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광주 5·18 당시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
⊙ 《전두환 회고록》,‘무기고 탈취는 일반 시민들이 우발적으로 할 수 없어’
⊙ 탈북 작가가 쓴 《풍계리》, ‘100명의 전사들이 광주에서 작전. 귀환 도중 97명 사망’
⊙ 논픽션 《보랏빛 호수》, 5·18 광주에 남파됐던 북한 군인의 체험담
⊙ 청와대,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 추진
⊙ 《전두환 회고록》,‘무기고 탈취는 일반 시민들이 우발적으로 할 수 없어’
⊙ 탈북 작가가 쓴 《풍계리》, ‘100명의 전사들이 광주에서 작전. 귀환 도중 97명 사망’
⊙ 논픽션 《보랏빛 호수》, 5·18 광주에 남파됐던 북한 군인의 체험담
⊙ 청와대,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 추진
- 5·18 당시 군용 트럭과 장갑차에 올라탄 시민의 모습이다.
1980년 광주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 혹은 암시하는 책들이 최근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어쩌면 북한 특수군 개입설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5·18의 완전한 진실규명과 맥이 닿아 있는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옛 전남도청 인근 전일빌딩 헬기사격을 포함한 5·18 민주화운동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동안 탈북자와 보수성향 인사들이 제기한 ‘배후조종(북한군)에 의한 폭동설’을 불식시킬 수 있을까.
현재 청와대는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을 위해 대(對)국민 공감대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광주시와 지역 정치권도 ‘5·18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진실규명의 범주에 북한군 개입설까지 포함시킬지는 미지수다.
최근 들어 5·18 당시 북한군 개입 의혹을 가장 먼저 제기한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4월 초 펴낸 《전두환 회고록》(전3권, 자작나무숲)에서 전 전 대통령은 광주 5·18 사태가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그 이유로 ▲무기고 위치파악·습격·탈취 ▲짧은 시간 내 수백 대의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집결 ▲일반인의 장갑차 운전 등을 들었다.
〈… 해당 직장이나 지역 사람이 아니고 광주에서 각지로 흩어져 내려간 사람들이, 사전에 파악해 두지 않은 상황에서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군부대의 무기고는 그 위치 자체가 군사기밀이다. 무기고 탈취는 군대에서도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 시민들이 우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또 짧은 시간 안에 수백 대의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집결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운전자가 많지 않았고, 운전 기술과 경험은 지금처럼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특히 일반 시민이 장갑차를 몰고 이동했다는 건 해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1》, p.406)
당시 검찰의 수사기록과 안기부 자료에 따르면, 광주 시위대는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불과 4시간 사이에 17개 시와 군에 소재한 38개의 무기고에서 5000여 정의 총기를 탈취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화순광업소에서 8t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탈취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다.
전 전 대통령은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진실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가능한 조사만이라도 이뤄져야 한다”며 진실규명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5·18 단체와 유족들이 민주 유공자와 광주시민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회고록의 출판과 배포를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풍계리 핵과학자 아내의 5·18 증언
지난 4월 중순 펴낸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의 실상을 고발한 소설 《풍계리》(도서출판 곰시)도 5·18 북한군 개입설을 담고 있다.(《월간조선》 2017년 5월호 참조)
저자 김평강은 탈북 작가로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근무했던 핵과학자의 아내다. 2000년 말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했다.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김평강은 자신의 아버지와 장성택 등에게 듣게 됐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장성택과 김일성종합대 동창이다. 그의 집에는 김일성대 교수인 형부를 비롯해 북한 엘리트들이 자주 모였다고 한다. 덕분에 ‘김일성 일가의 비밀스런 속살’을 곁에서 볼 수 있었다.
〈… 식민지 파쇼정권에 반대하여 5·18 광주 인민봉기의 시위 현장으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을 도와 간다고 하면서 기세 충천하여 떠났던 영웅들이었다. 통일전사들은 국방군에 의하여 발각이 되었다. 유철용은 긴급후퇴 명령을 내렸고 무선을 통하여 조선인민군사령부에 퇴각의사를 밝혔다. (중략) 그들은 남조선 국방군의 추적을 피하여 산에 숨어 들어가 헤매다가 약속한 귀가시간 내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하지 못했다. (중략) 미처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남측 복장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당시 북조선 제8군단이 시험포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복귀하던 그들을 지도간부 3명만 빼고 모두 사살하였다. …〉(《풍계리》, p.90~91)
《풍계리》에는 5·18 당시 100명의 ‘통일전사’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담지 않았다. 북한에서 광주로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모호하다. 다만 우리 국군에 발각되자 도보로 북한쪽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했다고 적고 있다.
기자와 만난 김씨는 “북한 당국이 일부러 97명을 죽였다. 이남에 갔다온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격훈련을 조작해 죽였다”고 말했다. 이들의 시신은 평양의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살아남은 3명은 지금도 대남사업부와 통일전선부에서 수장으로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탈북군인 정순성·김명국, 5·18 광주에서 북한 특수군 활동
“아버지와 장성택에게 들은 얘기”라는 탈북작가 김평강의 주장과 달리, 지난 5월 중순 출간된 《보랏빛 호수》(비봉출판사)는 직접 5·18 당시 작전에 참여한 탈북 군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북한 1010 군부대 ‘019번’이란 숫자로 5·18 당시 광주에 갔다는 정순성(가명)은 북한으로 돌아와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파견대장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당시 파견대장 이름은 ‘문제심’이었다. 책에는 정순성이 광주로 내려가기 앞서 총탄 300발, 수류탄 2발, 권총 1정, 카빈총 1정, 단도, 포승줄, 구급 치료약을 배급 받았다고 한다.
남한의 고기잡이 어선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이들은 5월 19일 황해도 장산곶을 떠나 이틀간 서해에서 잠복한 뒤 21일 자정 무렵 남한의 어느 해안에 도착했다. 이어 도보로 광주 무등산 어느 사찰로 이동, 그곳에서 한 스님과 만났다. 스님과 문제심의 대화는 이랬다.
〈… “당에서는 동무가 파견된 지 몇 달 안 되는 기간에 정말 많은 임무를 수행했다고 높이 평가하였소.”
“소장 동지, 이번 광주폭동과 관련해 저희가 진행한 전투성과를 보고하겠습니다.”
까까머리 중의 말소리였다.
“이번 전라남도 각 지역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을 5400여 정을 노획하여 광주폭동 시민군을 무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00여 대를 노획하였습니다. 또한 폭약 저장소들을 습격하여 10t에 가까운 폭약과 4만 리터에 달하는 도화선과 35만 개의 뇌관을 탈취하였습니다.”
“소장 동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교도소 습격이 실패한 것입니다. 적들이 3m가 넘는 견고한 콘크리트 담벼락에 의지하여 저항하는 바람에 우리 쪽에서 희생자가 많이 났고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부득이 철수하였습니다.”
(중략) 남파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시민군과 진압군 두 부류로 나누어 침투했다는 것과, 상대방 진영에 총격을 가해 폭동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도 순성은 그때 알게 되었다. …〉(《보랏빛 호수》, p126~127)
무등산 어느 절의 ‘까까머리 중’의 이름은 ‘손성모’. 그는 1981년 문경에서 체포되어 19년간 감옥살이를 하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당시 특사로 가석방됐고 이듬해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게 정순성의 주장이다.
책에는 5·18 당시 구체적인 북한군의 작전상황도 담고 있다.
〈… 광주도청 지하실에 모인 청년들은 이번 광주폭동에 남파된 조선인민군 타격대 지휘관들이었다. 현지 상황 보고를 받고 난 문제심은 명령을 하달했다. “1타격대는 공수부대 군인들을 향해, 2타격대는 시민군 쪽을 향해 사격을 하라. 두 쪽에서 사망자가 나오게 정확히 쏴야 한다. 동시에 유언비어를 퍼뜨리도록 하라.”
문제심의 작전계획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그 몇 마디 명령 때문에 광주는 골육상쟁의 마당으로 번졌다. (중략) 광주 폭동 현장에 시민군으로 활약하던 북한 군인들을 시켜서 “전두환을 찢어 죽여라!”란 플래카드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내걸도록 지시했다.
대성공이었다. 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폭동은 번져 갔다. …〉(《보랏빛 호수》, p.135~136)
정홍원 총리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
《풍계리》는 북한군이 100명가량 남파했다고 쓰고 있지만 《보랏빛 호수》는 구체적인 남파 숫자를 적지 않았다. 다만 〈장산곶을 떠날 때 50여 명이었던 직속 부대원들 중 (정)순성의 조원들만 남아 있고 나머지 인원들은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난 뒤였다〉(p.134)는 표현이 나온다. 또 정순성의 여동생이 탈북해 남한 당국에서 조사를 받을 때 “오빠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200명은 넘는다”(p.47)고 말한 대목도 있다.
지난 4월 중순 재출간(2판2쇄)된 《5·18 최종보고서》(도서출판 시스템)도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 김명국(가명)의 증언을 수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김명국’과 《보랏빛 호수》에 나오는 ‘정순성’이 동일인물이거나 동일한 작전에 참여한 인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명으로 구성된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 지프로 대양리를 출발, 저녁 9시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북한대남연락소 기지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 (중략) 증언자가 호위했다는 파견대장 이름은 문제심, 2006년 당시 이곳의 국방차관급으로 출세했다. 문제심의 말로는 “그가 아는 남파부대원들에게 270명이 남파되었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7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 《5·18 최종보고서》, p.109)
김명국은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구체적 활동에 대해 “시민봉기군과 국군으로 가장했다. 시민군으로 가장한 북한 특수군 전사는 국군에게 총질을 했고, 국군으로 가장한 북한 특수군은 시민군에게 총격을 가해 서로에게 사상자를 발생시켜 서로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이간 책동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김명국은 지난 2013년 5월 15일 종편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그램에 출연, 북한 개입설을 주장한 일이 있다. 그는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발됐고 채널A는 방통위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강운태 광주시장은 김관진 국방장관을 찾아가 “광주에 북한군이 참전했는지” 여부를 물었고 김 장관은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개입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논란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민주당 정청래·임내현 의원 등은 그해 6월 10일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정홍원 국무총리를 추궁, “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는 답변을 끌어냈다. 당시 야당 의원과 정 총리의 일문일답이다.
〈(전략)
— 정청래 : 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 북한군이 쳐들어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국무총리(정홍원) :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정) 종편에서는 계속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총리) “그 점에 대해서는 방송통신 심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결론이 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략)
— (임내현 의원) TV조선과 채널A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광주에 몰래 잠입해서 일으킨 사태’라고 정체 모를 탈북자의 진술만을 근거로 방송을 내보낸 것 아시지요?
(총리) “예.”
— (임) 방심위 심사에 나온 채널A 보도본부장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오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오히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반문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총리) “하여튼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의 판단입니다.” (후략)〉
허화평, “5·18 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 의혹 제기
“북한군이 5·18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지만 북한군 개입설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한 관계자는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런 대규모 남파 가능성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희박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자와 통화한 정보당국의 한 인사는 “북한군이 아닌, 소규모 조직의 비정규 부대나 남한 내 활동하던 고정간첩의 개입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기자는 몇 해 전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5·18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은 전두환. 모든 정보가 그의 손을 거쳐 전두환 사령관에게 전달됐다.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허 전 수석은 “광주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나의 고백이 5·18 광주시민의 희생을 건드리거나 원점에서 시비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퇴진’이나 ‘계엄해제’ 요구와 비교해 지나친 것이었다. 평범한 시민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군 속에 숨어 있던 소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으로 군은 판단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5·18 당시의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적은 없지만 탈북자들의 주장이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부풀려지거나 사실을 왜곡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완전한’ 5·18 진실규명에 북한군 개입설도 포함될 수 있을까.⊙
현재 청와대는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을 위해 대(對)국민 공감대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광주시와 지역 정치권도 ‘5·18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진실규명의 범주에 북한군 개입설까지 포함시킬지는 미지수다.
최근 들어 5·18 당시 북한군 개입 의혹을 가장 먼저 제기한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4월 초 펴낸 《전두환 회고록》(전3권, 자작나무숲)에서 전 전 대통령은 광주 5·18 사태가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그 이유로 ▲무기고 위치파악·습격·탈취 ▲짧은 시간 내 수백 대의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집결 ▲일반인의 장갑차 운전 등을 들었다.
〈… 해당 직장이나 지역 사람이 아니고 광주에서 각지로 흩어져 내려간 사람들이, 사전에 파악해 두지 않은 상황에서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군부대의 무기고는 그 위치 자체가 군사기밀이다. 무기고 탈취는 군대에서도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 시민들이 우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또 짧은 시간 안에 수백 대의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집결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운전자가 많지 않았고, 운전 기술과 경험은 지금처럼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 (중략) 특히 일반 시민이 장갑차를 몰고 이동했다는 건 해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1》, p.406)
당시 검찰의 수사기록과 안기부 자료에 따르면, 광주 시위대는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불과 4시간 사이에 17개 시와 군에 소재한 38개의 무기고에서 5000여 정의 총기를 탈취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화순광업소에서 8t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탈취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다.
전 전 대통령은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진실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가능한 조사만이라도 이뤄져야 한다”며 진실규명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5·18 단체와 유족들이 민주 유공자와 광주시민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회고록의 출판과 배포를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풍계리 핵과학자 아내의 5·18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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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역. 지난 5월 18일 제37주년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
저자 김평강은 탈북 작가로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근무했던 핵과학자의 아내다. 2000년 말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했다.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김평강은 자신의 아버지와 장성택 등에게 듣게 됐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장성택과 김일성종합대 동창이다. 그의 집에는 김일성대 교수인 형부를 비롯해 북한 엘리트들이 자주 모였다고 한다. 덕분에 ‘김일성 일가의 비밀스런 속살’을 곁에서 볼 수 있었다.
〈… 식민지 파쇼정권에 반대하여 5·18 광주 인민봉기의 시위 현장으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을 도와 간다고 하면서 기세 충천하여 떠났던 영웅들이었다. 통일전사들은 국방군에 의하여 발각이 되었다. 유철용은 긴급후퇴 명령을 내렸고 무선을 통하여 조선인민군사령부에 퇴각의사를 밝혔다. (중략) 그들은 남조선 국방군의 추적을 피하여 산에 숨어 들어가 헤매다가 약속한 귀가시간 내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하지 못했다. (중략) 미처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남측 복장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당시 북조선 제8군단이 시험포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복귀하던 그들을 지도간부 3명만 빼고 모두 사살하였다. …〉(《풍계리》, p.90~91)
《풍계리》에는 5·18 당시 100명의 ‘통일전사’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담지 않았다. 북한에서 광주로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모호하다. 다만 우리 국군에 발각되자 도보로 북한쪽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했다고 적고 있다.
기자와 만난 김씨는 “북한 당국이 일부러 97명을 죽였다. 이남에 갔다온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격훈련을 조작해 죽였다”고 말했다. 이들의 시신은 평양의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살아남은 3명은 지금도 대남사업부와 통일전선부에서 수장으로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탈북군인 정순성·김명국, 5·18 광주에서 북한 특수군 활동
“아버지와 장성택에게 들은 얘기”라는 탈북작가 김평강의 주장과 달리, 지난 5월 중순 출간된 《보랏빛 호수》(비봉출판사)는 직접 5·18 당시 작전에 참여한 탈북 군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북한 1010 군부대 ‘019번’이란 숫자로 5·18 당시 광주에 갔다는 정순성(가명)은 북한으로 돌아와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파견대장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당시 파견대장 이름은 ‘문제심’이었다. 책에는 정순성이 광주로 내려가기 앞서 총탄 300발, 수류탄 2발, 권총 1정, 카빈총 1정, 단도, 포승줄, 구급 치료약을 배급 받았다고 한다.
남한의 고기잡이 어선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이들은 5월 19일 황해도 장산곶을 떠나 이틀간 서해에서 잠복한 뒤 21일 자정 무렵 남한의 어느 해안에 도착했다. 이어 도보로 광주 무등산 어느 사찰로 이동, 그곳에서 한 스님과 만났다. 스님과 문제심의 대화는 이랬다.
〈… “당에서는 동무가 파견된 지 몇 달 안 되는 기간에 정말 많은 임무를 수행했다고 높이 평가하였소.”
“소장 동지, 이번 광주폭동과 관련해 저희가 진행한 전투성과를 보고하겠습니다.”
까까머리 중의 말소리였다.
“이번 전라남도 각 지역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을 5400여 정을 노획하여 광주폭동 시민군을 무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00여 대를 노획하였습니다. 또한 폭약 저장소들을 습격하여 10t에 가까운 폭약과 4만 리터에 달하는 도화선과 35만 개의 뇌관을 탈취하였습니다.”
“소장 동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교도소 습격이 실패한 것입니다. 적들이 3m가 넘는 견고한 콘크리트 담벼락에 의지하여 저항하는 바람에 우리 쪽에서 희생자가 많이 났고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부득이 철수하였습니다.”
(중략) 남파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시민군과 진압군 두 부류로 나누어 침투했다는 것과, 상대방 진영에 총격을 가해 폭동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도 순성은 그때 알게 되었다. …〉(《보랏빛 호수》, p126~127)
무등산 어느 절의 ‘까까머리 중’의 이름은 ‘손성모’. 그는 1981년 문경에서 체포되어 19년간 감옥살이를 하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당시 특사로 가석방됐고 이듬해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게 정순성의 주장이다.
책에는 5·18 당시 구체적인 북한군의 작전상황도 담고 있다.
〈… 광주도청 지하실에 모인 청년들은 이번 광주폭동에 남파된 조선인민군 타격대 지휘관들이었다. 현지 상황 보고를 받고 난 문제심은 명령을 하달했다. “1타격대는 공수부대 군인들을 향해, 2타격대는 시민군 쪽을 향해 사격을 하라. 두 쪽에서 사망자가 나오게 정확히 쏴야 한다. 동시에 유언비어를 퍼뜨리도록 하라.”
문제심의 작전계획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그 몇 마디 명령 때문에 광주는 골육상쟁의 마당으로 번졌다. (중략) 광주 폭동 현장에 시민군으로 활약하던 북한 군인들을 시켜서 “전두환을 찢어 죽여라!”란 플래카드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내걸도록 지시했다.
대성공이었다. 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폭동은 번져 갔다. …〉(《보랏빛 호수》, p.135~136)
정홍원 총리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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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5·18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책들. |
지난 4월 중순 재출간(2판2쇄)된 《5·18 최종보고서》(도서출판 시스템)도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 김명국(가명)의 증언을 수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김명국’과 《보랏빛 호수》에 나오는 ‘정순성’이 동일인물이거나 동일한 작전에 참여한 인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명으로 구성된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 지프로 대양리를 출발, 저녁 9시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북한대남연락소 기지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 (중략) 증언자가 호위했다는 파견대장 이름은 문제심, 2006년 당시 이곳의 국방차관급으로 출세했다. 문제심의 말로는 “그가 아는 남파부대원들에게 270명이 남파되었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7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 《5·18 최종보고서》, p.109)
김명국은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구체적 활동에 대해 “시민봉기군과 국군으로 가장했다. 시민군으로 가장한 북한 특수군 전사는 국군에게 총질을 했고, 국군으로 가장한 북한 특수군은 시민군에게 총격을 가해 서로에게 사상자를 발생시켜 서로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이간 책동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김명국은 지난 2013년 5월 15일 종편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그램에 출연, 북한 개입설을 주장한 일이 있다. 그는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발됐고 채널A는 방통위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강운태 광주시장은 김관진 국방장관을 찾아가 “광주에 북한군이 참전했는지” 여부를 물었고 김 장관은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개입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논란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민주당 정청래·임내현 의원 등은 그해 6월 10일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정홍원 국무총리를 추궁, “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는 답변을 끌어냈다. 당시 야당 의원과 정 총리의 일문일답이다.
〈(전략)
— 정청래 : 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 북한군이 쳐들어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국무총리(정홍원) :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정) 종편에서는 계속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총리) “그 점에 대해서는 방송통신 심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결론이 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략)
— (임내현 의원) TV조선과 채널A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은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광주에 몰래 잠입해서 일으킨 사태’라고 정체 모를 탈북자의 진술만을 근거로 방송을 내보낸 것 아시지요?
(총리) “예.”
— (임) 방심위 심사에 나온 채널A 보도본부장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오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오히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반문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총리) “하여튼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의 판단입니다.” (후략)〉
“북한군이 5·18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지만 북한군 개입설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한 관계자는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런 대규모 남파 가능성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희박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자와 통화한 정보당국의 한 인사는 “북한군이 아닌, 소규모 조직의 비정규 부대나 남한 내 활동하던 고정간첩의 개입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기자는 몇 해 전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5·18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은 전두환. 모든 정보가 그의 손을 거쳐 전두환 사령관에게 전달됐다.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허 전 수석은 “광주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나의 고백이 5·18 광주시민의 희생을 건드리거나 원점에서 시비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퇴진’이나 ‘계엄해제’ 요구와 비교해 지나친 것이었다. 평범한 시민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군 속에 숨어 있던 소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으로 군은 판단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5·18 당시의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적은 없지만 탈북자들의 주장이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부풀려지거나 사실을 왜곡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무엇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완전한’ 5·18 진실규명에 북한군 개입설도 포함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