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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국군의 산실’ 군사영어학교가 있던 감리교신학대학교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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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陸士)의 전신(前身)인 군사영어학교, 1945년 12월~1946년 2월 감신대 자리에 있다가 태릉으로 이전
⊙ 통역장교 양성 명분으로 건군의 주역들 길러…, 1960년대 후반까지 육군참모총장 13명, 합참의장 7명, 대장 8명 나와
⊙ 국무총리 3명, 국회의장 2명 배출, 이후락·김계원도 군사영어학교 출신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는 감리교신학대학교. 건군의 주역들을 길러낸 군사영어학교가 있던 곳이다.
  10월 초 화창한 가을날 찾아간 서울 천연동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정은 한가했다. 추석이라고 해도 달리 갈 곳이 없을 것 같은 외국인 학생들만 간간이 눈에 보였다. 게시판에는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대자보들이 붙어 있었다. 추석 연휴의 초입에 이곳을 찾아간 것은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의 산실(産室)’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1945년 12월 5일부터 이듬해 2월 27일까지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가 있었다. 군사영어학교는 초창기 대한민국 국군, 더 나아가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정계·관계의 요인들을 수없이 배출해 냈다.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가 6000달러를 들여 5000평의 부지와 한옥 몇 채를 구입, 수리하고 협성신학교를 세운 것이 1911년 9월의 일이었다. 1931년에는 협성여자신학교를 합병, 감리교신학교가 됐다. 감리교신학교는 1940년 10월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됐다가 1946년 1월 다시 문을 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감리교신학교가 문을 열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이 대학 건물을 빌려 쓴 셈이다.
 
 
  이응준
 
  미군정(美軍政)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다음 날 쉬크 준장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당초 미 군정청은 1946년까지 4만5000명 규모의 육군과 공군, 5000명 규모의 해군 및 해양경비대로 구성되는 ‘국방군’을 창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점령지 문제를 관할하고 있던 국무부·육군부·해군부 조정위원회(SWNCC・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는 이 계획을 보류시켰다. 그러자 미 군정청은 ‘대나무(Bammboo)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2만5000명 규모의 경찰예비대(Constabulary)를 창설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경찰예비대는 ‘경찰 지원 및 국가비상시 국토방위’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국방군’이건, 경찰예비대건 군사조직을 만들려면 장교가 필요했다. 장교를 키우려면 사관학교부터 만들어야 했다. ‘대나무계획’의 책임자이던 리머 아고 대령은 이를 위해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인 이응준(李應俊)을 영입했다. 이응준은 대한제국 시절 육군무관학교 출신이다. 1909년 무관학교가 문을 닫자 당시 무관학교 재학생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됐다. 이들이 일본 육사에 진학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대한제국이 망했다. 망국의 사관생도들은 일본 군적(軍籍)에 편입됐고,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응준의 동기생으로는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라간 홍사익 장군, 신태영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항만 수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이응준은 해방 직후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영어 잘해 출세한 원용덕
 
군사영어학교 생도들을 선발했던 이응준(육군참모총장 역임)과 원용덕(헌병총사령관 역임).
  태평양전쟁 이전인 1930년대부터 미국은 일본의 적성국(敵性國)이었다. 일본 육사는 물론이고 일본 대학에서도 영어는 환영받지 못하는 언어였다. 당연히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장교 경험자가 많지 않았다. 영어를 할 줄 알면 금방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용덕(元容德)이었다. 그는 군의관으로 만주군 중좌(중령)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군·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 무리의 청년들을 이끌고 월남(越南)했다. 38선을 경비하고 있던 미군 병사는 원용덕 일행을 저지한 후 자기 상관과 통화하게 했다. 원용덕은 유창한 영어로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그와 통화를 한 미군 대위는 다음 날 원용덕을 찾아왔다. 그는 “고급 장교 출신으로 당신처럼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은 처음 본다”면서 “지금 군정청에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으니 서울에 가는 대로 군정청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원용덕을 만난 아고 대령은 “당신과 같은 영어 실력자와 건군 작업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원용덕은 이응준과 함께 건군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원용덕이 1950년대에 군부의 실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신임도 신임이지만, 이처럼 창군 요원들의 선발에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초 미군은 군사영어학교 정원을 60명으로 정하고,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자를 각각 20명씩 선발하려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군이 국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데다가 미 군정청의 통치권을 부인하고 있던 참이었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광복군 출신을 추천하기를 거부했다. 소수의 중국군 출신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왔다.
 
  당시 국내에는 출신별로 갖가지 사설 군사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단체에 장교 및 준사관(準士官) 출신자들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응준·원용덕이 입회한 가운데 아고 대령이 이들을 심사했다. 시험은 간단했다. 응시자들이 작성한 영문·한문 이력서를 바탕으로 경력을 살펴본 후, 간단한 영어 회화 테스트를 했다.
 
  학생들은 입학 전 나이, 경력, 계급이 각양각색이었다. 50대의 이응준처럼 일본군 대좌까지 올랐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21살의 장창국(張昌國·합참의장 역임)처럼 일본 육사 생도 출신도 있었다. 20대 초의 하사관·학병 출신들도 있었다.
 
  이들이 입교한 학교가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였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군사언어학교’였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곧 ‘영어’였기에 군사영어학교로 번역됐다. 이 학교의 공식적인 목표는 이름 그대로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해독하는,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 군정청이 단순히 통역장교를 길러내려 이 학교를 연 것은 아니었다. 이 학교에 입교하는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영어학교는 사실상의 육군사관학교였다. 교장은 미군 리스 소령, 부교장은 원용덕이 맡았다.
 
  선발된 학생들은 군정청 회의실에서 사흘 동안 예비교육을 받았다. 감리교신학교가 수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영어학교 개교식은 1945년 12월 5일 열렸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과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 등이 축사를 했다.
 
 
  군사영어학교에도 번진 좌우갈등
 
  영어 실력에 따라 학생들은 A·B· C·D반으로 나뉘어 교육을 받았다. 매일 시험을 보아 성적에 따라 반을 바꾸었다. 한국사·참모학·소총분해·자동차 운전 등도 가르쳤다.
 
  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모스크바 3상 회의 소식이 전해졌다. 신탁통치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국민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갈등을 빚었다. 그 여파는 군사영어학교로도 밀려왔다. 좌익 학생들은 ‘반탁(反託)은 반역’이라는 표어를 학교 곳곳에 붙여 놓았다. 좌익 학생들은 교문 앞에 자기 편 사람들을 배치해 반탁파(反託派) 학생들의 등교를 가로막았다. 당시 학생들은 집에서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김종오(金鍾五,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역임), 민기식(閔幾植, 육군참모총장 역임) 등 반탁파 학생들은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권용준 교수가 강의 중 “지금 우리는 좌우 사상의 혼란기에 있다. 자칫하면 공산주의에 당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가 좌익 학생들의 집단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학교 당국은 권 교수를 해임하려 했지만, 원용덕이 “교수에게도 ‘사상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무마했다.
 
  군사영어학교 내에서 좌익세력이 발호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 군정이 ‘사상의 자유’와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천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냉전(冷戰)이 시작되기 전이라 미 군정, 아니 미국 자체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때문에 군사영어학교는 물론 초기 육군사관학교에는 좌익세력이 자유롭게 침투할 수 있었다. 일본 육사 출신 김종석·조병건·오일균, 만주군 출신 최남근·이병주·이상진, 학병 출신 하재팔·최상빈 등이 군사영어학교 내 좌익세력의 핵심이었다. 이들은 후일 여순반란사건 이후 숙군(肅軍) 때 처형되었다.
 
 
  입학식은 있었지만 졸업식은 없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4일 창설됐다.
  군사영어학교는 입학식은 있었지만 졸업식이 없었다. 성적에 따라 A반부터 10차례에 걸쳐 차례로 졸업을 시켰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16일 장창국·민기식·박병권(국방부장관 역임) 등이 처음으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임관했다.
 
  같은 날 일본군 소좌 출신인 채병덕(蔡秉德), 대위 출신인 이형근(李亨根, 육군참모총장·연합참모본부 총장 역임)은 대위로 임관했다. 이형근은 ‘군번 1번’으로 유명하다. 그가 ‘군번 1번’이 된 것은 서류 접수순으로 군번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은 불만스러워했고, 두 사람 사이가 불편해졌다고 한다.
 
  정일권(丁一權, 육군참모총장 역임), 유재흥(劉載興, 1군사령관·국방부장관 역임), 최경록(崔慶祿, 육군참모총장·연합참모본부 총장 역임) 등도 같은 날 참위(소위)로 특별임관했다. 그 밖에 창군 작업에 참여했던 이응준과 원용덕도 나중에 군사영어학교 출신들과 함께 임관했다. 이응준은 대령, 원용덕은 소령 계급장을 달았다. 이들은 실제로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분류된다. 이들이 임관하기 이틀 전인 1946년 1월 14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됐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태릉에 있던 제1연대의 서쪽 병사(兵舍)로 옮아갔다. 일제말에는 지원병 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이후 수많은 육군 장교들을 배출한 육군사관학교의 태릉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문을 닫았다. 같은 날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Korea Constabulary Training Camp)가 문을 열었다. 직역하면 ‘조선경비대훈련소’쯤 되겠지만, 교장 이형근 소령 등은 이 학교를 육군사관학교라고 불렀다. 경비사관학교 1기가 곧 육군사관학교 1기다. 정식으로 육군사관학교가 된 것은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이 창설되면서부터였다. 육사 7기생들은 미 군정하에서 경비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가 건국 후인 1948년 11월 11일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을 움직인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
 
1953년 10월 5군단 청설식에 참석한 야전군단장들. 왼쪽부터 이형근 1군단장, 정일권 2군단장, 강문봉 3군단장, 최영희 5군단장. 모두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임관자는 110명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이 12명, 학병 출신이 72명, 지원병 출신이 6명, 만주군 출신이 18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교육기간은 짧았지만, 이들은 이후 국군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선두 주자들은 대령~소장으로 6·25를 맞았다. 채병덕은 육군 소장으로 육군참모총장이었고, 장창국(대령)은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도영(대령)은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다. 백선엽·이형근·김종오 등은 대령으로 사단장이었다. 이들은 개전 초기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면서도 대한민국을 지켜 냈다. 백선엽은 다부동전투에서, 김종오는 백마고지전투에서, 장도영과 송요찬은 용문산전투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다. 김백일(金白一)은 1군단장으로 38선을 돌파했고, 아몬드 장군에게 호소해 흥남철수작전을 성사시켰다.
 
  고생한 만큼 이들은 보상을 받았다. 임관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68명이 별을 달았다. 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은 모두 8명이다. 정일권·백선엽(白善燁, 육군참모총장·연합참모본부 총장 역임) ·이형근·장창국·민기식·김종오·김계원(金桂元)·김용배(金容培, 육군참모총장 역임) 등이 그들이다. 이 중 백선엽·정일권·이형근은 ‘3대장’이라고 불리면서 1950년대 중·후반 육군을 주름잡았다.
 
  육군참모총장이 13명(이응준·채병덕·정일권·백선엽·이형근·송요찬·최영희·최경록·장도영·김종오·민기식·김용배·김계원), 합참의장(연합참모본부 총장)이 7명(이형근·정일권·유재흥·백선엽·최영희·김종오·장창국)이나 나왔다. 육군 중장은 20명이 나왔다. 1960년대 후반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직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은 정계·관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정일권은 예편 후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5·16 당시 육사 교장으로 혁명에 반대해 육군 중장으로 옷을 벗은 강영훈(姜英勳)은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4·19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宋堯讚)은 5·16군사정부에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내각수반을 지냈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정래혁(丁來赫)은 박정희 정권 시절 상공부·국방부 장관을 거쳐 전두환 정권 때 국회의장을 지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계원은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10·26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후락(李厚洛), 2군 사령관 재직 시 김창룡 암살을 조종했던 강문봉(姜文奉), 5·16 당시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李翰林), 이승만 정권 시절 상공부 장관으로 업적을 남긴 김일환(金一煥) 등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강영훈과 이형근의 고민
 
  미 군정하에서 ‘국방군’도 아니고 ‘경찰예비대’로 출발한 국군의 시작은 초라했다. 초기에는 경찰모(鏡察帽)의 귀단추를 계급장으로 달아 경찰보다도 그 존재가 미미했다.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건군의 주역이 되면서 두고두고 정통성 시비도 일었다. 하지만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일본군에 가고 국군에 몸담은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은 만주 건국대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 그들에게 최남선은 이렇게 말했다.
 
  “민족의 실력배양 중 가장 중요한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무력을 기를 수 있는 이 기회를 우리는 잘 활용해야 한다. 출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희생된 전우의 몫까지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해 주리라 믿는다.”
 
  일본 육사(56기) 출신인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은 포병 중대장으로 중국전선에서 싸웠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근신(勤愼)하는 마음으로 대전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1946년 1월 미 군정에서 그를 호출했다. 참페니 대령과 아고 대령은 그에게 창군 작업에 참여해 달라고 청했다. 이형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몸으로 근신도 하고, 부모님을 모시면서 그동안 못다 한 효도도 좀 해야겠다”면서 사양했다. 하지만 참페니 대령과 아고 대령은 “일본군으로 복무했으면서 자기 나라 군대를 사양하느냐”면서 이형근을 설득했다. 이응준의 보좌관이 된 그는 이응준의 집에서 숙식을 하다가 결국 이응준의 사위가 됐다.
 
  강영훈이나 이형근의 고민은 군사영어학교 출신 대부분의 고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젊어서 한때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몸담는 바람에 이름에 흠을 남겼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들이 기꺼이 ‘조국’이라고 부를 나라는 없었다는 사실은 흔히 망각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이 나라를 지켜냈고, 군복을 벗은 후에는 개발연대(開發年代)를 이끌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젊은 그들의 고민과 혼란, 망국민의 설움을 겪어 보지 못한 후인(後人)들이 ‘나중 태어난 자의 행운’을 만끽하면서 오늘의 잣대로 그들을 단죄(斷罪)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일본공사관이 있던 동명여중
 
감리교신학대학 앞에 있는 동명여자중학교. 1880~1882년 주한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감리교신학대학 앞에는 동명여자중학교가 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개설한 첫 번째 주한일본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1880년 4월 이곳에 일본공사관을 마련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영조 때부터 경기중군영(中軍營)이 있던 곳이다. 경기중군영 내에는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천연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여기서 나왔다. 천연정은 서지(西池·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라는 연못을 끼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은 흔히 청수관(淸水館)이라고 불렸다.
 
  정식으로 공사관을 개설하기 전부터 강화도조약 후 서울에 들어오는 일본 사신들은 이곳에 묵었다. 이곳에 있던 일본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난민(亂民)들의 방화로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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