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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현실론”

글 : 장원재  (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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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자로 세브란스·이승만 전기 저술… 수학으로 이상(李箱)의 시와 마네의 그림 풀이하기도
⊙ 이승만과 체코의 마사리크, 아일랜드의 데 벌레라 비교하는 책 펴내
⊙ “외국의 비슷한 사례와 비교하면, 이승만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길이 열린다고 봤다”
⊙ “늦게 태어나 정답을 아는 자가 윗세대를 향해 ‘왜 그 당시에는 그것밖에 못 했냐?’고 하는 것은 오만한 폭거”

金學䖐
1946년생. 서울대 농업경제학과 졸업, 미국 피츠버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박사 /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경제연구소 소장, 한국은행 자문위원 역임 / 저서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이승만과 마사리크》 《이승만과 데 벌레라》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 《화폐와 이자》 《화폐와 시간》 《돈의 역사》 《화폐와 금융》 《이상의 시: 괴델의 수》 《한국의 근대경제학 1915~1956》 《마네의 그림 풍슐레의 기하학》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사진=조준우
  김학은(·76) 연세대 명예교수는 학문의 경계를 허무는 개척자다. 본분은 경제학자다. 《IMF 경제위기의 본질과 전망》 《화폐와 금융-불확실성의 경제학》 등의 저서는 경제학도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2008년에 펴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그의 생애와 시대》는 그가 역사학으로 외연(外延)을 넓힌 결과물이다. 미국 기독교 선교 자선가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의 전기(傳記). 연세(延世)대학교 교명(校名) 중의 ‘세’는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김학은 교수는 미공개 1차 자료를 수집하고 탐구했다. 발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 명저(名著)다. 2013년에 간행한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대한민국과 체코 건국 대통령의 인물과 사상을 비교한 책이다. 김학은 교수는 이승만과 아일랜드 초대 대통령 데 벌레라를 비교한 책도 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근 700년을 영국 식민지로 살았던 나라가 독립을 쟁취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살폈다. 2014년에는 《이상(李箱)의 시: 괴델의 수》라는 책을 써 문학과 수학의 결합을 시도했고, 2022년에는 《마네의 그림 풍슐레의 기하학》을 펴 미술의 바다로 독자들을 안내했다.
 
 
  1950년대 인천 풍경
 
김학은 교수의 저서들. 정치·경제·문학·미술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 경제학자가 예술에 관한 책을 낸 이유가 있을까요.
 
  “15년 전까지만 해도 이상이라든가 마네 등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한데 문득 이 두 책이 경제학 연구의 연장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무슨 뜻인지요.
 
  “경제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뭘까. 자원의 배분, 화폐 등 이런 것을 연구하다가 경제학은 인류를 자유롭게 만드는 학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자유의 상징이 예술이라고 봤습니다.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하는 행위니까요.”
 
  ― 어렸을 때도 관심이 없으셨나요.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어렸을 때 독특한 음악 체험을 했었습니다. 브라스 밴드에서 트롬본을 연주했습니다.”
 
  인천 신흥국민학교 시절의 일이다. 1950년대 초반, 인천에는 미군 항만사령부가 있었다. 수도권으로 가는 모든 원조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항만사령부는 월미도 전체를 축항(築港)하여 항구로, 물류(物流)창고로, 기지로 사용했다.
 
  “미군부대 주변에선 세상 모든 물건이 다 들락날락했어요. 예를 들면,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엔 동물원도 있었습니다.”
 
  ― 학교 안에요?
 
  “네. 원숭이도 갖다 놓고, 여우도 있었고, 뭐 많은 동물이 있었습니다.”
 

  ― 그 시절에 그게 가능했나요?
 
  “미군들은 애완용으로 원숭이도 기르고 개도 기르고 그랬는데, 그러다 본국으로 가게 되면 두고 가는 겁니다. 동물들을 위한 조그마한 묘지도 학교 안에 있었죠.”
 
  ― 그럼 악기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왔겠네요.
 
  “그렇죠. 여학생들은 ‘리듬밴드’라고, 아코디언 연주자로 팀을 꾸렸고, 남학생들은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죠.”
 
  이것이 1950년대 초 인천의 풍경이다.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발소를 경영하셨어요. 여러 부류의 손님이 많았습니다.”
 
  당대 이발소는 근대화의 창(窓)이었다. 사람들은 ‘서양식 의복의 완성’이 이발이라고 생각했다. 각종 페달이 달려 있고 뒤로 젖혀지는 ‘이발 의자’는 ‘신기한 첨단기기’였다.
 
  “아버님이 1911년생이신데, ‘남성들의 공간’ 이발소는 온갖 정보가 오가는 동네 사랑방이었습니다. 그냥 오가다 들러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 거죠. 바둑도 두고 정치 얘기도 하고…. 그런데 아버님이 화투는 못 치게 했어요. 교회 장로님이셨거든요. 술, 담배도 안 하시고.”
 
 
  록펠러보다 돈을 더 많이 번 세브란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2008)
  ―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 책은 어떻게 쓰시게 된 겁니까? 경제학과는 완전히 분야가 다릅니다.
 
  “제가 피츠버그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조교수로 갔는데, 학교 앞에 세브란스홀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 있어요. 신임 교수 환영회를 거기서 했죠. 근처에 세브란스 쇼핑센터도 있고. 알고 보니, 그 세브란스가 이 세브란스였습니다.”
 
  김학은 교수는 귀국 후 연세대 교수로 부임했다. 1985년 연세대학교 설립 100주년 때 학교에서 창학(創學)에 공이 있는 분들의 후손을 초청했다. 그런데 ‘세브란스’는 없었다. 절손(絶孫)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책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당시 박영식 총장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책을 써보라고 했다.
 
  ― 세브란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을 창업한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죠. 재무관리 책임자였습니다. 회계 담당 이사를 한 30년간 했는데, 돈을 록펠러보다 더 벌었어요. 그러고는 은퇴하고 모든 유산을 자선사업에 기부했죠.”
 
  세브란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기독교 의료선교’를 자선의 큰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조선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걸까?
 
  “에이비슨 박사와 뉴욕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입니다. 에이비슨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이과대학 교수인데, 조선의 의료 환경이 매우 안 좋다는 얘기를 듣고 이 땅에 옵니다. 사표를 내고요. 1800년대 후반입니다. 기독교적 박애정신(博愛精神)의 발로였죠. 와서 보니까, 사정이 생각보다 더 열악해요. 본인도 온갖 병에 다 걸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고요. 이러다 안식년(安息年)을 맞아 미국에 갔는데 세브란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이 세브란스 병원의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세브란스 병원은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의과대학이자 병원이다. 세브란스 재단은 2023년 현재까지도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고 있다. ‘세브란스’는 설립 초기부터 ‘현지인 의료인의 양성’을 목표로 내걸고,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를 길러낸 한국인의 생명선(生命線)이자 근대(近代)의 기지(基地)다.
 
 
  가망 없는 조국의 독립을 믿은 마사리크와 이승만
 
김학은 교수의 이승만 관련 저서들.
  ‘근대’를 논하자면 한국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인물이 있다. 최근 들어 김학은 교수가 연구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하는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이다.
 
  ― 이승만 대통령과 외국 지도자를 비교해서 책을 쓴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직접 겪은 국내 지도자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심리적 거리도 가깝고, 주정적(主情的) 관점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이러한 태도는 위인의 참모습을 가리고 비틀죠. 그래서 ‘비교’하게 된 겁니다. 외국의 비슷한 사례와 비교하면, 이승만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조망(眺望)하는 길이 열린다고 봤습니다.”
 
  ―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사리크(T. G. Masaryk·1850~1937년)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외교독립론입니다. 독립 수단을 외교 독립으로 잡고, 외교로 독립을 성취했죠. 두 분 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두 분이 미국에서 한 번 만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학은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과 마사리크가 위대한 점은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사실에 있다. 두 사람 모두 사형 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으며, 폭력과 무력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였다는 점도 같다. 부인도 모두 외국인이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었다는 점마저 닮았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외교독립론을 우선적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이다.
 
 
 
외교로 독립을 쟁취한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의 아버지 토마시 마사리크.
  “건국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먼저지만, 시대순으로 보면 이 박사의 외교독립론이 먼저 나왔습니다. 마사리크가 이승만을 따랐는데, 실천은 마사리크가 먼저 한 거죠.”
 
  ― 선생님은 이 책에서 ‘외교독립론이 가장 현실적인 독립론이었다. 한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최대치의 현실론이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전쟁이라는 게 결국 돈인데, 당시 조선이 일본과 맞설 만한 전비(戰費)를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경제력의 차이가 엄청났으니까요. 그다음에 병력 동원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은 한때 100만 병력을 전장에 내보냈습니다. 우리에게 100만 명을 동원할 능력이 있었나요? 그러니까 전쟁을 통해서는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가 없다. 이승만은 이런 결론을 내린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일본은 무적(無敵)이었다. 러시아와 청(淸)나라를 이겼고, 칭다오(靑島)에 쳐들어가서 독일도 이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동남아시아를 침략해 프랑스를 이겼고, 싱가포르 함락 시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런 일본을 상대로,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노선이 외교독립론이었다는 이야기다.
 
  “또 한 가지, 이승만은 체코슬로바키아가 군사력으로 독립한 게 아니라 외교로 독립을 쟁취한 좋은 예를 봤단 말이죠. 그러므로 외교로 독립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세계의 다른 나라로부터 공감을 얻는 일입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미국에 주목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은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어 식민지 해방에 소극적이었거든요.”
 
 
  이승만이 미국에 주목한 이유
 
  ― 현대의 연구자들이 조금 착각하는 부분이랄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할 당시의 미국은 지금과 같은 압도적인 강대국, 패권국(覇權國)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남(雩南)은 미국에 주목했던 겁니까.
 
  “참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국력이나 국제적 영향력은 유럽의 중위권 정도? 제가 보기론 루마니아 정도랄까요? 그런데 이승만이 왜 그렇게 미국에 주목했느냐. 첫째, 미국은 필리핀 외에 식민지를 갖지 않았어요. 필리핀마저도 미국 상원에서 1945년에 독립시키자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라고 본 겁니다. 물리적인 영토보다는 시장(市場)으로서 영토를 생각한 나라였던 것이죠.”
 
  ―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미국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철학적·정치사적 이유가 있었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습니다. 정치적인 맥락으로 보자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미국이 자유공화국인 점, 또 하나는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백성을 노예로 삼는 나라가 아니라 통상(通商)하는 나라라는 점, 통상을 하기 위해서는 항해와 통행의 자유를 추구해야 하잖아요? 세 번째는 세계적인 기구, 당시에는 자유국가연합체라고 불렀는데, 그런 기구를 리드할 수 있는 나라로 미국을 꼽은 거죠.”
 
  김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이승만과 기독교’를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개인적 신앙 차원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내다본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모든 회의를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무리했습니다. 동포 사회를 순회할 때도 교회 순회로 일정을 시작했죠.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저변(底邊)이 기독교 세력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서부 개척이 끝난 다음에 미국 국력이 외부로 뻗어나가죠. 무엇을 갖고 뻗어나갔느냐. 선교(宣敎)와 통상입니다. 유럽 제국과는 다른 점이죠.”
 
  제헌의회 개회식 때 이승만 의장(아직 대통령 선출 중이었으니까)이 기도로써 회의를 시작한 것도 특정 종교의 선양이 아니라고 했다. 미국과 국제사회에 보내는 고도의 국제정치적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독립정신》은 기적적 문헌”

 
  반공포로 석방 직후 경무대로 항의 방문한 미국 대표단을 향해 이승만이 ‘미국 독립선언문 정신에 따라 결단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언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미 대표단은 별다른 대응논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독립선언문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았을까?
 
  “통상과 공화제를 지향한 미국의 국체(國體)는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징(明徵)하게 쓰여 있어요. ‘만유(萬有)의 대주체(大主體)한테 우리를 호소한다’고 나옵니다. 그때는 국제연합이나 국제연맹 같은 국제적인 기구가 없을 때니까 그걸 대신해서 만유의 대주체한테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해서 독립한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리고 맨 마지막에 ‘우리가 독립하면 국가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라고 하고 네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동맹권, 다른 나라와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죠. 둘째가 전쟁선포권, 세 번째가 평화조약권이고, 네 번째가 통상조약권입니다. 이 미국 독립선언문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번역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복역했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불후(不朽)의 명저 《독립정신》을 완성했다.
 
  “그러니까 감옥에서 미국의 참모습을 벌써 안 거죠. 《독립정신》은 당대에는 발간이 불가능했었던 기적적 문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200년 사이에 한국인의 손으로 쓰인 저작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 중국에 예속돼 있었잖아요. 그런데 근대적 정신을 바탕으로 독립하자고 한 것입니다.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죠.”
 
  ― 이승만은 미국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역사와 미국의 정신, 이걸 미국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었죠. 미국이 기독교 정신과 실용주의의 바탕 위에서 건국한 뒤에, 비로소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이론적으로 정립됩니다.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통상으로, 우호로, 친구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죠. 내게 없는 건 상대방으로부터 얻고, 상대방이 없는 건 나한테서 가져가고 하는 것이 국가와 국가의 관계다. 제가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놀라운 얘기입니다.”
 
 
  “이승만, 적은 자원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 늘 생각”
 
  ― 왜 그렇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지금까지도 국가 간 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소련이 제일 대장이고 다른 나라는 다 밑에서 엎드려서 절하는 관계가 공산주의 국가 사이의 관계니까요.”
 
  ― 하지만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비판하는 분도 계십니다.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싸운 독립투사들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적다는 거냐? 이분들의 업적을 폄하하는 거냐? 이런 논리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강연하고 글을 쓸 때 ‘우리 독립군이 시베리아에서, 만주에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라는 말을 반드시 집어넣었습니다. 예를 들어,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대회를 할 때 ‘지금 몇만의 우리 독립군이 체코 군단과 함께 싸우고 있다’라고 합니다. 미국 정부를 상대할 때는 충칭(重慶) 임시정부 얘기를 꼭 했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는데, 그게 우리의 대표고 내가 하는 것은 구미위원부다. 이 박사는 ‘우리가 보유한 자원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이걸 다 써버리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을 평생을 두고 하셨습니다. 적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늘 고민하셨죠. 뭐를 잘라버리고 이런 게 없었습니다.”
 
  ― 신채호(申采浩)는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서 ‘이완용(李完用)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라며 아주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랬죠. 신채호 선생님은 잘 알다시피 정말 투철한 애국지사임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단재(丹齋)는 구시대의 학자이고, 이 박사는 세계에 대한 눈이 넓어진 신세대의 독립지사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1933년 5월 2일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 그의 외교독립론은 약소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 정세가 요동칠 때, 이승만 박사는 ‘만약 조선을 독립시켜준다면 위임통치로 가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이것이 신채호가 격분한 배경이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식민지를 다 풀어주자고 했죠. 그런데 승전국(勝戰國)들이 전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었죠. 그리고 승전국들이 내세운 논리가 더 있습니다. 식민지가 독립한다고 해도, 국제적인 책임감, 의무를 다할 수 있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차선책(次善策)으로 거론한 것이 ‘국제연맹하의 위임통치론’입니다. 그걸 그대로 가져온 것이 2차 세계대전 후 루스벨트가 주창한 ‘유엔 관리하의 신탁통치’죠. 1차 세계대전 직후엔 조선은 존재감이 거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럽에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곳이었어요.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조선의 존재감을 부각한 효과가 있습니다.”
 
  ― 존재감을 부각해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복안이네요.
 
  “바로 그겁니다. 마사리크가 한 얘기가 있습니다. 식민지가 되면 외부에 대한 창구가 닫힌다고요.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국제기구가 많이 생겨났고, 독립국이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식민지들이 자기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세계에다 독립의 대의를 호소하려면 존재감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코리아’라는 이름을 되도록 많은 나라에 알려야 하잖아요. 그다음에 억울함을 얘기하고 그다음에 대의를 얘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위임통치 청원은 ‘코리아’라는 이름을 국제연맹에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은 업적입니다.”
 
 
  “우리나라를 萬國의 자유통상지로”
 
  신생국의 독립은 국제사회가 문제점을 알고, 호의적 태도를 보이고, 결정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박사는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의 독립으로 가는 첫 단추를 거의 혼자 힘으로 꿰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위임통치에 대해 이승만과 이승만의 동지 정한경(鄭翰景·1890 ~1985년)이 국제연맹 앞으로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도 편지를 보냈죠. 그런데 두 분의 글을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 뭡니까?
 
  “김규식 박사는 훌륭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임에 틀림없지만, 글을 보면 감성에 호소해요.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학정(虐政)을 하는데 우리를 좀 풀어주십시오.’ 이승만하고 정한경은 다릅니다. ‘우리나라를 만국의 자유통상지로 만들어달라’고 하죠. 만국 자유통상지가 되고 그다음에 위임통치국이 되면, 그 나라에 군사시설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 나라의 청년들을 군인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고요.”
 
  ― 미래를 내다보신 거네요.
 
  “그렇죠. 조선을 만국의 통상지로 만들면 다툼이 없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시장으로 봐달라고 한 겁니다. 그 과정을 거쳐 우리가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면 그때 독립하면 된다, 이거거든요.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 게 아니라, 시장으로 만들어달라고 한 겁니다. 이것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 겁니다. 여러 나라의 자유통상 경쟁지니까, 누구 하나 조선을 탐낼 수가 없게 된다는 거죠. 이런 논리는 우남이 한성감옥에서 쓴 《제국신문》 논설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독립을 그나마 부지하고 있는 건 여러 나라와 통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채호 선생님과는 세계관이 다른 거예요.”
 
  ― 마사리크는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마사리크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최초의 조직적 저서를 쓴 사람입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허점을 간파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죠.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을 청년기부터 인식하고 있었어요. 1923년에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발표한 〈공산주의 당부당(當不當)〉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한 탁월한 글입니다. 두 사람 모두 반소(反蘇),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 그렇다면 이승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성립도 불가능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 건국이 불가능했거나, 아니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무장투쟁에서 외교독립론으로 전향한 데 벌레라
 
아일랜드 독립의 아버지 에이먼 데 벌레라.
  이승만 대통령과 비슷한 행로를 걸은 정치가가 또 있다. 아일랜드 초대 대통령을 지낸 에이먼 데 벌레라(Éamon de Valera·1882~1975년)다.
 
  “데 벌레라는 무장투쟁을 하다가 1916년 부활절 봉기 실패 이후 ‘이거 안 되겠구나’라고 깨달은 뒤 외교독립론으로 돌아서는 사람이죠. 아일랜드는 700년 이상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16번 무장 독립투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16번 다 실패해요. 독립투사도 많이 죽고요. 영국은 강대국 중의 강대국이니까, 무력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데 벌레라는 1916년 그 유명한 부활절 봉기에 참가했다 영국군에게 붙잡힌다. 그러고 사형당하기 일보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난다. 그가 갇혔던 곳이 더블린 캐슬이다.
 
  “감옥에서 깨달은 겁니다. 무력투쟁은 이제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외교로 해야 한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가 아마 500만 남짓 했을 거예요. 그런데 대기근 시대(1845~1852년) 전후(前後)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자리 잡은 아일랜드계가 2000만 명이었어요. 이 박사가 독립운동할 때 소수(少數)지만 재미동포들을 참 잘 활용했잖아요. 데 벌레라는 2000만 아일랜드계 미국 시민의 잠재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입니다.”
 
  ― 그 전에도 이들을 활용한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있었잖습니까.
 
  “있었죠. 이들을 통해 자금이나 무기 등을 조달하며 독립운동한 경우가 있었어요. 그런데 데 벌레라는 뭐가 달랐느냐. 여러 단체에 함부로 이름을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맘대로 돈 걷지 말라고 했죠. 앞으로는 아일랜드 이름으로 모금하는 돈은 전부 아일랜드 의회의 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말하자면, 자금 모금과 출처를 투명하게 개선한 것이다. 신뢰가 쌓이니 모금액이 늘었다.
 
 
  ‘공채표’를 판 이승만과 데 벌레라
 
이승만이 미국에서 임시정부 명의로 발행했던 독립공채표.
  “100만 달러 모금이 목표였는데 500만 달러가 모금됩니다. 대성공이죠. 그런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관련 있는 이야기입니다.”
 
  ― 어떤 건가요.
 
  “데 벌레라가 독립자금을 구하러 미국에 갔는데,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오는 겁니다. 그런데 독립공채(獨立公債)를 팔면 미국에서는 불법이에요. 그래서 공채가 아니라 공채표(公債票)를 팝니다.”
 
  ―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법적으로 정체가 불분명한 단체,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단체는 채권을 발행할 수가 없는 거죠. 회사 등록도 안 한 회사가 회사채(會社債)를 팔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 팔아먹듯이, 푸른 하늘 팔아먹지 말라고 미국엔 블루스카이법(Blue Sky Law)이 있습니다. 사기방지법이죠. 여기에 딱 걸린 거예요. 그래서 당시 신문에 ‘데 벌레라를 체포해야 한다, 저건 사기꾼이다’라는 글이 실리죠.”
 
  ― 데 벌레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독립공채표를 만듭니다. 일종의 어음이죠. 공채표를 사면 나중에 아일랜드가 독립했을 때 아일랜드 정부가 발행한 공채와 교환할 수 있는 증서입니다. 그렇게 합법적으로 500만 달러를 만듭니다. 근데 데 벌레라보다도 6개월 전인가 9개월 전에 먼저 독립공채표를 판 사람이 있습니다.”
 
  ― 누굽니까.
 
  “이승만이에요. 법률을 공부했으니까 민법 조항을 꼼꼼하게 검토한 겁니다. 제가 이걸 보고 이승만 박사의 탁월함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 앞면엔 한글로, 뒤엔 영어로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공채표’라고. 그러니까 법을 피해 간 겁니다. 그러니까 데 벌레라보다도 미국법을 잘 알아서 불법적 요소가 없이 일을 진행한 겁니다.”
 
  ― 데 벌레라는 법률회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승만은 개인 능력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앤 것이군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마구잡이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전부 국제 수준에 맞춰서 했어요. 나중에 새 나라를 건설할 때도 다 국제법에 맞춰서 했습니다. 함부로 진행한 일이 단 하나도 없어요. 대표적인 예가 공채표입니다.”
 
 
  이승만이 무국적자였던 이유
 
  김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가 무국적자(無國籍者)로 시종(始終)한 것도 눈여겨봐야 할 사항이다. 개인적 불편을 감수하고 대의(大義)를 고수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들은 미국 시민이었죠. 우리 독립지사들 가운데 많은 분은 중국이나 러시아 국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는 왜 무국적을 고수했느냐? 미국의 중립법(中立法) 때문입니다.”
 

  ―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이 법에 의하면, 미국 시민이 미국과 친선 관계에 있는 나라에 대해 적대 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과 전쟁하기 전에는 정식으로 수교하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미국 시민은 항일(抗日)단체의 임원이 될 수 없습니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임원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1817년에 만든 유명한 중립법(Neutrality Acts of the U.S.A.)인데, 이승만 박사 학위 논문에 줄줄이 나옵니다. 이 박사는 임시정부 대통령이지만 미 국적자라면 법에 걸리는 거예요. 그걸 아니까 서재필(徐載弼)이 필라델피아 국민회의 때 자기는 미국 시민이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겠다고 한 겁니다. 이승만이 끝까지 무국적자였던 건 이런 의미가 있는 건데 그럼 다른 사람들은 국적이 뭐였냐? 이걸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이 국적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어, 상하이 임시정부의 주요 요직에 있던 사람들의 면면을 봤더니, 뭐 소련 국적에 중국 국적 등등, 그럼 외국에서 볼 때 임시정부가 무슨 임시정부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따진 사람도 없고, 논리적으로 보면 임시적 방편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박사는 끝까지 원칙을 고수했죠.”
 
 
  프레더릭 매켄지
 
캐나다인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
  ― 데 벌레라와 이승만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건데, 선생님 책에서 재미있는 사항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더군요. 프레더릭 매켄지 기자입니다.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1869~1931년)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의 활동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언론인이죠. 1919년 3·1운동 당시 일본군의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폭로했고, 의병 사진도 매켄지가 1907년에 찍은 두 점이 전부죠. 메켄지는 데 벌레라가 체포됐을 때, 1916년 부활절 봉기 때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 옥중에서요?
 
  “아니요, 잡혀갈 때 옆에 붙어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매켄지에게는 의협심(義俠心)이 있어요. 당시 강대국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었던 사람이죠. 세계 곳곳을 얼마나 다녔는지 모르지만, 참 우연찮게 아일랜드와 한국의 독립운동에 모두 기여했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로운 역사의 단면입니다.”
 
  매켄지 기자는 무려 세 번이나 한국에 왔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종군(從軍)기자로 왔고, 1906년 방문 때는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대한제국의 비극》을 썼다. 1920년엔 3·1운동의 기록을 담은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201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승만, 마사리크, 데 벌레라는 위대한 영웅”
 
  역사적 위인들이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불투명한 상황에서 하나의 선택을 하기 위해 얼마나 고뇌를 했을지 현재의 우리로서는 알기 어렵다.
 
  “이승만이나 마사리크나 데 벌레라나 다 좌충우돌(左衝右突)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 박사만 해도, 위임통치 청원했다고 트집 잡는데,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해야 그다음이 있는 것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원칙을 세우고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세 분 모두 뛰어난 위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구한 생명이 수백만, 수천만은 될 겁니다. 늦게 태어나 정답을 아는 자가 윗세대를 향해 ‘왜 그 당시에는 그것밖에 못 했냐?’고 하는 것은 오만한 폭거예요. 누가 뭐래도, 이승만, 마사리크, 데 벌레라 이 세 분은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거의 최대치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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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소    (2023-12-12) 찬성 : 4   반대 : 0
현대 조선과 대한민국은 2명의 천재적인 지도자를 모시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바로 이승만과 박정희죠. 이 두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암담했을 지, 눈 앞이 아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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