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일주일 만에 누적 관람객 300만을 눈앞에 둔 영화 <1987>. 정치권도 이 영화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이 ‘1987 직선제 개헌(改憲)’이기 때문이다. 올해 6·13 지방선거에서 개헌을 목표로 하는 개헌 세력들은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등에 고루 분포해 있다. 영화가 ‘대박’ 조짐을 보이면서 문재인 정부 첫 전국 선거인 6·13 지방선거 결과와 개헌 여부에 벌써부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987>은 1987년 6월 항쟁을 다루고 있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일주 일 만에 누적 관람객 수 30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른바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봉 다음날 박상기 법무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과 이철성 경찰청장이 이 영화를 관람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수사권을 가진 핵심 기관장들이다.
<1987>은 1987년 6월 항쟁을 다루고 있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일주 일 만에 누적 관람객 수 30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른바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봉 다음날 박상기 법무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과 이철성 경찰청장이 이 영화를 관람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수사권을 가진 핵심 기관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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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8일 박상기 법무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과 이철성 경찰청장이 이 영화를 관람해 주목을 받았다. |
새해 들어 정치권이 앞다퉈 이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3일 지도부와 당직자, 지역위원 등과 함께 <1987>을 봤다. 이 자리에는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과 이종철 대변인, 일부 지역위원장들도 함께했다. 전날에는 정의당 측 인사들이 이 영화를 봤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오는 9일 지도부, 기자단과 함께 이 영화를 볼 계획이다. 자유한국당은 이 영화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 이 영화에 관심을 갖는 데는 6월 지방선거에서 ‘개헌’을 목표로 국민적 공감대를 조성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은 그해 1월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출발한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도중 물고문으로 사망하자 당시 수사기관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던 것이다.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과정은 대강 이렇다.
1987년 1월 15일 저녁, 치안본부(현 경찰청) 기자실. 당시 치안본부 책임자가 사건 개요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져 1월 14일 10시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그때 치안본부장 옆에 있던 고위 간부가 “책상을 ‘탁’ 치니, 박종철이 ‘억’ 하고 쓰러졌다”며 추가설명을 했다.
이 말에 세상이 뒤집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나흘 뒤인 1월 19일에 치안본부장이 다시 기자회견을 했다.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두 사람에게 물고문을 당했으며 그 도중에 ‘사고’로 사망했다.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두 경찰이 멋대로 벌인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치안본부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가 5·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도 미사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축소·조작됐다. 지금 구속된 경찰관들은 종범에 불과하며 현장에는 상급자 세 사람이 더 있었다.”
박종철 사건은 국민 감정을 깊게 후빈 기폭제가 됐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수사팀을 교체하고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검찰이 재수사에 나섰다.
마침내 그해 5월 29일, 경찰 수뇌부가 구속됐고 이후 전두환 정부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김성기 법무장관, 정호용 내무장관 등이 물러나며 유감 표명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해 6월의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그해 1월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출발한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도중 물고문으로 사망하자 당시 수사기관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던 것이다.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과정은 대강 이렇다.
1987년 1월 15일 저녁, 치안본부(현 경찰청) 기자실. 당시 치안본부 책임자가 사건 개요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져 1월 14일 10시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그때 치안본부장 옆에 있던 고위 간부가 “책상을 ‘탁’ 치니, 박종철이 ‘억’ 하고 쓰러졌다”며 추가설명을 했다.
이 말에 세상이 뒤집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나흘 뒤인 1월 19일에 치안본부장이 다시 기자회견을 했다.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두 사람에게 물고문을 당했으며 그 도중에 ‘사고’로 사망했다.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두 경찰이 멋대로 벌인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치안본부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가 5·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도 미사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축소·조작됐다. 지금 구속된 경찰관들은 종범에 불과하며 현장에는 상급자 세 사람이 더 있었다.”
박종철 사건은 국민 감정을 깊게 후빈 기폭제가 됐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수사팀을 교체하고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검찰이 재수사에 나섰다.
마침내 그해 5월 29일, 경찰 수뇌부가 구속됐고 이후 전두환 정부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김성기 법무장관, 정호용 내무장관 등이 물러나며 유감 표명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해 6월의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박종철 사건이 “축소·조작됐다”고 폭탄선언을 한 천주교 측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비밀의 진실을 <월간조선>이 2010년 10월호 기사 ‘박종철 사건과 영등포교도관들’을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했다. 다음은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가 쓴 기사의 일부다.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딥 스로트(Deep Throat)’가 23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숨지게 한 경찰관이 당초 2명이 아니라 3명이 더 있었으며 이 과정에 전두환 정권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 은폐·조작 사건의 본질이다.
그동안 딥 스로트가 누군지는 미스터리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歷史)’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李富榮·전 열린우리당 의장)씨가 축소·은폐 사실을 우연히 알아내, 그 사실을 비밀 편지에 적어 교도관을 통해 교도소 담장 밖으로 전했다는 정도였다. 수형자(受刑者) 신분이던 이씨가 어떻게 엄청난 정보를 입수하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씨 스스로도 입을 닫았었다.
그러나 최근 영등포교도소 황용희 교도관이 쓴 <가시울타리의 증언>이라는 수필집 속에 내부고발자가 처음 등장한다. 바로 1987년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으로 근무하던 안유(安裕)씨다. 안씨는 이후 인천구치소 부소장과 청송제2교도소 소장, 서울지방교정청장을 거쳐 2003년 퇴직한 상태다.
서울교정청장은 교정업무를 책임지는 법무부 교정본부장 다음의 최고위직이다. 안씨는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보안 사안을 1차로 취급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고문 경찰관들의 면담기록 등 극비사항은 가장 먼저 그의 손을 거쳐 상부로 보고되었다. 안씨는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부영씨는 “지금도 (안씨가)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고위직으로 공직생활을 마쳤으니 그들 커뮤니티 내에서 오는 압박과 고립감이 작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중략) 결론적으로 ‘박종철 은폐·조작 사건’이 폭로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만든 주인공은 영등포교도관들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김영삼 정부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지낸 김정남씨는 2005년 출간한 자서전 <진실, 광장에 서다>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몇몇 사람들이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조작된 채로 은폐될 뻔했다”고 썼다. 당시 재야 민주계에서 큰 역할을 했던 김정남씨는 이부영씨가 쓴 ‘진실의 메모’를 영등포교도관들로부터 전달받아 김덕룡(현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씨를 거쳐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측으로 넘겼다. ‘박종철 사건’을 국회에서 터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용 자체가 어마어마해 결국 ‘박종철 메모’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87년 5월 18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 때 정의구현사제단의 최연장자였던 김승훈 신부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결과적으로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뒤편에는 말없이 움직인 영등포교도관들이 있었던 것이다.
글=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