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7년 전남 홍도에서 납북된 이민교씨의 어머니 김태옥씨(왼쪽)와 이민교씨 사진(오른쪽).
“기자님, 나 이민교 엄마예요. 기억해?”
지난 1977년 8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납북된 이민교(당시 18세·경기 평택 태광고 2년)씨의 어머니 김태옥(77)씨였다.
“뉴스 보니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정일 만나서 여기자 데리고 가던데, 내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면 우리 아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내가 편지를 쓰면 기자님이 영어로 바꿔서 그 양반한테 보내줄 수 있나?”
김씨는 3년 전인 2006년 1월 설을 앞두고 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었다.
“삼일 있다 온다는 아들이 영녕 돌아오지 안애씀니다. 면년 지나고 지금 삼십년이 돼였슴니다. (중략) 각카께서도 아듬니이 게시지요. 그 고통 격끈 것은 아무도 모름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알지. 각카께서 김정이 만나서 거기서 사라도 소식이나 듯고, 죽기 전에 아들 얼굴이나 봤스면 죽어도 원이 업슴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뉴스를 접한 김씨는 맞춤법도 맞지 않고,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을 들여 힘들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은 무산됐고, 김씨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씨는 북한에 끌려갔던 ‘800 연안호’ 선원들이 귀환한 지 이틀 뒤인 8월 31일 필자를 찾아왔다. 아들을 잃고 상심한 탓에 마비가 된 왼쪽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김씨는 정작 편지를 써오지 않았다.
“우리 딸은 괜히 편지 썼다가 애한테 안 좋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해. 써야 좋을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기자님한테 물어보려고….”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민교씨는 2000년대 초까지 평양 용성구역에 있는 ‘以南化(이남화) 환경관’에서 수퍼마켓 종업원으로 활동했다. 이남화 환경관은 간첩들이 南派(남파)되기 전 남한 내의 생활을 경험하도록 만든 일종의 교육시설이다.
이씨와 함께 납북된 최승민(당시 17세·경기 평택 태광고 2년)씨, 일본인 납북자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남편인 김영남(당시 17세·군산기계공고 1년)씨, 홍건표(당시 17세·천안상고 3년)씨, 이명우(당시 17세·천안농고 3년)씨 등 1977~1978년 서해 해수욕장에서 납치된 고교생 5명은 북한에서 이남화 공작 교관으로 활동했다. 국정원은 1995년 간첩 김동식 사건과 1997년 최정남 등 부부간첩 사건 수사과정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때까지 김씨는 20년 넘게 아들의 납북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루는 꿈에 민교가 교복을 입고 나타났는데 다음날 안기부에서 살아있다고 알려주더라고. 그 뒤로 간첩을 두 번인가 만났어. 그 사람도 열세 살 때부터 부모랑 헤어져서 간첩 교육을 받았대. 내 아들 같아서 ‘꼭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 만나라. 우리 아들 만나거든 엄마 만났다고 말해 달라’고 했어.”
김씨는 아들이 납북된 것도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다.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못 보낸 게 가슴에 맺혔는데 친구들하고 인천 송도로 놀러간다기에 애 아버지 몰래 화장품 수금한 돈 3000원을 줬어. 그런데 송도가 아니라 홍도로 갔다는데 그 돈이면 차비밖에 안돼. 애 찾으려고 수소문하러 다니는데 택시기사가 ‘학생들은 돈 떨어지면, 며칠 섬에 가서 일하면 돈 벌 수 있다는 꾐에 잘 넘어간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애 아버지랑 홍도, 흑산도, 제주도까지 섬이란 섬은 다 뒤졌지. 애 아버지가 ‘저년이 자식 잡아먹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했어.”
김씨는 아들이 혹시 인신매매 당하지나 않았을까 싶어 남편과 함께 전국을 헤맸다. 길거리에서 걸인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길에서 하반신이 없는 거지를 봤는데 꼭 우리 아들 같은 거야. 장갑을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어. 손만 봐도 우리 아들인지 알 수 있는데 장갑을 꼈으니 알 수가 있나. 몇 시간 동안 옆에서 고개 들기만 기다렸는데 결국 아니었어.”
김씨의 남편은 아들이 납북된지도 모르고 전국을 헤매다 중풍으로 쓰러져 18년 전 사망했다.
인천 부평에서 홀로 살고 있는 김씨는 32년 동안 아들의 밥그릇을 비워둔 적이 없다고 했다.
“걔 생각만 나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산에 올라가 나무 부둥켜 안고 민교 이름 부르면서 소식이라도 듣게 해달라고 울었어. 근데 요즘은 일부러 생각을 안 하려고, 인천 한 바퀴 도는 버스나 전철 타고 돌아다녀. 다리가 아파서 걷기도 힘들지만 걔 생각하면 살 수가 없으니까. 신경 쓰다 풍이라도 오면 나중에 만나도 못 알아볼까 봐. 거기 있다고 하니까 어느 하늘 아래서라도 살아있으면 언젠간 만나겠지, 그저 건강하게 살아있기만 해달라고 기원해. 살았나 죽었나 그저 얼굴이나 보고 싶은 거야. 내 눈으로 죽기 전에 얼굴만 한 번 보면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