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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자서전

푼수 할아버지가 세탁공장에서 바라본 세상

“내 별명은 세탁실 ‘태평양 며루치(멸치)’”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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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장기 투숙 女 손님의 속옷 빨래는…
⊙ 세탁실 왕푼수는 명문대 출신 노총각. 월급 받으면 수표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현금만 가져
⊙ 룸살롱 접대부 아가씨의 놀라운 기억력… “무슨 색 단추에 무슨 장식이 달려 있고”
⊙ “내 옷이 남대문 시장 싸구려 옷인 줄 아느냐”… 자세히 보면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 세탁 전 주머니 검사해 볼펜, 칼 제거. 간혹 돈(동전) 부수입. 동료 아줌마들과 나눠
⊙ “금반지, 금목걸이 못 봤느냐고 할 때 보지 못했지만 얼굴 달아올라”
⊙ “어렸을 때 하나님을 매우 원망. 지금은 왜 하나도 안 주셨는지 이해”
  몇 달 전 서울의 한 호텔 세탁실에서 일한다는 어르신이 《월간조선》 편집실을 찾아왔다.
 
  서울 홍은동에서 사는 송영도(宋永都·72)씨는 파란색 볼펜으로 200자 원고지에 눌러쓴 원고뭉치를 건네며 “부끄럽지만 검토해보시고 가능하면 좀 실어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자신을 중졸(中卒)의 세탁공장에서 오래 일한 ‘하층 노동자’라고 소개했다.
 
  “어떻게 해서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지난 2016년 파주의 한 세탁공장에서 일하다 무릎이 아파 그만둔 뒤 6개월 동안 쉬게 됐는데 심심하고 무료해 초등학교 동창이던 친구에게 긴 편지를 보냈더니 ‘자네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니 소설이나 수필을 써보라’는 문자를 두 번이나 보내왔어요.”
 
 
  세탁공장 노동자의 삶 담아
 
송영도씨가 《월간조선》에 보내온 〈푼수의 이야기〉 원고다. 파란색 볼펜으로 200자 원고지에 정성스레 글을 썼다.
  그 친구는 이명박 정부 시절 장관을 지낸 K씨다. 송씨는 의례적인 과찬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용기를 내게 됐다고 털어놨다.
 
  기자는 그가 쓴 원고뭉치를 책상 한쪽에 두었는데 점점 쇠뭉치처럼 느껴졌다. 지난 추석 연휴 때, 지방 출장 때 틈틈이 읽어 보았다. 그리고 점점 빠져들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물적인 내용에다 도덕적 비난까지 있을 수 있는 글이었지만 그의 표현대로 노동자로 살아온 삶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었다. 조심스럽지만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소개하면 어떨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 만나보았다.
 
  1952년생인 그는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북 의성군 옥산면 전흥리. 스스로 “푼수에다 얼굴까지 밉상으로 생겨” 평생 결혼을 못 했고 건강이 안 좋아 군 입대도 못 했단다.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1968년 4월 9일’을 잊을 수 없다. 식당과 유흥업소 주방보조, 공사장 인부, 강원도 태백 광부로 전전했다. “한때는 버스비가 없어 구로공단~연희동 사이를 걸어 다녔다”고 했다.
 
  인천 남동구의 한 세탁공장을 시작으로 파주 봉일천, 파주 법원리 등지의 세탁공장에서 일했다. 다림질은 물론 호텔·병원·목욕탕의 수건, 사우나 가운, 침대·베개 시트, 심지어 미군 군복, 환자 수술복 등을 세탁기계로 빤 뒤 일일이 개키는 일을 했다. 고백하기를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1~2시간 늦게 퇴근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단다. 틈틈이 신문사 문화원이나 철학 아카데미를 찾아 인문학적 교양도 채웠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1980년대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2005년까지 한 달에 한 번 시골에 내려갈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그가 쓴 글을 문맥에 맞게 조금 수정했지만 보태고 깎고 고칠 문장이 아니었다.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다만 원고는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읽는 이에 따라 설령 글이 가볍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자기만의 음성으로 솔직하게 쓴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해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다. 조심스럽지만 판단은 《월간조선》 독자에게 맡긴다.
 
  송씨의 바람은 이 글이 자그마한 에세이집으로 묶어진다면 좋겠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가 정한 글의 제목은 〈푼수의 이야기〉다.(중간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임)
 
 
 
푼수의 이야기
  송영도

서울에 소재한 세탁공장 실내 모습이다. 글 내용과 무관하다. 사진=조선DB
  내가 처음 푼수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작은 호텔 세탁실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호텔에 장기 투숙하는 손님들은 세탁을 의뢰하며 세탁실로 세탁물을 내려보내는데 때로는 브래지어나 팬티 같은 여자들의 속옷도 많이 내려와서 우리를 매우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 여자들의 속옷은 왜 그리도 곱고 예쁘며 향기가 나는지 자꾸 만져보고 싶어져서 그런 세탁물은 세탁기에 넣지 않고 손세탁을 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런 세탁물은 추운 겨울철에도 고무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세탁하게 되지요. 그것은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론 “야! 우리 꼴이 이게 뭐고? 여자들 속옷이나 빨고…” 하면서 내숭을 떨지만 돌아서서는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수돗가로 가서 요리조리 만지고 주무르고 비비고 하면서 고이 손세탁을 하여 올리지요.
 
  나는 이런 세탁물은 부인이 있거나 애인이 있는 사람은 만지면 안 된다고 하면서 독점하곤 했는데 그때 그런 세탁물을 내게 빼앗긴 그들이 나를 푼수라고 이름 붙여준 것이지요.
 
 
  푼수
 
송영도씨는 1시간에 와이셔츠를 10장 정도 다릴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조선DB
  푼수라는 말은 ‘완전치 못하고 무언가 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란 뜻이지요? 어릴 때 엄마 배 속에서 열 달을 다 채우고 완전한 상태가 되어 태어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어떤 사정으로 8개월 만에 혹은 7개월 만에 태어나 버린, 그래서 좀 모자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팔푼이 칠푼이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들을 모두 푼수라고 부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그 당시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고(지금까지 못 갔지만), 직업도 남들이 꺼리는 세탁 일이라 푼수라는 말이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장가도 못 가고, 오죽 못났으면 세탁실에서 빨래나 하고 있나 하는 말도 들었기 때문이지요.
 
  옛말에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일하던 세탁실에 직원이 8명이 있었는데 나처럼 마흔이 지나도록 장가 못 간 이가 3명이나 있었고 30대 초·중반의 미혼 남자까지 합하면 5명이 나와 비슷한 푼수였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왕푼수는 내가 아니고 제일 나이 어린 총각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집안에 명문 대학까지 나왔는데도 숫자를 100까지도 못 세는 진짜 푼수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대학까지 나왔으면서도 왜 100까지도 못 세느냐”고 물으면 그는 “다른 것은 열심히 했는데 수학은 대충 해서 그렇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호텔 객실과장이 “야, 인마! 수학은 대충 하더라도 산수는 제대로 해야지!”라는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탁물을 찾으러 온 아줌마들이 고추를 보여달라고 자꾸 조르면 바지를 내리고 고추를 보여주고 월급을 받으면 수표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현금만 가져간 일도 있었어요.
 
  두 번째 푼수는 오○○이라는 30대 중반의 외모가 반듯하게 잘생긴 남자였는데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자아 도취된 사람이었어요. 이 세계, 이 우주가 자기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자기 같은 이런 위대한 인물을 사람들이 너무 몰라준다고 매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었죠. 월급이 생활비에 못 미쳐 경기도 연천에서 여관을 하는 어머니한테 가서 용돈을 타 쓰는 사람이어서 쉬는 날은 기차를 타고 연천으로 자주 갔습니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 나비가 창문으로 들어와서 그 많은 사람을 놔두고 자기 머리 위에 앉더라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뭘 뜻하는 것이냐”고 하면서 “나비도 인물을 알아보는데 왜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느냐? 특히 여자들이 더 그렇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여자들한테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다 주었어! 그런데 여자들이 나를 안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내 책임이 아니잖아!”고 말하기에 나는 우스갯소리로 알고 웃어넘기려는데 너무나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해 차마 웃지 못했지요.
 
  그는 또 “나 같은 인물은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에 있으면 세상이 몰라주고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미국 가서 살아야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쯤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지…. 그러나 그의 이름이 TV 뉴스에 안 나오는 것을 보니 세계적 인물은 못 된 것 같네요.
 
 
  신학대학 나온 세탁실 근무자
 
  그 다음번에 푼수는 나이가 나보다 많았던, 신학대학까지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세탁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가까이 있는 전문대학에 가서 야간 경비 일까지 하는 대단히 부지런한 분이었는데도 항상 돈 때문에 쩔쩔매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또 자기가 지금 무슨 책을 쓰고 있는 중인데 그 책이 완성되어 나오기만 하면 김영삼 정권은 금방 무너지게 되어 있다면서 큰소리를 치며 쓰고 있던 글을 내게 보여주기도 했지요. 나는 어려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래도 신문 사설이나 신문에 실린 칼럼 같은 글을 제법 이해하는데 그런 글보다 어려워 내가 이해 못 하는 글이라면 그 책이 나온다 해도 김영삼 정권을 무너지게 할 만큼 그런 위력은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는 또 용기가 대단해서 자기보다 체격이 훨씬 더 큰 사람에게 육탄 돌격하는 만용도 보여주는 사람이었어요.
 

  마지막 푼수는 나이가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분이었는데 키도 크고 외모도 잘생겼는데도 쉰이 되도록 왜 장가를 못 갔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도 누님집 가까이 살면서 누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분 같았어요. 그분의 집은 내가 사는 동네와 가까운 곳이라 하루는 그분이 얘기하면서 집까지 걸어가자고 해서 1시간30분쯤 걸으며 얘기를 나눴는데 내게는 말 한마디 못 하게 하고 듣기만 하라고 하면서 어릴 때 얘기, 이화여대생과의 데이트, 군대서 겪은 얘기 등 믿기지 않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놨어요.
 
  이런 푼수는 우리 세탁실 가까이 있었던 기관실에도 있었습니다. 그는 기관실에서 최고참 직원으로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도 “장가 안 가면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것이 우리나라 전통관습”이라면서 나를 하대하며 자기에게는 존댓말을 쓰라는 둥 여러 가지로 놀리고 괴롭히던 사람이었어요. 내게 “장가를 왜 못 갔느냐? 고추가 없기에 장가 못 간 게 아니냐? 한번 확인해보자”며 자주 그랬죠. 한번은 세탁실 송년회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어요. 귀찮기도 해서 “남의 것을 보려면 먼저 자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를 내리는 것이었어요. 그때 바로 옆에 있던 아줌마가 자세히 보고는 “별것 아닌 것 갖고 자랑한다”고 했지요. 그가 내게 “이제는 송씨 차례”라고 할 줄 알고 도망치려 했는데 웬일인지 아무 말이 없어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되짚어보니 정말로 내 물건을 확인해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물건을 자랑하고 싶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여 그것을 깊숙이 숨기고 다니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내보이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똑똑한 룸살롱 아가씨들
 
젊은 시절 송영도씨. 팔당댐 인근 검단산에 올랐다.
  그 당시 내가 근무하던 호텔 세탁실은 지하였는데 그 가까이에는 룸살롱이 있었고, 거기에서 근무하는 남자 웨이터들의 얘기에 의하면 거기에도 푼수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은 얼굴 예쁘고, 키 크고, 늘씬한 아가씨들이 돈을 많이 벌고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돈을 못 벌 것이라 생각했는데 외모와는 별 관계없이 똑똑하고 말 잘하고 손님을 잘 다루는 아가씨들이 돈을 많이 번다며 거기에서도 양극화가 심하다고 하더군요.
 
  그곳 아가씨들은 우리 세탁실로 세탁물을 가지고 와서 맡기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는 ○○라는 이름의 고마운 아가씨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옷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옷도 가져와서 맡겼는데 한번은 세탁물 사고로 다른 한 아가씨의 옷이 못 쓰게 되어버렸어요. 옷값을 물어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가씨가 “아저씨, 또 바보같이 돈 물어주려고 하느냐? 우리는 비싼 옷 안 입기 때문에 괜찮다”며 “미친 것들이 비싼 옷을 입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내가 알아서 잘 말할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정말 한참이 지나도 옷 주인이 항의 같은 것을 한 적이 없었어요.
 
  ○○라는 아가씨는 마음씨 좋고 매우 똑똑했는데 한번은 “여러 개의 옷 중에서 하나가 없어졌다”며 그 옷에 대해 설명하는데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색 단추에 무슨 장식이 달려 있고 옷 뒤에 무슨 글자나 숫자가 적혀 있다고 정확하게 기억하더군요. 그 옷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 배달되어 돌아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말이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저런 머리로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님 옷을 시간에 쫓겨 바쁘게 세탁하다 보면 옷에 붙은 단추나 장식물이 깨지거나 옷이 탈색되고 변색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럴 때 단추나 장식 등은 비슷한 다른 것으로 바꿔 달아주고, 부분 탈색된 부분은 그림물감으로 살짝 칠해 숨기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단추를 바꿔 달아도, 심지어 전부 바꿔 달아도, 혹은 옷 한쪽 부분의 색깔이 조금 바뀌어도 그냥 지나가는 수가 많은데 여성들은 귀신같이 잘못된 곳을 찾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떤 여성은 수십 개의 구슬 장식 중에 하나만 없어져도 알아내더군요. 옷에 달린 구슬 전체 수를 다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 걸로 보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머리가 좋은 것 같았습니다.
 
  또 세탁하다 단추가 깨지거나 하면 단추를 들고 남대문 시장 단추가게에서 똑같은 단추를 사 오거나 똑같은 것이 없으면 비슷한 걸로 여러 개 사와 단추 전체를 바꿔 다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떤 땐 단추 하나 값이 1만원이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탁업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세탁 사고 안 내는 것

 
  세탁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세탁물 사고로 손님한테 돈을 물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세탁업중앙회 간부로 있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 세탁업자들이 세탁물 사고로 물어주는 돈이 1년에 1000억원가량이 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세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탁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세탁물 사고를 안 내는 것입니다. 세탁물 사고가 나서 옷이 못 쓰게 되면 어떤 손님은 “이 옷이 어떤 옷인지 아느냐” 하며 마치 대관식 황제 옷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짓고 야단이지요. 그럴 땐 우리는 참 난감해하며 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렇게 귀중한 옷이면 집에다 고이 보관해두지 왜 입고 다니냐고요….
 
  오래전 저도 세탁 작업 도중 사고를 내서 최고 80만원까지 물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호텔 세탁실에서 일할 때 여자 손님 투피스 한 벌을 드라이클리닝으로 세탁했는데 그만 옷이 탈색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옷 탈색은 주로 물세탁할 때 생기는 것이지 드라이클리닝으로 탈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지라 그곳의 제조과정에서 염색 가공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손님께 설명을 드렸더니 “내 옷이 남대문 시장에서나 파는 싸구려 옷인 줄 아느냐. 이 블라우스만 해도 40만원짜리야!” 하며 큰소리를 치더군요. 그러고는 또 “세탁소에서 빨래나 하는 사람이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하며 돌아서 가버렸어요.
 
  그 후 손님은 “옷값이 180만원인데 120만원만 변상하라”고 하고 호텔 객실과장 또한 읍소해서 80만원을 내가 혼자 물어주게 된 것이지요. 그 당시 80만원은 한 달 월급에 가까운 돈이었습니다.
 
  값비싼 명품 옷이 들어오면 겁이 나 마음 놓고 세탁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때로는 물수건 등으로 오점(汚點)을 지우고 부분 세탁만 해서 다림질이나 잘해서 주는 수도 있습니다. 한번은 호텔 사우나에서 손님 한 분이 양복 상의 한 벌을 내려보내면서 “600만원짜리 옷이니 조심해서 세탁해야 한다”는 말에 겁이 났습니다. 살펴보니 비교적 깨끗해서, 향긋한 냄새가 나게 하는 섬유 유연제를 뿌리고 건조만 잘해서 다림질을 하고 세탁을 했노라고 올려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명품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탁을 잘하지 못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수도 있지요. 또 그런 값비싼 명품 옷도 자세히 보면 ‘메이드 인 차이나’나 ‘메이드 인 캄보디아’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옷도 있었어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값이 비싸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왜 그렇게 값비싼 옷을 좋아하는지…. 그런 명품 옷을 좋아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푼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호텔 세탁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호텔방을 청소하는 룸메이트 아줌마가 직원 식당에서 나를 보고 웃으며 “며루치(멸치의 방언) 같다”고 했습니다. 듣기 싫은 말이었지만 생각해보니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며루치’ 같은 작은 존재지만 ‘며루치’가 사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고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호텔 이름도 태평양을 뜻하는 이름이어서 나는 내 별명을 ‘태평양 며루치’라고 지었습니다.
 
 
  인천 세탁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호텔 세탁실은 그만두고 몇 개월 뒤인 2006년 봄에 인천 남동구 운연동에 있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거리가 매우 멀어 힘들었지만 그곳 직장에서 정착이 되면 그쪽으로 이사 갈 생각으로 그곳 공장에서 일하기로 한 것이지요. 집에서 공장까지 2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였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공장에 가면 오전 6시40분쯤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저녁때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두었다 아침 출근길에 가져가서 공장에서 먹었어요. 그래서 누구보다 공장에 먼저 도착해서 일하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8시 안으로만 오면 되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일찍 오느냐고 나무라기도 했지만 출근시각에 맞춰 간다고 집에서 늦게 출발하면 모두들 출근하는 시간이 되어 버스가 복잡해서 편히 앉아갈 수 없잖아요.
 
  또 나는 원래 남들보다 체격이 작아 체력도 떨어지고 머리도 많이 나빠 무슨 일을 해도 남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열심히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느 직장에서나 남들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해 작업 준비나 공장 청소, 기계 청소 같은 일을 하였지요. 그래서 청소 일이 내 전담 일이 되다시피 하니 사람들은 매일 공장 바닥을 쓸고 닦는다고 ‘마당쇠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하고, ‘푼수’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또 어쩌다 다른 일로 청소를 못 하는 날이 있으면 “아저씨, 오늘은 왜 청소를 안 했어요?” 하고 나무라는 아줌마도 있었어요.
 
  그것은 아마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양반의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청소 같은 것은 노비, 하인들 같은 쌍놈들이나 하는 일이지 양반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체력도 머리도 남들을 못 따라가기 때문에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충수업을 하듯 청소 같은 일이라도 주어지면 고맙다고 생각해 열심히 했지요.
 
 
 
하루 14~15시간씩 한 달에 하루도 쉬지 않고 7개월 일하기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지능검사를 했는데 내 지능지수가 97점으로 나왔어요. 급우들로부터 놀림과 함께 그 사실을 듣고 난 나는 어린 마음에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실망감에 빠져 우울했었지요. 이런 실망감에 빠져 있는 나를 위로하느라 내 옆의 단짝도 종일 수업을 제대로 못 들었어요. 나는 수학이 어렵고 재미가 없어 0점 받은 적도 있었지만 나와 달리 단짝친구는 머리가 좋아 수학을 아주 잘했고, 성격도 침착하고 온화했어요.
 
  나는 그 친구가 그동안 매우 보고 싶었지만 장가도 못 가고 초라하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찾지를 못했는데 나이가 예순이 넘어가니 이러다간 죽을 때까지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소문 끝에 대구에 살고 있는 그를 몇 년 전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대구에서 유명한 부자동네에 살며 벤츠를 몰고 와서 태워주며 나를 기쁘게도 부럽게도 해주고 또 부끄럽게도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지능지수가 97점밖에 안 됐으니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공부를 포기하고 만화책이나 삼국지, 수호지 같은 재미난 책만 보았어요. 성공이나 출세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아버지처럼 힘든 농사 일이나 노동 같은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예측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예측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식당, 유흥업소 주방이나 각종 공장, 공사판에서 항상 하루 12시간 이상씩 힘든 노동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경기도 하남에 있던 공장에서는 하루 14~15시간씩 한 달에 하루도 쉬지 않고 7개월 동안이나 일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 5일 근무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별나라 이야기였지요.
 
  딱 한 번 하루 8시간만 일하는 직장이 있었는데 강원도 황지(지금의 태백) 탄광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하루 3교대였기에 더 일할 수도 없었지요. 내가 탄광에서 일하게 된 그때는 1976년이었습니다.
 
 
  강원도 태백 탄광에서
 
  겨울은 다가오고 마땅한 일자리가 없던 그때 황지에서 올라온 동료 하나가 “탄광 일을 하면 월급을 두 배나 받을 수 있고, 겨울에도 춥지 않고 취직하기도 쉽다”는 말에 황지로 떠났지요. 막상 광업소에 도착하니 인사 담당자가 “체력이 약해 안 되겠다”고 해서 난감해하던 차에 마침 그곳에서 일하던 고향마을 형님 친구를 만나게 되어 취직할 수 있었지요. 광부 작업복을 입고 허리에 무게가 3kg 가까이 나가는 축전지를 달고 머리엔 전등이 달린 안전모를 쓰고 터널 입구에서 3000~4000m나 되는 땅속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때 탄광에서는 제일 안쪽 막장에서 갱목을 세워가며 석탄을 캐내는 사람을 선(先)산부라고 하고, 그 뒤에서 선산부가 필요로 하는 갱목을 갖다 주고, 선산부가 캐낸 석탄을 바깥으로 옮기는 이를 후(後)산부라고 불렀지요. 나는 후산부로 일하며 매일 20~30kg이나 되는 갱목을 세로로 등에 지고 좁고 가파른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작업환경이 좁고 컴컴해 불안감과 불편함이 컸습니다.
 
  하지만 월급은 당시 선산부가 8만원이고 후산부는 4만5000원인데 서울서 내가 일했던 직장보다 확실히 2배나 더 많았습니다. 그때 탄광지하 갱 속 작업장으로 토목기사가 가끔 순찰을 돌면서 “이 지역은 메탄가스인지 무슨 가스인지 그 가스가 공기 중에 30% 이상 되면 폭발하니 절대 담배 피우지 마라”고 당부하더군요. 그래도 고참 광부들은 무시하고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나는 기겁을 하며 굴 바깥쪽으로 20~30m 도망가서 지켜보았지요. 그분들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도망가는 내가 재미있어서 담배 피울 생각도 없으면서 자주 “담배 한 대 피워볼까” 하면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지요. 그때마다 도망치는 내게 “죽는 것이 그렇게나 무섭나?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이가 여긴 왜 왔어? 여기는 모두 죽으러 온 사람들이야! 살길을 찾아 가다가다 더 못 가서, 더 갈 곳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죽으러 온 데가 여기야. 그래서 여길 인생막장이라고 하는데, 야! 그런데 젊은 사람이 그렇게 갈 곳이 없어 여기까지 왔어?”라고 야단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니야, 잘 왔어! 어릴 때 이런 고생, 이런 체험, 한번 해보는 것도 인생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도 있지. 잘 왔어!”라며 위로해주던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사고 없이 9개월쯤 지났을 때 서울서 같이 내려왔던 동료 하나가 다른 광업소에서 일하다 사고로 죽게 되었어요. 그걸 보고는 겁이 났어요. 내가 죽는다는 것도 겁났지만 내가 죽으면 부모님들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생각하니 더욱 견딜 수가 없어 그 후 한 달쯤 더 일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한 가지 놀랐던 것은 그곳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쌍욕을 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는 듯이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한번은 황지 읍내를 걸어가는데 아주 고운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더군요. 그때 트럭 한 대가 무섭게 지나치자 아주머니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어요. 내가 적잖이 놀라자 아주머니는 미안했던지 “우째 욕이 저절로 나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요즘 중·고교 학생들이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됐는데 그리도 쌍욕을 많이 하더군요. 광산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험한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세탁 前처리 작업
 
  2006년 무렵 인천공장에서 내가 한 일은 전(前)처리 작업이었습니다. 옷을 그냥 세탁기에 넣으면 옷 주머니에 들어 있던 칼이나 볼펜 같은 것이 세탁기에 함께 들어가 큰 사고를 내는 수가 있어 주머니 검사를 합니다. 또 옷에 묻은 오점을 대충 지우고 세제나 기타 약품 등을 분무기로 뿌려주어 세탁이 잘 되도록 하는 작업이 전처리입니다. 아무리 주머니 조사를 잘 해도 볼펜 같은 것이 세탁기로 들어가 사고를 내고 돈을 물어줘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머니에 있던 볼펜이 주머니를 뚫고 돌아다니다 옷 한쪽 구석에 숨어 있는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또 손님 옷 주머니 조사를 할 때는 돈이 나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요즘은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돈이 나오는 경우가 드물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1만원짜리는 드물었지만 1000원짜리는 많이 나왔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 돈을 그냥 가져버리면 절도죄나 횡령죄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때 공장에서는 그냥 가졌어요.
 
  주머니에서 2만원 이상 나오면 손님이 연락하고 찾았기 때문에 2만원 이상은 고이 가지고 있다가 아무 연락이 없으면 그냥 가져버렸지요. 손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일하면서 다른 사람도 주울 때가 있었지만 단연 전처리 하는 내가 제일 많이 가졌습니다. 나는 그 돈을 혼자 주머니에 넣기가 뭣해서 일하다가 내 곁으로 오는 동료 아줌마들에게 나눠주곤 했어요. 그런데 아줌마들 중에는 당연하다는 듯 빼앗다시피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떤 이는 500원짜리 동전도 매우 미안해하며 망설이다가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아줌마들에게는 더 많이 자꾸 더 주고 싶었어요. 또 이런 아줌마들 얼굴이 확실히 더 예뻤어요. 이 때문에 나는 또 아줌마들로부터 푼수라는 말을 듣게 되었어요.
 
 
  “그런다고 모르나? 웃기지도 않아!”
 
  가끔 공장장도 내게 와서 “형님, 오늘은 얼마나 주웠어”라고 묻는데 하루는 내게 와서 “내일 어린이날인데 우리 예쁜 딸에게 장난감은 고사하고 우유 한 병 못 사주게 되었다”며 슬픈 표정을 짓더군요. 뒷골목 폭력배 두목을 할 만큼 우락부락한 이가 내게 아양을 떨다시피 하는 모습이 참 좋아서 나는 손님 주머니에서 나온 돈 5000원에다 내 돈 1만원까지 보태 1만5000원을 주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였어요.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있기에 누가 줬느냐고 하니 공장장이 주더라는 겁니다. 나는 공장장한테 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졌지요? 그는 “그게 아니고…” 어쩌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주머니 조사를 할 때 가끔 여자 귀걸이가 나왔어요. 귀걸이가 쌍으로 나오면 참 좋은데 꼭 한 짝만 나왔어요. 한번은 한 짝만 어느 아줌마에게 줬더니 “야, 예쁘다. 나머지 한 짝도 빨리 찾아오라”고 떼를 쓰다시피 재촉하는 겁니다. 하도 떼를 쓰기에 할 수 없이 귀금속 가게에 가서 그 귀걸이와 가장 비슷한 걸로 3만5000원을 주고 한 쌍을 사다 주어야 했어요. 그 후 아무리 예쁜 귀걸이가 나와도 아줌마들한테 줄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한 짝 귀걸이 여러 개를 갖고 있습니다.
 
  아줌마들 중에는 내가 특별히 예뻐하는 아줌마도 있었어요. 그래서 공장에서 일하다 손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다른 아줌마들에게는 1000원짜리를 주었지만 그 아줌마에게는 5000원짜리, 만 원짜리도 주었어요. 심지어 올림픽 주화까지 줄 때는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요. 그때마다 그 아줌마는 “형님! 알았어요”라고 대답은 예쁘게 잘해놓고는 다 말해버리는 것 같았어요. 그때 우리 직원들은 공장에서 300m가량 떨어진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하루는 앞서 걸어가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우리한테는 1000원짜리 주고 ○○이 언니한테는 5000원짜리 주었대. 88올림픽 주화도 주고….”
 
  “그러고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나? 그런다고 모르나? 웃기지도 않아!”
 
  실은 내가 그 아줌마를 좋아한 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어요. 어느 날 회식이 끝나고 하천 둑길을 걸어갈 때 그 아줌마는 술에 취해서인지 매우 기분이 좋아서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갔어요. 나는 그때까지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너무 고맙고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그 아줌마를 좋아하게 됐으니 내 잘못은 아니지요?
 
  참으로 난처할 때도 있습니다. 세탁을 맡긴 손님이 찾아와 “옷 주머니에 금반지, 금목걸이를 넣어두었는데 못 봤느냐?”고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를 때입니다. 그럴 땐 금반지 감춘 도둑이 됩니다. 분명 본 일이 없는데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지요.
 
 
  병원 세탁물들을 보며
 
경기도 한 세탁공장 내부 모습이다. 호텔·병원·목욕탕의 침대·베개 시트, 환자 수술복 등을 세탁기계로 빤 뒤 일일이 개키는 작업을 한다. 사진은 글 내용과 무관하다. 사진=조선DB
  나는 인천공장을 그만둔 후 2~3개월 쉬었다가 2009년 무렵 경기도 파주 봉일천 가까이에 있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인천공장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서 1~2시간 더 늦게 퇴근(밤 8~9시)했지요. 더 열심히 일한 것은 공장 때문이었어요.
 
  그 세탁공장에 입사하기 전 서울 구의동에 있는 어느 세탁공장에 갔는데 담당자가 월급을 80만원 주고 3개월 후에 다시 조정하자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말에 너무 실망했습니다. 아무리 토요일 오전 근무라 해도 월급 80만원은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매우 기분이 나빴죠. 그런데 파주공장 공장장은 내가 취업하러 가서 하루 12시간 일하고 150만원 받기를 원한다고 했을 때 “경력이 얼마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줘야지” 하며 쾌히 승낙하더군요. 이런 분에게 실망을 안겨주면 안 되겠다 싶어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공장을 그만둘 때까지 한 번도 내게 화를 내거나 나무란 적이 없었어요.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한다 해도 관리 감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랄 일이 없을 수가 없지요?
 
  한번은 내가 실수로 세탁기 문을 잘 닫지 않고 세탁기를 돌리는 바람에 세탁기 문짝이 망가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분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고 “그럴 때도 있다”며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어요.
 
  공장 등에서 일할 때 제일 걱정스러운 부분이 기계 고장입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퇴근시각이 늦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사장님이나 감독자가 기계 사용을 잘못해서 고장 나게 했다고 크게 야단치기 때문이지요. 아무런 실수나 잘못이 없는데도 기계가 고장이 나면 사장님들은 “그게 얼마나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외국산 기계인데 망가뜨렸느냐”고 호되게 야단치는 경우가많아요. 그러니 사소한 고장은 감독자 모르게 기계 수리 기사를 불러 다 사비로 고치는 일도 있습니다.
 
  파주 세탁공장은 병원 세탁물을 취급하는 공장인데 환자 수술복이나 수술포가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렇게 큰 병에 걸린 사람이 많나? 우리는 수술은커녕 치아가 상해도 병원이 무서워 치과에 못 가고, 병이 나도 수술해야 한다고 할까 봐 병원에 못 가는데 이런 대수술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하니 너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부모님 이야기
 
송영도씨의 부모인 송명암(1914~2005년)씨와 손화춘(1915~1996년)씨의 교회에서 기도하는 생전 모습이다. 막내아들인 그는 1980년대부터 2005년까지 매달 고향 마을을 찾았을 정도로 효자였다.
  우리 어머니는 광신자에 가까울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 신자라서 그 옛날 어려운 살림살이 생활 속에서도 늘 감사, 감사, 감사하시면서 사셨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보리나 좁쌀 같은 곡식 한 알도 내가 땀 흘려 열심히 일해야 생기는 것이지 그냥 공짜로 저절로 생기는 것은 하나도 없다”시며 “무얼 감사, 감사하느냐”고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며 나무랐지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집집마다 자식들이 5~6명씩, 많게는 8~9명씩 낳던 시절인데 병원은 고사하고 약국도 없어 치료는 생각도 못 했지요. 그저 운명에 맡기고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지만 우리 4남 4녀 8남매는 모두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했으니 신의 은혜나 보호 없이는 절대 될 수 없다시며 감사해하셨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셨지만 신앙심이 별로 없어 감사할 마음도 별로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파스칼의 말을 실천한 부모님
 
  파스칼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에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 그것 따지지 말고 우리 내기 한 번 하자.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삶과 없다고 생각하는 삶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을까?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했지요. 왜냐면 신이 없다고 믿어 죽어 심판받느니, 일단 믿었다가 심판받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지요. 우리 아버지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매우 의심스러워하셨지만 파스칼의 말처럼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그 어려운 살림살이에 제사 지낼 필요 없어 좋고, 담배와 술도 안 하게 되니 좋고… 아버지가 파스칼의 이야기를 아실 턱이 없지만 파스칼의 말대로 하신 것을 보면 우리 아버지는 매우 현명하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나 자신도 하나님의 존재가 많이 의심되더라도 파스칼의 말처럼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삶을 살고 결혼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그렇게 안 한 것이 크게 후회가 됩니다.
 
  아버지는 농사 일만 하시면서 좋은 음식 한 번 못 드시고 힘든 일만 죽도록 하셨는데 9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에 한 번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0~20km 거리를 무거운 짐을 지시고도 보통으로 다니셨어요. 노동이든 운동이든 몸을 많이 움직여야 건강하다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늘을 통해 우리 아버지 건강을 지켜주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마늘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마늘이 없으면 식사를 안 하다시피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도 모두 마늘이 보약이라 생각해서 많이 먹었어요. 마늘 하면 우리 고향 의성마늘이 최고입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두 사건
 
  내가 70년 이상 살아오면서 나를 제일 반갑게 맞이해준 이는 친구도 우리 형제도 어머니도 아니고 집에서 키우던 개였어요. 그 개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멀리서 뛰어와서 반갑다고 뛰어오르며 얼굴에 뽀뽀를 수없이 하며 야단이었지요. 그렇게 매일 나를 반겨주던 그 개를 우리 가족들은 잡아먹어버렸어요. 둘째 형님이 그 개의 목에 밧줄 올가미를 씌워 나무에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때려죽여 가마솥에 삶아 먹었어요. 여동생도 그 광경을 보고 울었지만 먹을 땐 아주 맛있게 잘 먹었어요. 우리 가족 모두는 한 가족처럼 지내던 그 개를 잡아먹은 공동정범이었지요.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지은 죄라곤 그것밖에 없어요. 나는 천국 가서 그 개를 다시 만나게 될까 봐 제일 겁나요.
 
  초등학교 다닐 때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크게 위축시킨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부모님이 자녀를 너무 많이 낳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산에 가서 나무를 너무 많이 베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알다시피 그 시절에는 가족계획이란 말이 대유행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래서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는 산아 제한에 관한 표어들이 벽에 붙어 있던 시절이어서 아버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라에서 하나둘만 낳으라고 하는데 우리 부모님은 생각도 없이 8명이나 낳아서 그 때문에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고생하고 나까지 부끄럽게 만든다고 말이죠.
 
  그래서 내가 낳아야 할 자녀 몫은 부모님들이 다 낳아버렸기에 나중 결혼해도 아이를 하나도 낳으면 안 된다고 굳게 다짐하고 결심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금방 아시고 “그래? 그러면 아예 장가도 가지 마라” 하시고는 결혼을 못 하게 해버리신 것 같습니다.
 
  또 그때 우리가 살던 시골은 땔감 나무를 많이 베었기에 민둥산이 많았어요. 정부에서는 ‘나무를 심자’라는 벽보도 많이 붙였고 학교 교실 게시판에 ‘나무 찍는 도끼소리 삼천만의 울음소리’라는 표어까지 붙어 있었죠. 난 그 표어 때문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산에 가서 나무를 베는 톱소리, 도끼소리가 삼천만 국민을 울게 하는 소리라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누군가 제 뒤에 다가와 “야 인마! 너 아버지가 산에 가서 나무 많이 벴지?”라고 할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불안해했습니다. 참으로 우리 아버지는 누구보다 산에 가서 나무를 많이 베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 잡혀간 일도 여러 번 있었어요. 집에서 쓸 땔감으로, 장작으로 팔기도 하고, 참나무로 숯을 구워 팔기도 했습니다. 특히 숯을 구울 때는 깊은 산속에서 밤새워 숯을 구워 그걸 아침에 지고 와서 집 근처의 산에 숨겨놓았다가 숯을 사가는 트럭이 오면 팔았습니다.
 
 
  그해 여름
 
  산에서 나무를 많이 베어버린 아버지 때문에 나는 어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나무가 없는 민둥산을 사서 나무를 많이 심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산마다 나무들이 많아져 민둥산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몇 년 전 고향에 갔을 때 산에 올라가 보니 옛날 다니던 산길이 모두 없어져버렸어요. 나무가 우거져 길이 사라진 겁니다.
 
  내가 파주 봉일천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더니 그 공장 사장님께서 나를 두고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네” 했습니다. 공장 동료들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내가 일을 잘못해서 무슨 차질이라도 생기고 해서 어떤 피해자라도 생기면 그때는 “복덩이인 줄 알았더니 돌덩이였나?” 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겁이 나서 더욱 조심하며 더 열심히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09년도 그해 여름은 다른 해보다 유난히 더 더웠습니다.
 
  그 더운 날씨에 힘든 일을 열심히 했더니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체력이 약해지고 건강이 많이 나빠진 것 같았어요. 목욕탕에 가서 체중을 달아보니 44.3kg밖에 안 나갔습니다. 평소 체중보다 4kg 이상 줄어든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계속 일하다가는 과로로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어 사장님, 공장장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두 달 정도 쉬면서 체중을 회복시킨 나는 공장 출근길 버스에서 알게 된 유리공장 공장장으로부터 “유리공장은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4시 정도면 끝난다”는 말을 듣고 그 유리공장이 마음에 들어 그 공장장께 부탁해서 유리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유리공장은 저를 너무 실망시켰어요. 공장 주변은 온통 쓰레기장 같았고 공장은 50년 전 그 낡은 방식으로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유리 녹은 물을 도구로 떠다가 형틀에 부어 넣고 유리병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이었어요. 나는 그걸 보고 아직도 이런 공장이 있나 하고 놀랐습니다. 거기서 내가 한 일은 다른 사람과 함께 형틀에서 만들어진 유리병을 고이 들고 열처리하는 곳으로 옮기는 일이었는데 열처리하기 전의 유리병은 퍽퍽 소리를 내며 잘 깨지기도 해서 유리조각이 튀어 위험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작업이 대단히 위험해 보였어요. 보호 장구 하나 없이 여러 사람이 일을 하는데도 아무런 사고 없이 하루 종일 일을 잘해 나가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도 보였습니다. 나는 겁이 나서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를 소개해준 공장장 체면을 생각해서 일주일 정도 견디고는 일 못 하겠다고 말하고 품삯도 포기하고 그만뒀어요. 유리공장을 그만둔 즉시 그래도 세탁공장이 최고다 생각하고 세탁 일을 찾았는데 다행히도 이틀 만에 파주시 법원리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세탁공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세탁공장을 옮기다
 
  법원리 공장에서 일한 지 1년쯤 됐을 때 봉일천 세탁공장장이 법원리 공장까지 찾아와서 내게 좋은 처우 조건을 제시하며 다시 그 공장에 가자고 했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공장에 가면 그 공장 사장님이나 공장장은 절대로 나를 혹사시키는 일이 없는데 내가 나 자신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법원리 공장은 내가 일했던 어느 공장보다도 규모가 크고 시설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쁜 아줌마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그래서 그 공장에서 일하게 된 얼마 후 인천에서 버스운전을 하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에게 ‘어느 땐 밤 11시를 넘어서까지 일해야 하는 나쁜 점도 있지만 월급도 전에 일하던 공장보다 많고 무엇보다 예쁜 아줌마들이 많아서 좋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송형은 아직도 여자를 좋아하시오?’라는 답신이 금방 왔어요. 나는 그 문자가 ‘아직도 어른이 못 되었나?’로 들려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렇소! 그럼 ○○씨(그도 미혼입니다)는 아직도 여자를 미워하시오? 여자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을 미워하는 것이고,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오. 우리를 낳아서 길러주신 어머니도 여자가 아니오? 여자인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소. 따라서 여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남자의 첫째 의무요’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즉시 ‘아멘’이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한테도 피해나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것이 마지막 저세상으로 갈 때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하고 나름 큰 기대 같은 것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하나님을 매우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다고요. 부잣집 같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주지도 않고 좋은 두뇌나 특별한 재능 같은 것도 하나 준 것 없고, 큰 키에 좋은 체격이나 잘생긴 외모를 준 것도 아니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장점 같은 것은 하나도 주지 않고 쓸데없는 욕심만 가득 안겨주어 날 괴롭게만 만들어준 것 같았어요. 정말이지 능력이나 재주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욕심은 왜 그리 많은지,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 사치는 다 누리고 싶고, 거리에 지나가는 예쁜 여자들은 다 안아보고 싶고…. 어릴 때 어머니도 형제들 중에 욕심이 제일 많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몹시 원망스러워 지금도 다른 형제들은 모두 교회에 다니지만 나는 교회도 안 다니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고 있어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까닭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왜 그런 능력이나 재주 같은 것을 하나도 안 주셨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 같은 욕심 많은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나 재주 같은 힘을 주었더라면 나쁜 일, 못된 짓이나 하며 죄를 많이 짓고 지옥 갈 것이 뻔해 그랬던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되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푼수다 하면서 시작한 글이 다 쓰고 보니 나는 푼수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변명하는 글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찰서에 잡혀온 도둑이 자기가 도둑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 것이 오히려 도둑임을 증명해버리듯 푼수가 아니라고 변명한 글이 푼수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만 것 같아 매우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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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20248    (2024-01-25) 찬성 : 0   반대 : 0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진솔하고 재미 있어요.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jjlee020    (2024-01-25) 찬성 : 0   반대 : 0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진솔하고 재미 있어요.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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