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도시일까.
수출입국의 깃발이 높이 들리기 전과 후의 구미를 파헤친 책이 나왔다. 서명수 매일신문 객원 논설위원이 쓴 《거대한 뿌리 구미》는 박정희를 다시 기억하고 구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구미의 뿌리는 영남의 뿌리다. 구미 이전에 선산이 있었다. 선산은 선초 성리학의 본산이자 신라 불교의 초전지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뿌리와도 다르지 않다.
기자는 출판사의 도움으로 이 책을 3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 수출 100억 달러를 기념하기 위해 구미에 세워진 수출탑. 이하 사진=서명수
《거대한 뿌리 구미》의 저자 서명수는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 빈곤의 굴레에서 온 국민을 벗어나게 하겠다는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와 실행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박정희 평가는 너무 박하다. '문화대혁명' 같은 비극이나 대기근 같은 참사도 빚지 않은 박정희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 정도의 후한 평가가 적당하다."

공돌이와 공순이의 탄생
1970년대는 '공돌이'와 '공순이'의 전성시대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노동자들을 당시 공돌이, 공순이라고 비하해서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킨 '산업역군'이었고 수출주역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전 세계를 무대로 '메이드인코리아'를 판 종합상사 '상사맨'도 존재할 수 없었다.
수출전진기지로는 '구로공단'이 가장 먼저 생겼고 인천 남동공단,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었고 마침내 내륙도시에선 구미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됐다. 구미공단은 그렇게 탄생했고 구미에도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인 공돌이, 공순이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 우리나라 수출실적이 사상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160여 차례 직접 주재하는 등 온 나라를 수출전선에 내세운 지 13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2023년 우리나라 총 수출실적은 6,326.9억 달러.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와 반도체 선박 일반기계 등 고부가가치제품일색이다. 수출입 등 무역규모로는 세계 7위의 경제대국 위상을 당당하게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하기 직전인 1960년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의 아시아 최빈국에서 2024년 일본을 제칠 정도로 한국경제는 세계속에 우뚝 섰다. 그 중심에 '구미공단'이 있었다.
구미IC를 통해 구미시내에 들어서 이마트로 가기 직전에 회전교차로, 즉 '로터리'를 만나게 된다. 로터리 중간에 '수출탑'이 우뚝 서있어 수출탑로터리'라고 불리는 구미시의 도로원표 기준이다. 로터리 한가운데에는 40m 높이의 단순한 형태의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얼핏 보면 어느 도시에나 있는 특징없는 현충탑과 다를 바 없지만 '수출탑'이다.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에 달성한 것을 기념해서 건립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출실적이 100억 달러를 달성한 것은 수출탑이 건립된 1976년이 아니라 1년 후인 1977년이다. 당시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국민소득 , 전 국민 마이카 시대'라는 구호의 고 신동우 화백의 그림은 전국에 벽화형태로 도배를 했고 우리는 달콤한 꿈을 꾸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장밋빛 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구미공단에서 산업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0년 무렵이다.
그런데 그 허황해보이던(?) 100억 달러 수출의 꿈이 목표연도보다 3년 일찍 성사됐고 그보다 1년 전에는 100억 달러 수출을 바라는 수출탑이 '바벨탑'처럼 구미공단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수출탑 전면에는 이라는 휘호가 새겨져있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온 국민의 수출을 통해 나라를 세우자는 수출입국의 소망이 이 탑에 담겨있는 셈이다. 그리고 1년 만에 우리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한국경제는 비약적 도약을 거듭했다. 이 수출탑은 얼마 전 경북도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구미공단은 수출품목을 전자제품으로 전환
그러나 구미전자산업단지 조성은 우리 수출전선의 주력제품을 전자제품으로 탈바꿈시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수출입국', '수출은 국력의 총화', '전 산업의 수출화', '전 세계의 시장화' 등 마치 북한의 선전선동구호와 다를 바 없는 박 대통령이 수출 독려용 휘호는 전국에 내걸렸다.
물론 100억 달러 수출의 초석은 '구로공단'이 마련했다. 5.16을 통해 권력을 잡은 군부는 보세가공으로 성공한 싱가포르와 대만 등을 모델로 한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했고 그 첫 단추가 구로공단이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구미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고향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특혜로 비칠 것을 우려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구로공단 등을 조성해서 운용한 후 울산과 청주 마산 등지에 공단을 조성한 이후 구미공단 조성에 동의했다.
정작 구미공단 조성에 앞장선 것은 당시 경북도지사 양택식과 구미지역 유지 장월상 그리고 구미가 고향인 재일교포실업가 '곽태석' 한국도시바사장 등이었다. 양 지사는 포항지역에 공단을 조성하려고 했으나 구미지역 상공계 인사들과 곽 사장 등이 구미유치를 설득하자 마음을 돌렸다.
1969년 1월 '구미공업단지 설립추진대회'가 열렸고 6월 건설부 고시로 공업단지 사업시행자를 지정함으로써 구미공단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다. 당초 구미공단은 경북도가 주체가 된 '지방공단'과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자공업공단으로 이원 조성됐다.
구미 1공단은 1969~1973년 입주를 마쳤고 1977~1981년 2공단, 1987~1995년 3공단을 조성하는 등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단규모를 확장하면서 성장을 거듭한 다른 산업단지와 다른 특징이 있다. 구미공단은 박정희 시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하면서 '수출입국'의 영광을 만드는데 기여한 조국 근대화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반도체코리아'의 초석을 놓았다.
수출중심의 구미 국가산엄단지는 1공단에 이어 1977~1981년 구미2공단을 조성했고 이어 1987~1995년에 3공단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구미4공단을 조성하는 데 성공,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내륙공업기지를 구축했다.
이처럼 구미국가산업단지는 다른 산단과 달리 한꺼번에 전체 산단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50여년에 걸쳐 전자산업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그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면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1공단이 주로 섬유산업의 비중이 높았다면 2,3공단은 전자업종의 대기업과 관련 중소기업이 주로 입주했고 4공단은 첨단 전자분야 중소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5공단은 혁신클러스터로 조성되고 있어 구미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이다.
가난한 농업국가를 경공업과 중화학공업, 첨단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출주도 압축성장정책의 결실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구미국가산업단지라는 집적된 인프라 조성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구미 금오공고에 있는 기능탑.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산업화는 우수한 기술인 양성
'정성(精誠)·정밀(精密)·정직(正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어 준 여느 학교와 다른 금오공고의 특별한 교훈이다.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성공에는 금오공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니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금오공고를 필두로 한 공고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술인력, 기술공의 대량 양성 없이 개발도상국의 산업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 대통령은 간파했다.
"조국 근대화는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과 의욕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국가건설의 대열에 혼연히 참가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과 인력과 기술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이를 습득한 기술인들이다.
1970년대 초반 금오공고와 동시에 설립된 서울성동공고, 광주공고, 부산한독직업훈련원 등을 통한 산업기술 인재의 집중양성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업고등학교가 배출한 숙련공들은 대한민국 제조업과 기술산업에 인적자원을 공급한 최고의 오아시스였고 이후 중화학공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오늘날의 세계 속에 당당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만든 최대공신이었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나라였다. 유교문화가 뿌리박힌 조선사회는 사농공상의 신분차별로 상업과 공업을 천하게 취급했다. 장사를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선비가 되고자 했던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뒤처져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이런 사농공상 문화를 완전히 혁신했다,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고 국가역량을 산업화에 집중시켰다.
과학기술처 공보관을 지낸 정진익 교수는 ▷한글창제와 ▷조선 개항, ▷원자력 도입과 함께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우리나라 4대 과학 발전계기로 꼽았다. 박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1962~1966)과 동시에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수립·추진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설립했고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처를 설립(1967),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1971~78), 중화학공업육성정책 추진(1967~) 등을 연쇄적으로 추진했다.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은 오늘날 반도체·철강·자동차·조선강국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미 금오공고 전경
'金烏工業高等學校'
금오공고의 설립에는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이 밑바탕이 됐다. 박 대통령의 경제참모로 중화학공업육성을 진두지휘한 오원철 전 경제수석의 회고에 따른 금오공고의 탄생비화다.
"상공부가 주관해서 기계 계통의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소질이 있는 청소년을 선발, 일본의 실기교사를 초빙해서 집중적인 교육과 실습을 시켜 '시아게' 정신을 도입함으로써 우수한 기계 기술공이 될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보기로 했다. 이는 '한일경제각료회의'에서 논의한 사안이기도 해서 일본이 지원한 '한일경제협력기금'을 이용, 기술고등학교를 시범설립하기로 했다."
일본조사단이 직접 구미에 와서 조사를 했고 구미전자공업단지로 부지가 결정되고 나서 박 대통령은 몇 번이나 현장을 직접 찾을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1971년 3월 학교 부지 6만 평을 확보하고, 4월 20일 공사 착공한 데 이어, 8월 16일 금오학원 설립인가가 나왔다.
박 대통령은 개교에 앞서 1973년 2월 20일 '金烏工業高等學校'라는 휘호를 썼고 1976년 1월 '精誠·精密·正直'이라는 교훈도 휘호로 써서 내려 보냈다. 금오공고에는 이처럼 박 대통령의 깊은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