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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크레텍책임㈜ 최영수 사장

“매뉴얼 만들어 지키는 게 기업 성장의 교과서”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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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할 당시 정직하게 장사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영세하고 한계가 많던 공구업계에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임보장’이란 원칙을 지켜가고, 투명하고, 부정과 결탁하지 않는 떳떳한 기업, 해보니 과연 가능했습니다”

⊙ 청년 시절, 대구 북성로와 인교동 일대에서 공구 노점과 행상, 고물수집
⊙ 1971년 대구 원대동에 ‘책임보장공구사’로 창업해 41년 만에 3400억원대 ‘전국 1위’ 공구·산업용품
    유통회사로 키워
⊙ 공구 9만5500여 개 품목을 망라한 2128쪽 분량의 《한국 기계공구 종합 카탈로그》 발행
⊙ 국내 유통분야 1호로 ‘ISO-9001’ 인증받고, 바코드 시스템·전자주문·전자결제 시스템 도입

최영수
⊙ 65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중소기업청 ‘신지식인’ 제67호.
⊙ 대구산업대상 노사화합부문 수상(2012), 국가품질상 산업포장 수상(2011),
    한국유통대상 지식경제부장관상(2010) 등 다수.
⊙ 現 대구상의 상공위원, (사)한국산업용재협회 명예회장, 대구 새마을회 회장.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에서 대구 달성공원 사거리까지를 북성로(北城路)라 부른다. 북성로는 1906년 대구읍성의 북쪽 성곽이 헐리면서 생겨났다. 섬유회관에서 인교동 쪽으로 가다 보면 고색창연한 ‘오토바이 골목’이 이어져 있고, 그 끝자락에 삼성그룹의 모태(母胎)인 삼성상회 옛터가 나온다.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근대적 상업활동을 시작한 삼성상회 자리 뒤에는 ‘크레텍책임㈜’이라는 공구유통회사가 버티고 있다. 이 회사는 주변의 낡은 건물을 모조리 점령, 거대한 패밀리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막막하던 이십대, 삼성상회 앞에서 쪼그려 공구 노점을 하던 최영수(崔英洙) 사장은 현재 매출액 3400억원 규모의 회사 CEO가 되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41년 만이다. 1인당 총생산(GRDP)이 지난 19년간 전국 꼴찌인 대구 경제에 ‘전국 1위’ 공구·산업용품 유통회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최 사장의 성공을 이야기하기 앞서 북성로와 인교동 주변에 따개비처럼 붙은 공구상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낡고 기름때 덕지덕지 붙은 곳이지만 한때는 자동차 제조공장, 운수회사, 섬유공장, 미군 보급창, 대구역의 번성과 맞물려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젊은 시절 이병철 회장 역시 북성로 일대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것이다. 최영수 사장의 말이다.
 
  “북성로의 번성은 1950년대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근거리권 배후 생산기지였던 대구 3공단의 등장, 화려했던 섬유산업과 자동차, 오토바이 부속품 상권이 영향을 미쳤어요. 이로 인해 야시(여우의 대구 사투리)골목, 떡전골목, 오토바이 골목, 화교골목 등 대구의 명물(名物) 거리가 든든한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상회와 크레텍
 
크레텍책임(주)의 사무실 모습. 역동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지난 6월 4일 대구 인교동 ‘크레텍책임’ 본사에서 최영수 사장을 만났다. 크레텍은 방대한 10만여 종의 공구·산업용품을 분류, 집대성하고 과학적 유통망을 통해 공구산업이 성장하는 데 기여한 기업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최 사장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마치 작은 일에도 큰 횡재를 한 것처럼 무릎을 치며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랄까. 그는 “먼 곳에서 오셨다”며 두꺼운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나 회사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달랐다. 불황에 신입사원부터 뽑고, 공격적으로 영업사원을 거래처에 투입하며, 전 직원을 새벽같이 나오게 해 ‘집단 군무(PT 체조)’를 시킨다는 것이다. 실적이 안 나오면 “힘냅시더. 우린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사내방송을 하고 매년 경영방침을 바꾸며(올해는 ‘큰 주머니, 긴 두레박’) 두 달에 한 번씩 경영지침을 내린다. 지난 1~2월의 경영지침은 ‘매출 총력’, 3~4월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자’, 5~6월은 ‘크게 놀아보자 불 한번 질러보자’다.
 
사장실 유리문에 최영수 사장이 자필로 쓴 문구.
  사장실 문에 최 사장이 직접 쓴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사자성어가 붙어 있었다. 미쳐야(狂) 미치(及)고, 미치려(及)면 미쳐(狂)야 한다는 뜻이다. 표어가 다소 섬뜩했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일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혼자 미쳐서 이룰 수 있는 일도 있지만, 함께 미쳐서 일해야 신명나게 일할 수 있고, 성공의 결실이나 보람도 더 크잖아요.”
 
  ―올해 경영방침이 ‘큰 주머니, 긴 두레박’인데 무슨 뜻입니까.
 
  “주머니가 커야 뭘 좀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또 두레박 끈이 길어야 깊은 우물도 길어 먹을 수 있잖아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이 들어가면 뭔가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또 큰 도전을 해봐야 어려운 과제도 이겨낼 수 있어요.”
 
  크레텍책임 정문은 삼성상회 옛터 바로 뒤다. 현재 사옥 ‘책임관’은 이병철 회장의 사택 자리라고 한다. 최 사장은 작년 대구시가 ‘삼성상회 옛터’를 기념공간(215.9㎡·65평)으로 조성하자, 주변 땅 22평을 내놓았다.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하기 전 6개월 동안 삼성상회 앞에서 공구 노점을 했어요. 군용 천막을 치고 공구를 진열해 팔았어요. 주변에 비슷한 노점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막막하던 시절,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제게도 물건 파는 재주 하나는 있었나 봐요. 노점 일을 처음 가르쳐준 아저씨들보다 더 많이 팔았으니까요.”
 
 
  “어이, 책임보장!”
 
책임기업사 시절의 최영수 사장(맨앞).
  그에게 있어 대구 북성로와 인교동은 특별한 원형(原形) 공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 온 뒤 일하고 결혼하고 사업을 이룬 곳이다. 가난을 이겨내고 싶다는 갈망과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을 번갈아 질겅질겅 씹으며 한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대구 달성군 옥포면에서 살다가 1959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인교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지금은 사라진 ‘떡전골목’ 10평이 안 되는 사글세에 살았어요. 전학 간 종로초등학교 2층 교사(校舍)의 목조계단을 오르는 데 발이 후들거렸어요. 난생처음 2층 건물에 올라갔던 겁니다. 만약 건물 무너지면 창문으로 뛰어내릴 각오였어요.”
 
  이듬해 경북중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경상중에 입학했다. 졸업한 뒤 고교 진학을 포기한 채 아버지가 다니던 철공소에서 수습공으로 3년간 일했다. 기름에 전 작업복이 부끄러워 몇 년 동안 친구를 안 만났다고 한다.
 
  ‘크레텍책임’은 1971년 12월 스물다섯의 최 사장이 설립한 ‘책임보장 공구사’에서 출발한다. 군 제대 후 초기 자본금 40만원으로 시작한 10평 남짓한 공구상이었다. 1975년 6월 ‘책임기업사’로 상호를 바꿔 볼륨을 키웠고 2010년 ‘크레텍(CRETEC)책임’으로 다시 고쳤다.
 
  ‘책임보장’이란 상호는 고객의 요청을 책임지고 지키겠다는 뜻이다. ‘책임’과 ‘보장’이란 다소 틀에 박힌, 그러나 거래의 기본이 되는 이 말에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객들은 그의 이름 대신 “어이, 책임보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건값을 안 깎아주지만, 정품을 쓰고, 주문 배달시간을 지키는 ‘책임보장’이었습니다. 처음엔 안 깎아준다며 뒤돌아서지만, 주위와 비교해 보니 제가 제시한 가격과 비슷하거나 싸다는 것을 알고 다시 찾아왔어요. 하지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차를 들어올리는 ‘잭’을 수리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버스 기사분이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막상 잭을 쓰려니 고장이 나더란 겁니다. 그 기사가 저를 찾아와 ‘책임은 무슨… 무책임이구먼!’하며 잭을 내던지는 게 아닙니까. 아차, 싶었습니다. 다시는 무책임이란 말을 안 듣고 싶었어요. 책임이란 말은 좋지만, 그 앞에 ‘무’가 붙으면 무서운 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최 사장은 자전거를 끌며 공구 노점을 했고 장거리 시외버스 운전기사에게 공구를 파는 대신 고철을 받아오는 행상을 했다. 자동차 부품, 농기구, 베어링, 공구 등의 고철을 잘 닦고 손질해 되팔았다. 차차 ‘책임보장’의 명성과 신용이 쌓이면서 1975년에 공구 납품업, 1980년에 도매업으로 확장했다.
 
 
  “10만 개 부품 외우기, 알고 보면 쉽습니다”
 
지난 2011년 3월 21일 워런버핏(가운데)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김범일 대구시장(오른쪽)과 함께한 최영수 사장(왼쪽).
  현재 크레텍책임의 주사업은 기계공구 및 관련 기계의 도소매·무역이다. 거래하는 품목이 8만1495개(2011년 기준), 취급 메이커가 740개에 이른다. 1987년 ‘책임’에서 분사한 ‘크레텍웰딩’은 주로 용접 기자재 및 산업 안전용품을 판매한다. 1만5106개 품목을 거래한다.
 
  크레텍책임의 올해 매출목표는 2420억원, 크레텍웰딩은 980억원이다. 작년에는 ‘책임’이 2144억원, ‘웰딩’이 841억원의 실적을 거뒀다. IMF가 몰아친 1998년 잠시 주춤했을 뿐 창사 이래 줄곧 성장을 거듭해 왔다. 2011년 ‘국가품질 산업포장’, 2010년 ‘한국유통대상(지식경제부장관상)’, 2009년 ‘우수자본재 개발 유공기업상(국무총리상)’, 2008년 ‘납세자의 날,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는 등 국내 최고의 산업공구 유통업체로 인정받고 있다.
 
  크레텍책임은 또 2년마다 갱신되어 발행하는 2200쪽 두께의 공구 바이블로 통하는 《한국 공구·산업용품 종합 카탈로그》를 제작하고 있다. 수록 품목이 ‘수(手)작업 공구’에서부터 ‘배관공구’, ‘측정계측공구’ 등에 이르기까지 9만5500개(수록 상표는 1020개)에 달하는데 지금까지 15만 부를 판매했다고 한다.
 
  ―10만 개 부품을 다 외웁니까.
 
  “듣도 보도 못 한 공구 부품이 엄청시리(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대·중·소 분류로 나누고 체계화시키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하나 외우려고 덤비면 도저히 못 외웁니다. 흔히 멍키스패너, 드라이버만 알지 어떤 것은 바늘처럼 얇고 어떤 것은 항공기에 쓰이는 거대한 정밀부품도 있어요.”
 
  그러나 공구를 분류하고 일일이 바코드를 부착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000년 초의 일이다. 한국표준협회에 물류관리에 관한 조언을 요청했더니 “책임기업은 바코드를 부착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공구에 바코드를 부착한 업체가 20%를 넘지 못했다. 외국 제품은 바코드가 있었지만 한국 제품은 바코드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3개월간의 컨설팅을 받고 시도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러다가 직원들 다 죽이겠구나”
 
최영수 사장이 ‘2011 국가품질상 산업포장’을 수상하고 있다.
  2003년 4월 크레텍책임에 석현수 부사장이 부임해 왔다. 공군 준장으로 예편한 석 부사장은 주로 군수 계통에서 일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동기인 그에게 최 사장은 “군인정신으로 바코드를 추진하라”고 했다.
 
  디데이를 2004년 4월 1일로 잡고 밀어붙였다. 매일 밤 12시가 넘도록 그 많은 제품에 바코드를 일일이 손으로 직원들과 함께 붙였다. 20여 일이 지나자 최 사장은 ‘도저히 더는 못 하겠다. 이러다가 직원들 다 죽이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공구유통업체만의 노력으론 불가능하다. 협력사(제품 공급사)와의 완전한 협력이 필요했다. 어떤 업체는 애원하듯, 어떤 업체는 협박하듯 요구했다. 밤늦게까지 손으로 바코드를 붙이다 보니, 협조가 잘 안 되던 업체들도 서서히 따라주기 시작했다.
 
  2004년 연말이 되어 70% 부착률을 넘었고, 시행 1년이 되었을 때 80%가 넘었다. 그리고 현재 98% 정도이다. 바코드를 도입하던 당시 4만여 개 정도이던 물품은 어느새 10만여 개로 늘어났다. 만약 일찌감치 바코드 도입을 서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남은 2%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20%를 98%로 만들었는데, 남은 업체에 대해서도 계속 설득해 100%를 이룰 계획입니다. 만약 이 시스템을 처음부터 포기했다면 회사 운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직원 수가 지금보다 20% 이상 더 있어야 하고, 복잡한 제품관리, 재고관리도 어려웠을 겁니다.”
 
  바코드뿐만이 아니다. 크레텍책임은 국내 유통업체로선 처음으로 지난 1996년 12월 ‘ISO-9001 심사’에 합격했다. 회사 규모로 볼 때 표준화를 이루기에 이른 감이 있었다고 한다.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고 절차만 까다로워 효율이 떨어진다는 내부 지적도 있었다. 최 사장은 밀어붙였다. 그는 “품질 표준화를 이뤄놓으니 지금까지도 회사가 성장하는 데 받침이 된다”고 했다. 이후 안전부문 표준화인 ISO-14001, 환경분야 표준화인 OSHAS-18001을 획득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초석을 다졌다.
 
  “정착 초기에는 무척 어려웠지만 지금은 회사 업무에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그때 이렇게 해놓지 않았더라면 회사의 몸집이 커지면서 혼란이 가중돼 이만한 성장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매뉴얼을 마련하고 지침을 지켜가는 것은 기업이 성장하는 데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합니다.”
 
최영수 사장의 도장
 
“꿈은 꼭 이루어진다”

 
   처음 공구 행상을 할 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 열심히 일했지만 ‘계속 이런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은행통장부터 하나 만들자고 마음먹었는데, 통장을 만들자니 도장이 필요했다. 도장을 파러 가는 길에 한참을 생각했다.
 
  ‘최, 영, 수! 내 이름 석 자에 책임을 지자! 지금 나의 모습은 이렇지만 지금 내 나이 두 배가 되는 쉰 살에는 한국 최고가 되자.’
 
  그래서 도장에 ‘Korea First Man 최영수 1997’이라고 새겼다. 1997년은 그가 쉰 살 되는 해였다. 도장을 본 은행창구 여직원이 웃었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훗날 내가 한국 최고가 꼭 될 테다’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고 한다.
 
  드디어 25년 후 쉰 살. 정말 공구 분야 한국 최고가 되었을까.
 
  “사실, 목표 시점에 맞춰 다 이루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나이 쉰 살은 비로소 어떻게 하면 정상정복이 가능할지 그 방법을 알게 된 시점이었고 고지가 훤히 보일 때였습니다. 쉰 살에 이루겠다는 목표는 약 10여 년 뒤로 미뤄져 육십이 되던 해에 이뤘습니다.”
 
  그때 그런 목표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최고’라는 결실은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저는 늘 꿈꾸는 미래를 바로 눈앞에 보듯 그려왔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설령 시일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꿈은 꼭 이뤄집니다.”
 
  확신 못 했던 ‘전자주문 시스템’ 개발
 
크레텍의 상담원이 전자주문 시스템을 통해 거래를 하는 모습.
  크레텍책임은 1985년부터 가격표 발행을 시작했고, 1989년부터 제품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그 많은 부품의 재고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웠고 들쑥날쑥한 가격변동도 고민거리였다. 전화 주문이 많아지고, 전화 주문을 받는 직원의 책상에 전화기가 하나씩 늘어갔다. 그래도 고객사는 항상 더 많은 요구를 하였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최 사장의 시선은 온라인 전자주문 시스템(CTX)으로 옮아갔다. 이 시스템은 온라인으로 가격비교, 재고확인, 판매가 가능했다. 2005년 7월에 준비해 이듬해 7월 오픈했다. 최 사장은 “성공할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겁도 났다. 다만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갔다”고 회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픈했지만 “10%만이라도 온라인으로 주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CTX를 통한 주문은 계속 늘어났다.
 
크레텍의 자랑인 전자주문 시스템의 메인화면.
  “이제 CTX 시스템에 들어오면 재고확인뿐만 아니라 회원사에 매겨지는 등급에 따라 가격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개발을 포기했다면 고객들은 예전처럼 재고나 가격변동에 대한 답변을 하염없이 기다려주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CTX에 공구 조작을 시연하는 동영상 설명까지 넣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와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CTX 도입에 앞서 크레텍은 2004년 자동이체 시스템(CMS)을 개발하기도 했다. 처음엔 영업부와 경리부조차 어렵다고 했다. “신문요금 이체도 어려운데 큰 물품 대금을 어떻게 이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꾸준히 설득하고 홍보했다. 고객사의 동참이 늘면서 영업부 직원들이 수금기간에도 영업할 수 있게 됐다.
 
  “자동이체가 정착되자 매출도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지금 4000여 거래업체 중 80% 이상을 이 시스템으로 수금합니다. 만약 옛날 방식을 고집했다면 지금도 영업사원들이 일일이 수금하러 다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건비는 물론, 시간적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크레텍책임의 성공비결은…
 
情과 정신무장

 
공구업계에 바코드를 정착시켜 물류 과학화를 실현했다.
  경북대 경영학과 허문구·김국태 교수는 지난 2010년 논문 ‘자전거행상에서 공구유통산업의 리더로’를 통해 크레텍의 성장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표면적인 성공요인으로는 카탈로그 발행, 바코드 시스템 도입, 전자주문 및 전자결제 시스템 도입 등이 있다. 그러나 그 내부로 들어가 성공요인을 짚어보면 동종 업계에서 차별적 전략을 구사해 고객과의 신뢰성을 높이고, 유통망과 품질관리에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전문성을 확보한 것, 그리고 사람에 대해 정(情)을 투자하는 기업문화를 만든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우리 경제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들에 전문성을 가지고 시각을 달리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크레텍의 조직문화는 특이하다. 유명강사를 불러 직원의 자기계발을 독려하고 매년 여름 해병대 체험 등의 극기훈련을 보내 정신무장을 시킨다. 격년으로 전 사원이 1박2일 여행을 떠나고 5만원 신권이 나왔을 때, 직원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는 깜짝 이벤트, 지방기업으로 드물게 모유 수유 우수기업으로 뽑혔다.
 
  지금도 닭싸움하면 5명은 거뜬
 
  최 사장에게 창업 초기 이야기를 더 물어보았다. 처음 행상을 하던 시절에는 대구 북성로나 인교동에서 자동차 정비에 필요한 공구를 구입해 미군부대 야전백에 넣고, 시외버스를 운전하는 분들에게 가서 “공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며 장사를 했다.
 
  고객이 주문하는 재고를 다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고객은 “언제 차가 어디 갔다 들어오니까 그때까지 이러한 공구를 갖다주세요”라고 주문을 했다. 그는 그 시각에 맞춰 공구를 공급했다. 당시에는 대구에 4개 시외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북부주차장을 비롯해 서부주차장(옛 내당주차장), 옛날 코오롱 자리 옆에 있던 남부주차장, 신암동 파티마 병원 앞에 동부주차장이 있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서부주차장을 거쳐 남부주차장으로 갔고, 또 중간에 공구 공급을 하고 폐품 처리를 한 후 동부주차장으로 갔다가 저녁시간에는 북부주차장으로 갔다. 어느 날, 최 사장의 자전거에 실린 짐 무게를 달아보았더니 284kg이나 됐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65kg 정도였다. 이후 원동기를 단 자전거, 그리고 오토바이를 몰았다고 한다.
 
  “지금도 체력이 좋아요. 그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열심히 다리운동을 한 덕분입니다. 요즘도 닭싸움을 1대 5로 싸워도 이길 수 있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고객이 그를 찾게 되는 경우가 더 빈번했다.
 
  “기다리지 않고 찾아다니던 방법이 제 생활에 많은 전환을 가져왔어요. 지금 돌아보면 장사를 접을 위기에 ‘고객을 찾아가자’는 발상을 한 것이 공구산업용품 유통기업의 모태가 된 것 같아요.”
 
  ‘공구산업용품 유통’이란 공구 생산업체와 도소매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말한다.
 
 
  공부 공부 공부
 
대구 중구 인교동에 위치한 크레텍책임(주)의 사옥.
  사업이 커지면서 배움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최영수 사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만나는 사람이 전부 선생이더라”고 했다.
 
  1986년 9월 대구대 사회개발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AMP·1년 과정)에 입학해 수료하고 이듬해 대구상공회의소 주관 경영 18기 과정과 무역 18기 과정을 마쳤다.
 
  1989년에는 경북대 AMP 과정, 1996년에는 경북대 AIP(공과대) 과정을 수료했다. IMF를 겪고서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1998년 서울대 AMP와 AIP 과정, 2004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국가정책과정을 공부했다. 연세대에서 유통과정과 마케팅과정을, KAIST에서 정보과정을 마쳤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 봐야 그들을 이해하고 배우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KTX가 개통되기 전,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기 위해서는 밤 11시발 새마을호 열차를 타야 했어요. 동대구역에 도착하면 새벽 2시18분입니다. 때로는 늦어져서 12시 기차를 타기도 했고, 그만 잠이 들어 부산역까지 간 적도 부지기수입니다. 오늘 배운 것을 내일 바로 써먹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최 사장은 직원들에게도 배움을 장려한다. 1991년 제일여상과 자매결연을 하였다. 이 학교 출신이 제일 많이 근무하는 회사가 크레텍이라고 한다. 20년 동안 꾸준히 입사해 현재 60여 명이 재직 중이다. 사원들이 전문대 과정에 진학할 경우 회사가 등록금 전액을 지급하고 있다.
 
 
  공구상 가격표와 카탈로그를 만들다
 
2011년 12판 《한국 공구·산업용품 종합카탈로그》. 15만 부를 발간한 산업계 최대 베스트셀러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공구업계는 영세했다. 공구상에서 물건을 파는데, 파는 사람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제품의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사장은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거래질서가 잡히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공구의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을 적절히 운용하도록 표준가격을 만들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구품목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경험 많은 직원이야 품목과 가격, 경쟁사 제품을 금방 알 수 있지만, 경험이 없는 이는 허둥대기 일쑤다. 또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름도 비슷하고 크기도 비슷해서 혼돈이 잦았다. 최 사장이 제품 카탈로그를 발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가 대구 서문교회 유년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주보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어요.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고… 잔손이 많이 갔는데, 문득 공구업계 가격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요. 그래서 사진과 품명을 넣고 가격표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1987년 처음 만든 카탈로그는 비닐 코팅을 입혀 만든 12쪽 분량의 회사 소개책자였다. 2년 뒤에는 28쪽의 카탈로그를 만들어 공구부품 8000개를 소개했다. 이것이 《한국 공구·산업용품 종합 카탈로그》의 시초가 되었다.
 
크레텍 사원들은 매일 업무 시작 전 집단체조를 통해 정신무장을 한다.
  이후 2년 혹은 3년마다 판을 거듭해 2011년 12판은 2128쪽에 수록 품목이 9만5500개나 된다. 국내외 1020개 제조사에서 만든 제품이 모두 망라되었다. 모두 15만 부를 찍었다.
 
  “2009년에 정부로부터 ‘국가 우수 자본재’로 선정됐으며, 그해 제작한 제11판 카탈로그는 13만 부가 판매돼 국내 전문서적 분야 최고 판매기록을 세웠어요. 작년 4월 12판을 발간했는데 언론에서 이 카탈로그를 ‘공구 대백과’ 혹은 ‘한국산업종사자들의 바이블’이라 불렀어요.”
 
  20여 년 전 교회 주일학교 주보를 만든 경험이 지금의 기계공구 바이블로 이어진 것이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그 일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열정은 저절로 생기고,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작고 사소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큰일을 이룰 기회가 옵니다.”
 
  1990년 3월, 크레텍책임은 처음 무역거래를 시작하였다. 일본을 방문, 거래를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은 대부분 거래처가 사전에 계약되어 있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PB브랜드 개발
 
크레텍의 PB브랜드.
  그해 5월에 타이완을 가게 되었고, 마침 국제공구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타이완 제품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은 가격은 싸고, 디자인은 형편없으며 품질은 아주 떨어져 한두 번 사용하면 쉽게 부러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 사장이 직접 박람회장을 둘러본 결과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타이완 제품의 품질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하나는 DIY(Do It Yourself)용, 또 다른 하나는 선진국에 수출하는 PRO제품들이었다. 한국에는 타이완 제품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DIY 제품만 들어오고 있었다.
 
  최 사장은 타이완의 지니어스(GENIUS)사 제품에다 크레텍의 ‘책임’을 덧씌웠다. “1~2년 후부터 품질뿐 아니라 제품 디자인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현재 국내 소켓 렌치 분야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제품 중 하나다.
 
  근간에는 중국과 무역을 많이 하고 있다. 중국산에 대해서는 아직도 품질과 가격을 신뢰하지 못하는 고객이 많다. 그러나 크레텍이 거래하는 중국업체는 철저한 품질관리를 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일본, 독일 등 일류 메이커에 OEM 공급하는 업체들과 우선 거래를 하고 있다. 그는 “타이완이나 중국과의 무역은 ‘무책임공구사’, ‘무책임기업’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품질이나 디자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견되면 다시 돌려보내기를 수차례 하였고, 충분히 검수가 되지 않은 제품들은 시중에 나갔더라도 다시 회수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크레텍책임은 2003년부터 SMATO, UDT, BLUE BIRD 등 자사(自社) OEM·ODM 브랜드를 한국, 일본, 타이완,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생산해 품질·디자인·가격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PB브랜드 개발은 개발 당시의 수익만을 보고 한 것은 아니었다. 향후 고객만족을 위해 직접 생산품질 및 가격관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 대비책으로 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근간에 와서는 시장에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대기업이 바로 이 공구산업용품 유통에 뛰어든 것이다. 중소기업형 산업으로 성장했던 공구산업 및 공구유통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하지만 크레텍에는 PB브랜드가 있었다. 그는 “우수한 품질, 좋은 가격의 브랜드가 있으면 유통에서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크레텍책임은 올해 PB브랜드 매출의 급격한 상향선까지 그리게 됐다. ‘무책임’을 벗고자 시작했던 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지름길이 됐다.
 
  “대기업은 특별한 기술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시장확보만을 위해 저가정책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어요. 전체 가격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장사라는 것이 싸게 팔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대기업의 이런 정책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요. 크레텍의 고객은 도매, 소매, 납품 등 다양해요. 각각에 맞춰 공존공생하는 방법을 찾아왔어요.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물량공세로 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기계공구는 전문성과 기술성을 갖춰야 하는 분야입니다. 사실, 공구품목 중 가격만으로 경쟁할 수 있는 부분은 약 20%밖에 되지 않아야요. 기업 오너들이 이 사실을 알면 (이 분야로) 못 들어올 겁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주어진 길이 있다”며 “외부 환경의 위협을 잘 이겨내 회사도, 국가산업발전에도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중국시장을 공략할 계획입니다. 중국에는 공구 분류 시스템이 아직 없어요. 또 여건이 되면 북한에도 진출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 공구 카탈로그를 북한에 보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또 건설개발이 이뤄질 때 도움이 됐으면 해요. 공구는 산업제품의 생산성과 안정성을 높여 삶을 풍족하게 하는 귀한 도구입니다.
 
  저는 창업 당시 정직하게 장사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영세하고 한계가 많던 공구업계에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책임보장’이란 원칙을 지켜가고, 부정과 결탁하지 않는 떳떳한 기업, 해보니 과연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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