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종전 50주년 맞은 베트남

2000년간 계속된 베트남-중국 전쟁

중국과의 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리한 후에는 사대외교로 국익 확보

  • 글 : 오정환 前 MBC 보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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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明·淸 등 중국 통일 왕조와 몽골의 침략 물리쳐
⊙ 쩐꾸옥뚜언, 두 차례에 걸쳐 몽골 침략 물리쳐
⊙ 진나라 장군 찌에우다가 진시황 사후 남비엣(南越) 건국
⊙ 기원전 111년 한 무제 때 점령당해… 938년 바익당강 전투로 독립 회복
⊙ 15세기 초 명나라 침공 물리친 레러이의 게릴라전은 베트콩 게릴라전의 원조
⊙ 1979년 중국의 침공도 격퇴

吳正煥
1964년생. 서울대 법대 공법학과 졸업. 한양대 대학원 행정학과 졸업 / MBC 방콕특파원, MBC 보도본부장, MBC 제3노조 비상대책위원장 역임 /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 중국 천년전쟁》 《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
응오꾸엔의 938년 바익당강 전투 상상도(하노이역사박물관).
중국은 베트남(越南)의 직접 지배를 원했다. 조공책봉(朝貢冊封) 관계에 만족했던 우리나라와 달랐다. 베트남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교두보(橋頭堡)이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식민지배했던 중국인들이 베트남을 자기들 영토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더 문제였을 것이다. 한(漢)나라 이후 중국의 모든 통일 왕조는 단 한 차례도 예외 없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베트남은 이 와중에 중국의 천 년 지배를 끝내고 다시 천 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두 나라 간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를 위해 베트남은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싸웠고, 이에 못지않은 뛰어난 외교를 펼쳤다.
 
 
  진나라 장군이 세운 남비엣
 
  청동기(靑銅器) 시대 초기부터 현재의 중국 남부에서 내려온 베트남족이 기원전 7세기경 홍강 유역에 반랑(文郞)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역사서는 이들을 ‘락비엣(雒越)’이라 기록했는데, 이것이 ‘베트남’ 민족명의 기원이다.
 
  오늘날 중국 저장성(浙江省)에 있던 월(越)나라 백성 백월(百越)족도 한(漢)족과 언어가 달랐다. 월이 초(楚)에 의해 망하고 다시 초가 진(秦)에 의해 망한 후, 진시황(秦始皇)의 무자비한 통치가 시작되자 백월족이 대거 남쪽으로 이주했다. 이들 중 한 무리가 베트남 북쪽 고지대에 어우비엣(甌越)을 세웠고, 기원전 257년 반랑을 병합한 뒤 나라 이름을 ‘어우락(甌雒)’으로 바꿨다. 두 나라 백성들은 언어와 습속에 큰 차이가 없어 국가 통합은 순조로웠다.
 
  진시황은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전국 통일 2년 뒤 대군을 남쪽으로 보냈다. 진나라군은 4년 만에 백월족 땅을 거의 다 정복하고 남해군(南海郡)과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을 설치했다. 진시황이 죽고 천하가 다시 대란에 휩싸이자 진나라 장군 찌에우다(趙佗·조타·기원전 ?~기원전 139년)는 재빨리 세 개 군을 통합해 기원전 227년 남비엣(南越)을 세우고, 이어 어우락까지 정복했다. 찌에우다는 연(燕)나라 출신이었지만 방망이 모양의 상투를 트는 등 백월족처럼 행동했으며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 등 중국과 구분되는 자주(自主)의식을 과시했다.
 
  한때 영토 폭이 1만 리에 달하는 등 위세를 떨치던 남비엣은 기원전 111년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공격에 치열하게 저항하다 결국 멸망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찌에우다를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 황제로 우러르며, 남비엣에서 본격적인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바익당강 전투
 
딘보린 사당(닌빈성 호아루). 정문에 ‘북문소해약’, 즉 ‘북쪽의 방비를 튼튼히 한다’라고 쓰여 있다.
  당(唐)나라 말기에 각지의 절도사들이 봉기하면서 중국 대륙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된다. 베트남에서도 호족(豪族)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931년 쯔엉딘응에(楊廷藝·874~937년)가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독립을 꿈꾸던 그는 사랑하는 양아들에게 암살당한다. 식민지배의 근거지였던 다이라(大羅·오늘날 하노이)를 중심으로 친중(親中) 세력이 건재했던 것이다.
 
  남쪽 변방인 아이주에서 쯔엉딘응에의 사위 응오꾸엔(吳權·898~ 944년)이 궐기했다. 그는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다. 친중파는 중국 남부의 남한(南漢)을 끌어들였다. 응오꾸엔은 과감하게 행동했다. 먼저 빠른 속도로 북진(北進)해 다이라의 친중파 군대를 기습해 궤멸시킨 후 남한군을 기다렸다.
 
  남한의 전력은 베트남보다 우세했다. 그들은 병력을 나누어 수군이 먼저 교두보를 마련한 뒤 육군이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응오꾸엔은 바익당강(白藤江) 바닥에 나무 기둥들을 박아놓고 적을 유인했다. 남한 수군의 육중한 전선(戰船)들이 나무 기둥에 걸려 좌초되자 불화살로 공격했다. 남한 병사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패전(敗戰) 소식을 접한 육군도 침략을 포기했다.
 
  938년 바익당강 전투의 승리는 천 년 넘게 이어져온 중국 복속의 사슬을 끊어내는 승리였다. 응오꾸엔은 절도사 호칭을 버리고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후(死後) 벌어진 내전(內戰)을 수습하고 968년 새 왕조를 연 딘보린(丁部領·924~979년)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年號)까지 정했다.
 
  스스로 황제라 칭했지만 딘보린은 황제 호칭을 고집하다가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다. 딘보린은 송(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송에 조공을 바치고 교지군왕(交趾郡王)이라는 책봉도 받아들였다.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事大)외교로 안보를 도모하고, 주변국에는 황제라 일컬으며 중심국 지위를 확보하는 이중적인 국제 정책은 이후 왕조들 또한 계승하였다.
 
 
  宋의 침략에 앞서 선제공격
 
  문약(文弱)했던 송나라는 재상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자 대외팽창 욕구가 되살아났다. 때마침 1072년 베트남에서는 7세짜리 어린 왕이 즉위했다. 중국의 국경 관리들은 이 기회에 베트남을 병합하자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왕안석도 베트남 정벌론에 동조했다.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젊은 황제 신종(神宗)은 남정(南征)을 명령했다. 송나라 남부 각지에서 장정들을 징집하고 군함을 건조했다. 중국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베트남이 이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당시 베트남의 권력자는 리트엉끼엣(李常傑·1019~1105년)이었다. 그는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 장교로 임관한 뒤 승진을 거듭해 국왕의 경호대장이 되었고, 왕실의 성(姓)까지 하사받았다. 베트남 인종(仁宗)이 7세에 즉위하게 돼 모후(母后)가 섭정했지만 실권(實權)은 그에게 있었다.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의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받고 고민 끝에 선제(先制)공격을 결심했다. 침략이 예정된 것이라면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적의 전력(戰力)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베트남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반대가 빗발쳤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075년 말 베트남군이 3군으로 분할해 맡은 지역의 공격을 위해 북진(北進)했다. 깜짝 놀란 송나라는 국경 일대 병사들을 모아 저항했다. 그러나 이는 위장 공격이었다. 리트엉끼엣은 정예병력을 이끌고 바닷길로 돌아 광동성 흠주(欽州)에 상륙한 뒤 염주(廉州)를 초토화시키고, 송나라군을 뒤에서 공격했다.
 
  이어 베트남군은 군사요충지 옹주(邕州)성을 포위했다. 송나라 군민(軍民)들이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40일 만에 함락됐다. 베트남은 각지의 군수(軍需)물자를 불태우고, 주민과 병사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베트남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협상으로 宋軍 철수시켜
 
  송나라 신종은 격노했다. 곽달(郭達)을 토벌군 지휘관으로 임명해 즉시 베트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곽달은 명장(名將)이었지만 원정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출발해야 했다.
 
  1076년 국경을 넘은 송나라군은 탕롱(昇龍·지금의 하노이)을 향해 곧장 서진(西進)했다. 베트남군은 계속 퇴각해 송군의 보급선을 늘어뜨렸다. 그러고 홍강을 결전지로 삼아 기다렸다. 리트엉끼엣은 근처의 모든 배를 강 서안에 집결시켜 송군의 도강을 막았다. 한 달 넘게 대치가 이어지면서 송나라 병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이 틈에 베트남군이 강을 건너 기습하자 송군은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잃고 후퇴했다.
 
  곽달은 재빨리 병력을 수습해 전선을 고착시켰다. 전쟁이 길어지자 베트남군도 버티기 어려웠다.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에 철군(撤軍) 명분을 주며 화해를 청했다. 송나라가 점령 중인 국경지대 5개 주(州)를 할양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송이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하자 즉시 공격을 재개해 이 중 3개 주를 되찾았다.
 
  2년 뒤 베트남은 코끼리 10마리를 조공으로 바치면서 나머지 2개 주를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송나라 신종은 이전에 베트남이 잡아간 자국인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양국이 모두 약속을 지키면서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이는 송이 북방에 요(遼)를 대신해 들어선 금(金)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더 이상 베트남을 적국으로 삼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골의 1차 침략
 
베트남 거리에 그려진 몽골군을 물리친 쩐꾸옥뚜언의 승전을 그린 벽화.
  13세기 초 몽골 제국이 흥기(興起)할 무렵 베트남에는 해적 출신인 쩐(陳) 왕조가 들어섰다. 쩐 왕조는 왕족의 결속력이 유난히 강해, 태위(太尉)와 군 지휘관 및 지방의 주요 성주들까지 왕족이 독차지하는 이른바 ‘종실(宗室) 독점 지배체제’를 형성했다. 또한 누가 최고 권력자가 되든 왕위는 탐내지 않는다는 장자(長子) 계승 전통이 초기부터 확립되었다.
 
  종실 독재는 국가 자원의 관리와 동원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었다. 특히 모든 성인 남자들을 정규군과 왕족의 사병, 방대(防隊), 즉 지역 예비군 등 촘촘히 짜인 군대 조직 어딘가에 소속되도록 만들었다. 대몽(對蒙)항쟁 때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병력이 끝없이 충원된 비밀이 여기에 있다.
 
  베트남은 북쪽에서 불길같이 내려오는 세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호라즘처럼 몽골 상인들을 학살하거나 버마처럼 사신을 처형하는 등 몽골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몽골은 1253년 지금의 중국 윈난성(雲南省)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정복,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게 된다.
 
  1257년 몽골의 몽케 대칸은 운남 주둔군 사령관 우량하타이에게 베트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베트남을 점령해 남쪽에서 송나라를 치는 또 하나의 공격로를 확보하고 베트남 군민을 대송(對宋) 전쟁에 동원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량하타이는 국경에 3만 대군을 집결시키고 베트남에 송을 공격할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을 사실상의 항복 요구로 받아들인 베트남 조정은 몽골 사신을 감옥에 가두고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1258년 1월 수도인 탕롱 서북쪽 비엣찌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베트남군은 분투했지만 야전에서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베트남 왕은 급히 남쪽으로 피신했고, 백성들은 몽골군의 학살과 약탈에 희생당해야 했다.
 
  우량하타이는 탕롱을 점령한 뒤 항복을 기다렸다. 그러나 베트남은 항복은커녕 오히려 소규모 반격을 가하며 저항했다. 베트남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얕봤던 게 잘못이었다. 베트남군은 퇴각하며 몽골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베트남과의 전쟁을 단기전으로 생각했던 몽골군은 점점 줄어드는 병량과 낯선 전염병까지 만나게 돼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돌아가는 길 또한 순탄치 않았다. 몽골군은 뀌화에서 소수민족인 무엉족 군민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침략할 때 저질렀던 만행에 대한 죗값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것이다.
 
 
  ‘베트남의 이순신’ 쩐꾸옥뚜언
 
꽝닌성 껌프시에 있는 쩐꾸옥뚜언 사당. 베트남 장교들은 이곳을 참배하며 애국심과 군인정신을 기른다.
  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강화(講和)를 맺었다. 재침을 막으려는 노력이었지만, 몽골은 송나라 공격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1274년 송이 무너지자 몽골의 태도가 돌변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공납 요구를 늘리는가 하면, 남쪽 참파를 정벌할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침략의 명분 쌓기였다. 베트남에서는 제1차 몽골전의 지휘관이었던 쩐꾸옥뚜언[陳國峻·1228~1300년/쩐흥다오(陳興道)라고도 함]을 다시 군(軍)사령관으로 내세웠다. ‘베트남의 이순신 장군’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쿠빌라이 대칸의 아들 토곤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1284년 12월 국경을 넘었다. 베트남군은 연패(連敗)해 수도 탕롱을 빼앗겼다. 남딘에 재집결했지만 또 패했다. 토곤은 참파 국경에서 대기하던 소게투에게도 북상을 명령했다. 남북으로 협공당한 베트남군은 대몽 항쟁 이후 최대 위기로 내몰렸다.
 
  쩐꾸옥뚜언은 결단을 내렸다. 왕과 군 지휘부, 일부 병력을 배에 태워 먼바다로 나갔다. 그러고 탕롱 북쪽에 상륙했다. 토곤은 적이 보급로를 노린다고 생각해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베트남군은 다시 배를 타고 내려와 소게투 부대를 기습했다.
 
  그사이 우기(雨期)가 시작됐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홍강 유역이 드넓은 습지로 변했다. 진흙 펄 속에서 몽골 기병은 더 이상 천하무적이 아니었다. 베트남군은 잃었던 요새들을 차례로 탈환했고, 고립된 몽골군은 또다시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토곤은 철군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쩐꾸옥뚜언은 5만 병력을 보내 몽골군 앞을 가로막았다. 전투 의지를 잃은 몽골군 병사들은 달아날 길만 찾다가 결국 5만 명 넘게 포로로 잡혔다.
 
 
  제2차 바익당강 전투
 
하노이역사박물관에는 1288년 몽골의 3차 침략 때 퇴각하는 몽골군을 격멸하기 위해 바익당강 바닥에 박았던 나무 말뚝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몽골 제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인적·물적 손실도 일본 원정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누구도 쿠빌라이의 분노와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베트남이 몽골군 포로들을 모두 송환하며 강화를 간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몽골군은 2년여 준비 끝에 1287년 또다시 국경을 넘었다. 지휘관은 토곤이었고, 총 10만 병력 중 8만 명이 몽골족일 정도로 정예부대였다.
 
  베트남군은 2차 항쟁 말기 야전에서 대승(大勝)한 사실에 몽골군과 정면전(正面戰)을 벌였다. 결과는 참패(慘敗)였다. 토곤은 국경의 저항을 일소한 뒤 바익당강 하류인 반끼엡에서 수군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배로 군량을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페르시아인 오마르가 이끄는 몽골군 전투함대가 베트남 수군에 대승을 거뒀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몽골군 수송함대가 안심하고 내려오는데 전멸한 줄 알았던 베트남 수군이 나타나 그 많은 군량과 건초를 불태워버렸다. 쿠빌라이가 다시 군량을 모아 전투함대로 호위해 보냈지만 이번에도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베트남 수군에게 참패했다.
 
  토곤은 일단 탕롱을 점령했다. 그러나 우기는 다가오고 적의 기세는 여전히 거셌다. 머뭇거리다가는 참사를 겪을 게 뻔했다. 몽골군은 결국 육로와 해로로 나뉘어 철군했다.
 
  쩐꾸옥뚜언은 이들을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350년 전 선조들이 그랬듯이 바익당강 바닥에 나무 기둥을 박아놓고 몽골군 전선들을 좌초시킨 뒤 화공(火攻)을 퍼부었다. 그 나무 기둥 일부가 최근에 발견돼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베트남은 곧바로 사신을 원(元)나라로 보내 사과하고 “우리는 덫에 갇힌 짐승처럼 생존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읍소(泣訴)했다. 쿠빌라이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러게 왜 참파 공격로를 열어주지 않았느냐”고 꾸짖었다. 쿠빌라이는 여전히 베트남 침략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의 사후 양국은 우호 관계를 회복했다.
 
 
  다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다
 
  철옹성 같던 쩐 왕조도 쇠퇴해 외척 호뀌리(胡季犛·1336~1407년)에게 15세기 초에 멸망한다.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는 왕위 찬탈을 응징한다는 핑계로 1406년 베트남을 침략했다. 호(胡) 왕조는 국력을 기울여 전쟁에 대비해 왔지만, 이반된 민심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렇게 베트남은 460여 년 만에 다시 중국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통치는 무자비했다. 병합 1년도 안 돼 우마(牛馬) 23만 마리, 벼 1360만 석, 배 8000여 척을 빼앗아 갔다. 베트남 풍속을 금지하고, 베트남어 쯔놈으로 쓴 책을 모두 불태워 문화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베트남 백성들이 하나둘 들고일어나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번이 진압됐다. 호 왕조의 군대나 저항군 모두 명나라군과 똑같은 전술로 정면 승부하는 전략적 미숙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패배 속에 마침내 새로운 지도력을 갖춘 세력이 나타났다.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레러이(黎利·1385~1433년)는 야심 많고 호방한 인물이었다. 그는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돌아와 식민정부의 순검(巡檢)으로 일하며 때를 기다리는 등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주위로 당대의 지사(志士)들이 모여들었고, 마침내 1418년 병사 2000명과 함께 출진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명나라군에 대패했고 가족들까지 붙잡혀갔다.
 
 
  게릴라전의 원조 레러이
 
탄호아성 탄호아시에 있는 레러이 동상.
  레러이는 좌절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병사들을 모아 몇 번이고 다시 봉기했다. 이런 중 그는 장렬하게 싸우다 전멸하는 것보다 달아나 전투력을 보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레러이군은 적이 진격하면 산으로 달아나 유격전(遊擊戰)을 벌였고, 후퇴하면 쫓아가 공격했다. 방비가 약한 적의 보급부대나 전진기지들을 노렸고, 매복과 유인 기습을 기본 전술로 삼았다. 20세기 미국과 싸운 베트남 공산군이 게릴라전의 전범(典範)으로 여겼던 레러이의 전략은 이렇게 완성되어 갔다.
 
  레러이는 세 번이나 명나라군에 쫓겨 전멸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명군 주력이 레러이 쪽에 몰려 있는 사이 베트남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휴전협정을 맺고 군대를 철수했다. 당당하게 고향으로 돌아온 레러이는 본격적인 군대 양성에 들어갔다. 그러고 방비가 약한 남쪽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남부를 평정한 레러이가 수도 탕롱을 향해 진격하자 명나라는 왕통(王通) 장군과 지원군을 보냈다. 10만 명으로 증강된 명나라군은 탕롱 외곽 까오보에서 개전 이래 최대 전투를 벌였다. 왕통의 작전은 북쪽에서 소수 병력으로 적의 퇴로를 막고 남쪽에서 주력부대가 공격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좋았지만 기밀이 유출됐다. 명군은 이동 도중 똣동과 쭉동에서 연이어 매복에 걸려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제 탕롱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이 레러이의 발아래 놓였다.
 
  명 조정은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15만 명을 다시 파견했다. 지휘관은 유승(柳升)이었다. 그는 화총부대로 오이라트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기병대를 이끌고 자칭 불모(佛母) 당새아의 난을 진압하는 등 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 지나쳤다.
 
  국경을 넘어 쾌속 진격하던 유승은 치랑 계곡의 적을 소탕하던 중 멀리 베트남군 장수가 있는 것을 보곤 직접 쫓아갔다. 그는 주요 참모 등 100여 기로 추격을 개시했는데, 이는 베트남군의 함정이었다. 계곡 안에서 그만 매복에 걸려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최취(崔聚)가 지휘를 이어받았지만 소심한 그는 오도 가도 못 하고 고립됐다. 결국 베트남군의 포위 공격에 지원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탕롱성의 명나라군은 모든 희망을 잃었다. 레러이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많은 장군이 퇴각하는 명나라군을 격멸하자고 주장했지만 레러이는 만류했다. 그는 명나라 병사들의 귀국을 위해 길옆에 식량을 준비해 두고 배 500척을 제공했다.
 
  1428년 왕위에 오른 레러이는 명나라에 책봉을 요구했다. 명나라는 인정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왕이 아닌 권서안남국사(權署安南國事)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베트남 국왕 권한대행’ 정도라고 할까. 레러이는 이를 수용했고 두 나라는 공식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내전
 
탄호아성 람낀에 있는 레러이 궁궐 유적.
  레러이가 세운 레 왕조의 전성기 이후 무능한 왕들이 잇따르자 베트남은 군벌(軍閥)들의 각축장이 됐다. 1527년 막당중(莫登庸·1483~1541년)이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빼앗았다. 막당중은 명나라에 자발적으로 영토를 바치는 등 정권 유지에 몰두했지만, 그의 왕조는 60여 년 만에 붕괴했다.
 
  이후 베트남은 일본의 막부처럼 명목상 레 왕조를 존치하되 권력은 유력 군벌이 쭈어(主)라는 이름으로 장악했다. 이와 동시에 북쪽에 찡(鄭) 씨 가문, 남쪽에 응우옌(阮) 씨 가문이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열렸다. 두 가문은 45년간 싸웠지만 승부를 내지 못하고 휴전했다. 이 과정에서 열세였던 응우옌 가문이 남쪽으로 영토 확장을 꾀하면서 1697년 참파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왕위 다툼에 여러 차례 개입하며 곡창지대인 메콩 델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고달팠다. 오랜 전쟁에 피폐해지고, 기득권층의 수탈은 갈수록 심해졌다. 게다가 당시는 소빙하기였다. 반란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 가운데 1771년 응우옌 형제들이 일으킨 농민 봉기는 마침내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채 말을 내달린 삼 형제 중 막내인 응우옌후에(阮惠·1753~1792년)는 단숨에 전장(戰場)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먼저 찡 쭈어와 화약을 맺고 응우옌 쭈어 세력을 멸망시켰다. 이를 구하기 위해 태국군 5만 명이 참전했는데 강 위에서 포위해 전멸시켰다. 그러고 칼끝을 찡 쭈어에게로 돌려 결국 전국을 통일했다.
 
  이런 중 레 왕조의 마지막 왕이 청(淸)나라로 달아나 도움을 청했다. 광서성 총독 손사의(孫士毅)는 “본래 안남은 우리의 옛 영토”라며 정벌을 주청(奏請)했다. 건륭제(乾隆帝)는 그에게 29만 대군을 맡겼다. 1788년 손사의는 손쉽게 탕롱 등 베트남 북부를 점령했다. 그는 베트남이 과거처럼 지구전(持久戰)으로 맞설 거라고 생각했다. 응우옌후에는 이를 역이용했다. 최고 속도로 북쪽을 향해 진군했으며, 마침 구정 명절이었다. 응우옌후에는 방심하고 있던 탕롱 외곽의 청나라군 요새들을 격파하고 성 안으로 돌진했다. 손사의는 말안장조차 챙기지 못한 채 달아났다. 청나라는 체면을 구겼지만 15만 팔기군(八旗軍)으로 5000만 한족을 지배해야 하는 취약성 때문에 더 이상의 침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
 
하노이군사박물관에 있는 응우옌 왕조 시기 대포.
  응우옌후에의 행위는 왕위 찬탈이었다. 하지만 레 왕조의 청나라를 향한 도움 요청은 매국 행위여서, 왕위 찬탈의 비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응우옌후에는 왕위에 올라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축출하고, 호적에서 신분 기록을 지웠다.
 
  그런데 분열이 또 문제였다. 삼 형제 사이에 무력(武力)충돌이 벌어지면서 응우옌후에는 응우옌 쭈어의 거점이었던 쟈딩(嘉定·지금의 호찌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여력이 없었다. 이는 옛 세력의 복귀를 불렀다.
 
  응우옌 쭈어 가문이 멸망할 때 당시 13세였던 응우옌푹아잉(阮福映·1762~1820년)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 그는 태국으로 망명해 세력을 규합한 뒤 응우옌 형제들이 내분에 빠지자 다시 돌아왔다. 프랑스인 피뇨 주교가 베트남 내 기독교 왕국 건설을 꿈꾸며 그를 적극 지원했다. 그는 유럽인 용병 400명과 각종 무기 그리고 전함 네 척을 구해왔는데, 특히 해군의 압도적 우위가 내전의 향방을 바꿨다. 최종 승자가 된 응우옌푹아잉은 1802년 푸쑤언(富春·지금의 후에)을 수도로 새 왕조를 열었다.
 
  응우옌 왕조는 주변으로 영토를 넓히는 등 지역 강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이 전 세계를 압도하던 시대였다.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침략을 개시했다. ‘만고의 충신’ 응우옌찌푸엉(阮知方·1799~1873년)이 분전했지만 무기 수준 격차에 막히고 말았다. 성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장기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베트남 왕은 정규전으로 청나라와 태국을 눌렀던 화려한 기억에 매달려 망국(亡國)의 시기를 앞당기고 말았다. 1884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치다
 
하노이군사박물관에 있는 베트남 전쟁 당시 무기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반도로 들어왔다. 다음 해 호찌민(胡志明·1890~1969년)이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越盟)을 결성했는데,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전략사무국)가 이들에게 무기와 훈련을 지원했다. 베트민은 1945년 초부터 소규모지만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시작했는데, 일본의 항복으로 큰 전과(戰果)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주요 도시들을 신속하게 장악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1946년 말부터 전쟁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들의 독립운동으로 전력이 분산된 반면에 베트민은 중국공산당의 대규모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는 디엔비엔푸에서 참패한 뒤 1954년 제네바에서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미국은 당초 베트남 문제에 거리를 두려 했지만, 중국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끼고 적극 개입으로 돌아섰다. 미국은 1965년부터 지상군을 투입했지만 2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1973년 철수했다. 그러고 2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이 패망했다.
 

  비슷한 무렵 캄보디아도 폴포트(1925~1998년)가 이끄는 크메르루주에 의해 공산화됐다. 폴포트는 자국민 80만 명 이상을 학살한 정신병자였다. 이런 미친 사람에게도 애국심은 있었다. 폴포트는 메콩 델타를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캄보디아군은 수시로 베트남 국경을 넘어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베트남은 중국을 의식해 제한적인 반격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전면전을 결정했다. 1978년 12월 25일 전군을 동원해 캄보디아로 밀고 들어갔다. 캄보디아군은 허무하게 무너져 13일 만에 프놈펜이 함락됐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베트남에 역사적 원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두 손을 들어 베트남군을 환영했다.
 
 
  중월 전쟁
 
  대신 중국이 움직였다. 1979년 2월 17일 중국군 20만 명이 침공해 왔다. 당시 베트남은 정규군 대부분을 캄보디아로 보내 북부 국경에는 민병대 10만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베트남군은 잘 버텼다. 미국과 소련제 최신 무기들이 있었고, 실전(實戰) 경험도 풍부했다. 반면에 중국군은 아직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인명피해 끝에 방어선들을 돌파하고 사흘간의 시가전(市街戰)으로 랑선을 점령한 뒤 승리를 선언하고 철수했다.
 
  베트남 정부는 민간인 여성들이 총을 들고 중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사진을 외신(外信)에 배포해 중국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한 달 동안 진행된 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베트남은 한동안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맹주(盟主)로 군림할 수 있었다. 중국은 낙후된 기술 수준을 뼈저리게 느껴 국가 현대화를 위한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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