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史 증언] 洪一植 前 고려大 총장

“일제末 崔南善의 學兵 출정권유는 우리민족의 ‘군사지도자’ 양성이 목적”

  • : 배진영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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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堂이나 仁村 선생을 親日로 모는 것은 金日成 혼자서 민족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기 위한 상징조작”

홍일식
⊙ 1936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학 박사. 연세대 명예철학 박사.
⊙ 고려대 국문과 교수, 同 민족문화연구소장, 총장, 민족문화연구원장, 육당기념사업회 부회장,
    서울문화사학회 회장 역임. 現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사업회장, 孝세계화 운동본부 총재,
    한국인문사회연구원장.
⊙ 상훈 ; 5·16민족상, 제1회 세종문화상, 문화훈장 보관장, 제7회 아산효행대상, 청조근정훈장 등.
⊙ 저서 ; <육당연구>, <한국전통문화시론>, <한국 개화기의 문학사상 연구>, <21세기와 한국전통
    문화>,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한국개화기 詩歌(시가)의 사상적 연구>,
    <육당 최남선의 친일 시비에 관한 고찰> 등.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6월 6일. 서울 시청앞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단에 오른 ‘자칭 시민’은 이렇게 외쳤다.
 
  “미친 쥐새끼가 청와대에 들어가니 미친 쇠고기가 들어오고, 미친 교과서가 나오고, 미친 뉴라이트가 나오고….”
 
  ‘미친 교과서’, ‘미친 뉴라이트’ 운운하는 소리는 지난 4월 나온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이하 <대안교과서>로 표기)를 두고 하는 소리임에 분명했다. 이른바 ‘뉴라이트’성향의 학자들이 중심이 돼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左(좌)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대안교과서>에는 “일제시대 동안 형성된 법적·제도적 장치와 인프라, 人的(인적) 자원이 광복 후 한국 경제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때문에 <대안교과서>는 출간 직후부터 親日(친일)논쟁에 휘말렸고, 뉴라이트 세력은 親日派(친일파)로 낙인이 찍혔다. 촛불시위 기간 중 시위대가 戰警(전경)버스에 한 낙서 가운데는 뉴라이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대안교과서> 집필자들과는 전혀 무관한 뉴라이트전국연합 사무실에도 한동안 “뉴라이트는 친일파”라고 욕하는 전화들이 그치지 않았다. 광복 63주년, 건국 60주년을 맞는 2008년 현재까지도 친일파라는 비난은 과거의 ‘빨갱이’ 못지않은 ‘주홍글씨’인 것이다.
 
  盧武鉉(노무현) 정권 시절 左派(좌파)성향 인터넷 매체들의 응원 속에 國庫(국고)지원을 받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했던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8월 29일과 지난 4월 29일 두 차례에 걸쳐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의 이름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 金性洙(김성수) 전 부통령, 申鉉碻(신현확) 전 국무총리, 兪鎭午(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白樂濬(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金活蘭(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安益泰(안익태), 崔南善(최남선), 李光洙(이광수), 홍난파 등 문화예술인이 포함됐다. 면면에서 보듯 이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했고,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인사들이다. 이들에게 한때의 행적을 가지고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성북동에 있는 한국인문사회연구원으로 洪一植(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을 찾아갔다. 홍 전 총장은 3·1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이면서 日帝末(일제말) 훼절해서 친일 논란의 중심에 섰던 六堂(육당) 최남선의 마지막 제자다.
 
 
  어린 눈으로 본 광복과 건국
 
  ― 올해는 건국 60주년, 광복 63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당시의 일들이 혹시 기억나십니까.
 
  “그럼요. 어릴 때, 나는 서울 안암동 로터리 앞 제기동에 살았습니다. 근처에 경기도청 官舍(관사)가 있어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일본인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조선 사람들에게서는 더러운 마늘 냄새가 난다’고 수모를 많이 당했어요. 밤에 새총으로 일본 사람 집 유리창을 깨고 도망하기도 했죠. 그러다 광복이 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불쌍한 모습으로 쫓겨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때가 10살 때였는데, 들뜬 분위기 속에서 만세를 부르고 거리를 누비고 다니기는 했지만, 뭘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광복의 감격과 흥분은 아버지나 형님 세대의 몫이었지요. 건국 무렵의 일로는 金九(김구) 선생이 南北(남북)협상을 하러 北行(북행)할 때 형님과 친구들이 반대하러 나갔던 일, 이듬해 김구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弔問(조문)하러 가서 울었던 일이 기억나네요.”
 
  ―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두고 ‘분단 고착화’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런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冷戰(냉전) 초기 국제정세를 제대로 간파한 사람은 李承晩(이승만) 박사뿐이었습니다. ‘공산당과는 타협이 안 된다. 어차피 세계는 둘로 갈리는데, 미국 편에 줄을 서야 우리가 산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한 정읍 발언이 나왔을 때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그럼 분단되는 것 아니냐. 해방된 조국에 통일정부가 들어서야지, 각각 반 쪼가리 정부가 들어서면 비극이 온다’ 고 생각했습니다. 白凡(백범) 선생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포퓰리즘입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그렇게라도 안 하면 共産化(공산화)된다’는 생각에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건국으로 나간 것은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육당 같은 분을 해방된 조국에서 저렇게 하다니…”
 
학문의 巨人이었던 六堂 崔南善.
  ― 후일 육당의 제자가 되었는데, 어린 시절 春園(춘원) 이광수나 육당 최남선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까.
 
  “물론이죠. 광복 후 사춘기 때, 越北(월북)한 이태준·이기영·홍명희 선생의 작품들이나 이광수·김팔봉·박종화·김동인 같은 분들의 역사소설들을 많이 읽었어요. 특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읽으면서는 그 풍부한 우리말 어휘에 놀랐습니다. 후일 육당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홍명희 선생은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할 때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보면서 썼다고 합니다. 예컨대 망우리에서 양주까지의 거리를 언급할 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쓰지 않고 꼭 <동국여지승람>을 확인해 보면서 썼다는 것이죠.”
 
  ― 육당 선생이나 춘원 선생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어린 마음에도 육당 선생은 중후하고 남성적인 碩學(석학)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반면에 춘원 선생은 재주나 문장의 기교는 대단하지만, 육당 선생에 비하면 굳은 신념은 부족한 여성적인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춘원 선생도 <백팔번뇌> 후기에서 ‘육당 곁에 있으면 수줍은 처녀 같은 느낌이 든다’고 쓴 적이 있어요. 反民特委(반민특위)에 가서도 춘원 선생은 자기변명을 많이 했지. 육당 선생은 일절 말을 안 했고.”
 
  ― 우리 근대문화 형성기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육당 선생과 춘원 선생이 반민특위에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중학교 1학년 땐데, 잘 모르기는 해도 ‘표면에 나타난 사실 뒤에 가려져 있는 진실이 있을 텐데, 표면에 나타난 사실만 가지고 저렇게 사람을 지지고 볶으면 어떻게 하나. 저런 분들은 일반 대중보다 몇 발자국 앞서 가는 선구자들인데, 大鵬(대붕)의 마음을 燕雀(연작)이 어떻게 알랴’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건국과 친일파
 
仁村 金性洙. 일제시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이었다.
  ― 정말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때는 중학생이라도 지금보다는 많이 성숙하고 사회의식이 있을 때였어요. 아버지나 형님께서는 육당 선생이나 춘원 선생이 반민특위에 잡혀가는 사진을 신문에서 보면서 ‘대중들이 참 어리석다. 광복을 위해 애썼는데, 그 진실한 뜻은 모르고 표피적인 것만 가지고 저런다. 춘원은 몰라도 육당 같은 분을 해방된 조국에서 저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혀를 차셨는데, 자연 그 영향을 받은 것이겠죠.”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경성신탄주식회사 취체역을 하셨죠. 일제말 우리 집에는 呂運亨(여운형) 선생의 동생인 呂運弘(여운홍)씨 등이 드나들었어요. 그분들이 다녀가면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불평 비슷한 말을 하곤 했어요. 그에 대해 아버지께서 자세한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서는 일제말 애국지사들이 어려울 때 그분들에게 도움을 주셨던 것 같아요.”
 
  ― 홍 총장께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1950년대 중·후반에는 일제시대 고등문관시험 출신자들이 장·차관이나 여·야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자들이 軍(군)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당시 대학생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제 삼는 분위기는 없었습니까.
 
  “현대적 관리능력과 기술능력은 근대 국가의 두 수레바퀴 아닙니까? 국가 건국기에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런 능력을 배운 사람은 일제시대의 지식인밖에 없었어요.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귀국한 분들은 ‘애국심’은 있지만 배운 게 없었잖아요. 게다가 6·25를 겪으면서 공산주의와 싸워야 했어요. 따라서 건국기에는 일제 시대에 양성된 사람들을 쓰는 것이 양해가 됐다고 봅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戰後(전후) 복구는 지지부진한데 미국의 원조물자를 놓고 부정부패가 생겼어요. 일제 시대에 高文(고문) 패스했다는 것 하나 가지고 대한민국의 장·차관 자리를 독점하고 자기들끼리 이어가던 상황에 한계가 온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戰後(전후) 젊은 세대의 정의감이 폭발한 것이 4·19였습니다.”
 
  ― 그럼 4·19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을 전복한 5·16은 어떻게 보십니까.
 
  “민주당 정권도 본질적으로 자유당 정권과 같은 세대였어요. 다만 그 시절 소외세력이었을 뿐이죠. 그런데 이건 갈팡질팡 더 못하는 거야. 자유당 정권의 엘리트들이 전후 세대가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자기들 세상이 계속될 것으로 착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정권은 전쟁을 거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선진시스템을 익힌 청년장교들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간과했어요. 결국 ‘우리가 한번 해 보겠다’며 청년장교들이 일어난 것이 5·16이죠. 당시 나는 軍政(군정)에는 비판적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국정을 담당할 세력은 군대뿐’이라고 생각했어요. 趙芝薰(조지훈) 교수 등 동료 교수들과 그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죠.”
 
  홍일식 전 총장이 육당 최남선 선생의 문하에 들게 된 것은 대학시절 은사인 具滋均(구자균) 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具滋均 교수의 권유로 육당 문하에 들어가
 
  “대학교 1학년 2학기이던 1955년 어느 날 구자균 교수께서 부르셨어요. ‘신문을 봤더니 지금 육당 선생이 병환을 앓다가 요양 중이라고 한다. 그분은 한국 근현대 문학·종교·역사·학술·문화예술의 寶庫(보고)다. 그분 문하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고려대 창립50주년 기념논문집>과 <문리논집>, 구자균 선생의 <평민문학사>를 가지고 서울 종로구 묘동(종로3가 단성사 근처)에 있던 최남선 선생님 댁에 가서 인사를 올리고, 그때부터 육당 선생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2년여 동안 거의 매일같이 드나들었습니다.”
 
  홍 전 총장의 은사인 구자균 교수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 재직 시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르쳤고,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 교무처장으로서 고려대를 설립할 때의 실무책임자였다. 홍일식 전 총장은 일제시대에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나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경성제대는 李商在(이상재) 선생 등이 앞장서서 民立(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자 일제가 이를 막기 위해 설립한 것입니다. 후일 경성제대 1회 졸업식 때 총독부에서는 이상재 선생 등 민족지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많은 지사들이 ‘일제가 만든 학교 졸업식에는 가지 않겠다’고 참석을 거절했지만, 이상재 선생은 ‘우리가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지 않았으면 저들이 저 학교를 만들었겠나? 세우긴 저들이 세웠으되 우리의 대학이나 마찬가지’라면서 흔쾌히 졸업식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당시 경성제대는 일본인들까지 포함해서 秀才(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직장을 얻어 안정된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었어요. 그 유일한 예외가 조선어문학과였습니다. 우리 민족정신의 결정체인 조선어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조선어문학과는 일제시대에 민족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학과의 존재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 학과 출신은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일제시대에 조선어문학과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민족의식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趙潤濟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국문학자 趙潤濟. 일제시대 경성제국대에 조선어문학과가 생긴 것은 조윤제 선생 덕분이었다고 한다.
  홍일식 전 총장에 의하면 경성제대에 조선어문학과가 생긴 것은 국문학자인 趙潤濟(조윤제) 선생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조윤제 선생에게 직접 들은 얘기예요. 1926년 봄, 경성제대에 本科(본과)가 처음으로 생겨 그해에 豫科(예과) 2년을 마친 첫 입학생들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아직 본과에 학과가 생기기 전이어서, 본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어떤 학과를 지망한다고 하면 그 학과가 만들어지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조윤제 선생이 ‘조선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면접을 보던 일본인 교수는 ‘조선문학이라는 것이 따로 있겠느냐? 漢(한)문학을 하면 그중 한 부분이 조선문학 아니겠느냐?’면서 ‘일본문학이나 한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답니다. 조윤제 선생은 ‘앞으로 학부 3년(당시 본과는 3년이었음) 동안 나름대로 조선문학을 연구해 보고 그때 가서 조선에 독특한 문학이 없으면 조선에는 독자적인 문학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학문적 가치가 있다’면서 졸랐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조윤제 선생 한 사람을 위해 경성제대에 조선어문학과가 생긴 것입니다. 교수가 어디 있어요? 일본 동경제대에서 한문학을 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교수와 학생이 같이 공부하는 거죠. 고쿠라 신페이 등이 바로 그들이었어요. 이듬해에 학생이 하나 더 들어왔는데, 바로 李熙昇(이희승) 선생이었습니다. 그 다음해엔가 李崇寧(이숭녕) 선생이, 그리고 몇 년 뒤 7회 입학생으로 구자균 선생이 입학했다고 합니다.”
 
  다시 최남선 선생 얘기로 돌아가 홍 전 총장에게 “최남선 선생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하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古今東西를 종횡무진한 육당
 
학병으로 나가는 아들을 전송하는 어머니. 최근 발견된 일본측 비자료에 의하면 일제시대 일부 조선 지도층이 학병 출정을 권유하는 것은 군사기술 축척을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별로 배울 게 없었어요. 구자균 선생, 김형규 선생 등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몇몇 분이나 조지훈 선생 등을 제외하면, 실력 있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최남선 선생을 보니, 古今東西(고금동서)를 종횡무진하는데, ‘바로 이런 분을 碩學(석학)이라고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대해 얘기하는데, 기가 팍 죽어버리더군요. 그분을 역사학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율리시즈> 같은 소설이라면 나도 써 보고 싶다’고 그러시는데, 내가 <율리시즈>가 뭔지 아나? 그땐 <율리시즈> 번역판도 없을 때였어요.”
 
  ― 그때 최남선 선생 댁을 드나들던 분으로는 어떤 분들이 있었습니까.
 
  “시인 金冠植(김관식)씨, 梁柱東(양주동) 선생, 조용만 선생, 姜英勳(강영훈) 장군 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양주동 선생이 와서 ‘T.S 엘리어트를 번역하겠다’고 했어요. 양주동 선생이 가고 난 후, 육당 선생은 ‘재주는 제일인데, 연구는 하지 않고 엘리어트 번역이나 하겠다고 저러고 다니니 재주가 아깝다’면서 ‘여러 사람을 가르쳤지만, 无涯(무애·양주동)가 가장 재주가 있어’라고 하시더군요.”
 
  ― 최남선 선생에게 일제말 學兵(학병) 권유 강연 등 친일행적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있죠. 어린 마음에 당돌하게 여쭈어 보았더니, 의외로 ‘그런 강연을 했지. 그건 내 진심이었어’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육당의 學兵 권유 강연
 
   홍 전 총장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육당 선생은 ‘군사학은 근대국가의 핵심 기술이다.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후 다른 기술은 그럭저럭 배울 수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은 군인으로 뽑지 않아 근대 군사기술은 배울 수 없었다. 이제 그 기회가 온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때문에 일제가 도쿄(東京)에 가서 조선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병 권유 강연을 요청 받았을 때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홍 전 총장은 “당시 육당의 도쿄 학병 유세를 직접 들었던 金鵬九(김붕구) 교수가 그때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고 했다. 다음은 김붕구 교수의 글이다.
 
  <육당의 경우, 동경 간다(神田)의 어느 여관방, 학병이라는 문제에 부딪혀 기로에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애타는 눈동자들에 둘러싸여 熱(열)에 뜬 수난의 고행자 같은 춘원 옆에서, 일제 관헌과 입회 교수들을 뒤에 앉히고 그는 거침없이 吐 (토)하는 것이었다.
 
  “온 세계의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 오직 조선 청년만 편히 앉아 있으리라고 둬둘 성싶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된다면 전쟁 후에 어떤 발언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비단 일본에 충성을 하기 위해서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총 쏘는 법을 배워 두란 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말, 혹은 일종의 궤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명료한 말이며, 그의 진의를 충분히 전달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당시 日人(일인) 입회 교수도 탄복했지만, 그때의 최후 발악적인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는 놀라울 만큼 대담하고 솔직한 표현이었다.> (김붕구, <한국인의 지식인상> 중에서)
 
  김붕구 교수의 글은 만주건국대학 시절 육당의 제자였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회고와도 일맥상통한다.
 
  <초급 지휘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병 입대가 논의되던 어느 날, 우리 건국대생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육당 최남선 선생의 고견을 듣기로 했다. 선생 말씀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지금 서울에서 윤치호 선생 같은 분은 징병을 반대하고 있는데, 나는 찬성이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의 자치를 위해, 나아가서는 독립을 위해 가장 중요하달 수 있는 무력을 양성할 호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민족의 실력 배양 중 가장 중요한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무력을 기를 수 있는 이 기회를 우리는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학도병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군 간부 양성은 一朝一夕(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일본에 의해 징집된 우리 병정들을 조직화할 수 있는 사람은 훈련 받은 장교들이어야 하는데, 그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천부의 기회인 줄로 안다. 다만 자네들에게 말하기는 안되었지만 출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을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희생된 전우의 몫까지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일해 주리라 믿는다.”
 
  육당 선생의 말씀은 건국대학 한국인 학생들의 학병 문제에 대한 기본 지침이 되었다. 우리는 전원 학병 입대를 지원키로 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장교로서의 전략전술을 습득하기 위함이었다.> <강영훈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자기변명이 없었던 육당
 
2005년 3월 28일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잔재 청산위원회’는 고려대 출신 친일인사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홍일식 전 총장은 “수카르노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로 쳐들어오자 그들과 제휴해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무장시키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옛 종주국인 네덜란드가 돌아오자 수카르노는 그렇게 훈련시킨 군대로 게릴라전을 벌여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육당이 수카르노의 전략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도쿄 학병 권유 강연에 대한 육당의 얘기를 들은 홍일식 전 총장은 육당에게 “춘원은 <나의 고백> 등으로 해명을 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도 책을 내면 어떻겠습니까? 선생님이 口述(구술)하시면 제가 받아 적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육당 선생은 ‘그럴 필요 없네. 구차스럽게 자기변명을 하나. 세월이 지나면 다 밝혀질 것을…’이라고 하시더군요. 이게 육당과 춘원의 차이였어요.”
 
  홍일식 전 총장이 평생 봉직했던 고려대는 舊韓末(구한말)이던 1905년 이용익 선생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가 그 前身(전신)이다. 그 후 학교가 어려워지자 1932년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 선생이 인수해 오늘날의 고려대로 키웠다.
 
  일제시대에 민족지 동아일보를 설립했고, 보성전문을 통해 인재를 키웠으며, 민족기업인 경성방직도 일으켰던 인촌은 1980년대 이후 친일파로 몰려 뒤늦게 욕을 보았다. 1980년대에는 운동권 학생들이 고려대 교정에 있는 인촌의 동상을 철거하려 했다. 지난 2005년에는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민족고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 등에서 그를 친일파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다(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 장덕수 전 한민당 총무 등도 함께 친일파로 지목됐다). 인촌이 친일파로 몰린 것은 일제말 ‘학도여 聖戰(성전)에 나가라’, ‘징병이 닥쳐온다’ 등의 글을 매일신보에 기고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한 견해를 묻자 홍 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서재필, “어미 닭이 병아리 품듯”
 
  “徐載弼(서재필) 선생은 해방 후 귀국해서 한 강연에서 ‘우리 같이 해외로 망명했던 사람들은 고생하기는 했지만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 있는 애국지사들은 어미 닭이 병아리 품듯 이 국민들을 품고 앉아서 삼복더위에도 활갯짓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이 고생이 컸다’면서 인촌 같은 분들을 평가했어요.
 
  해방 직후에 좌·우익이 갈려 있는 흠 없는 흠 끄집어내면서 서로 헐뜯을 때, 진짜 친일한 사람이면 그때 다 녹아났을 겁니다. 당시에는 일제 시대를 같이 살았던 좌익들도 함부로 사람을 친일파로 몰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당시의 상황 논리는 보지 않고 언론 출판물에 나온 것을 유일한 증거로 들이대면서 친일파로 몰고 있어요.”
 
  홍 전 총장은 “당시 국내 민족지사들이 어떤 분들이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일본 정보기관에서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 정보요원으로 총독정치를 막후에서 움직였던 아이바 기요시(上場 淸)라는 사람의 얘기를 꺼냈다.
 
  “아이바 기요시가 후일 외무대신을 지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있어요. 여기서 아이바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조선민족의 일본 민족관을 기탄없이 말하면, ’일본 민족은 이미 발전의 막바지에 도달하여 이제는 내리막길에 서 있다. 때문에 조선민족이 오늘날 서둘러야 할 일은 일본 민족이 아직 크게 몰락하기 전에 일본의 문화·기술·富力(부력)을 착취함에 황국신민을 가장하여 이루도록 하고, 단순 천박한 일본 민족의 환심을 사면서 未久(미구)에 다가올 시대에 처할 조선 민족의 부강한 터전으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건 주로 최남선을 두고 한 말이긴 하지만, 당시 민족지사들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거예요. 아이바 같은 사람도 알았던 것을 오늘날 우리가 모른다면 바보이거나, 아니면 다른 惡意(악의)가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 (아이바 기요시에 대해서는 後述)
 
 
  “仁村의 學兵 권유 글은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들이 쓴 것”
 
春園 李光洙
  ― 하지만 인촌 선생의 경우, 일제말 학병이나 징병에 응할 것을 권유하는 글을 쓴 것이 매일신문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인촌의 그 글을 보고 내가 유진오 선생에게 가서 ‘선생님, 인촌 선생이 학병 권유 글을 썼다고 좌파에서 난리를 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유진오 선생은 픽 웃으면서 ‘인촌은 평생 글 한 줄 안 썼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야. 인촌의 이름으로 나간 글은 전부 내가 썼어. 그런데 내가 그런 글을 매일신문에 쓴 적이 없어’라고 하더군요. ‘그럼 누가 썼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조용만에게 물어보게’라고 해요.”
 
  후일 고려대 영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홍일식 전 총장을 가르쳤던 조용만 교수는 일제말 매일신문 학예부장을 지낸 인물. 조용만 교수를 찾아간 홍 전 총장은 “선생님, 인촌 선생이 매일신문에 쓴 학병 권유 글은 누가 쓴 것입니까? 혹시 선생님이 쓴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 조용만 교수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내가 쓴 것은 아냐’라고 하셨어요. ‘玄民(현민·유진오) 선생님께서 선생님께 여쭈어 보라고 하시던데요’라고 했더니, 이러세요.
 
  ‘총독부에서 ‘아무개 글을 실으라’고 지시가 내려오면 춘원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학예부 기자 네 명이 돌아가면서 대신 글을 써서 실었어. 인촌 선생 글도 아마 그때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썼을 거야’ 이러시더군요.”
 
  홍 전 총장은 “어떻게 보면 춘원이 순진해서 그랬을 것”이라면서, 조용만 교수에게 들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일제말 어느 날 춘원이 전투모에 국민복, 각반 차림으로 경성일보 사장실을 찾아왔대요. 일본인 사장이 춘원이 왔다고 학예부장이던 조용만 교수를 사장실로 불렀는데, 12시가 되자 東方遙拜(동방요배 ;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것)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답니다. 사실 당시 실외에서는 동방요배를 했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실내에서는 잘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일본인 사장도 가만히 있는데, 춘원이 벌떡 일어나서 동방요배를 하더랍니다. 할 수 없이 사장도 일어나 동방요배를 했대요. 춘원이 가고 난 후 사장이 조용만 부장에게 ‘저 사람 왜 그래? 미쳤나’라고 하더랍니다. 그만큼 춘원은 고지식했던 거죠.”
 
 
  島山을 도운 仁村
 
  홍 전 총장은 “인촌의 애국하신 얘기는 다 아는 얘기 아니냐”면서 이런 일화를 얘기해 줬다.
 
  “독립운동자금을 얻기 위해 상해임시정부 등에서 사람이 오면, 인촌 선생은 사랑에 앉혀 놓고 금고문을 열어 둔 채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돈을 가지고 국경을 넘다가 일본 경찰에 잡히더라도, 인촌은 ‘나는 그 돈을 도둑맞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거죠. 국내에서 동아일보·보성전문·경성방직을 해야 하는 인촌으로서는 일제 하의 현행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그런 수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홍 전 총장은 인촌이 島山(도산) 안창호 선생을 도운 얘기도 했다. 아래 내용은 홍 전 총장의 말을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1937년 도산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됐다. 일제는 도산 선생이 배에 腹水(복수)가 차서 다 죽게 되자 옥사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내보냈던 것이다. 도산 선생은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가족들이 모두 미국에 있어 국내에는 연고자가 없었다.
 
  당시 일본군 中佐(중좌)이던 李應俊(이응준) 장군(후일 육군참모총장 등 역임) 부인이 도산 선생을 돕기 위해 나섰다. 이응준 장군의 부인은 도산의 젊은 시절 동지로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李甲(이갑) 선생의 따님으로 어렸을 때 도산 선생의 귀여움을 받았다.
 
  이응준 장군 부인은 당시 조선사람 가운데 가장 부자로 꼽히던 朴興植(박흥식·화신 창업주)을 찾아가 병원비 등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박흥식은 “내가 어떻게 돈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不逞鮮人(불령선인)을 도왔다가는 어떻게 장사를 하겠습니까? 이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라며 거절했다.
 
  이응준 장군 부인은 그 다음으로 조선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은 현금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광산왕 崔昌學(최창학)을 찾아갔다. 최창학은 “여기 왔다 갔다는 얘기도 하지 말라”며 내쫓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찾아간 사람이 인촌 선생이었다. 인촌은 가만히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 보세요. 지금 돈을 드리고 싶지만, 부인은 현역 고급장교의 부인 아닙니까? 말썽이 생기면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내가 내일 병원으로 도산 선생을 찾아뵙겠습니다.”
 
  다음날 오후 이응준 장군 부인이 병원에 갔더니, 도산 선생은 “인촌이 다녀갔다”면서 베개 밑에서 돈봉투를 꺼내 보여주었다. 봉투에는 1500원이 들어 있었다. 도산은 그 돈으로 석 달 동안의 입원비와 간병인 월급은 물론, 죽기 전에 춘원과 함께 차를 대절해서 개성-해주-사리원-평양-함경도-통천-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여행을 했을 때의 여행경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다.>
 
육당 기념비 제막식을 마치고.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洪一植 전 총장. 洪 전 총장은 대학시절 은사인 구자균 교수의 권유로 六堂의 마지막 제자가 됐다.
 
  仁村 동상 철거 소동
 
  홍 전 총장은 “이런 어른을 이제 와서 친일파로 매도하다니 말이 되나? 인촌을 친일파로 모는 이들이 진실을 모를 리가 없다. 金日成(김일성) 혼자서 독립운동을 하고 민족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친일파로 모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1980년대 중반 운동권 학생들이 인촌 선생 동상을 철거한다고 했을 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까?
 
  “趙誠宇(조성우·現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가 와서 ‘인촌 동상을 헐어낸다’고 하기에 ‘누가 주동이냐’고 했더니, 朴啓東(박계동·現 국회 사무총장)이래요. 조성우에게 ‘박계동이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둘이 수유리 우리 집으로 왔어요. ‘너희가 어떤 사회운동을 해도 좋은데, 인촌 동상을 헐어내다니 말이 되느냐?’고 야단을 쳤어요. 그랬더니 박계동이 ‘선생님, 지금 혁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데 잔디가 상할 수 있는 거지, 고려대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 당시 운동권들을 잘 아시는가 보군요.
 
  “내가 청년문제연구회 등 당시 문제 서클들을 지도했어요. 金相浹(김상협) 총장이 골치 아픈 애들은 전부 내게 떠맡겼어요. 丁世均(정세균·민주당 대표), 李相洙(이상수·전 노동부 장관)는 얌전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편이었죠. 박계동이 제일 극렬했는데, 난 그가 지금 한나라당에 있는 게 이상해요.”
 
  ― 인촌 선생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으십니까?
 
  “어렸을 때 안암동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고려대(당시 보성전문) 교정은 내 놀이터였어요.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어요. 어떤 분이 본관 앞 잔디밭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고 있더군요. 아버지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시다. 인사 드려라’라고 하셨어요. 그분이 바로 인촌 선생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교장이던 인촌 선생은 교수들이 퇴근한 후 학교 구석구석을 돌면서 잔디에서 잡초를 뽑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닭이 1000마리면 그중에 鳳(봉)이 한 마리라는데, 이놈들 이렇게 가르치지만, 이중에서 장차 나라 이끌고 민족 이끌어 갈 놈이 몇 놈은 나와 주어야 할 텐데…. 이거 왜 자라라는 잔디는 안 자라고 이렇게 잡초만 자라는지….”
 
  홍 전 총장은 “인간의 역사에서는 표면에 나타나는 사실보다 오히려 그 사실 뒤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 더 중요한 법”이라면서 “육당 선생이나 인촌 선생을 둘러싼 친일 시비에서도 표면에 나타난 사실 뒤에 있는 진실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친일파 청산 문제가 다시 사회적 이슈가 되는 데는 林鍾國(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큰 역할을 했다. 홍 전 총장은 임종국 선생과 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육당이 창간한 잡지들.
  “그는 나보다 1년인가 위였어요. 정외과를 다녔는데 성격이 데카당스하달까.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 뜻이 있어 고대문학회를 같이 창설했어요.”
 
  ― <친일문학론>은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임종국 선생은 늘 ‘형무소에서 8·15 해방을 맞은 작가가 없다. 당시의 상황 논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문학의 자기반성이란 의미에서 <친일문학론>을 써야겠다’고 말했어요. 나중에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초기에 그는 문학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친일문학론>을 모색한 것이었지, 지금 돌아가는 것처럼 당시 전체 지식인을 몽땅 부정하고 대신 김일성을 내세우겠다는 것은 아니었어요.”
 
  홍 전 총장은 육당기념사업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는 ‘友堂 李會榮(우당 이회영)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李始榮(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형으로 한일합방 후 오늘날 화폐가치로 수백억 원이 넘는 家産(가산)을 정리해 일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우당은 말년에는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日警(일경)에 체포돼 고문 끝에 세상을 떴다.
 
  ― 우당기념사업회장은 어떻게 맡게 됐습니까.
 
  “원래 우리 집안과 우당 선생 집안이 世交(세교)가 있어요. 우당 선생의 손자인 李鍾贊(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오래 전부터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달라고 했어요. 그가 공직에 있는 동안은 사양하다가 2003년부터 회장직을 맡게 됐습니다.”
 
 
  “절묘한 역할분담이 대한민국 성취의 근원”
 
1969년 철거 당시의 조선광문회 건물(왼쪽).
  ― 국내에서 친일 혐의를 쓰면서까지 문화진흥과 인재양성을 위해 헌신했던 육당이나 인촌을 기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타협적 무장투쟁을 했던 우당 선생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계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어느 쪽이든 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나는 그 분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할분담’을 했다고 봅니다. 해외에 망명한 분들은 무장 투쟁 등을 했고, 국내에 계신 분들은 문화·교육·언론 활동을 통해 실력양성에 盡力(진력)했어요. 육당 선생이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전통문화의 연구와 계승, 신문물의 보급 등에 나선 것이 나라가 망하던 1910년 4월이었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그해 11월이었어요. 徐載弼(서재필) 선생은 생전에 ‘나라를 되찾으면 우당 선생 댁 재산과 육당 선생 댁 재산은 나라에서 보상해 줘야 한다’고 했대요.”
 
  홍 전 총장은 “우리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 간의 절묘한 ‘역할분담’ 덕분”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장 항쟁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전 민족이 무장 항쟁에 올인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은 나라를 잃은 지 60년이 되도록 나라를 찾지 못하고 있고, 나라를 되찾는다 해도 전망이 밝지 않아요. 독립 후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는 한편으로 나라 안에서는 인재를 기르고 민족문화를 보존하는 등 나라 안팎에서 역할분담을 했던 덕분에 오늘과 같은 빛나는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건국 60주년이 됐으니 우리는 친일의 어두운 굴레를 벗어던지고 보다 떳떳하고 따스한 시각으로 우리 근대사를 다시 봐야 합니다.”
 
  사진 : 이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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