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출국> 포스터.
‘오길남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출국>(감독 노규엽, 제작사 디씨드)이 내일(14일) 전격 개봉한다. 정확히는 경제학자 오길남 박사가 쓴 책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을 기반으로 했다. 주연은 배우 이범수·연우진·박혁권·박주미씨가 맡았다. 15세 이상 관람가로 1980년대 독일의 모습을 간직한 폴란드 현지에서 촬영됐다. ‘오길남 사건’이란 1986년 독일에서 북한 공작원들의 회유에 넘어가 입북(入北) 후 탈출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오길남 박사의 사연이다. 당시 오씨는 경제학을 공부하던 재독(在獨) 유학생으로 아내를 비롯해 슬하에 자식까지 둔 상태였다.
배우 이범수씨가 주인공 ‘영민’ 역을 맡아 오씨로 분했다. 연우진씨가 안기부 요원 ‘무혁’을, 박혁권씨가 독일 내 납북 책임자 ‘김참사’ 역을, 박주미씨는 영민의 아내 ‘은숙’으로 분했다. ‘영민’은 극중에서 남과 북, 그 경계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던 학자로, 북의 꾐에 휘말려 입북하지만 이내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 과정에서 아내, 둘째 딸과 헤어지게 되고 가족들을 되찾기 위해 남북 정보국에 매달리지만 역으로 이용만 당한다.
"배우로서 남 주기 아까운 작품" (이범수)
메가폰을 잡은 노규엽 감독은 최근 시사회에서 “오길남 박사의 실제 비극적 탈출 사건을 영화화하려고 했을 때 부담감은 (크게) 없었다”며 “전기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비극적인 탈출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어떻게 영화적으로 접근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노 감독이 <출국>에서 방점을 찍은 핵심은 ‘전체 이야기의 맥락과 전개 구조’다. 다시 말해 서사 그 자체를 어떻게 박진감 있게 극화할 것인지, 지극히 ‘극적인 관점’에서 실화 내용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노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는 사실(史實)을 일방적으로 대입하는 역사물이 아닌, 부성애와 휴머니즘이 담긴 인간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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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국>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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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국> 스틸컷. |
주연 이범수씨는 지난 6일 오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언론사 초청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매력이 많은데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지가 또 다른 과제가 아닐까 싶다. 매력은 많은데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부성애’ ‘가족애’밖에 없는 거 같다”며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들이 많은데, (<출국>은) 볼거리 위주인 요즘 극장가에 진정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제가 시나리오를 읽고 느꼈던 (진정성 있는) 작품이 나온 거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배우가 연기력만으로 세심한 감정의 변화와 갈등·번민·슬픔 등을 표현하며 이끌 수 있는 작품을 오랜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에 도전을 희망했다”며 “원작의 존재는 나중에 알았는데 어찌 됐든 배우로서 남 주기 아까웠던 작품이었다.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在獨학자 오씨에게 접근한 北 공작원들
한편, 《월간조선》은 '오길남 사건'과 관련해 여러 번 심층 보도한 바 있다. 2003년 11월호 ' 宋斗律 - 아내·두 딸을 北에 두고 탈출했던 吳吉男 박사 痛恨의 고백'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오씨의 입국 경위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 나와 있다. 이하 해당 기사 대목이다.
<1942년 경북 義城(의성)에서 출생한 吳吉男은 부산高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大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한다. 재학 시절, 서울에 있는 독일문화원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서울지부장인 독일인 에리흐홀체를 알게 된다. 그의 도움으로 吳吉男은 1970년 10월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전공을 바꿔 튀빙겐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1976년 학사학위를 취득한다. 그 당시 튀빙겐 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申淑子(신숙자·61)씨를 만나 1972년 11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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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국> 포스터. |
두 사람은 평상복 차림으로 튀빙겐市 호적계장 앞에서 증인을 세우고 市內 금은방에서 산 금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吳씨는 지금도 그때의 실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그때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 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된다』고 했다. 그의 큰딸 혜원 1976년 독일 킬(Kiel)에서 태어났고, 둘째 딸 규원은 1978년 역시 킬에서 태어났다.
吳吉男은 1974년 3월부터 서독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 중심으로 결성한 親北反韓(친북반한)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民建)」에 가입해 反정부활동을 하다가, 한국 정부가 독재정치를 한다는 확신下에 1980년 3월 독일 정부에 망명했다. 독일 유학 15년째이던 1985년, 吳吉男은 브레멘 대학에서 「마르크스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 이론의 再구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43세의 늦은 나이에 쉽게 강단에 설 수 없었다.
그때 吳吉男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데다, 근무하던 병원에서 透析(투석) 치료를 담당하다 혈액이 감염돼 휴직상태에 있었다. 가정 형편은 어려운 처지에 처했다. 이때 그의 주변에 宋斗律, 尹伊桑(윤이상), 金鍾漢(김종한) 등 民建 회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北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한다. 吳吉男은 金鍾漢에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위해 빌린 돈 1500마르크가 「미끼」가 돼 북한 공작원을 접촉하게 된다.
吳吉男은 1974년 3월부터 서독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 중심으로 결성한 親北反韓(친북반한)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民建)」에 가입해 反정부활동을 하다가, 한국 정부가 독재정치를 한다는 확신下에 1980년 3월 독일 정부에 망명했다. 독일 유학 15년째이던 1985년, 吳吉男은 브레멘 대학에서 「마르크스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 이론의 再구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43세의 늦은 나이에 쉽게 강단에 설 수 없었다.
그때 吳吉男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데다, 근무하던 병원에서 透析(투석) 치료를 담당하다 혈액이 감염돼 휴직상태에 있었다. 가정 형편은 어려운 처지에 처했다. 이때 그의 주변에 宋斗律, 尹伊桑(윤이상), 金鍾漢(김종한) 등 民建 회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北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한다. 吳吉男은 金鍾漢에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위해 빌린 돈 1500마르크가 「미끼」가 돼 북한 공작원을 접촉하게 된다.
'인간 로봇' '간첩' 노릇 종용한 北
공작원을 만난 지 열흘 뒤, 작곡가 尹伊桑으로부터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北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중략)
1985년 12월13일 吳吉男은 對南공작원인 백치완에게 독일 망명여권을 맡기고 대신 그들이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이름이 적힌 북한 공무여권을 받고 東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1985년 12월부터 吳吉男의 일가족은 고려호텔 인근 창광거리에 있는 동흥동 아파트에서 살았다. 吳吉男은 이번 대질심문에서도 宋씨에게 『宋형 덕택에 제일 좋은 아파트 배정받아 살았다』고 했다고 한다. 부인 申淑子는 한 번 걸렸던 간염으로 인해 몸은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고 한다.
吳吉男의 일가족은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소위 「밀봉 세뇌교육」을 받으면서 金日成에게 충성을 강요당하는 「인간 로봇」으로 전락했다. 吳吉男은 1986년 6월부터 그해 11월 북한을 탈출할 때까지 북한이 남한內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韓民戰) 산하 칠보산 연락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평양市 흥부동에 있는 對南 흑색선전 방송국인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종속경제비판」 등을 녹음해 남한으로 送出(송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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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당시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오길남씨. |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던 吳吉男은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대동강변 눈 덮인 벌판에 나가 눈을 맞으며 울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입북하기 전에 나와 약속한 것과는 달리, 경제학자로서 일할 여건도 마련해 주지 않았고, 철저하게 개인생활을 통제하고 나의 요구를 기만하고 무시했습니다』
1986년 11월 초순,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에 근무하던 吳吉男은 北의 對南공작기구 책임자인 리창선으로부터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해 帶同(대동) 入北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경제학자의 환상을 안고 北으로 간 吳吉男이 對南 흑색선전 방송요원에서 끝내 「공작원」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우리의 進路(진로)를 심각하게 상의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곳이 못 되니 당신이 먼저 이곳(북한)을 탈출해 독일 정부에 호소해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入北 전까지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급박했던 덴마크 공항에서의 脫北 작전
위 기사에 따르면, 오씨는 “(현재까지) 가족과 書信(서신) 왕래도 안 되니, 의식이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고통스럽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반복한다는 것은 고통 자체”라며 “덴마크 공항에서 탈출에 실패해 끌려가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저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꿈을 꾸기도 한다. 소주 두 병을 거푸 ‘병나발’을 불고서야 잠을 청한다”고 털어놨다.
위 기사에 따르면, 오씨는 “(현재까지) 가족과 書信(서신) 왕래도 안 되니, 의식이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고통스럽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반복한다는 것은 고통 자체”라며 “덴마크 공항에서 탈출에 실패해 끌려가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저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꿈을 꾸기도 한다. 소주 두 병을 거푸 ‘병나발’을 불고서야 잠을 청한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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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국>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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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국> 스틸컷. |
오씨는 1986년 11월 10일 심근경색에 동맥경화증으로 초췌해진 아내와 열감기를 앓고 있던 두 딸을 북한에 두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독일 유학생 박인호·이창규를 입북시키기 위해 북한을 떠났다. 그해 11월 12일 그는 북에서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가명의 여권을 소지한 채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때, 오씨는 미리 준비한 박사학위증 사본과 구조요청 메모를 공항직원에게 밀어 넣었다. 공항직원은 황급히 그를 잡아채 옆 사무실로 그를 옮겼다. 그들의 도움으로 동행한 북한 요원들을 따돌리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그는 독일에 재정착하게 된다.
오씨는 북한을 탈출한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윤이상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청했다. 윤이상을 통해 1987년 10월과 1988년 10월, 두 차례 북한에 있는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했다. 당시 그의 부인은 평양시 형제산 구역 형산리 8반에 살고 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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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윤이상은 처자(妻子)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전해주며 “당신은 미제(美帝)의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며 다시 입북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오씨는 가족 송환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최후수단으로 한국에 들어가 당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1992년 4월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 그해 5월 입국했다. 그의 가족 소식은 1992년 10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에 수용돼 있다 탈출한 안혁(安赫), 강철환(姜哲煥) 두 사람의 증언에 의해 들려 왔다. 그의 부인과 두 딸은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수용돼 있고, 부인은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하는 등 산나물을 뜯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이상의 正體
그렇다면 오씨와 그의 가족들을 입북토록 회유했다고 알려진 ‘윤이상’은 누구인가.
《월간조선》 2017년 8월호 기사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가 참배한 윤이상은 누구인가?’에 따르면, 윤이상의 정체가 자세히 나와 있다. 이하 기사의 해당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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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김일성으로부터 ‘민족의 재간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총애를 받았다. 왼쪽부터 윤이상, 김일성, 윤씨의 부인 이수자. |
<윤이상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졌지만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이후에도 친북(親北) 행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재독(在獨) 학자 오길남씨는 윤이상이 자신에게 입북(入北)을 권유했고 북한을 탈출한 후 북한에 남은 가족의 구명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는 이를 외면했다고 주장했다.
윤이상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이다. 윤이상은 6월 17일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연행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그는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 3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아내 이수자는 징역 5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의 구명을 위해 세계 각국의 음악인들이 나섰다. 독일(서독)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작전이 독일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비판이 높아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特赦) 형태로 윤씨를 석방, 독일로 돌려보냈다.
윤이상의 주장에 의하면 그가 북한과 접촉하게 된 것은 1959년경이었다. 그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설명한 경위를 요약하면 이렇다.
〈1958년 여름 내가 처음으로 다름슈타트의 국제음악하기강습회에 참가했을 때, 우리는 교육대학의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급사를 하고 있던 소녀는 동독에서 온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코리아에서”라고 말했지요. “남에서입니까, 북에서입니까?”라고 그녀가 다시 물었지요. 그녀가 말한 바로는 자기는 동독에서 왔는데, 거기에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청년 시절의 친구 최(崔)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함께 학교에 다녔고,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그 후 일본에서 함께 음악을 공부했던 바 있는 그 최를 말입니다. 그는 당시부터 이미 열렬한 공산주의자여서 그 때문에 우리는 종종 논쟁을 했었지요. 그는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간 이후, 국립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며 지휘도 했습니다. (중략)
동독에서 이 소녀를 만났을 때, 나는 즉석에서 그녀를 통해 북한의 친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꼬박 1년간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동베를린에 사는 어떤 북한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행방불명된 친구로부터 서울의 가족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맡아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가지러 오시기 바란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중략) 물론 나는 곧 동베를린으로 편지를 가지러 갔지요. 나는 그 편지를 가능한 한 일찍, 오랫동안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의 부인(최의 부인-기자 주)에게 보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북한 사람을 방문하는 것이 어떠한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북분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게는 북한 사람도 동포지요.〉(《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한울, 1988년)
윤이상은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지만 “나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북한 정부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친구) 최로부터 받은 것으로 그의 자식들이 서울로부터 오기 위한 여비였다”고 주장했다. 윤이상은 1963년 4월 아내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때의 소감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청년 시절의 친구 최(崔)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함께 학교에 다녔고,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그 후 일본에서 함께 음악을 공부했던 바 있는 그 최를 말입니다. 그는 당시부터 이미 열렬한 공산주의자여서 그 때문에 우리는 종종 논쟁을 했었지요. 그는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간 이후, 국립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며 지휘도 했습니다. (중략)
동독에서 이 소녀를 만났을 때, 나는 즉석에서 그녀를 통해 북한의 친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꼬박 1년간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동베를린에 사는 어떤 북한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행방불명된 친구로부터 서울의 가족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맡아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가지러 오시기 바란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중략) 물론 나는 곧 동베를린으로 편지를 가지러 갔지요. 나는 그 편지를 가능한 한 일찍, 오랫동안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의 부인(최의 부인-기자 주)에게 보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북한 사람을 방문하는 것이 어떠한 정치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북분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게는 북한 사람도 동포지요.〉(《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한울, 1988년)
윤이상은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았지만 “나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북한 정부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친구) 최로부터 받은 것으로 그의 자식들이 서울로부터 오기 위한 여비였다”고 주장했다. 윤이상은 1963년 4월 아내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때의 소감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메이데이를 그 땅에서 보냈습니다. 이 축전 때에 나는 동베를린의 대사관에서 영화로 보았을 때에는 조작된 광경이라고 생각하던 광경을 현장에서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완전히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김일성 주석이 와서 말하면 거대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단지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을 뿐인데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민중은 전쟁 후 오랫동안 굶주리고 빈곤하여 잠을 잘 다락방도 없었지요. 그런데 김일성이 모든 것을 지도하여 그들이 더 이상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했으며 집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옛날의 오두막집이 아니라 진짜 기와집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고 지도자의 자격을 증명했으며 또 개인적인 위광을 과시했습니다.〉(《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이와 관련, 국가안전기획부는 1992년 “윤이상은 1963년 아내와 함께 입북, 간첩교육을 받고 독일로 귀환, 월북한 친구 최상한의 장남 최정길을 독일로 유인해 북한 공작원에게 인계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문화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 국가안전기획부는 1992년 “윤이상은 1963년 아내와 함께 입북, 간첩교육을 받고 독일로 귀환, 월북한 친구 최상한의 장남 최정길을 독일로 유인해 북한 공작원에게 인계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문화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중략)
윤씨의 아내 이수자는 김일성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김 주석을 첫 대면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내가 북에 와서 김 주석에 대한 필름을 보며 일본 조총련에서 오는 사람들이 김 주석을 대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부르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했는데,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의 한생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러한 감회는 어디서 왔을까? 오랫동안 조국과 떨어져 이국의 하늘 밑에서 살다가 찾아온 망향자의 서러움에서일까, 아니면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꿋꿋이 나가는 김 주석의 모습에 감격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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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윤이상의 면담 기록인 《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와 윤이상·이수자 부부가 김일성 사후 보낸 조전들을 모은 《영원한 추억》. |
훌륭하고 당당한 풍채, 사람을 위압하지 않는 편안하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따뜻하고 웃음 어린 밝은 표정, 큰 인물이 가지는 무게, 그러면서 부드러운 덕성과 자비심, 예술적인 섬세함과 감각. (물론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자주 접근하면서 발견한 사실이다. 내가 남편과 같이 15년을 두고 한 번씩 접견을 하면서 가까이에서 느낀 사실을 나는 솔직한 심정에서 적기로 했다.)’ (《내 남편 윤이상》)>
이토록 곡절 많았던 오씨의 사연이 내일 개봉하는 영화 <출국>에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극화(劇化)돼있을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정리=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자료=《월간조선》 2003년 11월호, 2017년 8월호 기사
자료=《월간조선》 2003년 11월호, 2017년 8월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