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간첩법은 고쳤는데, 간첩 잡을 사람이 없네”

국가정보연구회, 창립 5주년 기념식·컨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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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정주진 연세대 연구교수, 신언 국가정보연구회장,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임성재 동국대 객원연구원. 사진=월간조선

간첩죄 적용 대상을 기존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까지 넓히는 형법 일부개정법률이 지난 3월 12일 공포됐다. 전문가들은 법 개정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정보기관 역량 공백과 ‘영향력 공작’이라는 새로운 위협 앞에서 개정만으론 부족하다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국가정보연구회는 27일 서울 광화문 세종연구소에서 창립 5주년 기념식과 함께 ‘간첩법 개정의 의의와 향후 과제’를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고 개정 간첩법의 의미와 한계를 집중 점검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 신언 국가정보연구회 회장,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등 정보·안보 분야 전문가 100여 명이 참석했다.


신언 회장은 개회사에서 최근 국제정세를 언급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충돌, 미국의 대외 군사행동을 사례로 들며 “현대 정보활동은 휴민트·테킨트·이미인트·시긴트·사이버·물리 작전이 결합된 ‘복합예술’ 형태로 작동한다”면서 “‘우리 안보의 최대 위협은 북한’이라는 국정원의 대북 인식이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권과 언론의 비판이 정보기관의 본질과 역량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정보기관의 ‘머슬메모리’와 조직문화가 중요하다”면서 최근 국정원이 워라밸 기조 속에 일반 행정기관처럼 변하고 있다는 내부 우려도 전했다. 대통령과 국정원장이 확고한 정보철학을 갖고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외눈박이 정보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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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국가정보연구회 창립 5주년 기념식 및 컨퍼런스에서 축사 중인 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 사진=월간조선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축사에서 국제질서를 ‘파국 상태’로 규정했다. 그는 “세계는 다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구조로 이동 중”이라면서 미국 역시 고립주의와 거래적 세계관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각자도생의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군·외교·정보를 포함한 국가안보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우리 정보 기능은 되레 약화했다고 비판했다. 이 전 원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 역량이 기형적으로 퇴화했다”면서 대공수사권 박탈과 국내정보 기능 폐지로 내부안보 대응이 어려워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정원은 국내 안보 위험을 모니터하는 기능이 빠진 ‘외눈박이 기관’이 됐다”고도 했다.


간첩법 개정에 대해서는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짚었다. 그는 “산업스파이를 간첩죄로 처벌할 근거가 마련된 점은 의미 있다”면서도 “다만 법이 작동하려면 이를 탐지·적발할 정보 기능이 필수”라고 했다. 간첩 수사는 단순 치안 문제가 아니라 해외·국내 정보가 결합된 고도의 전문 영역이라는 설명이다. 이 전 원장은 “이 상식이 무시되면 간첩죄는 조문으로만 남는다”고 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축사에서 연구회의 지난 5년간의 성과를 짚으면서 특히 연구회가 기존의 억지력 중심 접근을 넘어 ‘영향력 공작’이라는 개념까지 논의의 지평을 넓힌 점을 언급했다. 연구가 정책과 전략으로 이어져야 한다고도 했다.


2014년 이후 간첩 검거 ‘0건’


이후 토론에서는 개정 간첩법을 안보 법체계 전환의 분기점으로 볼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형법 제정 이후 73년 만에 간첩죄 조항이 개정됐다”면서 “그간 북한을 ‘적국’으로 보지 않는 판례에 의존해왔고, 외국을 위한 간첩 행위는 처벌 근거가 없었는데 이번 개정으로 보완됐다”고 했다.


다만 한계도 분명하다고 했다. 유 원장은 “외국 등의 지령 없이 개인이 단독으로 기밀을 탐지·수집·누설하는 행위는 처벌 근거가 없다”면서 “국가기밀의 개념과 범위도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외국 간첩과 적국 간첩 간 형량 차이, 형법과 국가보안법 적용 충돌 문제도 언급했다. 그는 “비국가행위자까지 포함하도록 간첩죄 범위를 확대하고, 국가기밀 정의를 입법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수사체계 문제도 제기했다. 유 원장은 “2014년 이후 경찰의 간첩 검거는 0건”이라면서 “게다가 경찰청 안보수사단 인력의 70%가 내란 수사에 투입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정원 수사권 원복이 어렵다면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수사청 신설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주진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는 수사·정보 기능 분산 문제를 짚었다. 개정 형법과 중수청 출범으로 간첩 수사는 중수청이 맡게 된다. 반면 관련 정보는 국정원, 경찰, 방첩사에 흩어져 있다. 이 구조가 유지되면 업무 중복과 비효율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중수청에 정보·수사 통합 조정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영향력 공작’은 사각지대


장석광 사무총장은 ‘영향력 공작’을 핵심 공백으로 꼽았다. 장 사무총장은 “국회·정부 동향 보고, 산업정책 사전 파악, 학계·언론 네트워크 정보 등은 정보 가치가 높지만 현행법상 ‘국가기밀’로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면서 “온라인 여론조작, 조직적 댓글 활동, 허위정보 유포, 싱크탱크·언론·시민단체를 통한 정책 개입도 간첩 행위로 포착하기 어렵다”고 했다. 요컨대 간첩의 목적이 주로 사회를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현행 간첩법으로는 잡기가 힘듦으로 범위를 ‘영향력 공작’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안으로 중국의 반간첩법,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을 제시했다. 접촉·협력 단계까지 규율하거나, 등록과 공개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국내에 대해서는 정보기관 역량 강화, 미디어 리터러시 제고, 한국형 외국대리인등록제 도입 검토를 제안했다.


최성규 고려대 국제법 연구교수는 간첩법의 틀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전통적 간첩 개념이 ‘적국’과 ‘군사기밀’ 중심이라면, 최근은 ‘정보안보법’으로 확장되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이는 여론 분열, 정치 개입, 영향력 정보전까지 포함하는 방향이다. 

 

최 교수는 영국, 중국, 독일의 입법례를 비교하며 “한국도 전통적인 간첩법 논의를 넘어 정보법 또는 정보안보법이라는 더 큰 틀로 논의를 전환하고, AI·사이버·데이터 환경에 맞는 입법과 함께 국가정보에 대한 국민 신뢰 확보 장치를 중심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성재 동국대 북한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은 개정 간첩법이 외국 스파이 처벌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국정원이 방첩과 국익 보호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됐다”고 했다. 반도체, 방산 등 핵심 산업 영역까지 방첩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름 없는 별’ 배지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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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에서는 무명의 헌신을 기리는 상징으로 제작된 기념 배지 ‘이름 없는 별’도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됐다. 사진=월간조선

 

이날 행사에서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무명의 정보요원을 기리는 상징으로 제작된 기념 배지 ‘이름 없는 별’도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됐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손광주 북한인권단체 상임대표, 김희곤 전 한국정책학회 전략부회장, 김주성 대한민국구국혼선양회 공동대표, 성종환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등 17명이다. 이름 없는 별은 드러나지 않은 채 국가안보를 지탱해 온 이들의 희생과 책임을 상징한다. 배지는 권태오 예비역 육군 중장이 직접 도안하고 자비로 제작했다. 


창립 5주년을 맞은 국가정보연구회는 2020년 12월 한국행정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국가정보기관과 국가안보수사권 문제를 다룬 세미나가 모태가 됐다. 그해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단계적으로 경찰로 넘기는 내용의 국정원법 전부개정이 이뤄졌고, 이를 계기로 전직 정보요원과 연구자들이 국가정보와 정보기관의 역할, 정보공동체의 훼손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연구회는 이후 2021년 3월 한국행정학회 분과위원회로 출범했고, 이후 연평균 10회 안팎의 세미나와 연구지 발간, 외부 연구기관 협업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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