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진단

17년 만에 통과된 非정규군 공로금 지급

6·25 당시 맹활약 켈로부대(KLO), 공로금 받는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켈로부대 등 민간인 신분 非정규군 1만8994명 대상
⊙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 “지금이라도 챙겨드릴 수 있어 다행”
⊙ 공로금 액수가 적다는 지적도
  1950년 9월 15일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작전이다. 이 작전의 성공은 ‘팔미도(八尾島) 등대 탈환 작전’에서 시작한다. 10만명의 병력을 태운 261척의 연합군 함대가 무사히 인천항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인천항에서 13km 떨어진 팔미도와 이곳의 등대를 우선 장악해야 했다.
 
  인천은 조수(潮水)와 수로(水路), 암초 등 해안 사정이 복잡해 상륙작전이 쉽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특공대를 조직해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을 시행한다. 이 작전에는 KLO(Korea Liaison Office·미 극동군사령부 한국 연락사무소), 이른바 ‘켈로부대’가 투입된다.
 
  켈로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북한의 정부·군·산업 기관에 침투해 정보 수집을 하기 위해 1949년 6월 1일 만든 첩보조직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 켈로부대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러 온 켈로부대 출신 노병들. 사진=뉴시스
  2016년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켈로부대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선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이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인민군과 켈로부대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기까지 6일간 등대와 섬을 놓고 뺏고 뺏기는 전투를 치렀다.
 
  9월 15일 새벽 2시20분. 켈로부대가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혔다. 이를 본 맥아더 사령관은 7개국의 연합함대 261척을 팔미도 해역에 집결시켰고, 곧이어 상륙작전에 돌입했다. 13일 뒤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켈로부대는 1951년 5월 중공군이 점령한 강원도 화천의 ‘화천발전소 탈환 작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켈로부대는 화천발전소에 배치된 중공군의 대포와 전차가 유엔군의 정찰을 속이기 위한 위장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유엔군은 중공군 진지를 공습해 화천발전소를 탈환했다.
 
  고려대 남광규 교수가 2018년 한국보훈학회에 제출한 논문 〈6·25 참전 KLO한국유격군 보상법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켈로부대는 4445회 작전을 수행했고, 적 7만여명을 살상(殺傷)했다.
 
  6·25 당시 미군은 북한군의 게릴라전을 경험하고는 유격부대의 필요성을 느꼈다. 1951년 7월 미 ‘8240부대’가 창설되자 켈로부대는 8240부대로 통합됐다. 8240부대 예하에는 유격부대가 30여 개에 이르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자 8240부대는 국군으로 소속이 변경돼 ‘8250부대’로 다시 재창설됐다가 1954년 2월 공식 해체됐다.
 
  이후 켈로부대를 비롯해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 신분의 참전용사들은 잊혔다. 국가의 관심에서 배제된 채 5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2007년 3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 외국군 소속 특수임무수행자에 대한 신속한 보상을 위해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17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회기마다 비정규군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이들에 대한 보상 법이 발의됐다. 하지만 정부는 미군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비정규군에 대한 인정 및 보상이 곤란하다고 했다.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는 예산 추가 소요를 문제 삼았고, 국방부는 ‘개인 기록이 없어 보상과 서훈이 불가능하다’ ‘자생적으로 조직된 미군 산하 단체이므로 한국 정부의 보상 책임이 없다’ ’이미 미군 등으로부터 급여를 지급받았다’ 등의 주장을 폈다.
 
  지난 4월 13일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다. 이로써 켈로부대원들도 보상받을 길이 생겼다. 법안을 만드는 데 앞장선 이는 예비역 육군 중장 출신인 국민의힘 한기호(韓起鎬) 의원(강원 춘천시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을)이었다.
 
 
  한기호 의원 대표발의로 17년 만에 법안 통과
 
  지난해 9월 9일 한기호 의원은 ‘6·25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률안은 소위원회 심사 등을 거치며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로 법안의 이름과 세부 내용이 일부 수정됐다. 지난 3월 24일에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4월 13일 공포됐다. 입법 노력을 펼친 지 17년 만이다.
 
  법안의 주 내용은 1948년 8월 14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적 지역으로 침투해 비정규전을 수행한 KLO, 미 8240부대 등의 공로를 인정해 공로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한 의원은 지난해 9월 법률 제안 이유에서 “6·25전쟁 중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격대나 미 8군 및 미 극동군사령부의 첩보부대 등에 소속되어 비정규전을 수행한 공로자와 그 유족의 경우 외국군 소속이거나 정규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라는 이유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6·25전쟁에 참전한 비정규군 공로자의 경우, 국가 수호의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해 나라를 위해 희생했지만 제도적 여건의 미비로 보훈 사각지대에 있다. 특히 현재 생존자들의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고령자임을 감안할 때 더 늦기 전에 명예회복과 보상대책 마련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한 의원은 “임무 수행이나 참전 시기 등이 유사한 백골병단유격대나 특수임무수행자의 경우에는 관련 법률을 마련해 보상이 이뤄지고 있다”며 “정규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라도 국가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해 보상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국방부 장관 소속으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비정규군의 활약
 
  6·25전쟁 당시 활동한 비정규군은 군번과 계급도 없이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격대원이다. 이들은 비정규전, 즉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들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약 30개 단위 부대로 편성돼 미 8군 및 미 극동군사령부와 연계해 유격 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북한 지역 연안 일대와 적지 내륙에서 해안선 침투, 상륙작전, 공산군 배후 습격, 교량·교통망 파괴, 공중 침투 등을 벌였다. 전투를 통해 함경도와 평안도 연안에 2개 군단, 강원도와 함경도 연안에 1개 군단 등 공산군 3개 군단을 견제하는 전략적 효과도 거뒀다. 또 남포항과 원산항의 입구를 봉쇄해 동·서해 제해권 확보에 기여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 법의 보상 대상 공로자는 ▲외국군 소속으로 첩보 수집 등의 비정규전을 수행한 부대인 켈로부대 ▲미 공군 소속 첩보부대인 미 공군 제6004항공정보대(이후 제6006항공정찰정보대로 개편) ▲자생적으로 조직된 구월산 유격대 등이다. 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유격대가 전쟁 중 미 8240부대에 소속됐다. 휴전 후에는 한국군 8250부대로 전환돼 활동했는데, 총인원은 1만8994명으로 파악된다.
 
  이 밖에도 자생적으로 조직된 유격대가 상당수 있으나 구체적인 근무 기간, 활동 내역 등에 관한 자료가 부족해 정확한 확인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는 자체 추산으로 6·25전쟁 중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인원은 총 3만2000명이라고 주장한다.
 
 
 
虎林부대 포함 위해 법안명 수정

 
사망한 전우들을 위한 추모식에 참석한 유격백마부대원들. 사진=최성용 제공
  국방부가 공개한 ‘6·25전쟁 참전 당시 비정규군 공로자 현황’에 따르면, 1만8994명은 ▲미 8240부대→한 8250부대 전환자 1만2595명 ▲유격대원 위패 봉안자 3928명 ▲미 8240 유격대원 특별상 기장수여자 737명 ▲8250부대 장교 전환자 753명 ▲전상자(戰傷者) 명부 439명 ▲종군복무자로 확인된 8240부대원 542명 등이다.
 
  처음 발의한 법안의 이름은 ‘6·25전쟁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지만, 6·25전쟁 이전에 유격전을 수행했던 ‘호림(虎林)부대’ 등의 공로자가 누락되지 않도록 법안명을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로 수정했다. 이 때문에 비정규군으로 인정하는 기간도 1950년 6월 25일부터가 아닌, 1948년 8월 15일로 앞당겼다.
 
  호림부대는 월남한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1949년 2월 25일 만들어진 육군본부 정보국 직속 대북 침투 목적 특수부대이다. ‘최초의’ 북파공작원인 셈이다. 이들은 1949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대북 침투 공작을 벌였고, 1950년 3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내외적 국가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현역 장병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호림부대원 252명은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말, 설악산 대청봉에 손톱과 발톱을 잘라 생무덤을 만든 뒤 38선을 넘었지만 북한 인민군에게 발각돼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소련군 군수 장비의 수송을 지연시키기 위해 적진으로 침투했다.
 
  북한에서 작전을 펼치던 호림부대원 중 일부는 생포돼 1949년 9월 11일 평양 모란봉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작전 중에 전사한 호림부대원(장교 2명, 병사 174명)은 병적 확인을 거쳐 숨진 지 54년 만인 2003년에야 현충원에 안장됐다. 이들은 6·25전쟁 이전에 창설됐다는 이유로 그간 보상에서도 제외돼왔다. 이들도 공로자로 인정을 받으면 공로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보상금 대신 공로금 지급
 
  한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는 ‘보상금 등’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입증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보상금 등’이라고 다소 포괄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수정 법률안은 ‘보상금 등’ 대신 ‘공로금’만을 명시했다. 현시점에서 자신이 비정규군으로 활동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공적에 따라 보상액이 달라지는 보상금 대신 공로금의 형태로 보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입장이다.
 
  국회 국방위원회 배용근 수석전문위원은 《국회보》 기고를 통해 “합리적이고 형평에 맞는 보상을 위해 개인별 활동 기간 및 공적 등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나 비정규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사람의 신분 및 계층이 매우 다양하고 정규군이 아니었던 까닭에 그 근거자료가 부족하다”며 “정전 후 60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비정규군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쉽지 않아 일률적으로 공로금을 지급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했다.
 

  지난해 9월 24일 국회 예산정책처는 한기호 의원이 발의한 법안의 ‘비용추계서’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법 시행 후 5년간 총 617억원, 연평균 123억4000만원의 추가 재정이 든다.
 
  세부적으로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추정 생존자 4064명과 추정 유족 보상 신청인 1806명에 대해 1인당 1000만원 수준의 공로금 지급 ▲보상심의위원회 인건비·운영비 연 5억원 ▲비정규군 공로자 및 유족 단체 지원비 연 1억원 등이다.
 
  일부에서는 공로금의 액수가 적다고 주장한다. 1000만원은 어떤 기준으로 책정됐을까.
 
  한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대해 배용근 수석전문위원이 작성한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공적 등의 확인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제정안에서 규정하는 유격대와 그 활동 시기 및 공적이 유사한 ‘백골병단’을 참고했다. 이를 바탕으로 비정규군 공로자와 그 유족에게도 1000만원을 준다는 계산이다.
 
  백골병단은 1950년 12월 ‘국민 총동원령’ 소집을 통해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제11~13연대에 배속된 유격부대이다. 당시 채명신 중령(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인민군으로 위장해 적진 후방 지역에서 교란 작전을 펼치며 많은 전공을 올렸다. 817명 중 364명이 전사했으며 283명만이 생환했다. 공로금을 지급받은 생존자는 119명이다. 백골병단의 14.5%만이 공로금을 받은 셈이다. 1인 평균 1020만원(보상금 20만원+공로금 1000만원)을 받았다. 백골병단에 대한 공로금 지급에는 총 12억1000만원이 소요됐다. 백골병단에 대한 공로금 지급은 2004년 윤후덕 의원이 발의한 약칭 ‘6·25적후방공로자법’이다. 이 법은 2016년에 폐지됐다.
 
 
  공로금은 1000만원
 
  켈로부대 출신들은 공통으로 공로금의 액수가 적다고 말한다. KLO8240부대전우회총연합회 김상기 회장은 지난 4월 13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5명 중 4명 이상이 전사하며 극비 임무를 수행했는데도, 그동안 국군 소속이 아닌 유엔군 소속이라 보상을 못 하겠다고 버티던 정부가 생색내기 수준으로 그런 금액을 제시한다면 누가 납득하겠느냐”며 “국가가 방치했던 과오를 인정하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대원들에게 제대로 예우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6·25 당시 평안북도 일대에서 활약한 KLO8240유격백마부대 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 최성용씨는 “이번에 법안이 통과된 것은 다행이지만, 공로금이 너무 적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래는 보상금을 지급하려고 했으나, 액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공로금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최 회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켈로부대에 대한 보상금 지급 법안이 발의됐어요. 1인당 3000만원 수준으로 보상하고, 전체 예산은 약 1700억원 규모였습니다.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 법사위 문턱에서 막혀버렸어요. 당시 여당, 새누리당 의원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특히 검사 출신 의원 두명이 ‘예산이 너무 많이 든다’며 보상금 지급에 반대했죠.
 
  그 사람들 인식이 ‘이런 식이면 임진왜란 때 있었던 일도 보상해줘야 한다’는 식이었죠. 제가 ‘당신들이 보수 정당 정치인이 맞느냐’며 따졌죠.
 
  자꾸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예산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우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한 겁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경우, 특별법을 만들고 법까지 개정해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1조원 이상을 배상하잖아요. 현재는 공로금이 1000만원 수준이라고 하지만 비정규군 등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위해 법을 개정해 보상 규모를 늘려야 합니다.”
 
  최 회장의 부모는 모두 켈로부대 출신이다. 부친 최원모씨는 6·25전쟁 당시 유격백마부대를 이끌며 북진(北進)호 함장으로 활약했다. 북위 40도선에서 활동하며 서해에서 적선(敵船)을 섬멸하고 중공군의 식량 등을 노획했다.
 
  전쟁이 끝나고 충남 서천에서 어업 활동을 하던 최원모씨는 1967년 연평도 부근에서 조업하다가 납북됐다.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2013년 정부는 납북된 최원모씨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최씨를 대신해 아들 최성용 회장이 대신 받았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최씨는 ‘납북자가족모임’을 만들어 납북자 구출, 국군포로 구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가 대한민국으로 귀환시킨 국군포로만 7명이다.
 
 
 
공로금 신청 예정 인원은 5870명

 
  국방부는 한창 시행령을 만들고 있다. 오는 10월 14일부터 이 법이 시행된다. 이때부터 공로금 지급 대상자에게 공로금 신청을 받는다.
 
  오는 9월에는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 구성 등 위원회의 윤곽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공청회도 이쯤에 연다. ‘공로금의 액수는 1000만원이 맞느냐’는 물음에 국방부 관계자는 “그렇다”고 했다.
 
  예산 규모가 617억원인 보상심의위원회는 5년간 활동할 예정이다. 617억원 중 위원회 수당과 운영비를 제외한 순수 공로금은 587억원이다. 국방부가 인정하는 비정규군인의 인원은 1만8994명인데, 왜 전체 인원의 3분의 1가량에만 지급할 수 있는 규모인 587억원일까.
 
  국회 예산정책처는 비정규군인의 수는 1만8994명이지만, 상당수가 사망했다고 보고 추정 생존자를 4064명으로 봤다. 여기에 공로자의 유족 중 신청할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을 1806명으로 추산했다. 이렇게 해서 대상 인원은 5870명이 됐다.
 
  국방부 관계자에게 ‘공로금 신청자의 수가 5870명 이상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 관계자는 “그렇게 되면 예비비 등을 반영할 것이므로, 공로자가 공로금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추가로 ‘왜 유족 신청 추정 인원은 1806명밖에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관계자는 “비정규군인의 상당수가 젊은 나이에 전사(戰死)하는 바람에 남은 가족이 거의 없다. 또 이들은 주로 북한 출신이었기에 대한민국에는 이들의 직계 가족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한 백골병단의 사례를 소개하자면, 백골병단에 속했던 817명 중 공로자의 유가족 자격으로 보상을 받은 이는 7명에 불과했다.
 
  비정규군인이지만 훈장을 받았다면 공로금을 받을 수 있을까. 국방부는 공로금을 추가로 지급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최성용 회장에 따르면, 1만여명이 넘는 켈로부대원 중 훈장을 받은 이는 약 30명이다.
 
 
  비정규군 공로 인정, 보훈 정책에 큰 이정표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 사진=뉴시스
  한기호 의원은 “이번 비정규군 공로자에 대한 공로금 보상법이 국가 보훈 정책의 큰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 의원은 “6·25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이 중에는 미처 알려지지 못한 소중한 희생도 많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켈로부대와 같은 비정규군”이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70년 가까이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챙겨드릴 수 있어 다행이다. 17년 만에 해결했다”고 했다.
 
  ‘공로금 액수가 적다’는 의견에 대해서 한 의원은 “법안 처리 과정에서 ‘보상금’이라는 표현이 ‘공로금’으로 바뀌고, 그 금액도 그리 많지 않아 아쉽다”면서도 “국가가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액수가 적다고 외면해 일을 미루기만 한다면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기호 의원은 군인 출신답게 안보를 강화하고 제대로 된 보훈 정책을 펼치는 의정 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14~17세의 나이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소년·소녀병에 대한 예우, 6·25전쟁 당시 발생한 8만명의 국군포로 문제와 이분들에 대한 예우를 마련하는 데도 힘쓸 겁니다.”
 
  한기호 의원실은 “6·25전쟁 당시 발생한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들에 대한 예우를 마련하기 위해 국방부 등 정부 부처와 협의하며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