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원에 사는 옛 부하 찾아갔지만, 그의 배신으로 소련 비밀경찰(게페우)에 被逮
⊙ 철원 게페우에서 사형 선고 받고 처형 직전 함흥으로 이송되다가 열차에서 뛰어내려 탈출
⊙ 어릴 때 함께 자란 외사촌, 보안서장 되어 돈 요구… 거절하자 체포돼
⊙ 한겨울에 옷 입은 채로 우물에 던져지는 등 혹독한 고문받아
⊙ 越南 후 가족들 모두 잡혀간 후 행방불명
[편집자 주]
《월간조선》은 김창룡(金昌龍·1916~1956년) 전 육군특무부대장의 구술(口述) 회고록을 입수, 지난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이 구술 회고록은 1954~1955년경 김창룡 특무대장이 당시 특무대에서 복무하던 대학 영문학과 및 국문학과 출신 부대원들에게 구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월호와 2월호에서는 일제시대 만주 하이라얼에서 일본 특무기관 요원으로 소련·중국공산당 간첩망을 적발한 이야기와 해방 후 귀국하다가 소련군의 만행을 목격한 이야기를 실었다. 큰 제목은 원래의 필자가, 작은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글의 줄거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글을 약간 줄였음을 밝혀둔다.
⊙ 철원 게페우에서 사형 선고 받고 처형 직전 함흥으로 이송되다가 열차에서 뛰어내려 탈출
⊙ 어릴 때 함께 자란 외사촌, 보안서장 되어 돈 요구… 거절하자 체포돼
⊙ 한겨울에 옷 입은 채로 우물에 던져지는 등 혹독한 고문받아
⊙ 越南 후 가족들 모두 잡혀간 후 행방불명
[편집자 주]
《월간조선》은 김창룡(金昌龍·1916~1956년) 전 육군특무부대장의 구술(口述) 회고록을 입수, 지난 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다. 이 구술 회고록은 1954~1955년경 김창룡 특무대장이 당시 특무대에서 복무하던 대학 영문학과 및 국문학과 출신 부대원들에게 구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월호와 2월호에서는 일제시대 만주 하이라얼에서 일본 특무기관 요원으로 소련·중국공산당 간첩망을 적발한 이야기와 해방 후 귀국하다가 소련군의 만행을 목격한 이야기를 실었다. 큰 제목은 원래의 필자가, 작은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글의 줄거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글을 약간 줄였음을 밝혀둔다.
철원에서 被檢
나는 울분에 잠긴 채 나의 고향인 영흥(永興)에 내렸다. 오래간만에 발을 디디는 곳이었다. 흙빛이 부드럽고 물빛마저 꽃잎처럼 연해 보이는 내 고향! 일찍이 나를 길러내 준 이 고향 땅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것은 나에게 있어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흥역에서 백여 리 떨어져 있는 시골 고향으로 찾아갔다. 나무뿌리를 뜯어 먹던 뒷산과 헤엄치며 놀던 동네 앞 못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같이 놀던 어릴 때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그들 품 안에서 울어보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십 년! 십 년 동안 나는 고향을 등지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있었다. 그동안 소식도 변변히 보내지 못했다. 늙은 부모들은 나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무 소식도 없이 꿈처럼 나타난다면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
10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
산과 들은 예나 다름이 없지만 어딘가 달라진 듯한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나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불렀다. 첫마디에 어머니가 ○○(판독 곤란-기자 주)을 하고 나왔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이게 누구냐?” 하고 어머니는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머리는 이미 백발로 변하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 그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기에 이렇게도 머리가 은빛으로 변하고 말았을까?
나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동시 앞으로는 이 늙은 어머니 옆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이렇게 늙으셨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늙으셨을까? 나는 “아버지는 어디 나가셨어요?”라고 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벌써 돌아가셨다. 넌 그것도 몰랐지?” 하고 눈을 슴벅슴벅했다. 그리운 아들을 만나는 기쁨이 돌아가신 남편 생각을 하게 만든 모양이다.
즐거움을 같이 나누지 못하고 돌아간 남편을 생각할 때 그의 눈에서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인가?
“뭐요?”
나는 그저 놀랄 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해방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큰 죄인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갔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나는 목을 놓아 울면서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온 감회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며칠 동안을 집안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서 마음이 안정되자 그때는 무슨 일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조국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철원의 옛 부하를 찾아가다
그러나 고향에는 의논할 친구도 없었다. 나는 어디로 또 떠나야 했다. 나는 철원(鐵原)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북만 당시에 나의 부하로 일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김윤원(金允元·당시 31세)이었다. 그는 나의 부하였던 만큼 나와 똑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공산 스파이를 박멸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역시 동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철원으로 가기로 했다.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철원읍 관전리(官田里) 김윤원을 찾아간 것은 그날 밤이 이슥할 때였다. 김은 반가이 맞아주었다. 하이라루(하이라얼-편집자 주)적십자병원에서 환자들의 시중을 들던 그의 어머니도 나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들의 고마운 정에 감격하여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취해버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들은 나에게 피곤할 것이니 일찍 자라고 했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려니 하고 고맙게 여기기는 했으나 밤을 새워가면서라도 이야기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억지로 눌러 잠재우려 하는 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 역시 피곤했던 몸이라 자리에 눕기가 무섭게 그만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새벽 두 시경 나는 뜻하지 않은 음성에 놀라 깨고야 말았다. 내무서원 3명과 소련 군인 한 명이 피곤하게 잠든 나를 깨우고 있던 것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김윤원 이외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철원이었다. 그것도 밤늦게 가서 겨우 첫잠에 들었는데 내무서원들이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을 것인가? 어쨌든 나는 내무서에 붙들려가는 몸이 되고야 말았다.
사형 선고와 탈출
보안대원과 소련 군인은 나를 묶어가지고 철원 게페우(GPU·소련의 비밀경찰인 국가정치보위부. KGB의 전신-편집자 주) 사령부로 끌고 갔다. 철원 게페우 사령부는 전 철원경찰서였다. 나는 이곳 유치장 3호 감방에 갇히고야 말았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내가 철원에 도착했다는 것은 김윤원밖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고 나를 잡으러 왔을까? 김윤원은 나의 부하였을 뿐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설마 그가 나를 밀고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치장에 들어간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취조를 받으러 끌려나갔을 때 취조실 한가운데 김윤원과 그의 어머니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붙잡혔으니까 나를 재워준 죄로 그들도 끌려온 것이라고 나는 미안해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앞으로 걸어오던 김윤원이가 구둣발로 죽어라 나를 걷어차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는 말도 못 하고 그저 놀란 표정만 지었다. 그때 김윤원이가 “나쁜 놈! 이제 맛 좀 봐라” 하고 또다시 나를 찼다. 나는 김윤원이의 고발로 내가 붙잡힌 것을 알았다. 김윤원이가 나를 차고 있는 사이에 보안대원 앞에 섰던 그의 어머니는 “이놈! 너는 소만국경에서 애국자를 몇 명이나 죽였지? 우리 공산당원을 몇 명이나 체포하고 또 몇 명이나 죽였는지 똑바로 고백하라” 하고 호령하였다.
세상이 바뀌면 인정도 바뀌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가 있었다. 내 밑에 있었다고는 해도 나와 똑같은 일을 해온 김윤원이다.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면 그에게도 죄가 있다. 같은 죄를 지은 사람끼리 누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고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보다도 한국 사람이 별로 없던 하이라루에서 만나기만 하면 친척처럼 서로 반가워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원수로 고발을 하다니….
참으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역시 인정(人情)이라는 것을 인간의 미덕(美德)이라 생각하는 나의 착각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정이라는 것이 없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친척도 친구도 함부로 팔아먹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죽이면 그 죽인 사람은 그만큼 사상이 두텁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해서 누구나 눈이 빨개갖고 자기 가까운 사람들의 흠집을 찾아냈다.
김윤원이는 자기 죄상을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원수인 내가 자기 집을 찾아갔을 때 김윤원은 자기의 공적표가 하나 늘 것을 생각하고 나를 반가워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혼자서 후회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 잔인한 면을 채 몰랐던 것을 후회했다. 이제는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밥을 요강에 담아줘
나는 연일 취조를 받았다. 취조는 소련 군인이 담당했지만 고문은 통역관인 한국 사람이 맡고 있었다. 통역을 하여 한마디 묻고는 한 번씩 때리는 그 통역관은 소련 군인보다도 더 무서운 눈을 뜨고 있었다. 민족적인 점에서 소련 군인보다 조금이나마 가까워야 할 한국 사람이 나를 더 미워하고 더 때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래야만 승진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치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붙들려 와 있었다. 대부분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3호 감방에도 세 사람의 애국청년이 있었다. 그리고 철원경찰서장이었다는 일본인 한 명과 관리 노릇 하던 일본인 한 명이 나와 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공산주의자의 눈에 비칠 때 모두가 원수 같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취급하는 태도가 너무나 야만적이라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주워 모았는지는 모르나 가정에서 쓰던 요강을 가져다가 그 속에 밥을 담아 주는 데는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으기도 용하게 모아다 놓았다. 오줌을 누는 변기에 밥을 담아 준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콩밥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할지라도 변기 속의 밥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흘쯤 지나가자 변기에 주는 밥이라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살아야만 인류의 적인 공산주의와 싸울 수도 있었다.
게페우에서는 내게 사형을 언도했다. 재판이라는 것도 없는 사형 언도였다. 취조관이 한마디의 말로 내린 선고였다. 그렇다고 해서 불복 공소할 수도 없었다. 죽인다고 하면 죽는 도리밖에 없었다. 참으로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놈들에게 맥없이 죽고 말 것 같지는 않았다. 그새 무슨 수가 생기고야 말 것만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대로 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형 직전의 이송 명령
11월 중순경이었다. 밥을 나르는 어떤 경죄수(輕罪囚)로부터 내일 오후에 내가 사형 집행을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형장소가 전 철원신사 앞 광장이라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다음 날 정오가 되자 나는 드디어 끌려나갔다. 소지품을 전부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나와 함께 일본인 두 사람도 끌려나왔다. 사형장으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형장에 가는 사람에게 소지품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유치장에서 나와 게페우 앞으로 가니 사형 집행을 구경 나온 철원 시민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남은 죽는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구경거리가 되어 이렇게 모였을까? 인심이 너무도 잔인하여 놀랐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할 때 사람 죽이는 것을 보고 싶어 나온 사람보다도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나온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임으로써 공포 관념을 넣으려는 공산주의자의 야만적 정책 밑에서는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안 나올 수 없는 것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사형장으로 나가려고 할 즈음 소련 군인 장교 한 명이 나와서 사형을 중지하고 함흥 게페우 사령부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함흥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사형이 감형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살길이 트인 것 같은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라루 시대에 내가 한 일과 그리고 그 당시의 소만국경 정세를 알기 위하여 함흥으로 이송시키는 것이리라.
함흥으로 가는 길
두 일본인에게도 나와 함께 이송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의 총살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 사이로 철원 정거장을 향해 걸어갔다. 군중은 왜 죽이지 않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군중 맨 앞에 김윤원과 그의 어머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도 내가 사형받지 않고 끌려가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죽으면 자기의 공적이 그만큼 높아질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상이 감추어질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아무런 항거도 없이 정거장에 이르러 화물차 속으로 들어갔다. 일본인 두 명과 내가 화물차에 오르자 그들은 밖에서 입구를 막고 못을 박았다. 탈출을 방지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안대원과 수송책임자인 소련 군인은 창살을 통하여 바라다볼 수 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엄중한 경계를 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속으로 탈출을 생각했다. 함흥으로 이송한다는 것은 조사를 더 엄중히 하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 내 죄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탈출하지 않으면 나는 영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탄 화물차는 말을 수송하던 화물차였다. 말똥과 말 터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벽 위에 있는 철창이 기차가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 소리를 냈다. 밖에서 못을 박았는데 웬일일까 하고 유심히 바라보니 못이 박혀 있지 않았다. 내가 탈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놈들이 나중에라도 못을 박을 것 같은 생각에 나는 화물차 밑바닥에 있는 옥수수 껍질을 집어서 철창의 빈틈에 끼웠다. 그러면 기차가 움직인다 해도 창문이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민활하게 놈들이 보지 못하는 새 그 일을 했다.
기차는 어느덧 고원(高原)을 지났다. 나의 고향인 영흥도 지나 함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영흥 교외에 흐르고 있는 영흥강을 바라볼 때 나는 여기서 탈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과 가까운 곳이어서 고향을 그리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철창 옆으로 다가서는 순간 감시원이 “왜 일어서?” 하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내 고향 앞을 지나기 때문에 한 번 보기라도 하고 싶었다는 말을 꾸며대고는 도로 앉았다. 감시원들은 안심했다는 듯이 그 뒤로는 나를 보지 않았다.
열차에서 뛰어내리다
어느덧 흥상역(興上驛)에 다다랐다. 함흥 못 미쳐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다음 기차가 멎는 곳은 내가 한 번 더 고문을 받고 사형을 집행당할 곳이었다. 나는 이곳이 내가 탈출할 수 있는 최후의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탈출을 못 한다면 나는 영영 죽고 마는 몸이 된다.
나는 이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의 모든 신경을 탈출에 기울였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기차는 속력을 더욱 높여 달렸다. 함흥에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극도로 초조한 나머지 감시원들이 보건 말건 뛰쳐 내릴까도 생각하고 있을 때 감시원들이 하차를 준비하라고 했다. 같이 탔던 일본인들은 얼굴이 파래지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나는 하차 준비를 하는 척하고 일어섰다. 처음이고 또 마지막인 기회였다. 일어서자마자 나는 철창문에 끼웠던 옥수숫대를 잡아 빼고 문을 번개처럼 열었다. 동시에 몸을 던져 질주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어떻게 어떤 곳에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몸이 얼얼한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만 알았다. 몹시 다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차역에서 쏘는 총소리에 나는 한시라도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산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기차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르러서야 왼쪽 눈 아래 뼈가 상했고 거기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알았다. 손발 할 것 없이 피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는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탈출한 이상 한시바삐 남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 나는 밥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하고 걸었다. 출혈을 하고 밥을 못 먹은 데다가 사흘 동안을 걸으니 피곤이야 이루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흘이 지난 날 어떤 농부가 산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사흘 동안에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농부에게 먹을 것이라도 부탁하고 싶은 생각에 그 사람을 불렀지만 농부는 나를 보자 도리어 기겁을 하고 도망질쳤다. 나는 악몽에서 깬 것처럼 다시 산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越南 결심
어디를 어떻게 돌았는지 나흘이 지났을 때야 나의 고향인 영흥 근처에 이르렀다. 마장(馬場)이라는 조그마한 부락이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굶어서라도 죽을 것만 같아 부락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피란민으로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기차 위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는데 영흥까지 보내만 주면 돈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젊은 농부 한 사람이 친절하게 달구지를 준비해주었다. 나는 달구지 위에 누워 이불을 쓰고는 환자로 가장한 뒤 우선 영흥읍에 있는 외사촌댁을 찾아갔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밥을 먹었고 상처를 씻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머무를 수가 없었기에 어머니한테 기별하여 달구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 날은 형님(창헌·昌憲)이 가지고 온 달구지에 누워 이번에는 시체로 가장했다.
집에 이르니 마음이 턱 놓였다. 그러나 내 집이라고 해도 공산치하의 세상이다.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도착한 날부터 창고에서 살았다. 어머니만이 몰래 들락날락하며 밥을 날라다 주었고 또 나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이십여 일이 지나고 나니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그러나 얼굴에 입은 상처는 커다란 흠집을 남기고야 말았다.
상처가 낫자 나는 북한이 나의 살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거기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정체가 드러나면 체포될 것이 틀림없었다. 체포만 되면 사형이었다.
나는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했다.
두 번째의 사형 선고
상처가 거의 아물어 내일쯤이면 이남으로 출발하려고 준비하던 날이었다. 형수가 이제 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니까 떡이라도 해 먹자고 했다. 시골에서는 떡이 제일 좋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떡방아를 찧으러 갔던 형수가 무슨 이야기 끝엔지 시동생 되는 내가 이남으로 떠나기 때문에 떡을 한다고 동네 아낙네에게 발설을 했던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떡이 화근이 되었다. 형수의 말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보안서장으로부터 글발이 왔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돈 5만원만 보내라는 것이었다. 협박장 비슷했지만 결국 돈이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는 분한 생각이 들어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구두로 돈이 없다고 거절해버렸다. 보안서장이라는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분할 것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있는 대로 주어 무사하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보안서장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의 외조카 김영조(金永助)였다.
김은 외조카라 하지만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가 되었을 때 우리 집에서는 그를 데려다가 자식처럼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그는 나와 같이 소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같이 해왔다. 내가 만주에서 나온 직후에는 몇 번이나 만나 “공산주의를 타도해야 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공산주의를 없애야 해” 하고 손을 잡고 일하자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보안서장이 되었지만 보안서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리 나를 협박하여 돈을 먹으려고 할 수가 있는가?
세상이 아무리 흉악하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분한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김영조를 찾아가서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나를 협박하느냐고 힐난을 하고 싶기도 했으나, 내일이면 떠날 것이니 참자 하는 마음에 이를 악물고 참아 버텼다.
어머니가 가져온 음식 창살에 매달고 놀려
그러고 다음 날 새벽 정작 출발을 하려고 할 때였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보안대원들이 나의 집을 포위하고 들어와서는 나를 체포하여 보안서로 끌고 갔다. 나를 체포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의 외사촌인 김영조였다.
끌려가기는 하면서도 나는 분함을 참지 못했다. 돈을 달라고 했다가 돈을 주지 않으니까 이제는 체포를 하고 만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불측한 놈이 있을 수 있는가? 참으로 이가 갈렸다.
그래도 할 수가 없었다. 끄는 대로 끌려가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때린다고 하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놈들에게 고분고분할 수는 없었다. 김영조를 생각해도 그랬고 소위 취조관이란 작자들을 생각해도 그랬다. 취조관이란 자는 8·15 이전까지 여관 사환으로 있던 김부서란 자였다. 그야말로 국문도 모르는 자가 그동안 배운 계급이니 투쟁이니 반동이니 하며 나를 고문하는 데는 어이가 없어서 입도 안 벌어졌다. 도리어 악이 솟구쳐 “너희 같은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될 게 뭐냐? 망했다, 망했어!”라고 고함을 질러주었다.
그랬더니 놈들은 화를 내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무리매였다. 칠팔 명이 달려들어 죽어라 하고 때렸다.
나는 그날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유치장에 누워 있었다. 찬 바람이 휙휙 날리는 유치장이었다. 마루 사이로까지 찬바람이 올라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버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웅크리고 밤을 새울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옷과 음식을 차입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외사촌인 보안서장은 그 차입도 들여주지 않았다. 그 대신 어머니가 가지고 오신 음식을 창살에 매어 달고 “네 어머니가 가져온 음식이다. 구경이나 해라!” 하고 나를 놀렸다. 먹이지는 않고 구경만 시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고문을 하고 두드리기를 한다 해도 먹일 것은 먹여야 하지 않는가? 치가 떨렸다. 사람을 원숭이처럼 놀리는 외사촌이 죽이고 싶게 미웠다.
정월 초하루에도 고문
일주일 후에는 나를 정평(定平) 소련 게페우로 이송했다. 거기서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나를 취조했다. 일제시대 철로 공사판에서 노동일을 하던 장영동(張榮東)과 김용환(金龍煥)이란 자였다. 그러나 이 자들은 나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가혹하게 취조를 했다.
매일처럼 고문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치장에도 정월 초하루가 찾아왔다. 이날만은 취조가 없으려니 하고 나는 정월 초하룻날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 때리기를 좋아하는 놈들이라 해도 정월 초하룻날만은 고문을 중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초하룻날도 여전했다. 나는 또 끌려나갔다. 끌려나간 정도만이 아니었다. 전보다 더 혹독하게 때렸다. 실신할 정도로 고문을 한 것이다. 몸을 바로잡지 못해서 허리를 굽히고 있으려니 그때는 나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유치장에서 나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눈이 하얀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놈들은 나를 앞마당에 있는 우물로 끌고 가서 그 우물 속에 잡아넣었다. 옷을 입은 채 나는 우물 속에 잠겨버렸다. 그때의 추위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었다.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뼈가 얼어 터지는 것 같았다.
놈들은 옷과 몸이 물에 완전히 젖은 것을 보자 그때야 나를 꺼내어 그대로 유치장 안에 집어넣었다. 불도 없는 유치장이니 옷을 벗어 물을 짰으나 그것을 말릴 길이 없었다. 체온으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음이 꽁꽁 어는 유치장 안에서 물에 젖은 옷을 입어서 말리려니 그동안의 추위는 어떠했을 것인가? 얼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옷도 일주일쯤 지나 완전히 말랐다.
매일처럼 매를 맞으면서도 나는 죽지를 않고 살았다. 아마 겨울도 지나고 봄이 온 모양이었다. 유치장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그리 차지가 않았다.
反共 애국청년들과의 만남
겨울을 지내면서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유는 감방에 들어오는 사상범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스스로 격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청년이 유치장으로 잡혀 들어왔다. 대부분이 이남에서 공부했다는 죄목으로 들어왔다. 어떤 날은 함흥농업학교 학생들이 공산주의 반대 궐기를 하다가 수없이 잡혀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이 유치장에서 지금은 부산경찰서 사찰과에 근무하고 있는 최라는 애국청년도 만났다.
어느 날 나는 정평 게페우 사령부로 이송이 되었으며 거기서 두 번째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철원에서처럼 재판도 없이 취조관으로부터 그런 선언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죽지 않았다는 마음이 하나의 신념처럼 되었는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놈들이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나에게는 살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공산당 놈들에게 죽어서야 될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수방관적으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형 집행 날짜를 늦춰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지만 나는 사형선고를 내린 게페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이렇게 잡혀온 것은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요덕면 보안서장인 김영조가 돈 5만원을 강요했을 때 그것을 주지 않았다는 개인감정으로 죄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게페우는 그것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김영조가 나를 잡아 사형 언도를 받게 했다고 해서 보복적 수단을 쓰는 것 같은 나 자신이 비굴한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사형 집행을 늦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페우는 내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나를 영흥으로 이송하였다. 그날이 바로 4279년(1946년-편집자 주) 4월 17일이었다.
소련 장교 打殺하고 38선 越境
영흥 게페우 사령부는 일제 시의 금융조합이었다. 나는 이 게페우로 이송된 다음 날부터 다시 취조를 받기 시작했다. 취조받기 시작한 날이 바로 4월 19일인 일요일이었다.
따뜻한 봄날 나는 취조실로 끌려나가 소련 장교 앞으로 갔다. 창밖에는 복숭아꽃이 한창이었고 그리 높지 않은 담 너머로 버드나무 잎이 파릇파릇 보였다.
나는 취조실로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 바깥을 내다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봄을 보는 것이 그리 유쾌했던 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소련 장교가 나를 불러 테이블 앞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조그마한 의자에 앉았다. 병원 진찰실에 있는 환자용 의자처럼 생긴 조그마한 의자였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소련 군인 총위(總尉)가 안락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털이 덥수룩한 데다가 솜털이 온 얼굴에 덮여 있었다. 사람이기보다 원숭이 같은 느낌을 주는 소련 장교였다. 무지하고 우둔해 보이는 것이 그래도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을 취조하려 하는 것이 아니꼽게 생각되었지만 나는 무슨 말을 물으려나 하고 그 장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때마침 통역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유치장에서 끌고 나온 사람에게 통역을 데려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소련 군인과 단둘이 마주 앉으니 어쩐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원수다. 더구나 나는 고랑도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자유스러운 몸이었다. 힘껏 두들겨주고 싶은 충동이 나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
통역을 부르러 간 사람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소련 장교는 초조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언제라도 통역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안락의자에 기대어 절반쯤 누워 있었다. 따뜻한 봄볕에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불현듯 바깥을 한번 내다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담장, 그리고 쥐 죽은 듯한 조용한 정원! 그러고는 소련 장교를 보았다. 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모르나 눈만은 감고 있었다.
탈출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던 의자를 집어 들고 책상 맞은편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소련 장교를 향해 죽어라 하고 내리갈겼다. 번개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한 번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갈겼다. 소련 장교는 어떻게 되었는지 꼼짝도 못 했다. 피가 솟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이고 쓰러진 것이 꼭 죽은 것 같았다.
나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창문을 뛰어넘었다. 뜰을 지나 담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교외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렸다.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길을 골라 죽어라 하고 달렸다. 어떻게 달렸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겠고 어쨌든 교외의 용흥강(龍興江)까지 이르니 그때는 숨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는 쉴 새 없이 다시 달려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수풀이 우거진 산이었다. 나무 사이로 오르고 또 올라 부엉바위 근처까지 가서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틈새로 영흥읍이 내려다보였다. 땅바닥에 엎드려 내려다보니 시내에서는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경종이 울리고 야단이었다.
이제야 소련 장교가 구타를 당하고 내가 탈주했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보안대원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특히 나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남산리(南山里)와 용남리(龍南里) 근처는 특별경계를 하는지 그 근처는 더욱 웅성거리고 있었다. 백주인 만큼 내가 산속으로 도망쳤으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시내 어떤 곳에 잠복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미친 놈들 같으니!”
형이 싸준 엿을 가지고 산속으로
나는 한참 동안 영흥 시내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미소(微笑)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취할 나의 작전을 연구했다.
놈들은 틀림없이 내가 남쪽인 고원·철원 방면으로 도주하여 38선을 넘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영흥서 38선을 넘으려면 그 방면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 방면의 경계란 대단히 엄중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양덕(陽德)·맹산(孟山)으로 해서 평양을 거쳐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몇 배나 도는 길이었다.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그래도 나는 안전한 길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흥을 뒤로하고 산속 깊이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산속이라 해도 낮에 걷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걸으려 했다.
밤 10시쯤 되었을 때 나는 양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걷기를 사흘 동안이나 계속했을 때에야 나는 내 사촌 형 김택길(金澤吉)이 살고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아직도 영흥군내를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의 정보를 듣고 피곤도 회복시키기 위하여 사촌 형을 찾아갔다. 사촌 형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영흥사건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숨겨놓고 거기서 10리밖에 안 되는 곳에 살고 있는 내 가형에게로 사람을 보냈다.
기별을 받자마자 가형이 따라왔다. 가형은 갈아입을 옷과 돈 3000원과 도중에 먹을 엿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특히 고마운 것은 이발 기계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변장을 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으라는 것이었는데 시골 사람으로 그런 것까지 생각한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빡빡 깎고 옷을 갈아입은 뒤 엿을 짊어지고 즉시 길을 떠났다. 가형은 놈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며 떠나는 나의 손목을 잡고 걱정을 했다. 글썽글썽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것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절대로 안 잡힙니다. 형님이나 조심하십시오.”
나는 용기를 내어 이런 말을 남긴 뒤 다시 산속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형님이 준 엿으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을 산속에서 살았다.
臨檢
어느덧 함남(咸南)과 평남(平南)의 경계선인 산성(山城)에 이르렀다. 평안도 땅에 들어섰다는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하기 위하여 나는 가지고 가던 엿을 비상용으로 조금만 남기고는 대부분을 던져버린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산속에서 내려와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날이 바로 5월 1일이었다. 시골에서도 메이데이(May Day·노동절-편집자 주) 행사가 야단이었다.
이날 나는 맹산 채 못 미친 어떤 부락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지나가는 트럭을 붙들었다. 평양에 가는 트럭으로 그대로 태워달라고 해서는 태워줄 것 같지 않아 나는 몸이 아픈 시늉을 했다. 평양 병원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꼭 좀 태워달라고 사정을 했다.
나는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 도착한 것이 다음 날 저녁때였다. 서평양역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여인숙 조그만 방에 투숙을 하고 잠을 잘 때였다. 밤 한 시쯤 해서 보안서원 두 명이 임검을 나왔다. 나는 꼼짝없이 잡혔구나 생각했다. 나에게는 악운이 언제까지 따라다닐 작정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됐다.
나는 나를 깨우는 보안서원에게 “수고들 하십니다”라고 천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엿을 꺼내 시장하실 테니 잡수어 보라고 선뜻 내주었다. 보안서원들은 엿을 받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심문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는 악운만이 따르는 게 아니었다.
다음 날 나는 남행열차를 타려고 서평양역으로 나갔다. 차표를 사려고 사람 틈을 비집고 앞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하이라루에서 알던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서 있지 않은가? 나는 꿈틀 하고 뒤로 물러섰다. 철원 김윤원을 생각했던 것이다. 나를 밀고한다면 나는 또 붙잡혀야 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
나는 정거장을 나와버렸다. 남천(南川)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남천에는 나의 처가가 있었다. 나는 처가까지 걸어가서 하룻밤을 잤다. 그새 고생한 이야기를 밤새도록 하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남쪽으로 떠났다.
장모 권유로 달걀 장수 위장
장모는 떠나는 내가 마음에 놓이지 않는지 달걀 석 꾸러미를 주면서 달걀 장수로 가장하고 38선을 넘으라 했다. 나는 장모의 지혜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시키는 대로 달걀 장수로 가장하고 남쪽으로 떠났다.
아무 일 없이 금교까지 왔다. 이제부터 38선을 넘어야 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38선만 무사히 넘으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38선을 과연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묵상에 잠긴 채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서 걸어가던 청년 한 사람이 문득 “동무는 어딜 가시오?”라고 물었다.
나는 가슴이 또 내려앉았다. 가장한 보안서원이나 그렇지 않으면 보안서 끄나풀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달걀 장사를 다닙니다”라고 방향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남으로 가시는 거지요? 이남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십시오”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꾸며서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순박한 농촌 청년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참 동안 걸어가던 청년이 두 갈래 길이 있는 데까지 가서는 둑에 서서 “이 길로 가십시오. 한참 가면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이 보일 테니 송악산으로 해서 넘어가십시오”라고 말해주고 자기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어 잠시 망설였다. 이남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면 그때 권총을 빼서 쏘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심을 품고 있을 때 “별로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조심해서 가십시오” 하며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족들
나는 청년이 가르쳐주는 길로 들어서서 송악산을 지나 아무 일 없이 38선을 넘었다. 지옥 같은 북한 공산치하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이었다.
생각하면 그 미지의 청년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 청년이 갈래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고생을 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붙잡혀 또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 청년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일생의 은인이다. 나는 그가 무사하기를 기도한다.
어쨌든 나는 38마선(魔線)을 넘었다. 그럼 이북에 있을 나의 친척들은 어찌 되었을까? 오래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4283년(1950년-편집자 주) 9월 25일 나는 우연하게도 영흥 게페우에서 같이 감옥에 있던 애국청년 최를 만났다.
그도 내가 탈출한 뒤 얼마 안 있어 이남으로 넘어온 모양인데 그는 내가 영흥 게페우를 탈출한 뒤의 이야기와 우리 집안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가 때려 넘어트린 소련 장교는 틀림없이 죽었다고 했다. 그 뒤 나의 친척들이 전부 잡혀왔는데 그 뒤에는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나로 말미암아 희생이 된 가족들! 그러나 한 사람이 죄를 졌다고 해서 무고한 가족들까지 죄인으로 취급하는, 법률 없는 공산주의! 생각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만이 커질 뿐이다.〈다음 호에 계속〉⊙
나는 울분에 잠긴 채 나의 고향인 영흥(永興)에 내렸다. 오래간만에 발을 디디는 곳이었다. 흙빛이 부드럽고 물빛마저 꽃잎처럼 연해 보이는 내 고향! 일찍이 나를 길러내 준 이 고향 땅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것은 나에게 있어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흥역에서 백여 리 떨어져 있는 시골 고향으로 찾아갔다. 나무뿌리를 뜯어 먹던 뒷산과 헤엄치며 놀던 동네 앞 못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같이 놀던 어릴 때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그들 품 안에서 울어보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십 년! 십 년 동안 나는 고향을 등지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있었다. 그동안 소식도 변변히 보내지 못했다. 늙은 부모들은 나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무 소식도 없이 꿈처럼 나타난다면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
10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
산과 들은 예나 다름이 없지만 어딘가 달라진 듯한 고향 마을에 들어서자 나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불렀다. 첫마디에 어머니가 ○○(판독 곤란-기자 주)을 하고 나왔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이게 누구냐?” 하고 어머니는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머리는 이미 백발로 변하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 그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기에 이렇게도 머리가 은빛으로 변하고 말았을까?
나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동시 앞으로는 이 늙은 어머니 옆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이렇게 늙으셨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늙으셨을까? 나는 “아버지는 어디 나가셨어요?”라고 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벌써 돌아가셨다. 넌 그것도 몰랐지?” 하고 눈을 슴벅슴벅했다. 그리운 아들을 만나는 기쁨이 돌아가신 남편 생각을 하게 만든 모양이다.
즐거움을 같이 나누지 못하고 돌아간 남편을 생각할 때 그의 눈에서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인가?
“뭐요?”
나는 그저 놀랄 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해방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큰 죄인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갔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나는 목을 놓아 울면서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온 감회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며칠 동안을 집안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서 마음이 안정되자 그때는 무슨 일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조국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철원의 옛 부하를 찾아가다
그러나 고향에는 의논할 친구도 없었다. 나는 어디로 또 떠나야 했다. 나는 철원(鐵原)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북만 당시에 나의 부하로 일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김윤원(金允元·당시 31세)이었다. 그는 나의 부하였던 만큼 나와 똑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공산 스파이를 박멸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역시 동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철원으로 가기로 했다.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철원읍 관전리(官田里) 김윤원을 찾아간 것은 그날 밤이 이슥할 때였다. 김은 반가이 맞아주었다. 하이라루(하이라얼-편집자 주)적십자병원에서 환자들의 시중을 들던 그의 어머니도 나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들의 고마운 정에 감격하여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취해버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들은 나에게 피곤할 것이니 일찍 자라고 했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려니 하고 고맙게 여기기는 했으나 밤을 새워가면서라도 이야기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억지로 눌러 잠재우려 하는 것이 이상스럽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 역시 피곤했던 몸이라 자리에 눕기가 무섭게 그만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새벽 두 시경 나는 뜻하지 않은 음성에 놀라 깨고야 말았다. 내무서원 3명과 소련 군인 한 명이 피곤하게 잠든 나를 깨우고 있던 것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김윤원 이외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철원이었다. 그것도 밤늦게 가서 겨우 첫잠에 들었는데 내무서원들이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을 것인가? 어쨌든 나는 내무서에 붙들려가는 몸이 되고야 말았다.
사형 선고와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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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에 있는 舊노동당사 건물. 사진=조선DB |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내가 철원에 도착했다는 것은 김윤원밖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고 나를 잡으러 왔을까? 김윤원은 나의 부하였을 뿐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설마 그가 나를 밀고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치장에 들어간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취조를 받으러 끌려나갔을 때 취조실 한가운데 김윤원과 그의 어머니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붙잡혔으니까 나를 재워준 죄로 그들도 끌려온 것이라고 나는 미안해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앞으로 걸어오던 김윤원이가 구둣발로 죽어라 나를 걷어차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나는 말도 못 하고 그저 놀란 표정만 지었다. 그때 김윤원이가 “나쁜 놈! 이제 맛 좀 봐라” 하고 또다시 나를 찼다. 나는 김윤원이의 고발로 내가 붙잡힌 것을 알았다. 김윤원이가 나를 차고 있는 사이에 보안대원 앞에 섰던 그의 어머니는 “이놈! 너는 소만국경에서 애국자를 몇 명이나 죽였지? 우리 공산당원을 몇 명이나 체포하고 또 몇 명이나 죽였는지 똑바로 고백하라” 하고 호령하였다.
세상이 바뀌면 인정도 바뀌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가 있었다. 내 밑에 있었다고는 해도 나와 똑같은 일을 해온 김윤원이다.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면 그에게도 죄가 있다. 같은 죄를 지은 사람끼리 누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고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보다도 한국 사람이 별로 없던 하이라루에서 만나기만 하면 친척처럼 서로 반가워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원수로 고발을 하다니….
참으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역시 인정(人情)이라는 것을 인간의 미덕(美德)이라 생각하는 나의 착각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정이라는 것이 없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친척도 친구도 함부로 팔아먹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죽이면 그 죽인 사람은 그만큼 사상이 두텁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해서 누구나 눈이 빨개갖고 자기 가까운 사람들의 흠집을 찾아냈다.
김윤원이는 자기 죄상을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원수인 내가 자기 집을 찾아갔을 때 김윤원은 자기의 공적표가 하나 늘 것을 생각하고 나를 반가워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혼자서 후회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 잔인한 면을 채 몰랐던 것을 후회했다. 이제는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밥을 요강에 담아줘
나는 연일 취조를 받았다. 취조는 소련 군인이 담당했지만 고문은 통역관인 한국 사람이 맡고 있었다. 통역을 하여 한마디 묻고는 한 번씩 때리는 그 통역관은 소련 군인보다도 더 무서운 눈을 뜨고 있었다. 민족적인 점에서 소련 군인보다 조금이나마 가까워야 할 한국 사람이 나를 더 미워하고 더 때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래야만 승진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치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붙들려 와 있었다. 대부분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3호 감방에도 세 사람의 애국청년이 있었다. 그리고 철원경찰서장이었다는 일본인 한 명과 관리 노릇 하던 일본인 한 명이 나와 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공산주의자의 눈에 비칠 때 모두가 원수 같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취급하는 태도가 너무나 야만적이라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주워 모았는지는 모르나 가정에서 쓰던 요강을 가져다가 그 속에 밥을 담아 주는 데는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으기도 용하게 모아다 놓았다. 오줌을 누는 변기에 밥을 담아 준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콩밥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할지라도 변기 속의 밥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흘쯤 지나가자 변기에 주는 밥이라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살아야만 인류의 적인 공산주의와 싸울 수도 있었다.
게페우에서는 내게 사형을 언도했다. 재판이라는 것도 없는 사형 언도였다. 취조관이 한마디의 말로 내린 선고였다. 그렇다고 해서 불복 공소할 수도 없었다. 죽인다고 하면 죽는 도리밖에 없었다. 참으로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놈들에게 맥없이 죽고 말 것 같지는 않았다. 그새 무슨 수가 생기고야 말 것만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대로 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1월 중순경이었다. 밥을 나르는 어떤 경죄수(輕罪囚)로부터 내일 오후에 내가 사형 집행을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형장소가 전 철원신사 앞 광장이라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다음 날 정오가 되자 나는 드디어 끌려나갔다. 소지품을 전부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나와 함께 일본인 두 사람도 끌려나왔다. 사형장으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형장에 가는 사람에게 소지품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유치장에서 나와 게페우 앞으로 가니 사형 집행을 구경 나온 철원 시민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남은 죽는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구경거리가 되어 이렇게 모였을까? 인심이 너무도 잔인하여 놀랐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할 때 사람 죽이는 것을 보고 싶어 나온 사람보다도 강제적으로 동원되어 나온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임으로써 공포 관념을 넣으려는 공산주의자의 야만적 정책 밑에서는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안 나올 수 없는 것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사형장으로 나가려고 할 즈음 소련 군인 장교 한 명이 나와서 사형을 중지하고 함흥 게페우 사령부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함흥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사형이 감형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살길이 트인 것 같은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라루 시대에 내가 한 일과 그리고 그 당시의 소만국경 정세를 알기 위하여 함흥으로 이송시키는 것이리라.
함흥으로 가는 길
두 일본인에게도 나와 함께 이송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의 총살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 사이로 철원 정거장을 향해 걸어갔다. 군중은 왜 죽이지 않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군중 맨 앞에 김윤원과 그의 어머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도 내가 사형받지 않고 끌려가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죽으면 자기의 공적이 그만큼 높아질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상이 감추어질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아무런 항거도 없이 정거장에 이르러 화물차 속으로 들어갔다. 일본인 두 명과 내가 화물차에 오르자 그들은 밖에서 입구를 막고 못을 박았다. 탈출을 방지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안대원과 수송책임자인 소련 군인은 창살을 통하여 바라다볼 수 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엄중한 경계를 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속으로 탈출을 생각했다. 함흥으로 이송한다는 것은 조사를 더 엄중히 하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 내 죄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탈출하지 않으면 나는 영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탄 화물차는 말을 수송하던 화물차였다. 말똥과 말 터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벽 위에 있는 철창이 기차가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 소리를 냈다. 밖에서 못을 박았는데 웬일일까 하고 유심히 바라보니 못이 박혀 있지 않았다. 내가 탈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놈들이 나중에라도 못을 박을 것 같은 생각에 나는 화물차 밑바닥에 있는 옥수수 껍질을 집어서 철창의 빈틈에 끼웠다. 그러면 기차가 움직인다 해도 창문이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민활하게 놈들이 보지 못하는 새 그 일을 했다.
기차는 어느덧 고원(高原)을 지났다. 나의 고향인 영흥도 지나 함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영흥 교외에 흐르고 있는 영흥강을 바라볼 때 나는 여기서 탈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과 가까운 곳이어서 고향을 그리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철창 옆으로 다가서는 순간 감시원이 “왜 일어서?” 하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내 고향 앞을 지나기 때문에 한 번 보기라도 하고 싶었다는 말을 꾸며대고는 도로 앉았다. 감시원들은 안심했다는 듯이 그 뒤로는 나를 보지 않았다.
어느덧 흥상역(興上驛)에 다다랐다. 함흥 못 미쳐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다음 기차가 멎는 곳은 내가 한 번 더 고문을 받고 사형을 집행당할 곳이었다. 나는 이곳이 내가 탈출할 수 있는 최후의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탈출을 못 한다면 나는 영영 죽고 마는 몸이 된다.
나는 이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의 모든 신경을 탈출에 기울였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기차는 속력을 더욱 높여 달렸다. 함흥에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극도로 초조한 나머지 감시원들이 보건 말건 뛰쳐 내릴까도 생각하고 있을 때 감시원들이 하차를 준비하라고 했다. 같이 탔던 일본인들은 얼굴이 파래지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나는 하차 준비를 하는 척하고 일어섰다. 처음이고 또 마지막인 기회였다. 일어서자마자 나는 철창문에 끼웠던 옥수숫대를 잡아 빼고 문을 번개처럼 열었다. 동시에 몸을 던져 질주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어떻게 어떤 곳에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몸이 얼얼한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만 알았다. 몹시 다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차역에서 쏘는 총소리에 나는 한시라도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산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기차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르러서야 왼쪽 눈 아래 뼈가 상했고 거기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알았다. 손발 할 것 없이 피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는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탈출한 이상 한시바삐 남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 나는 밥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하고 걸었다. 출혈을 하고 밥을 못 먹은 데다가 사흘 동안을 걸으니 피곤이야 이루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흘이 지난 날 어떤 농부가 산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사흘 동안에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농부에게 먹을 것이라도 부탁하고 싶은 생각에 그 사람을 불렀지만 농부는 나를 보자 도리어 기겁을 하고 도망질쳤다. 나는 악몽에서 깬 것처럼 다시 산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越南 결심
어디를 어떻게 돌았는지 나흘이 지났을 때야 나의 고향인 영흥 근처에 이르렀다. 마장(馬場)이라는 조그마한 부락이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굶어서라도 죽을 것만 같아 부락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피란민으로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기차 위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는데 영흥까지 보내만 주면 돈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젊은 농부 한 사람이 친절하게 달구지를 준비해주었다. 나는 달구지 위에 누워 이불을 쓰고는 환자로 가장한 뒤 우선 영흥읍에 있는 외사촌댁을 찾아갔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밥을 먹었고 상처를 씻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머무를 수가 없었기에 어머니한테 기별하여 달구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 날은 형님(창헌·昌憲)이 가지고 온 달구지에 누워 이번에는 시체로 가장했다.
집에 이르니 마음이 턱 놓였다. 그러나 내 집이라고 해도 공산치하의 세상이다.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도착한 날부터 창고에서 살았다. 어머니만이 몰래 들락날락하며 밥을 날라다 주었고 또 나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이십여 일이 지나고 나니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그러나 얼굴에 입은 상처는 커다란 흠집을 남기고야 말았다.
상처가 낫자 나는 북한이 나의 살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거기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정체가 드러나면 체포될 것이 틀림없었다. 체포만 되면 사형이었다.
나는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했다.
두 번째의 사형 선고
상처가 거의 아물어 내일쯤이면 이남으로 출발하려고 준비하던 날이었다. 형수가 이제 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니까 떡이라도 해 먹자고 했다. 시골에서는 떡이 제일 좋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떡방아를 찧으러 갔던 형수가 무슨 이야기 끝엔지 시동생 되는 내가 이남으로 떠나기 때문에 떡을 한다고 동네 아낙네에게 발설을 했던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떡이 화근이 되었다. 형수의 말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보안서장으로부터 글발이 왔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돈 5만원만 보내라는 것이었다. 협박장 비슷했지만 결국 돈이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는 분한 생각이 들어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구두로 돈이 없다고 거절해버렸다. 보안서장이라는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분할 것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있는 대로 주어 무사하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보안서장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의 외조카 김영조(金永助)였다.
김은 외조카라 하지만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가 되었을 때 우리 집에서는 그를 데려다가 자식처럼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그는 나와 같이 소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같이 해왔다. 내가 만주에서 나온 직후에는 몇 번이나 만나 “공산주의를 타도해야 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공산주의를 없애야 해” 하고 손을 잡고 일하자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보안서장이 되었지만 보안서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리 나를 협박하여 돈을 먹으려고 할 수가 있는가?
세상이 아무리 흉악하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분한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김영조를 찾아가서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나를 협박하느냐고 힐난을 하고 싶기도 했으나, 내일이면 떠날 것이니 참자 하는 마음에 이를 악물고 참아 버텼다.
어머니가 가져온 음식 창살에 매달고 놀려
그러고 다음 날 새벽 정작 출발을 하려고 할 때였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보안대원들이 나의 집을 포위하고 들어와서는 나를 체포하여 보안서로 끌고 갔다. 나를 체포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의 외사촌인 김영조였다.
끌려가기는 하면서도 나는 분함을 참지 못했다. 돈을 달라고 했다가 돈을 주지 않으니까 이제는 체포를 하고 만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불측한 놈이 있을 수 있는가? 참으로 이가 갈렸다.
그래도 할 수가 없었다. 끄는 대로 끌려가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때린다고 하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놈들에게 고분고분할 수는 없었다. 김영조를 생각해도 그랬고 소위 취조관이란 작자들을 생각해도 그랬다. 취조관이란 자는 8·15 이전까지 여관 사환으로 있던 김부서란 자였다. 그야말로 국문도 모르는 자가 그동안 배운 계급이니 투쟁이니 반동이니 하며 나를 고문하는 데는 어이가 없어서 입도 안 벌어졌다. 도리어 악이 솟구쳐 “너희 같은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될 게 뭐냐? 망했다, 망했어!”라고 고함을 질러주었다.
그랬더니 놈들은 화를 내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무리매였다. 칠팔 명이 달려들어 죽어라 하고 때렸다.
나는 그날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유치장에 누워 있었다. 찬 바람이 휙휙 날리는 유치장이었다. 마루 사이로까지 찬바람이 올라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버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웅크리고 밤을 새울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옷과 음식을 차입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외사촌인 보안서장은 그 차입도 들여주지 않았다. 그 대신 어머니가 가지고 오신 음식을 창살에 매어 달고 “네 어머니가 가져온 음식이다. 구경이나 해라!” 하고 나를 놀렸다. 먹이지는 않고 구경만 시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고문을 하고 두드리기를 한다 해도 먹일 것은 먹여야 하지 않는가? 치가 떨렸다. 사람을 원숭이처럼 놀리는 외사촌이 죽이고 싶게 미웠다.
정월 초하루에도 고문
일주일 후에는 나를 정평(定平) 소련 게페우로 이송했다. 거기서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나를 취조했다. 일제시대 철로 공사판에서 노동일을 하던 장영동(張榮東)과 김용환(金龍煥)이란 자였다. 그러나 이 자들은 나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가혹하게 취조를 했다.
매일처럼 고문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치장에도 정월 초하루가 찾아왔다. 이날만은 취조가 없으려니 하고 나는 정월 초하룻날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 때리기를 좋아하는 놈들이라 해도 정월 초하룻날만은 고문을 중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초하룻날도 여전했다. 나는 또 끌려나갔다. 끌려나간 정도만이 아니었다. 전보다 더 혹독하게 때렸다. 실신할 정도로 고문을 한 것이다. 몸을 바로잡지 못해서 허리를 굽히고 있으려니 그때는 나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유치장에서 나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눈이 하얀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놈들은 나를 앞마당에 있는 우물로 끌고 가서 그 우물 속에 잡아넣었다. 옷을 입은 채 나는 우물 속에 잠겨버렸다. 그때의 추위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었다.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뼈가 얼어 터지는 것 같았다.
놈들은 옷과 몸이 물에 완전히 젖은 것을 보자 그때야 나를 꺼내어 그대로 유치장 안에 집어넣었다. 불도 없는 유치장이니 옷을 벗어 물을 짰으나 그것을 말릴 길이 없었다. 체온으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음이 꽁꽁 어는 유치장 안에서 물에 젖은 옷을 입어서 말리려니 그동안의 추위는 어떠했을 것인가? 얼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옷도 일주일쯤 지나 완전히 말랐다.
매일처럼 매를 맞으면서도 나는 죽지를 않고 살았다. 아마 겨울도 지나고 봄이 온 모양이었다. 유치장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그리 차지가 않았다.
反共 애국청년들과의 만남
겨울을 지내면서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유는 감방에 들어오는 사상범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스스로 격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청년이 유치장으로 잡혀 들어왔다. 대부분이 이남에서 공부했다는 죄목으로 들어왔다. 어떤 날은 함흥농업학교 학생들이 공산주의 반대 궐기를 하다가 수없이 잡혀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이 유치장에서 지금은 부산경찰서 사찰과에 근무하고 있는 최라는 애국청년도 만났다.
어느 날 나는 정평 게페우 사령부로 이송이 되었으며 거기서 두 번째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철원에서처럼 재판도 없이 취조관으로부터 그런 선언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죽지 않았다는 마음이 하나의 신념처럼 되었는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놈들이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나에게는 살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공산당 놈들에게 죽어서야 될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수방관적으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형 집행 날짜를 늦춰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지만 나는 사형선고를 내린 게페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이렇게 잡혀온 것은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요덕면 보안서장인 김영조가 돈 5만원을 강요했을 때 그것을 주지 않았다는 개인감정으로 죄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게페우는 그것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김영조가 나를 잡아 사형 언도를 받게 했다고 해서 보복적 수단을 쓰는 것 같은 나 자신이 비굴한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사형 집행을 늦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페우는 내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나를 영흥으로 이송하였다. 그날이 바로 4279년(1946년-편집자 주) 4월 17일이었다.
소련 장교 打殺하고 38선 越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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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정 시절 노동절 행사. 구호판 밑으로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와 소련군 고위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DB |
따뜻한 봄날 나는 취조실로 끌려나가 소련 장교 앞으로 갔다. 창밖에는 복숭아꽃이 한창이었고 그리 높지 않은 담 너머로 버드나무 잎이 파릇파릇 보였다.
나는 취조실로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 바깥을 내다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봄을 보는 것이 그리 유쾌했던 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소련 장교가 나를 불러 테이블 앞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조그마한 의자에 앉았다. 병원 진찰실에 있는 환자용 의자처럼 생긴 조그마한 의자였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소련 군인 총위(總尉)가 안락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털이 덥수룩한 데다가 솜털이 온 얼굴에 덮여 있었다. 사람이기보다 원숭이 같은 느낌을 주는 소련 장교였다. 무지하고 우둔해 보이는 것이 그래도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을 취조하려 하는 것이 아니꼽게 생각되었지만 나는 무슨 말을 물으려나 하고 그 장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때마침 통역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유치장에서 끌고 나온 사람에게 통역을 데려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소련 군인과 단둘이 마주 앉으니 어쩐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원수다. 더구나 나는 고랑도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자유스러운 몸이었다. 힘껏 두들겨주고 싶은 충동이 나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
통역을 부르러 간 사람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소련 장교는 초조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언제라도 통역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안락의자에 기대어 절반쯤 누워 있었다. 따뜻한 봄볕에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불현듯 바깥을 한번 내다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담장, 그리고 쥐 죽은 듯한 조용한 정원! 그러고는 소련 장교를 보았다. 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모르나 눈만은 감고 있었다.
탈출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던 의자를 집어 들고 책상 맞은편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소련 장교를 향해 죽어라 하고 내리갈겼다. 번개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한 번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갈겼다. 소련 장교는 어떻게 되었는지 꼼짝도 못 했다. 피가 솟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이고 쓰러진 것이 꼭 죽은 것 같았다.
나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창문을 뛰어넘었다. 뜰을 지나 담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교외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렸다.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길을 골라 죽어라 하고 달렸다. 어떻게 달렸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겠고 어쨌든 교외의 용흥강(龍興江)까지 이르니 그때는 숨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는 쉴 새 없이 다시 달려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수풀이 우거진 산이었다. 나무 사이로 오르고 또 올라 부엉바위 근처까지 가서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틈새로 영흥읍이 내려다보였다. 땅바닥에 엎드려 내려다보니 시내에서는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경종이 울리고 야단이었다.
이제야 소련 장교가 구타를 당하고 내가 탈주했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보안대원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특히 나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남산리(南山里)와 용남리(龍南里) 근처는 특별경계를 하는지 그 근처는 더욱 웅성거리고 있었다. 백주인 만큼 내가 산속으로 도망쳤으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시내 어떤 곳에 잠복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미친 놈들 같으니!”
형이 싸준 엿을 가지고 산속으로
나는 한참 동안 영흥 시내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미소(微笑)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취할 나의 작전을 연구했다.
놈들은 틀림없이 내가 남쪽인 고원·철원 방면으로 도주하여 38선을 넘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영흥서 38선을 넘으려면 그 방면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 방면의 경계란 대단히 엄중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양덕(陽德)·맹산(孟山)으로 해서 평양을 거쳐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몇 배나 도는 길이었다.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그래도 나는 안전한 길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흥을 뒤로하고 산속 깊이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산속이라 해도 낮에 걷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걸으려 했다.
밤 10시쯤 되었을 때 나는 양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걷기를 사흘 동안이나 계속했을 때에야 나는 내 사촌 형 김택길(金澤吉)이 살고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아직도 영흥군내를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의 정보를 듣고 피곤도 회복시키기 위하여 사촌 형을 찾아갔다. 사촌 형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영흥사건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숨겨놓고 거기서 10리밖에 안 되는 곳에 살고 있는 내 가형에게로 사람을 보냈다.
기별을 받자마자 가형이 따라왔다. 가형은 갈아입을 옷과 돈 3000원과 도중에 먹을 엿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특히 고마운 것은 이발 기계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변장을 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으라는 것이었는데 시골 사람으로 그런 것까지 생각한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빡빡 깎고 옷을 갈아입은 뒤 엿을 짊어지고 즉시 길을 떠났다. 가형은 놈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며 떠나는 나의 손목을 잡고 걱정을 했다. 글썽글썽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것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절대로 안 잡힙니다. 형님이나 조심하십시오.”
나는 용기를 내어 이런 말을 남긴 뒤 다시 산속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형님이 준 엿으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을 산속에서 살았다.
臨檢
어느덧 함남(咸南)과 평남(平南)의 경계선인 산성(山城)에 이르렀다. 평안도 땅에 들어섰다는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하기 위하여 나는 가지고 가던 엿을 비상용으로 조금만 남기고는 대부분을 던져버린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산속에서 내려와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날이 바로 5월 1일이었다. 시골에서도 메이데이(May Day·노동절-편집자 주) 행사가 야단이었다.
이날 나는 맹산 채 못 미친 어떤 부락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지나가는 트럭을 붙들었다. 평양에 가는 트럭으로 그대로 태워달라고 해서는 태워줄 것 같지 않아 나는 몸이 아픈 시늉을 했다. 평양 병원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꼭 좀 태워달라고 사정을 했다.
나는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 도착한 것이 다음 날 저녁때였다. 서평양역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여인숙 조그만 방에 투숙을 하고 잠을 잘 때였다. 밤 한 시쯤 해서 보안서원 두 명이 임검을 나왔다. 나는 꼼짝없이 잡혔구나 생각했다. 나에게는 악운이 언제까지 따라다닐 작정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됐다.
나는 나를 깨우는 보안서원에게 “수고들 하십니다”라고 천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엿을 꺼내 시장하실 테니 잡수어 보라고 선뜻 내주었다. 보안서원들은 엿을 받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심문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는 악운만이 따르는 게 아니었다.
다음 날 나는 남행열차를 타려고 서평양역으로 나갔다. 차표를 사려고 사람 틈을 비집고 앞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하이라루에서 알던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서 있지 않은가? 나는 꿈틀 하고 뒤로 물러섰다. 철원 김윤원을 생각했던 것이다. 나를 밀고한다면 나는 또 붙잡혀야 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
나는 정거장을 나와버렸다. 남천(南川)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남천에는 나의 처가가 있었다. 나는 처가까지 걸어가서 하룻밤을 잤다. 그새 고생한 이야기를 밤새도록 하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남쪽으로 떠났다.
장모 권유로 달걀 장수 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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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을 넘어오는 월남자 가족을 미군 경비병이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
아무 일 없이 금교까지 왔다. 이제부터 38선을 넘어야 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38선만 무사히 넘으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38선을 과연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묵상에 잠긴 채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서 걸어가던 청년 한 사람이 문득 “동무는 어딜 가시오?”라고 물었다.
나는 가슴이 또 내려앉았다. 가장한 보안서원이나 그렇지 않으면 보안서 끄나풀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달걀 장사를 다닙니다”라고 방향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남으로 가시는 거지요? 이남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십시오”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꾸며서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순박한 농촌 청년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참 동안 걸어가던 청년이 두 갈래 길이 있는 데까지 가서는 둑에 서서 “이 길로 가십시오. 한참 가면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이 보일 테니 송악산으로 해서 넘어가십시오”라고 말해주고 자기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어 잠시 망설였다. 이남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면 그때 권총을 빼서 쏘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심을 품고 있을 때 “별로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조심해서 가십시오” 하며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족들
나는 청년이 가르쳐주는 길로 들어서서 송악산을 지나 아무 일 없이 38선을 넘었다. 지옥 같은 북한 공산치하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이었다.
생각하면 그 미지의 청년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 청년이 갈래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고생을 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붙잡혀 또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 청년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일생의 은인이다. 나는 그가 무사하기를 기도한다.
어쨌든 나는 38마선(魔線)을 넘었다. 그럼 이북에 있을 나의 친척들은 어찌 되었을까? 오래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4283년(1950년-편집자 주) 9월 25일 나는 우연하게도 영흥 게페우에서 같이 감옥에 있던 애국청년 최를 만났다.
그도 내가 탈출한 뒤 얼마 안 있어 이남으로 넘어온 모양인데 그는 내가 영흥 게페우를 탈출한 뒤의 이야기와 우리 집안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가 때려 넘어트린 소련 장교는 틀림없이 죽었다고 했다. 그 뒤 나의 친척들이 전부 잡혀왔는데 그 뒤에는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나로 말미암아 희생이 된 가족들! 그러나 한 사람이 죄를 졌다고 해서 무고한 가족들까지 죄인으로 취급하는, 법률 없는 공산주의! 생각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만이 커질 뿐이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