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육대회에서 장도영 사단장으로부터 표창장 받았지만, 며칠 후 사창리에서 중공군 기습받고 패주
⊙ 미군, 최루가스 살포하며 국군 후퇴 막으려 했지만 패주 막지 못해
⊙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설욕
⊙ 1951년 6월 6일 정식으로 일병 계급장 달아
⊙ 첫 휴가 복귀 후 연대장, “이놈, 고생 많았구나. 부모님은 잘 계시더냐?”
⊙ 휴전 직전까지 금성대 전투, 백암산 전투 치르고 1955년 이등중사로 제대
⊙ 미군, 최루가스 살포하며 국군 후퇴 막으려 했지만 패주 막지 못해
⊙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설욕
⊙ 1951년 6월 6일 정식으로 일병 계급장 달아
⊙ 첫 휴가 복귀 후 연대장, “이놈, 고생 많았구나. 부모님은 잘 계시더냐?”
⊙ 휴전 직전까지 금성대 전투, 백암산 전투 치르고 1955년 이등중사로 제대
- 용문산 전투에 투입되었던 6사단 장병들. 사진=육군
1950년 9월 22일 신령-조림산 반격 작전과 함께 국군 제6사단의 북진이 본격화됐다. 9월 25일 함창을 탈환한 데 이어 26일에는 문경 조령과 이화령을 넘었다. 29일에는 단양-충주선을 따라 북상하면서 지역 내 잔적들을 격파하고 충주-원주-횡성-춘천선으로 진격, 30일 춘천 원 주둔지로 복귀한다.
10월 1일 동해안에서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전격적으로 삼팔선을 돌파한 데 이어 2일 서부전선의 국군 제1사단이 삼팔선을 돌파했다. 그리고 10월 5일 6사단이 가장 늦게 삼팔선을 돌파하며 압록강을 향한 장도(壯途)를 시작했다. 그러나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함으로써 통일이 눈앞에 와 있던 순간,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7연대는 연대 병력 3분의 2를 잃고 개천으로 철수한 뒤, 1951년 초에는 이천까지 철수한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예고된 상태에서 7연대는 6사단의 예비대가 되어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 주둔하며 적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창리 후퇴와 표창장
1951년 4월, 전 전선에 걸쳐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예고되어 있었다. 장도영(張都映·1923~2012년)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은 1951년 4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장도영 사단장이 몸소 사창리 전선사령부에 머물며 부대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가평읍 사단사령부에서는 7연대장이었던 임부택 대령이 부사단장으로서 전선 상황을 조율하고 있었다.
당시 2연대는 북쪽 정면 56번 도로 명월고개 너머 다목리 삼거리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수피령과 파포천 하류 방면에 대한 경계 강화에 들어갔다. 19연대는 사창리 분지 서쪽 463번 도로 축선상의 광덕계곡에서 김화 방면 잠곡리 삼거리를 중심으로 2개 대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광덕계곡 삼거리에는 예비대를 배치했다. 7연대는 사단 예비대가 되어 사창리에 주둔했다.
체육대회
4월 22일, 6사단은 전장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잠시 잊고 장병들의 사기 진작 겸 망중한의 조촐한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연대별로 할당 선발된 장병들을 공터로 집합하게 하여 씨름과 기마전, 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대회가 차례대로 진행됐다. 소년은 7연대를 대표하는 단축마라톤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됐다.
기마전은 옛 시골 동네에서의 투석전을 연상케 할 만큼 거칠었다. 병사들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모래며 자잘한 돌멩이들을 절반쯤 채워 감추고 있다가 기수 노릇을 하는 간부들을 집중 공격했다. 적당히 힘겨루기 하며 대치할 때쯤 계급을 내세운 상대 기수가 주먹을 휘두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양말 모래주머니를 휘둘러 그를 태우고 있는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말들이 쓰러지니 기수 노릇을 하던 간부들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비록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 멍들었지만, 기마전에 참여한 장병들이나 구경하는 장병들이나 폭소를 터뜨리며 모처럼 가져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군장에 소총을 멘 채 달리는 단축마라톤. 만 17세 소년은 좁은 분지를 에두른 시골길을 몇 바퀴 달리는 동안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사단장 표창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표창장은 소년에게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기습
4월 하순의 땅거미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북쪽 다목리 방면 명월고개와 동쪽 지촌천 하류 방면에서 ‘따콩’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사창리 분지를 에워싼 산기슭과 능선들에서도 일제히 함성과 함께 대병력이 분지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꽹과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6사단 전체가 사창리 비좁은 분지에 갇힌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것이다. 다목리 방어진지가 일거에 무너지며 퇴각해 온 2연대원들마저 사창리로 밀려들며 분지는 넋이 나간 채 퇴로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6사단 병력과 그 뒤를 쫓는 중공군이 뒤섞여 아수라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장도영 사단장은 미군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있을 것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다목리 방면에 2연대를, 김화 방면 잠곡리 일대에 19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창리에 7연대를 예비대로 배치하여 다목리와 잠곡리의 1차 방어진지를 돌파한 적을 사창리에서 막아냄으로써 중공군의 춘천-가평 진출 저지를 목표로 했다. 그런 중에 막간을 이용해서 가진 체육대회와 조촐한 회식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장병들은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깨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혼을 빼는 나팔 소리에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 역할을 해야 할 장교들까지 군장에 개인 화기까지 팽개치고 사창리 분지의 남쪽 골짜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전초부대고 예비부대고 할 것 없이 뒤섞여 일단 남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남쪽은 화악산-석룡산-명지산으로 이어지는 고산준령이 가로막고 있었다.
패주
사단장은 다급하게 부대별 현 위치 사수(死守)를 명령했다. 그러나 회식과 휴식 중에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각종 화포며 차량, 개인 장비들을 내팽개친 채 퇴로를 찾아 내달렸다. 장병들은 그 순간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가 동림산과 온정리 계곡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수많은 전우를 잃어야 했던 악몽에 사로잡혔다.(당시 초산까지 진격했던 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개천으로 탈출 재집결했을 때 3553명의 병력 가운데 75%를 잃어 개천으로 재집결한 생존 인원은 불과 875명으로서 연대는 전투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각종 야포와 개인 화기, 군장을 비롯한 장구류까지 팽개친 채 무질서하게 남쪽 후방 가평 방면으로 내달리는 장면을 전사(戰史)와 사전류에서는 ‘철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질서와 전혀 무관한 엄연한 ‘퇴각’이고 ‘패주(敗走)’였다.
그렇게 4월 22일, 중공군 제9병단 소속 3개 사단의 기습으로 시작된 사창리 전투는 19연대는 고립, 2연대와 7연대는 차량과 야포 등의 장비를 포기하고 일부는 좌우 인접 부대로, 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흩어져 철수해야 했던 국군 제6사단의 치욕의 패배였다.
6사단 주력이 화악산과 명지산 사이 도마치고개를 넘어 적목 조무락 골짜기를 따라 퇴각하고, 또 한 무리는 화악산 계곡을 거슬러 올라 매봉 옆 능선을 타고 넘어 목동 분지로 내려왔을 때 그 양쪽 퇴각로 뒤에서는 중공군도 맹렬하게 뒤쫓고 있었다.
최루가스
6사단은 4월 24일 지금의 가평 북면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미군 헌병들이 퇴각로에 최루가스를 뿌리고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하며 막아섰지만, 전의(戰意)를 상실한 병사들의 탈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달리던 병사들이 얼굴을 감싸 쥐고 쓰러지자, 병사들은 미군이 살인 독가스라도 뿌린 줄 알고 그 와중에도 분지 양쪽으로 흩어져 달렸다.
소년은 ‘낮은 포복을 하면 아무리 독가스라도 괜찮겠지’ 생각하며 땅바닥을 기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따가워지며 눈물, 콧물이 얼굴을 덮기 시작했다. 연거푸 기침, 재채기가 나고, 드러난 맨살이 따가워지며, 땀구멍이 열린 듯 온몸에서 땀이 나고 열병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소년은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죽더라도 더 달아나 죽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미군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멈추어선 6사단 병사들이 하나같이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쭈그려 앉아 연신 눈물을 닦고 코를 풀며 컥컥대고 있는데, 그 꼴을 보고 선 미군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뭐라 쏼라쏼라하며 손가락질을 해대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비웃고 놀리는 게 확실했다. 더러는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4월 25일 가평읍 부근까지 내려온 6사단은 지촌천을 따라 밀고 올라오는 중공군을 뚫고 화천천 하류로 퇴각한 제16포병대원들이 춘천을 거쳐 가평 본대로 합류하면서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 패전으로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득이 사단은 다시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하에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에서 부대를 재편하였다. 이때까지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인치 로켓포 66문, 3.5인치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 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 포병부대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낙오한 병력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하게 되었다.〉
당시 수준으로 6사단이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만 해도 사단이 해체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기습과 함께 개인 화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후퇴한 덕분에 6사단은 역설적이게도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4월 22일 저녁 무렵 시작된 사창리 전투는 영연방 제27여단과 미 제2사단, 제40사단, 제213야전포병대의 분전에 힘입어 4월 25일 중공군 주력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퇴각하면서 종료됐다.
소총과 군장을 챙길 틈도 없이 남쪽 계곡과 고갯길을 내달려온 소년은 4월 23일 날이 밝아서야 미군으로부터 개인 화기와 장비들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계급 없는 군복을 입은 지 1년여 만에 전장에서 맛본 체육대회의 즐거웠던 시간과 꿈결처럼 사라진 사단장 표창장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장도영 사단장 명의(名義)로 된 표창장은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 없는 소년이 난생처음 받아보는 상이었다.
용문산에서 파로호까지
5월 20일 새벽, 7연대에도 반격 출동 명령이 하달됐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함께 주먹밥과 시래깃국, 미군 측에서 제공한 C-레이션 등으로 간단 신속하게 식사를 마쳤다. 중대 막사 앞에 소대별로 도열한 12중대원들은 군장 검사와 무장 상태를 점검받고, 용문산 북쪽 427고지를 향해 출발했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소년은 걸으면서 새벽 식사 시간에 따로 몇 개 챙긴 주먹밥을 선임들 눈치를 봐가며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런데 목표로 한 고지 하단부에 다다랐을 때쯤 소년의 배가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소대장에게 보고하고 어느 바위 뒤로 가서 허겁지겁 바지를 내렸다. 쭈그려 앉기가 무섭게 설사가 났다. 행군 중에 먹은 주먹밥뿐 아니라 출발하면서 한입에 털어 넣다시피 한 시래기 줄기가 생으로 쏟아졌다. 소년은 여전히 속이 편치 않았지만, 서둘러 옷을 추스르며 소대원들을 따라잡았다.
복통
다행히 소대원들은 얼마 가지 않은 곳에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임하사를 비롯한 고참들의 장난 섞인 핀잔을 들으며 소년도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427고지를 연대 최후의 보루로 삼아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내며 분전하고 있는 2연대가 중공군과 뒤섞여 혈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 7연대는 427고지를 좌회, 중공군 후방을 급습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소년의 소대도 이른 새벽 고지를 향해 신속 기동을 시작했다.
소년은 부글거리는 변의를 참아가며 걷고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427고지로 향하는 어느 야산을 오를 무렵이었다. 소년은 하늘이 노래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본격적으로 복통이 시작된 것이다. 소년은 산기슭에 주저앉아 복통을 호소했다. 선임병들이 꾀병 부리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소년은 고참병들의 호통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복통은 멈출 줄 몰랐다. 온정리 산골짜기에 갇혀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소년이 이번에는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소대장이 소년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창백해진 소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소대장은 소대원들 눈을 피해 가며 게걸스럽게 주먹밥을 먹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대장은 손수건을 꺼내 소년의 얼굴에 얼룩진 땀과 눈물을 닦아내며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이 녀석을 야전병원으로 후송해라.”
병사 둘이 축 늘어진 소년을 부축해서 산을 내려갔다.
소대장
소년은 기진맥진한 채 연대 주둔지 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 군의관은 식중독으로 진단했다. 소년이 의식을 잃고 야전침대에 누웠다가 눈을 떴을 때는 5월의 햇살이 한가득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들것을 든 병사들이 야전병원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말이 야전병원이지 땡볕 아래 군용 야전침대 몇 개 놓여 있는 게 다였다.
소년은 위생병들에게 떠밀려 야전 병상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행히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한숨 푹 자고 났더니 복통도 가시고 몸도 개운해져 있었다. 소년은 위생병들을 도와 사상자들을 야전 병상으로 옮기면서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들것에 실려온 사상자들이 모두 소대원들이었다. 그중에는 자신을 후송 보낸 소대장도 있었다. 소대장은 얼굴과 전투복이 피범벅이 된 채 들것에 실려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대장을 부르며 다가섰다.
“소, 소대장님!”
소대장은 피로 얼룩진 얼굴에 두 눈을 껌벅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대장의 손이 소년의 손을 쥐는 게 느껴졌다. 힘이 없었다. 소년은 그 뒤로 소대장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소년이 야전 병상에 누워 꿈속을 헤맬 무렵이었다. 소대원들이 목표로 한 427고지를 좌회하여 고지 후방의 중공군 주력을 기습하기 위해 어느 능선을 지날 무렵이었다. 5월 하순으로 접어든 계절의 덜 익은 녹음을 엄폐물 삼아 고지 후방으로 기동하던 소대원들은 한 무리의 중공군과 조우했다. 중공군의 따발총이 먼저 불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소대원들은 산개하여 바위며 나무 그루터기를 엄폐물 삼아 대응 사격을 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치열한 총격전이 전개되는 동안 인접한 다른 능선을 따라 기동하던 중대원들이 달려왔다. 증원된 적군의 기세에 눌린 중공군들은 사상자들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하지만 소년의 소대가 입은 인명 피해는 막심했다.
용문산 전투
소년은 그날로 다시 427고지로 투입되었다. 소대는 소대장뿐 아니라 상당수의 소대원이 새로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2연대의 결사항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좀처럼 전진하지 못하던 중공군은 427고지에 6사단 주력이 집결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중공군 제63군은 예비사단인 189사단까지 427고지에 투입함으로써 고지에서는 국군 1개 연대와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이 뒤섞여 고지 사수와 점령을 위한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지며 대혼전이 벌어졌다.
427고지 좌우 능선으로 우회한 7연대와 19연대가 5월 20일 새벽 중공군 후방에서 들이닥쳤다. 후방을 기습당한 427고지의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맹렬하게 고지를 달려 올라가던 기세가 꺾이며 중공군들이 고지 하단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좌우에서 치고 들어온 7연대와 19연대 병사들의 화기들이 불을 뿜었다. 대대 예하 중대마다 몇 명씩 인원을 차출 충원함으로써 편제가 갖추어진 소년의 소대원들도 적진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6사단은 자신들이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무질서 속에 퇴각했던 것처럼 혼란에 빠져 쫓겨 가는 중공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제63군)은 7연대와 19연대가 들이닥치기 시작한 그날 새벽, 청평댐을 건너 조종천에 이르러 군단 주력이 현리, 포천 방면으로, 후속 퇴각해 온 부대는 경춘국도를 따라 가평읍 방면으로 퇴각해 갔다.
불타는 중공군 시신들
7연대는 퇴각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며 5월 23일 새벽 홍천강을 도강하여 박암리의 주요 고지들을 점령했다. 패주하는 중공군을 향해 미군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치며 기총소사와 네이팜탄 공격을 퍼부었다. 네이팜탄이 폭발하며 번진 거센 불길에 살아 달아나던 중공군도 죽어 있는 중공군도 활활 타오르며 형체도 없이 스러져 갔다. 중공군이 패주해 간 길에는 폭격으로 숨진 수많은 적군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5월 하순의 땡볕 아래 빠르게 부패하며 부풀어 오른 배가 터져 내장이 옷섶을 비집고 나온 시체가 곳곳에 나뒹굴었다. 살찐 쉬파리 떼가 시체와 생사람을 가리지 않고 까맣게 달라붙었다. 공병부대원들과 동원된 노무자들이 시체들을 들것에 실어 공터로 옮겼다. 공터마다 쌓인 시체 더미에 기름이 부어지고 불이 붙여졌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함께 박암리, 가정리를 지나 봉화산 서쪽 골짜기를 돌아 강촌에 다다랐다. 패주하던 잔적들이 산발적으로 저항하다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공포와 굶주림에 지친 중공군들이 무리로 투항하며 포로를 자청하기도 했다.
5월 25일 아침, 강촌에서 북한강을 건너 삼악산 서쪽 기슭을 돌아 계관산(736m) 동측방의 잔적을 제압하고 북배산(867m) 동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방동리에 집결, 차량 기동으로 다시 북한강을 건너 춘천 동북쪽의 청평리까지 진출했다.
파로호 전투와 매운탕
한편 설악에서부터 숨 돌릴 틈도 없이 사흘여에 걸친 대혼란 속에 가평읍을 통과한 중공군은 가평천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상당수가 후퇴를 포기하고 투항했다.
용문산 전투 종결을 눈앞에 둔 국군 6사단에 임무 전환이 하달됐다. 지평리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온 중공군 패잔병들과, 춘천과 평창 방면에서 후퇴해 온 중공군 3개 군단이 파로호 남쪽 간동면 오음리와 용호리 일대에 집결한다는 첩보에 따라 신속히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이었다. 오음리 분지에 집결한 중공군은 평균 폭 1km가 넘는 저수지를 건널 방법이 없었다. 매봉산 강기슭을 타고 구만리발전소 방향으로 나아가 댐 아래쪽 갈수기의 북한강 여울을 건너는 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용화산과 수불무산을 넘어 용호리-오음리 분지를 향해 돌격해 갔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중공군들이 몰려드는 국군과 미군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고 저수지 가로 몰려들어 일대는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분지를 에워싼 산들로 탈출 방향을 잡은 중공군들이 총격과 기총소사에 쓰러졌고, 폭격에 쫓긴 중공군들은 다시 저수지 방향으로 내달려 호수로 뛰어들었다. 중공군은 아비규환 속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들도 국군이 보이는 대로 그 앞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모하게 파로호(破虜湖)로 뛰어든 중공군들은 허우적거리다 익사했다. 살아남은 중공군은 포로가 됐다.
5월 29일, 중공군 포로들이 트럭에 실리거나 도보로 남쪽으로 떠났다. 이로써 5월 18일 가평 설악면 용문산 일원에서 중공군의 5월 공세로 시작된 용문산-화천호 전투가 종료됐다.
그러나 포로들이 떠난 뒤 또 다른 전투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 숫자보다 많은, 산더미를 이룬 중공군 시신 처리였다. 7연대 병력 대부분이 시신 처리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통나무를 이어 붙여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에 시신을 싣고 나룻배로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 수장시켰다. 시신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시신마다 묵직한 돌덩이를 달았다.
그러는 동안 5월이 가고 6월이 시작됐다. 시신 처리와 전장 정리도 거의 끝나가고 병사들은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호숫가로 나왔다. 한데 신기하게도 잉어며 붕어, 쏘가리, 피라미들이 물가로 나와 주둥이를 물 밖에 내놓고 뻐끔거리고 있었다. 익사하거나 수장된 중공군 시신이 부패하며 부영양화(富營養化) 현상을 유발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저수지는 산소가 부족해지며 물고기들이 대량 폐사(斃死)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물가며 계곡 쪽으로 피신한 물고기들조차도 물 밖으로 주둥이를 내밀어 뻐끔거렸다.
소대원 몇몇이 물가로 나와 맥을 못 추는 물고기를 잡아 솥을 걸고 매운탕을 끓였다. 여기저기 되는 대로 모닥불을 피워 물고기를 굽는 병사들도 있었다. 소년은 한 고참이 반합에 떠주는 매운탕을 받아 들었다. 소년은 국물 한술을 뜨려다 말고 반합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수장된 중공군 시체들, 가라앉다 말고 떠올라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즐비한 저수지의 물고기들이었다.
소년은 헛구역질을 거듭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고참들이 장난 삼아 억지로 소년의 입을 벌리고 물고기 살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살점은 소년의 목을 넘어가지 못했고, 위장에서 올라온 토사물과 함께 땅바닥에 뿌려졌다. 소년은 다시금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입맛을 잃었고, 헛구역질이 자꾸 났다. 신경성 위염과 과민성 장염이 그 뒤로 오래도록 소년을 괴롭혔다.
드디어 군인이 되다
1년 동안 북한강에서 낙동강으로, 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 압록강에서 다시 한강으로 오르내리는 동안 국군 제6사단은 전쟁의 변곡점이 된 전투의 주역이었다. 춘천-홍천 전투와 음성 전투, 문경 전투가 그랬고 낙동강 전선의 효령-신령 전투가 그러했다. 그리고 용문산-화천호 전투가 그랬다. 초산 진격 후 온정리-동림산 전투와 사창리 전투 패전으로 부대가 해체될 상황에 빠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일구어낸 용문산-화천호 대승이었다. 사단사령부가 화천읍으로 이동 주둔한 가운데 7연대는 그로부터 5km 북방 북한강 상류 풍산리에 주둔하며 부대 정비와 함께 병사들에게 잠시의 휴식이 주어졌다.
1951년 6월 6일, 중대 주둔지 막사 앞에 모처럼 이발과 면도를 하고 누추한 군복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대원들이 도열했다. 앞선 전투에서의 승리로 일계급 특진을 명 받았던 장병들에게 뒤늦게나마 진급 계급장이 수여됐다.
1950년 4월, 우연히 군복을 입고 병영 생활을 시작한 소년에게도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소년은 호명과 함께 중대장 앞으로 나아가 섰다. 중대장이 직접 소년의 가슴에 일등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러고 소년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 녀석, 고생했다. 장하다!”
첫 휴가
그 순간, 양평 먼 친척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군복을 입고 생사를 넘나든 전장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소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중대장의 두 손이 소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성명: 길운효(河, 學, 鶴 혼용)
입대일: 1951. 06. 06.
군번: 0742471
계급: 일병
1년여를 사선에서 혈전을 벌이며 살아남은 소년은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군번과 계급장이 주어지고, 이름과 군번이 적힌 인식표를 군복 입고 처음으로 목에 걸었다. 춘천에서 첫 전투를 치른 후 낙동강 전선에서, 삼팔선을 돌파하여 초산 압록강에서, 사창리와 용문산-화천호에 이르기까지 소년은 인식표조차 없이 전투를 치른 무명(無名)의 소년 용사였다.
그리고 곧바로 2박 3일의 특별 휴가가 주어졌다. 소년은 군장과 개인 화기를 챙겨 군용트럭에 올랐다. 아침 일찍 양평 어디쯤에서 출발한 트럭은 초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인천 부평역 앞에 도착, 사흘 뒤 00시까지 부평역 앞으로 와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소년을 내려주고는 떠나갔다. 소년은 경인선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출한 지 네다섯 해 만에 다시 밟는 부평 땅이었다. 시커먼 연기와 허연 증기를 내뿜으며 거칠게 씩씩거리던 증기기관차를 따라 달리며 집으로 돌아오고는 하던 그 길이었다. 굳게 쓴 철모에 군장을 지고 소총을 멘 소년이 그 길을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철마를 따라 달리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총탄과 포연 속을 달리고 적군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단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부평역에서 동암 방면으로 10여 분 걸으면 나타나는 곡선 구간을 돌아 소년은 철길을 벗어나 동산 쪽으로 난 마을 길로 들어섰다. 무너지고 쓰러진 집들 대신 공터마다 판자며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고 거적을 씌운 임시 거처들에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저녁 땟거리를 준비하던 한 아낙과 아낙의 치마폭을 잡고 선 코흘리개가 소년의 귀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소년은 동산 아래 초가지붕 끝자락이 선명해지자 “어머니!” 하고 소리쳐 불렀다. 소년의 군홧발 소리가 미처 집에 닿기도 전이었다. 다섯 칸 초가의 무너진 울타리 한가운데 쓰러질 듯 버티고 선 사립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둘째냐? 운학이 살아 있었느냐?”
메마른 6월 초저녁, 흙먼지 날리는 마을 길을 맨발로 달려 여인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의 초췌하고 핏기 없는 얼굴, 야윈 몸에 걸친 남루한 치마며 저고리가 지금이 전쟁 중임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다시 전선으로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마친 소년이 휴가 나올 때의 복장과 장비 그대로 아침 일찍 십정동 집 사립문을 나섰다. 소년은 경인선 철길 옆으로 올라서면서 그렁해진 눈물을 닦고 뒤돌아섰다. 배웅하는 양친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래전 집을 나설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에 사로잡힌 소년이 양친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깨에 걸친 소총이 걸리적거리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나지 못하는 소년을 부친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소총을 들어 소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염부(鹽夫)의 거친 두 손바닥이 소년의 볼을 감쌌다.
“잘 다녀오너라.”
다시 부평역에서
소년이 부평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철길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서 소년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년은 곡선 구간을 지나 멀리 부평역사가 보일 때쯤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주저앉아 흐느끼는 듯한 어머니가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소년은 걱정하지 마시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더 걷자 철길 우측 언덕 위로 성당이 보였다. 성당 첨탑의 십자가가 소년이 처음 가출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평에 양자로 보내지기 전, 동네 꼬마들과 몰려가면 늙은 신부가 사탕이며 과자를 나누어 주고는 했던 곳이다.
소년이 부평역에 도착하자 이미 트럭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 옆 선탑자 선임하사가 소년을 보고 씩 웃어 보였다. 소년은 반듯한 자세로 경례하며 휴가 복귀를 신고했다.
1951년 6월 9일 오전 7시, 소년을 태운 트럭이 부평역광장을 출발했다. 영등포를 지나 한강에 임시로 설치된 부교(浮橋)를 건너 종로통을 가로질러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광진에서 한강 북단을 끼고 구리 방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어 한강 북단을 따라 난 비포장도로를 달린 트럭은 양수리 북한강을 건넌 후에는 남한강변을 따라 달렸다. 6번 도로를 달려 양평읍을 지날 때쯤 용문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섰다. 탈이 난 배를 부여잡고 중공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청운면 삼거리에서 홍천 방면 44번 도로로 들어선 트럭은 굽은 비포장도로를 더욱 속도를 내며 달렸다. 초여름 뜨겁게 달아오른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며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병사들을 덮쳤다. 이윽고 홍천에서 5번 도로로 갈아탄 트럭은 춘천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럼 초산까지 갔다 왔겠구나”
몇 명의 특별 휴가 복귀병을 태운 트럭은 6월의 긴긴 해가 뉘엿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화천 풍산리 공터에 숙영 중인 7연대 영내에 들어섰다. 소년과 휴가 복귀병들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연대 주임상사의 인솔하에 주둔지 안쪽의 가장 큰 야전 막사로 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대대장들과 중대장들, 간부 장교들이 연대장(양중호 대령)으로부터 작전 지시를 받고 있었다. 막사 거적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연대장은 회의를 멈추고 환한 표정으로 병사들 앞으로 몸소 다가왔다.
병사들은 인솔 주임상사의 구령에 따라 연대장에게 경례하고 휴가 복귀를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연대장은 병사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하며 복귀를 환영했다. 소년과 악수하던 연대장은 물끄러미 소년을 보더니 물었다.
“길운효? 몇 살이냐?”
소년은 얼어붙은 듯 입을 열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열여덟 살입니다.”
“언제부터 싸우기 시작했느냐?”
“작년 6월 25일부터입니다.”
“그래? 그럼 초산까지 갔다 왔겠구나?”
“예, 그렇습니다.”
“학교 다니다 왔느냐?”
“아닙니다. 학교 다닌 적 없습니다.”
연대장이 주임상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여기 와 있는 건가?”
그러자 12중대장이 다가와 연대장 귀에 속삭였다. 연대장은 설명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고생 많았구나. 부모님은 잘 계시더냐?”
“예, 그렇습니다.”
연대장은 다시 한 번 소년의 두 손을 모아 쥐고는 격려와 함께 건투를 빌었다.
“무운을 빈다. 다시 보자꾸나.”
연대본부 막사에서 나오자 소대 선임하사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이 경례와 함께 휴가 복귀를 신고했다. 선임하사와 함께 소대 막사로 들어가 소대장에게 복귀 신고를 했다.
‘길운효 이등중사’
1951년 10월 13일, 6사단은 화천 백암산으로 진격하여 중공군 2개 사단을 격파한 데 이어 금성천 건너 교암산을 7연대가 점령했다. 이로써 소년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년 9개월여에 걸쳐 금성 대전투의 현장을 누볐다. 마지막 전투는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7연대가 국군 제8사단(사단장 장도영 소장)에 배속되어 중공군 60군 주력과 벌인 ‘백암산 전투’였다.
7월 27일 전쟁이 끝났다. 소년은 그로부터도 오랫동안 군문(軍門)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길운효 이등중사’에게도 제대 특명이 떨어졌다. 1월 28일, 21세 청년 제대병 길운효 중사는 화천군 상서면 주파리 백암산 기슭의 병영을 떠나 인천 십정동 집을 향해 출발했다.⊙
10월 1일 동해안에서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전격적으로 삼팔선을 돌파한 데 이어 2일 서부전선의 국군 제1사단이 삼팔선을 돌파했다. 그리고 10월 5일 6사단이 가장 늦게 삼팔선을 돌파하며 압록강을 향한 장도(壯途)를 시작했다. 그러나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함으로써 통일이 눈앞에 와 있던 순간,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7연대는 연대 병력 3분의 2를 잃고 개천으로 철수한 뒤, 1951년 초에는 이천까지 철수한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예고된 상태에서 7연대는 6사단의 예비대가 되어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 주둔하며 적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창리 후퇴와 표창장
1951년 4월, 전 전선에 걸쳐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예고되어 있었다. 장도영(張都映·1923~2012년)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은 1951년 4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장도영 사단장이 몸소 사창리 전선사령부에 머물며 부대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가평읍 사단사령부에서는 7연대장이었던 임부택 대령이 부사단장으로서 전선 상황을 조율하고 있었다.
당시 2연대는 북쪽 정면 56번 도로 명월고개 너머 다목리 삼거리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수피령과 파포천 하류 방면에 대한 경계 강화에 들어갔다. 19연대는 사창리 분지 서쪽 463번 도로 축선상의 광덕계곡에서 김화 방면 잠곡리 삼거리를 중심으로 2개 대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광덕계곡 삼거리에는 예비대를 배치했다. 7연대는 사단 예비대가 되어 사창리에 주둔했다.
체육대회
4월 22일, 6사단은 전장의 긴장감으로 인한 피로를 잠시 잊고 장병들의 사기 진작 겸 망중한의 조촐한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연대별로 할당 선발된 장병들을 공터로 집합하게 하여 씨름과 기마전, 완전군장 단축마라톤 대회가 차례대로 진행됐다. 소년은 7연대를 대표하는 단축마라톤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됐다.
기마전은 옛 시골 동네에서의 투석전을 연상케 할 만큼 거칠었다. 병사들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모래며 자잘한 돌멩이들을 절반쯤 채워 감추고 있다가 기수 노릇을 하는 간부들을 집중 공격했다. 적당히 힘겨루기 하며 대치할 때쯤 계급을 내세운 상대 기수가 주먹을 휘두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양말 모래주머니를 휘둘러 그를 태우고 있는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말들이 쓰러지니 기수 노릇을 하던 간부들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비록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 멍들었지만, 기마전에 참여한 장병들이나 구경하는 장병들이나 폭소를 터뜨리며 모처럼 가져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완전군장에 소총을 멘 채 달리는 단축마라톤. 만 17세 소년은 좁은 분지를 에두른 시골길을 몇 바퀴 달리는 동안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사단장 표창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표창장은 소년에게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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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6·25 당시 사용했던 나팔. 국군과 유엔군에게 중공군의 나팔 소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
장도영 사단장은 미군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있을 것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다목리 방면에 2연대를, 김화 방면 잠곡리 일대에 19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창리에 7연대를 예비대로 배치하여 다목리와 잠곡리의 1차 방어진지를 돌파한 적을 사창리에서 막아냄으로써 중공군의 춘천-가평 진출 저지를 목표로 했다. 그런 중에 막간을 이용해서 가진 체육대회와 조촐한 회식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장병들은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깨는 요란한 따발총 소리와 혼을 빼는 나팔 소리에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 역할을 해야 할 장교들까지 군장에 개인 화기까지 팽개치고 사창리 분지의 남쪽 골짜기를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전초부대고 예비부대고 할 것 없이 뒤섞여 일단 남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남쪽은 화악산-석룡산-명지산으로 이어지는 고산준령이 가로막고 있었다.
패주
사단장은 다급하게 부대별 현 위치 사수(死守)를 명령했다. 그러나 회식과 휴식 중에 기습을 당한 장병들은 각종 화포며 차량, 개인 장비들을 내팽개친 채 퇴로를 찾아 내달렸다. 장병들은 그 순간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가 동림산과 온정리 계곡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수많은 전우를 잃어야 했던 악몽에 사로잡혔다.(당시 초산까지 진격했던 7연대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개천으로 탈출 재집결했을 때 3553명의 병력 가운데 75%를 잃어 개천으로 재집결한 생존 인원은 불과 875명으로서 연대는 전투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각종 야포와 개인 화기, 군장을 비롯한 장구류까지 팽개친 채 무질서하게 남쪽 후방 가평 방면으로 내달리는 장면을 전사(戰史)와 사전류에서는 ‘철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질서와 전혀 무관한 엄연한 ‘퇴각’이고 ‘패주(敗走)’였다.
그렇게 4월 22일, 중공군 제9병단 소속 3개 사단의 기습으로 시작된 사창리 전투는 19연대는 고립, 2연대와 7연대는 차량과 야포 등의 장비를 포기하고 일부는 좌우 인접 부대로, 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흩어져 철수해야 했던 국군 제6사단의 치욕의 패배였다.
6사단 주력이 화악산과 명지산 사이 도마치고개를 넘어 적목 조무락 골짜기를 따라 퇴각하고, 또 한 무리는 화악산 계곡을 거슬러 올라 매봉 옆 능선을 타고 넘어 목동 분지로 내려왔을 때 그 양쪽 퇴각로 뒤에서는 중공군도 맹렬하게 뒤쫓고 있었다.
최루가스
6사단은 4월 24일 지금의 가평 북면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미군 헌병들이 퇴각로에 최루가스를 뿌리고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하며 막아섰지만, 전의(戰意)를 상실한 병사들의 탈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달리던 병사들이 얼굴을 감싸 쥐고 쓰러지자, 병사들은 미군이 살인 독가스라도 뿌린 줄 알고 그 와중에도 분지 양쪽으로 흩어져 달렸다.
소년은 ‘낮은 포복을 하면 아무리 독가스라도 괜찮겠지’ 생각하며 땅바닥을 기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따가워지며 눈물, 콧물이 얼굴을 덮기 시작했다. 연거푸 기침, 재채기가 나고, 드러난 맨살이 따가워지며, 땀구멍이 열린 듯 온몸에서 땀이 나고 열병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소년은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죽더라도 더 달아나 죽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미군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멈추어선 6사단 병사들이 하나같이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쭈그려 앉아 연신 눈물을 닦고 코를 풀며 컥컥대고 있는데, 그 꼴을 보고 선 미군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뭐라 쏼라쏼라하며 손가락질을 해대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비웃고 놀리는 게 확실했다. 더러는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4월 25일 가평읍 부근까지 내려온 6사단은 지촌천을 따라 밀고 올라오는 중공군을 뚫고 화천천 하류로 퇴각한 제16포병대원들이 춘천을 거쳐 가평 본대로 합류하면서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 패전으로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득이 사단은 다시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하에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에서 부대를 재편하였다. 이때까지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인치 로켓포 66문, 3.5인치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 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 포병부대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낙오한 병력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하게 되었다.〉
당시 수준으로 6사단이 입은 무기와 장비 손실만 해도 사단이 해체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기습과 함께 개인 화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후퇴한 덕분에 6사단은 역설적이게도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4월 22일 저녁 무렵 시작된 사창리 전투는 영연방 제27여단과 미 제2사단, 제40사단, 제213야전포병대의 분전에 힘입어 4월 25일 중공군 주력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거나 포로가 된 가운데 퇴각하면서 종료됐다.
소총과 군장을 챙길 틈도 없이 남쪽 계곡과 고갯길을 내달려온 소년은 4월 23일 날이 밝아서야 미군으로부터 개인 화기와 장비들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계급 없는 군복을 입은 지 1년여 만에 전장에서 맛본 체육대회의 즐거웠던 시간과 꿈결처럼 사라진 사단장 표창장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장도영 사단장 명의(名義)로 된 표창장은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 없는 소년이 난생처음 받아보는 상이었다.
용문산에서 파로호까지
5월 20일 새벽, 7연대에도 반격 출동 명령이 하달됐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함께 주먹밥과 시래깃국, 미군 측에서 제공한 C-레이션 등으로 간단 신속하게 식사를 마쳤다. 중대 막사 앞에 소대별로 도열한 12중대원들은 군장 검사와 무장 상태를 점검받고, 용문산 북쪽 427고지를 향해 출발했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소년은 걸으면서 새벽 식사 시간에 따로 몇 개 챙긴 주먹밥을 선임들 눈치를 봐가며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그런데 목표로 한 고지 하단부에 다다랐을 때쯤 소년의 배가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소대장에게 보고하고 어느 바위 뒤로 가서 허겁지겁 바지를 내렸다. 쭈그려 앉기가 무섭게 설사가 났다. 행군 중에 먹은 주먹밥뿐 아니라 출발하면서 한입에 털어 넣다시피 한 시래기 줄기가 생으로 쏟아졌다. 소년은 여전히 속이 편치 않았지만, 서둘러 옷을 추스르며 소대원들을 따라잡았다.
복통
다행히 소대원들은 얼마 가지 않은 곳에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임하사를 비롯한 고참들의 장난 섞인 핀잔을 들으며 소년도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427고지를 연대 최후의 보루로 삼아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내며 분전하고 있는 2연대가 중공군과 뒤섞여 혈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 7연대는 427고지를 좌회, 중공군 후방을 급습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소년의 소대도 이른 새벽 고지를 향해 신속 기동을 시작했다.
소년은 부글거리는 변의를 참아가며 걷고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427고지로 향하는 어느 야산을 오를 무렵이었다. 소년은 하늘이 노래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본격적으로 복통이 시작된 것이다. 소년은 산기슭에 주저앉아 복통을 호소했다. 선임병들이 꾀병 부리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소년은 고참병들의 호통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복통은 멈출 줄 몰랐다. 온정리 산골짜기에 갇혀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소년이 이번에는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소대장이 소년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창백해진 소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소대장은 소대원들 눈을 피해 가며 게걸스럽게 주먹밥을 먹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대장은 손수건을 꺼내 소년의 얼굴에 얼룩진 땀과 눈물을 닦아내며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이 녀석을 야전병원으로 후송해라.”
병사 둘이 축 늘어진 소년을 부축해서 산을 내려갔다.
소대장
소년은 기진맥진한 채 연대 주둔지 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 군의관은 식중독으로 진단했다. 소년이 의식을 잃고 야전침대에 누웠다가 눈을 떴을 때는 5월의 햇살이 한가득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들것을 든 병사들이 야전병원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말이 야전병원이지 땡볕 아래 군용 야전침대 몇 개 놓여 있는 게 다였다.
소년은 위생병들에게 떠밀려 야전 병상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행히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한숨 푹 자고 났더니 복통도 가시고 몸도 개운해져 있었다. 소년은 위생병들을 도와 사상자들을 야전 병상으로 옮기면서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들것에 실려온 사상자들이 모두 소대원들이었다. 그중에는 자신을 후송 보낸 소대장도 있었다. 소대장은 얼굴과 전투복이 피범벅이 된 채 들것에 실려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대장을 부르며 다가섰다.
“소, 소대장님!”
소대장은 피로 얼룩진 얼굴에 두 눈을 껌벅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대장의 손이 소년의 손을 쥐는 게 느껴졌다. 힘이 없었다. 소년은 그 뒤로 소대장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소년이 야전 병상에 누워 꿈속을 헤맬 무렵이었다. 소대원들이 목표로 한 427고지를 좌회하여 고지 후방의 중공군 주력을 기습하기 위해 어느 능선을 지날 무렵이었다. 5월 하순으로 접어든 계절의 덜 익은 녹음을 엄폐물 삼아 고지 후방으로 기동하던 소대원들은 한 무리의 중공군과 조우했다. 중공군의 따발총이 먼저 불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소대원들은 산개하여 바위며 나무 그루터기를 엄폐물 삼아 대응 사격을 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치열한 총격전이 전개되는 동안 인접한 다른 능선을 따라 기동하던 중대원들이 달려왔다. 증원된 적군의 기세에 눌린 중공군들은 사상자들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하지만 소년의 소대가 입은 인명 피해는 막심했다.
용문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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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6사단장은 용문산 전투 후 전장을 방문한 오마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밴 플리트 8군사령관 등 미군 최고 지휘부 앞에서 브리핑을 했다. |
427고지 좌우 능선으로 우회한 7연대와 19연대가 5월 20일 새벽 중공군 후방에서 들이닥쳤다. 후방을 기습당한 427고지의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맹렬하게 고지를 달려 올라가던 기세가 꺾이며 중공군들이 고지 하단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좌우에서 치고 들어온 7연대와 19연대 병사들의 화기들이 불을 뿜었다. 대대 예하 중대마다 몇 명씩 인원을 차출 충원함으로써 편제가 갖추어진 소년의 소대원들도 적진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6사단은 자신들이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무질서 속에 퇴각했던 것처럼 혼란에 빠져 쫓겨 가는 중공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제63군)은 7연대와 19연대가 들이닥치기 시작한 그날 새벽, 청평댐을 건너 조종천에 이르러 군단 주력이 현리, 포천 방면으로, 후속 퇴각해 온 부대는 경춘국도를 따라 가평읍 방면으로 퇴각해 갔다.
불타는 중공군 시신들
7연대는 퇴각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며 5월 23일 새벽 홍천강을 도강하여 박암리의 주요 고지들을 점령했다. 패주하는 중공군을 향해 미군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치며 기총소사와 네이팜탄 공격을 퍼부었다. 네이팜탄이 폭발하며 번진 거센 불길에 살아 달아나던 중공군도 죽어 있는 중공군도 활활 타오르며 형체도 없이 스러져 갔다. 중공군이 패주해 간 길에는 폭격으로 숨진 수많은 적군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5월 하순의 땡볕 아래 빠르게 부패하며 부풀어 오른 배가 터져 내장이 옷섶을 비집고 나온 시체가 곳곳에 나뒹굴었다. 살찐 쉬파리 떼가 시체와 생사람을 가리지 않고 까맣게 달라붙었다. 공병부대원들과 동원된 노무자들이 시체들을 들것에 실어 공터로 옮겼다. 공터마다 쌓인 시체 더미에 기름이 부어지고 불이 붙여졌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함께 박암리, 가정리를 지나 봉화산 서쪽 골짜기를 돌아 강촌에 다다랐다. 패주하던 잔적들이 산발적으로 저항하다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공포와 굶주림에 지친 중공군들이 무리로 투항하며 포로를 자청하기도 했다.
5월 25일 아침, 강촌에서 북한강을 건너 삼악산 서쪽 기슭을 돌아 계관산(736m) 동측방의 잔적을 제압하고 북배산(867m) 동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방동리에 집결, 차량 기동으로 다시 북한강을 건너 춘천 동북쪽의 청평리까지 진출했다.
파로호 전투와 매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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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1월 18일 파로호에는 전승기념비가 세워졌다. |
용문산 전투 종결을 눈앞에 둔 국군 6사단에 임무 전환이 하달됐다. 지평리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온 중공군 패잔병들과, 춘천과 평창 방면에서 후퇴해 온 중공군 3개 군단이 파로호 남쪽 간동면 오음리와 용호리 일대에 집결한다는 첩보에 따라 신속히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이었다. 오음리 분지에 집결한 중공군은 평균 폭 1km가 넘는 저수지를 건널 방법이 없었다. 매봉산 강기슭을 타고 구만리발전소 방향으로 나아가 댐 아래쪽 갈수기의 북한강 여울을 건너는 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소년은 소대원들과 용화산과 수불무산을 넘어 용호리-오음리 분지를 향해 돌격해 갔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중공군들이 몰려드는 국군과 미군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고 저수지 가로 몰려들어 일대는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분지를 에워싼 산들로 탈출 방향을 잡은 중공군들이 총격과 기총소사에 쓰러졌고, 폭격에 쫓긴 중공군들은 다시 저수지 방향으로 내달려 호수로 뛰어들었다. 중공군은 아비규환 속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들도 국군이 보이는 대로 그 앞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모하게 파로호(破虜湖)로 뛰어든 중공군들은 허우적거리다 익사했다. 살아남은 중공군은 포로가 됐다.
5월 29일, 중공군 포로들이 트럭에 실리거나 도보로 남쪽으로 떠났다. 이로써 5월 18일 가평 설악면 용문산 일원에서 중공군의 5월 공세로 시작된 용문산-화천호 전투가 종료됐다.
그러나 포로들이 떠난 뒤 또 다른 전투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 숫자보다 많은, 산더미를 이룬 중공군 시신 처리였다. 7연대 병력 대부분이 시신 처리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통나무를 이어 붙여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에 시신을 싣고 나룻배로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 수장시켰다. 시신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시신마다 묵직한 돌덩이를 달았다.
그러는 동안 5월이 가고 6월이 시작됐다. 시신 처리와 전장 정리도 거의 끝나가고 병사들은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호숫가로 나왔다. 한데 신기하게도 잉어며 붕어, 쏘가리, 피라미들이 물가로 나와 주둥이를 물 밖에 내놓고 뻐끔거리고 있었다. 익사하거나 수장된 중공군 시신이 부패하며 부영양화(富營養化) 현상을 유발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저수지는 산소가 부족해지며 물고기들이 대량 폐사(斃死)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물가며 계곡 쪽으로 피신한 물고기들조차도 물 밖으로 주둥이를 내밀어 뻐끔거렸다.
소대원 몇몇이 물가로 나와 맥을 못 추는 물고기를 잡아 솥을 걸고 매운탕을 끓였다. 여기저기 되는 대로 모닥불을 피워 물고기를 굽는 병사들도 있었다. 소년은 한 고참이 반합에 떠주는 매운탕을 받아 들었다. 소년은 국물 한술을 뜨려다 말고 반합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수장된 중공군 시체들, 가라앉다 말고 떠올라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즐비한 저수지의 물고기들이었다.
소년은 헛구역질을 거듭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고참들이 장난 삼아 억지로 소년의 입을 벌리고 물고기 살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살점은 소년의 목을 넘어가지 못했고, 위장에서 올라온 토사물과 함께 땅바닥에 뿌려졌다. 소년은 다시금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입맛을 잃었고, 헛구역질이 자꾸 났다. 신경성 위염과 과민성 장염이 그 뒤로 오래도록 소년을 괴롭혔다.
드디어 군인이 되다
1년 동안 북한강에서 낙동강으로, 낙동강에서 압록강으로, 압록강에서 다시 한강으로 오르내리는 동안 국군 제6사단은 전쟁의 변곡점이 된 전투의 주역이었다. 춘천-홍천 전투와 음성 전투, 문경 전투가 그랬고 낙동강 전선의 효령-신령 전투가 그러했다. 그리고 용문산-화천호 전투가 그랬다. 초산 진격 후 온정리-동림산 전투와 사창리 전투 패전으로 부대가 해체될 상황에 빠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일구어낸 용문산-화천호 대승이었다. 사단사령부가 화천읍으로 이동 주둔한 가운데 7연대는 그로부터 5km 북방 북한강 상류 풍산리에 주둔하며 부대 정비와 함께 병사들에게 잠시의 휴식이 주어졌다.
1951년 6월 6일, 중대 주둔지 막사 앞에 모처럼 이발과 면도를 하고 누추한 군복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대원들이 도열했다. 앞선 전투에서의 승리로 일계급 특진을 명 받았던 장병들에게 뒤늦게나마 진급 계급장이 수여됐다.
1950년 4월, 우연히 군복을 입고 병영 생활을 시작한 소년에게도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소년은 호명과 함께 중대장 앞으로 나아가 섰다. 중대장이 직접 소년의 가슴에 일등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러고 소년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 녀석, 고생했다. 장하다!”
첫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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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운하(길운효 등 다른 이름도 사용) 선생의 병적기록부. 위쪽은 1955년 1월 제대 후인 1956년 제대병 소집훈련(예비군법 입법 전) 후 작성된 것, 아래는 이후 전산화되면서 재작성된 기록부. 사진=길도형 |
성명: 길운효(河, 學, 鶴 혼용)
입대일: 1951. 06. 06.
군번: 0742471
계급: 일병
1년여를 사선에서 혈전을 벌이며 살아남은 소년은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군인이 되었다. 군번과 계급장이 주어지고, 이름과 군번이 적힌 인식표를 군복 입고 처음으로 목에 걸었다. 춘천에서 첫 전투를 치른 후 낙동강 전선에서, 삼팔선을 돌파하여 초산 압록강에서, 사창리와 용문산-화천호에 이르기까지 소년은 인식표조차 없이 전투를 치른 무명(無名)의 소년 용사였다.
그리고 곧바로 2박 3일의 특별 휴가가 주어졌다. 소년은 군장과 개인 화기를 챙겨 군용트럭에 올랐다. 아침 일찍 양평 어디쯤에서 출발한 트럭은 초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인천 부평역 앞에 도착, 사흘 뒤 00시까지 부평역 앞으로 와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소년을 내려주고는 떠나갔다. 소년은 경인선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출한 지 네다섯 해 만에 다시 밟는 부평 땅이었다. 시커먼 연기와 허연 증기를 내뿜으며 거칠게 씩씩거리던 증기기관차를 따라 달리며 집으로 돌아오고는 하던 그 길이었다. 굳게 쓴 철모에 군장을 지고 소총을 멘 소년이 그 길을 걸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철마를 따라 달리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총탄과 포연 속을 달리고 적군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단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부평역에서 동암 방면으로 10여 분 걸으면 나타나는 곡선 구간을 돌아 소년은 철길을 벗어나 동산 쪽으로 난 마을 길로 들어섰다. 무너지고 쓰러진 집들 대신 공터마다 판자며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고 거적을 씌운 임시 거처들에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저녁 땟거리를 준비하던 한 아낙과 아낙의 치마폭을 잡고 선 코흘리개가 소년의 귀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소년은 동산 아래 초가지붕 끝자락이 선명해지자 “어머니!” 하고 소리쳐 불렀다. 소년의 군홧발 소리가 미처 집에 닿기도 전이었다. 다섯 칸 초가의 무너진 울타리 한가운데 쓰러질 듯 버티고 선 사립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둘째냐? 운학이 살아 있었느냐?”
메마른 6월 초저녁, 흙먼지 날리는 마을 길을 맨발로 달려 여인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의 초췌하고 핏기 없는 얼굴, 야윈 몸에 걸친 남루한 치마며 저고리가 지금이 전쟁 중임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다시 전선으로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마친 소년이 휴가 나올 때의 복장과 장비 그대로 아침 일찍 십정동 집 사립문을 나섰다. 소년은 경인선 철길 옆으로 올라서면서 그렁해진 눈물을 닦고 뒤돌아섰다. 배웅하는 양친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래전 집을 나설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에 사로잡힌 소년이 양친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깨에 걸친 소총이 걸리적거리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나지 못하는 소년을 부친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소총을 들어 소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염부(鹽夫)의 거친 두 손바닥이 소년의 볼을 감쌌다.
“잘 다녀오너라.”
다시 부평역에서
소년이 부평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철길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서 소년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년은 곡선 구간을 지나 멀리 부평역사가 보일 때쯤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주저앉아 흐느끼는 듯한 어머니가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소년은 걱정하지 마시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더 걷자 철길 우측 언덕 위로 성당이 보였다. 성당 첨탑의 십자가가 소년이 처음 가출하던 때의 모습 그대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평에 양자로 보내지기 전, 동네 꼬마들과 몰려가면 늙은 신부가 사탕이며 과자를 나누어 주고는 했던 곳이다.
소년이 부평역에 도착하자 이미 트럭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 옆 선탑자 선임하사가 소년을 보고 씩 웃어 보였다. 소년은 반듯한 자세로 경례하며 휴가 복귀를 신고했다.
1951년 6월 9일 오전 7시, 소년을 태운 트럭이 부평역광장을 출발했다. 영등포를 지나 한강에 임시로 설치된 부교(浮橋)를 건너 종로통을 가로질러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광진에서 한강 북단을 끼고 구리 방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어 한강 북단을 따라 난 비포장도로를 달린 트럭은 양수리 북한강을 건넌 후에는 남한강변을 따라 달렸다. 6번 도로를 달려 양평읍을 지날 때쯤 용문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섰다. 탈이 난 배를 부여잡고 중공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청운면 삼거리에서 홍천 방면 44번 도로로 들어선 트럭은 굽은 비포장도로를 더욱 속도를 내며 달렸다. 초여름 뜨겁게 달아오른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며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병사들을 덮쳤다. 이윽고 홍천에서 5번 도로로 갈아탄 트럭은 춘천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럼 초산까지 갔다 왔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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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길운하 선생(원 안). 1950년 6·25 개전 당일부터 휴전 직전까지 전선을 누비고 1955년 이등중사로 제대했다. 사진=길도형 |
병사들은 인솔 주임상사의 구령에 따라 연대장에게 경례하고 휴가 복귀를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연대장은 병사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하며 복귀를 환영했다. 소년과 악수하던 연대장은 물끄러미 소년을 보더니 물었다.
“길운효? 몇 살이냐?”
소년은 얼어붙은 듯 입을 열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열여덟 살입니다.”
“언제부터 싸우기 시작했느냐?”
“작년 6월 25일부터입니다.”
“그래? 그럼 초산까지 갔다 왔겠구나?”
“예, 그렇습니다.”
“학교 다니다 왔느냐?”
“아닙니다. 학교 다닌 적 없습니다.”
연대장이 주임상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여기 와 있는 건가?”
그러자 12중대장이 다가와 연대장 귀에 속삭였다. 연대장은 설명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고생 많았구나. 부모님은 잘 계시더냐?”
“예, 그렇습니다.”
연대장은 다시 한 번 소년의 두 손을 모아 쥐고는 격려와 함께 건투를 빌었다.
“무운을 빈다. 다시 보자꾸나.”
연대본부 막사에서 나오자 소대 선임하사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이 경례와 함께 휴가 복귀를 신고했다. 선임하사와 함께 소대 막사로 들어가 소대장에게 복귀 신고를 했다.
‘길운효 이등중사’
1951년 10월 13일, 6사단은 화천 백암산으로 진격하여 중공군 2개 사단을 격파한 데 이어 금성천 건너 교암산을 7연대가 점령했다. 이로써 소년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년 9개월여에 걸쳐 금성 대전투의 현장을 누볐다. 마지막 전투는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7연대가 국군 제8사단(사단장 장도영 소장)에 배속되어 중공군 60군 주력과 벌인 ‘백암산 전투’였다.
7월 27일 전쟁이 끝났다. 소년은 그로부터도 오랫동안 군문(軍門)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길운효 이등중사’에게도 제대 특명이 떨어졌다. 1월 28일, 21세 청년 제대병 길운효 중사는 화천군 상서면 주파리 백암산 기슭의 병영을 떠나 인천 십정동 집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