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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제왕열전] 秦始皇

‘萬歲의 폭군’인가 ‘千古一帝’인가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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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마천의 왜곡
⊙ 焚書坑儒의 대상은 儒生이 아니라 方士
⊙ 趙高는 환관이 아니라 유능한 法家 관료
⊙ 진시황은 결단력 있고 성실한 창업군주

申東埈
⊙ 1956년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 저서: <개화파열전> <논어론> <순자론>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등 20여 권.
진시황(秦始皇).
  중국인을 대상으로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진시황(秦始皇)과 마오쩌둥(毛澤東)은 늘 1~2위를 다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시황은 500년에 달하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난세(亂世)를 종식시키고 이후 수천 년에 걸친 중앙집권적 ‘제왕정(帝王政)’의 기틀을 닦았다는 게 이유이다. 마오쩌둥은 아편전쟁 이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지속된 근·현대의 난세를 종식시키고 현대중국의 기초를 닦았다는 게 이유로 꼽히고 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집권기간 중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간 ‘폭정(暴政)’의 장본인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마오쩌둥 역시 생전에 스스로를 진시황의 후예(後裔)로 생각했다. 지난 1973년 이집트 부통령을 접견할 당시 외빈(外賓)들 앞에서 밝힌 소회가 그 예이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입니다. 나도 진시황입니다. 린뱌오(林彪)가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습니다. 중국은 예부터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진시황이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파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합니다.”
 
  1850년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과 1919년 ‘5·4운동’ 당시에는 오직 공자(孔子)만 비판했을 뿐 진시황을 높인 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진시황은 진보의 표상이 되어 반동(反動)의 원흉(元兇)으로 낙인찍힌 공자와 대척점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사인방(四人幇)이 진시황을 천 년 만에 한 번 등장할까 말까 하는 ‘천고일제(千古一帝)’로 칭송하고 나선 배경이 여기에 있다.
 
 
  司馬遷, “만세의 폭군”
 
  역사상 진시황을 ‘만세(萬歲)의 폭군’으로 낙인찍은 최초의 인물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다. 그는 <사기> ‘진시황 본기(本記)’의 사평(史評)에서 진시황의 통치를 ‘여정잔학(呂政殘虐)’ 4자로 요약해 놓았다. 여불위(呂不韋) 소생이 평생 포학한 통치를 펼쳤다는 뜻이다. 그가 ‘여불위 열전(列傳)’에서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趙姬)를 두고 ‘평생 음란한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는 뜻의 ‘음부지(淫不止)’로 표현해 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최근 천징(陳靜)은 <진시황평전>에서 〈사기〉의 기록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쓰루마 가즈유키(鶴間和幸)도 <진시황제>에서 관련 대목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사마천이 ‘사실(史實)’과 항간의 소문을 근거로 한 ‘전설(傳說)’을 제대로 구분치 않음으로써 진시황에 대한 폄하를 조장했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전국시대에는 인질교환이 빈번했다. 진시황의 증조부 소양왕(昭襄王)도 어렸을 때 등급이 낮은 후궁(後宮) 소생이었던 까닭에 연(燕)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그는 적형(嫡兄)인 진무왕(秦武王)이 기원전 308년에 사고로 죽자 곧바로 보위(寶位)에 오른 후 생모인 초(楚)나라 출신 미팔자를 선태후(宣太后)로 올렸다. ‘선태후’는 중국 내 일각에서 진시황릉의 진짜 주인공으로 꼽는 당사자이다. 소양왕이 당팔자(唐八子) 사이에서 낳은 안국군(安國君)의 정실(正室)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도 초나라 출신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후비(后妃)는 크게 부인(夫人),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子), 칠자(七子), 장사(長使), 소사(少使) 등으로 등급이 나뉘어 있었다. ‘팔자’와 ‘칠자’는 후궁 축에도 낄 수 없을 정도로 급이 낮았다. 공교롭게도 진나라 말기의 왕은 모두 ‘팔자’와 ‘칠자’ 소생이었다.
 
 
  呂不韋와 異人의 만남
 
  소양왕은 재상인 범수(范?)의 건의를 좇아 종래의 소극적인 ‘연횡책(連衡策)’을 버리고 주변국을 병탄키 위한 적극적인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구사했다. 이는 먼 나라와 결맹해 가까운 이웃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재위 19년째인 기원전 288년에 하늘에 제사를 올린 후 동쪽 제(齊)나라 왕에게 동제(東帝)라고 칭할 것을 권하면서 서제(西帝)를 자칭하며 천하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소양왕이 진시황의 천하통일 30년 전인 기원전 251년에 병사(病死)하자 뒤이어 태자인 안국군이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 직후 생모 ‘당팔자’를 당태후(唐太后)로 높인 후,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시황의 부친 이인(異人)을 태자로 삼았다. 여기에는 당대의 거상(巨商) 여불위의 공이 컸다. 여기서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원래 여불위는 한(韓)나라 도성인 양책(陽翟)에 본거지를 두고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상인 출신이다. 젊었을 때 부친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통해 큰 돈을 벌어들인 그는 우연히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으로 갔다가 인질로 잡혀와 있는 안국군의 서자(庶子) 이인을 보게 됐다. 비록 남루한 옷을 걸치기는 했으나 귀인(貴人)의 상이었다. 그가 행인에게 물었다.
 
  ―혹시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저분은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아들 이인으로 지금 우리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소.”
 
  여불위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기화가거(奇貨可居)!
 
  이는 기이한 보물을 은밀히 감춰두었다가 훗날 비싸게 팔아 이익을 도모할 만하다는 뜻이다. 그는 곧 이인을 찾아갔다.
 
  ―제가 그대의 집 문 앞을 성대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대의 집 문 앞이나 성대하게 만드시오.”
 
  ―저의 집 문 앞은 그대의 집 문 앞이 성대해진 뒤에야 비로소 성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인이 말뜻을 곧바로 알아듣고 속내를 털어놓자 여불위가 제안했다.
 
  ―지금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사랑하지만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대의 형제들은 20여 명이나 됩니다. 그대로 두면 총애를 받고 있는 공자(公子) 자혜(仔)가 보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대는 아예 후사의 자리를 다툴 입장이 못 됩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후사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양부인뿐입니다. 저는 그대를 위해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실로 그리만 된다면 장차 진나라를 나눠 그대와 함께 다스릴 것이오.”
 
  여불위는 곧 이인에게 500금(金)을 건네주면서 여러 명사(名士)와 사귀게 했다. 이어 나머지 500금으로 진귀한 보물과 아름다운 노리개를 산 뒤 이를 들고 진나라로 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그가 예물을 바치며 화양부인을 설득해 줄 것을 당부하자 그녀는 곧 동생인 화양부인을 만나 이같이 설득했다.
 
  “지금 부인은 총애를 받고 있으나 아들이 없으니 번창할 때 미리 현명하고 효성스런 자를 골라 아들로 삼아야 하오.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이인은 현명하여 자신이 적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부인이 이때 그를 발탁하면 그는 나라가 없다가 있게 되고, 부인은 아들이 없다가 있게 되는 것이오.”
 
  그럴듯하게 여긴 화양부인이 이내 틈을 보아 안국군 앞에서 이인을 칭송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첩은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습니다. 지금 이인은 밤낮으로 태자와 저를 생각하며 울고 있습니다. 원컨대 이인을 친자식으로 삼아 훗날 이 몸을 의탁하고자 합니다.”
 
  안국군이 이를 허락하자 이인의 명성이 일시에 크게 떨치게 됐다.
 
 
  秦始皇의 출생
 
  당시 여불위는 한단에서 가장 뛰어난 미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바로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였다. 그녀는 조나라 호족(豪族)의 딸이었다.
 
  하루는 이인이 여불위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조희를 보고는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청했다. 여불위가 이를 승낙하자 조희는 이인에게 간 이듬해인 기원전 259년 정월에 진시황을 출산했다. 정월에 태어난 까닭에 이름을 ‘정(政)’으로 지었다. 당시 바르다는 뜻의 ‘정(正)’과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의 ‘정(政)’은 원래 같은 뜻으로 쓰였다.
 
  진시황이 생후 2년이 되던 해인 기원전 257년 진나라 군사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한단성 내에는 이인과 조희가 어린 진시황과 함께 살고 있었다.
 
  조나라 백성들은 화가 난 나머지 이인을 죽이려고 했다. 이인은 황급히 여불위와 상의해 황금 600근으로 감시관을 매수해 이내 진나라 군사가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조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진시황을 안고 몸을 숨긴 뒤 진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은밀히 거처를 옮겨다니며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이때 여불위는 이인과 함께 진나라에 돌아오면서 이인에게 초나라 복장을 하고 화양부인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화양부인이 초나라 출신인 것을 계산에 넣은 주문이었다. 과연 화양부인은 크게 기뻐했다.
 
  “나는 초나라 사람이다. 너를 내 아들로 삼겠다.”
 
  그러고는 이인의 이름을 ‘초나라 종자(種子)’라는 뜻의 ‘자초(子楚)’로 바꿨다. 남방언어인 초나라 말은 수식어가 명사의 뒤에 붙는다. 조희는 이인이 보위에 오른 기원전 250년에야 어린 아들 진시황과 함께 진나라로 갈 수 있었다. 이는 조나라가 후환을 두려워해 이들 모자(母子)를 조속히 송환한 결과였다. 진시황 출생 전후의 얘기는 비록 극적이기는 하나 전국시대 말기의 혼란스런 상황을 감안하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司馬遷의 왜곡
 
<사기(史記)>에서 진시황을 폭군으로 매도한 사마천(司馬遷).
  그럼에도 사마천은 <여불위열전>에서 조희가 이인에게 가기 전에 이미 ‘유신(有身:임신)’의 상태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는 항설(巷說)을 마치 사실인 양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유신’ 구절 뒤에 곧바로 “조희가 이인에게 가 대기(大期)가 지난 후 진시황을 출산했다”는 대목이 뒤따르고 있는 게 그 증거이다. ‘대기’와 ‘유신’의 내용이 상호 모순되는데도 이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대기’를 하나같이 ‘12달’로 해석했으나 이는 상식에 어긋난다. 설령 이를 인정할지라도 논리상 모순이다. 만일 조희가 1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유신’ 사실을 확인하고 여불위와 공모해 이인에게 갔다면 최소 2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고 보아야 한다. 이 경우 조희는 이인에게 간 지 얼마 안돼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릴 때 인질로 잡혀와 숱한 고비를 넘기며 세상인심을 훤히 꿰뚫게 된 이인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나아가 사마천은 마치 여불위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양 “여불위는 비록 화가 났으나 이내 기화를 낚고자 하는 욕심에 조희를 바치게 됐다”고 기록해 놓았다. 지극히 주관적인 묘사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오히려 그보다는 의도적으로 조희를 이인에게 바쳤을 가능성이 크다. <자치통감>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마침 이인이 그녀를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청하자, 여불위가 양노(佯怒: 짐짓 화난 체 함)하며 그녀를 바쳤다.”
 
  이는 여불위가 애초부터 이인에게 넘겨줄 생각으로 조희를 거둔 뒤 짐짓 연회를 베풀어 이인에게 넘겨주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子楚의 즉위
 
  효문왕은 부왕(父王)인 소양왕의 사망 직후 곧바로 보위에 오른 뒤, 이듬해인 기원전 250년에 비로소 상복을 벗고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즉위식을 치른 지 불과 3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무수한 설이 난무했다. 명대(明代) 말기의 풍몽룡은 <열국지>(列國誌)를 저술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해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묘사해 놓았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여불위가 태자 자초를 속히 보위에 올려놓기 위해 효문왕을 독살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원래 효문왕은 서자였던 까닭에 어렸을 때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다가 태자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여러모로 몸이 부실했을 공산이 크다. 게다가 부왕인 소양왕은 56년간에 걸쳐 재위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부왕이 장수할 경우 태자는 책을 읽는 일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자칫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가는 가차없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부왕이 장수할 경우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사절하는 ‘두문사객(杜門謝客)’밖에 없다. 몸이 쇠약해질 소지가 큰 것이다. 효문왕의 급서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하는 게 자연스럽다.
 
  효문왕이 재위 1년 만인 기원전 250년에 급서하자 ‘자초’가 장양왕(莊襄王)으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후사로 삼은 적모(嫡母) 화양부인을 화양태후, 생모 하희(夏姬)를 하태후로 높였다.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는 왕후가 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기>에 장양왕인 자초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는 점이다. 자초는 즉위한 후 최소한 3~4년간 보위에 있었다. <전국책>(戰國策) 등을 보면 오히려 ‘자초’ 때 진나라가 더욱 강성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사기>가 자초와는 정반대로 여불위의 뒤를 이어 조희와 사통한 인물로 내세운 노애()의 행보를 지나치게 상세히 기술해 놓고 있는 것도 의문이다. <전국책> ‘진책(秦策)’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자초는 매우 총명했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효문왕이 자초를 태자로 삼은 뒤 학문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 하며 이를 시험코자 했다. 그가 자초를 부른 뒤 책을 내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자초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외국에 버려져 일찍이 선생을 모시고 글을 배운 일이 없습니다. 아직 책을 읽는 것이 서투릅니다.”
 
  장양왕은 애초 학문을 기준으로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게 아닌 만큼 이를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자초는 내심 크게 부끄러워한 나머지 하루는 한가한 때를 틈타 이같이 진언했다.
 
  “대왕도 일찍이 조나라에 인질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나라의 호걸과 어울리면서 이름을 알고 지낸 자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왕이 귀국해 보위에 오른 뒤 그들은 줄곧 서쪽을 바라보며 대왕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은 사자 한 사람이라도 보내 그들을 위로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사이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을까 두렵습니다.”
 
  비록 학문이 짧다고는 하나 사리에 부합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전국책>은 “장양왕이 이 얘기를 듣고 자초를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는 자초가 후계자 자격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음을 시사한다. 이와 유사한 일화가 제법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사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이는 진시황을 여불위의 자식으로 둔갑시키고, 조희를 ‘천하의 음녀’로 왜곡하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사료(史料)를 훼손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趙태후의 음행
 
  <사기>는 ‘자초’가 즉위한 후 여불위가 승상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지고, 진시황 즉위 후에는 승상보다 한 단계 높은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의 칭호를 받게 됐다고 기록해 놓았다. ‘중부’는 ‘백부(伯父)’ 및 ‘숙부(叔父)’ 등과 마찬가지로 신하를 높여 부른 호칭이다.
 
  진시황이 여불위를 ‘중부’로 부른 것은 소양왕이 승상 범수를 ‘숙부’로 부른 것처럼 신하를 왕실의 일원으로 높인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특별히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여불위가 진시황 즉위 후에도 계속 태후의 자리에 오른 조희와 사통하다가 장안의 건달인 노애를 가짜 내시로 만들어 조태후의 음행을 방조했다는 후속 대목에 있다. 사마천은 <여불위열전>에서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태후와 사통(私通)하던 여불위는 진시황이 성장하는데도 태후가 더욱 자주 음행을 요구하자 이내 발각될까 두려운 나머지 대음인(大陰人: 음경이 큰 남자)을 찾던 중 마침내 노애를 사인(舍人: 시중을 드는 집사)으로 삼게 됐다. 여불위는 노애로 하여금 음탕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음경에 ‘동륜(桐輪: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수레바퀴)’을 끼운 뒤 걸어다니게 한 뒤 태후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가게 했다. 태후가 과연 이 소문을 듣고 노애를 곁에 두고자 했다. 여불위가 마침내 그를 가짜 환관으로 만들어 태후를 시중들게 했다.”
 
  사마천이 도색잡기 수준의 얘기를 이처럼 소상히 묘사해 놓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훗날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에서 이 대목을 기술하면서 ‘동륜’ 등의 대목을 빼버렸다. 가당치 않다고 여긴 것이다.
 
  기본적으로 엄정한 법치(法治)가 행해진 진나라의 궁중에서 이런 엉터리없는 일이 자행됐다는 게 비상식적이다.
 
 
  儒生들의 역사 왜곡 가능성 커
 
  진제국의 멸망 후 ‘분서갱유(焚書坑儒)’ 등으로 인해 원한을 품고 있던 유생(儒生)들이 악의적으로 이런 헛소문을 만들어 유포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진나라의 강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일반 백성들도 조희와 노애에 관한 헛소문에 살을 붙이며 즐거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이야기는 후대로 가면서 더욱 살이 붙었다.
 
  전한(前漢)말기 유향이 지은 <설원>(說苑)에 실린 얘기가 그 증거이다. 이에 따르면 젊은 조태후는 피접(避接: 전염을 막기 위해 멀리 요양을 감)을 핑계로 노애와 함께 함양에서 200리 떨어진 옛 도성 옹(雍: 산시성 펑샹현 남쪽) 땅으로 가 거리낌없이 부부 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옹성에 머문 지 2년 만에 잇달아 2명의 아들을 낳자 곧 사자를 함양으로 보내 진시황에게 이같이 청했다.
 
  “노애가 왕을 대신하여 나를 잘 모시고 있소. 그에게 토지를 봉해 주면 좋겠소.”
 
  진시황이 이를 받아들여 곧 노애에게 태원(太原) 땅을 내리고 장신후(長信侯)에 봉했다. 노애 주변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노애는 마침내 함양성 안에까지 자신의 무리를 두게 됐다. 이 이야기는 <여불위열전>에 살을 붙인 것이다.
 
  <설원>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얘기도 실려 있다. 진시황이 22세가 되는 재위 9년째인 기원전 238년에 혜성이 나타났다. 당시 혜성은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진시황은 여러 액막이 조치를 취한 뒤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어가(御駕)를 타고 옹성으로 갔다. 아직 관례(冠禮: 성인식)를 올리지 않은 까닭에 모후인 조태후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당에서 의식을 거행키 위해서였다.
 
  5일 동안 잔치를 베풀고 그가 신하들과 함께 즐기는 와중에 노애도 날마다 술을 마시며 도박을 즐겼다. 4일째 되던 날 노애가 대부 안설과 도박을 하다가 계속 잃게 되자 판을 쓸고 새로 하자며 억지를 부렸다. 안설이 이를 거절하자 노애가 대로했다.
 
  “네 이놈, 네가 어느 존전이라고 감히 거부를 하는 것인가.”
 
  손을 들어 안설의 따귀를 갈기자 화가 난 안설이 노애의 관끈을 잡아당겨 끊어버렸다. 노애가 눈을 부라리며 호령했다.
 
  “나는 진왕(秦王)의 양부(養父)이다. 너 같은 자가 감히 나에게 대드는 것이냐.”
 
  겁이 난 안설이 방 밖으로 뛰쳐나가 곧 진시황을 찾아가 고했다.
 
  “노애가 궁형(宮刑)을 당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는 비밀히 태후와 관계해서 이미 아들을 2명이나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장차 보위를 빼앗고자 역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결국 노애의 무리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일당 역시 줄줄이 잡혀 죽임을 당했다. <자치통감>도 노애의 반란에 대해서는 <사기>의 기록을 좇아 상세히 기록해 놓았으나 안설의 일화는 생략했다.
 
  <사기>는 당시 진시황이 노애의 반란사건에 연루된 여불위를 촉 땅으로 귀양을 보내자 여불위는 이후 중압감을 못 이겨 2년 뒤인 기원전 235년에 이내 자살하고 말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진시황을 여불위 혈통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은 여불위의 죽음까지 이에 맞춰 해석하고 있다. 자식의 앞날을 위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식이다.
 
  원래 ‘노애’의 ‘노’는 오입쟁이, ‘애’는 음란함을 뜻한다. ‘노애’라는 이름 자체가 ‘음란한 오입쟁이’라는 뜻이다. 당시 그가 이런 이름을 얻었다면 진나라 백성들이 그의 오입쟁이 행각을 모를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 조태후가 과연 노애를 성적(性的) 노리개로 삼을 수 있을까. 이는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여러 정황에 비춰 노애는 이미 내시로 궁중에 들어갔다가 장양왕(자초)의 눈에 들어 그의 총신(寵臣)으로 활약했을 공산이 크다. 이후 조희는 남편의 유명(遺命)을 좇아 노애와 제휴해 여불위를 일정부분 견제했고, 진시황은 장성한 뒤 두 권신(權臣)인 장신후 노애와 문신후 여불위를 차례로 제거해 군권(君權)을 확립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노애와 呂不韋의 대립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전국책> ‘진책’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진시황의 재위 7년째인 기원전 240년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거세게 공격하자 어떤 사람이 위왕에게 이같이 건의했다.
 
  “지금 진나라는 집정대신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노애와 여불위 중 어디에 붙어야 좋을지를 놓고 서로 묻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왕은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면서 이를 노애의 공으로 삼아 그의 입지를 공고히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십시오. 대왕이 노애를 도우면 틀림없이 그가 이길 것이고, 그러면 조태후가 대왕을 고마워하며 그 덕을 골수에 새길 것입니다. 노애를 통해 진나라와 가까워지고 그 교분이 천하의 제후들 중 으뜸이 되면 천하의 제후들 중 그 누가 여불위를 버리고 노애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불위에 대한 대왕의 원한도 갚게 되는 것입니다.”
 
  <사기>도 노애가 장신후에 봉해진 후 여불위는 문객(門客)들을 동원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쓰는 것 이외에는 달리할 일이 없게 됐다고 기록해 놓았다. <사기>의 해당 기록이다.
 
  “태후가 궁을 옮겨 옹성에 거주하자 노애가 항상 뒤따랐고, 상으로 받는 하사품이 매우 많았다. 일은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 집안에는 노비가 수천 명이나 되었고, 그의 집은 벼슬을 구하러 온 손님들로 인해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사기>의 기록처럼 여불위가 노애를 ‘천하의 음녀’ 조희에게 천거했다면 노애와 조태후는 여불위에게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국책>의 내용처럼 오히려 여불위와 극렬한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사기>의 해당 기록을 결정적으로 의심케 만드는 대목이다.
 
  당초 왕후가 된 지 3년여 만에 남편이 죽고 13세의 어린 아들이 보위에 오르면서 졸지에 태후가 되었을 때 조희의 나이는 30여 세로 추정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당시 조태후의 급선무는 어린 아들의 보위를 지키는 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최고의 위험인물은 여불위였다.
 
  실제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는 여불위의 놀라운 수완을 곁에서 지켜본 장양왕(자초)이 30여 세의 과부와 13세의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가면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삼국시대 유비(劉備)도 그토록 신임하는 제갈량의 충성심을 거듭 확인한 뒤 후사를 당부하는 ‘탁고유조(託孤遺詔)’를 남긴 바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에 비춰 노애는 장양왕(자초)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불위를 견제하기 위해 조희 곁에 심어둔 총신일 공산이 크다.
 
 
  李斯의 등장
 
이사(李斯)의 글씨.
  진시황이 사상 최초로 천하통일에 성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왕정’을 실시케 된 데에는 법가(法家)인 이사(李斯)의 공이 컸다. 이사는 비록 진시황 사후 조고(趙高)의 꼬임에 빠져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참화를 입었으나, 이는 그가 조고를 너무 가벼이 본데서 비롯된 것으로 진시황이 그를 발탁한 것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럼에도 진시황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이사의 발탁을 암군(暗君)의 행보로 깎아내리고 있다.
 
  원래 이사는 초나라 상채(上蔡: 허난성 상차이현) 출신으로 젊었을 때 군(郡)의 말단 관리로 있었다. 하루는 변소의 쥐가 오물을 먹다가 사람과 개가 다가가면 놀라서 도주하는 데 반해, 창고의 쥐는 넓은 건물 안에 살며 사람과 개가 지나가는데도 전혀 겁내지 않고 곡식을 여유 있게 먹는 것을 보게 됐다. 충격을 받은 그는 이같이 소리쳤다.
 
  “아,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은 비유하면 쥐와 같은 것이다. 오직 스스로 어떤 상황에 처하는가에 달렸을 뿐이다.”
 
  이에 그는 곧 당대의 명유(名儒)인 순자(荀子)를 찾아가 제왕지술(帝王之術: 제왕의 통치술)을 배웠다.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는 그와 동문이었다. 그는 학문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곧 스승을 찾아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듣건대 ‘때를 얻으면 태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제후들이 바야흐로 서로 다투자 유세객들이 정사를 주도하고 있고, 진나라 왕은 천하를 병탄(倂呑)하여 황제를 칭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포의(布衣)가 유세하기 좋은 시기인 듯합니다. 비천한 처지에 있으면서 자신의 계책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굶주린 짐승처럼 고깃덩이를 보면 바로 집어삼켜야 하는 처지에 있는데도 사람의 얼굴을 한 까닭에 억지로 참는 것에 불과합니다. 치욕으로 말하면 비천보다 더 큰 게 없고, 슬픔으로 말하면 빈궁보다 더 심한 게 없습니다. 오랫동안 비천한 지위와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부귀를 비판하며 스스로 실행하지 않는 것은 선비의 진심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장차 서쪽으로 가 진왕에게 유세할 생각입니다.”
 
  그가 진나라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양왕이 죽은 까닭에 이내 여불위를 찾아가 그의 사인(舍人: 집사)이 됐다. 그의 학문과 재주를 아낀 여불위는 곧 그를 낭관(郞官: 황제의 비서)으로 천거했다.
 
 
  <諫逐客書>
 
  그가 ‘낭관’의 자격으로 자연스럽게 진시황을 만나 유세하자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곧 객경(客卿: 타국 출신 고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기원전 237년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돼 상국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진나라의 대신들이 진시황을 찾아가 이같이 건의했다.
 
  “여불위도 다른 나라에서 온 자입니다. 지금 진나라로 들어와 벼슬하는 타국 출신 모두 그들의 군주를 위해 유세하면서 진나라 군신(君臣)을 이간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내쫓아야 합니다.”
 
  진시황이 소위 ‘축객령(逐客令: 유세객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린 배경이다. 타국 출신으로 진나라에 들어와 벼슬을 살고 있는 소위 ‘기려지신(?旅之臣)’과 유세객 모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추방한다는 내용이었다. ‘축객령’의 발포에는 당시 진나라의 치수(治水)사업을 맡고 있던 정국(鄭國)이 한나라의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점도 크게 작용했다. 객경으로 있던 이사는 쫓겨 가는 와중에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버금하는 명문으로 평가받는 소위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듣건대 ‘태산은 모든 토양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같이 크게 되고, 강과 바다는 작은 시냇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렇게 깊게 됐다’고 합니다. 왕자(王者)는 백성들의 귀의(歸依)를 두루 받아들임으로써 덕정(德政)을 널리 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은 백성들을 버려도 적국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하물며 찾아온 빈객(賓客)을 물리쳐 다른 제후들이 업적을 쌓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소위 ‘도적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양식을 집어준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진시황은 그의 <간축객서>를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곧 ‘축객령’을 거두고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는 복직하자마자 이같이 건의했다.
 
 
  反間計
 
전국(戰國)시대의 지도.
  “진나라가 천하를 도모한 지 이미 여러 대가 되었습니다. 진나라의 힘과 대왕의 위망(威望)으로 6국을 무찌르는 것은 마치 먼지를 떠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부지런히 천하를 도모하지 않은 채 다른 나라들이 다시 부강해지는 것을 앉아서 구경만 하려는 것입니까. 6국이 다시 합종하여 일어나면 어찌할 것입니까. 그때는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몰래 변사(辯士)들을 시켜 각 제후국에 금옥(金玉)을 가지고 가 유세하도록 하십시오. 각 제후국의 명사들 중 금전으로 매수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재물을 후하게 주어 교결(交結)하고, 매수를 거부하는 자는 가차없이 제거토록 하십시오.”
 
  진시황이 천하통일 과정에서 무력과 더불어 반간계(反間計: 첩자를 보내 이간질하는 계책)를 구사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이사와 더불어 진시황을 섬긴 병가(兵家)의 대가 위료자(尉?子)도 유사한 건의를 했다.
 
  당시 이사가 천하통일의 방략으로 ‘반간계’를 권한 것은 되도록 피를 적게 흘리며 속히 천하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옳다. <간축객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이사의 발탁은 명군과 현신의 만남에 해당한다. ‘분서갱유’ 논란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천하통일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제나라를 병탄해 마침내 사상 최초의 천하통일 위업을 달성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사와 위료자의 ‘마타도어’ 계책을 좇은 결과였다.
 
  당시 진나라에 맞설 수 있던 유일한 나라였던 제나라 상국 후승(后勝)은 진나라 첩자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뒤 제왕 건(建)에게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건의했다. 나머지 5국이 진나라의 침공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제왕 건이 팔짱을 끼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당시 제왕 건은 이웃 나라가 하나씩 망할 때마다 오히려 사자를 진나라로 보내 축하했다. 진시황이 기원전 230년의 한나라 병탄을 시작으로 제나라 병탄에 이르기까지 불과 10년 만에 6국을 모두 평정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위료자와 이사가 건의한 군사와 외교 책략의 절묘한 결합이 그 비결이었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직후 곧바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군권(君權)의 확립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이룬 공덕이 전설적인 3황(三皇: 복희·신농·황제)과 5제(五帝: 소호·전욱·제곡·당요·우순)를 능가한다고 여겼다. 이에 마침내 스스로를 ‘짐(朕)’으로 칭하면서 이같이 명했다.
 
  “죽은 뒤 생전의 행적을 가지고 평하여 정하는 것이 시호(諡號)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아들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다. 금후 시법(諡法)을 없앤다. 짐은 첫 번째 황제인 시황제(始皇帝)가 되니 후세는 순차로 2세와 3세가 된다.”
 
  사상 처음으로 ‘황제(皇帝)’ 칭호가 등장한 배경이다. 원래 당시 ‘짐’은 현대 중국어의 ‘워(我)’와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1인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이때를 계기로 황제의 전용어가 되었다. 민가를 뜻하던 ‘궁(宮)’ 역시 황제의 거처인 궁궐의 의미로 한정되었다. 기존의 명(命)과 영(令)은 특별히 제(制)와 조(詔)로 부르게 되었다. 황하(黃河)의 명칭을 ‘덕수(德水)’로 바꾸고, 백성의 명칭을 ‘검은 두건을 한 인민’이라는 뜻의 검수(黔首)로 바꾼 것은 진제국의 건국을 흑색을 상징하는 수덕(水德)의 결과로 간주한 음양가의 ‘오행설’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당시 진시황이 가장 고민한 것은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민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를 조정회의에 부쳤다. 승상 왕관(王?)을 비롯한 대다수 관원이 봉건제(封建制)를 다시 채택할 것을 강력 주장했다.
 
  “연·제·초의 땅은 모두 먼 곳에 있어 왕을 두지 않으면 이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여러 자제 가운데 적임자를 골라 이들 지역의 왕으로 세우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백관들을 모아 놓고 이를 의논케 하자 정위(廷尉: 사법총책)로 있던 이사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주(周)왕조가 제후로 봉한 사람들 중에는 자제(子弟)와 동성(同姓)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은 소원하게 되어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원수같이 했습니다. 군현제(郡縣制)를 도입해야만 천하를 아주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천하인 모두 다른 뜻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봉건제를 부활하는 것은 주왕조의 전철(前轍)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제왕의 명에 의해 천하를 일사불란하게 다스리는 ‘제왕정’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케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제왕정’은 문자와 법제도의 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특히 문자의 통일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키 위해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공식 문자는 이사가 고안한 ‘소전(小篆)’이 채택되었다. 문자의 통일과 더불어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도 급속히 이뤄졌다.
 
 
  萬里長城 축조
 
  교통제도의 통일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에 속한다. 이는 수레 폭의 통일에서 시작되었다. 천하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열국 모두 적국의 급속한 침공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레의 폭을 달리했다. 수레의 폭을 달리해야만 적국의 수레를 파손하거나 전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수레의 폭을 모두 6척(六尺: 약 135cm)으로 규격화했다. 이를 ‘동궤(同軌)’라고 한다. 제국이 정해 놓은 수레 폭을 어긴 ‘불궤(不軌)’가 후대에 반란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반란군이 수레 폭을 달리하며 독립을 획책한 결과였다.
 
  ‘동궤’를 좇은 도로망의 개설은 지방의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키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의 신속한 이동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전국시대에 열국이 건설했던 일련의 방어기지와 성채 등을 자연스럽게 허문 것도 지방할거의 근거를 발본색원코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진시황이 흉노의 침공에 대비해 축조한 만리장성.
  실제로 진제국은 ‘동궤’를 좇은 도로망의 개설로 조정의 명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지방에 전달해 지방통제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전국의 부호(富戶) 12만 호를 도성인 함양 주변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민간이 소지한 병기를 몰수한 뒤 이를 모두 녹여 종거(鐘: 악기걸이)와 금인(金人) 12개를 만들어 함양에 비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민원(民怨)의 표적이 된 만리장성과 아방궁(阿房宮), 여산릉(驪山陵)의 축조에 있다. 만리장성과 관련한 소위 ‘맹강녀(孟姜女)’ 전설은 지금까지도 진시황을 ‘폭군’으로 모는 데 빠짐없이 인용되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의 전거가 된 맹강녀 전설은 결혼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범희량(范喜良)이 만리장성을 쌓는 인부로 차출되어 북쪽으로 끌려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가 오래지 않아 배고픔과 심한 노동으로 병사하자 부인 맹강녀는 겨울 옷가지를 장만해 고향인 산시성 동관(潼關)에서 수천 리 떨어진 산해관(山海關)까지 갔다. 수소문 끝에 남편이 장성의 돌무더기 밑에 묻혔음을 알아낸 그녀는 너무 애통한 나머지 장성 아래서 며칠 밤낮을 통곡했다. 그러자 만리장성 800리가 허물어지면서 남편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강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맹강녀 전설’은 20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노래와 <곡장성>(哭長城) 등의 경극을 만들어내는 등 다양한 종류로 가지를 쳐 나갔으나 기본 줄거리는 같다.
 
 
  驪山陵과 阿房宮
 
  원래 만리장성의 축조는 제국의 안녕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당시 흉노족은 선우(單于)의 지휘 아래 하나로 통합돼 막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북변을 수시로 침공하고 있었다. 몽념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농서군(西郡: 간쑤성)에서 랴오둥(遼東)에 이르는 총 5000여 ㎞의 장성을 구축한 배경이다. 비록 무리가 뒤따르기는 했으나 제국의 안녕을 확보키 위한 고육지책에 해당했다.
 
  그러나 여산릉 및 아방궁 조영(造營)은 납득기가 쉽지 않다. 원래 아방궁의 조영은 기존의 함양이 제국의 수도로는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방궁은 거대한 궁궐의 전전(殿前)의 명칭으로 궁궐 전체의 정식 명칭이 아니다. 진시황의 수릉(壽陵: 생전에 미리 조성하는 능묘)인 여산릉은 아방궁보다 더 크게 조영되었다. 높이 100m, 한 변의 길이가 500m인 정방형 묘실 안에 거대한 지하궁전으로 조성되어 문무백관의 자리까지 정해 놓았다.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병마용(兵馬俑). 천하를 통일한 진(秦)나라 군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지난 1974년 여산릉 능묘의 동쪽 약 1.5㎞ 떨어진 지점에서 병마용갱(兵馬俑坑)이 발견된 바 있다. 총면적 2만㎡에 달하는 병마용갱 안에는 약 7000개에 달하는 도용(陶俑)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병마용갱 자체가 아방궁과 마찬가지로 여산릉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능묘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아방궁이 지상궁전이라면 여산릉은 지하궁전에 해당한다.
 
  아방궁과 여산릉은 천하통일 이후 불과 10여 년밖에 안되는 단기간에 조성되었다.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가 일시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곧 민력(民力)의 피폐가 상상을 초월했음을 뜻한다. 학자들은 연인원 약 300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제국의 인구가 약 300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10명당 1명꼴로 부역에 동원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사기>의 비판은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焚書坑儒는 儒家 탄압이 아니었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 ‘불로장생(不老長生)’을 떠벌이는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도사)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거만의 재물을 낭비하는 등 ‘암군’의 행보를 보였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법가사상을 신봉한 그가 황당무계한 도가(道家)의 ‘신선술(神仙術)’에 넘어가 소위 ‘진인(眞人)’이 되고자 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나,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미신적인 음양가(陰陽家)의 ‘오행설(五行說)’과 도가의 ‘신선술’이 널리 퍼져 있을 때였다. 100년 뒤 전한의 한무제(漢武帝)도 불로장생의 신선술을 믿었다.
 
  진시황도 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한 데 따른 자만심이 이런 실수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그를 ‘암군’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치다.
 
  진시황을 폭군으로 매도하는 데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분서갱유’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쓰루마는 다양한 출토자료와 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책인 <진기>(秦記) 등의 문헌사료에 대한 광범위한 검토를 끝낸 뒤 ‘분서갱유’는 유가(儒家)를 탄압하기 위한 게 아니라고 못 박았다. 한제국의 유생들이 ‘분서령’과 ‘갱유령’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풀리면서 ‘분서갱유’ 사건이 유가에 대한 탄압 사건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분서갱유’ 사건은 먼저 ‘분서’와 ‘갱유’ 사건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213년에 이뤄진 ‘분서’ 사건은 기왕에 알려진 것처럼 무자비한 문화말살 정책이 아니었다. 이는 ‘분서’를 건의한 승상 이사의 주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어리석은 유생들이 천하통일의 의미도 모른 채 법을 배워 관리로 나설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사사로운 주장으로 비방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미혹 하고 있습니다. 옛것을 숭상하거나 옛것을 가지고 현재를 비난하는 자는 일족(一族)을 주살(誅殺)해 그런 조짐을 없애야 합니다.”
 
  공공연히 제국체제를 비난하는 유생들을 방치할 경우 체제 자체가 뿌리째 흔들릴 소지가 크다고 지적한 것이다. ‘분서’ 건의는 법가사상가로서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비자> ‘오두’편에도 유사한 주장이 나온다
 
  “지금 유생은 글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俠客)은 폭력으로 금령(禁令)을 어기는데도 열국의 군주들은 이들을 예우한다. 무릇 법에 걸린 자는 죄를 주어야 함에도 여러 유생은 학문에 밝다는 이유로 관원으로 발탁되고 있다. 금령을 어긴 자 역시 주살해야 함에도 협객들은 사사로이 검술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자객으로 양성되고 있다.”
 
  전국시대 말기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을 비롯한 소위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가 거느린 문객 대부분이 이들 유생과 협객이었다. 여불위가 수많은 식객을 둔 것도 ‘전국4군’을 흉내 낸 것이었다.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라도 이런 무리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시황이 새롭게 권신으로 부상한 노애와 기존의 권신인 여불위를 일거에 제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분서령’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이사가 유가경전을 비롯한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와 통일 이전의 열국 사서(史書)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건의한 적이 없고, 진시황 역시 그같이 명한 적이 결코 없다는 점이다.
 
  분서의 대상이 된 모든 책은 당시 수도였던 함양의 황실 서고와 함양에 거주하고 있던 70명의 박사들 개인 서고(書庫)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학자들의 연구 작업만큼은 자유롭게 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가경전을 비롯한 제자백가서가 불태워진 것은 진시황 사후 함양에 쳐들어온 항우(項羽)에 의해서였다.
 
 
  ‘坑儒’의 대상은 儒生이 아닌 方士
 
중국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台)에 있는 서불(徐市)의 상(像).
  ‘분서령’ 이듬해에 나온 ‘갱유령’ 역시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 ‘갱유’ 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생이 아닌 방사를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에는 불로장생을 떠벌이는 방사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횡행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제나라 출신의 서불(徐: ‘서시’가 아님)과 연나라 출신의 노생(盧生)이다.
 
  서복(徐福)으로도 불린 서불은 신선이 사는 동쪽 봉래산에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겠다는 거짓말로 많은 자금을 사취한 뒤 도주한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서불보다 더한 자는 노생이었다. 그는 황제의 거소를 외부인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만 진인이 찾아온다고 속인 후 이내 사기행각이 들통날까 두려워 ‘진시황은 불사약을 얻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비난한 뒤 자취를 감춰버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시황은 대로했다.
 
  “서불은 거만금을 받고도 종래 불사약을 얻지 못했고, 노생은 짐이 하사한 것이 심히 많은데도 지금 오히려 짐을 비방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짐의 부덕이 더욱 깊어졌다. 짐은 이제 함양에 있는 제생(諸生) 중 요사스런 말로 백성들을 미혹 하는 자가 있는지 어사(御史)들을 보내 조사할 것이다.”
 
  ‘제생’은 후대에 유생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으나, 당시만 해도 제자백가의 사상을 공부하는 모든 연구생을 의미했다. 유생들이 제국체제를 큰소리로 비판하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방사들만 처벌받았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유생들은 사상 최초의 ‘제왕정’ 체제를 공공연히 비판하고 돌아다닌 탓에 소탕령에 대거 연루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마 대화재 당시 기독교도들이 늘 부패한 로마를 신이 불로 징벌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벌이다가 네로에 의해 대거 화형을 당한 사건과 닮아 있다. 진시황이 한제국의 성립 후 ‘분서갱유’ 사건 등을 이유로 무자비한 폭군으로 매도된 것 역시 서양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후 네로가 꼼짝없이 만고의 폭군으로 몰린 것과 유사하다.
 
 
  扶蘇, 분서갱유 반대하다 진시황의 눈 밖에 나
 
  진시황은 기원전 210년 7월, 마지막 천하순행(巡行) 도중 사구(沙丘)의 평대(平臺: 허베이성 쥐루현)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에도 그의 죽음을 놓고 ‘독살설’ 등 여러 얘기가 나왔으나 사인(死因)은 과로사였다. 과로사는 누적된 피로가 일시에 폭발해 돌연사로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진시황은 생전에 자신이 급서(急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게 확실하다. 제국의 존망을 좌우할 태자(太子)책봉 문제를 죽는 순간까지 해결하지 못한 게 그 증거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일찍이 그의 장남 부소(扶蘇)는 ‘분서갱유’ 사건 당시 이같이 건의한 바 있다.
 
  “유생들은 모두 공자(孔子)를 높이 받들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폐하가 이들을 모두 중법(重法)으로 묶어 버리니 신은 장차 천하가 불안해할까 두렵습니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해 곧 부소에게 명하여 북쪽으로 가 흉노의 침공에 대비해 상군(上郡)에 주둔하고 있는 몽념(蒙恬)의 군사를 감독게 했다. 통치의 기본이치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같이 명한 것이다.
 
  여러 정황에 비춰 진시황이 계속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부소가 태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고 보는 게 옳다. 진시황 사후 장남 부소와 막내 호해(胡亥) 사이에 벌어진 제위(帝位)계승전도 이런 시각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원래 진제국이 진시황 사후 불과 4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사기>는 조고가 스스로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를 심산으로 2세 황제를 제거했다는 식으로 조고의 행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조고가 2세 황제 사후 부소의 아들 자영(子榮)을 옹립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을 제대로 해석기가 어렵다. <사기>의 이 기록은 조고를 희대의 간신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그를 총애한 진시황을 ‘암군’으로 몰아가기 위한 복선(伏線)의 혐의가 짙다.
 
 
  趙高는 법률과 문자에 밝았던 관료
 
  최근 일각에서 조고가 <사기>의 기록처럼 결코 권력에 도취한 추악한 내시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해의 출발은 <사기> ‘몽념열전’의 다음 기록에서 비롯된다.
 
  “조고를 비롯한 형제 모두 ‘은궁(隱宮)’에서 살았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조고를 내시(內侍)로 단정했다. 빌미는 당(唐)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정(司馬貞)이 제공했다. 그는 <사기>를 주석한 <사기색은>(史記索隱)을 펴내면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유씨(劉氏)의 ‘은궁’에 대한 주석을 인용해 놓았다.
 
  “대략 조고의 부친이 궁형을 받아 처자가 모두 관청의 노비가 되었고, 그의 처가 이후 외간 남자와 사통해 자식들을 낳은 후 조씨 성을 붙인 것이다. 이들 역시 모두 거세했다. 그래서 <사기>가 ‘은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사마정은 여기에 상상력을 발휘해 ‘은궁’의 ‘궁’은 거세를 뜻한다고 덧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는 환관이 극성을 부린 당나라 때의 상황을 토대로 한 잘못된 해석이다.
 
  1980년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에서 출토된 <장가산한묘죽간>(張家山漢墓竹簡)에 따르면 ‘은궁’은 형기를 마친 사람들이 일하던 ‘은관(隱官)’의 착오이다. 정부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수공예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시 형기가 만료된 사람들의 지위는 서민보다 낮았고, 점유하는 주택과 토지도 일반인의 절반 수준이었다. 진제국의 법은 공정성을 중시한 까닭에 이들의 혼인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은관’에서 일하는 사람의 자녀 역시 신분상으로 서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고를 내시로 단정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 <이사열전>의 ‘환인(宦人)’ 구절 역시 당시에는 궁내(宮內)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를 후대의 ‘환관’과 같은 뜻으로 오해한 것이다.
 
  당시 거세한 ‘내시’는 ‘환인’이 아니라 ‘엄인(?人)’으로 달리 표현했다. 궁중에서 일하는 엄인은 특별히 ‘환엄(宦?)’으로 칭한 게 그 증거이다.
 
  ‘환인’ 조고는 궁중에서 일하며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인물이지 결코 거세된 후 궁정에서 일한 ‘환엄’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고의 딸이 도성인 함안령(咸安令: 도성인 함안의 시장) 염락(閻樂)에게 출가(出嫁)한 사실도 조고가 환관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설령 조고를 ‘환인’이 아닌 ‘환엄’으로 간주할지라도 그를 권력에 도취한 추악한 내시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조고는 진시황보다 3년가량 늦은 소양왕 51년(기원전 256) 전후에 함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법을 다루는 관원으로 있던 부친의 감독하에 글 쓰는 것과 법률을 배웠다. 당시 법률의 집행은 모두 문서를 통해 이뤄진 까닭에 법률은 물론 문자에도 능했다. 조고와 그의 동생 조성(趙成)이 뛰어난 문자 및 법률지식을 바탕으로 돌아가며 낭중령(郎中令: 궁궐의 경비책임자)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胡亥는 暗君이 아니었다
 
진시황릉. 뒤에 작은 산처럼 보이는 것이 진시황의 능이다.
  조고가 진나라 궁중에 들어간 시기는 진시황이 친정을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기원전 234년 전후로 짐작되고 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곧바로 능력을 인정받아 태복(太僕) 소속의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임명됐다. ‘태복’은 구경(九卿) 중 하나로 황제의 거마(車馬)와 교통을 담당했다. 봉록이 600석인 중거부령은 황제의 시종 자격으로 어가의 관리와 수행을 담당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의 경호차 담당관에 해당한다. 법률과 문자에 밝았던 조고의 발탁은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진시황의 급서에 있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순행할 때마다 늘 어가를 앞에서 지휘했던 조고는 진시황의 급서로 졸지에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여기에는 진나라 내부의 권력구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조고와 승상 이사는 진제국 최대 문벌인 몽씨 일족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몽씨 일족에 대한 진시황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몽념은 흉노의 침공을 막는 최전선의 장군직을 맡고 있고, 그 동생 몽의(蒙毅)는 조정에서 국가정책을 논의하는 일에 참여해 명성을 떨쳤다. 당시 장상(將相)일지라도 감히 그들과 다투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진시황의 장자인 부소와 가까웠다.
 
  일찍이 몽의는 황명(皇命)을 받아 잘못을 저지른 조고를 치죄(治罪)하면서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작은 잘못을 이유로 인재를 죽일 수는 없다”는 이유로 조고를 이내 사면했다. 복관(復官)한 조고는 진시황이 급서한 비상상황에서 부소가 몽씨 일족의 지지를 배경으로 보위에 오를 경우 목숨을 부지키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급서 당시 진시황의 의중은 어디에 있었을까. 진시황이 죽기 직전에 작성한 유조(遺詔)에 그 단서가 있다. <사기>에 따르면 당시 진시황은 부호(符號: 군사동원의 신표)와 옥새를 관장하는 조고에게 자신이 직접 쓴 유조를 보여주며 이를 부소에게 보내게 했다. 그는 이 유조에 이같이 썼다.
 
  “부소는 속히 돌아와 상사(喪事)에 참여하고, 함양에서 군신들과 회합해 짐을 안장토록 하라.”
 
  결코 부소를 태자로 세운다는 내용은 없다. 단지 장례에 참석해 자신의 장례를 무사히 치르라는 당부만 있을 뿐이다. 당시 진시황의 의중은 막내아들 호해에게 기울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천하순행에 동행토록 한 게 그 증거이다. 호해와 가까웠던 조고의 입장에서 볼 때 몽씨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부소의 즉위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승상 이사가 정적(政敵)인 몽념의 전면 부상을 언급한 조고의 설득에 넘어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원래 장남 부소는 20명에 달하는 진시황의 아들 중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막내 호해 역시 <사기>의 기록처럼 어리석은 인물도 아니었다. 진시황이 급서할 당시 호해의 나이는 이미 20세였다. 그는 보위에 오른 뒤 부황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었다. 재위 원년인 기원전 209년에 천하순행에 나서 회계(會稽)에 다다른 뒤 부황이 세운 각석(刻石)에 미처 다 새겨 넣지 못한 내용을 채워 넣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찌 보면 조고가 이사에 이어 2세 황제 호해마저 제거하는 와중에 진제국이 급속히 몰락하는 바람에 모두 희극적인 인물로 왜곡되고 만 셈이다.
 
 
  최초의 帝王
 
  원래 중국과 같이 방대한 지역과 많은 인민을 보유한 나라를 통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제왕정’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역사상 이를 최초로 실현한 인물이 바로 진시황이다. 비록 2세 황제에 그치기는 했으나 ‘시황(始皇)’의 호칭은 이런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하나같이 ‘제왕정’을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한 것은 ‘제왕정’이 나름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이 창업주에 해당하는 현대중국 역시 그 이면을 보면 ‘제왕정’의 연장선에 있다. 솔즈베리가 <새로운 황제들>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을 ‘신(新)중화제국’의 황제로 규정한 게 이를 뒷받침한다.
 
  진시황의 천하경영은 문자·도량형(度量衡)·화폐 등을 통일하고, 전국 각지로 뻗은 도로망을 개설해 천하를 하나로 묶는 일에서 시작됐다. 이 와중에 그가 분서갱유를 단행한 것은 불행한 일이기는 했으나 제국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짙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북방의 흉노(凶奴)는 최강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흉노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해 제국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진시황본기>에서 이런 사평을 가해 놓았다.
 
  “진시황은 왕도(王道: 덕치)를 폐기하고 통치 권력을 사권(私權)으로 삼았다. 포학한 정치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무력을 바탕으로 한 패도(覇道) 행보를 ‘폭군’의 논거로 든 셈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당시는 한무제가 소위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외치며 유학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관학(官學)으로 선포한 때였다.
 
  ‘왕도’를 숭상하는 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진시황의 ‘패도’ 행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군주는 늘 선비를 가까이하며 수양과 학문에 힘써야 하는데도 ‘분서갱유’를 감행하고, 민생을 최우선시해야 함에도 만리장성과 아방궁 등을 축조하고, 신하에게 국사를 위임해야 하는데도 신하들을 믿지 못해 모든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는가 하면 신선이 되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 것 등이 그렇다. <사기>가 진제국을 잠시 존재했다 사라진 변칙적인 역사전개 과정으로 간주한 이유이다.
 
 
  탁월한 창업자 리더십 발휘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5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런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을 동원해 천하를 통일하는 길밖에 없었다. 나아가 사상 최초의 ‘제왕정’을 제대로 실시키 위해서는 일정기간 동안 무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조치가 불가피했다.
 
  이 와중에 진시황은 탁월한 창업자 리더십을 발휘했다. 단호한 결단력과 성실한 직무수행, 뜨거운 열정 등이 그것이다.
 
  <사기>는 그를 잔학한 인물로 그려놓았으나 그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향락에 빠졌다는 얘기는 이후 전설로도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저울을 사용해 정확히 무게를 달듯이 똑같은 양의 정해진 업무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처리했고, 확정된 사안도 철저히 검토하기 전에는 결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는 10년 동안에 무려 다섯 번이나 나라의 구석구석을 시찰하는 ‘천하순행’을 결행했다.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는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시황이 패도의 ‘득천하(得天下)’와 왕도의 ‘치천하(治天下)’ 이치를 몰랐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가 천하를 5번에 걸쳐 순행하는 와중에 전국 곳곳에 세운 각석에 유가의 ‘왕도’ 이념을 새겨 넣은 게 그 증거이다. 진시황 역시 장수하며 제국의 기틀이 확고히 잡히는 것을 보았다면 이후 ‘왕도’를 널리 행했을 공산이 컸다. 중농억상(重農抑商)을 기치로 내세웠음에도 단사(丹砂)를 개발해 큰 재산을 모은 자를 표창해 산업진흥을 격려한 게 좋은 실례이다. 그러나 그의 과로사가 모든 것을 흩트려놓고 말았다.
 
 
  현 중국지도부는 帝王政과 禮治의 접목에 관심
 
  현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때처럼 진시황을 ‘천고일제(千古一帝)’로 미화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사기>처럼 그를 일방적으로 ‘만세의 폭군’으로 매도하는 일도 없다. 오히려 지난 2002년에 상영된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영웅>처럼 민간차원에서 그를 긍정 평가하는 분위기가 높게 일고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일련의 ‘패도’ 행보로 무고한 인명을 대거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현대중국을 창업한 공을 인정받아 많은 인민의 지지를 받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공자가 복권되고 진시황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이 시도되고 있는 현재 중국 수뇌부가 그리는 21세기의 국제질서는 진시황이 단초를 연 ‘제왕정’ 위에 공자의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접목한 ‘신중화질서’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제왕정’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고, 그 선결요건으로 진시황의 ‘패도’ 행보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아(東亞)3국에서 많은 학자가 <사기>의 진시황 관련대목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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