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김중만 별세.... <월간조선> 과거 인터뷰 보니

"대한민국이 작정하고 이 김중만이를 예술가로 만든 겁니다"
  • 월간조선 뉴스룸
  • 업데이트 2023-01-01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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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중만 씨가 2022년 12월 31일, 향년 68세로 별세했다. 김 씨는 폐렴으로 투병하다 이날 오전 10시께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1월1일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며 발인은 1월3일이다.
국내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사진작가로 인정받았던 그는 국내 최초로 아프리카 사진집을 냈으며, 국내 톱스타들의 사진을 찍었다. 2006년부터는 상업사진을 찍지 않고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박정희정권 시절과 전두환정권 시절 추방당한 바 있다. 첫번째는 프랑스 국적으로 국내에서 허가없이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였고, 두번째는 신상옥-최은희 탈북 직후였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2005년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다시 조명한다.
06 2005 MAGAZINE


 

[인물 연구] 영원한「언더그라운드」사진작가 金重晩

『대한민국이 작정하고 이 김중만이를 예술가로 만든 겁니다』이근미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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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국외 추방, 마약복용과 투옥이라는 긴 터널을 지난 사진작가 金重晩은 한국에서 가장 비싸고 바쁜 사진작가다. 오십을 넘긴 그는 삶의 기록을 쉬지 않고 필름에 남기고 있다.

金重晩
1954년 강원도 철원 출생.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 서양화과 수료. 1977년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선정. 「북경의 나날展」(맥화랑), 「A Propose展」(조선일보 미술관), 「아프리카 여정展」(성곡미술관), 광주비엔날레(2004) 등 개최.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 운영. 저서 「동물왕국」, 「아프리카 여정」, 「애프터 레인 1·2」 등.
꽃 사진을 찍는 남자
  지난 4월21일 서울 명동의 롯데호텔 명품관 에비뉴엘 2층 「더 갤러리」에서 사진작가 金重晩(김중만·51)씨의 전시회가 시작됐다. 이파리도 없이 오로지 꽃만 내려찍은 사진은 회화작품 같았다.
 
  오후 3시, 선글라스를 낀 金重晩씨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땋아 내린 레게머리에 캐주얼 의상을 입은 金重晩씨는 20代 차림이었다. 쉰한 살, 知天命(지천명)의 나이지만 파격적인 패션이 그와 잘 어울렸다.
 
  100여 명의 관객들 앞에서 그는 꽃 사진 전시회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사실 15년 전부터 꽃 사진을 찍었습니다. 남자가 무슨 꽃을 찍나 그런 얘기를 할까 봐 쑥스러워서 발표를 안 했어요. 이 꽃들은 양재동 꽃시장이나 동네 꽃집 같은 데서 구해서 찍은 겁니다』
 
  50代 여성 관객 두 사람이 『우리가 이런 데 아니면 어디서 金重晩씨를 만나겠어』라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4월27일, 경기도 양평 「엘렌 킴 머피 갤러리」에서 영화 「외출」의 포스터 촬영이 있었다. 주연을 맡은 영화배우 배용준씨는 金重晩씨의 사진을 이렇게 평가했다(배용준씨는 사진 촬영이 취미다).
 
  『차가운 느낌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인간 냄새가 나는 사진이에요. 金重晩 선생님은 작업할 때 모델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그렇게 숨겨진 표정을 찾아내는지 놀랍죠』
 
  포스터 촬영 작업은 오후 늦게서야 끝났다. 촬영 현장에는 학교 수업을 빼먹고 온 고등학생, 두릅나물을 캐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김중만씨에게 사인을 받고 기념촬영을 했다. 金重晩씨는 『사진을 전공하고 싶다』는 고교생에게 따로 시간을 내서 20여 분간 조언을 해주었다.

  『사진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오면 제일 좋아요. 제가 프랑스에서 사진을 공부할 때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질문하면 누구나 대답을 잘 해줬어요. 그렇게 배웠으니, 저도 누가 찾아오면 친절하게 답변하려고 애를 씁니다』
 
  金重晩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라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진이론가 신수진(연세大 인지과학연구소 전문연구원)씨는 金重晩씨를 이렇게 평가했다.
 
  『金重晩씨는 드물게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입니다. 유명인 초상사진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별도로 풍경사진을 찍으면서 작가적 감수성을 일관되게 유지했습니다. 대중적인 지명도가 있으면서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어 젊은 사진가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사무실
 
   4월28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金重晩씨의 사진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방문했다. 소파에 편하게 앉아 전화를 걸고 있는 金重晩씨 머리 위로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앵무새類인데 한두 마리가 아니고 10여 마리나 됐다.
 
  꽉 막힌 세상, 그 한계 속에서나마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스튜디오는 그리 넓지 않았다. 암실은 화장실을 겸하고 있었고, 그래픽 디자이너가 일하는 방과 사진을 보관하는 방을 제외하면 남은 공간은 20평 정도였다. 그곳을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쪽 공간이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사진을 찍는 곳이다. 1000명 정도 찍었다니 유명한 배우는 이 스튜디오를 거의 다 거쳐간 셈이다. 金重晩씨는 『송강호씨를 아직 안 찍었다. 찍고 싶은데 곧 올 거 같다』고 했다.
 
  ―인기 연예인들을 많이 찍었으니, 돈을 꽤 벌었겠습니다.
 
  『사진촬영을 의뢰하는 언론매체에서 원고료를 얼마 주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많지 않습니다』
 
  ― 그래도 최고 인기 사진작가인데.
 
  『잡지에 실리는 사진은 제 작품입니다.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제 뜻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개런티가 적은 겁니다. 하지만 제 작품으로 영원히 남는 거죠』
 
  金重晩씨는 『50代에 현장에서 일하는 사진작가는 거의 없다』고 했다.
 
  『저는 제 자신이 主流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도 저는 「언더그라운드」고 「아웃사이더」죠. 그러나 단 하나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사진가의 수명 연장에 기여하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는 광고사진을 찍지 않는다.
 
  『광고사진을 찍으면 돈을 엄청나게 받죠. 하지만 이미 모든 컨셉트가 정해진 상황에서 작가는 창의성 없이 그저 셔터만 눌러야 합니다. 상업사진은 하루에 1000만원에서 1500만원을 받을 수 있어요. 저도 인간관계 때문에 일년에 한두 차례 그런 사진을 찍긴 하지만, 광고사진은 안 찍는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사진은 순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9년 아프리카에서 카메라를 다 잃어버린 뒤 카메라 장비와 필름 5만 달러어치를 외상으로 구매했다. 아직도 빚을 다 못 갚았다고 한다.
 
  『내 집을 작년에 마련했어요. 사진으로 돈을 만들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가능하면 돈이 안 되는 사진을 하려고 했죠. 단지 지금 상황에서 고마운 건, 상업적인 일을 많이 안 하면서도 수익이 굉장히 좋다는 점입니다』
 
  전시회에서의 사진 판매, 가요앨범 재킷 사진이 그의 主 수입원이다. 지난해부터 사진 전시회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영화 포스터 사진 의뢰가 늘어나 그의 주머니 사정이 호전될 조짐이다.
 
  『앨범 재킷이나 영화 포스터는 작가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개인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작업이 많이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아버지
 
   金重晩씨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가 열일곱 살이던 1971년, 아버지가 정부 파견의사로 서부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부임하면서 그의 인생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정말 황당했어요. 전기도 없는 완전한 시골이었죠. 「대체 뭐가 좋다고 여기 오신 걸까」,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이듬해에 프랑스로 가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아버지에게 단 한번도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주실 수 없었죠.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살면서 자급자족했어요. 몸 파는 일 말고는 다 했어요. 접시닦는 일을 가장 많이 했을 겁니다』
 
  그의 아버지인 외과의사 김정씨는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간 아프리카에서 의술을 펼쳐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너는 의사 아들인데 늘 돈도 없고 가난하냐」고 해서 어린 나이에 「우리 부모는 나를 왜 안 돌보나」 그런 생각을 했죠. 한참 지나서 「아버지가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형편이 안 되니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金重晩씨는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어느 날, 친구의 사진 작업을 도와주러 암실에 따라 들어갔다가 단 5분 만에 하얀 종이에 그림이 생기는 데 매료되어 사진에 빠져 들었다.
 
  그는 1977년 프랑스 아를르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그해에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에 선정되었다. 그때까지 선정된 80人의 사진작가 가운데 최연소였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와 「보그」 등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영화배우 오수미와 결혼
 
   1977년에 한국에서 한 차례 사진전을 연 그는, 1979년 귀국하여 사진전을 열고 한국에 정착했다. 그는 1980년 영화배우 오수미씨와 결혼했다. 당시 오씨는 남편 신상옥 감독이 북한으로 납치되는 바람에 두 자녀와 살고 있었다.
 
  아이 둘을 가진 여배우와의 결혼은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작품 외적인 걸로 화제에 오르면서 사진 작업에 지장을 받진 않았나요.
 
  『오히려 오기가 더 생겼고, 사진에 더 파고드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는 사진가고 사진으로 미쳐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그런 생각을 했죠』
 
  1985년과 1986년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그는 국내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까지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적으로 전시회 했다고 추방

 
   『1977년과 1979년에도 사진 전시회를 했는데, 그때는 제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어서 괜찮았던 거죠. 국적 때문에 전시회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추방은 한 사람의 삶이 갑자기 낯선 시간과 공간 속으로 떨어지는 걸 의미합니다. 정말 참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죠』
 
  미국으로 건너가 코닥사진점에서 하루하루 벌어 방세 내고 밥 사먹고 필름 사서 사진을 찍었다. 괴로움 속에서 마약에도 손을 대게 됐다. 1988년에 그는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오수미씨는 1990년에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그 몇 해 전엔 오수미씨의 여동생이 실종되어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다.
 
  ―두 자매의 연이은 사고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굉장히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죠. 해결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계속 생각한 건 아닙니다. 제 자신이 굉장히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내가 왜 추방당했을까. 내가 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지낼 수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마음은 괴롭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게 살다보니 생각을 많이 할 겨를이 없었어요』
 
  ―오수미씨 얘기를 꺼내서 마음이 불편하진 않나요.
 
  『이젠 괜찮아요. 삶을 불행하게 마무리 한 것이 마음이 아프죠』
 
  ―한국 사회와의 부조화가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1970년대 말에 귀고리를 단 남자는 나밖에 없었어요. 나의 생활방식이 당시 한국사회와 마찰을 일으켰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내가 사람들에게 오해의 여지를 줄 수 있는 삶의 배경을 갖고 있잖아요. 프랑스에서 사춘기를 보냈고, 외롭게 혼자 외국생활을 오래 했잖아요.
 
  나로서는 정말 고통스러운 생활이었지만, 「의사 아들이 외국 물을 먹고 와서, 정신 못 차린다」고 밉보이는 요소가 됐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제가 좀더 조심하면서, 좀더 절제하면서 살아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지금은 하죠』
 
 
 
 억울한 옥살이 그리고 이혼
 
   미국에서 돌아온 후 마약에 손을 댄 그는 1993년에 구속됐고, 그 후 마약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런데 패션모델 이인혜씨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고 잘 살던 1996년, 金重晩씨는 다시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됐다.
 
  『예전에는 마약을 했던 사람은 검사가 심증만으로도 구속해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어요. 惡法 중의 하나였죠. 저는 완전히 마약을 끊었지만 주위에서는 몰래 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 놓고 보름 동안 모발검사를 했어요. 마약을 안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니까 풀어 주었어요. 이미 나는 마약 복용으로 구속된 걸로 언론에 보도되었고, 실망한 아내는 저와 이혼을 했죠』
 
  ―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그때는 정말 괴롭고 죽고 싶었어요. 정신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나라가 나를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했구나」(웃음) 그런 경험이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 거 같아요』
 
  1996년에 그는 아들 네오와 미국에 가서 다시 힘든 생활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사진이었다. 아파트 월세 낼 돈이 없어 어린 아들과 거리에 내몰릴 상황에도 자신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위기를 넘겼다.
 
  오해가 풀리고 아내 이인혜씨와 再결합했다. 1998년 12월15일 온 가족이 아프리카로 향했다.
 
아프리카와 아버지를 再발견
 
   『부모님께 다시 시작한다는 인사를 드리러 갔어요. 그런데 1999년 1월1일에 카메라를 몽땅 도둑맞았어요. 「아프리카가 날 붙잡고 있구나. 나에게 뭘 하고 가라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물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어요.
 
  15년 전부터 찍으려고 했지만 전기도 없는 열악한 곳을 다니면서 작업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카메라도 없어지고 돈도 없으니 가장 힘든 걸 할 결심이 생기더군요. 바로 카메라를 외상으로 구입해서 동물 사진을 찍기 시작했죠』
 
  봉고차로 몇 시간을 다녀야 한 무리의 동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험난한 길을 찾아나서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며 『그제서야 열악한 아프리카에서도 항상 웃으며 행복해 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99년에 귀국해 아프리카 동물 사진 전시회를 하고 「동물왕국」(김영사 刊)이라는 책을 펴냈다. 전시회와 책이 큰 호응을 얻었고, 언론에서 金重晩씨를 새롭게 조명했다. 처음으로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전까지 우리나라 작가가 찍은 아프리카 사진이 없었어요. 「이건 내 아들과 또래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다. 나를 위한 게 아니고 남을 위한 작업이다」 그런 생각으로 작업했는데 그게 인정받은 거죠. 그 전까지 나는 계속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스캔들 중심으로 나를 봤어요. 2000년부터 나를 사진작가로만 봐줘요. 그게 기쁩니다』
 
  ―사진이 「어둡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언제부터 밝아진 겁니까.
 
  『1970년대는 혼자 살았지만 행복했어요. 그때는 사진이 밝았지요. 적나라한 모습의 여자도 찍었어요. 1980년 이후로 방황하는 삶이었죠. 추방당하고 이혼당하면서 내가 우울하고 어려운데 밝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어요. 1990년대 들어와서 비로소 정체성을 얻게 되면서 사진이 서서히 밝아지게 되었죠』
 
  金重晩씨는 『마음의 안정과 평온을 얻게 된 것은 부모님의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열악한 곳에서 행복하게 사셨어요. 어머니와 제가 아프리카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판 적이 있어요. 부모님은 소박하고 담백하고 순진한 삶을 사셨어요. 선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 무언으로 보여 주셨죠. 아버지는 진료하는 모습을 못 찍게 했어요. 「수술에 방해되고, 선행을 홍보하려는 의사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하셨죠. 부모님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고,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신상옥 감독의 두 아들도 그를 『아버지』라고 불러
 
   金重晩씨는 프랑스인 샹탈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애니(29), 이인혜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네오(15),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애니를 한국으로 불러서 함께 생활했다. 돈이 없을 때는 카메라를 팔아서 비행기표를 마련했다.
 
  두 아들을 둔 金重晩씨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넷』이라고 말한다. 8년간 함께 산 오수미씨의 자녀 신상균(30)·신승리(28)씨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곧 대만 여성과 결혼할 예정인 신상균씨가 『결혼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신상옥 감독)가 참석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더니, 상균이는 제가 참석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金重晩씨는 신상옥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신승리씨는 따로 살지만 자주 집에 드나든다고 한다.
 
  ―자녀문제로 고민하는 再婚(재혼)가정이 많은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정직하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감추는 거 없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좋은 건 좋은 대로, 표현하고 살면 돼요』
 
  ―金點善(김점선) 화백이 『金重晩은 삶이 모두 오픈돼 있어 뒤를 캐도 나올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군요.
 
  『보여줄 것, 안 보여줄 것 다 드러내고 살아서 그렇게 스캔들에 시달렸잖아요(웃음). 숨길 게 많으면, 삶을 미묘하고 신비롭게 만드는 힘이 있죠. 하지만 진실은 굉장히 큰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진은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자니 나도 모르게 수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100% 원하던 게 아니에요. 실수도 하고 그래야 인간적인 거 아닌가요』
 
  金重晩씨는 여러 차례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2004년 4월 과천 현대미술관 전시회와 9월 광주 비엔날레 전시회 이후 부쩍 미술관에서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金重晩씨의 사진은 한 장에 200만~500만원에 팔린다. 사진 하나에 10장 안팎만 인화해 희귀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studio v」라는 상표로 패션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디자인과 소재 선택에만 관여한다. 그는 『느낌으로 옷을 만든다』고 했다.
 
 
 
 연예인 누드에는 美學이 없다
 
  金重晩씨는 작년부터 SK텔레콤의 무선 인터넷 서비스 「네이트」를 통해 사진을 선보이고 있다. 『한창 유행하고 있는 연예인 누드사진에 비하면 수입이 100분의 1도 안 되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누드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으세요.
 
  『아직은 찍을 때가 아닌 것 같아요. 나에게 의뢰한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진의 수가 너무 많아요. 내 생각에는 하루에 10~15장 정도의 사진을 만드는 게 적당한데, 그 사람들은 100~150장을 찍어 달라는 겁니다.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죠. 누드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이 없어요. 작품사진이라면 찍을 수 있지요』
 
  ―지금 쏟아져 나오는 연예인 누드 사진은 어떻게 보세요.
 
  『그 정도 수준은 벗어나야죠. 거기에는 觀淫(관음)과 흥분만 있지, 美學이 없잖아요. 천천히 음미하면서 정신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는 누드가 돼야죠. 「빨리빨리 많이 찍어 애 어른 없이 팔겠다」가 현실이죠. 통신업자와 기획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金點善 화백 댁에 여러 사진이 있는데 金重晩 선생님 사진이 눈을 찌르더군요.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듭니까.
 
  『이게 답이 될까요? 내가 金點善이란 작가를 찍는다. 그럼 그날은 金點善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가장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어요. 내일은 이름 없는 할머니를 찍을 거예요. 나는 그 할머니가 제일 예쁠 거예요』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잘 찍은 사진은 어떤 겁니까.
 
  『간단해요. 그때 봐서 좋은 사진이 있고, 시간이 지나서 좋은 사진이 있어요. 나는 후자를 좋아해요. 예를 들면 가족사진이죠. 진실이 담겨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입니다. 「구도」·「채광」·「색상」 이런 것은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해요. 그 안에 진실을 담아야 합니다. 사진은 기록성이 가장 앞서는 분야입니다. 거기에 진실성이 많을수록 좋은 사진이고, 그게 떨어지면 뒤떨어지는 사진이죠』
 
  캐논 카메라 모델을 한 적이 있는 金重晩씨는 니콘 카메라를 쓰고 있다. 익숙한 것을 사용한다고 했다. 요즘도 종종 광고모델 제의가 온다고 한다. 작년에는 일본에서 사진전시회를 하고 사진집을 출간했다.
 
  「얼마나 팔렸느냐」고 묻자 『많이 팔렸다』며 웃었다.
 
 
 
 40만 장의 사진을 찍다
 
  현재 金重晩씨는 자신의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에서 다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조선희·안성진·김지양·김현성씨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사진가 중의 절반이 金重晩씨 제자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뒤 金重晩씨 휘하에 와서 2~3년간 함께 생활하다가 독립했다.
 
  현재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설기범씨와 이한길씨는 金重晩씨의 사진이 각광받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30代 초반인 우리들보다 더 젊어요. 전혀 나이를 느낄 수 없어요. 그런 젊은 감각이 지금까지 사진을 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이 자연스러워요.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죠. 사진이 과장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사진을 찍고 난 다음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지는 등의 후반작업을 하지 않아요』
 
  요즘 대부분 사진작가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LCD화면을 확인하는 데 반해, 金重晩씨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뽑아 확인했다.
 
  『기계에 대해서 밝지 않아요. 기계에 호감이 안 가요. 기계를 잘 몰라서 안 하는 겁니다』
 
  제자들도 金重晩씨에 대해 『셔터와 초점 정도만 움직여서 사진을 찍는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金重晩씨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게 없다고 했다. 『그들이 사진공부를 전문적으로 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많이 안다』며 웃었다. 제자 이한나씨는 『옆에서 보는 게 공부』라고 했다.
 
  金重晩씨는 일년에 2만 장 가량의 사진을 찍는다. 30여 년 동안 찍은 사진이 모두 40여만 장에 이른다. 스튜디오 한켠에 사진을 담은 함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디지털로 보관하지 않아요. 저는 그 정도까지 치밀하지 않아요. 내 방식대로 쌓아 두었죠. 별걸 다 찍기 때문에 반은 뭐가 들어 있는지 몰라요. 저는 끊임없이 찍어요. 삶의 일기를 쓰는 거죠. 글로 표현하는 대신 사진으로 매일 매일을 기록하는 거죠. 꽃을 찍고, 길을 찍고, 뭐든지 찍어요. 요즘은 주로 꽃을 찍어요. 나이 들어서 못 움직일 때쯤 되면 꺼내서 보려고요』
 
  ―2000년 이후 삶이 안정되셨는데 그 이후 사진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사진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아지려고 노력하는 거죠. 「이렇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마침내 이렇게 되었다」 이런 시각이 싫어요. 세상이 마음 먹은 대로 되나요. 내가 살아온 과정이 공개된 건 방송이라든지, 타의에 의해서였어요.
 
  나는 성공한 작가가 아니에요. 단지 바라는 건 인간적인 완성에 도달하고 싶다는 겁니다. 남에게 부끄럼 없는 나를 갖고 싶죠. 작품으로 표출이 되면 좋겠지만, 그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요』
 
 
 
 사진은 체력, 70세까지 찍고 싶다
 
  ―자신의 작품에 어느 정도 만족하시나요.
 
  『내가 원하는 것에서 25~30%밖에 안됩니다. 욕심이 클 수도 있고, 내가 굉장히 냉정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50%를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어요. 솔직히 70~80% 느껴본 적은 없어요. 완성도를 어떻게 높이나, 그 수준에 도달하느냐, 그게 고민이죠. 인혜(아내)랑 많이 얘기합니다』
 
  ―51세인데, 지금 나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세요.
 
  『저는 나이가 들어서 굉장히 좋다는 생각을 하는 쪽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죠. 내 스스로 걸러내는 능력이 생겼다고 봅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더 많이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남은 시간 동안 어떡하면 최대한 생산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감각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은 감각이 아니라 체력입니다. 젊었을 때는 감각이니 천재성이니 하지만 사진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개발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작업을 계속할 수 있어요』
 
 
 
 『젊었을 때는 오만했고, 지금은 절제한다』
 
  ―지금 나이에 레게머리가 조금 쑥스럽지 않나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하죠. 3년 전부터 이 머리를 하고 있는데 내 나이에 맞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하다가 반문합니다. 「야, 니가 그래서 더 잘될 게 뭐가 있는데…」(웃음) 일주일에 두 번 감고, 머리가 길면 자란 부분만큼 보강해 주고 아래는 자르고 싶으면 자르고 그러죠. 불편하지 않아요. 처음에 이 머리를 했을 때 다들 웃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웃어서 좋았어요』
 
  ―일로 인정을 받으니까, 레게머리를 하고 다녀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 아닐까요.
 
  『그런 면이 있을 겁니다. 사실 남들의 눈을 크게 의식하는 편이 아닙니다. 남들이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못 하는 걸 내가 하는 것 아닐까요.
 
  남들이 인정해 줄 때 오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젊었을 때는 오만한 쪽이 많았다면 지금은 절제하는 쪽이 더 많아졌어요. 나이가 든 거죠』
 
  ―어떤 부분들을 절제하시나요.
 
  『모든 유혹, 쾌락적인 것까지 다 포함되죠. 내가 이 정도로,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는 것도 나에게 소중하죠. 그러기 위해서 버릴 건 버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사진을 찍을 생각이세요.
 
  『70세까지 찍고 싶어요. 그 이후에 책을 내고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오후 6시쯤 가수 박정현씨 일행이 왔다.
 
  좁은 스튜디오에 갑자기 여러 사람이 들어서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金重晩씨가 피워 놓은 향 냄새, 좁은 공간을 날아다니는 새들로 어지러웠다. 金重晩씨는 사진 촬영에 몰두했다.
 
  『좋아 좋아, 허리를 너무 굽히지 말고, 고개를 더 들고, 됐어, 좋아 좋아』
 
  그는 작은 렌즈에 눈을 바짝 대고, 끊임없이 『좋아 좋아』를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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