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저우(福州)의 ‘항해의 수호신’ 媽祖… ‘마카오(媽閣)’와 ‘홍콩(香港)’이라는 지명도 媽祖에게서 유래
⊙ 취안저우(泉州)에는 신뤄춘(新羅村)·가오리춘(高麗村) 등의 지명 남아 있어… 人蔘을 가오리(高麗)라고 불러
⊙ 신라의 玄訥 禪師, 唐 취안저우 자사 왕연빈(王延彬)의 초빙으로 취안저우 福淸寺 초대 주지로 취임
許又笵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 취안저우(泉州)에는 신뤄춘(新羅村)·가오리춘(高麗村) 등의 지명 남아 있어… 人蔘을 가오리(高麗)라고 불러
⊙ 신라의 玄訥 禪師, 唐 취안저우 자사 왕연빈(王延彬)의 초빙으로 취안저우 福淸寺 초대 주지로 취임
許又笵
1961년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現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 취안저우에 있는 칭징스(淸淨寺)는 중국 최초의 이슬람 사원이다.
푸젠성은 약칭하여 ‘민(閩)’이라고 한다. 춘추(春秋)시대 민월(閩越)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한(漢)나라 때는 양주(揚州)에 속했고, 당(唐)나라 때 처음으로 복주(福州)라고 하였다. 원(元)나라 때에는 복건도(福建道)가 되었다가 이후 성(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푸젠성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섬이 많은 곳이다. 해협(海峽)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臺灣)과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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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나라 때 건설된 덩먼다오(登門道) 부두. 최근 고대 해상 실크로드 관련 유적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
몇 번 시골길을 묻고 차를 돌려서 마침내 덩먼다오(登門道) 부두에 도착했다. 이곳은 푸저우에서 제일 오래된 부두로 당나라 때부터 있었던 곳이다. 시골마을의 텃밭 어귀에 차를 세우고 강가로 걸어가니 화강암으로 만든 100여 m의 부두 터가 강으로 이어져 있다. 민강(閩江)이 바다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당나라 시대에는 내륙의 물산이 몰리는 집산지이자 해외의 상선들이 오가는 주요 항구였다. 지금은 고대(古代) 항구였다는 표지석만 홀로 덩그렇게 서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국이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영향을 받아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유적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오면 번잡한 관광지가 되어 있으리라.
항해의 수호신 媽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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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媽祖 여신상. |
먼저 둥치 부두를 찾았다. 마을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다 찾은 부둣가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사찰이 보인다. 그 앞으로 ‘항해의 수호신’인 마조(媽祖) 여신상이 우뚝하다. 마조는 송나라 때 실재(實在) 인물이다. 고향은 푸젠성 푸티안(莆田)에서 30여 km 떨어진 메이저우(湄洲)섬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삼교(三敎)의 서적을 섭렵했다고 한다. 또한 신통력이 있어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었고, 해상의 날씨도 잘 예견해서 어부들의 안전운항을 도왔다. 조난한 사람들도 잘 구해주었다. 바다가 생활터전인 이곳 사람들은 그녀의 은덕(恩德)을 기리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마조는 항해의 수호신이 되었다.
마조는 고대 바다를 오가는 항해자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支柱)였다. 이러한 사상은 항해자를 따라 중국 근해와 동남아시아 등지로 퍼졌다. 도시명인 ‘마카오(媽閣)’는 마조를 모시는 사당에서 유래되었다. ‘홍콩(香港)’은 마조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붉은 향을 피우는 향로가 있는 항구(洪香爐港)’에서 비롯되었다. 마조묘(媽祖廟)는 26개국에 5000여 개가 있다고 하니, 해신(海神)으로서 마조의 위상이 용왕신을 능가함을 알 수 있다.
聖壽寶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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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나라 때 동남아 조공선이 드나들던 중롱교(逈龍橋). 宋나라 때 싱강 부두가 있던 곳이다. |
둥치 부두에서 민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석교(石橋)인 중룽교(逈龍橋)가 나온다. 송나라 때의 싱강 부두다. 동남아 지역의 조공선(朝貢船)이 드나들었다. 주변 마을은 민안역사문화명촌(閩安歷史文化名村)으로 새롭게 조성되어 둥치 마을과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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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저우에 있는 높이 28m의 성서우바오탑(聖壽寶塔). 900년 전부터 등대 역할을 했다. |
싱강 부두 건너편 시내에는 높이가 100여m는 됨직한 탑산(塔山)이 있다. 정상(頂上)에는 900년 전에 세워진 성서우바오탑(聖壽寶塔)이 있다. 높이 28m 정도인 이 탑은 고대 항해사들에게 등대 역할을 했다. 고대에는 불탑 형태의 등대가 항구가 보이는 구릉이나 산에 세워졌다. 지금은 고층 건물에 가려져 강어귀에서 보이지도 않지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푸저우로 입항하는 선원들에게는 표지판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명(明)나라 때 정화(鄭和)의 함선이 싱강과 둥치 부두에 대거 정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탑이 있는 곳도 정화공원(鄭和公園)으로 부르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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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代 푸저우의 모습을 표현해 놓은 조감도. |
〈이 도시에서는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고 상인과 수공업자도 많다. 이 도시 가운데로 폭이 거의 1마일인 커다란 강이 관통하고 있고, 그 강을 따라 많은 배가 이 도시에 들어온다. 그곳에서는 얼마인지 추측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사탕이 생산되고 있다. 진주를 비롯하여 다른 보석들의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인도의 섬들에 자주 드나드는 상인과 함께 인도로부터 많은 선박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옛날 푸저우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싼팡치샹(三坊七巷) 거리로 갔다. 이곳은 남북을 대로(大路)로 하여 좌우 10개의 골목으로 이뤄진 거리다. 서진(西晉)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본격적인 발전은 당나라 때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내려온 사대부들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다. 이후 북쪽은 사대부 중심의 귀족이, 남쪽은 상업자와 평민이 거주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명칭은 송나라 때에 붙여졌다. 천 수백 년을 이어오며 지금은 대부분 명청(明淸)시대의 건물이 남아 있다.
한국의 인사동 골목을 연상케 하는 거리는 인파(人波)로 가득하다. 오래된 건물들을 살려 전통적인 상업거리를 조성해 놓았다. 골목길마다 시대를 아우르는 고아함이 느껴진다. 작지만 다양한 전시관이 있는데, 그중에는 해양 실크로드 전시관도 있다. 옛날 푸저우의 해상활동 사진과 모형 배 등이 있었는데, 흑백사진이 주는 정겨움이 거리를 둘러보는 것보다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인삼’을 ‘고려’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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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안저우의 스후 부두. 唐 현종 때 세워졌다. |
중세(中世) 아랍여행가인 이븐 바투타의 눈에 비친 취안저우는 어떠했을까.
〈이 도시에는 올리브 나무(자이툰)가 없다. 중국과 인도의 어느 곳에도 올리브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이름을 취했다. 자이툰은 대단히 큰 도시로 여러 비단을 생산하는데 이곳의 명산물로 알려져 있다. 항구는 세계 대항(大港) 중의 하나, 아니 어찌 보면 가장 큰 항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거기에서 약 100척의 대형 정크선을 봤으며 소형 정크선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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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상인들이 살던 가오리샹(高麗巷). 지금은 쿠이샤샹(奎霞巷)으로 바뀌었다. |
취안저우는 한반도와 왕래가 많았다. 집단 거주 흔적인 신뤄춘(新羅村)·가오리춘(高麗村)도 있고, 가오리샹(高麗巷)도 있다.
가오리샹은 고려의 무역상인들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시장으로 변했고, 지명도 쿠이샤샹(奎霞巷)으로 바뀌었다. 송나라 상인들은 고려와의 무역을 중시하였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인삼을 아예 ‘고려’라고 부를 정도였다. 인적(人的)교류도 활발했다. 가오리춘은 고려에서 온 유학생·상인·승려 등이 집단 거주한 곳이다. 고려인들이 먹었다는 가오리차이(高麗菜)는 지금도 식당 메뉴판에서 볼 수 있다. 간을 한 양배추에 마른 고추를 썰어넣고 볶아 먹는 나물인데, 김치볶음과 비슷한 맛이 난다. 타국에서 고향의 음식은 더욱 그리운 법이다. 고려 상인들이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에 고추를 넣고 고향의 맛을 흉내낸 것이리라.
최승로, 宋人 입국 제한 건의
고려인들이 송나라에 간 것처럼 송인(宋人)들도 고려로 왔다. 고려에 온 송인들은 최소 5000명에 이르렀다. 《고려사》 ‘최승로(崔承老)전’에는 그가 올린 〈시무책(時務策)〉이 나온다. 이를 보면 당시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은 교빙의 사신만이 아니라 무역으로 인해 사자(使者)도 번거롭게 많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교빙의 사신에 의지하여 무역을 아울러 행하고 그 나머지 때가 아닌 거래는 모두 금지하여 못 하게 하소서.〉
하지만 고려는 송나라의 재능 있는 전문 인력들은 언제든지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부분 저장성과 푸젠성 등 중국 동남 연안지역에서 입국했는데, 취안저우 출신이 가장 많았다. 고려에 입국한 송인들은 과거에 합격한 문인이나 승려 또는 각종 전문기술자들이었다. 고려는 이들의 학식과 능력을 검증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적극적인 귀화(歸化)정책을 폈다. 또한 고려의 관료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뇌물수수 등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즉시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고려의 귀화정책이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최초의 이슬람사원 淸淨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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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안저우 고선진열관에 전시되어 있는 宋나라 상선 축소 모형. |
카이위안쓰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은 86개의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이를 일컬어 ‘바이주뎬(百柱殿)’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힌두신상과 동식물 문양이 다채롭게 조각된 쌍주(雙柱)가 있다. 이 사찰에는 인도와 서역에서 온 승려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이들의 교류가 빈번하자 절의 면모도 조금씩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옆에는 고선진열관(古船陳列館)이 있다. 송나라 때의 난파선을 발굴하여 복원해 놓은 곳이다. 이제까지 난파선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선박에 싣던 물품의 일부도 진열되어 있는데, 각종 향신료 외에도 주사(朱砂), 수은(水銀), 바다거북 껍데기 등이 보인다.
칭징스(淸淨寺)는 중국 최초의 이슬람사원이다.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당나라 때인 620년대로, 선지자인 무함마드가 네 명의 제자를 보내 포교(布敎)하면서부터다. 이 사원은 북송(北宋) 시기인 1009년에 창건되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사원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사원으로서의 경건함과 전통은 곳곳에 배어 있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살펴보면, “중국은 도시마다 무슬림들만이 거주하는 특정구역을 설정해서 그들의 풍속과 문화를 지키며 살게 하였다. 그리고 무슬림들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칭징스는 무슬림을 일체화시키고 나아가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정신세계를 숭앙(崇仰)시키는 장소였다.
취안저우에서 활동하던 포교자들이 죽자 이슬람교도들은 이들을 칭위안산(淸源山)에 묻고 ‘성묘(聖墓)’라고 부르며 참배하였다. 그 후 이곳 성묘 주위에는 송·원·명나라 때 신도들의 묘가 늘어나면서 오늘날은 중국 내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성묘 옆에는 정화행향비(鄭和行香碑)가 있다. 이슬람교도인 정화가 제5차 원양함대를 출동시키면서 이곳에 들러 향을 피우고 안전을 빌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六角亭은 쓸쓸한 비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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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안저우 해외교통사박물관 내 이슬람문화관 입구에는 중세의 유명한 아랍여행가 이븐 바투타 像이 서 있다. |
취안저우에도 한국과 관련된 유서 깊은 유적이 있다. 바로 푸칭스(福淸寺)다. 이 사찰은 당나라 때 취안저우 자사 왕연빈(王延彬)이 신라의 현눌선사(玄訥禪師)의 불력(佛力)에 감탄하여 첫 주지(住持)로 모신 곳이다. 빗방울이 잦아드는 가운데 푸칭스에 도착했다. 영화로웠던 사찰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조그마한 전각(殿閣)과 육각정(六角亭)이 쓸쓸히 비에 젖어 있다. 그야말로 찾아오는 신도도 없는 쇠락한 절의 모습이다. 정자 옆의 용수(龍樹)만이 이 절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선사는 이곳에서 30년간 불법을 전수하였는데,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 많은 승려가 찾아왔다. 그의 불법을 전수한 제자들은 고려의 건국과 함께 해동불교의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되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