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닝샤 허란산의 ‘西夏王’, 연간 6만t의 포도주 생산. 2013년 외교사절 접대용 와인으로 지정
⊙ ‘寧夏紅’, 증류한 白酒의 原酒에 구기자를 넣어 만들어…, 구기자로 만든 고급 과실주도 생산
牟鍾赫
⊙ 44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 ‘寧夏紅’, 증류한 白酒의 原酒에 구기자를 넣어 만들어…, 구기자로 만든 고급 과실주도 생산
牟鍾赫
⊙ 44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 〈붉은 수수밭〉에서 시집온 궁리가 마차에서 내려 신혼집으로 들어가던 언덕과 대문.
7세기 탕구트족에게 엄청난 외풍이 밀려왔다. 안두 아래 티베트고원에서 송첸감포(松贊干布)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633년 송첸감포는 분열된 부족들을 통합한 뒤 라싸(拉薩)에서 티베트의 첫 통일왕국인 토번(吐蕃)을 세웠다. 뒤이어 대군을 이끌고 안두로 쳐들어갔다. 당시 안두에는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토욕혼(吐谷渾)이 있었다. 4세기 중엽부터 탕구트족은 토욕혼의 피지배민으로 선비족과 공존했었다. 하나 토번의 잇단 침략으로 탕구트족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663년 토번은 토욕혼을 멸망시켰고, 안두는 680년에 이르러서 티베트인의 땅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로부터 탕구트족은 당나라에 귀부(歸附)해서 300여 년간 지금의 간쑤성 동부, 닝샤(寧夏)자치구 전역, 산시(陝西)성 북부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9세기 들어 탕구트족은 내부 역량을 키워 나갔다. 때때로 당 지방관의 혹정과 한족 상인의 수탈에 대항해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의식을 강렬히 키워 가는 계기가 됐다.
西夏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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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촨시 지도. |
탕구트족은 당 말기와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틈타 독립세력으로 변해 갔다. 960년 대륙에 새로운 통일제국 송나라가 들어섰으나, 탁발사공의 9대손 이계천(李繼遷)은 이를 인정치 않았다.
이덕명(李德明)은 아버지 이계천과 달리 겉으로는 송에 복종하면서 속으로는 부족통합에 힘썼다. 어느 정도 기틀을 다진 뒤 그의 아들 이원호(李元昊)는 독립왕국 건설에 더욱 매진했다. 1033년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채택했고 궁궐을 지었으며 관료제를 정비했다. 1036년에는 고유문자를 창제해 국서에 담아 반포했다. 1038년 이원호는 드디어 ‘대하(大夏)’를 개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도읍은 지금의 인촨(銀川)으로 정했다. 송은 대하가 영토 서쪽에 있다 하여 ‘서하(西夏)’라 불렸다.
송 인종(仁宗)은 서하의 건국을 인정치 않았다. 대군을 일으켜 서하 토벌에 나섰다. 서하군은 1040년 삼천구(三川口), 1041년 호수천(好水川), 1042년 정천채(定川寨) 등지에서 송군과 4차례 맞붙어 모두 이겼다. 이원호는 그 여세를 몰아 요(遼)나라로 출격했다. 요 흥종(興宗)도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왔다. 양군은 지금의 네이멍구 중부인 허취(河曲)에서 전투를 벌였다. 10만의 사상자를 내는 격전 끝에 서하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대륙은 송・요・서하가 삼분하게 됐다.
1044년 서하와 송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하는 송에 신하의 예를 취하기로 했으나 매년 송에서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근 등을 받기로 했다. 또한 국경에 시장을 개설해 무역거래를 하게 했다. 이처럼 송은 위신은 지켰으나 허울뿐이었다. 막대한 실익은 서하가 얻었기에 결국 승자는 서하였다. 서하는 한반도의 5배가 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영토는 동으로 네이멍구 바오터우(包頭), 서로는 간쑤성 위먼관(玉門關), 남으로 란저우(蘭州), 북으로 중국과 몽골 국경선에 달했다.
건국 초 서하는 송의 관제를 모방했으나 차츰 독자체제를 정비했다. 관직은 크게 문·무관에 상사, 중사, 하사 3계급으로 나눴다. 지방행정조직은 4부, 11주, 7군, 6현, 8진을 설치해서 제국 통치를 원활히 했다. 경제는 탕구트족의 유목문화를 기반으로 한족의 농경문화를 적극 흡수했다. 무엇보다 송과 서역(西域)의 중간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실크로드 중계무역로를 독점해 상업이 발달했고 국력이 부강해졌다. 이를 통해 서하는 2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西夏의 찬란했던 불교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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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 중인 개국황제 이원호의 밀랍상. |
서하문자는 언뜻 보면 한자 같지만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다. 회의자(會意字)와 형성자(形聲字)에 편(偏)·방(傍) 등을 결합시켰다. 획수가 많아 어떤 자는 40획이 넘는다. 이는 한자를 단순히 원용하는 데 그쳤던 거란문자나 여진문자와 다른 점이다. 서하는 문자 보급을 위해 각자사(刻字司)를 두어 음운과 단어를 정리한 《문해(文海)》를 출판했다. 1149년에는 서하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 법전 《천성개구신정율령(天盛改舊新定律令)》을 서하문자로 반포했다. 서하문자는 서하 멸망 후에도 한동안 쓰일 정도로 생명력이 끈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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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두신조는 서하가 티베트 밀교까지 받아들인 다원적인 문화였음을 보여준다. |
인촨에서 25km 떨어진 서하왕릉에서는 진귀한 불교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이원호의 묘로 추정되는 3호 능원에서는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두신조(人頭神鳥)상이 발견됐다. 인두신조는 불경에서 히말라야산맥에 살며 묘한 울음을 낸다고 묘사한 ‘쟈릴핀가’다. 옛날 중국에서는 극락세계를 오가는 전설의 신조 ‘묘음새(妙音鳥)’로 추앙했다. 하지만 오늘날 둔황(敦煌) 벽화와 일부 사찰 유물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서하는 모든 건축물에 인두신조를 장식할 정도로 숭상했다. 서하 불교가 티베트 밀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서하의 찬란한 불교예술은 카라호토(黑水城)에서 그 전모가 처음 드러났다. 카라호토는 지금의 네이멍구 어지나기(額濟納旗)에 있어 간쑤성의 주취안(酒泉)과 가깝다. 서하의 서역 전진기지이자 변방 요새로 상업이 융성했었다. 서하가 멸망한 뒤 카라호토 일대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모래 속으로 사라졌고 전설로만 구전됐다. 전설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한 이는 러시아의 군인이자 탐험가 코즐로프다. 1909년 코즐로프탐험대는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카라호토를 발굴했다.
코즐로프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존이 완벽한 고대 도서관을 발견했다”고 썼다. 실제 탐험대는 두 차례에 걸쳐 수십 점의 불상, 500여 점의 불화, 8000여 점의 고문서, 금화와 귀금속 등 엄청난 유물을 약탈해 갔다. 발굴을 위해 30여 개의 불탑 중 80%를 파괴했다. 1926년 카라호토를 다시 찾아 남아 있던 유물도 싹쓸이해 갔다. 이 카라호토의 발굴 및 유물 탈취 덕분에 한낱 퇴역군인에 불과했던 코즐로프는 세계 고고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남게 됐다.
‘동방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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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왕릉의 능원은 외성, 내성, 능탑의 구조로 이뤄졌다. 이 묘도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 황제 시신을 매장했다. |
3호 능원에서는 인두신조와 유목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도깨비 형상을 한 남녀 조각의 주춧돌이 발견됐다. 6호 능원에서는 금수(禽獸) 조각의 암막새와 와당, 치미, 망새 등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까지 전체 능원에서 14만점의 기와, 200여 점의 건축장식 그리고 진귀한 유물이 출토됐다. 서하왕릉은 유목민의 문화전통 위에 한족 능원의 장점을 흡수하고 불교예술을 더해 재창조했다. 특히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능탑은 서하황실의 웅대한 기질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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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는 왕족과 귀족 묘실 앞에 청동소를 뒀다. 서하의 강건한 정신과 사회기풍을 보여준다. |
10여 년에 걸친 금과의 전쟁은 서하를 피폐케 했다. 이에 1216년 칭기즈칸이 함께 호레즘왕국 공략에 나설 것을 요구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분노한 칭기즈칸은 이듬해 대군을 이끌고 서하를 침공했다. 천만다행으로 몽골과의 담판이 이뤄져 서하는 패망을 면할 수 있었다.
위태롭게 정권을 유지하던 서하의 숨통을 끊으려 1226년 칭기즈칸이 다시 친정(親征)에 나섰다. 서하는 몽골 대군을 맞아 분연히 맞서 싸웠고, 이 때문에 칭기즈칸은 전투 중 죽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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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왕릉에서 발견된 금수 조각의 암막새. 한족 건축술에서 보기 힘든 형식이다. |
근세기 들어 카라호토 유적과 서하왕릉이 발굴되면서 서하 문명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서하는 동서 문화를 골고루 받아들여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정주민으로 변모해 경제적 안정을 누리면서 유목민의 강건하고 용맹한 품성을 잃어버렸다. 한때 송의 대군을 무찔렀고 요와 금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서하가 몽골에 무릎을 꿇은 것은 이런 내적 변화에서 비롯됐다. 오늘날 탕구트족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중국 곳곳과 여러 분야에 남아 있다.
서하왕포도주업
허란산의 동남 기슭에는 서하를 브랜드로 삼아 와인을 생산하는 서하왕(西夏王)포도주업이 있다. 서하왕은 1984년 닝샤에서 처음 문을 연 와이너리(winery)다. 현재 포도밭과 양조장의 면적이 30만 무(畝, 1무=667m²)에 달할 만큼 거대하다. 한 해 생산하는 포도주는 6만t에 달한다. 서하왕이 허란산에 와이너리를 조성한 이유는 수자원이 넉넉하고 일조량이 많은 자연조건 때문이다. 최근에는 서하왕 외에도 장위(張裕), 창청(長城) 등 중국산 메이저 와인기업의 와이너리가 들어섰다.
중국은 지난해 와인용 포도 재배면적에서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2위에 올라섰다. 포도 경작지는 79만2000ha로 스페인(102만ha) 다음으로 많다. 2000년 전 세계의 4%에서 14년 만에 10.6%로 급증했다. 세계 와인산업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것이다. 궈샤오화 서하왕 문화선전부장은 필자에게 “허란산 일대는 이미 중국 3대 포도주 생산지 중 하나로 성장했다”며 “서하왕은 2013년에 외교사절 접대용 와인으로 지정됐을 만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내 대다수 와인업체들이 민영회사인데 반해, 서하왕은 닝샤자치구 농업청이 운영하는 국영기업이다. 이런 이점을 십분 활용해 단시일 내에 닝샤를 대표하는 주류업체로 성장했다. 2012년 중앙정부가 지정하는 ‘중국유명(馳名)상표’를 획득했고, 2014년 현재 중국 30여 개 대도시에 판매망을 구축했다. 다만 국영기업이기에 외국 취재진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식 절차를 밟아 취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필자는 서하왕 와이너리를 방문하지 못하고 궈 부장과 전화통화만 해야 했다.
인촨에서 사 마신 서하왕의 중저가 와인은 향긋하고 맛이 부드러웠다. 단지 메이저 와인에 비해 떫은맛이 좀 강한 게 흠이었다. 결정적으로 와인과 함께 먹을 현지 음식이 없다는 게 큰 약점이었다. 와인은 음식과 함께 마시는 술이다. 현재 중국 내 와인 판매량 1위는 장위다. 장위가 소재한 산둥(山東)성은 한동안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아서인지,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가 상당수 존재한다. 와인과 궁합이 맞는 음식을 개발해야만, 서하왕이 닝샤를 발판삼아 더 성장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
닝샤回族자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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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를 보기 위해 흰 모자를 쓰고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회족 남성들. |
닝샤는 동으로 산시성, 서와 남으로 간쑤성, 북으로 네이멍구자치구와 접한 서북부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중국 성·시 중 아주 작은 편에 속한다. 6.6만km²으로 한국(9.9만km²)보다 작고 4대 직할시 중 하나인 충칭(重慶, 8.2만km²)보다 협소하다. 인구도 적어 2014년 말 현재 상주인구는 661만명에 불과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경제력은 볼품없다. 2014년 지역내총생산(GRDP)은 2752억 위안(약 48조1600억원)으로, 티베트자치구(920억 위안)와 칭하이성(2301억 위안) 다음으로 적었다.
지하자원도 서북부의 다른 성에 비해 풍부하질 않다. 석탄이 곳곳에 매장되어 있지만, 석유와 천연가스의 보고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나 적지 않은 지하자원을 간직한 산시성에 견줄 바 못 된다. 계획경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 하부 행정단위인 촌 아래가 두이(隊)로 짜여 있다. 두이는 과거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인민공사(人民公社)와 생산집단화를 집약했던 행정집단이다. 또한 다른 성·시에 비해 국유기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닝샤는 생활에 여유가 넘치는 땅이다. 황허(黃河)가 자치구 전체 300여km를 흐르면서 수자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강물은 닝샤의 대지를 촉촉이 적셔 주어 밀, 벼, 수수, 옥수수 등을 넉넉히 생산케 했다. 또한 텅거리(騰格里)사막에서 퍼지는 사막화 현상을 일정 부분 해소하고 있다. 텅거리는 면적이 4만2700km²로 중국에서 8번째로 큰 사막이다. 이 사막에서 일어난 모래먼지는 멀리 베이징(北京), 톈진(天津)까지 날아간다. 이 때문에 텅거리는 황사 발원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천하의 황허가 오직 닝샤에 부를 줬다(天下黃河唯富寧夏)’는 속담이 있었다. 그만큼 닝샤는 사막과 황무지 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닝샤의 구도인 인촨이 그 대표적인 도시다. 인촨은 주변에 사막과 강, 호수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허란산맥이 있어 텅거리에서 몰아치는 강풍과 모래먼지를 막아 준다. 이 때문에 닝샤 인구의 3분의1인 212만명이 이 도시에 몰려 살고 있다. 이런 자연의 혜택을 시샘 받아 ‘변방의 보배(塞上明珠)’라 불려 왔다.
回族의 고향
닝샤는 중국에서 달리 ‘회족의 고향’이라 불린다. 2014년 말 닝샤 인구 중 35.7%인 236만명이 회족이다. 비록 10년 전에 비해 6%나 떨어졌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회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독특한 이주와 정착 역사를 지녔다. 이들은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상인들의 후예이다. 특히 당대에 자신만의 주거지를 두고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수도 장안(長安)을 위시해 광저우(廣州), 취안저우(泉州), 항저우(杭州) 등 큰 항구에는 아랍 상인(商民)만의 마을이 생겨났다.
당시 아랍 상인의 위세는 엄청났다. 무역항을 중심으로 세계제국 당의 상권을 쥐락펴락했다. 중앙아시아 주민들도 대거 유입됐다. 7세기 지금의 신장자치구를 장악한 당은 포용정책을 펼쳐 중앙아시아 각지의 인재를 받아들였다.
750년에는 고구려 유민의 후예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이끄는 당군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까지 쳐들어갈 정도로 국력을 떨쳤다. 비록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과 투르크 연합군에 패해 더 전진하진 못했지만, 중앙아시아인들을 부단히 흡수했다.
8세기에는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급속한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상인과 주민을 이슬람교(回回敎)를 믿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회회(回回)’라 불렀다.
회회의 중국 정착이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879년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는 이슬람교도를 대량 학살했다. 당 조정도 이슬람교를 믿고 단결력이 강한 회회를 경계했다. 그 때문에 회회가 지은 모스크 청진사(淸眞寺)는 한족에게 줄곧 파괴당해야 했다.
13세기 쿠빌라이 칸(元世祖)은 중국마저 집어삼켜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했다. 원대(元代) 회회는 몽골인 다음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元末・明初 닝샤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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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풍의 의상을 입고 전통 춤을 추는 회족 여성들. |
명대(明代)에는 〈대명률(大明律)〉에 ‘색목인은 곧 회회다’고 명기할 만큼 원대의 유풍을 유지했다. 다만 원말·명초(元末・明初)에는 조정이 회회를 끊임없이 닝샤로 이주시켜 둔전(屯田)을 개척케 했다. 이는 서역과 산시 사이 하서주랑(河西走廊)에 주로 살았던 기존의 회회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닝샤에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닝샤 곳곳에 집단 촌락을 형성해 살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회회가 7할, 한족이 3할(回七漢三)’일 정도로 인구가 늘어났다.
청조(淸朝)는 종교적 색채가 깊은 회회 대신 ‘회민(回民)’이라 불렸다. 또한 반이슬람 정책과 회민에 대한 탄압을 수시로 펼쳤다. 19세기에는 이런 폭정에 항거해 중국 곳곳에서 회민봉기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회민을 한데 묶어 ‘회족’이란 민족집단으로 분류했다.
이런 긴 정착 역사를 거친 만큼 오늘날 회족의 생김새는 한족과 구분하기 힘들다. 언어는 한족과 똑같이 한어(漢語)를 사용하고 문자도 한문을 쓴다. 단지 종교생활을 하면서 아랍과 페르시아의 어휘를 사용할 뿐이다.
복식에선 뚜렷한 특색이 있다. 회족 남성은 보통 희고 둥근 모자를 쓰고 다닌다. 가을부터 봄까지는 검은색 조끼를 걸치길 좋아한다. 여성은 머리에 흰색, 녹색, 검은색 등의 천을 두른다. 일종의 머리 가리개로 회족식 ‘히잡’이다. 머리카락, 귀, 목덜미 등만 덮을 뿐 얼굴은 노출한다. 이는 전형적인 히잡 스타일이기도 하다. 연해 지방의 회족은 한화(漢化)가 심각해 평소에 이런 복장을 잘 안 걸치지만, 닝샤의 회족에겐 필수 옷차림이다.
신앙에 간섭하지 않으면 정부에 협조하고 異민족과 공존하는 回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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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족은 이슬람 교리에 따라 예배 전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
또한 회족은 이슬람 교리에서 인정한 ‘할랄’ 고기만 먹는다. 보통 명절 때나 경조사, 손님 접대, 가족 회식 등을 위해 소나 양을 잡아먹는다. 잘 알려졌다시피 무슬림은 돼지, 말, 나귀, 개 등의 고기와 동물의 피는 먹기는커녕 손도 대지 않는다.
다른 지역의 무슬림보다 회족은 위생과 청결을 아주 중시한다. 물론 이슬람 교리는 예배의식 전 반드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닝샤의 회족은 그 수준을 뛰어넘어 날마다 소정(小淨)과 대정(大淨)을 반복한다. 소정은 손과 발을 씻고 대정은 몸 전체를 씻는 의식이다. 또한 집안 곳곳을 씻고 닦길 좋아한다. 이는 황허의 혜택으로 물이 넉넉한 자연환경 덕분이다. 차를 마시길 좋아해서 어느 집이든 물을 끓이는 화로와 멋들어진 주전자가 배치되어 있다.
보통 집 밖에는 아랍어로 쓰인 기도문을 붙이고, 방안에는 코란 경문을 걸어 놓는다. 회족은 이 집안에서 결혼식을 간단하고 검소하게 치른다. 성직자인 이맘의 주례 아래 신랑신부가 코란과 결혼에 관한 경문을 함께 읽는다. 이때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행위는 금지된다.
아랍과 달리 회족 여성은 남성과 동일하게 이혼과 상속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회족 이외 남성과 결혼하지 못했지만, 최근 들어 이교도와 혼인하는 여성도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 회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 두번째로 많다. 2010년 전국 인구센서스 결과 좡족(壯族) 1692만명, 회족 1058만명, 만주족 1038만명, 위구르족 1006만명으로 조사됐다.
좡족이 광시(廣西)자치구, 만주족이 화북지방과 동북3성, 위구르족이 신장자치구에 집거하는 데 반해 회족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정부 입장에선 체제 안정을 위하여 회족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다행히 회족은 신앙생활이 침해받지 않으면 정부에 협조하고 다른 민족과 적극 공존한다.
〈붉은 수수밭〉의 무대
회족을 들지 않더라도 닝샤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1987년 공개된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梁)〉을 닝샤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붉은 수수밭〉은 모옌(莫言)의 소설을 원작으로, 신출내기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궁리(鞏悧)와 장옌(姜文)을 발탁해 찍은 데뷔작이다. 원작 배경은 모옌의 고향인 산둥성 가오미(高密)현이었다. 하지만 장이머우가 시안영화제작소에서 일했기에 닝샤에서 제작됐다. 그 세트장이 인촨에서 서북쪽으로 38km 떨어진 전베이바오(鎭北堡)였다.
전베이바오의 정식 명칭은 서부영화세트장(西部影視城)이다. 원래 명·청대 국경요새를 지난해 9월 사망한 장셴량(張賢亮)이 개조해 영화·드라마세트장으로 만들었다. 장셴량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서적 100권 중 하나로 선정됐고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됐던 〈남자의 반은 여자(男人的一半是女人)〉의 작가다. 자신이 쓴 소설이 잇달아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되자, 영상산업에 눈을 떴다. 1993년 인세와 은행 대출금 78만 위안(약 1억3650만원)을 들여 전베이바오를 건설했다.
본래 전베이바오는 황량한 사막 위의 성터였다. 16세기 세워진 명대 성(老堡)과 1740년 중축된 청대 성(新堡)은 허란산 이북에 살던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20세기 들어 성을 지켰던 병사는 떠났고 세월의 풍파 속에 잔해만 남았다. 장셴량은 옛 성벽과 마을의 원시적인 신비를 간직한 전베이바오의 매력에 주목했다. 1980년대 말 장셴량의 소개로 장이머우뿐 아니라 중국 4세대 감독 셰진(謝晉)도 〈말몰이꾼〉 〈노인과 개〉를 전베이바오에서 제작했다.
〈붉은 수수밭〉에서는 그 매력이 극대화해 나타났다. 궁리가 수수밭에서 가마꾼인 장원에게 겁탈당하고, 황무지를 거쳐 언덕 위 신혼집에 들어가는 장면은 인촨 주변과 전베이바오에서 촬영됐다.
그 뒤 이곳은 독특한 자연경관과 역사적 전통을 간직한 제작공간으로 주목받았다. 이에 따라 수많은 중국과 홍콩 영화인들이 전베이바오를 찾았다. 쉬커(徐克) 감독의 〈신용문객잔〉, 저우싱즈(周星馳) 주연의 〈대화서유(大話西游)〉 등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바이주에 구기자 넣은 닝샤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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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베이바오영화성술집. |
구기자는 몸의 기운을 회복시켜 주고 열을 내려 준다. 또한 간염, 시력감퇴 등을 질병과 노화를 막아 준다. 닝샤의 회족은 차를 마실 때 꼭 구기자를 넣어 마신다. 닝샤의 한족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구기자를 넣어 술을 빚는다. 그 대표적인 술 브랜드가 닝샤홍(寧夏紅)이다. 닝샤홍은 증류된 바이주(白酒)의 원주(原酒)에 구기자를 넣어 수개월에서 3년까지 숙성시켜 제조한다. 이 때문에 닝샤홍의 술 빛깔은 짙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병 라벨과 뚜껑도 홍색이라 구기자로 담근 술 이미지가 더욱 강렬하다.
원료인 구기자는 닝샤 최대의 생산지인 중닝(中寧)에서 조달한다. 중닝의 구기자는 인체 내 필요한 20가지 아미노산을 활성화시키는 효능을 지녔다. 이 때문에 닝샤홍은 중국에서 ‘보건주(保建酒)’ 혹은 ‘약주(藥用酒)’로 분류된다. 닝샤홍을 생산하는 홍구기산업그룹은 1996년에 설립된 국영 홍향산(紅香山)주업이 전신이다. 2004년 싱가포르 자본의 투자를 받으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회사 연혁은 길지 않지만, 2005년에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0대 주류 브랜드’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급성장하고 있다.
현재 홍구기산업그룹은 30종이 넘는 닝샤홍 시리즈를 시장에 내놓았다. 다양한 구기자 제품도 중국 전역과 해외에 판매하고 있다. 최근에는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을 고려해 구기자의 원액으로 술을 담근 과실주까지 개발했다. 이는 2011년 프랑스 보르도의 한 유서 깊은 와이너리를 인수한 뒤 양조기술을 축적한 결과다. 기존의 닝샤홍과 달리 술병도 와인병처럼 세련됐다. 이처럼 닝샤홍은 닝샤를 방문하는 이방객이 잊지 말고 맛보아야 할 특산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