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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파이팅’, DMZ 봉쇄 그리고 김주애… 지금 북한엔 무슨 일이?

“김정은의 두 국가론, 북한 주민들 지지 못 받고 있어”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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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의 ‘두 국가론’은 노골적인 무력통일 전략으로 돌아가겠다는 뜻”(김천식 통일연구원장)
⊙ “조선학교에 반쪽 지도 걸라고 하자 조총련 원로들도 ‘이것만은 못 받아들이겠다’ 해”(태영호 민주평통 사무처장)
⊙ “서독이 동독의 ‘두 국가론’에 제대로 대처하고 유일대표성 고수한 결과 독일 통일 앞당겨졌다”(염돈재 전 국정원 제1차장)
⊙ “김주애는 후계자 내정 단계… 김정은은 8세 때 내정”(정성장 세종연구소 한반도전략센터장)
⊙ “핵무장 주장하는 사람들 의도 의심스러워… 핵무장해서 주한미군 철수하면 한미동맹 파괴”(김천식)
지난 5월 14일 열린 전위거리 준공식에 참석한 김주애(왼쪽)와 김정은. 사진=로동신문
  #1 첫 번째. 2024 파리올림픽 여자 복싱에서 동메달을 딴 임애지(25·화순군청)와 북한 여자 복싱 선수 방철미(29)가 선수촌 내 웨이트장에서 마주쳤다. 방철미는 임애지에게 말했다. ‘파이팅 해라.’
 
  #2 두 번째. 우리 군은 북한군이 수개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휴전선 인근 전선 지역에 지뢰를 매설하고 불모지를 조성하고 방벽을 설치해온 사진을 7월 17일 공개했다. 합동참모본부가 공개한 사진에는 북한군이 등에 목함지뢰로 추정되는 물체를 지고 비무장지대(DMZ) 북측 지역에서 지뢰 매설 작업을 하는 모습, 지뢰 폭발 사고와 부상자 후송, 폭염 속 앰뷸런스를 동원해 온열 질환자를 트럭 등에 싣고 가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3 세 번째, 북한 신문과 방송에 김주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일정에 함께하는 식이다. 지난 8월 5일 조선중앙TV는 신형 전술탄도미사일무기체계 인계인수 기념식을 보도했는데, 여기에 김여정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열한 살 조카인 김주애에게 깍듯이 의전을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코로나19 기간 굳게 닫혀 있던 빗장을 조금씩 열고 있는 북한, 그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김정은 ‘두 국가론’ 발표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를 매설 중인 북한군. 지난 7월 17일 합동참모본부가 공개한 사진이다.
  ‘남북한은 더 이상 동족이 아니다.’ 김정은은 지난해 말 남한과 ‘절교’를 선언했다. 내내 한민족이라 주장했다가 ‘이제는 완전 남’이라 못을 박았다.
 
  2023년 12월 말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8기 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 현재 조선반도에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가 병존하고 있는 데 대하여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남조선 것들과의 관계를 보다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다.”
 
  2024년 1월 15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지난 80년간의 남북 관계사에 종지부를 찍고 한반도에 병존하는 두 개 국가를 인정한 기초 위에서 북한의 대남 정책을 새롭게 법화하였다.”
 

  원래 전에도 북한은 한국을 두고 주적(主敵)이라 했다가 아니랬다가 그때그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좀 다르다.
 
  김정은은 1월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명기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을 헌법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직접 지적했다.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인 경의선의 북측 구간을 ‘회복불가한 수준으로’ 물리적으로 완전히 끊어놓고, 수도 평양의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의 철거를 지시했다.
 
 
  “6·25 일으켰던 그 자세로 돌아간 것”
 
김천식 통일연구원장.
  갑자기 ‘두 국가론’을 들고 나온 이유는 뭘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첫째, ‘남한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서다. 통일부 차관을 지낸 김천식(金千植·67) 통일연구원장은 두 국가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확히 봐야 하는 게, 북한은 1948년부터 늘 남북 관계는 적대 관계고 남한은 북한의 주적이라 규정했습니다. 남한을 공산화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가 실패했지요. 그 실패를 거울삼아 내세운 게 고려연방제입니다. 남조선 혁명과 미군 철수가 선결 요건이죠. 그게 가능하려면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좋은 체제라는 걸 남한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잖아요. 북한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이제 인정한 거죠. 전통적인 방법으로 돌아가겠다는 겁니다. 작년 말부터 북한에서 나온 얘기를 종합해보면, ‘고려연방제 안 하겠다, 남북한은 교전 중인 관계이기 때문에 핵무기로 남한을 파괴해도 합법적’이라 주장하는 겁니다.”
 
  ― 김정은은 2월 8일 연설에서는 ‘한국 괴뢰 족속들을 우리의 전정에 가장 위해로운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유사시 그것들의 영토를 점령, 평정하는 것을 국시로 결정’한다고 말했지요.
 
  “노골적인 무력통일 전략입니다. 6·25 전쟁을 일으켰던 그 자세로 돌아간 겁니다. 지금은 남한에 비해 그나마 우위에 있는 게 군사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다만 6·25 때와 달리 지금은 주한미군이 있습니다.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완벽하게 남한에 대해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한미군 철수만을 바랄 겁니다.”
 
 
  “북한의 전략, 꾸준한 일관성 있어”
 
  ― 그래서 북한이 문재인 정권 시기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노렸던 거군요.
 
  “북한의 전략에는 꾸준한 일관성이 있는데 우리는 자꾸 그걸 망각합니다.”
 
  올해 들어 미국의 일부 학자들이 ‘동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해커 교수는 지난 1월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썼다.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하다. 지난해 초부터 북한 관영매체에 등장하는 ‘전쟁 준비’ 메시지는 북한이 통상적으로 하는 ‘허세’가 아니다.”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도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기고한 글에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최소한 염두에는 둬야 한다”고 썼다. 이에 대한 김 원장의 생각을 물었다. 그의 답이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일부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핵전쟁 위협을 강조하면서 북한이 원하는 핵 동결에 동의하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공격을 막도록 대화를 한다든가, 제재를 풀어주라든가 하는 얘기들을 하려 드는 게 아닌가 의심됩니다. 전쟁 위기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데는 노림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北 정권, 남한 문화와 싸워온 지 오래됐다”
 
태영호 민주평통 사무처장. 사진=조선DB
  21대 국회의원을 지낸 태영호(太永浩·62)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북한이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졌다는 것을, 특히 ‘한류’를 통해 절감할 거라 말했다. 태 처장은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를 지내다 2016년 한국에 들어왔다. 2019년 10월 북한 《로동신문》에는 〈보이지 않는 대결 소리 없는 전쟁〉이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일부 대목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은폐된 공격 수단으로 다른 나라들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정권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그 수단은 사상문화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대결이며 소리 없는 전쟁이다.… 제국주의자들이 퍼뜨리는 반동적인 사상문화가 세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저속하고 불건전한 사상과 문화, 생활방식이 악성비루스(바이러스)처럼 이 나라, 저 나라 국경을 넘어 전파되고 있다.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 대한 교양사업에 더 큰 힘을 넣어야 한다. 제국주의자들이 노리는 기본 대상은 다름 아닌 청소년들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서방의 사상문화로 청소년들을 부패 타락시켜 그들이 자기의 것을 멀리하고 나라를 반대하여 나서게 하려고 꾀하고 있다.〉
 
  사설에서 북한 정권의 다급함이 느껴진다. 태영호 처장은 “실은 북한 정권이 북한 사회에 흘러들어오는 남한 문화와 싸워온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2000년대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북한이 학교에서 컴퓨터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컴퓨터 수재를 양성한다면서 컴퓨터 전문학교, 한국으로 말하면 특목고 같은 학교를 전국 곳곳 시군구 단위에 세웠어요. 컴퓨터 교육을 대대적으로 했지요. 그런데 북한이 이후 상황을 예측을 못 한 겁니다. 애들이 컴퓨터를 배우니까 집집마다 컴퓨터를 사려고 하는 거예요.”
 
 
  “김정일, 자신의 영화창고를 선전선동부에 개방”
 
컴퓨터로 학습 중인 북한 어린이의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 컴퓨터가 비싼데 쉽게 살 수 있나요.
 
  “그 틈을 파고든 게 바로 중국입니다. 중국이 저렴한 컴퓨터를 만들고, 북한 회사들이 들여다 판 겁니다. 컴퓨터 부품을 파는 외화 상점들이 생기고, 시장에서도 컴퓨터가 팔리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진 집에 돈이 좀 생기면 첫째, 컬러TV, 둘째 냉장고를 사는 식이었어요. 이제는 첫째, 휴대전화, 둘째 컴퓨터라는 식으로 소비 패턴이 바뀌었어요. 그런데 컴퓨터가 보급됐으니 이용할 콘텐츠가 있어야 하잖아요.”
 
  ― 그렇죠. 인터넷을 자유롭게 못 쓰는데 컴퓨터가 있어봤자죠.
 
  “북한의 밀수꾼들이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과 함께 지하에서 불법 복제를 합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불법 복제해서 담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를 대량으로 생산합니다. 밀수꾼들은 목숨을 걸고 배낭 메고 압록강을 넘나듭니다. 부가가치가 가장 큰 게 한국 영화·드라마가 담긴 USB인데 작고 가볍잖아요. 컴퓨터가 보급되니 USB로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이전에는 USB가 있어도 컴퓨터가 없어서 쉽게 못 봤거든요.”
 
  ― 그렇게 한류(韓流)가 퍼지기 시작했군요.
 
  “이렇다 보니 김정일에게 보고가 들어갔어요. 처음엔 무조건 막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을 수 없잖아요. 그러자 김정일은 ‘최소한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못 보게 해야 한다’며 자신의 영화 창고를 열고는 선전선동부를 통해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재미있는 영화들을 골라 번역해 DVD로 제작하게 합니다. 외국 영화로 한국 영화를 밀어내려 한 거죠.”
 
  ― 그걸 주민들에게 판 건가요?
 
  “선전선동부 산하의 목란비데오라는 회사가 DVD를 제작해요. 목란비데오는 평양시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목란비데오 판매점을 두고 있는데 그곳을 통해 팔려 나가는 거죠. 주민들이 그전에는 한국 영화만 보다가 러시아, 중국, 인도, 이집트, 영국 영화까지 접하게 됐는데 〈슈팅 라이크 베컴(Bend It Like Beckham)〉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어요. 김정일은 미국 영화라도 재밌으면 보여주라고 했어요. 그래서 만화 〈톰과 제리〉, 북한 제목으로는 〈우둔한 고양이와 꾀 많은 생쥐〉가 북한 텔레비전에서 방영됩니다. 미국 만화가 북한 TV에서 방영된다는 게 이해가 됩니까?”
 
  ― 김정일식 실용주의네요.
 
  “북한이 당장 한국 영화에 맞설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없으니 외국 영화를 이용해 밀어내려 한 겁니다. 그래서 한때는 북한 아이들이 아버지한테 얼음과자(아이스크림) 사 먹는다며 돈을 타서 목란비데오 판매점에서 영화를 사다 봤어요.”
 
 
  “만화영화라도 재미나게 만들어서…”
 
북한에서 한때 인기를 끌었던 북한 제작 만화영화 〈소년장수〉.
  ― 한류가 꺾였나요?
 
  “한동안은 그랬습니다. 그러다 다시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저도 북한에서 〈불멸의 이순신〉 〈대장금〉을 봤어요. 밀수로 들어온 거죠. 이게 외국 영화보다 더 재밌잖아요. 그렇게 목란비데오 DVD의 인기가 꺾입니다. 이후 김정은 시대가 되고, 김정은은 만화영화에 주목합니다.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로 현지 지도를 가서 지시합니다. ‘만화영화라도 재미나게 만들어서 북한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한국 영화 보지 않게 해라.’”
 
  ― 지시가 먹혔나요?
 
  “〈소년장수〉 같은 만화영화가 한때 인기를 끌었지요. 사람들이 방송 시각을 기다렸다 볼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한국 드라마가 또 유행합니다. 상황이 이러자 선전선동부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한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북한이 한국 영화·드라마보다 더 잘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못 보게 막는다고 될 게 아니다.’ 이에 김정은이 2018년쯤 특별 조치를 내립니다. 북한의 작가와 배우들을 한군데에 몽땅 모아놓고 보름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집중적으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여준 거예요.”
 
  ― 보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보여주나요.
 
  “그러고선 매일 소감을 쓰게 했대요. 그러면서 김정은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북한 사람들이 왜 한국 드라마에 미쳐 있느냐, 한국 드라마에는 한국 사회의 안 좋은 모습까지 나온다. 이게 인간 생활이다. 북한의 영화·드라마도 만날 수령에 대한 칭송, 위대성 선전 이런 것만 하지 마라. 북한에도 나쁜 사람들, 부패한 간부들, 뇌물이 있지 않냐. 이걸 체제에 위협이 안 되게 잘 녹여내라.’”
 
  김정은은 2019년 3월 선전일꾼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이렇게 썼다. “수령은 인민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만일 위대성을 부각시킨다고 하면서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 된다. 수령에게 인간적으로, 동지적으로 매혹될 때 절대적인 충실성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 그래서 북한 사회의 폐단이 담긴 영화를 제작했나요?
 
  “내부적으로 몇 편 만들긴 했어요. 뇌물 주고, 아이들 학교 부정하게 합격시키고 하다 들켜서 마지막에 당 비서나 검찰이 바로잡는 엔딩인데, 공개는 못 했어요. 막상 공개하자니 망설여지는 거죠.”
 
 
  “방철미 선수 처벌받을 수도”
 
한국 임애지와 북한 방철미가 2024 파리올림픽 여자 복싱 54kg급 시상대에 서 있다. 사진=조선DB
  ― 결국 김정은과 선전선동부는 한국 드라마를 이길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됐겠군요.
 
  “북한 정권 입장에서 한국 드라마가 대단히 위험한 게, 북한 사람들 사이에 커먼 놀리지(Common Knowledge), 즉 상식(常識)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 당국이 ‘오빠야, 자기야’ ‘남친, 여친’ 이런 말을 금지했거든요. 파리올림픽에서도 방철미 선수가 임애지 선수에게 ‘파이팅 해라’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파이팅’이란 말을 전 한국 와서 배웠거든요. 지금 북한에서 파이팅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거잖아요.”
 
  북한은 2020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2021년엔 청년교양보장법을 제정했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 7조는 “국가는 반동사상문화를 류입, 시청, 류포하는 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하여서는 그가 어떤 계층의 누구이든 리유 여하에 관계없이 엄중성 정도에 따라 극형에 이르기까지의 엄한 법적 제재를 가하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열 살짜리 아이가 한국 만화를 보다 적발돼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단 얘기다. 국제 인권 규약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한 악법(惡法)이다. 이걸로도 부족했는지 2023년엔 평양문화어보호법을 만들었다. 규정을 살펴보면 ‘괴뢰말투(남한어투)’를 쓰지 말라는 말을 히스테릭하게 반복해놨다. 또한 괴뢰말투를 쓰면 ‘6년 이상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무기로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한다’고 돼 있다. 방철미 선수의 경우, 올림픽 동메달까지 따고도 ‘파이팅’ 한마디 때문에 무기징역이나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단 얘기다. 태 처장의 말이 이어졌다.
 
  “지난 시기엔 남한 드라마를 보거나, 남한 말투를 써도 계도로 그쳤는데, 그렇게 해도 안 되니 이제는 형사 처벌을 하는 겁니다. 지난 한 해 들어온 탈북민들의 연령대를 보면 20대가 제일 많고 두 번째가 10대, 세 번째가 30대예요. 배고파서 탈북했다는 사람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탈북 원인인 거예요. 국방부나 통일부가 하지 못한 일을 우리 문화계, 연예계가 하고 있는 겁니다.”
 
 
  4대 세습 위협하는 한류
 
정성장 세종연구소 한반도전략센터장. 사진=주간조선
  정성장(鄭成長) 세종연구소 한반도전략센터장 역시 북한 사회를 뒤덮은 한류의 영향을 언급했다.
 
  “한류의 영향이 생각보다 아주 큽니다. 전 세계적 현상인데, 북한만 예외로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젊은 층이 컴퓨터·스마트폰으로 집에서 몰래 동영상 보는 게 고위 간부층 가정에까지 확산됐어요. 이러다 4대 권력 세습에 장애가 되는 것 아닌가 싶어 북한 정권이 남한과의 단절을 강력히 선언한 겁니다. 젊은 층에 가해지는 남한의 영향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해서죠.”
 
  ― 그 정도군요.
 
  “탈북 양상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어요.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청년이 먼저 탈북하고 부모가 뒤따라간다든가, 자식의 미래를 걱정해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탈북하는 사례들이 많아졌어요. 외국에 나가 있는 북한 유학생들이 특히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학교에 가면 인터넷을 쓰잖아요. 남한 문화를 접하면서 사상의 변화를 겪는 거죠.”
 
  태 처장은 북한 정권이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예로 ‘식량 지원 거부’를 들었다.
 
  “김일성 이름이 박혀 있는 시계를 ‘존함시계’라 합니다. 김정일 때는 사람들 굶고 있는데 쌀이라도 빨리 들여오라고 했어요. 저도 덴마크에서 치즈 3200t을 들여와서 김정일에게 존함시계를 표창으로 받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외부에서 쌀 많이 들여오는 사람 표창 주는 일이 없어요.”
 
  ― 왜 안 할까요?
 
  “김정은은 외부로부터 뭘 받으면 자기 리더십에 타격이 온다고 생각해요. 김정일 때는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김정일은 외부에서 식량, 의약품 지원을 받으면 이렇게 선전했어요. ‘이건 김정일 장군님의 선군 정치가 가져온 전리품이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도 미국이 식량을 보내주면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힘이 커졌기 때문에 미국까지도 쌀을 보내는 것이다.’”
 
  ― 그 말을 믿나요?
 
  “그때는 믿었죠. 이제는 북한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걸 알잖아요. 이런 마당에 ‘김정은 장군님이 위대해서 외국에서까지 쌀을 보내왔습니다’라고 하면 주민들이 속으로 생각하지요. ‘놀고 있네!’ 북한 정권도 이제는 선전이 안 먹힌다는 걸 알아요.”
 
 
  DMZ에 지뢰 집중 매설
 
  북한이 두 국가론을 강고히 선언한 두 번째 이유는 내부 단속 강화를 통한 정권 영속 도모다. 북한은 최근 몇 달간 집중적으로 DMZ에 지뢰를 매설하고 경의선 철도를 훼손하고 있다. 김천식 원장의 말이다.
 
  “자기들 내부를 단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한군이 먼저 내려오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치고 올라가는 군사 전략은 없거든요. 북한도 그걸 알 텐데 내부의 움직임을 단속하려는 거죠.”
 
  태 처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이 지금 2개 국가론을 주장하고 핵과 미사일을 완성한 다음부터는 군사 전략이 달라졌어요. 지난 시기에는 6·25 전쟁 같은 상황에서 북한이 치고 내려와야 되니까 내부적으로 지뢰를 집중적으로 매설한 지역과 매설 안 한 지역을 구분해놨어요. 지뢰가 없는 지역으로 기계화 군단이 움직일 수 있도록요. 그런데 북한의 재래식 무기들이 연료도 없고 노후화됐어요. 이제는 북한도 6·25 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안에서는 못 나가고 밖에서도 못 들어오게 지뢰를 잔뜩 매설해놓는 겁니다. 철벽을 만들고 있는 거죠.”
 
  ― 더욱 폐쇄 사회로 가고 있네요.
 
  “완전한 폐쇄지요. 코로나19 이후 국가 정책이 180도 바뀐 나라가 북한입니다. 코로나19 기간 3년 동안 국경과 휴전선을 철저히 봉쇄해도 북한이 무너지지 않았잖아요. 그걸 김정은이 안 겁니다. 봉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서 두 국가론을 내놓고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키고 있어요.”
 
  그 기간 새 얼굴이 북한 방송을 통해 보이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딸 김주애다. 북한 언론에 처음으로 공식 등장한 건 지난해 2월 8일. 2월 7일 건군절을 맞이해 김정은이 인민군 장령(장성)들의 숙소를 방문했는데 이때 동행했다. 이후 여러 번 등장했다. 가장 최근 등장은 8월 5일 신형전술탄도미사일무기체계 인계인수 기념식이다. 이때는 김정은의 옆자리가 아닌 뒤편에 앉혔다.
 
  정성장 센터장은 김주애가 ‘후계자로 내정되는’ 단계에 있다고 분석했다. 후계자로 공식화된 것은 아니다. 정 센터장은 김주애의 부상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예측했다. 정 센터장은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을 여러 번 만났다. 고용숙은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한집에 살면서 돌봐줬다. 그러다 남편, 자식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고용숙은 김정은이 이미 8세에 후계자로 내정됐다고 증언했다. 고용숙의 남편 이강이 김정일에게 물었다. ‘너무 어리지 않나?’ 김정일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를 닮아서.’ 정 센터장의 말이다.
 
  “고용숙의 증언을 듣고 알게 된 거죠. ‘북한의 로열패밀리는 권력 세습을 당연시하는구나.’ 김정은이 만 8세 때에 후계자에 내정됐다면,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일찍 후계자가 결정된 겁니다. 비록 내정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소수 측근에 불과했지만요. 현철해 같은 측근들은 확실하게 인지를 하고, 그들이 기반이 돼서 준비된 거죠. 갑자기 김정일이 쓰러져서 느닷없이 ‘너 후계자 해’ 이런 건 아니었단 얘깁니다. 김주애도 어린 나이부터 훈련시키고 있다고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 단순한 쇼가 아니라는 거군요.
 
  “10년에서 20년 동안 경험을 쌓는다면, 후에 정식 후계자가 됐을 때 큰 어려움 없이 이인자 역할을 할 수 있잖아요. 김정은은 후계 수업을 충분히 받지 못했어요. 김정일이 여성 관계가 복잡해서 그걸 숨기려, 김정은의 존재와 후계 내정을 소수 측근에게만 밝혔지요. 그러니 김정은이 집권 후 인맥 구축에 어려움을 겪은 겁니다. 김정남도 죽이고, 장성택도 죽이고 숙청이 잦았던 것도 그 때문이고요. 어릴 때부터 ‘후계자는 김주애’라 알려두면 사람들이 일찍부터 줄 설 거 아닙니까.”
 
 
  ‘군주제적 스탈린 체제’
 
  정 센터장은 김정은 체제를 ‘군주제적 스탈린 체제’라 부른다.
 
  “진보나 보수나 북한에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진보는 자꾸 북한을 남한 같은 정상 국가로 보려 합니다. 보수는 ‘북한 급변사태’를 자주 얘기합니다. ‘20대 지도자가 얼마나 가겠냐’면서 곧 무너질 것처럼 생각했죠. 예전의 왕조 국가를 보세요. 왕이 15세에 즉위해도 안정적으로 가잖아요. 북한은 왕조 체제와 사회주의가 결합된 형태예요. 보수도 북한을 왕조 국가라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태 처장은 김주애의 이름이 주민들에게 공개가 안 된 점에 주목했다. 《로동신문》은 김주애를 ‘사랑하는 자제분’ ‘존경하는 자제분’이라 지칭한다.
 
  “의전을 보면 후계자 대우를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김주애인지, 김주예인지 헷갈려하고 있어요. 《로동신문》이 우리 공주의 이름은 이거라고 딱 정리를 안 해주고 있잖아요. 마지막에 진짜 후계자로 책봉될지 알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김정일 때도 같았어요. 김정남이 5세 때 장군복을 입혀놓고 의장단 사열도 시켰어요. 그거 보면서 사람들이 생각했어요. ‘맏아들이 후계자가 되겠구나.’ 결국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한 건 김정은이잖아요.”
 
  ― 4대 세습을 암시하는 광경을 북한 주민들은 무심하게 볼까요.
 
  “김일성, 김정일 때도 같았어요. 아들, 딸 데리고 다니면 간부들이 깍듯이 대했죠. 그래야 수령의 절대적인 권위가 더 높아지니까요.”
 
 
  “조선학교에 반쪽 지도 걸려”
 
  ― 두 국가론을 북한 주민들이 받아들일까요?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못 받고 있어요. 70여 년간 북한의 선전·선동 방향은 민족 해방론이었습니다. ‘남조선은 미제(美帝)의 식민지고 남한 주민들은 미제와 독점 자본주의의 노예다.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이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아이 때부터 그렇게 배웠어요. ‘휴전선은 곧 허물어서 없애야 한다’고도 배웠어요. 김대중 대통령 시기 6·15 공동선언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간다고 선언했고, 문재인 정부 때는 종전(終戰)선언을 맺어서 점차 평화적인 단계로 간다고 했지요. 정책의 초점이 통일 지향적이었단 말이에요.”
 
  ― 특별히 뭐가 바뀐 것도 아닌데 최고지도자가 이렇게 나오니 일반 주민들은 당황스럽겠네요.
 
  “학교 교실에 걸려 있는 지도도 이제는 북한만 있는 반쪽짜리로 건단 말이에요. 조총련계가 운영하는 조선학교에도 반쪽 지도를 걸라 한대요. 조총련계에서도 연세 있는 분들은 그럽디다. ‘이것만은 못 받아들이겠다.’”
 
  정성장 센터장도 같은 얘기를 했다.
 
  “나이 든 세대 같은 경우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통일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길 강요받아왔고, 남북은 한민족이라고 교육받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남북은 서로 다른 국가라고 하니까요. 젊은 세대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젊은 세대의 경우 통일에 크게 관심이 없잖아요.”
 
  김천식 원장의 말이다.
 
  “그동안 북한이 남한을 비난하며 ‘민족분열 세력’,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세력이라고 했어요. 이제 북한이야말로 민족분열 세력, 분단 고착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유일대표성 포기 안 한 서독
 
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 사진=월간조선
  그러면 남한은 북한의 두 국가론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염돈재(廉燉載·81) 전 국정원 1차장은 “두 국가론을 절대 용인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염 전 차장은 노태우 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북방 정책을 입안하고, 헝가리, 소련 등 공산권과의 수교 교섭에 참여했다. 독일 통일 직전인 1990년 8월부터 3년간 주독일 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면서 독일 통일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두 국가론을 인정하면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통합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다.
 
  동독은 1971년 기존의 독일 민족 개념을 폐기하고 ‘두 민족론’을 내세운다. 서로 다른 체제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민족이 됐다는 어찌 보면 참신한 주장이었다. 독일 민족의 단일성을 부정해 동독 체제의 독자적 주권성을 인정받기 위해 내세웠다. 서독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염 전 차장의 말이다.
 
  “여기에 서독이 제대로 대응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이 앞당겨졌습니다. 서독은 기본법 전문에 ‘전 독일 국민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의해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달성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고 규정했어요. 통일이 헌법적 의무였던 거죠. 서독은 독일 전체를 서독이 대표한다는 ‘유일대표성’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독이 무너진 후 서독이 동독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겁니다.”
 
  ― 그게 무슨 뜻이죠?
 
  “동독이 무너지고 서독과 동독은 ‘화폐, 경제 및 사회통합 조약’에 서명했어요. 그 결과 동독의 물품이 프랑스나 영국에도 수출될 수 있게 된 겁니다. 근데 그때 EC(유럽공동체, EU의 전신)가 존재했거든요. 만약 이전에 서독이 두 국가론을 인정했다면 EC가 양 독일의 조약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요?”
 
 
  탈북 어부들 북으로 보낸 文 정권
 
  우리가 북한의 두 국가론을 무시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북한 주민들의 존재다. 만약 우리마저 두 국가론을 인정하면 북한 주민들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된다. 염 전 차장의 말이다.
 
  “동서독 분단 당시 동독 사람들은 서독 정부가 동독 국민들을 같은 국민으로 인정하는지, 어떻게 대해주는지 끝없이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이런 게 희망의 싹이 됐거든요.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국 정부가 북한 주민들을 한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탈북자들을 같은 국민으로 대해주는 걸 보면, 언젠가 그들에게도 좋은 날이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않겠습니까.”
 
  ― 문재인 정부는 힘들게 북한을 탈출해온 어부들을 북으로 즉시 돌려보냈는데요?
 
  “그건 헌법 위반입니다. 우리 영토에 들어온 대한민국 국민을 사지(死地)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까? 법적인 측면에서도, 인도적인 측면에서도 문제지요. 국가가 뭡니까. 국민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존재 이유 아니에요? 그때 관여한 사람들을 찾아 단죄(斷罪)해야 합니다.”
 
  북한의 두 국가론을 인정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는 통일 후를 생각해서다. 한국이 두 국가론을 인정해버리면, 향후 남한의 흡수 통일을 두고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생판 남의 나라를 병합하는 것이니 말이다.
 
 
  “평화는 힘으로 지켜진다”
 
8월 5일 신형전술탄도미사일무기체계 인계인수 기념식에 참석한 김정은과 김주애(오른쪽 끝). 사진=로동신문
  이런 북한을 이웃에 둔 남한의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 힘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다. 김천식 원장의 말이다.
 
  “평화는 힘으로 지켜집니다. 문재인 정부가 평화를 통한 비핵화를 추진하다 완전히 실패했어요. 뭘 해도 북핵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현재는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잖아요. 핵무기 사용 억제가 우선이기 때문에 힘에 의한 평화를 얘기하는 겁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제 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정책을 폈습니다. 그때 이미 미·중은 전략적 체제 경쟁에 들어갔어요. 중국과 잘 지내면 우리를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었던 거죠.”
 
  ― 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이름만 거창했지, 결과적으로 상황을 더 악화시켰네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게 평화적 환경을 조성해서 비핵화를 추구한다는 건데, 그건 북핵 완성 전에나 쓸 수 있는 정책입니다. 핵이 완성되면 무용(無用)합니다. 유화 정책 펴다 북으로부터 무시나 당했잖아요. 문재인 정부 기간 북핵이 가장 고도화됐습니다.”
 
  ― 평화는 힘으로 지켜진다는 걸 외면한 대가군요.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 뭡니까. 첫째, 자주국방을 강화하고, 둘째 북핵 위협하에서는 한미동맹이 핵동맹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셋째,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일단 북한의 도발을 막고 그 기반 위에서 비핵화를 유도하는 게 기본입니다.”
 
  ― 북핵 폐기가 가능하다고 봅니까.
 
  “그렇습니다. 중국과 미국이 갖고 있는 힘을 제대로 쓰면 김정은은 정권 보호를 위해 핵을 포기할 겁니다. 미·중이 비핵화를 위해 제대로 일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동방 정책 때문에 통일된 거 아냐”
 
  염 전 차장 역시 ‘평화가 대화로 지켜진다고 내세운 것’을 문재인 정권의 잘못으로 들었다.
 
  “문재인 정부가 뭐라 얘기했습니까. ‘평화는 군사력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지켜진다.’ 기본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우리는 독일 통일에 있어 화해 협력의 영향을 과대평가합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들면서요. 동방 정책은 동독의 공산 정권과 화해 협력을 해서 통일을 이룬다는 정책이거든요. 동독 주민이 변해서 통일이 이뤄질 거라는 정책이 아니었어요. 동방 정책을 추진한 사민당 정부는 동독 주민들은 도외시하고 동독 공산 정권과의 관계 증진에만 노력했어요.”
 
  ― 그게 통했나요?
 
  “아니죠. 독일 통일은 동독 정권이 변해서가 아니라 동독 정권이 망해서 이뤄졌어요. 서독이 부강하고 민주적인, 동독 주민들이 동경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자석에 쇠붙이가 달라붙듯 동독이 딸려가서 통일이 된 겁니다. 브란트도 인정했습니다. 동방 정책 때문에 통일이 된 게 아니라고요. 대한민국 국민들만 동방 정책이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 됐다고 믿고 있어요. 답답하지요.”
 
  ― 서독의 교훈이 현재 대한민국에도 적용된다고 보십니까.
 
  “100% 적용되지요. 우리가 민주주의 제도와 경제적 풍요, 국민들이 함께 잘사는 매력 있는 국가로 만들면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동경하겠지요. 언젠가 북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 정부가 들어선다면 그때는 통일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죠.”
 

  독일 통일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동독과 북한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TV 시청이다. 동독은 TV 방송 때문에 무너졌다는 얘기가 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방송을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었다. 동독은 왜 TV 시청을 허가했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어차피 서독의 방송 전파를 통제하기 힘들었다. 동독 영토 가운데 서베를린이 있었다. 서베를린에서 쏘는 방송 전파를 막으려면 주변 동독 주민들이 아예 TV를 시청 못 하게 해야 하는데 그건 무리였다.
 
  둘째, 자신감이 있었다. 염 전 처장의 말이다.
 
  “동독 지도부가 자신감이 있었어요. 동독은 공산 국가 중 최고의 복지 국가였거든요. 서독의 TV 방송을 보면 마약, 범죄, 각종 퇴폐적인 장면이 등장하잖아요. 그걸 보면 동독 사람들이 실망할 거라 생각한 거죠.”
 
  셋째, 종주국인 소련이 굳건할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동독은 핵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핵무기에 대한 염 전 차장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도 핵을 가져야죠. 만약 트럼프 정부가 집권하면 김정은과 비핵화가 아닌 어떤 합의를 한 다음 대북제재를 완화해줄까, 우려하고 있잖아요.”
 
 
  “트럼프 당선은 핵무장 기회”
 
  정성장 센터장도 한국의 핵무장 필요성을 언급했다.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 균형을 이루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주한미군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감축하고 한미연합훈련도 줄일 수 있습니다. 미군의 전략 자산을 전개할 때마다 청구서를 내밀 거고요. 결국 독자적인 핵우산이 필요합니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국제 분쟁에 비개입주의를 고수합니다. 한국, 일본이 핵을 갖는 것에 대해서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이잖아요. 우리에게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어요.”
 
  기자는 7월 23일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폼페이오는 트럼프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결정은 한국 정부에 달려 있다. 모든 주권 국가에는 자신들만의 길을 모색할 권리가 있다. 한국 정부가 북핵의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정성장 센터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산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순간에 펼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ICBM을 갖고 있어요. 북한이 핵공격을 당하면 당연히 워싱턴을 공격할 거 아닙니까. 미국이 동맹을 지켜주기 위해 과연 북한과 핵전쟁을 감수할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거죠.”
 
  ― 핵개발이 말이 쉽지,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엔 넘어야 할 산이 굉장히 많지 않나요? 우리는 일본과 상황이 다르니까요.
 
  “일본은 핵 잠재력을 갖고 있죠. 마음만 먹으면 3개월이나 6개월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 우라늄 농축 시설이 없지요. 한데 처음부터 대규모 재처리 시설을 갖출 필요는 없잖아요. 작은 규모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만들려면 약 5개월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6개월이면 핵탄두 서너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어요. 윤석열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1년 내에 핵무장을 할 수 있다고 한 얘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핵개발 주장, 원전 산업 발전에 방해”
 
  김천식 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핵무장이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핵무기 만들 준비도 안 돼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면 원전 산업 발전을 가로막게 됩니다. 일본은 재처리·농축 다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못 하고 있어요. 지난날 우리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기 때문이에요. 비핵화를 고수하면서 원전 산업 발전을 위해 농축과 재처리를 하겠다 주장해야 얘기가 되지, 여차하면 핵무기 개발하겠다고 하면서 농축, 재처리하겠다고 하면 국제사회에서 누가 찬성하나요.”
 
  ― 그 말씀도 맞네요.
 
  “우리는 지금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핵우산은 검증된 적이 없잖아요. 주한미군이 그 핵우산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장치입니다. 주한미군이 존재하면 북한이 핵을 쓸 수 없습니다. 재래식 전쟁도 못 합니다. 주한미군의 주둔 여부가 핵우산의 신뢰성을 좌우합니다.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을 유지하며 핵우산을 활용하는 게 국익에 더 도움 되지 않을까요.”
 
  김천식 원장은 핵무기 개발 후 북한의 안보가 더 개선됐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북한이 핵개발 후 안보가 더 개선된 것도 아니잖아요. 핵개발 후 국제제재를 받아 경제는 망가지고 오히려 체제 안전까지 위협받고 있잖아요. 오죽하면 러시아를 끌어들여 군사 동맹을 맺었겠습니까. 핵이 안보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주한미국이 존재하고 미국이 확장 억제를 보장하는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의심됩니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 핵심”
 
  ― 왜 의심되나요?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주한미군은 철수할 겁니다. 프랑스가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나토(NATO)에서 빠져나왔어요.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벗어났지요. 한미동맹의 핵심은 주한미군 주둔입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미동맹이 파괴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한미동맹은 군사적 성격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명질서, 어떠한 가치와 체제에서 살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 한·미·일 3국이 민간 원자력발전소에 사용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고 공급하기 위해 협력하는 방안을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면 좋지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니까요.”
 
  태 처장은 두 국가론에 맞서 남한 정부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계속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지원을 받든 안 받든 우리는 일관성 있게 인도적 지원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손길을 내밀어라, 우리는 준비되어 있다’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야 됩니다. 북한이 거절하더라도 북한 엘리트들은 남측 정부의 태도에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태영호 처장은 말했다.
 
  “탈북민들이 잘사는 모습을 끊임없이 북한을 향해 보여서 더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기울어지게 해야 합니다. 한국의 발전 상황, 인간의 보편적 권리 같은 정보를 자꾸 북한에 들여보내야 합니다. 컴퓨터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는 북한의 MZ 세대, 장마당 세대가 북한의 주류 사회에 진입했을 때 북한이 스스로 한국과의 자유 통일을 선택하도록 말입니다.”
 
  지난 6월 19일 북한과 러시아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는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을 시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바로 다음 날인 6월 20일 대통령실은 북·러 조약에 대응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보도를 보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재검토하겠다는 것’이라고 친절히 부연 설명까지 했다.
 
  상당히 놀라웠다. 민간 싱크탱크나 시민단체 같은 곳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발표했다면 모를까, 대통령실이 친절히 부연 설명까지 해가며 발표한 사안이라니 말이다. 지극히 비외교적인 태도다. 한국 입장에서 북·러 조약에 실질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게 아닐까.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를 자극하면 그 감정은 전후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위협’이 러시아에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껴지기나 할까. 염돈재 전 차장은 정부가 외교 문제에서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를 신중히 맺어야 한다. 우리는 러시아와 안 좋은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다. 우리와 관계를 재개선할 수 있도록 우리는 열려 있다’ 이런 자세를 보여야지요. 애들 싸움입니까? 곧장 ‘그러면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나오는 건 하수 중의 하수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있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로서 어느 정도는 참여해야겠지만 불필요하게 러시아를 자극할 필요가 없어요.”
 
  ― 한국에서는 러시아를 ‘병든 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미국이 북한에 핵을 사용하면 그건 우리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그때는 우리도 핵을 사용하겠다’ 이런 식으로 나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할 때도, 미리 러시아에 우리 입장을 설명하면 됩니다. 우리 상황을 이해해달라고 사전에 설명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천지 차이죠. 외교도 사람이 하는 겁니다.”
 
 
  “세습 체제 존재하는 한 평화 공존은 어려워”
 
  염돈재 전 차장은 ‘대통령이 나서서 새로운 통일 정책을 제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기존의 통일 방안에 다소 결함이 있지만,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다른 방안이 없어요. 독일도 교류 협력, 그리고 3달간이었지만 연방 국가처럼 동서독이 다른 체제로 공존하는 기간을 잠정적으로 거쳤어요. 그런 다음 통일한 겁니다. 우리도 결국 그런 모델을 거쳐 통일될 겁니다. 그러니 기존의 통일 방안을 두되, 북한 세습 정권이 화해 협력의 대상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면 되는 겁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통일 정책을 멋대로 바꾸는 게 말이 됩니까.”
 
  ―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 3000’,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은 사실 본질적으로는 국내 정치용 레토릭(rhetoric)인데, 북한은 시빗거리로 삼았지요.
 
  “북한도 레토릭이라는 걸 알면서 시비 거는 겁니다.”
 
  ―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2023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20대의 41.5%는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북한 세습 체제가 존재하는 한 평화 공존은 매우 어렵습니다. 끝없이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그게 본인들의 존재 이유거든요.”
 
  ―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찾아야 하는 게 군사 국가의 특징이지요.
 
  “한국을 괴롭히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정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전쟁 날지 모르니 국방비를 많이 지출해야 합니다. 통일 비용을 젊은이들이 걱정하는데, 독일의 경우 통일 비용을 대느라 애쓴 게 15년입니다. 불과 15년 만에 다 극복하고 통일의 효과를 보고 있어요. 한때는 ‘유럽의 병자(病者)’였는데 통일 후 ‘유럽 경제의 엔진’이라 불리잖아요. 통일로 고생하는 건 길어야 20년이지만 혜택은 영원합니다. 아주 남는 장사 아닙니까.”
 
  동독은 1971년 두 민족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18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역사는 속도는 다를지라도 어디선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북한도 동독의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닐까. 동독의 약한 고리(weak link)가 텔레비전이었다면, 현시점 북한 체제의 아킬레스건은 몰래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컴퓨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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