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민 감독이 만든 북한 인권 영화… ‘개런티 상관없다’며 참여한 유명 배우들
⊙ “이게 현실이 아니라 연기인 것이 행복한 거죠”(배우 임정은)
⊙ 2분짜리 장면 찍는 데 한나절… 멀고도 험한 배우의 길
⊙ ‘사람 1’ ‘사람 2’로 출연하며 1년 만에 대사 한 줄 받는 엑스트라의 세계
⊙ 촬영 거듭되자 실제로 감정이입돼… 선이 엄마의 죽음에 울컥하다
⊙ “이게 현실이 아니라 연기인 것이 행복한 거죠”(배우 임정은)
⊙ 2분짜리 장면 찍는 데 한나절… 멀고도 험한 배우의 길
⊙ ‘사람 1’ ‘사람 2’로 출연하며 1년 만에 대사 한 줄 받는 엑스트라의 세계
⊙ 촬영 거듭되자 실제로 감정이입돼… 선이 엄마의 죽음에 울컥하다

- 지난 4월 8일 영화 〈1만 킬로미터〉 촬영 현장. 이날 찍은 장면은 죽은 선이 엄마의 배낭에서 밀수품이 적발되는 컷이었다. 사진=월간조선
“컷! 오케이!”
영화 〈1만 킬로미터〉 촬영 현장에 다녀왔다.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서다. 강 건너 중국에서 밀수품을 들여오다 죽은 북조선 아낙을 발치에서 보며 안타까워하는 북한 주민 중 한 명. 대본상 비록 ‘구경꾼들’에 불과했지만, 호락호락하게 보면 섭섭하다. 이래 봬도 고도의 내면 연기가 필요한 역할이었다.
북한 주민 스타일 옷으로 바꿔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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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팅 시각인 3시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기자는 북한 주민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제작실장의 차에서 빵을 먹었다. |
탈북 전 진혁은 효심과 함께 밀수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처지던 선이 엄마가 사체로 발견됐고, 그의 가방 속 여러 밀수품이 보위부 부부장과 장교에 의해 확인된다. 효심은 이 사건으로 본인 집에도 보안원이 들이닥칠 거라며 중국으로 건너간다. (실은 팔려간다.) 진혁은 누나의 설득에도 북한에 남는다. 그러다 결국 보안원에게 적발돼 끌려가 호된 고문을 당한다. 이러다 극적으로 도망쳐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게 된다.
영화 속 압록강의 실제 장소는 가평의 한 계곡. 지난 4월 8일, 오전 11시30분. 분장팀을 시작으로 의상팀, 조명팀 등 스태프가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이날 찍을 장면은 죽은 선이 엄마의 배낭에서 밀수품이 적발되는 컷. 촬영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조현숙 예술감독. 그는 바닥에 돗자리를 깔더니, 옷 꾸러미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죄다 어둡고 칙칙한 데다 남루했다.
“오늘 구경꾼들이 입을 옷이에요. 기자님도 출연하시죠? 바지랑 신발은 괜찮은데, 윗도리가 좀 화사하네요. 이걸로 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서 솜이불처럼 두툼하고 커다란 카키색 점퍼와 빨간 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체크무늬 목도리를 들어 보였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옷을 바꿔 입고, 거울 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진짜 북한 주민 같은 사람들이 대거 돗자리 주변으로 몰려왔다. 함께 구경꾼으로 출연할 엑스트라들이었다.
상업영화급이 된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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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길 현장팀장이 김일성·김정일이 새겨진 배지를 나눠주고 있다. |
이날 가평의 낮 최고 기온은 21도. 최저 기온은 10도였다. 한겨울 옷을 껴입고 있으니 땀이 삐질삐질 났다.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슈팅 시각(촬영 시작 시각)은 오후 3시. 그때까진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준비에 분주한 스태프 주변을 기웃거려 봤다.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다. 말로만 듣던 영화판 특유의 군기 문화는 없어 보였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빵을 건넸다. 회계를 담당하는 임경아 제작실장이었다.
“배고프시죠? 저희 영화가 저예산임에도 불구하고,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규모는 상업영화 수준이에요. 며칠 전에는 공개총살 신과 장마당 신도 찍었어요. 중국 공안들이 타는 특공대차와 북한의 목탄차도 등장했고요. 공개총살 신에서는 보조출연(엑스트라)만 300~400명을 동원했죠.”
독립영화 사상 이렇게 엑스트라가 많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상업영화급’이 된 건 계산 없이 돕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정도 스케일의 촬영이면 장비 금액만 몇억인데, 장비 업체 사장님이 영화 내용을 듣고 ‘필요한 것 갖다 쓰라’고 하셨어요. 좋은 장비를 쓰면 이를 다룰 수 있는 인력을 써야 하니까 자연히 카메라, 오디오, 조명 감독 등의 몸값도 올라갔는데, 이들 또한 선뜻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배우들도 개런티의 약 10분의 1 정도만 받겠다며 나섰어요. 주인공 진혁을 돕는 목사 역의 김영호 배우는 ‘개런티 상관없이 하겠다’고 했고, 캐스팅도 배우들이 릴레이로 소개시켜 주며 성사됐죠. 모두 이 예산으로는 결코 섭외할 수 없는 분들입니다.”
발 벗고 나선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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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주인공 최진혁 역을 맡은 배우 신용범, 최진혁의 누나 효심 역을 맡은 배우 임정은, 보위부 부부장 역을 맡은 배우 송재희, 보위부 장교 겸 영화 음악감독을 담당한 가수 김신의. |
“극 중 브로커로 등장하는 최필립 배우가 저를 추천했어요.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흥미로움과 우려가 교차했습니다. 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께서 이북분이시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북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서 생소하진 않았어요. 다만 감정적으로 곡선이 큰 캐릭터인 진혁을 어떻게 소화할지는 걱정이 많이 됐죠. 어깨너머로 듣기만 했지 사실 북한 인권의 실상은 잘 몰랐습니다. 촬영하며 많이 배웠어요. 그동안 방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더군요.”
신씨는 현재 아일랜드에서 연기 공부 중이다. 앞으로는 한국보다 영국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오로지 진혁 역을 위해 기꺼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진혁의 누나인 효심 역은 배우 임정은이 연기한다. 브로커에 의해 중국으로 팔려가는 탈북 여성의 현실을 묵직하게 풀어내야 한다. 조용히 촬영장에 도착해 분장을 마친 임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처음에는 이 배역을 고사했지만, 효심 역을 맡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아홉 살, 열두 살 아이를 키우고 있어 영화에 출연할 여건이 안 됐어요. 고심 끝에 거절을 했는데,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 누가 효심의 마음을 알까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그 심정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진 거잖아요. 물론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었고, 사람들도 저를 통해 그 심정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남편과 어렵게 스케줄을 맞춘 뒤 출연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임씨는 전날 이곳에서 새벽 4시까지 압록강 도강 신을 찍었다.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저는 연기를 하는 거지만, 실제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는 거잖아요. 이게 현실이 아니라 연기인 것이 행복한 거죠. 지금껏 촬영한 모든 장면이 소중하고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중국에서 아이를 두고 떠나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마음이 너무 힘들었는데, 이게 지금도 버젓이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인 거죠. 다들 살기 바쁘니까 탈북민 생각은 쉬이 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관객들에게 아프게 다가가길”
효심의 뒤로 북한 군관 제복 차림의 남성들이 성큼성큼 지나다녔다. 그중 키가 가장 커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열연했던 배우 송재희였다. 이 영화에서 보위부 부부장 역을 맡았다. 주인공 진혁을 고문하는 장본인 중 하나다. 이런 송씨는 “평소에도 북한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궁금했어요. 딱 붙어 있는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 동시에 한국에서 태어나 다행이란 생각도 자주 했죠. 최근까지도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굉장히 많이 찾아봤습니다. 특히 1962년 월북한 제임스 드레스녹 시니어 주한미군 이병의 두 아들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북한군으로 살아가는 파란 눈의 홍순철·홍철 형제를 보니 체제에 대한 확신이 들더군요. 부부장 캐릭터 연구에 귀감이 됐죠. 탈북민들의 인터뷰만 모아놓은 영상도 여럿 찾아봤습니다. 제 사촌의 형수께서 탈북민이기도 해요. 모(某)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탈북민 인권 연구도 많이 하세요.”
그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아프게 다가가길 바란다”고 했다.
“북한 인권의 실상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영화잖아요. 제가 직접 보위부 일원이 돼보니, 당에 충성한다는 명목하에 죄의식 없이 자행하는 만행이 상당하겠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고문 장면을 연기할 땐 몰랐는데, 모니터로 보니 너무 잔인하더군요. 그 장면 속 등장인물들의 정서가 관객들에게 아프게 다가갔으면 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요.”
보위부 장교 역 겸 음악감독을 맡은 가수 김신의는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팔려간 탈북 여성이 후에 한국에 오더라도, 다른 탈북 여성이 그 자리를 계속 채우는 쳇바퀴 같은 비극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그가 직접 만든 영화음악은 잿빛 현실에 밀도를 더한다.
1년 만에 받아 든 대사 한마디
“리허설 곧 시작합니다. 위치해 주세요!”
흩어져 있던 배우들과 엑스트라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부부장과 장교는 시체 옆으로, 기자는 구경꾼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구경꾼들은 살짝 언덕진 고개 위에서 두 줄을 이뤄 계곡 아래 시체를 내려다봤다. 함께 서 있는 이 엑스트라들은 모두 어디서 온 걸까.
“보조출연만을 위한 에이전시가 따로 있어요. 업체마다 1000명 단위의 사람들이 등록돼 있고, 제작사에서 ‘이런 역할이 필요하다’고 하면 거기에 맞춰서 섭외를 해주는 거예요. 이번에 섭외가 정말 기가 막히죠? 다들 어쩜 이렇게 북한 사람들 같은지. 풉!”
바로 앞에 서 있던 엑스트라 양미령씨가 말했다. 대본상 ‘사람 3’인 양씨는 “이 일을 하고 1년 동안 떼 신(사람들이 떼로 나오는 장면)만 찍다가 오늘 처음 대사를 받았다”고 했다. 긴장과 설렘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의 대사는 “쯧쯧…. 이놈의 강이 사람을 대체 얼마나 잡아먹는 기야”였다. 양씨는 나지막이, 쉴 새 없이 대사를 읊조렸다. 그러더니 “괜찮아요? 어색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고향이 신의주인 줄 알았어요”라며 엄지를 치켜들어 줬다.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자자! 리허설 갑니다!”
촬영장 마이크는 미세한 소리까지 다 잡는 듯했다. 잡담을 나누던 배우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묘하게 떨렸다. 군중 속에서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는데, 여러 대의 카메라 앞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잘하는 법은 튀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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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이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는 북한주민 역할을 한 보조출연자들. |
몇 번의 리허설 끝에 본 촬영을 앞두고 있는데 이동민 보출(보조출연)실장이 다가와 말했다.
“여러분. 강에서 시체 떠내려온 건 그냥 봐도 보이잖아요? 괜히 몸을 좌우로 움직이거나, 눈 크게 뜨면서 과장 안 하셔도 됩니다. 힘 빼고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다만 익사자는 여러분이 아는 사람인 겁니다. 그 느낌을 살려야 해요.”
이수길 현장팀장이 거들었다.
“시체를 향해 간간이 손가락질도 해주시고요. 웅성웅성하되 너무 크게 말하면 안 됩니다. 안타까워하다가 5초 뒤에 ‘사람 1’ 대사해 주시고, 2초 뒤 ‘사람 2’, 3초 뒤 ‘사람 3’ 하시면 됩니다. 대사 하다 버벅거리게 돼도 그냥 이어가세요. 스스로 NG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아셨죠?”
아, 어렵다.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만큼은 선이 엄마의 죽음에 진심이어야 했다. 갑자기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교내 연극무대에 몇 번 서봤다고, 장래희망란에 남몰래 썼던 오만방자한 두 글자가 스틸 컷처럼 스쳐 지나갔다. ‘배우.’ 기왕이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자기가 감독인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혼자 다해먹는(?) 비중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던 날도 있었다. 대중 앞에 서길 좋아했던 ‘관종’ 청소년은 이후 각종 풍파를 맞으며 점차 내성적인 어른으로 자라났다. 반강제적으로 회상된 과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기자님 얼굴이 왜 빨개졌데? 하하. 생각보다 어렵죠?”
전문 보조출연자인 김형욱씨가 말했다.
“잘하는 방법은 별거 없어요. 튀지 않으면 돼요. 우리는 영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돕는 역할이에요. 과하면 안 되죠.”
한 번의 NG 없이 오케이!
이날 찍은 장면은 영화 분량으로 치면 2분쯤밖에 안 된다. 그런데 촬영은 저녁 6시까지 이어졌다. 영화 촬영에 참여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NG가 나지 않더라도 같은 장면을 여러 차례 찍는다는 것. 각도와 거리를 바꿔가면서다. 예기치 못한 헬기 소리와 ‘가평군에서 알려드립니다’와 같은 확성기 방송으로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엑스트라들과 나란히 몇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 있다 보니 어쩐지 동지애 같은 게 생겨났다. 어느새 ‘집이 어디냐, 고향은 어디냐’는 질문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다.
“저거이 19반 선이 엄마 아니네?”라고 말하는 ‘사람 1’의 진짜 이름은 이윤주다. 오랫동안 보육교사로 일하다 50대 접어들어 이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씨는 “아이도 다 성장했고 이래저래 할 만한 취미를 찾다 진정한 취미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이 요즘 생활의 활력소”라고 했다. “아휴…. 또 죽었네”라며 울먹이는 ‘사람 2’는 김성일씨다. 며칠 뒤면 예순이 된다는 그는 원래 사업체를 운영했었다. 스피치 능력을 키우려고 5년 전부터 연기학원을 다녔는데, 적성에 꼭 맞았다고 한다. 김씨는 “덕분에 이제는 TV 광고와 연극무대에까지 서게 됐다”면서 “연기 전날에는 설레서 잠까지 설친다”고 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최선미·전유하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최씨는 “아무리 엑스트라지만 배역을 맡으면 잠깐이나마 그 역할로 사는 것”이라면서 “이런 게 너무 재밌고, 매번 소풍 나오는 기분으로 촬영에 임한다”고 했다. 전씨는 “보조출연자들은 모두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가 항상 즐겁고, 처음 만나도 금세 친해진다”고 했다.
동지애가 피어오른 건 이래서였나보다. 본 촬영에 들어갔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촬영을 거듭할수록 선이 엄마의 죽음이 ‘정말로’ 슬프게 느껴졌다. 이윤주씨가 “저거이 19반 선이 엄마 아니네?”라고 하자 울컥! 하는 기운이 올라왔다. 또 부부장의 눈과 마주치면 ‘진짜로’ 큰일 나는 것처럼 위축됐다. 나도 모르게 치와와처럼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배우의 감정이입이란 걸까?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된 듯 임했다. 결국 단 한 번의 NG 없이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아, 이제 연기를 조금 알 것 같았는데, 고이 접었던 꿈을 다시 펴볼까 했는데, 이날 촬영은 이렇게 끝이 났다. 영화는 오는 8월 말 개봉을 앞두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그렇다. 대형 멀티플렉스에 걸릴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기대감은 크다. 해외 개봉도 구상 중이다.
인터뷰
〈1만 킬로미터〉 박향남 감독
“지금까지 관객 마음 울리는 탈북 영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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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디렉션 중인 박향남 감독. 사진=월간조선 |
“특히 영화판은 그런 게 심하잖아요. 나이 든 꼰대분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팀은 젊은 사람들 위주로 꾸렸어요. 청년들이 만들어가는 북한 인권 영화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어디 가서든 박향남 감독의 현장은 분위기가 최고라는 소리를 들어왔고, 이를 꾸준히 유지하려고 합니다.”
박 감독은 탈북민이다. 2013년 탈북해 중국에서 13년을 살다 한국으로 왔다. 그래서 영화의 고증이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나리오도 직접 다 썼다. 북한에서 8개월간 간수(교도관)로 일했던 덕에 교도소 신도 실감 나게 찍었다.
― 주인공 진혁은 실존 인물입니까.
“친한 관계는 아니고, 지인이에요. 그의 사연을 녹인 거죠. 탈북민들의 짠한 사연은 굉장히 많습니다. 북한 주민의 실상은 〈1만 킬로미터〉 대본보다 더 처참한데, 그걸 고스란히 반영하면 영화가 너무 자극적일 것 같아 지금 대본으로 각색한 겁니다. 특히 북한 여성의 인신매매 장면은 최대한 톤다운한 거예요.”
― 2013년 탈북했다고 들었는데, 전후사정을 들려주시자면.
“저의 탈북 얘기는 남에게 일절 한 적이 없습니다. 물어도 답을 안 했어요. 북한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탈북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북한이 제일 잘사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1997년인가 1998년도에 형을 따라 중국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는 쉽게 강 건너 중국에 갔다 왔다 하던 때예요. 거기서 알게 된 중국인 집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처음 안 거죠. 아, 북한이 되게 못사는구나.”
― 중국에서는 뭘 했나요.
“중국에서 절 돌봐주던 분이 촬영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조수로 일했어요. 한국에 오니 할 수 있는 게 촬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뛰어들 자리는 없더군요. 처음엔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한 영화감독을 만나서 그 밑에서 일했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다가 인권영화에 도전했어요. 2019년부터 지난해 〈향미〉까지 매해 단편 영화를 찍었고, 이번에 장편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 북한에서도 영화에 관심이 있었는지.
“그땐 카메라가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어요.”
― 촬영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요.
“아무래도 예산입니다. 3억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촬영 중인데, 한정된 예산으로 집채만 한 규모를 구현하려니까 힘들어요. 감사하게도 스태프분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다들 메이저에서 일했던 분들인데, 북한 인권 영화라고 하니 발 벗고 나서줬습니다.”
― 한국 영화판이 좌경화돼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는지? 탈북 영화의 설자리가 좁을 거라는 우려도 나오는데.
“이 작품에 참여하는 분들은 좌우 이념 없이 한마음으로 찍고 있습니다. 제가 회의 때 늘 강조하는 게 북한 인권에는 좌우가 없으니 한목소리를 내달라는 거예요. 기존에 나왔던 탈북 배경의 영화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건, 잘 못 찍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자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동안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그들의 공감을 끌어냈던 탈북 배경의 영화가 없었어요. 이제까지의 영화와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