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 ⑬] ‘말할 수 없음’이라는 역설.... 김윤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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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속엔 노을같이 붉은 말할 수 없는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위한 말할 수 있는 말들로 가득해요

우는 자들을 위해 소나타 형식으로 짜여진

사랑스러운 말 그리운 말 전하지 못한 말들이 빽빽하죠

주체할 수 없어 입 벌려 말하려 하면 꺼내기도 전에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이나 소리 나지 않아 버린 고장 난 악기가 되어버리죠

터트릴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입속 가득한 말로

성을 쌓으려 해도 새를 날리려 해도 반복되는 악순환을 떨칠 수가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위한 말할 수 있는 말들이

입속 가득 찬 공기였다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구릉이었다고 신기루였다고

물푸레나무 슬픈 이름으로 속삭이는 수밖에요

그럼에도 난 내 입속 쏟아낼 수 없는 말들을 사랑해요

소리로 접을 수 없어 숨 막히는, 말해지지 않아 말의 늪에 빠져 지내는 하루를

그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를

둑 넘치는 질주를 사랑하고 사랑해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전문

 

김윤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작가마을)를 펴냈다. 언어의 경계를 탐문해 온 그의 시 세계가 이번 시집에서 한층 밀도 있게 응축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끝내 말해지지 않는 것 사이, 그 틈을 더듬는 작업이 시 쓰기일지 모른다.

 

그에게 시 쓰기는 곧 말하는 행위로 치환된다. 그러나 그 말은 언제나 완결되지 못한다. 표제작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파반느에서 시인은 입속 가득 찬 말을 토해내지 못한 채 맴도는 존재로 자신을 형상화한다. 언어는 넘치지만 발화는 좌절된다. 그 긴장 속에서 시는 오히려 생성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둘러싸고 맴도는 언어의 궤적 자체가 시가 되는 구조다. 마치 신()을 향한 구도(求道)의 몸부림 같기도 하다.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중략)

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까 (중략)

한 줄 문장으로 떠오르는 당신

 

당신은 무엇입니까

누구의 슬픔입니까

어느 몸속을 흐르는 쪽배입니까 (중략)

 

당신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당신을 경유해야 하는 당신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되어버려서 아침의 기도가 길어지는 까닭입니다 (하략)

-‘시를 위한 단상일부

 

시집 전반에는 모더니즘적 언어 감각이 짙게 깔려 있다. ‘같다와 처럼의 이중구조’, ‘시를 위한 단상등은 시론에 가까운 메타적 성격을 띠며, 언어 자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의미를 단번에 포착하기 어려운 난해성이 특징이지만, 반복해 읽을수록 리듬과 어감이 살아난다. 특히 낭독을 통해 감각이 극대화되는 점이 두드러진다. 시어들은 마치 덧댄 옷을 기우듯 이어지며, 감각의 충돌과 중첩을 통해 독특한 울림을 형성한다.

 

동그랑게 몸을 말아

발톱을 깎고 있으면 생각나는 사람 있다네

 

이십여 년 전에 별이 된 사람

눈물 콧물 속 빼놓고 떠난 사람

 

단 한 번도 누구의 발톱을 깎아 준 적 없는 내가

평생 누구에게 발을 내밀어 본 적 없을 그녀의

발톱을 깎아 주어서가 아니라

구순을 넘기고도 수줍어 두 발을 치마 속으로 감추던

그 비밀스러운 순정을 보았기 때문이네

그렇게 희고 부드럽고 아담한 발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발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우아한 것인지

반달같이 떠오른 발톱을 깎아 주며 숨을 삼겼다네

 

북녁으로 돌아눕는 그녀의 등에서는 바람 소리가 났다네

갈대 서격이는 소리 한 생각 일깨우는 산사의 풍경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허공에서 흰 눈발 펄펄 휘날리는 소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애끓는 울음소리

이승과 저승 어디쯤

깨끗하게 깎은 발톱으로 한 생을 지우며 걸어가는 소리 소리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

 

몸을 동그렇게 말아 발톱을 깎아 드렸다네

-‘발톱전문

 

조용히 책을 읽으며

은발의 사내가 타 주는 모닝커피를 마시네

 

나는 한 가지는 졸업했네

누구는 솥뚜껑을 졸업했다는 사람도 있고

설거지를 졸업했다는 말 들으면

커피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나도 이제 한 가지는 졸업했네

 

그러나 한없이 기분 좋다가도 썰물처럼 밀려오는

공허감을 막을 수 없네

쓸쓸히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쓸쓸해지는 쓸쓸을 덮을 수가 없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엄마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라며

결정권을 포기하는 남편

엄마 눈치 보는 자식들

여지없이 세상이 변했다는 걸, 청보리 같던 아버지의 위상이

바닥 친 걸 느낄 있네

 

세상 돌아가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일 테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남자들의 아성이 무너진 걸 보면

안쓰럽다 못해 불쌍한 생각마저 드는 건 왜일까

함께한 생에 대한 연민일까

 

그 모두를 졸업하는 날이 머지않았는데

 

내 편이 자꾸 쪼그라드는 것 같아 슬프다

-‘졸업전문

 

시집 후반으로 갈수록 시적 밀도는 다소 완화되고, 개인적 서정이 전면에 드러난다. ‘발톱은 떠나간 존재, 추측건대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듬는다. 발톱을 깎아주던 장면에서 출발한 시는 소리의 이미지로 확장되며, 이승과 저승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감각을 환기한다. 이미지로 건축한 시인데도 상당한 울림이 느껴진다. ‘졸업에서는 노년의 일상과 가족 관계의 변화를 담담히 그려내며, 시대 변화 속에서 위축되는 가장의 위치를 연민의 눈으로 그린다. '청보리 같은 아버지' 문장이 몹시 여운을 준다.

 

사랑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죽어라

 

온몸 털어내는 은행나무에게라도 목을 매어 죽어라

 

한여름을 걸어온 나무도 더는 사랑할 수 없어서 꽃피울 수 없어서

 

죽을 각오로 옷을 벗는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하지 마라

 

최초의 햇살 같은 사라지는 저녁 같은 천 길 벼랑 같은

 

죽을 듯 사랑하고 죽을 듯 헤어져라

 

단 한 번이라도 미친 사랑을 하라

 

수없이 전율하고 무수히 감동하고 그 기쁨과 슬픔에 절망하라

 

종을 울리며 날아가는 종달새의 깃털의 깃털을 흔드는

 

바람처럼

 

물고기의 눈물처럼 초록 나무의 잎새처럼 무인도의 신우대처럼 울어라

 

사랑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은 겨울밤 별을 보고 멀리 걸어가 보라

 

외로워서 추워서 손잡아줄 사람 그리워서 목이 메일 테니

 

사랑할 수 없으면 죽은 목숨

 

사랑의 잔해가 독보다 쓰다 해도 내일 죽는다 해도 사랑하라

 

사랑하다 죽어라

-‘사랑하다 죽어라전문

 

사랑을 정면으로 밀어붙인 작품들도 눈에 띈다. ‘사랑하다 죽어라는 과격할 만큼 직설적인 어조로 사랑의 본질을 파고든다. 사랑을 삶의 조건이자 존재의 증명으로 확인하려 한다. 사랑의 극한이 느껴진다. 죽을 각오로 사랑하고 그런 각오가 없다면 사랑은 꿈도 꾸지 말아야 될까.

폭염역시 욕망과 관계의 긴장을 강렬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어들이 살아 꿈틀댄다. 현란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소환해, 빛과 욕망, 죄의 문제를 교차시키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는 태양을 바라보는 건 나를 조금 허물겠다는 의미

벗겨지지 않는 보늬를 벗겨 내겠다는 뜻

 

조금은 느슨해지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너지는 중인데

당신은 강렬한 속도로 탐욕의 눈빛을 건넨다

 

노곤해지던 눈꺼풀이 스르르 닫힌다

 

그럼 다시 한번 혼인해 볼까

 

모든 것이 서툴던 달빛 들던 밤처럼

 

당신이 쳐놓은 그물에 걸러

무쇠도 녹아 뱀처럼 휘어질 열기에 대낮을 벌겋게 태워 볼까

다시 백 년의 언약을 손가락 걸어 볼까

 

당신과 나

저 햇볕 쏟아지는 벌판에

당신의 먹이가 되어도 괜찮은 한낮을 멀리 던져 볼까

 

빛 때문에 살인한 뫼르소*는 잊고

사랑이 죄가 될 수 없는 아담과 이브로 돌아가

 

흐물흐물 녹아 볼까

길을 잃어 볼까

-‘폭염전문

 

*<이방인>의 주인공

 

김윤수 시인은 언론계에서 은퇴한 뒤 2013문장21로 등단했으며, 2022년 시 전문지 사이펀신인상으로 다시 등단했다. 시집 기억 속 별을 찾아, 고양이 울음이 남은 저녁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시집이다시인 김정수는 존재와 부재, 사람과 사람, 말과 말 사이의 시간을 견뎌온 삶의 문양을 그려낸다내면의 열기를 춤으로 풀어내듯 집요하게 시를 밀어붙인다고 평했다.

 

결국 이번 시집은 말할 수 없음이라는 역설을 통해 시의 가능성을 탐색한 작업으로 읽힌다.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기보다, 의미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드러내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독자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그 난해함 자체가 시적 체험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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