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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장진호 전투 참전자 李鍾淵 변호사

“장진호에서 죽어가던 중공군 눈빛 못 잊어”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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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재학중 6·25 발발, 통역장교로 입대
⊙ 인천상륙작전 등 참가, 장진호에서 카투사 지휘
⊙ 휴전 후 미국 유학, 美8軍·美 법무부 등에서 활동

李鍾淵
⊙ 84세. 고려대 국문학과 수학. 美예일대·同 로스쿨 졸업.
⊙ 호건&허드슨 변호사, 美8군·법무부·국방부 변호사, 인천국제공항공사 고문변호사 역임.
미군 통역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종연 변호사(사진 왼쪽).
  지난 9월 26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 충남 계룡대. 이날 초청된 참전용사들 가운데는 필립 D.셔틀러 예비역 미(美)해병중장과 이종연(李鍾淵·84) 변호사가 있었다. 이들은 1950년 장진호 전투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번 국군의 날 행사에 장진호 전투 참전자들을 초대한 것은 지난 5월 25일, 미군에 의해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의 유해 12구(柩)가 62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과 관련이 있다. 이들이 바로 장진호 전투 당시, 미 육군 7사단에 배속되었던 한국군, 즉 카투사(KATUSA)였던 것이다. 군(軍)에서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당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한국군 장병을 수소문했고, 그 결과 이종연 변호사가 이날 행사에 초청받았던 것이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개마고원으로 진격했던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7사단 병력이 그달 말부터 12월 초까지 중공군 9병단(兵團) 병력 12만명과 벌인 전투를 말한다. 육군 7사단이 패퇴하고, 미국 본토에서는 언론들이 “해병 1사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는 절망적인 뉴스를 토해내고 있는 동안, 미 해병 1사단은 사투(死鬪)를 벌였다. 이들의 적은 중공군뿐이 아니었다.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는 중공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에드윈 P.호이드는 미 해병대가 치른 장진호 전투에 대해 “군사상(軍史上)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칭찬’(?)에 대해 당시 참전했던 미 해병대원들은 격하게 반발한다.
 
 
  “우리는 후방으로 공격한다”
 
장진호 전투 당시 눈보라를 헤치며 행군하는 미 해병대원들.
  “그건 공격작전이었지, 후퇴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호 전투 전체가 공격작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북쪽으로 유담리까지 쳐올라갔고, 다음으로는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1500m 지점까지 공격해 갔으며, 그러고는 남쪽으로 유담리에서 황초령까지 공격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러는 중에 후퇴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우드로 윌슨 테일러)
 
  당시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少將)도 상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후, 휘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 밖에 6200여 명의 비(非)전투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동상(凍傷)환자였다. 이에 반해 중공군 9병단은 2만5000여 명의 전사자와 1만20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중공군 9병단의 중동부 전선 남하가 저지된 것이다.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 13병단의 공격으로 유엔군이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주고, 오산-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다. 만일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9병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면, 중공군 9병단은 중동부 전선으로 남하하면서 서부전선의 13병단과 함께 유엔군을 강하게 압박했을 것이다.
 
  중공군 13병단의 공격만으로도 유엔군은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고,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다. 만일 중공군의 작전대로 9병단까지 중동부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남하했다면,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6·25전쟁은 공산 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미 해병 1사단의 감투(敢鬪)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당시 이종연 변호사는 한국군 연락장교로 미 해병 1사단에 파견되어 있었다. 10월 6일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이 변호사는 84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이 변호사의 전쟁 궤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전쟁이 났는데도 강의 강행했던 玄相允 총장
 
장진호 전투에 대해 증언하는 이종연 변호사.
  이종연 변호사(이하 호칭 생략)는 황해도 연백 호농(豪農)의 아들이었다. 당시 연백은 38선 이남이었지만, 북한과 가까웠던 탓에 학교 안에서 좌익세력의 세(勢)가 강했다. 연백중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좌익의 등쌀에 밀려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 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학사행정이 어수룩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덕수교회에 다니면서 메이블 겐솔이라는 여자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었던 시절, 영어회화를 배워놓으면 미군부대에라도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미군부대에 취직하겠다는 그의 꿈은 뜻하지 않은 시기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터진 6월 25일은 물론 26일과 27일에도 그는 등교했다. 한국유교사(韓國儒敎史)를 강의하고 있던 현상윤(玄相允) 고려대 총장은 적기(敵機)가 서울상공을 날고, 멀리서 포성(砲聲)이 들려오는 데도 강의를 강행했다. 6월 27일, 현 총장의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하나 둘 강의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의 끝 무렵까지 자리를 지키던 이종연도 슬그머니 강의실을 나왔다(서울에 남은 현상윤 고려대 총장은 결국 납북됐다).
 
6·25전쟁이 난 후에도 강의를 계속했던 현상윤 고려대 총장은 결국 납북됐다.
  용두동에 있던 집에는 고향에서 뒷바라지를 해주기 위해 올라온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너만이라도 내려가라”며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이종연은 “인민군이 들어오면 너 같은 젊은이는 잡혀가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는 별일 없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애써 위안으로 삼으면서 집을 나섰다.
 
  6월 28일 광나루에서 헤엄을 쳐서 한강을 건넌 이종연은 한동안 광주(光州)에 있던 친구 정하택의 집에 머물렀다. 함께 정하택의 집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친구 계봉혁(아시아개발은행 이사 역임)은 “하루빨리 대구로 가서 국군에 입대하자”고 재촉했다.
 
  광주를 떠난 이종연과 계봉혁은 거의 걸인(乞人)과 같은 몰골이 되어 7월 말 대구에 도착했다. 어느 날 이종연은 시청 앞 게시판에서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영어통역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다.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7월 29일 아침 9시까지 시험장인 모 학교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훈련 없이 통역장교가 되다
 
이종연 변호사의 육군 통역중위 임명장. 이 변호사는 훈련 한번 받지 않고 중위로 임관했다.
  7월 29일 아침, 이종연은 미군이 임시로 사용하고 있던 학교에서 면접시험을 쳤다. 지원자는 이종연 말고도 다섯 명이 더 있었다. 그중 두 명은 대구 지역의 학교에 근무하는 영어교사였고, 나머지는 대학생들이었다. 고려대 2학년에 재학중이고 교회 영어성경반에 다니면서 겐솔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는 말에 시험관은 두말없이 그를 합격시켰다. 시험관은 “오늘 저녁 부산으로 내려가 곧 상륙할 미 해병대에 배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종연의 회고다.
 
  “미 해병대에 배속될 것이라는 말을 듣더니, 영어교사 두 명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더군요.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나이가 좀 들었던 그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병대가 일본군과 혈전(血戰)을 벌인 최일선 부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육군 중위가 됐다. 장교후보생 교육은 고사하고, 일반 병사로서의 훈련도 없었다.
 
  “미군은 참전하면서 한국군에 통역장교들을 요청했어요. 하지만 당시 군내(軍內)에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자원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어 좀 하는 젊은이들을 급히 모집했고, 이들을 미군에게 보내면서는 ‘한국군 중위’라고 둘러댔습니다. 얼마 후 국방부 장관 명의로 된 정식 임관사령장(辭令狀)이 나왔습니다.”
 
  그날 밤으로 부산으로 내려간 이종연은 7월 30일 미 제1임시해병여단 5연대 수송중대에 배속됐다. 여단장 에드워드 크레이그 준장, 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은 모두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부중대장 바믄 중위는 그를 보자마자 수송선 샤워실로 데리고 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미 해병대 전투복과 카빈총, 실탄 등이 지급됐다. 이렇게 해서 이종연은 전쟁이 나기 전 꿈꾸었던 대로 미군부대에 ‘취직’이 됐다.
 
  부산에서 만난 미 해병대는 사기충천해 있었다. “피란을 내려오는 동안 후퇴하는 국군이나 미군(육군)들을 보았는데, 참 형편없었어요. 그런데 무장도 잘되어 있고,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미 해병들의 모습을 보니, 나까지 즐거워지더군요. 전쟁이 터진 후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지요.”
 
 
 
낙동강 전선에서

 
  다음 날 아침, 부대는 서쪽 인근 진동리로 이동했다.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호남 지역으로 진출했던 북한군 6사단을 마산 방면으로 투입했다. 북한군 6사단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전했던 팔로군(八路軍) 소속 조선족 장병들로 구성된 최정예 부대였다. 마산이 뚫리면 부산은 지척이었다.
 
  다급해진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막 부산항에 도착한 미 해병 1여단을 진동리로 보냈다. 수송중대 소속인 이종연은 중대장의 지프에 동승해서 부대를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질 무렵 진동리에 도착한 미 해병대는 야전삽으로 참호를 구축하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에 어깨에 소총을 멘 50명가량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미 해병대원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중대장 아클랜드 대위가 이종연에게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종연이 “누구냐?”고 묻자, 앞장선 장교가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대답했다. 한국군에 해병대가 있는지 여부도 몰랐지만, 아클랜드 대위에게 그렇게 보고했다. 중대장은 그들을 통과시켰다. 그들이 통과하는 동안에도 미 해병대원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들에게 총구(銃口)를 겨누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만난 한국군 장교는 후일 해병대사령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김성은(金聖恩)이었다. 한국 해병대사령부는 후일 이때의 공적을 인정해 이종연에게 명예해병대증을 수여했다.
 
  진동리로 진출했던 미 해병대는 경남 고성에서 북한군 6사단 주력부대를 격퇴한 후, 진주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어 부대는 북한군 4사단이 점령한 영산(靈山)으로 이동했다.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이종연은 선두 지프를 타고 부대를 인도했다. 그의 회고다.
 
  “어디를 가나 나도 초행길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도를 봐도 확실치 않을 때는 만나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물어 갔죠. 어떤 때는 민가에 들어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길을 물어보기도 했고…. 경상도 사람들, 외지(外地) 사람이라고 얼마나 서먹하게 굴던지….”
 
 
  中世 사람 같던 맥아더
 
  전선이 위험해질 때마다 투입되는 미 해병대를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소방대’라고 불렀다. 9월 초 해병대는 영산 방위를 미 2사단에 인계하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종연이 소속된 해병 5연대는 미 본토에서 이동해 온 미 해병 제1사단 휘하로 들어갔다. 이종연은 인천에 상륙하는 부대의 기함(旗艦)인 매킨리호(號)에 승선했다. 이와 함께 그는 미 해병 1사단 G-2(정보참모부)로 배속됐다. 1여단장 크레이그 준장은 그에게 중위 계급장을 착용하도록 해주었다. 이종연의 회고다.
 
  “매킨리호에 승선할 때만 해도 인천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원산이나 군산 아니면 진남포라고 생각했죠.”
 
  1950년 9월 15일 오후 4시. 이종연은 소형 상륙정으로 옮겨 타기 위해 매킨리호 선체에 걸린 밧줄 사다리에 올랐다. 갑판은 건물 3층 높이쯤 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퍼런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아찔했다. 밧줄 사다리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미 해병들은 익숙한 솜씨로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이종연은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간신히 상륙정으로 옮겨탔다.
 
  10척의 상륙정이 인천을 향해 돌진했다. 이들이 상륙한 곳은 ‘청색지대’, 지금의 송도해수욕장 서쪽 지역이었다. 오후 5시30분, 밀물 시간에 맞춰 미 해병 제1사단(1·5·7연대)과 한국 해병 제1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에는 북한군 8사단, 31사단, 경비여단 등이 주둔해 있었지만,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이종연은 “인천은 ‘거저먹었다’고 할 정도로 적의 저항이 미미했다”고 말했다.
 
  미 해병 1사단 사령부는 예하 1연대와 함께 움직였다. 1연대장 체스티 풀러 연대장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뒷산을 점령했다.
 
  맥아더 원수가 풀러 연대장에게 작전 성공을 치하하면서 만나자고 하자, 풀러 연대장은 “사단본부는 산에 있으니, 올라오라”고 했다. 맥아더가 풀러에게 훈장을 수여하려 하자 그는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며 사양했다. 이종연은 “맥아더는 말투나 행동이 마치 중세(中世)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윌리엄 쇼 대위

 
이종연 변호사와 함께 미 해병 1사단 G-2에서 근무하다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한 윌리엄 쇼 대위.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전투는 치열해졌다.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북한군에 빼앗긴 지 3개월이 되는 9월 28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하려 했다. 이는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종연은 사단본부에서 근무하면서 노획된 적군의 작전계획 관련 문서들을 즉석에서 번역해 일선 부대장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북한군 포로를 직접 심문하기도 했다.
 
  사단 G-2에는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일한) 대위와 윌리엄 해밀튼 쇼 해군 대위가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쇼 대위는 2차대전 당시 해군장교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 참가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에 와서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는 등 해군 창설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제대해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6·25 발발 소식을 접하고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가 왔을 때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다시 군복을 입었다.
 
  쇼 대위는 서울이 아직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9월 22일 정찰대를 이끌고 녹번리(지금의 은평구 녹번동)까지 진출했다가 전사(戰死)했다. 이종연은 “키가 크고 평양 말씨를 쓰는 쇼 대위는 백인이라는 우월감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 진정한 신사였다”고 회고했다. 2010년 6월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쇼 대위의 동상이 세워졌다.
 
  서울 탈환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특히 미 해병 5연대는 연희고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종연은 해병 1사단 본부 및 해병 1연대와 함께 한강을 건너 용산으로 들어갔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다음 날에는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원수, 유엔군 지휘부가 참석한 가운데 환도식(還都式)이 열렸다.
 
 
  어머니와의 재회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군.
  환도식을 구경하고 난 후 이종연은 지금의 조선일보사 근처에 있던 KBS방송국으로 향했다. 뜻밖에도 방송국에는 5~6명의 북한군이 있었다. 이종연이 카빈총을 겨누자 그들은 손을 들었다. 군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전투요원이 아니라 방송요원인 듯싶었다. 이종연은 그들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한 후 미군 헌병을 불러왔다. 하지만, 다른 한국군 부대에 사살당한 것인지 북한군 병사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내막은 알 길이 없었다.
 
  이종연은 용두동으로 달려갔다. 석 달 만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종연은 어머니에게 국군 장교가 되어 미군부대에 근무하고 있는데, 사령부 근무라 위험한 일은 없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어머니는 쌀밥과 콩나물국, 김치로 상을 차려왔다. 어머니는 “간밤에 좋은 꿈을 꿔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쌀밥을 지어놓고 있었다”고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어머니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면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오래 자리를 비우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어서 부대로 돌아가라”면서 “외국 군대이니 더욱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이종연은 “곧 전쟁이 끝날 것이고, 틀림없이 살아 돌아와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종연은 집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되돌아보았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말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종연의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의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구상했다. 10군단에 배속된 미 해병 1사단은 개마고원을 거쳐 낭림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후퇴하는 북한군을 동서(東西)에서 협격하기 위해서였다.
 
  미 해병 1사단은 1950년 10월 11일 인천에서 수송선에 올랐다.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승선에 앞서 전사한 해병대원들의 시신을 참배했다. 그는 시신 한 구 한 구 앞에서 일일이 묵념을 올렸다. 그 바람에 출항(出航)이 두 시간쯤 지연됐다.
 
 
  하갈우里에서
 
  10월 25일 해병 1사단은 원산에 상륙했다. 10월 30일, 해병 1사단 예하 7연대는 수동에 주둔해 있던 한국 육군 3사단 26연대와 접촉했다. 이들은 이보다 며칠 전 중공군과 교전(交戰), 16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포로들은 이미 장진호 일대에 중공군 42군이 대규모로 전개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이미 서부전선에서도 간헐적으로 중공군 참전 사실이 확인되고 있었다.
 
  하지만 맥아더 원수의 정보참모인 윌로비 소장은 한국까지 날아와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 의미를 낮게 평가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했던 참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징적 수준의 소규모 병력을 파병(派兵)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아몬드 소장은 결국 미 해병 1사단을 예정대로 장진호 지역 깊숙이 전진시켰다.
 
  11월 2일 한국군 3사단과 임무를 교대한 미 해병 7연대 예하 1대대 정찰대가 중공군과 교전했다. 이어 수동 일대에서는 다음 날까지 중공군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7연대는 황초령을 넘어 고토리로 진격했다. 이때부터 미 해병대는 장진호라는 커다란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종연은 하갈우리(里)에 있는 사단본부 본부사령실에 배속됐다. 장진군의 군청 소재지인 하갈우리는 남쪽 해안으로 향하는 탈출로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곳이 점령당하면 유담리, 덕동고개 등 전방으로 진출한 해병대의 퇴로(退路)가 끊긴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군악대를 포함해 1개 중대 규모의 사단 본부대 병력과 2개 중대 병력이 전부였다.
 
  이종연은 일종의 민사(民事)장교 역할을 수행했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부대 시설물들을 설치하고, 유엔군 수송기가 너무 먼 곳에 떨어뜨린 보급품들을 회수해 오도록 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체로 협조적이었다. 동원된 마을 사람 중에서 세 명이 죽고 여러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카투사 지휘를 맡다
 
장진호 전투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 이종연 중위는 카투사들을 지휘해 이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11월 28일 저녁 5시, 날카로운 나팔 소리, 소름끼치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드디어 하갈우리 일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중공군은 그야말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장진호 지역 깊숙이 진격했던 미 해병연대들이 차례로 철수해 왔다. 전방에서 철수해 온 부대들 가운데는 미 육군 7사단에 배속됐던 100명가량의 한국군 카투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카투사와는 달리 영어는커녕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경상도 출신의 농부 무지렁이들이었다. 미군은 이들 가운데 50명을 떼어 이종연에게 맡겼다. 이종연의 회고다.
 
  “말도 안 통하는데 미 7사단에 배속되어 천시당하면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 처음으로 한국인, 그것도 사단장까지도 ‘루테넌트(중위) 리’라면서 인정해 주는 장교의 지휘를 받게 되자, 그들도 무척 좋아하더군요.”
 
  이종연과 그의 부하들은 미군을 보조해 중공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종연은 “중공군 포로들이 우리(카투사)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기억했다.
 
  스미스 사단장은 12월 6일 하갈우리에서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영국인 기자 한 명이 스미스 장군에게 “지금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물었다. 스미스 장군은 “뭐라고!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쪽으로 공격하려는 거야!”라고 일갈했다.
 
  철수 전날 이종연은 20명쯤 되는 사람이 어느 집에 모여드는 것을 발견했다. 이종연은 숨어서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조용히 오래된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꺼내서 예배를 보았다. 하갈우리에는 일제(日帝)시대에 이미 감리교가 들어왔지만, 태평양전쟁과 공산치하를 거치면서 종교적 기반이 많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종연의 회고다. “신자들은 예배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들도 미 해병대와 함께 피란 길에 오르기로 결심한 것이죠. 평상시에도 가기 힘든 길을 나서야 하는 그들의 고단한 운명을 생각하니, 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눈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에게 간청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저들을 살려주실 수 있습니다. 저들의 피란 길에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시오.”
 
장진호 일대의 지도. (마틴 러스 著 《브레이크 아웃》에서 인용).
 
  하갈우里 철수 작전
 
미 해병들이 부상병들을 트럭에 태우고 철수하고 있다.
  하갈우리 철수 작전은 12월 6일 시작됐다. 철수를 시작하기 전, 미 해병대원들은 해병대가를 힘차게 불렀다.
 
  “몬테주마의 홀에서 트리폴리 해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조국의 권리를 위해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싸운다네!”
 
  그들은 철수를 하는 병사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기충천해 있었다.
 
  이종연은 행렬의 앞쪽에서 150명가량의 중공군 포로들을 인솔하고 남하했다. 중공군 포로들은 양순했다. 20리 정도 진군했을 때였다. 약 500m 정도 떨어진 철도 제방 위에서 누군가가 몇 번 조명을 비추었다.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도로 위의 행렬을 중공군인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중공군 포로들을 앞세운 미군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중공군 포로들을 향해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이어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루테넌트 리, 루테넌트 리”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중대장 프레드릭 심슨 소령이었다. 이종연은 총알을 뚫고 150여m를 되돌아갔다. 심슨 소령이 부른 것은 뒤에 낙오된 10여 명의 한국군 카투사 때문이었다. 심슨 소령이 물었다.
 
  “이들이 한국군인가? 중공군인가?”
 
  혼전(混戰) 가운데 미군의 눈에는 한국군 카투사나 중공군 포로나 구별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일 그들이 중공군이라고 판단되면 사살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종연이 한국군이라고 하자, 심슨 소령은 그들을 이종연에게 맡겼다.
 
  다시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쏟아지는 총탄 때문에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기 어려웠다.
 
  “피융, 피융 하면서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것입니다. 바로 앞에 팍, 팍, 팍 하면서 총알이 박힐 때는 정말이지 고개도 들 수 없어요. 도랑 속에서 나는 ‘하나님, 꼭 살아 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게 해주세요.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맥클렁 상사의 戰死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됐다. 사방에서 총알과 박격포탄이 쏟아졌다. 총알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총알(amor), 총알”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탄약수송트럭에 있던 병사들도 부상을 당했다. 그때 윌리엄 맥클렁 상사가 트럭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부상병들을 돕는 한편, 탄약을 해병대원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때 적의 박격포탄이 날아와 떨어졌다. 파편이 맥클렁 상사의 이마에 박혔다. 이종연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포탄에 맞은 맥클렁 상사의 시신이 내 곁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총알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자신의 생사(生死)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전투가 끝난 후 나는 그의 시신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는 내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고, 자기 목숨보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더 챙긴 인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용감한 미 해병대원들도 점차 기가 죽기 시작했다. 특히 기관총이나 자동소총 사수에게는 적군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자기가 쏘는 총구의 불빛 때문에 적탄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미 해병대원들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프레드릭 심슨 소령이 몸을 일으켜 독전(督戰)했다. “이러고도 너희가 해병이냐? 부모님이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 말에 용기가 생긴 해병들이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에서 먼동이 틀 무렵 미 해군 함재기(艦載機) 코르세어가 나타났다. 비행기의 기총소사(機銃掃射)에 중공군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결국 중공군들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했다.
 
 
  진짜 미 해병대원이 되다
 
흥남으로의 철수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미 해병대는 다시 남쪽 고토리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종연 휘하의 카투사 병사들이 앞장을 섰다. 그들은 도로 양편에 쓰러져 있는 중공군 병사들을 사살했다. 이종연의 회고다. “내가 지휘하고말고 할 것도 없었어요. 카투사들이 신이 나서 앞장서 내려갔으니까…. 미군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카투사 병사들이 제거해 주니 좋아했지요. 하지만 죽어가는 중공군 병사들 가운데는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너는 사살을 중단시킬 권한이 있는 장교인데, 왜 중단시키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어요. 나중에 가끔 그들의 눈이 떠오르더군요.”
 
  12월 7일 마지막 미 1해병사단 병력이 목적지인 고토리에 도착했다. 1사단 예하 3개 연대 병력이 한데 모인 것이다. 운 좋게도 이종연 휘하의 50명의 카투사는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심슨 소령이 병사들을 점검하더니, 한 명도 죽지 않은 것을 알고는 ‘우와!’ 하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하지만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공군이 16km에 달하는 고토리~진흥리 사이의 황초령 고갯길에 강력한 화망(火網)을 구성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 해병대가 이들의 공격을 뿌리치고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것은 12월 11일이었다. 이종연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내가 처음 미 해병대에 배속됐을 때만 해도, 난 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였어요. 하지만 함께 전투를 치르면서, 특히 장진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같이한 후, 그들은 나를 자기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더군요. 진짜 미 해병대원이 된 것이죠.”
 
 
  休戰, 그리고 미국 유학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대원들은 영하 20~30도의 극심한 추위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이종연의 부대는 12월 13일 흥남에서 수송선에 올랐다. 장진호에서 고생한 덕분에 가장 먼저 승선의 혜택이 주어진 것이다. 2~3일간의 항해 끝에 배는 마산에 도착했다. 10만여 명의 민간인을 철수시킨 흥남철수는 이들이 흥남을 떠난 후에 이루어졌다. 이종연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갈우리 피란민들의 행방이다.
 
  “하갈우리에서 출발한 피란민들이 고토리까지는 같이 왔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장진군에서 왔다는 사람은 봤지만, 하갈우리 출신이라는 사람은 여태까지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 끔찍한 추위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 참 가슴이 아픕니다.”
 
  이종연의 전쟁은 여기서 사실상 끝난다. 이후 그는 동부전선을 거쳐 파주에 주둔한 미 해병 1사단 헌병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한국 군경(軍警)과 협력해 임진강을 건너오는 북한 공비들을 막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1951년에는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온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 훈장을 받았다.
 
  1953년 7월 휴전을 맞은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는 휴전협정 체결 소식을 환영했다.
 
  “나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존경하지만, 그분이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선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부터 살리는 것이 옳았다고 봅니다.”
 
  휴전 소식을 접한 동료 미 해병들은 들떴다. 헌병대에 근무하던 해병들은 대개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다니다가 온 집안 좋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귀국하면 로스쿨을 간다, 경영대학원을 간다 하면서 장래 계획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이종연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고향 연백에 남은 아버지는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제대하면 당장 먹고살 일이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 눈이 벌게져서 나타난 이종연을 보고 미 해병들이 놀라서 이유를 물어봤다. 사연을 들은 그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존 리’라고 부르는 이종연을 전쟁 후에도 계속 군인의 길을 걸을 노련한 직업군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도 전쟁 전에는 대학생이었다면서 T.S 엘리엇의 시(詩) ‘황무지’를 읊었더니 모두 깜짝 놀라더군요. 내가 자기들처럼 꿈 많은 젊은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들은 나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동료들은 자기가 다니던 모교(母校)에 이종연이 입학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여러 학교에서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제안이 왔다. 이종연은 예일대를 선택했다.
 
 
  “그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1954년 9월 이종연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그는 로스쿨에 진학, 1961년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이종연에 의하면, 한국인으로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딴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한다. 1970~1988년에는 주한 미8군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우였던 크루랙 미 태평양사령관의 도움이 컸다.
 
  크루랙뿐이 아니었다. 장진호의 미 해병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나타나 그에게 도움이 됐다. 이종연 변호사가 인천공항공사 고문변호사로 있을 때였다. 당시 인천공항은 개항(開港)을 앞두고 미연방항공국(FAA) 기준에 부합하는지 인증을 받아야 했다. FAA 담당관의 이름은 윌리엄 행콕이었다. 이종연은 하갈우리에서 전사한 존 행콕 중위의 이름을 떠올렸다. 혹시나 싶어 행콕 중위의 이야기를 꺼냈더니, 윌리엄 행콕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이후 윌리엄 행콕은 인천공항이 FAA 인증을 얻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다. 덕분에 인천공항은 차질없이 개항할 수 있었다.
 
  이종연 변호사가 미 법무부에서 일할 때였다. 한국과의 범죄인인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국무부·법무부 등 미국 유관 부처 대표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종연 변호사는 미 법무부 대표로 나갔다.
 
  “동양인인 내가 법무부를 대표해 나가자, 국무부 대표는 ‘너는 뭐냐’는 식으로 쳐다보더군요. 그 친구가 미 해병대 출신이었어요. 그에게 ‘당신, 해병대 출신이라며? 나도 미 해병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었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을 확인한 그는 ‘그럼, 당신이 전사(戰史)에 나오는 그 존 리냐’고 묻더니, 바로 깍듯하게 나오더군요.”
 
  미국 법무부에 근무하면서, 이종연 변호사는 정신대대책위원회를 도와서 미국 정부가 일본 종군위안부 모집에 관련했던 자들을 전범(戰犯)으로 지정해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제정할 때 기여하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로펌인 호건&허드슨에 근무할 때에는 존 로버츠 현 미 연방대법원장과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초신 퓨
 
장진호 전투 생존 미 해병들의 친목회 ‘초신 퓨’의 소식지.
  이종연 변호사는 1983년 미국에서 조 오웬, 프랭크 커 등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들과 ‘초신 퓨(Chosin Few·‘초신의 소수 생존자들’이라는 의미)’를 결성했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어 발음이다. 당시 미군이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된 지도를 갖고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장진’을 ‘초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미군에게 ‘초신’은 명예로운 전설이다. 미 해군은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순양함을 ‘초신함’이라고 명명(命名)했다. 알래스카주 출신 돈 영 하원의원은 지난 6월 알래스카의 한 이름 없는 산을 장진호 전투 생존자를 일컫는 ‘초신 퓨’라고 명명하는 법안을 미 의회에 제출했다. 이종연 변호사는 말한다.
 
  “공산군과 싸울 때에는 솔직히 이념 같은 것은 잘 몰랐어요.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생을 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그때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머나먼 이역(異域) 땅까지 와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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