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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皇室 재산 소송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황실재산, 주인은 누구?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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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관리공사-숙명여대, ‘황실 交付 무상사용 승낙서’ 실효성 여부 놓고 소송 중
⊙ 황실 재산은 광복 직후 500억원대로 추정, 현재 시가로 35조원대… 3만 건 이상 헐값에 매매
⊙ 1960년 구황실재산사무총국 화재로 소실된 1억5000만 평 토지 소유권 허공으로
⊙ “대한제국은 황실재산-정부재산 분리, 황실의 숨겨진 재산 있을 것”
고종황제의 가족사진. 엄황귀비와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가 보인다.
  자산관리공사가 숙명여대와 70억원대의 변상금을 놓고 소송 중이다. 이유는 ‘황실(皇室) 재산의 사용권’ 문제다. 자산관리공사는 숙명여대가 국유지 2만㎡를 권한 없이 점유하고 있다며 2012년 4월 73억원의 변상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숙명학원은 해당 부지를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영구 무상 사용을 승낙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박스1 참조)
 
  숙명여대는 대한제국 당시 황실 재산 관리기관인 이왕직(李王職)이 1938년 교부한 무상사용승낙서를 근거로 들어 2012년 5월 서울행정법원에 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변상금 부과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자산관리공사는 “1992년 용산구청에서 변상금을 부과해 무상사용을 철회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그 이후에는 무상사용 권한이 없다”고 반박했다. 2013년 1월 현재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는 3차례에 걸쳐 양측 주장과 변론을 청취한 상태다.
 
  법조계 관계자는 “해당 소송은 그 결과가 황실 문서를 근거로 한 유사한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사건”이라며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황손 또는 친일 인사의 후손들이 황실이 소유했던, 혹은 임대·매매했던 토지 소유권을 놓고 제기한 소송이 적지 않다. 대한제국 황실이 소유했던 재산과 관련 재산은 현재 어떻게 됐을까.
 
<박스1>
 
숙명여대와 황실

  고종의 비(妃)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친모인 순헌황귀비(귀비 엄씨)는 6세 때 입궁해 명성황후를 모시는 상궁으로 일했다. 1895년 을미시해(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의 부름을 받았고, 1986년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귀인-순빈-순비를 거쳐 1903년 황귀비 직위를 받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제실(帝室)재산정리국을 설치해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순헌황귀비는 황실 재산을 일제에 뺏길 수 없으며 이를 여성교육에 투자하자고 생각하게 된다. 황귀비는 1906년 왕후의 소유였던 용동궁(현재 종로구 수송동) 부지와 개인재산을 내놓아 명신여학교를 설립한다. 이것이 현재 숙명학원의 전신이다.
 
  명신여학교는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했고, 1912년 재단법인 숙명학원(淑明學園)이 설립됐다. 숙명학원은 1910년 영친왕궁으로부터 황해도 신천군·은율군·재령군·안악군, 경기도 파주군, 전라남도 완도군 등에 있는 농경지 1천여 정보를 하사받았으며, 1912년 그 재산과 농경지 수익금을 포함한 자산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숙명학원은 1938년 5월 황실재산관리기관인 이왕직에서 용산 황실 땅 6471평에 대한 ‘영구무상사용승낙서’를 교부받았고, 같은 해 12월 현재 위치에 숙명여자전문학교(현 숙명여대)를 설립한다. 기존의 용동궁 부지에는 숙명여고가 자리 잡고 있다가 1980년 강남 도곡동으로 옮겨갔다. 현재 재단법인 숙명학원은 숙명여중·숙명여고·숙명여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설립자는 순헌황귀비이다.
 
  광복 당시 500억원대로 추정… 현재 시가 35조원
 
  대한제국 황실 재산은 1945년 광복 후 모두 국유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관리공사 측이 숙대에 변상금을 부과한 근거다. 국회가 1945년 9월 23일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정하면서 구(舊)황실재산사무청이 설치됐고, 1950년 4월 8일 ‘구왕궁재산처분법’이 제정되면서 과거 이왕직에서 관리했던 황실 재산은 국유로 하며, 존치할 필요가 없는 재산은 매각·대여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렇다면 광복 직전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1960년 구황실재산사무총국 화재로 황실 재산의 목록이 남아 있지 않은 만큼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구 황실의 재산은 당시 기준으로 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광복 직후 쌀 1가마 가격을 기준으로 당시(300원)와 현재(20만원)를 비교해 보면 이는 약 35조원에 달하는 수치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자.
 
  <창덕궁·창경원·덕수궁 등을 위시한 궁과 전국 각처에 있는 산림·전답 등 무려 500여억 원으로 추산되는 구왕궁의 재산은 해방 후 구왕궁 사무국에 유지되어 오던 중 드디어 지난 9일 국무회의에서의 구왕궁재산처분법의 통과에 따라 앞으로 국회만 통과되면 곧 법에 의하여 처분되게 될 것으로 이 초안이 발표되자 구왕궁계의 이씨 일족은 물론 일반에 새로운 화제를 던지고 있다.
 
  과연 어떠한 범위 내에서 처분될 것인지 초안에 의하여 그 적용범위를 보면 제2조에 해당되리라고 보는 재산으로는 서울 시내에 창덕궁·창경원·종묘·칠궁·덕수궁·경복궁 등을 위시하여 삼척·전주 등에 있는 약간의 궁과 동구릉·광릉 등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있는 능 50개소와 원 12개소와 이왕가 미술관 안에 있는 국보적 미술품 및 역사적 기념도서 등이 국보적 기념품으로 지정될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1949년 2월13일자)
 
  <◇이왕가 재산
  전답 100만여 평, 대지 100만여 평, 종묘칠궁 6만여 평, 임야 1만9000여 정보, 건물 1만3000여 평, 기타 창덕궁·덕수궁·미술품·고물 다수
 
  ◇이우공(의친왕의 차남 이우) 재산
  (이미 처분한 재산은 들지 않음) 전답 16만4586평, 대지 2만4370평, 잡종지 10만9715평, 분묘지 4342평, 제방 1591평, 임야 102정보, 건물 1086평, 주식 1365주
 
  ◇이미 처분된 이우공 측 재산
  대지 3만446평(서울 시내), 임야 4만5457평(서울 시내), 건물(운현궁·염리동 아부당별장) 전부를 도합 7000여만 원에 매도하였음.>(자유신문 1949년 11월21일자)
 
  일본 방송인 출신 작가 혼다 세쓰코는 1980년 한국에 번역된 책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에서 영친왕의 비서를 지낸 조중구의 메모를 통해 1945년 광복 직전 옛 조선 황실의 재산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옛 조선 황실의 재산은 부동산 ▲임야 6만4천 정보(1정보는 3천 평) ▲밭 91만 평 ▲논 32만 평 ▲택지 31만 평, 동산은 ▲미술품 1만 수천 점 ▲은행예금 680만 엔 ▲유가증권 250만 엔 ▲현금 50만 엔 등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메모에는 전국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궁전과 묘지는 빠져 있다.
 
 
  광복 후 수년간 황실 재산 상당부분 공중분해
 
숙명여대가 변상금 취소소송의 근거로 제시한 이왕직장관의 영구무료사용증명서.
  황실의 재산이 모두 적법하게 국유지로 전환된 것은 아니다. 1945년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되고 구황실사무청이 설립됐지만, 미 군정이 국내 부동산을 장악하고 있었고 광복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신속하고 완벽하게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시장에서는 궁내의 문화재들이 수없이 거래됐으며, 아예 궁이 거래되는 일도 있었다.
 
  운현궁은 당시 왕족 이청씨의 명의였는데 이청씨는 1948년 동궁의 건축물과 토지를 매각했으며, 사동궁의 세대주였던 왕족 이강씨도 1947년 사동궁을 매각해 버렸다. 왕족들이 개인적인 부채를 갚기 위해 매각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주변 권력자들이 왕족을 종용해 헐값에 팔도록 강요했다는 설도 당시 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친왕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조선일보》·《서울신문》에서 일했던 언론인 김을한씨는 저서 《인간 영친왕》에서 “막대한 부동산을 불하 또는 임대계약의 형식으로 당시 권력가들이 다 나눠 먹었으며, 이렇게 털린 땅이 서울 근교만 해도 수십만 평은 된다”고 밝혔다.
 
  구 황실 재산에 대한 처분 방법이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1950년이다. 1950년 4월 8일 국회는 ‘법률 제119호 구왕궁재산처분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구왕궁재산(구한국황실 또는 의친왕궁의 소유에 속하였던 재산으로서 구이왕직에서 관리한 일체의 동산과 부동산)은 국유로 한다 ▲존치할 필요가 없는 재산은 대통령령에 의해 매각 또는 대여할 수 있다 ▲본 법의 규정에 저촉되는 종전 법령은 일체 폐지한다는 조항을 기초로 하고 있다.
 
  1950년 이후에도 황실 재산은 공공연히 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되곤 했다. 1955년 구황실재산사무청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확대개편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역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황실 토지를 모교인 배재학당에 헐값(평당 250원)에 팔아넘겼다는 의혹을 받았다.
 
  1959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 대한 국정감사 결과에 따르면 구황실재산사무총국 설립 이후 황실 재산 3만 건 이상이 시가 1/10 이하의 헐값에 수의계약으로 거래됐으며, 사무총국은 법으로 지정한 황족 생계비 지급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등 ‘황실 재산 팔아먹기’에만 집중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윤모 사무총국장이 물러나고 대한여행사 이사장이던 오재경씨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으로 임명받아 사무총국 개혁에 나선다. 그는 구황실의 재산 관련 서류를 모두 모아 철저한 조사에 돌입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맞는다.
 
 
  1억5000만여 평 토지문서 불타
 
1906년 엄황귀비가 세운 명신여학원(현 숙명여대)의 1910년 1회 졸업식 모습.
  1960년 6월 6일 밤 서류를 쌓아둔 창덕궁 내 구황실재산사무총국 2층짜리 목조건물이 불에 타 전소된 것이다. 불이 난 뒤 사무총국 사람들은 모두 “방화가 확실하다”고 말했고 검찰 조사 결과 그동안 비리를 저질러 왔던 사무총국 내부 직원과 전직 직원들의 소행이라는 유력한 증거까지 수집했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덮이고 말았다. 토지·임야·전답 등 총 1억5천 만여 평에 달하는 황실의 재산 기록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후 격동기를 맞으면서 황실 재산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 후에도 황실 재산은 끊임없이 불법으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1964년 경기도 구리 동구릉은 헐값에 유령회사에 매각됐고, 경주 소재 황실 임야도 부정입찰을 통해 매각됐다. 1969년 서울 청량리 소재 임야는 무연고자에게 허위서류를 통해 매각되는 등 황실 재산 불법불하 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이어졌다. 1969년 2월에는 시가 2000만원짜리 황실 토지를 84만원에 매각한 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이 검거되기도 했다.
 
  이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문교부 산하 문화재관리청으로 개편되고 1999년 문화재청으로 승격되는 동안 황실 재산은 국유화 또는 매각으로 하나둘 정리돼 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제기된 소송과 다툼도 적지 않았다. 1960년대 이구씨의 숙명여대 경영권 반환 청원, 1970년대 배재대학 부지 부정매각 관련 소송, 최근의 해원옹주의 양부 토지 반환 소송 등이 대표적인 예다.(박스2 참조)
 
  문제는 여전히 황실 재산에 대한 관리가 주먹구구식이라는 것이다. 2007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는 종묘와 덕수궁 등이 여전히 ‘이왕직’ 소유로 돼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소유주에 ‘이왕직장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종묘 영영전과 덕수궁 중화전은 각각 1928년과 1935년 이왕직장관 소유로 등기된 이후 2007년까지 한 번도 소유권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다. 광복 5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문화재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당시 문화재청 유홍준 청장은 “문화재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미처 관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바로 조치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밖에 정리되지 않은 황실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스2>
 
황실재산소유권 관련 주요 사건

  ◆ 해원옹주 하남 토지소유권 소송
 
  황족의 재산 관련 소송으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한제국 황위 계승자로 주목받았던 해원옹주의 하남시 땅 반환소송이다. 2006년 9월 대한민국황족회는 대한제국 30대 황위 승계식을 열고 고종의 손녀이며 의친왕의 둘째 딸인 이해원(해원옹주, 현재 95세)씨를 여황으로 추대한 바 있다. 대한민국황족회는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위해 뜻을 같이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다.
 
  해원옹주는 2012년 3월 고종의 후손 15명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해원옹주 부친(양부)인 이기용씨 소유의 하남시 땅 1만2700㎡가 1965년 토지조사과정에서 부당하게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며 “정부의 소유권보존등기를 말소하고 황실 후손에게 땅을 반환하라”는 취지의 소송을 냈다. 이기용씨는 고종의 5촌조카로, 일제강점기에 황실 직계 호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함에 따라 해원옹주를 포함해 의친왕의 자녀들이 이기용씨의 양자로 입적된 바 있다. 해원옹주 등은 조선총독부 기록에 해당 토지가 이기용씨 땅으로 나와 있으며, 1965년 토지조사과정에서 지목변경과 토지합병 등을 빌미로 부당하게 국유화됐다며 해원옹주를 포함한 이기용씨의 후손들이 이를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2012년 9월 “해당 토지는 적법하게 국유화됐으며, 민법상 취득시효가 지나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원고 패소판결했다. 재판부는 “1938년 일본 육군성이 포사격 연습장용으로 매입한 후 광복과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에 적법하게 귀속됐다”고 밝혔다.
 
 
  ◆ 배재대학 부지 소송
 
  현재 배재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의 땅 7만1950평은 대한제국 시절 대원군 형 흥인군의 5대손 이우인씨의 소유였으며, 광복 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 신탁돼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모교인 배재학당에 평당 250원(당시 시세의 1/30 수준)이라는 헐값에 특혜 매각했다는 제보가 이어졌고 이우인씨는 1965년 국가를 상대로 하월곡동 토지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검찰은 조사에 착수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에 대한 형사처벌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구황실재산을 민간에 불하할 때는 구황실재산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했는데, 이 경우 심의위원회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도 이씨의 승소를 예상케 했었다.
 
  그러나 8년여의 지리한 소송 끝에 1973년 대법원은 “해당 토지는 이씨의 땅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린다. 이에 대해 당시 언론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천문학적 액수의 황실 재산 소송이 줄줄이 이어질 것을 우려해 정치적으로 무마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숙명학원 경영권·재산권 반환 청원
 
  영친왕의 둘째 아들인 이구씨는 1964년 숙명학원의 경영권을 주장하며 문교부에 청원을 제기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일본에 머물다 1963년 부모인 영친왕·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한 이구씨는 본인이 숙명학원 설립자(순헌황귀비)의 직계 손자이며 황귀비의 재산으로 설립된 재단인 만큼 본인에게 재산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현 숙명학원 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현재 이사진을 교체하고 본인이 선임하는 인사에 학교 경영권을 주어야 한다고 문교부와 국회 문공위에 청원했다. 문교부는 이에 행정권을 발동해 숙명학원 일부 이사진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내고 이구씨가 지목하는 인물로 이사를 임명하는 등 직접 개입했다. 숙명학원의 기존 이사진과 이구씨 측 이사들, 국회 문공위와 문교부 관계자들은 1년 이상 서로 책임을 물으며 분규를 계속했고, 숙대의 준국립대학화 등 논의가 이어지다 1967년 결국 제3의 인물들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소송은 양측 ‘팽팽’, 문제는 황실의 상징성?
 
  이처럼 황실 재산 중 상당수가 어물쩍 사라진 가운데 황실이 영구무상대여를 약속했다는 숙명여대 부지는 어떻게 될까. 이번 소송의 쟁점은 일제시대 때 무상사용 약속이 유효한지, 그리고 이후 국가나 지자체가 무상사용 허용 의사를 철회할 경우 이전의 권리가 종결되는지 여부다.
 
  숙명여대는 변상금 부과 취소소송과 관련, 2012년 12월부터 교직원과 동문들의 서명을 받는 ‘캠퍼스 지키기 10만 서명운동’을 진행 중이다. 숙대 관계자는 “국가기관이 역사적 사실과 상식을 무시하고 숙대를 불법행위 기관으로 낙인 찍어 문책성 벌과금을 부과했다”며 “여론을 모아 여성인재 산실로서의 명예를 되찾고 학생들을 위해 사용돼야 할 변상금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산관리공사 측은 “변상금 부과에 대한 입장은 변함이 없으며, 법원 판결을 기다릴 것”이라고 밝혔다.
 
  경우는 다르지만 대학교와 자산관리공사가 토지를 놓고 맞붙은 사건으로는 2011년 1월 중앙대와 자산관리공사의 소송을 들 수 있다. 중앙대는 1988년 조성된 흑석동 캠퍼스 내 운동장에 국유지 185㎡가 포함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자산관리공사는 2010년 중앙대에 변상금 4700만원을 부과했다. 중앙대는 변상금 부과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서울고등법원은 “중앙대는 고의적으로 국유지를 무단점유하지 않았으며 20년이 지나 토지를 시효취득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므로 국가는 중앙대에 해당 토지의 소유권이전 등기를 하라”고 판결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사실 해당 토지가 일반적인 국유지라면 판례도 다수 있고 판결이 어렵지 않지만, 이 사건의 경우 소송 근거가 ‘황실 문서’라는 점에서 유사 사건들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재판부가 부담을 가질 수 있다”며 “쌍방간 합의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베일에 싸인 ‘황실 재산’이 그만큼 세간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 왜곡된 황실 문화 바로 세우기 나서야”
 
대한민국 황실의 적통을 이은 황사손 이원씨.
  현재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은 영친왕(고종의 일곱째 아들, 순종의 동생)이 마지막 황태자로, 그의 아들 이구(2005년 사망)씨가 마지막 황손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주 이씨의 대종회(大宗會)이며 조선시대 문화재의 보존관리와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구성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이구씨 사후에 후사를 남기지 않은 이구씨의 양자로 의친왕(영친왕의 형, 고종의 다섯째 아들)의 손자(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장남)인 이원씨를 입적시켰다. 현재 51세인 이원씨는 황사손(皇嗣孫·황족 사후 양자로 입적된 자손)으로 대동종약원 총재직을 맡아 조선시대 왕이 집례했던 종묘제례와 환구단제례 등을 주관하고 있다.
 
  이원씨는 현재 해외에 뺏긴 국내 문화재 반환운동과 왕실 문화를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등 조선 왕실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문화재는 왕실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지켜나가고 활용해야 할 전통”이라며 “왕실 복원운동이나 왕실 관련 기관을 재산과 관련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큰 오해”라고 말했다. 또 우리황실사랑회나 황실문화재단, 대한민국황족회 등 황실을 연구하거나 복원운동을 벌이는 기관들도 “황실의 재산 규모나 그 향방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으며,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황실의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주 목적”이라고 밝혔다.
 
  대한제국 황실을 20년 이상 연구해 온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대한제국 황실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국권을 빼앗기고 몰락했다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황실 역사가 오도되고 왜곡된 채 버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황실의 몰락에는 일제의 침략뿐만 아니라 황실을 정권의 위협적 존재로 여겨 핍박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책임도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황실의 재산을 모조리 국유화하고 영친왕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으며 해외의 황실 재산마저 뺏으려 했어요. 이처럼 광복 직후 황실을 보존하기는커녕 완전히 해체하려고 했으니 지금 황실과 황손들에게는 재산은커녕 자긍심마저도 남아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황실 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명예회복을 돕고 황실이 소유했던 일부 재산에 대해서는 사용권을 부여해 우리 문화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명확히 정리하지 않으면 통일 후 혼란 우려
 
  한편 남북통일 이후 황실 재산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로 현재 자산관리공사와 소송 중인 숙명학원만 하더라도 황실로부터 황해도 신천·은율·재령군에 많은 땅을 하사받은 기록을 갖고 있다. 이 밖에도 북한에 황족이 소유 또는 불하했던 토지나 임야가 존재한다면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토지연구소 조병현 소장은 “특히 조선총독부가 황실 재정 관련 서류 여러 권을 한 권으로 묶고 내용과 관련없는 제목을 붙여 은폐하는 등 고의적인 문서 조작을 통해 황실 재산을 침탈하고자 했던 근거가 있다”며 “일제 침탈-광복 후 혼란을 겪으며 황실 재산이 상당수 은폐·실종됐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통일 후 북한과 공동으로 철저한 자료 조사와 관리를 통해 이를 명확히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대 사학과 이윤상 교수는 “대한제국은 정부 재정과 황실 재정을 분리해 관리했고,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총독부가 관장했던 정부 재정과 달리 황실 재정은 별도로 건전하게 운영되었으며 독립운동 등을 위해 비밀리에 사용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한제국은 연구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미개척 영역으로, 아직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점이 많다”며 “이미 세간에 알려진 고종의 중국 은행 비자금 51만 마르크(현재 가치 250억원)를 포함해 황실의 비자금과 비밀 토지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박스3 참조)⊙
 
<박스3>
 
고종의 비자금

  조선의 왕에게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탕금’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획득한 토지 등 개인 재산을 내수소라는 기구를 두어 별도로 관리토록 하고 거기서 마련한 자금을 마음대로 썼는데, 이것이 내탕금이다. 극심한 흉년이 들면 왕이 내탕금을 풀어 국민들을 먹여 살릴 정도로 내탕금의 규모는 컸다. 대한제국의 황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1909년 외교고문이며 특사였던 허머 헐버트에게 중국 상하이에 소재한 독일계 은행 덕화은행에 예치된 예금 51만 마르크(현재 가치 250억원)를 인출해 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헐버트는 예금을 인출해 줄 수 없다는 은행 측의 답을 들었고, 당시 예금은 이미 일본에 의해 사라진 상태였다. 헐버트는 수십 년 동안 이 자금의 행방을 찾아 헤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 해당 은행에 비치된 비자금은 그 두 배인 100만 마르크에 달했다는 문서가 나왔다.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정상수 연구교수는 최근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외교문서의 복사본을 판독한 결과, 고종이 1903~1906년 덕화은행(현재 도이체방크에 합병)에 맡긴 비자금은 100만 마르크에 이른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일본이 1908년 독일정부와 합의해 51만 마르크를 가져간 사실은 확인되지만, 나머지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말했다. 국내 사학자들은 “고종은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내탕금을 상당액 해외에 비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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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주    (2019-01-09)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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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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