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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영화 〈공작〉의 모티브가 된 ‘흑금성’ 박채서의 실체

‘안기부 보고서’엔 ‘김정일 만났다’고 돼 있는데 20년 후엔 ‘안 만났다’고 부인… ‘흑금성’의 말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chosh760@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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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채서씨는 김정일과의 만남 부인했으나, 영화 〈공작〉과 김당 기자가 쓴 同名의 책 《공작》은 김정일과의 만남 다뤄
⊙ “흑금성 사건 관련자들, ‘(영화가) 사실과 다른데 박채서 혼자만 영웅처럼 나온다’고 말하더라”
⊙ “박채서씨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공작원 역할을 했는지 의문”
⊙ 1995년 광고 회사 ‘아자 커뮤니케이션’ 설립해 MBC와 삼성 對北 사업에 끌어들여
⊙ 1997년 대선 앞두고 ‘오익제 월북’이란 악재 만난 DJ, “北風 막을 수 있는 박 선생이 도와달라”
⊙ 2010년 흑금성이 연루된 현역 육군 소장 간첩 사건과 관련, “기무사 요원은 회의 중인 육군 소장을 수갑 채워 연행”
  지난 8월 8일 개봉한 영화 〈공작〉은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활동한 대북(對北) 공작원 박채서씨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에서 박석영(박채서의 극중 이름)은 국군 정보사령부 소령 출신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스카우트돼 북한 핵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 내부로 침투한다. 북한 고위 간부의 신뢰를 얻은 박석영은 북한 김정일과도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설정하고 있다. 그동안 박채서씨는 김정일과 만났다고 알려져 왔었다. 1998년 흑금성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에도 그가 김정일과 접촉했는지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가 김정일을 만난 건 거의 정설(定說)처럼 받아들여졌다.
 
 
  김정일 만남을 둘러싼 의문
 
1998년 3월 18일 《한겨레》의 단독 보도(사진)로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실체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최근 박채서씨는 김정일과의 만남을 부인했다. 지난 8월 11일 자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박씨는 ‘김정일과 만났느냐’는 질문에 “안 만났다”며 장성택이 북한에서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밝힌 것이다. 다수의 언론은 〈공작〉 개봉 사실을 알리며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박채서씨가 실제로 김정일을 만났다고 전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 기자 출신인 김당(현 UPI뉴스 에디터)씨는 박씨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어 왔다. 김당씨는 박채서씨의 행적을 추적, 박씨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同名)의 책 《공작》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김씨는 박씨와 김정일과의 만남을 제법 자세히 다뤘다. 김당씨는 책에서 “1%의 허구가 있다”고 밝혔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긴장감 있게 묘사돼 있다. 영화는 그보다 먼저 출간된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제작돼 김정일과의 만남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영화 역시 도입부에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픽션”이라고 명시돼 있다.
 
  그간 ‘흑금성’ 박채서씨를 둘러싼 행적엔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이중간첩’이라는 설부터 그의 대북 공작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박채서씨는 어떤 인물이길래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고, 북한 최고 권력자를 만난 것처럼 알려지기도 한 것일까.
 
  흑금성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건 20년 전인 1998년의 일이다. 그해 3월 18일 《한겨레》는 “안기부가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특수 공작원을 김대중 국민회의,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진영에 침투시켜 북한 접촉을 유도하고, 이 과정에서 각종 정보를 조직적으로 입수하는 등 불법적 비밀 정치공작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기사의 내용이다.
 
  〈《한겨레》가 단독 입수한 안기부의 ‘해외 공작원 정보보고’ 자료에 따르면 “공작원을 베이징에 파견해 북쪽의 대선 관련 기도를 유도”한다고 돼 있어, 안기부가 북풍 공작을 적극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이 자료는 특히 안기부가 북한에 위장 포섭돼 활동 중인 특수 공작원 ‘흑금성’이 지난해 5월 밀입북해 받은 지령을 따르는 형식으로 97년 9월께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후보 진영에 침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신문은 또 ▲흑금성이 1997년 10월 초 이인제 후보 진영의 ㅈ씨와 함께 베이징을 방문해 북한 쪽 인사들을 만나 대선에서의 협조 방안을 논의했고 ▲(흑금성은) 같은 방식으로 1997년 9월 말 국민회의 ㅈ의원에게 접근해 북풍 관련 정보 등을 제공하며 신뢰를 얻었다고 전했다.
 
 
  김정일과의 만남에 대해 “상상에 맡기겠다”
 
  흑금성 관련 보고서가 공개된 지 나흘 후인 1998년 3월 22일 박채서씨는 김당 당시 《시사저널》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박씨는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이중간첩’이라는 일각의 보도에 대해 부인했다. 김정일과의 만남에 대해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당시 인터뷰 문답이다.
 
  〈— 당신의 신분에 대해 여러 설(說)이 난무하고 있는데, 본인의 신원을 확실히 밝혀 달라.
 
  “충북 청주 출신이고 93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군에 있을 때는 국군 정보사에서 대북 특수 임무를 수행했고, 제대 후에는 안기부의 특수 공작원으로 일해 왔다. 신분을 더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
 
  — 언론의 ‘이중간첩’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웃으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지만, 첩보 공작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추측 보도가 나온 것 같다. 그런 용어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국가의 명을 받고 활동했지만 저쪽(북한)이 보기에는 포섭된 것이다. 이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단, 나는 국익을 위해 조직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 당신의 안기부 정보 보고에 따르면, 김정일 총비서를 면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만났는가.
 
  “(빙그레 웃으며) 상상에 맡기겠다. 너무 예민한 부분이니 ‘노코멘트’한 것으로 해 달라.”〉

 
  안기부 ‘해외정보 보고서’(요지)의 흑금성 관련 내용 중에는, 그가 1997년 8월 22일 북한의 모란봉 지역 한 초대소에서 ‘35분간 비밀리에 김정일과 면담했다’는 기록도 있다.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자료는 박채서씨의 보고를 바탕으로, 안기부 해외조사실(실장 이대성)이 작성해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과 이병기 2차장 등에게 보고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박채서씨는 김정일과 만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안기부가 보고서를 조작했거나 박씨가 거짓 보고를 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진실은 박채서씨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인들의 評 “(박채서는) 위험한 인물” “영웅이 되면 안 되는 사람”
 
  《월간조선》은 박채서씨와 친분이 있었던 법조인 A씨에게 박채서씨가 어떤 인물인지 물어봤다. A씨는 박씨를 “복잡한 인물이면서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A씨는 “휴전선을 비롯해 동·서해안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북한으로 넘기고, 탈북자 등 우리 측 정보도 (북한에) 넘겨준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A씨의 이야기다.
 
  “처음에 박채서씨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정의롭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박씨는 북한에 그런 자료들을 다 넘겼음에도 스스로를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봤다. 시간이 흐르면서 박씨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A씨는 “영화 〈공작〉에 관련된 실제 인물들이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하기도 했다”며 “‘(영화가) 사실과 다른데 박씨 혼자만 영웅처럼 나온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박씨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A씨에게 ‘박채서가 어떤 일을 또 시작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고도 한다. A씨는 “박씨는 위험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만 알아 달라”고 덧붙였다.
 
  박채서씨를 면밀히 관찰해 온 B씨도 “박씨의 행적엔 흐릿한 부분이 있다”며 “영웅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B씨는 “공작원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 존재가 노출되면 그 즉시 자신을 숨기는 게 그 세계의 원칙이다. 때론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박채서씨가 언론이나 영화를 통해 자신의 행적을 밝히는 건 적절치 못하다고 B씨는 지적했다.
 
  이처럼 A씨와 B씨는 대체로 박씨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B씨는 “안기부 보고서에 김정일과 만났다고 돼 있는 걸로 봐선 박씨가 그렇게 보고를 했기 때문인데, 이제 와 아니라고 하는 걸 봐선 그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 명확해진다”고 주장했다. B씨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탈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故) 이연길씨, 류경호텔 여종업원 탈북에 기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국익(國益)과 애국심을 기반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박채서씨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공작원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흑금성’ 박채서는 누구인가

 
1998년 3월 19일 아자 커뮤니케이션 대표 박기영씨가 취재진에게 ‘흑금성’으로 지목된 이 회사 전무 박채서씨의 정체를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박기영씨는 흑금성 박채서씨와는 이웃사촌이었다고 한다. 사진=조선DB
  박채서씨의 생애와 그가 북한과 벌인 사업,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일련의 ‘공작’에 대해 알아보자. 박채서씨는 충북 청주고 나와 3사관학교(14기)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 육군대학 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박채서씨는 육대를 3등으로 졸업했다. 그후 국군정보사령부에 배치, 1990년부터 서울 대방동 소재 한미합동 902정보대의 A-23팀장으로 발령 받았다. 대방역 앞 미8군 공병대 창고 건물에 위치한 902정보대는 한국 측 A-23팀을 포함한 2개의 A팀과 다수의 C팀(전선공작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23팀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미국 CIA와 함께 대북 우회침투 공작을 하는 비밀 조직이었다.
 
  박씨는 자신이 직접 북한에 선을 구축,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기존의 우회침투 방식에서 직접침투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 방편 중 하나로 선택한 게 ‘편승공작’이다. 대북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 사업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북한에 위장 침투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광고업을 하던 박기영씨다. 박기영씨는 박채서씨가 살던 서울 도곡동 대림아파트의 이웃사촌이었다고 한다. 박채서씨는 광고사업이 ‘편승공작’에 더욱 용이할 것이란 판단을 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1995년 12월, 두 사람은 북한 전문 광고기획사 ‘아자 커뮤니케이션’(이하 ‘아자’)을 설립했다. 박채서씨는 이 회사의 전무를 맡았다. 두 사람의 대북 광고 사업에 ‘물주’ 역할을 했던 사람이 정진석 현 자유한국당 의원의 형 정진호씨로 정씨는 당시 미진아이디(주)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자’ 지분 관계도 정씨가 70%, 두 박씨가 각각 15%를 갖기로 합의했다. 그때 박씨는 이미 소령으로 전역한 상태였고 그해 3월, 국가안전기획부 서기관급 국가 공작원에 정식 채용돼 활동 중이었다.
 
 
  박기영과 의기투합해 세운 ‘아자 커뮤니케이션’
 
  1997년 2월 ‘아자’는 중국 베이징(北京) 캠핀스키 호텔에서 북한의 외화벌이 회사인 ‘금강산 국제관광총회사’와 북한 내 광고 제작에 전격 합의, 업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이 회사가 통일원(현 통일부)에 제출한 ‘방북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박씨를 비롯해 박기영 사장 사진감독 변모씨 등 세 명이 북한에 들어가 금강산 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 등의 영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외국의 주요 인사를 위한 서재동 초대소와 금강산호텔 등에 묵으며 백두산 금강산 등지를 둘러봤다고 한다.
 
  박채서・박기영 두 사람이 북한을 상대로 벌인 광고 사업의 계획은 대강 이러했다. 우선 일단 북한 내의 명소를 배경으로 한국 기업의 제품을 홍보하는 광고를 촬영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공항과 주요 도시에 입간판을 설치하고 남북한 연예인들이 공동 출연하는 CF 촬영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가고자 했다. 박기영 사장은 광고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금강산 국제관광총회사 직원 5명을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내 일주일에 걸쳐 전반적인 개념을 공부시켰다.
 
  흑금성 문건이 공개됐을 당시, 박기영 사장은 모 언론에 “박 전무가 북한 내 고위층을 접촉하는 등 사실상 이번 사업을 성사시켰다”며 “박 전무는 대외적으로 우리 회사 전무 직함을 갖고 있지만 부인들끼리 친분이 있어 대가 없이 도와주었을 뿐 사실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대북(對北) 로비스트”라고 소개했다. 박 사장은 그러나 박채서씨의 구체적인 활동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답했다.
 
  ‘아자’의 북한 광고 사업을 주선한 북측 관리는 김영수・리철이었다. 이 중 박채서와 동갑인 리철은 김일성대 경제학부 수석 졸업자로, 북한의 대외경제위원회 심의처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집안도 좋아 그의 부친은 인민군 상장 출신이고, 장인 리길송은 양강도 당 비서, 부인은 《로동신문》 기자였다. 김영수는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었고, 우리의 방첩(防諜)에 해당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김당씨가 쓴 《공작》에는 박채서씨가 북한 관리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남조선 군부 부적응자’ 행세까지 했다고 적혀 있다. 이 역시 북측의 신뢰를 얻기 위한 고도의 공작이었던 셈이다.
 
 
 
‘아자 커뮤니케이션’, MBC와 삼성을 대북 사업에 끌어들여

 
  박채서씨는 ‘아자’를 기반으로 원대한 사업 계획을 입안했다. 삼성 제품을 북한에 광고하고, MBC가 대북 광고를 전담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계약을 북한과 추진한 것이다. 1997년 5월 26일 ‘아자’와 MBC는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당시 통일원은 ‘아자’의 방북 허가는 승인했지만, MBC에 대해선 ‘언론사 간 과당 경쟁이 우려된다’며 승인을 거절했다.
 
  이런 가운데 북측에 지불하기로 한 첫 번째 중도금 날짜가 도래했다. 총 60만 달러였는데 아자와 MBC의 계약대로라면 두 회사는 이 돈의 절반씩을 부담해야 했다. MBC의 방북이 불투명해지면서 정진호씨가 60만 달러를 직접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순간 정씨는 ‘이 많은 현찰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정씨의 걱정과 달리 김포공항 검색 요원은 돈뭉치를 잔뜩 든 가방을 소지한 정씨를 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이미 박씨가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정씨를 통해 돈은 북측에 무사히 전달됐다고 한다.
 
  그해 10월 통일부는 돌연 MBC의 방북(訪北)을 허가했다. ‘아자’ 측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MBC를 통해 북측에 전달하기 위해 황급히 허가를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MBC 관계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했다. MBC는 방북해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지역을 답사한 게 전부였다고 한다. ‘아자’와 MBC의 관계는 다소 삐걱거렸다. MBC는 대금의 절반을 북한에 지불하기로 한 약속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1998년 1월 ‘아자’는 MBC에 계약 파기를 선언하고 타 방송사와 계약을 맺겠다고 통보했다. 그제서야 MBC는 55만 달러를 출연하며 계약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채서씨는 삼성과의 사업에 가장 공을 들였다. 만약 삼성이 아자의 첫 번째 광고주가 되면 ‘아자’의 사업은 날개를 다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은 유명 영화배우 안성기씨를 모델로 내세워 북한에서 삼성전자의 휴대폰 브랜드인 애니콜 광고를 촬영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3월 12일 통일부는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 일행의 방북을 허가했다. 그렇게 사업이 진행되던 중 《한겨레》 보도가 나오고, ‘아자’의 사업은 사실상 좌초됐다.
 
 
  15대 대선 개입… 이회창·김대중·이인제 캠프 접촉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캠프는 박채서씨로부터 北風 관련 정보를 은밀히 받아보았다고 한다. 1997년 12월 19일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대통령 당선 환영 행사장에 김종필, 박태준씨와 함께 들어서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사진=조선DB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 흑금성이 개입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당시 김정일이 ‘김대중이 아닌 이인제가 당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박채서씨는 이러한 동향을 북한 보위부를 통해 확인한 뒤 안기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안병수 북한 조평통 부위원장은 베이징에서 이인제씨의 동서인 조철호 《동양일보》 사장을 만났다고 앞서 안기부 보고서를 인용해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조철호씨는 베이징에서 리철을 만난 적은 있으나 일반적인 동향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이인제 후보 지원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박채서씨는 당시 검찰에서 “1997년 11월 이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함에 따라 무산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현재로선 확인이 어렵다.
 
  박채서씨는 이인제 캠프뿐 아니라, 김대중·이회창 후보 측과도 선이 닿아 있었다. 이는 공작원의 속성이기도 하다. 유력 후보 측 모두와 선이 닿아야 차후에도 자신의 신분과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김 후보 측 라인은 정동영·천용택 의원이었다. 그러나 정·천 두 의원은 박채서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김대중 후보 측의 성향상 공작원 신분인 박씨에 대한 거부감 때문으로 추정된다. 박채서씨에 대한 김대중 후보 측의 경계는 곧이어 180도로 바뀐다.
 
 
  ‘오익제 월북’으로 궁지 몰린 DJ, 박채서에게 ‘SOS’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고문이었던 오익제(좌측 두 번째)의 월북은 김대중 후보 측을 긴장시켰다. 이때 흑금성은 관련 정보를 국민회의 측에 넘겨줬다고 한다. 사진=MBC 뉴스 캡처
  당시 김 후보 측은 오익제 천도교 교령의 월북(越北)으로 이른바 ‘색깔론’으로 정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월북 직전까지 오익제는 새정치국민회의 고문으로 등재돼 있었다.
 
  오씨가 월북한 지 3개월 뒤인 1997년 11월, 오익제는 김대중 후보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봉투엔 ‘평양우체국’이라고 소인(銷印)이 찍혀 있었다. 편지에서 오익제는 “선생님(김대중)께서도 이북의 영도자와 합의하여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소신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권고하고 싶은 것은 김정일 영도자님께서 1997년 8월 4일에 발표하신 로작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를 어떤 일이 있어도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후광(김대중의 호) 선생님이 집권하시면 금세기 안에 통일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도 했다.
 
  김당씨와 박채서씨는 ‘오익제 편지’를 북한의 김대중 ‘낙선 공작’의 일환으로 보았다. 실제로 북한이 자신들에게 유화적인 김대중 세력이 야당으로 남아 보수 여당을 견제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는 분석이 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면 기업과 정당이 북한 편으로 돌아 북측 입장에선 선택지가 줄어든다고 본 것이다.
 
  궁지에 몰린 김대중 후보는, 북한 상층부와 선이 닿는 박채서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김당씨의 책 《공작》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대통령이 되려면 북풍을 막아야 가능하다. 그러니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박 선생이 도와달라”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때 공작원으로서 박채서씨의 능력이 발휘된다.
 
  박씨는 1997년 8월 20일 평양에서 오익제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안기부도 박씨의 보고를 통해 오익제가 월북해 평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안기부 보고와는 별도로 박채서씨는 정동영 의원에게 두 시간에 걸쳐 남북한 정세 및 북한의 대선 개입 의도, 특히 오익제 입북을 통한 ‘김대중 죽이기’ 공작이 이뤄질 수 있다고 귀띔했다. 나중에 새정치국민회의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북풍대책팀’을 꾸리게 된다.
 
  권영해 안기부장을 비롯한 안기부 내 대북 강경파들은 오익제 월북을 계기로 그의 월북 경위와 편지 등에 관한 조사에 착수한다. 안기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이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이른바 ‘북풍 공작’으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다. 권영해 부장을 비롯해 고성진 안기부 대공 수사실장 등은 구속되고,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문패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박채서씨는 김대중 당선에 크게 기여한 셈이 됐다. 박씨가 북한 관련 정보를 새정치국민회의 측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김당씨도 당시 《시사저널》에 이러한 취지를 담은 기사를 썼다. 정동영 의원은 아예 박씨를 찾아와 “대통령(김대중)을 만나 사실대로 다 전했다. 대통령께서 흑금성과 박채서를 별개의 인물로 오해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정 의원은 “우리는 한마음이고 오직 한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도 전했다.
 
 
  육군 소장 간첩 사건에 얽힌 秘話
 
  그후 일반인들의 뇌리에서 잊힌 박채서씨는 12년 만인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또다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이른바 현역 육군 소장 간첩 사건이다. 육군 소장 C씨가 박채서씨에게 야전교범을 비롯한 작전계획(작계) 등 군 보안자료를 넘겼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자료를 북한에 넘겼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는 이러한 단서를 잡고 C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박채서씨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기무사 관계자로부터 이 사건 전반에 대해 들었다는 D씨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무사 관계자는 D씨에게 “박채서는 간첩이 확실하다”고 강조하며 C씨 검거에 얽힌 비화를 들려줬다고 한다. 이어지는 D씨의 증언이다.
 
  “기무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C씨가 박채서씨와 친분이 있다는 걸 파악했다고 합니다. 특히 C씨는 사단장 시절 박채서씨를 만나러 영외(營外)로 나갈 때 일종의 ‘회피기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통상 사단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단 기무부대가 파악하는데, 이를 따돌리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혐의를 잡고 C씨를 구속하는 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증거 확보를 한 뒤 재빨리 C씨의 신병을 확보한 거죠. 기무사 요원들이 그를 체포할 때 C씨는 회의 중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수갑을 채워 연행했다고 하더군요.”
 
  C씨는 박씨의 3사관학교 선배다. C씨가 전격적으로 구속됐을 때, 현역 장성(將星) 간첩 혐의도 충격이었지만 군내에서는 ‘3사 출신에 전도가 유망한 한 장성을 과도하게 몰아붙인 것 아니냐’는 일종의 음모론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C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군단 참모장(준장), 육군 ○사단장(소장)을 지낸 뒤 이명박 정부에서 상급부대 부(副)지휘관으로 영전한 상태였다. 별다른 사고만 없다면, C씨는 비육사 출신으로 중장 진급이 유력했다는 게 군내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D씨는 “C씨가 박씨를 친동생처럼 아껴 별다른 경계 없이 야전교범을 건넸을 수도 있다”면서 “문제는 그 상대가 박씨였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박채서씨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6년을 선고 받고 복역한 뒤 2016년 5월 만기 출소했고, C씨는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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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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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독자    (2018-08-23) 찬성 : 49   반대 : 28
흥미진진합니다. 더 좋은 기사 많이 써주세요.

안기부와 기무사 등의 주장이 일방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출처로썬 신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Young    (2018-08-22) 찬성 : 17   반대 : 25
안기부와 보안사의 이야기를 신뢰 못한 이유 온 국민이 알고 있잖아! 그들이 너무나 많이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어 내고 아무러 책임도 지지 않았거든. 조선일보는 안기부 발표 받아 쓰기에 바빴잖아. 대표적인 사건이 이유성 간첩 사건 이잖아! 그런데 이런 글을 어떻게 믿어? 한심한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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