야는 의료사고였다.
『의대 교수 입장인데도 심심치 않게 피의자가 돼서 조사를 받아. 말로는 의사를 존경하는 척하지만 막상 조사받아 봐. 세상이 의사에 대해 얼마나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나를 당장 알게 돼. 툭하면 환자 가족들이 병원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고 고소를 하니까 방어진료를 하게 되는 거지. 위험한 중환자나 응급환자, 노인환자를 기피하고 진료 중 발생하는 몇만분의 일도 안 되는 합병증이나 부작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검사를 남발하지. 난치병에 대한 도전은 이제 하면 안 돼. 그게 요새 의사들의 태도야』
그는 또 의사로서 다른 고충을 늘어놓았다.
『내가 대통령 주치의 팀에 있었던 일이 있어. 어느 날 아침에 테니스를 치고 나서 대통령이 머리에 드라이를 하다가 손등을 홀랑 덴 일이 있어. 시중을 드는 사람이 뜨거워진 드라이를 대통령에 줬던 모양이야. 그날 맞이할 사람이 많은데 악수 못하면 큰일이라고 비서실에서 난리를 치는 거야. 주치의를 비롯해서 온 서울의 의사들에게 비상이 걸렸어. 어떤 연고를 발라야 흉터가 남지 않느냐, 그리고 낮에 당장 악수를 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통증을 안 느끼느냐가 토의됐지. 나는 옆에서 보조의사로 대통령의 손에 연고를 바르고 위로 아래로 호호 불고 별짓을 다했어』
의사생활을 그만두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는 친구가 있었다.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한 지방 병원 방사선과를 책임지며 15년 가량을 근무했었다. 그는 뉴질랜드로 가서 목수가 되겠다고 목공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슈바이처를 존경하던 그의 의사로서의 회한은 이랬다.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돈에 젖어 있으면 그건 끝나는 거야. 그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어. 그리고 자기가 정말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면 다른 모든 걸 제쳐놓고라도 그 환자를 봐야 돼. 그런데 현실은 나를 포함해서 그렇지 못한 의사들이 많아. 그게 우리 의사들의 현주소라고 자아비판을 해』
그의 표정은 의사들을 대변하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의사의 고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설령 가슴이 열려 있는 판사라고 하더라도 그걸 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확률은 작지만 의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환자가 덜컥 하고 가버리는 경우 그 의사한테 돌을 던질 줄은 알아도 이해해 줄 사람이 지금 어디 있어? 정성을 다하는 의사의 판단 미스에 대해 어느 누가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 의사는 결코 神이 아닌데 말이야』
의사들끼리의 「개싸움」
의사들 중 비난대상은 서울 근교의 목 좋은 곳을 잡아 환자의 숫자와 돈에만 집착하는 개업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또다른 분명한 논리가 있었다.
1999년 11월 말 어둠이 짙어질 무렵. 서울 근교 A시의 중심가 함석담장에 둘러싸인 장방형의 넓은 땅 앞에서였다. 담장 한가운데에 흰 페인트 칠로 「산부인과 신축부지」라는 글자가 보였다. 건평 2500평의 병원이 들어설 그 땅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K원장이 입을 열었다.
『제 평생의 꿈이 큰 전문병원을 설립하는 거였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의료소송을 당한 그의 핏발 선 눈에는 집념이 어렸다. 그는 소송을 개의치 않고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병원을 키워온 또다른 모습의 의사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나이 50이 되도록 화장실 한번 마음 편하게 다녀온 적이 없어요. 마취과 의사인 집사람하고 병원 구석방에 처박혀 잠자고 진찰하고 수술하고 그렇게만 살아왔어요. 전문병원만 완성되면 그때부터 저도 인간답게 살 겁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또 살아남는 사람은 있는 것이다. 일부러 변두리 공단을 찾아간 그는 위기를 또다른 기회로 만들었다.
『의사끼리 진흙밭에서 개싸움 하는 경우를 한번 얘기해 드릴까요? 제 병원이 잘된다는 소문이 나니까 제가 세든 건물의 같은 층과 아래층에 산부인과가 개설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같은 의사끼리 저한테 오는 환자를 빼앗아요. 직업윤리고 뭐고 없는 게 우리 의료계의 현실이에요』
나는 그의 성공과정이 궁금했다. 명문의대를 나온 친구들이 회의를 하는 데 반해 그는 좋은 학벌은 아니었다. 선망받는 병원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정부에 있는 병원에 취직해 다녔어요. 통근버스 안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는 마취과 의사였죠. 통근차가 서울로 들어서면 길거리에 산뜻하고 세련된 산부인과의원 건물을 보면서 언젠가 우리도 저런 병원을 가져보겠다고 꿈을 꿨습니다. 저나 아내나 둘 다 집안이 여유 있는 형편이 못 됐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아주 늦었어요. 오십 가까운 지금에야 애가 여섯 살이거든요』
병원부지 주위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신도시의 건물들에서 밝은 불빛들이 명멸했다. 그가 계속했다.
『여기가 처음 개발될 때 저희 부부는 조그만 건물의 한 층을 빌려서 산부인과를 차렸어요. 저하고 아내는 무지무지하게 열심히 일했죠. 인건비가 아까워서 마취과 의사인 아내가 직접 모든 일을 보조해 왔어요. 마취과 의사에, 간호사에, 환자들 밥해대고 빨래하는 일을 다 했어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였어요. 집사람은 늦은 임신인데도 과로 때문에 유산을 여러 번 했어요. 그제서야 저는 돈이 다가 아니구나 하고 간호사를 두기 시작했어요』
우리들은 밤거리를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수시로 허리가 아픈 듯 몸을 비틀었다. 배가 나오고 걸음걸이가 무거워 보였다.
『운동은 안 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지금까지는 운동을 할 틈이 없었는데 앞으로 전문병원이 완성되면 해야지요…』
그가 씩 웃었다. 그는 수시로 의료소송에 걸렸다. 환자의 가족들이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해도 견뎠다. 방송사에서 카메라를 들고 와서 찍어 뉴스에 방영해도 끄떡도 안 했다. 경찰이 불러도 또 법원에서 소환해도 그는 늠름하게 몇 건의 수술을 하면서 버티는 강철이었다. 그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의료분쟁의 본질이 마음속에 정리되고 있었다. 분쟁의 배경은 낮은 보험수가 속에서 의료의 상업화였다.
『제가 소송 걸린 이유를 보니까 제가 그 옆에 꼭 붙어 있지 않았다는 걸 흠으로 삼았는데요,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 산부인과 의사의 경우 어떤 사람이 그 돈 받고 한 産母 옆에 몇 시간이라도 붙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해요. 외래환자를 보다가 수술실로, 또 분만실로 정말 다리 사이에서 요령소리가 나게 뛰어다녀야 병원을 유지할 수 있어요. 저의 경우 개업을 하고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꿈도 꿔보지 못했어요. 그나마 수술이 있으면 굶을 때도 많아요』
産母의 입장은 정반대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기대감은 절대적이다. 수요자들은 의사의 계속되고 자상한 보호 속에서 분만이 완벽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분만이 원만치 않을 경우 그 분노와 좌절감은 엄청나다. 특히 장애아를 낳았을 경우 양육비는 엄청나고 사회적 도움은 없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해서라도 재정적인 보조를 얻으려는 게 아이 부모들의 심리다. 産科 의사의 경우 두 생명을 취급해야 하고 진단으로 뱃속의 태아를 완전하게 판단하는 것을 산모들은 원한다.
의사의 설명 의무
2년 전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대강의실에서 토의가 있었다. 서울 인근의 주요병원 병원장이나 기조실장, 의료전문 변호사, 담당판사의 자유로운 토론장이었다. 병원장이자 의과대학 총장인 전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사고가 났을 때 더 잘할 수 있지 않았냐는 각도에서 보면 20~30% 더 향상시킬 수도 있다고 솔직히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공장의 어떤 물품에도 불량품이 있는데 병원은 절대 완벽하라는 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원로급 의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3분 진료로 완벽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라는 건 무리라는 의견들이었다. 전박사가 계속했다.
『보상한도가 커질수록 진료가 위축되고 과잉검사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피해는 국민들이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 다음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기획실장의 발언이었다.
『의사들이 불가항력을 어떻게 기본 상식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습니까? 환자나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멀쩡하게 걸어서 병원에 왔다가 죽어나가는 걸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의사 입장에서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법적인 과실책임을 쓰는 건 억울합니다. 그리고 현행 의료수가 체제에 비해 손해배상액이 너무 커요. 5만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수술준비도 그만큼밖에 하지 못합니다. 완벽하게 하려면 30만원 정도 든다고 가정할 때 수술준비의 미흡을 과연 의사측의 책임으로만 돌려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분쟁비용이 의료코스트에 산입되지 않고 있어요』
참석한 의사들 중 상당부분은 손해배상은 치료비로 받은 것만 되돌려 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왜 의사가 아이의 평생을 책임질 돈을 내야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참석했던 원로의사들은 그 자리에 참석했던 판사를 보면서 법원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판사가 소송을 진행하면서 느낀 감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심리를 하다 보면 의사의 감정서에 대한 신뢰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편들어 주기 감정이라는 뜻이었다.
『전문성이 약한 우리 판사들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의사한테 묻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말 감잡기 식으로 판단할 때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꼬투리가 책임의 근거로 나오기도 하고요. 어쨌든 공정하고 객관적인 의료감정이 있어야 공정한 판결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 현상은 독일 등 외국에서 먼저였다. 밀실 같은 수술실 내부에서 발생한 일은 관련자들이 입을 닫으면 규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법은 의료인들의 공모를 눈감아주고 피해를 방치할 수 없었다. 여기서 태어난 법이론이 설명 의무다. 구체적인 의사의 잘못을 꼬집지 못한 법원이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을 제대로 못했으니까 배상해야 된다고 판결이유를 만든 것이다. 의사가 아무리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주장해도 법원이 부족했다고 판단하면 그만이었다. 설명 의무 탄생의 저변을 모르는 의사들이 어디까지 설명해야 완벽하게 면책되는지 우왕좌왕하는 게 당연하다.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 구별하기
그에 대해 환자측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나섰다.
『소송에서 첫 재판이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환자측에서는 진료기록부를 입수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평가 분석을 못하게 됩니다. 감정을 신청해도 나오는 결과는 병원측의 어려운 입장만 그대로 반영해주는 결과가 나오는 게 상당수 있어요. 환자측에서는 난공불락의 그 결과를 뒤엎기가 힘들어요』
그런 의견에 대해 뒷줄에 앉았던 연세대학병원 기조실장이 이렇게 항의했다.
『유수병원의 의사들은 그래도 감정을 공정하게 합니다. 저도 감정하라는 법원의 부탁이 들어오면 주말에 집에 앉아서 모든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고 최소한 저의 양심에 어긋나는 감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앉아계시는 선생님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의료계의 원로 황박사가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의료행위가 불법행위라는 법률용어로 평가된다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의사들은 책이나 저널대로 못합니다. 똑같은 병을 똑같이 치료해도 다 다릅니다. 통계라는 건 하나의 가이드 라인이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법에서는 절대적 기준을 추궁합니다. 의료사건 기록을 보면 그게 재판인지 최첨단의 메디컬 컨퍼런스인지 구별하지 못하겠어요.
모든 의사가 백점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사건기록들을 보면 의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솔직히 현실에서 어떤 환자를 보면 이 환자는 글렀구나, 희망이 없구나 하고 판단했는데도 나중에 완쾌해서 멀쩡히 걸어나가는 수도 있어요. 의사도 왜 그런지 모르죠. 또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치료했는데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환자도 봤어요. 사람이 죽으니까 환자 가족들은 우선 소송을 걸고 보죠. 법원은 의사가 돈 많다고 생각하고 조지죠』
결국 각자 판단하는 잣대가 구구 각색이었다. 실력 있고 성실한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많았다. 문제 중의 하나는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를 구별하는 객관적인 심판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법이 색출해야 할 대상은 과실을 은폐하고 의료윤리를 팽개치는 의사였다. 부정한 의사를 퇴출시킬 때 진정한 의사가 대접받을 수 있다. 경제학자 그레셤의 법칙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를 보던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손교수의 주장은 이랬다.
『미국에서는 의료사고가 나면 담당변호사가 녹음기를 들고 의사를 찾아와 현찰 600달러를 주고 인터뷰를 해요. 양복을 깨끗이 받쳐입은 의사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인터뷰에 정직하게 임해요. 또 미국에서는 의사에게 불리한 감정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소송에서 져도 의사가 그 배상액을 부담하지 않고 보험에서 지불합니다. 의사의 잘못이 공정하게 드러나고 합당한 배상이 지불됩니다. 우리 의료제도도 그런 점을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