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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는] 나의 레일 인생 60년

“내가 복구한 철교 위로 인민군은 탱크를, 국군은 군수 물자를 실어 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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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건설한 춘양곡 철교 아직도 건재
⊙ 영암선 공사 중 수시로 공비 출몰
⊙ 낙동강 철교 하선 공사 현장을 방문한 李承晩 대통령
⊙ 고속도로 건설 참여가 회사 성장의 초석이 돼

全兢烈 유신코퍼레이션 회장
⊙ 1926년 평북 정주 출생.
⊙ 서울대 공대 토목공학과 졸업.
⊙ 운수부 기술서 건설과 기수,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장 역임.
⊙ 현재 (주)유신코퍼레이션 회장.
⊙ 상훈: ‘2006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
  필자는 한평생을 철도와 함께 달려왔다. ‘철도 인생’이라고 할까. 청춘은 물론 이후의 삶도 온통 철도 건설에 쏟아 부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철도 역사와 발전에 관한 한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됐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이다. 정주는 洪景來(홍경래), 李昇薰(이승훈), 李光洙(이광수), 金素月(김소월), 金億(김억), 方應謨(방응모) 등 한국 근현대사를 움직인 걸출한 인물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祖父(조부) 때부터 500석 농사를 지었기에 유년시절은 유복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평양 제2공립중학교(평양고보)를 거쳐 1945년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토목과에 입학했다.
 
  이과를 택한 것은 징병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이공계 지원자에 한해 징병 연기라는 특혜를 주고 있었다. 필자가 입학하던 해 경성공업전문학교 토목과 학생은 40명으로, 이 중 조선인은 6명이었다.
 
  곧이어 광복이 됐고, 광복 후의 혼란기에 학업을 계속했다. 1948년 7월, 경성공업전문학교 3년 과정을 모두 마친 뒤 곧바로 美(미) 군정청 운수부 기술서에 취직했다. 토목 인력이 태부족이었던 때라서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취업의 문은 어디서든 열렸다. 그런데 토목 분야 중에서도 철도 쪽이 기술인 양성에 열성적이었고 대접도 좋아 주저 없이 철도 분야에 취업했다.
 
  1948년에 교통부 건설과 기사가 된 필자는 이후 철도 기술자로서 경력을 축적해 나갔다. 그해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미 군정청으로부터 모든 행정권을 이양받은 교통부의 철도 건설이 본격화됐다.
 
1949년 필자가 설계하여 가설한 춘양곡 철탑. 60년이 다 되어 가는 요즘도 안전 운항 중이다.
 
  영암선 건설
 
  정부는 1949년 4월부터 영암선·영월선(제천~영월 38.1㎞)·문경선(점촌~은성 22.8㎞) 등 이른바 ‘3대 산업선’을 1953년 완공 목표로 차례로 착공했다. 미국의 원조 기관인 ECA(미국 경제협력국 MSA의 옛 명칭)의 후원을 받아서였다.
 
  당시 한반도의 철도 상황은 총 연장 6329km, 기관차 1166량, 객차 2027량, 화차 1만5352량, 종사원 10만527명이었다. 이 중 38선 이남의 선로 총 연장은 2642km, 기관차 488량이었다.
 
  당시 국내 철도는 경부선·경의선·중앙선 등 일본이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여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 건설한 것들이었다. 태백 탄전지역에 매장된 지하자원을 개발해 수도권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중앙선(당시 京慶線)과 삼척선·철암선을 연결하는 철도가 필요했다.
 
  이 구간의 철도가 건설되기 전 태백 지역의 지하자원은 광복 전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암선(철암~동해)과 삼척선(동해~삼척)을 이용해 묵호항으로 운송한 뒤 수도권까지 선박으로 실어 날랐다. 부산~목포~인천을 경유해 오는 거리라 운송 시간도 많이 걸릴뿐더러 운송비도 많이 들었다. 석탄 1t당 생산원가(3600환)보다 운송비(3618환)가 더 높아 채산성이 떨어졌다.
 
  영암선(현재의 영동선 일부) 건설은 우리 철도사에서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대목이다. 당시 철도 기술은 대한민국 토목 분야 그 어느 곳보다 수준이 높았다.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상 영암선처럼 동서를 관통하는 횡관철도 건설은 험준한 산악과 협곡을 돌파하기 위해 터널과 교량, 급경사 우회를 위한 각종 시설 등을 설치해야 하는 난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철도공무원으로서 당시 필자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철도 건설의 계획과 설계, 다른 하나는 철교 같은 특수 구조물의 설계였다.
 
  영암선과 영월선 두 노선 모두 백두대간의 험한 준령을 뚫고 가파른 계곡을 통과해 높은 지대로 상향하는 노선이었다. 공사는 개시됐지만 갖가지 난관에 부딪혔다. 특히 시멘트와 철근이 부족해 애로가 많았다.
 
 
  미국, 일본의 반대 무릅쓰고 강행
 
1953년 임진강 교량(現 자유의 다리) 복구 담당 책임자로 근무 당시 필자(오른쪽)와 흥화공작소 현장소장.
  당초 미 극동군사령부는 정부 수립 8개월밖에 안된 신생국가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철도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일본 방송에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사를 시작했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암선은 착공 10개월 만인 1950년 2월 영주~내성 간 14.1km를 부분 개통했다. 같은 해 3월엔 영암선 중에서 가장 난공사 구간인 승부~철암 구간(17.1km)이 착공됐는데, 이때 필자는 철도건설국 공사조역으로 임명돼 현지에 파견됐다.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나 서울의 신접살림을 접고 강원도 현장으로 내려갔다.
 
  필자는 석포에 주재하며 승부~석포 간 제22공구를 담당했다. 오늘날에도 석포는 외진 산간이지만 당시엔 아득한 僻地(벽지)였다. 지세가 험준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밤이면 공비가 수시로 출몰했다. 때문에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국군이 주둔해 치안을 담당했다. 필자의 가장 큰 책무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공정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3개월여에 걸쳐 노선과 구조물 검측을 비롯해 공사 가(假)도로 계획을 모두 마치고 공사를 본격적으로 착수하려던 1950년 6월 27일, 갑자기 철도건설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산군이 동해안으로 상륙해 삼척 철암 지구로 진군 중이니 전면 철수하라는 것이다. 필자는 급히 서울로 귀환했다.
 
  死線(사선)을 뚫고 서울의 가족에게 돌아와 보니 이미 서울은 공산치하였다. 사람들은 서둘러 남쪽으로 피란을 갔다. 그러나 이남 어디에도 혈육이나 친지가 없었던 필자는 서울의 철도관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불운한 일이 생겼다. 인민군들이 필자가 철도기술자이자 특수구조물 전문가임을 알고는 부역을 강요했다. 거부할 길이 없었다. 목숨이 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부역자 낙인 찍혀
 
  인민군들은 철교 보수를 요구했다. 한강철교는 낮이면 폭격으로 부서졌는데, 밤에 어떻게 해서든 이걸 고쳐 놓으라는 명령이었다. 밤에 철교로 나가서 황급히 설계를 하거나 보수공사가 제대로 되는지 체크해야 했다. 잠도 현장 숙소에서 잤다. 이렇게 보수된 철교 위로 인민군의 탱크를 실은 열차들이 남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런 부역의 대가로 밥을 굶진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인민군에게 협력한 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형무소에 갇혀 1주일을 지내며 매를 흠씬 맞았다. 하루는 직속상관이었던 시설국 건설과장이 면회를 왔다.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줄 테니 빠른 기일 내에 부서진 철교를 복구하라는 게 아닌가. 사양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철교 교량은 대부분 파괴됐다. 전쟁 시 대량 수송력을 가진 철도시설의 파괴는 당연했다. 특히 후퇴와 반격이 되풀이되던 지역의 철도는 거의 제 기능을 상실했고, 주요 교량과 터널 역시 파괴됐다.
 
  필자는 망가진 철교를 복구하는 작업에 참여해 진두지휘했다. 6·25전쟁과 관련해 임시로나마 복구한 최초의 교량이 양수리 북한강 철교였다. 북한강 철교는 중앙선 최대의 교량으로 1936년에 일제가 준공한 것이다. 이것이 전란 통에 폭격을 맞아 크게 부서졌다.
 
  필자는 임시복구 작업의 상부구조 책임자가 되어 부역자로 낙인 찍힌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서진 다리 상부로 기어 올라가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파손된 부위를 땜질 식으로 꿰맞춰 17일 만에 철교를 개통시켰다.
 
  복구된 북한강 철교 위로 시운전 열차가 지나는 날이었다. 필자와 다른 부역자 둘을 부르더니 기관차 맨 앞에 타라고 하는 게 아닌가. 만에 하나 열차가 다리를 지나다 무너지면 너희 먼저 죽으라는 뜻이었다.
 
  잠시 후 필자 일행을 태운 열차가 다리로 진입했다. 그리고 복구된 다리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 순간 설움과 기쁨이 동시에 복받쳐 셋이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양수리 북한강 철교가 복구되자 北進(북진)하는 국군을 위한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북쪽으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시 복구된 이 다리는 1·4후퇴로 다시 파괴됐으며, 1951년 6월 영구복구 공사를 추진해 이듬해인 1952년 1월에 완공됐다.
 
 
  낙동강 철교 복구현장 방문한 李承晩 대통령
 
  필자는 왜관의 낙동강 철도 교량 복구에도 참여했다. 이 철교는 일제 때인 1939년에 상행선이, 1944년에 하행선이 준공됐다. 6·25가 터져 낙동강이 아군의 최후 방어저지선이 되면서 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철교를 파괴했다. 상행선 교량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과 공동으로 임시복구 공사를 벌여 10월에 가개통했으며, 1952년 1월에 본공사에 착수해 그해 4월에 완전 개통했다.
 
  낙동강 복구공사 명령을 받은 것은 1·4후퇴 직전이었다. 교통부 상사로부터 “낙동강 철교 복구용 교량부재를 빠짐없이 화물차에 싣고, 그 화물이 편성되는 열차를 타고 왜관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체없이 자재들을 모두 싣고 화물열차를 편성하여 1951년 1월 3일 저녁에 서울을 출발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열차에 가족을 모두 태울 수 있었다.
 
  당시 열차에 동승한 아내는 홍역을 앓던 두 살배기 아들을 품에 싸안고 있었다. 우리는 유개차 화물칸에 동승한 다른 철도 직원 가족들에게 홍역 걸린 아들 얘기를 숨겨야 했다. 아이가 홍역 걸린 게 알려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하기 어려운 판국이었는데, 다행히 어린 아들은 울음소리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낙동강 철교 하선 복구공사는 예상 외로 빠르게 진행됐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하루빨리 수송로를 연결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를 몰아내고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이 꽉 차 있었다.
 
  복구작업이 한창이던 3월 하순경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이곳 교량 현장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장에서 설명을 들은 후 복구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원들과 지방민들은 박수갈채와 함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하는 노래를 부르며 현장을 떠나는 대통령을 배웅했다.
 
  휴전선 부근에서 포성이 멎자 정부는 1953년 9월부터 중단됐던 영암선 건설을 재개했다. 필자는 영암선 건설 과정에서 특수구조물로 선택된 춘양곡 교량의 설계를 담당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총 연장 71.43m의 이 교량은 6·25 전에 설계를 마쳤으나 휴전 후 새로 도입한 디젤기관차의 하중 조건을 감안해 필자가 재설계에 나섰다.
 
  1955년에 제작 및 현지 가설을 완료한 이 교량은 오늘날까지 끄떡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 열차 수송량이 급증하고, 운행 횟수가 늘어나고, 중량급 디젤기관차가 밤낮없이 쾅쾅거리며 다리 위를 달리지만 이 다리의 유지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든가 내구성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다.
 
1962년 함백소장 시절 필자가 설계한 정선선 조동육교. 콘크리트 라멘교로 여전히 건재하다. 사진은 2006년에 촬영한 모습.
 
  한강철교 복구사업
 
  영암선은 1953년 9월에 착공, 1955년 12월 전 구간 개통됐다. 지난 2005년 10월, 필자는 오랜만에 춘양곡 교량을 답사해 교량 현황을 살펴보았다. 철탑 교량의 외형은 가설 당시 모습 그대로여서 감회가 깊었다.
 
  철도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은 한강철교 복구사업이다. 한강철교는 경부 본선에 있는 교량 중 가장 장대한 철교로 단선 교량 A, B선 두 개와 복선 교량 C선 한 개가 있었다. A선은 1900년 7월에, B선은 1912년에 각각 준공됐다. 한강철교는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유엔군에 의해 탈환될 때까지 약 석 달 동안 가장 치열한 공격목표가 돼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것은 C선이었다.
 
  한강철교 복구를 위해서는 원래 도면이 필요한데 이게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전쟁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애초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였으므로 일본 철도회사를 찾아가 자료를 얻어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를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철교의 부재를 현장에서 일일이 조사해 계산서와 대조하면서 도면을 복구하는 일에 오랜 시일이 소요됐다. 그 과정에서 필자는 세계적인 교량 전문가인 일본인 오다야 노스케 박사가 창안한 복사재구조가 대단히 견고한 철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결국 한강철교는 우리 힘으로, 초기보다 더욱 견고한 철교로 복구됐다.
 
  언젠가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구조공학 교수가 來韓(내한)해 한강철교를 답사한 일이 있다. 이때 필자가 안내를 맡았는데 그 교수가 “이렇게 둔한(foolish) 설계가 어디 있는가?” 하고 지적했다.
 
  그의 의견은 분명히 경솔했다. 한강철교는 앞으로도 100년은 끄떡없이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전철처럼 가벼운 열차가 달릴 경우 육중한 구조가 아니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전기기관차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전기가 끊기면 디젤기관차가 달려야 한다. 그리고 디젤기관차는 매우 무겁다. 육중한 철교만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한강철교는 별다른 보수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저 페인트칠만 잘해 주면 그만이다. 비록 단기간에 걸친 복구공사였지만 지금까지 처짐이 허용치를 초과하거나 강성이 감소됐다는 징조 없이 열차가 정상 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부재 접합부의 이음이나 연결 기술이 절정에 달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오늘날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당산철교가 위험 직전에 철거되는 등 교량 수명이 20년도 못 돼 대체되고 있는 것은 리베터(버섯 모양의 굵은 못을 박고 죄는 기계) 구조가 새로운 용접구조로 전환하는 데서 겪은 엄청난 시행착오다.
 
 
  미국으로 기술 연수 떠나
 
  철도 복구사업은 1960년에 일단락됐다. 필자는 전국에 산재한 복구 현장을 누비면서 파괴된 철도교량을 정상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 노력이 인정을 받아 1961년, 미국 기술연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정부에서는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이후 AID) 기술원조계획에 맞춰 대상자를 선발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고 있었다.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필자는 교통부 시설국 계획담당관 자격으로 미국 기술연수를 떠났다.
 
  연수 기간은 7개월. 이 기간 동안 철도회사 6곳, 2개 주정부 공공시설국(도로 및 콘크리트 실험), 엔지니어링 컨설턴트 회사 한 곳에서 각각 보름 내지 한 달가량 근무하며 엔지니어링 분야 전반에 관한 기술 연수를 받았다.
 
  철도회사들을 방문하면서는 무엇보다 철도의 경영적 측면에 관해 많은 경험을 했다. 켄터키州(주)와 일리노이 주정부의 공공시설국을 방문해서는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를 건설하는 중이었다. 필자는 연수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국가의 수송력이 철도에서 점차 도로로 옮겨간다는 사실과, 도로건설의 기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았다.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를 방문해서는 합리적인 사업 진행과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는 방법 등을 폭넓게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설계와 시공에 앞서 행하는 ‘타당성 조사’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접하는 등 엔지니어링 산업 전반에 대한 신지식을 익히는 기회가 됐다. 이 경험은 훗날 국내 기술용역에 새로운 선진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귀국 후인 1962년 봄 필자는 강원도 정선선 함백공사 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현지에 파견됐다. 정선선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함백과 정선 지역의 지하자원 수송을 담당할 산업철도로 건설됐다.
 
 
  물지게 짊어진 미래 장관
 
1963년 함백공사 사무소 소장 재직 시절 기술자 모임.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필자다.
  함백 현장에 소장으로 부임해서 보니 조금은 이색적인 인물들이 작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국토건설단이라는 게 있었다. 대학졸업자가 병역을 미필한 채 공직에 있거나 취직하고자 할 때 국토건설단에 입단하여 건설 현장에서 1년간 근로봉사로 병역을 대신하는 제도였다.
 
  함백공사 사무소 관내에 건설단 인력을 배치하고 기술지도를 하는 것이 필자의 소관이었다. 건설단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근로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군대 안 간 대가를 치르느라 물지게를 짊어져야 했던 사람 중에는 후에 장관을 지낸 사람도 있었다.
 
  정선선 공사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동육교 건설이다. 이 교량은 안전성을 위해 강성을 높게 하고 급커브 궤도를 유지할 수 있는 유도상 구조로 건설됐다. 정선선 관문을 상징할 수 있도록 주위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하에 여러 날을 구상한 끝에 多徑間多層(다경간다층) 콘크리트 라멘 구조의 교량을 택하기로 하고 철도건설국장의 재가를 얻어 실행에 옮겼다.
 
  필자는 2005년에 조동육교를 답사한 적이 있다. 조동계곡의 탁 트인 공간을 횡단하는 철도교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2년 동안 정선선 함백공사 사무소장직으로 있던 필자는 1964년 5월 철도청 본청 시설국 건설과장으로 복귀했다. 이제는 시대의 변화에 주목해야 할 시기였다. 1950년대의 戰後(전후) 복구사업과 달리 1960년대에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철도, 도로, 전력, 항만, 수자원, 상수도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한 사업이 갈수록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에 따른 기술용역사업이 새로운 산업 분야로 인식돼 가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부터 외국 용역기술회사가 우리나라의 기술원조 기관인 ECA, ICA, AID 등의 엔지니어링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직에 있던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국내 기술자들이 이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기술용역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1965년 5월, 17년 동안 몸담았던 철도청을 떠났다. 그때 나이 불혹의 고개에 올라서고 있었다. 이 시기의 관심사는 엔지니어링 사업이었다. 나름의 야심을 갖고 창업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설계에 참여
 
1970년, 필자가 설계한 한강철도교 A, B선 가설을 끝마치고 시공 감독들과 함께. 가운데가 필자.
  그즈음 철도청으로부터 한강 A, B선 트러스 교량 설계와 경전선 합성형 설계 업무 두 건을 수주받았다. 철도청에서는 창업을 지원하는 뜻에서 이 일들을 선물로 필자에게 준 셈이다.
 
  청계천 근처의 지하실을 빌려 사무실을 차린 다음 몇 개월에 걸쳐 혼자 교량 설계를 하고 납품서류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대금으로 97만원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다. 도면 트레이싱하는 데 사용된 비용 2만원을 제외하면 거의 순수익이었다. 이 돈은 회사를 설립하는 종잣돈으로 투자됐다.
 
  1966년 1월 17일, 을지로에 사무실을 얻어 ‘유신특수설계공단’이라는 이름의 법인을 출범시켰다. 이 회사는 국내 건설기술 용역업체 가운데 20번째로 건설부에 정식 등록한 회사였다. 설립 자본금은 100만원.
 
  회사명을 ‘惟信(유신)’으로 정한 것은 ‘오직 신용을 바탕으로 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특수’라는 말은 다른 업체에서는 할 수 없는 ‘특수구조물’까지 설계하겠다는 취지에서 붙였다.
 
  창업 당시 직원은 11명에 불과했다. 필자는 일을 수주하고, 설계를 하고,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등 1인 3역을 했다. 경비를 줄이려고 버스조차 타지 않고 걸어다니기가 일쑤였다.
 
  창업 43년이 지난 현재, 유신은 토목 설계와 감리에 있어 국내 굴지의 업체로 성장했다. 영종대교, 경부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고속도로, 교량, 댐, 비행장 등 국토개발 현장 곳곳에 유신의 손길이 닿았다. 경부고속도로 설계에 참여한 것이 이 같은 성장의 초석이 됐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에 착공돼 2년 반 만인 1970년 7월 7일,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총 연장 428km의 4차선 도로로 개통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7년 청와대 직속으로 고속도로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 사업이 시작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 건설업계가 설레고 토목기술자들은 흥분했다. 공직을 떠나서 새로 설계용역 회사를 창립한 지 만 2년이 되는 때였다.
 
 
  윌버 스미스의 고속도로 타당성 보고서
 
  고속도로추진위원회 조사단장은 철도인 출신으로 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安京模(안경모)씨가 맡았다. 당시 도로 분야에 관한 국내 기술력이 매우 낮아 안경모씨는 철도기술자들을 적극 활용했다. 우리 회사는 ‘기회의 땅’인 고속도로 노선 설계에 참여하게 됐다. 도로 건설 경험이 없는 풋내기 회사였지만 철도건설 설계경험이 많아 일을 맡을 수 있었다.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그 시절에 고속도로 건설이라면 선진국 기술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토목사업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업을 논의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웃음거리로 보는 것이 일반 여론이었다. 더욱이 후진국 개발을 돕는 세계은행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큰 걸림돌이었다.
 
  바로 이때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한 파티에서 포터 주한 미국대사에게 “당신네 나라에서 제일 가는 도로 전문가를 나에게 보내줄 수 없는가?”라고 제안했다. 포터 대사는 본국에 연락해서 윌버 스미스 앤 어소시에이티드社(사)의 사장이자 미국 도로협회장인 윌버 스미스 씨를 미군 특별기 편으로 박 대통령에게 데려왔다고 한다.
 
  그때가 1967년 초겨울, 산에는 낙엽이 거의 떨어져 지형답사가 용이한 때였다. 스미스 씨는 우리 정부의 협조로 도상노선(Paper Location), 헬리콥터로 공중 답사, 지상 답사 등 3단계 답사 과정을 밟아서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2주일 만에 타당성 조사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계획에 냉소를 보냈던 세계은행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렇게 해서 경부고속도로 사업은 박 대통령의 계획대로 우리 자본과 기술로 예정 기간 내에 완성하게 됐다.
 
  당시 윌버 스미스 씨의 타당성 보고서는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보고서에 우방국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만한 사실은 기술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울 만큼 매혹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았나 추정된다.
 
  당시 국내외 교통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댔던 부정적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그들은 적어도 고속도로 건설 뒤 20년은 지나야 적정한 수효의 차량이 도로를 채울 것으로 보았고, 그 점에서 경제성이 전혀 없는 사업이라 예단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불과 10년이 지나자 서울~수원 간 4차선 용량이 포화상태를 이루었다.
 
 
  고속도로를 철도 노선 설계하듯 설계
 
필자(맨 오른쪽)는 2006년,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됐다.
  필자의 회사는 경부고속도로 사업에 참여하여 모든 열성을 다했다. 1968년 4월부터 2개월 동안 대전~부산 간 노선 도상계획과 현지답사 등을 마친 다음 노선 측량을 시행했다. 이어 12월부터는 모량~부산 간 70km 구간에 대한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를 맡았다.
 
  필자의 회사가 담당한 모량~부산 구간은 기존의 도로나 철도를 따라 쉽게 노선의 선형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름 선정한 노선이 안전하고 쾌적하면서도 경제적인 노선이라는 감독기관의 점검을 거치긴 했지만, 공사 일정이 줄어드는 바람에 고속도로 경험자의 충언을 듣지 못하고 넘어간 대목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노선이 개통되고 여러 나라 기술자들에게 공개됐을 때 선형에 관한 공통된 의견은 “고속도로 노선의 선형이라기보다는 철도 노선의 선형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영동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 사업이 진행되면서 미국과 유럽의 도로설계회사가 국내 회사와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의 선형이 재래식 전통 설계법을 따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국내 토목 설계업체들의 도로건설 기술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지렛대가 됐다. 우리 회사 역시 도로 전반에 대한 기술을 축적하고 신생기업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필자의 회사는 1991년 6월부터 경부고속전철 전체 구간 중 언양~양산~부산 간 57.54km 구간의 실시설계를 수주받아 과업을 수행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철도 관련 기관에 충언을 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속철도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1980년대 초기에는 철도청이 서울~대전 간의 고속철도 노선 대안을 검토하여 건설비와 건설기간 및 운영개념을 제시했다. 또 서울올림픽 이전에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아울러 부산까지 노선을 연장할 것을 고려한 제반 기준을 제시했다.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 도쿄올림픽 개막 10일 전에 개통되어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예를 상기시키면서 철도청이 의욕을 보였으나 시행에 옮기지 못했다.
 
 
  다키야마 씨의 충고
 
  당시 철도청은 일본 철도계의 거물이요 신칸센 건설 당시 技師長(기사장)을 지낸 다키야마 마모루(瀧山養) 박사를 초청해서 고속철도 건설 경험담을 들었다. 다키야마 씨는 신칸센 개통 이후 만 16년 동안 무사고 운전과 흑자운영을 한 사실을 나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당초 노선 선정에서 더 고려했어야 할 사항과 개통 이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말해 주었다.
 
  일본어에 능숙한 필자는 당시 철도청의 요청으로 통역을 맡아 다키야마 씨의 이야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강연 마무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사항을 되풀이 강조했다.
 
  (1)중간역의 수는 많을수록 유리하다. 그러므로 장차 중간역이 위치할 지역의 노선 선형을 정거장 조건에 맞도록 신중히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2)중간역이 놓일 지점의 노선 선형은 반드시 기존 역세권의 한 귀퉁이라도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
 
  그 후 1989년, 필자는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용역단에 참여하여 최적노선의 선정 작업을 하면서 다키야마 박사의 중간역 설치에 관한 지적사항을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용역을 주관하는 철도청 기술자들의 소극적인 자세가 장애가 됐다.
 
  그들은 8년 전 다키야마 씨의 강연을 청취했다는 기억은 했으나 중간역 설치에 관한 두 가지 강조 사항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원칙적인 사항을 다키야마 박사에게 다시 확인하거나, 그가 아니더라도 고속철도에 몸담아 온 외국인 기술자에게 문의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그저 당장 부딪힌 일을 안일하게 넘기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장래에 발생할 문제는 자기들이 알 바 아니라는 자세였다. 천추유한이라, 기록에나 남겨서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언젠가 우리 회사를 방문한 외국인 기술자가 고속철도와 인천국제공항 등 대형 국책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회사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나 우리가 바라는 성과를 70%밖에 달성할 수 없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국력이 선진국 문턱이니 100% 성과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라고 답했다 이 사람의 말이 농담이건 진담이건, 수긍이 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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