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다」라는 단어는 발음을 어떻게 하느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신기한 단어입니다. 2002년 대선하루 전의 일입니다. 정몽준 후보가 갑자기 노무현 후보와의 공조를 파기한다고 하면서 김행 대변인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김행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문 가운데는 노무현 후보가 유세장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고 말했다는 표현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싸움에 말려 들어간다」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김행 대변인이 「말린다」를 발음할 때 장단음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모호하게 발음했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말린다」라고 할 때는 타동사가 되어 「리」 발음을 길게 빼면 안되고 짧게 발음해야 합니다. 반대로 「말려든다」는 의미로 말할 때는 수동사가 되어 「리」 부분을 길게 발음해야 합니다.
같이 TV를 보던 사람들은 대체로 「싸움을 말린다」라는 뜻으로 들었으나, 저를 비롯해 일부 사람은 「우리가 싸움에 말려 들어간다」는 뜻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청취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말하는 사람이 「말리다」란 단어의 장단음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리다」란 말은 발음의 장단에 따라 뜻이 달라지지만, 「날리다」란 말은 수동이냐 사동사로 사용하냐에 따라 발음의 장단을 다르게 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무엇이 바람에 날리다」라고 할 때는 「날다」의 수동 됩니다. 그러나 「내가 연을 날리다」라고 할 때는 「날다」의 사동이 됩니다. 수동일 경우에는 「리」자를 길게 빼야 하고 사동일 경우는 짧게 발음해야 합니다. 「홀리다」란 단어도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특히 한자로 구성된 우리말에서 장단음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호국(護國) 보훈의 달」이라고 할 때 호국은 「호」자를 길게 발음해야 합니다. 짧게 발음하면 호국(胡國)이 되어 「야만인의 나라」란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제국(帝國:장음)과 제국(諸國:단음), 수학(數學;장음)과 수학(修學:단음) 등 우리 단어에는 장단음과 고저를 분명하게 발음해야 하는 것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말의 장단음과 고저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배(먹는 배), 배(복부), 배(타는 배), 배(곱빼기) 등의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못하고, 낯과 낫 혹은 낮의 미묘한 어감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더 심하면 눈(雪)과 눈(目) 처럼 명확하게 장단음을 구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요즘 일상생활에서 말의 장단음을 신경쓰지 않은 경우가 많고, 제대로 가르쳐 주는 기관이나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방송 언론이 이런 책임을 느끼고 발음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엉터리가 많습니다. 말의 장단음과 고저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입에 배도록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