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14〉

토루 속의 진짜배기 한족 ‘객가’의 냥주 & 격전의 전쟁터에서 빚는 ‘진먼고량주’

  •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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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젠지역에서 나는 품질 좋은 찹쌀로 빚은 냥주
⊙ 진먼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널리 퍼진 진먼고량주

牟鍾赫
⊙ 45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1980년대 어느 날 미국 중앙정보국(CIA) 내 위성사진판독실. 분석요원들이 첩보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판독하고 있었다. 당시 첩보위성은 갓 운용하기 시작해 지구 곳곳을 초정밀로 촬영해 나갔다. 한 요원이 중국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이상한 건축물 수십 개를 발견했다. 원형으로 된 대형 건물이었으나 중간이 비었다. 사각으로 지은 건축물도 있었다. 분석요원은 중국이 새로운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독 결과를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각계의 중국 전문가들이 모여 사진을 재판독한 결과 객가인(客家人)이 사는 집으로 판명됐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해프닝이다. CIA 분석요원을 멋쩍게 만들었던 건축물은 토루(土樓)다. 토루는 흙으로 쌓아올린 집이란 뜻이다. 오직 중국에서만 보이는 객가인의 전통 건축물이다. 객가는 중국 전역에 퍼져 살지만, 토루는 오직 푸젠(福建)·광둥(廣東)·장시(江西) 등 3개 성에서만 지었다. 형태는 원형, 방형(方形), 장방형, 사각형, 타원형 등 다양하다. 한 채가 마치 성채만큼 거대하다. 고운 점토, 삼나무(杉木), 돌, 기와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었다. 특히 외벽이 아주 두껍다. 보통 폭이 150cm를 넘는다.
 
  외벽은 오리나무와 대나무를 뼈대로 흙으로 다져서 철근처럼 단단하다. 이렇듯 튼튼해서 웬만한 외부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다. 대문도 마찬가지다. 돌이나 철판 입힌 나무로 만들어 웬만한 충격에 끄떡없다. 이 문만 닫아 놓으면 토루는 든든한 보루(堡壘)가 된다. 왜냐하면 외벽 층의 창문 구조도 방비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1층은 창문이 전혀 없다. 2층에는 조그만 창을 만들어 바깥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3층부터 정상적인 창문을 두어 외부 침입을 원천 봉쇄했다. 꼭대기에는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복도를 만들었다.
 
  이 같은 건축양식은 어떤 형태의 토루이든 적용된다. 단지 층수만 3층 혹은 4층으로 다를 뿐이다. 외부와 달리 내부는 완전한 개방형 구조다. 형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1층에는 거실과 부엌, 묘당(廟堂)이 있다. 2층은 침실이나 창고로 쓰고 3~4층은 모두 침실이다. 마당에는 사당을 지었다. 그 옆에는 수백 명이 한 달 동안 충분히 마시고 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수맥을 갖춘 우물이 있다. 이 넓은 주택에 적게는 수십 가구에서 많게는 300여 가구가 생활한다. 하나의 거대한 씨족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가는 것이다.
 
토루는 보통 개울 옆이나 수맥이 풍부한 곳에 지었다. 특히 난징현의 객가 마을이 모두 이러하다.
  토루를 명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객가의 역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객가는 본래 황허(黃河) 중류를 중심으로 중국 북부에 살았던 한족이다. 이들은 과거 대륙에서 일어난 전란과 자연재해를 피해 여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1차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 남부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파견하면서부터다. 214년에는 추가로 50만명을 파병했다. 군사들은 식솔을 데리고 근무지로 가 둔전(屯田)하면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적지 않은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아 최초의 객가인이 됐다.
 
  2차는 4세기 초에 벌어진 영가(永嘉)의 난에서 비롯했다. 300년 서진(西晉) 혜제 때 황족들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다. 회제가 황위를 이었으나 정국은 안정되질 못했다. 311년 흉노의 족장인 유연이 독립을 선언하고 거병해 뤄양(洛陽)을 함락했다. 흉노군은 전쟁에서 진 병사 10만명을 학살했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서진이 망하자 일부 황족이 난징(南京)에서 동진을 건국했다.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혼란과 전쟁을 피해 약 96만명이 양쯔강(長江) 이남으로 이주했다.
 
  3차는 당대 후기 안사의 난과 황소(黃巢)의 난 때다. 755년 돌궐 출신 무장인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켜 당의 명운을 바꿨다. 전쟁은 8년간 지속됐는데, 그 사이 가구 수가 890만호에서 293만호로 줄어 약 3000만명이 죽었다. 당대판 ‘킬링 필드’로 불러도 과하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874년 일어난 황소의 난도 대륙 전역에서 크고 작은 민중봉기를 동반하면서 7년이나 계속됐다. 부패한 관리의 수탈로 경제적 기반을 잃은 농민들이 봉기에 적극 합세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전란을 피해, 일부는 당군의 진압을 피해 중국 남부로 이주했다.
 
  4차는 정강(靖康)의 변으로 촉발됐다. 북송 휘종은 금과 동맹을 맺어 요의 연운(燕雲) 16주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금에게 북송의 군사력이 허약한 꼴만 보여주면서 내침을 받게 됐다. 1126년 금군은 카이펑(開封)을 함락했고 휘종과 흠종 그리고 왕족 3000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했고 중국 북부는 북방 유목민족의 수중으로 완전히 떨어졌다. 북부에서 탈출한 고관대작과 사대부가 대거 남부로 이주했고, 이듬해 항저우(杭州)에서 남송이 건국됐다. 지식 소양이 높은 사대부가 객가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객가의 문화 수준이 괄목상대해진다.
 
샤먼-진먼다오지도(○ 표시한 곳에 토루가 있다).
 
  토루가 생겨나게 된 까닭
 
토루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단 하나의 문만 갖췄다.
  5차는 명말·청초로, 왕조의 교체보다 자연재해의 영향이 컸다. 당시 푸젠과 광둥의 객가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먹고살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수년 동안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자, 여러 씨족공동체 사이에서 서진(西進)운동이 일어났다. 마침 청 조정도 오랫동안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인구가 급감한 쓰촨(四川)으로의 이주를 장려했다. 이 시기 쓰촨으로 옮겨갔던 객가의 후손으로는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 주더(朱德)와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대표적이다.
 
  6차는 태평천국 운동으로 비롯됐다. 태평천국은 1851년 비밀결사인 ‘배상제회(拜上帝會)’가 건국했다. 배상제회는 겉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객가 공동체를 배경으로 조직됐다. 수장인 홍수전과 대다수 지도부가 객가 출신인 데서 잘 드러난다. 태평천국은 한때 중국 남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1864년 붕괴했다. 그 뒤 청조는 객가를 혹독히 탄압했다. 이에 수많은 객가인들이 동남아와 미주로 이주했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 및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당선자 등이 이들의 후손이다.
 
토루의 내부 모습. 토루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 우물이다.
  객가가 이주했던 땅에는 이미 토착민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객지인이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객가는 산악지대로 들어가 독자적인 씨족공동체를 구성했다. 또한 토착민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개념으로 ‘손님’이란 뜻인 객가라 부르게 됐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들의 후손은 얼마나 될까? 중국에서는 푸젠, 장시, 광둥, 광시(廣西) 등 19개 성·시에 7400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미국, 칠레 등 전 세계 80여 개국에 2500만명이 거주한다.
 
  객가인은 어디에 살든 자신들이 ‘진짜배기 한족‘이라 여기면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원에서 내려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축했고 독특한 객가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객가어는 당·송대 한족 언어의 순수성이 잘 보존됐다. 이에 반해 현대 중국어는 서역어, 몽골어, 만주어 등 북방 유목민족의 발음과 억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옛 제례의식과 풍습을 1000여 년 동안 변치 않고 보존해 왔다. 음식문화도 원형 그대로 계승하면서 이주한 지역의 환경에 접목해 재창조했다. 객가의 차(茶)문화는 서구세계에 큰 영향을 줬을 정도로 풍성하다.
 
  이런 문화와 생활의 특징은 토루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토루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은 푸젠성 난징(南靖), 융딩(永定), 화안(華安) 등지다. 그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토루가 무려 3000여 개나 남아 있다. 그중 보존이 완벽한 46개를 2008년 중국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토루는 12세기 송대에 처음 나타났다. 객가는 깊은 산속이나 험한 고개에 대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집을 건축했다. 북부에서 가족 모두가 이주해 와 척박한 대지를 일구며 정착해야 했기에, 대가족이 함께 살며 힘을 합치는 것은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토루는 보통 4층으로 짓고 수직으로 나누어 한 가족이 한 칸을 사용한다.
  토루의 건축은 전통 풍수지리와 첨단기술을 총동원했다. 특히 풍수를 고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토루를 지을 때는 먼저 어떤 위치에 지을지를 선정한다. 여기에 ‘산은 사람을 다스리고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山管人丁水管財)’는 객가의 속담이 잘 응축되어 있다. 실제 대부분 토루는 산에 기대어 있으면서 앞이 트인 작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전면이나 측면에 하천이 있거나 지하수맥이 풍부한 곳이 보통이다. 이처럼 풍수는 객가인과 토루에 있어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결의 요소다. 오늘날 홍콩과 대만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풍수가도 대부분 객가 출신이다.
 
  집터를 정했으면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간다. 먼저 대문을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정한다. 대문을 건축물의 기준으로 삼아서 원을 그린다. 그 선상에 외벽의 기둥이 될 말뚝을 줄지어 박고 지반을 다진다. 이 작업이 끝나면 음식을 준비해 살 곳을 짓도록 도와주신 조상께 제사를 지낸다. 제사 뒤에는 외벽 공사에 돌입한다. 외벽 하단은 돌담으로 세우고, 그 위로는 오리나무와 대나무로 촘촘히 다져서 강철과 같은 흙벽을 만든다. 이 흙벽의 하단 폭은 170cm, 평균 150cm로 웬만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1층의 흙벽 공사를 어느 정도 진행하면, 그 안쪽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방을 짓는다. 층별로 한 칸씩 정교하게 나무로 맞추어 간다. 여기서 흙벽과 나무의 이음이 정교하게 맞아야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 있다. 보통 층마다 외벽을 먼저 세우고 내부의 방과 복도를 짓는다. 그런 뒤 다시 위층 공사를 진행하는 식이다. 이 공사가 모두 끝나면 기와로 지붕을 얹는다. 끝으로 안과 밖의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장식하고 보수작업을 마친다. 대문은 단 하나만 둔다. 철판 입힌 나무로 만든 대문 위에는 작은 관을 설치한다. 이는 외부에서 공격받을 때 뜨거운 물을 뿌리기 위해서다.
 
 
  객가가 생산하는 품질 좋은 찹쌀을 주원료로 빚은 냥주
 
4층에서 바라본 토루의 내부는 흡사 작은 성 안을 연상케 한다.
  문과 외벽은 토루의 특징인 강력한 방어성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산적의 노략질이 끊이질 않았고, 야생동물의 공격도 흔했기 때문이다. 토루 건설에 있어 마지막 작업은 마당 조성이다. 마당에는 선조(先朝)와 전통을 존중하는 객가의 관념이 잘 나타나 있다. 중앙 한복판에는 조당(祖堂)을 지어 조상신을 모신다. 여기에 모시는 조상은 남방으로 갓 이주해 왔을 때 혹은 토루를 처음 건설했던 선조를 가리킨다. 매년 선조의 생일과 기일에는 온 씨족이 조당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객가인은 이런 전통 건축술과 사상을 바탕으로 1960년대까지 토루를 지었다.
 
  보통 한 토루에 한 씨족 또는 한 대가족이 살았다. 그렇기에 성을 앞에 붙여 ‘○○루(樓)’라고 불렀다. 하나의 토루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다. 객가인은 토루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서당, 식당, 목욕탕 등 필요한 시설을 골고루 갖췄다. 토루의 침실은 2층부터 4층까지 두는데, 보통 한 가족을 한 단위로 해서 수직적으로 배열했다. 흥미로운 점은 집을 지을 때는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고 규모를 크게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대 지어졌던 원형 토루의 경우 방은 300여 칸에 달했고 최대 90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독립된 토루에서 사는 이들답게 객가는 철저히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를 갖췄다. 토루 주변에는 개천이 흐르거나 수맥이 있다. 이 물을 이용해 객가인은 쌀, 옥수수, 감자, 야채, 과일 등을 심어 수확한다. 특히 객가가 생산하는 쌀과 차는 품질이 아주 뛰어나다. 객가쌀에는 북방과 남방의 도작(稻作)문화가 한데 융합되어 있다. 그렇기에 남부의 여느 쌀보다 윤기가 흐르고 맛있다. 객가차는 청대 최상품으로 쳐 줄 만큼 유명했다. 청대 유일한 대외무역항이었던 광저우(廣州)의 13행을 통해 서구세계로 수출했던 차가 바로 푸젠의 객가차였다.
 
토루는 객가인의 심오한 풍수사상과 뛰어난 건축술이 응집된 건축물이다.
  푸젠의 객가인들은 경작한 찹쌀로 ‘냥주(娘酒)’를 빚는다. 이 냥주의 양조법은 우리의 쌀술과 유사하고 제조과정이 간단하다. 먼저 찹쌀을 씻은 뒤 물에 담가 하루 동안 불린다. 불린 쌀은 건져서 물기를 빼고 시루에 푹 찐 다음 차게 식힌다. 여기에 누룩과 고두밥을 섞고 물을 부은 뒤 비비고 증류한 술을 더한다. 이것을 술독에 담아 적당한 온도에 반나절 정도 끓이면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난다. 이때 술독 주둥이에 구멍을 내고 다시 이틀 정도 놔둔다. 그러면 냥주는 어느덧 일정하게 발효되어 숙성된다.
 
  그렇다면 미주(米酒)라 하질 않고 왜 냥주라 부를까? 여기에는 객가의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객가는 전란을 피해 북방에서 내려왔다. 4차 이주시기 한 무리의 대가족이 고향을 떠나 수개월 동안 남하한 끝에 푸젠의 산골까지 걸어왔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탓에 온 가족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해 버렸다. 모든 토착민들이 그들을 적대시했지만, 한 백발의 노파는 달랐다. 그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대나무 통에 담긴 술을 건넸다. “어서들 마셔 보게나. 금방 기력을 회복할 걸세.”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는 술을 연장자부터 들이켰다. 잠시 후 혼미한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이 점점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노파는 “이 술은 찹쌀로 지었다”면서 자세한 양조기술을 가르쳐 줬다. 자신들을 따뜻이 반겨 주고 술 제조법까지 알려준 노파를 온 가족은 그 뒤 어머니처럼 받들었다. 그리하여 술 이름을 ‘어머니(娘)의 술’이란 냥주로 명명했다. 객가인들은 “누구나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냥주를 제조한다. 임산부는 산후조리(坐月子)를 할 때 냥주를 마신다. 그 때문에 지금도 어느 토루를 가든 특색 있는 맛과 향내를 지닌 냥주를 마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명절이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거행할 때,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도 담가 놓았던 냥주를 꺼내어 마신다. 평소에도 음식을 만들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조미료가 바로 냥주다. 이처럼 푸젠 객가인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술 예절에 있어서 객가인은 손님을 대접할 때 술주전자의 꼭지를 절대 손님에게 향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렇게 두는 것은 상대방을 경원시한다는 뜻으로 아주 실례되는 행위다. 또한 술잔을 부딪칠 때 잔 윗선이 연장자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 이런 전통적인 술 예절은 오늘날 중국에서 오직 베이징(北京)인과 객가인만이 철저히 지키고 있다.
 
 
  푸젠 앞바다 섬에 동서 융합건축물이 들어선 이유
 
서양의 건축술에 진먼의 개성이 담긴 건축물 더웨러우.
  산간지방에 토루가 있다면, 푸젠 앞바다의 섬에는 동서 융합건축이 있다. 우리에겐 개혁개방 이후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나로 유명한 샤먼(廈門)의 코앞 진먼다오(金門島)가 그 현장이다. 진먼의 모든 섬은 샤먼에서 10km도 안 될 만큼 가깝다. 샤먼의 양탕(陽塘)에서 진먼의 시위안(西園)은 2.4km에 불과하다. 중국과 대만(臺灣)을 가로지른 대만해협(海峽)의 거리는 남북한을 둘로 쪼갠 비무장지대만큼이나 좁다. 이에 비해 진먼에서 대만까지는 165km나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진먼은 엄연히 대만의 영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진먼은 행정구역상 대만 본토 소속이 아니다. 대만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시에 속한다. 이 때문에 진먼은 대만에서 유일한 특별자치현으로 중앙정부 직속이다. 어찌하여 이리 복잡한 내력을 지니게 된 것일까? 진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계바늘을 과거로 되돌려 살펴봐야 한다. 이 섬은 3세기 진(晋)나라에서 건너간 소(蘇), 진(陳), 오(吳) 등 여섯 성씨의 가족이 처음 개척했다. 803년 당대 취안저우부가 5대 목장 중 하나를 진먼에 설치하면서 다른 열두 성씨의 가족이 이주했다.
 
  원대부터 청대까지는 조정에서 염전을 개발하면서, 진먼은 푸젠에서 으뜸가는 소금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다. 소금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켜 긴 세월 동안 섬 주민들을 굶주림 없이 살게 했다. 진먼이 중국 역사에 첫 등장하는 것은 청대 초기다. 해적 출신으로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치를 들고 청에 대항했던 정성공(鄭成功)의 본거지가 진먼과 샤먼이었다. 정성공은 당시 대만을 점령했던 네덜란드와 대륙 사이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고 군비를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658년 17만의 대군과 선단을 이끌고 난징(南京)을 공략했으나 청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그 뒤 정성공은 청조의 압박을 피해 대만으로 건너갔다.
 
  1680년 청은 우환덩어리인 대만을 정벌하기 위해 먼저 진먼을 쳤다. 3년 뒤 진먼에서 출발한 청군은 대만 점령에 성공했다. 진먼은 청대에는 퉁안(同安)현에 속했는데, 1915년 독립된 현으로 승격했다. 이런 역사적 연혁과 배경 때문에 지금까지 대만정부는 진먼을 푸젠성 관할로 두고 있다. 대만은 자국 헌법상 대륙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비록 행정권은 미치지 못하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진먼을 푸젠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동남아에 진출한 진먼인들은 약방을 통해 고향에 돈과 안부를 전했다.
  그렇다면 앞서 거론한 동서 융합건축은 어찌된 영문일까? 여기에는 진먼다오의 눈물과 환희 어린 역사가 서려 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아시아의 늙은 용’ 청은 영국에 참패했다. 1842년 맺어진 양국 간의 난징조약으로 청은 상하이(上海), 닝보(寧波) 등 5개 항구를 대외 개방했다. 이 중 하나가 샤먼이었다. 샤먼은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경제와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이에 따라 소금의 소비도 늘어나자, 진먼 이외에 염전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시장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진먼의 소금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잃어 갔다.
 
  생존을 위해 진먼인들이 선택한 출로는 해외진출이었다. 본래 진먼에는 어민들이 많아 각지로 나가는 뱃길에 익숙했다. 따라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교(華僑)’가 된 것이다. 진먼인들은 동남아 각국에 도착해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번 돈을 고향으로 보냈다. 1920년대까지 그들이 이용했던 송금창구는 흥미롭게도 차이나타운의 약방(藥房)이었다. 약방은 중국 본토에서 대부분의 약재를 사들였다. 동남아에 진출한 진먼인들은 약방 주인의 귀향 길에 돈과 편지를 딸려 보냈다.
 
  20세기 초부터 사업에 성공한 진먼 출신 화교의 금의환향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구와 가까운 수이터우(水頭)촌에 몰려 살면서 독특한 양식의 집을 지었다. 바로 동남아 현지에서 본 서구의 건축술과 접목시킨 동서 융합식이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더웨러우(得月樓)다. 더웨러우는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에 성공한 화교 황옌황(黄延煌)이 1930년대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이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황옌황은 네덜란드 건축술을 이식해 와 진먼의 전통건축술과 접목시켰다.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진먼의 사정을 고려해 담장을 높이 쳤고, 높은 망루(望樓)를 지었다.
 
  귀향 화교들은 수이터우에 진먼 최초의 근대식 초등학교도 열었다. 서구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진수이(金水)소학교다. 오늘날까지 동남아에 진출했던 진먼인들의 귀향과 투자는 끊이질 않고 있다. 푸젠성 전체로 봤을 때 전 세계 화교의 30%, 싱가포르 화교의 70%가 푸젠 출신이다. 이들의 투자는 진먼에 큰 힘이 됐다. 왜냐하면 진먼은 전체 면적 153km²(다진먼은 135km²)에 불과한 작은 군도(群島)이기 때문이다. 다(大)진먼, 샤오(小)진먼, 다단다오(大膽島) 등 1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됐다.
 
 
  진먼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일촉즉발 위기
 
오늘날 스쯔산(獅子山) 포대에서는 매일 4차례씩 1958년 포격전을 재연하고 있다.
  이런 작은 군도가 20세기 중반에는 참혹한 전쟁터로 변했다. 무려 21년간 역사상 최장의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른바 ‘진먼포격전’이 그것이다. 1949년 10월 1월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위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3주 뒤 샤먼에서 화동야전군 10병단이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대만으로 도망간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 군대를 치기 위해서였다. 10병단 사령관 예페이(葉飛)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예는 “저 눈앞에 보이는 진먼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대륙과 대만을 연결해 주는 통로다”라며 작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당시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파죽지세로 샤먼까지 밀고 내려와 사기가 높았다. 또한 진먼에는 국민당 패잔병만이 지키고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진먼에는 대만인으로 구성된 2만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륙에서 넘어온 18군도 합류했다. 이들을 이끈 후롄(胡璉) 사령관은 중일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명장이었다. 10월 24일 사위가 어두워지자, 10병단 병사들은 목선 수백 척을 타고 샤먼을 출발했다. 상륙부대가 구닝터우(古寧頭) 해변에 도착할 쯤 샤먼에서 포격으로 지원했다. 병사들은 기세당당하게 배에서 내렸으나 지뢰와 포탄·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상륙작전은 3일 뒤 3000여 명의 전사자와 7000여 명의 포로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첫 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중국군은 진먼 점령을 포기하질 않았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자, 중국군은 육·해·공으로 완벽한 상륙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마오는 출정을 명령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첨단병기의 쓴맛을 톡톡히 봐서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다. 그랬던 마오가 1958년 8월 23일 진먼에 대한 공격을 명령해 진먼포격전의 서막이 열렸다. 이날 샤먼의 포병부대는 459문의 대포를 동원했다. 또한 80여 척의 군함과 2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원해 진먼을 공격했다.
 
  갑작스런 중국군의 습격으로 진먼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하루 만에 부사령관 3명과 수백 명의 대만군 장병이 숨졌다. 수일간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바다에선 양국 함정이 치열한 해전을 펼쳤다. 하늘에선 양국 전투기의 공중전이 장관을 이뤘다. 이에 미국은 항공모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 등을 대만에 출동시켰다. 일본에 주둔했던 해병대 3800명도 수송기를 나눠 타고 대만에 내렸다. 금방이라도 중국과 미국 사이 전면전이 벌어질 기세였다. 하지만 전황은 이해 못할 방향으로 전개됐다. 중국군은 진먼으로 진입하는 대만 함선과 비행기만 공격했다.
 
8·23기념관에 전시된 각종 대만군 병기. 1958년 당시 사용했던 무기다.
  마오는 장군들에게 미군 군함으로부터 포격을 받더라도 절대 선제공격이나 반격을 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미군 선단도 진먼에 진입하는 흉내만 냈을 뿐 선수를 곧 대만으로 돌렸다. 9월 말 진먼은 식량과 탄약이 거의 바닥나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데 중국군은 진먼에 상륙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마오는 애초부터 전면전을 치를 의사가 없었다. 포격전이 벌어지기 한 달 전 이라크에서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심 왕조가 타도되고 공화국이 수립됐다. 미국은 혁명의 불길이 중동 전역으로 퍼지는 양상을 막기 위해 6함대를 파견했다.
 
  중국은 6함대의 화력을 분산시켜 중동의 혁명세력을 간접 지원하고자 했다. 이에 진먼 공격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국도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1957년에는 소련이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다. 만약 중국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소련과 핵전쟁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이에 미군 선단은 대만해협을 떠돌며 군사시위만 벌였다. 10월 13일 중국은 돌연 포격중지를 선언했다. 평화회담을 제의하면서 미국과 대만 사이를 이간질했다. 10월 말에는 진먼으로 들어가는 대만 함정의 진입을 용인했다.
 
  그 뒤 국공(國共) 양군은 짝수 및 홀수 날을 번갈아 가며 포탄을 쏘았다. 이듬해부터는 적지가 아닌 바다를 향해 쏘아댔다. 전쟁이 진먼에 끼친 피해는 엄청났다. 군인과 민간인 618명이 죽었고 2600여 명이 다쳤다. 전체 군도에 떨어진 포탄은 무려 47만 발이었다. 진먼포격전은 1979년 1월 중국과 미국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는 날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대만은 진먼을 요새화했다. 1958년부터 모두 12개, 총 연장 10여km에 달하는 지하갱도를 건설했다. 각종 군사시설, 주민 4만여 명이 생활할 수 있는 거주공간 등 엄청난 대역사를 벌였다. 이 지하갱도를 1992년에야 완공했다.
 
  1961년부터 5년간 화강암을 뚫어 조성한 자이산(翟山)갱도가 대표적이다. 자이산갱도는 바다에서 섬 안으로 연결되는 수로와 지하도로로 구성되어 있다. 수로는 A자로 높이 8m, 폭 11.5m, 길이 357m에 달한다. 도로는 높이 3.5m, 폭 6~7m이다. 수로는 상륙용 주정(LST) 42척이 한꺼번에 머물 정도로 크다. 도로는 탱크가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갱도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담수로 바꾸는 시설을 만들어 게릴라전까지 준비했다. 또 다른 진청(金城)갱도에는 현정부 청사, 관공서, 은행, 학교 등을 조성했다. 지하 6~7m 아래에 총연장이 2.6km에 달한다.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총통이 마신 진먼고량주
 
진먼고량주는 지하갱도의 저장고에 마련한 항아리에서 숙성한다.
  이 같은 전쟁터 체험을 위해 오늘날 진먼다오를 찾는 관광객 중 적지 않은 수가 중국인이다. 2014년 진먼을 방문한 중국인은 54만4000명이었다. 이는 전체 관광객 141만명 중 39%에 달했다. 중국인은 진먼·마쭈(馬祖)와 푸젠 간에 소삼통(小三通)이 허용된 2001년에는 951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5년 1만4000명, 2010년 15만명 등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본래 진먼은 대만인들도 쉽게 방문하질 못했다. 대만은 1987년 계엄이 해제됐지만, 진먼은 1992년까지 계엄통치가 계속됐다. 이때까지 진먼인들은 어로활동을 못했고, 밤 10시 이후 통행과 점등이 금지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계엄기간 진먼 주민들을 먹여살린 구세주는 10만명의 주둔군이었다. 대만정부는 군인들에게 진먼에서만 쓸 수 있는 지폐로 월급을 지급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은 진먼에서 먹고 쓰고 놀았다. 1937년 설립된 칼 제조공장 진허리(金合利)도 이때 급성장했다. 군대 내 부엌칼과 대검 수요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쩡둥(吳增棟·59) 사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섬 곳곳에 박힌 수십만 발의 포탄 중 일부를 수거해 다양한 칼을 만들었다. 바로 현재 중국인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양대 특산품 중 하나인 포탄 칼(砲彈鋼刀)이다.
 
  또 다른 특산물은 진먼고량주(高粱酒)다. 진먼고량주는 대만의 대표 전통주로, 동아시아의 주당들도 인정한다. 이 술을 생산하는 진먼술공장(酒廠)은 진먼현 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이다. 1952년 설립한 주룽장(九龍江)술공장이 전신이다. 1956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하지만 가내 수공업 형식으로 빚던 고량주를 지금처럼 현대적인 생산방식으로 발전시킨 이는 예화청(葉華成)이다. 예화청은 1950년 진청(金城)술공장을 세워 진먼고량주의 기틀을 다졌다. 진먼현 정부는 이 진청술공장을 흡수해 주룽장술공장을 설립했다.
 
양안 정상이 마셨던 진먼고량주와 똑같은 술병을 들고 포즈를 취한 린더궁 회장.
  진먼고량주가 대만 술의 대표주자로 도약한 데는 10만 대군의 힘이 컸다. 지난해 11월 4일 필자와 만났던 진먼술공장 린더궁(林德恭) 회장은 “진먼에 주둔했던 장병들이 부대 회식 때 진먼고량주를 즐겨 마셨는데 휴가를 나가거나 제대하면서 여러 병을 사 갔다”고 말했다. 이런 경로로 진먼고량주의 뛰어난 술맛은 대만 전역에 알려졌다. 대만정부도 진먼고량주를 의전용 술로 지정해 밀어 줬다. 이 덕분에 한때 진먼고량주는 대만 전통주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했다. 지금도 대만 3대 명주 중 최고봉으로 70~80%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포격전과 계엄 상황 아래 놓였던 탓에 진먼은 섬답지 않게 어업이 발달하질 못했다. 사시사철 바람이 세서 기후가 건조하다. 바위와 모래가 많아 땅은 메마르다. 이 때문에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지는 전체 면적의 1/3(50km²)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수는 잘 자란다. 이런 자연조건으로 인해 청대부터 수수를 주원료로 보리, 쌀, 옥수수 등을 더해 양조하기 시작했다. 고량주 제조는 진먼의 지주산업이라 할 정도로 지역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수수가 잘 자라지만, 고량주의 원료로는 절대 부족하다. 실제 고량주 생산에 필요한 10~20%의 수수만이 진먼에서 공급되고 있다.
 
  놀랍게도 진먼술공장은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수수보다 2배나 비싼 가격에 현지 수수를 매입한다. 린 회장은 “수수를 경작하는 농가는 작은 규모와 낮은 수확량으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며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는 진먼에서 수수 공급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주민들의 수입 증대를 위해 경작 농가와의 상생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먼술공장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도 힘쓰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선 경쟁 업체의 도전과 젊은이들의 저도주(低度酒) 선호로 더욱 절박했었다. 소삼통은 진먼고량주에 있어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2004년 진먼술공장은 중국시장 공략을 위해 샤먼에 법인을 설립했다. 린 회장은 “푸젠에는 딱히 내세울 만한 명주가 없기에 빠른 속도로 대륙 술시장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진먼고량주는 진먼을 방문하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즐겨 마시고 있다. 2010년에는 중국정부가 수여하는 ‘중국유명(馳名)상표’를 획득했다. 진먼술공장은 2014년 총판매액이 132.9억 대만달러(약 4795억원)를 기록했다. 금세기 들어 처음 역성장을 기록한 수치인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반부패전쟁으로 인해 중국인 소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7일 진먼고량주에 재도약의 날개를 달아 줄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서 만났던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과 시 중국 주석이 만찬주로 진먼고량주를 함께 마셨던 것이다. 분단 66년 만에 처음 대면한 두 최고지도자는 일곱 가지의 음식을 더해 술을 들이켰다. 진먼고량주는 마 총통이 두 병을 가져갔는데, 시마회(習馬會)를 빛냈던 최고의 조연이었다. 무엇보다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분단의 무대였던 진먼다오가 양안 화합의 상징으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이렇듯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진먼고량주이기에 그 앞날은 더욱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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