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북한 후계구도와 제3차 남북정상회담

김정은 주도의 개혁·개방에 우호적 환경 조성이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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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 후계자 위치 공고화
⊙ 2009년 말 북한 권력은 김정일이 60%, 김정은이 30%, 장성택·김영춘·오극렬·리제강 등
    김정일의 최측근들이 10%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평가 나와
⊙ 전인민적 후계자 추대 분위기 조성 위해 작년 하반기부터 대외·대남 유화책
⊙ 김정일 서기실에 김정은 주도의 개혁·개방 실무팀 구성, 북한 신년공동사설은 ‘국방공업’보다
    ‘경공업’과 ‘농업’ 발전을 강조

鄭成長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1963년 전남 완도 출생.
⊙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佛낭테르대 박사.
⊙ 경희대·서울대·이대·동국대·북한대학원대학교 강사 역임.
⊙ 저서: <한국의 국가전략 2020: 대북·통일>(편저) <김정일의 북한, 어디로 가는가?>(공저) 등.
타이완 사진작가 후앙 한밍 씨가 북한 원산 근교에서 찍은 김정은 찬양 벽보.
작년 상반기만 해도 대외적(對外的)으로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보였던 북한은 작년 하반기에 들어서는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당수 전문가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제2차 핵(核)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이나 2000년대 초 북핵(北核) 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사회가 가한 제재와 압박에 북한이 굴복해 정책을 전환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제재 효과’만 가지고 최근 북한의 정책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체제가 매우 폐쇄적이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북한의 국내정치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난 한 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후계 문제가 북한의 대내외 정책에 큰 변화를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8월 중순 김정일(金正日)이 뇌혈관계 이상으로 쓰러졌을 때 북한 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던 3남 김정은이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후계자 결정을 미루고 있었으나, 신체의 부분마비 증상으로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면서 후계자 결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의 이 같은 초조감과 북한 엘리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결합, 작년 12월경부터 북한군과 국가안전보위부 일각에서 김정은 후계자 추대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8년 육로통행 제한시부터 후계 추대 가시화
 
  북한 권력기관 일각에서 김정은 추대 움직임이 나타난 시점은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통한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 차단하기 시작한 12·1조치가 시행된 시점과 일치한다. 북한은 2008년 12월부터 군사분계선을 통한 육로(陸路)통행을 제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남한 민간단체의 삐라 살포를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외적으로 명분이 약한 3대 세습을 은밀히 추진하기 위한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추구했던 작년 상반기는 김정은의 후계체제 구축이 급속도로 진행됐던 시기와 일치한다. 반면에 북한이 작년 하반기부터 대외적으로 유화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후계체제가 조기(早期)에 안정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김정일은 김정은의 생일인 2009년 1월 8일,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리제강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하달했다. 리제강은 조직지도부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긴급 소집, 김정일의 결정 사항을 전달한 후 각 도당(道黨)으로 후계 관련 지시를 하달했다. 이에 따라 당의 핵심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후계자 결정에 관한 소식이 빠르게 확산됐다. 군부의 경우,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된 사실은 총정치국을 통해 군 대좌(대령)급 수준까지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후계자로서 김정은의 활동은 지명 직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김일성(金日成)의 97회 생일(4월 15일) ‘축포야회(祝砲夜會)’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치밀하게 준비해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그 앞에서 시험발사를 선보였다. 김정일은 이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전해진다.
 

 
  김정은, ‘150일 전투’ 지휘
 
  2009년 3월경에는 김정은의 이름은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김 대장’(김정은을 지칭하는 표현)이 후계자로 결정된 사실이 일반 당원과 병사들에게까지 통보됐다.
 
  제1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끝난 직후인 작년 3월 9일, 신의주지역 당 외화벌이사업소들에서 당원 강연회가 개최됐다. 이때 강사로 나선 초급 당비서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후계자로 결정된 김정일의 아들에 대한 호칭을 ‘친애하는 김 대장, 친애하는 김 장군’으로 불러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포치(통보)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청진 군부대의 일반 병사들도 김정은을 ‘친애하는 김 장군, 김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은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공위성 로켓을 발사했다. 북한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오후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2호’를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광명성 2호’ 발사에 대해 북한의 중간급 간부들은 “후계자의 혁명역사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쉬쉬하면서 이야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9년 4월 14일 김정은은 ‘강성대국의 불보라’라는 이름으로 김정일도 참석한 가운데 중국·타이완 등에서 여는 춘제 불꽃축제를 본떠 성대하게 ‘축포야회’를 개최했다.
 
  김정은은 4월 20일 시작되어 작년 9월 16일 종료된 대중 총동원 증산운동인 ‘150일 전투’도 지휘했다. 그리고 5·1절(국제노동절)날 북한 전역에서 금속공업과 연관부문의 노동자 1만5000여 명을 평양에 불러들여 김정일과 함께 국가공훈합창단 공연과 축포야회를 비롯해 다양한 경축공연을 관람토록 하는 성대한 행사를 기획·조직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의 차남 김정철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과 과장으로 중앙당 부부장 대우를 받으면서 동생 김정은의 후계체계 확립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군대 장악과 후계자 선전 본격화
 
  2009년 5월경 김정은은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당위원회에서 군대를 장악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이 북한을 선군(先軍)정치로 통치하면서 선군정치의 핵심인 군 간부들에 대한 장악 지도 역할을 김정은에게 맡긴 것이다.
 
  이 시기 김정일의 지방시찰 사전 준비는 3남 김정은과 차남 김정철이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련 기관은 김정은이, 당과 민간기관은 김정철이 김정일의 현지 지도를 사전조직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호위 원칙상 수령과 후계자가 같은 장소에 있으면 둘 다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김정은은 김정일의 현지 지도에 자주 동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작년 5월 25일 제2차 핵실험 직후부터 김정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가 김정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5월 28일에는 해외 주재 공관에 후계자 결정 사실을 공식 통보하면서 외부에 누설하지는 말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노동당 지도부는 5월 말에서 6월 초에 군대와 국가안전보위부 내에서부터 김정은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그의 ‘위대성’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6월 중순경부터는 사회의 일반 당원들에게까지 ‘김 대장’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활발하게 선전 작업을 진행했다. 6월 초 함경북도 회령시에서는 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김정은의 ‘위대성’과 ‘혁명업적’에 대한 강연들이 진행됐으며, 김정은을 찬양하는 ‘발걸음’이라는 노래가 보급되어 행진할 때마다 합창곡으로 부르게 했다. 그리고 양강도 혜산시 주둔 병사들도 “젊은 장군이신 김정은 동지가 우리 혁명무력을 이끌고 계시기에 우리는 백전백승한다”라는 식의 강연내용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월 중순경부터는 북한 지도부가 일반 공장, 기업소의 당원들에 대해서도 매우 활발하게 김정은에 대한 ‘위대성’ 선전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6월 11~13일 함경북도 회령과 평안북도 신의주, 평남 평성, 자강도 성간, 양강도 혜산 등에서는 당원들을 대상으로 <김정은 동지의 영도 따라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강성대국 건설의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자>라는 제목으로 김정은에 대한 학습 강연이 진행됐다.
 
  북한은 6월 하순경에는 인민반에서 주민들에 대해서까지 김정은에 대한 ‘위대성’ 학습을 진행하고, ‘발걸음’ 노래를 암송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6월 말에는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의 후계자 결정 사실이 북한 사회 전반에 알려지게 됐다.
 
김정은 후계체계를 지탱하는 북한의 黨·軍·政 엘리트. 윗줄 왼쪽부터 김영춘 인민무력상, 오극렬 당 작전부장, 장성택 당 행정부장,아래 왼쪽부터 주상성 인민보안상,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김정각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김정은,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돼
 
  이처럼 북한은 약 6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하고, 상층부에서부터 주민들에게로 후계자 결정 사실을 단계적으로 공지했다.
 
  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시기에 북한의 핵심 권력기관과 엘리트들이 참여하는 김정은 후계체계의 상부구조가 확립된 것이다. 김정은 후계체계에는 북한의 당·군·정(黨軍政) 엘리트들에 대한 인사와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리제강·리용철·김경옥 제1부부장, 김정은에 대한 개인숭배 문건과 찬양 가요 등을 제작하고 후계체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의 최익규 부장과 리재일 제1부부장, 김정은의 군대 장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북한군 총정치국의 김정각 제1부국장, 후계체계 구축 과정에서 엘리트와 주민들의 이반 또는 동요를 방지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과 주상성 인민보안상, 그리고 이 두 감시·억압기구들을 지도하고 있는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의 장성택 부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아직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작년에 김정은은 먼저 국가안전보위부장이라는 공안기관의 최고책임자 자리에 임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09년 하반기에도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은 계속 진전됐다. 작년 8월 국내 일부 언론은 ‘김정은이 성실한 간부들을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 세력을 심자 벌써부터 분파주의를 한다며 김정일이 화를 내면서 김정은에 대한 선전 작업이 중단됐다’는 북한 접경지역에서의 소문을 소개했다.
 
  일부 소식지는 ‘영도자 계승 문제가 논의되지 않고 있으며, 후계자 논의는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지시를 북한 지도부가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이미 권력의 30% 분점
 
  그러나 타이완 사진작가 후앙 한밍 씨가 2009년 9월 18일 원산 근교에서 찍어 인터넷 포털 ‘야후’의 사진 공유 사이트(www.flickr.com)에 9월 22일 올린 북한 벽보 사진을 보면 ‘김정은’의 이름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김일성과 김정은 이름 모두 빨간색으로 다른 글자들보다 큰 활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현재 북한에서 김정은이 ‘수령의 후계자’로 대우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벽보를 보면, 김정일이 1974년에 후계자로 지명되고 1980년 6차 당 대회까지 북한의 공개된 문헌들에서 ‘당중앙’으로 표현됐던 것처럼 김정은 또한 ‘김대장’과 ‘청년대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김정은의 부적절한 인사에 대한 김정일의 반발 때문에 선전 작업이 중단됐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해 10월 9일 김정일과 주민들이 참석한 황해북도 예술극장 개관공연에서 김정은에 대한 찬양가요인 ‘발걸음’이 합창 공연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는 김정일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이 중단 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2009년 한 해 동안 김정은의 지도체계 구축은 ▲김정일의 후계체계 구축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후계자론’이라는 권력세습 정당화 논리와 매뉴얼의 존재 ▲한미(韓美)의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 수립으로 인한 북한 엘리트들의 위기의식 ▲김정일의 적극적 지원과 김정은의 리더십 등이 상호작용해 급속도로 진척됐다.
 
  그리하여 2009년 말 ‘북한의 권력은 김정일이 60%, 김정은이 30%, 장성택·김영춘·오극렬·리제강 등 김정일의 최측근들이 나머지 10%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북한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김정은은 단기간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김정은 중심의 후계체계를 조기에 구축한 북한은 2009년 하반기에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수령의 후계자는 ‘전(全)인민적 추대’에 의해 선출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장거리 로켓 발사와 제2차 핵실험으로 인해 북한이 유엔안보리의 제재를 받게 됨에 따라 주민들에게 김정은이 후계자가 됨으로써 그들의 삶이 미래에 향상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없게 된 것이다.
 
 
  全인민적 김정은 추대 분위기 구축 위해 대남 유화책
 
  결국 북한은 김정은 후계체계 구축의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전인민적 추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다시 말해 김정은 후계체계에 대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외부세계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게 됐다.
 
  북한의 대외·대남 정책 전환은 2008년 8월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클린턴 전(前) 미 대통령이 작년 8월 4일 방북(訪北)한 것을 계기로 억류 중인 미국인 여기자를 석방했다. 현정은 회장과 김정일 간의 8월 16일 만남에서는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에 합의했다.
 
  또 북한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김정일의 최측근과 대남정책 실세들이 포함된 고위급 ‘특사’ 조문단을 남한에 파견해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게 했다.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은 방한(訪韓) 기간 중 정부 측 핵심 인사에게 “남북 간 모든 당면문제를 해결하려면 당국 간 대화가 필요하고, 역시 정상(頂上) 간의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남북한은 북한의 요청에 의해 10월 중순 싱가포르에서 남북정상회담 관련 비밀접촉을 가진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이때 북측은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적극성을 보였으나, 남측은 북측의 입장을 청취하는 것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작년 8월 23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서울에 온 북한 특사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왼쪽)과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운데)가 청와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했다.
 
  김정은, 개혁·개방 위한 실무팀 구성
 
  작년 하반기부터 북한이 이처럼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김정일 생시에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이룸으로써 김정은 주도의 개혁·개방에 우호적인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한 목적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일 서기실에는 40~50대의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각 분야의 북한 최고 실력자들로 구성된 김정은 주도의 실무팀이 구성되어 작년 여름부터 북한의 생존 및 개혁·개방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위스에서 약 4년 반 동안 유학한 김정은이 이 같은 실무팀의 지원하에 북한의 대내외 정책에 깊게 관여하면서, 올해 북한 신년공동사설은 ‘국방공업’보다 ‘경공업’과 ‘농업’ 발전을 강조하고, 인민생활 향상에 ‘올인’하는 듯한 인상까지 주는 정책 변화를 보여주었다.
 
  북한에서 권력이양이 ‘3대 세습’의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은 통일을 위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3대 세습’이 북한에서 보다 실용주의적인 젊은 세대가 정책을 주도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면, 한국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비록 장기 생존전략 차원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포기를 촉진하고 북한을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더욱 나아가게 만드는 전략적인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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