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병원, “뇌졸중 아닌 경동맥박리… 골든타임인 6시간 이내 수술했으면 회복할 수 있었다”
⊙ 문재인 보훈처, 4·19 유공자 신청하자 ‘서류 미비’ 이유로 거부
⊙ 유신 후 부부가 함께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 “‘다른 사람들은 다 수월하게 정치를 하는데 왜 당신만 그러냐’고 하자 ‘4·19 때 죽어가던 친구들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린다’고”
⊙ “‘전두환에겐 장세동이, YS에겐 최형우가 있는데 나에겐 그런 사람이 없다’는 노태우에게 ‘나를 믿고 YS를 후보로 내십시오’”
⊙ 쓰러지기 며칠 전 김무성으로부터 “(대선) 후보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대표로서 당을 추스르라”는 YS 메모 받아
⊙ “‘청와대 7인방’, 학자 출신 대선 후보 선호”
⊙ 문재인 보훈처, 4·19 유공자 신청하자 ‘서류 미비’ 이유로 거부
⊙ 유신 후 부부가 함께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 “‘다른 사람들은 다 수월하게 정치를 하는데 왜 당신만 그러냐’고 하자 ‘4·19 때 죽어가던 친구들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린다’고”
⊙ “‘전두환에겐 장세동이, YS에겐 최형우가 있는데 나에겐 그런 사람이 없다’는 노태우에게 ‘나를 믿고 YS를 후보로 내십시오’”
⊙ 쓰러지기 며칠 전 김무성으로부터 “(대선) 후보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대표로서 당을 추스르라”는 YS 메모 받아
⊙ “‘청와대 7인방’, 학자 출신 대선 후보 선호”
- 최형우·원영일 부부와 장녀 최은지씨(왼쪽). 사진=조준우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무의미하다지만, “만약 이랬다면 지금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몇 가지 장면이 있다. 그중 하나가 1997년 3월, 고(故)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최형우(崔炯佑·88) 전 내무부 장관이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진 순간이다. YS 정권의 2인자로 6선 의원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최 전 장관은 이후 27년째 투병 중이다.
그가 쓰러진 사건은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인 최 전 장관은 한나라당의 최대 지분을 보유한 당내 1인자였고, 차기 대권 유력 후보로 불렸다. 그가 여당 대선 후보로 나섰다면, 또는 당대표를 맡아 조직을 철저히 관리하고 민주계와 민정계를 아우르며 대선을 치렀다면 여당 후보(한나라당 이회창)가 야당 후보(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일각에서는 최 전 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대선 불출마 요구를 받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족들은 “오랜 야당 정치 활동과 고문으로 몸이 약해진데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늘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려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26년간 집에서 간병
정치인 최형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지난 4월 19일 국가보훈부는 그를 4·19 유공자로 인정했고 최 전 장관은 4·19 묘지에 묻힐 수 있게 됐다. 지난 9월에는 이채익 의원, 김두겸 울산시장, 안효대 울산시 경제부시장, 김기환 울산시의회 의장, 이윤철 울산상공회의소 회장, 《경상일보》 김두수 본부장 등 울산의 유력 인사들이 그의 자택으로 병문안을 갔다. 최 전 장관은 이들의 예방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고, 가족들은 “현직 공직자들이 어렵게 시간을 내 방문해주셨고, 울산이 최형우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씀해주셔서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기자는 경기 성남 위례신도시의 최형우 전 장관 자택을 두 차례 찾아 8시간여에 걸쳐 인터뷰를 가졌다. 최 전 장관과 부인 원영일(元英一·82) 여사, 장녀 최은지(崔銀智·56)씨가 함께했다. 최 전 장관은 천천히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최 전 장관은 지난해 입은 낙상 때문에 실내에서도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짧은 말과 인사는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인터뷰 자리를 쭉 지키지는 못했지만 종종 이야기에 반응하기도 했다.
일단 근황을 물었다. 최 전 장관은 1997년 쓰러진 후 말은 원활하게 못했지만 신체적 기능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식사를 하고, 행사 참석과 산책 등 외출도 자주 했다. 지난 2015년엔 김영삼 전 대통령 상가(喪家)를 찾아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이후에도 가끔 외출을 하곤 했지만 낙상 후 외출을 잘 하지 못하게 되면서 몸과 마음이 다소 약해진 것 같다고 설명한 원 여사는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형우의 정치적 동지 원영일 여사
원영일 여사는 최형우 전 장관의 ‘정치적 동지’였다. 기자들은 정치인 최형우에 대해 과묵하고 꼿꼿한 최 전 장관의 이야기보다 그의 모든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원 여사의 이야기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
원 여사가 겪은 우여곡절은 여느 정치인 아내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하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대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지만, 결혼 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음식 장사에 뛰어들어 남편의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남편이 정보기관에 수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2주 이상 감금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또 중앙정치무대에서 활약하는 남편을 대신해 지역에서 선거운동에 앞장서면서 네 아이(2남 2녀)를 키워냈다.
1997년 남편이 쓰러진 후에는 치료를 위해 해외와 국내를 가리지 않고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물론 민간요법까지 안 해본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이 많을 리도 없었고, 국회의원 연금도 관련법 개정으로 없어지면서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면서 주간에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지만, 그동안의 간병은 오롯이 원 여사의 몫이었다.
원 여사는 남편을 요양원에 보낼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싫어해 간병인도 쓸 수 없었지요. 그리고 쓰러진 후 몇 년 후부턴 상당히 회복이 됐고 의사소통도 되니 집에서 잘 모시면 더 회복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장녀 은지씨는 “26년 내내 어머니는 아침엔 죽과 반찬, 점심과 저녁은 8첩반상을 아버지께 차려드린다”고 했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결혼식
최형우 전 장관과 원영일 여사는 1966년 결혼했다. 최 전 장관은 국회입법조사국에서 근무하고 원 여사는 교편을 잡고 있던 맞벌이 부부였다. 예식장을 잡으려던 원 여사는 “결혼식을 울산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강당에서 하자”는 최 전 장관의 말에 기가 막혔다고 한다.
“예식장은 좁으니 학교 강당을 예식장처럼 꾸며서 하자는 거예요. 결혼식에 사람이 얼마나 오느냐를 봐야 자기가 정말 정치를 할 재목인지 판단할 수 있다면서요. 사람은 엄청나게 많이 왔지요.
답례품이 모자라서 나중에 보내드리겠다고 명함을 걷기도 했어요. 결혼식이 끝나고 자신감을 갖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기로 했지요.”
문제는 돈이었다. 최 전 장관은 “자금만 좀 있으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을 텐데”라며 고민에 빠졌고, 원 여사도 이런 남편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지인의 식당 개업식에 초대받아 가게 된다.
“무교동 소금구이집이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보니 장사가 너무 잘되는 거예요. 카드도 없던 시절이라 현찰장사인데다가 고기와 술을 파니 단가도 높고 거의 돈을 쓸어 담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습니다. 주인 부부 중 남편은 정치 지망생이고 부인은 음대를 나왔는데 남편 뒷바라지하려고 식당을 차렸더라고요. 저 사람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하겠냐 싶어서 당장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죠.”
원 여사가 자리 잡은 곳은 광화문 조선일보사 옆 작은 2층 건물이었다. 바로 옆에 과학기술처병원(현재 노원구로 이사한 원자력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언론사와 가까이 있어 장사가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새로 문 여는 식당은 자신 있는 한 가지 음식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판단한 원 여사는 당시 유명한 갈빗집 ‘조선옥’의 주방장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젊은 부인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인 주방장은 개업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수하고 주방장도 추천해줬다.
식당은 대성공이었다. 점심메뉴로 내놓은 갈비탕은 일찌감치 다 떨어져 못 파는 경우가 허다했고, 저녁에는 언론인들을 비롯해 그들의 취재원까지 문전성시를 이뤘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에게 “(선거를) 딱 한 번만 물심양면으로 돕겠다, 당선이든 낙선이든 (식당은) 이번까지만 한다”고 말했다.
3선 개헌 저지 투쟁으로 심한 고문당해
원 여사 덕에 금전적인 부담은 덜었지만 정치인 최형우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9년 최 전 장관은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와 함께 1968년 4·19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3선 개헌 반대 투쟁 청년대표도 맡아 3선 개헌(1969년)을 저지하기 위해 앞장섰다. 당시 범청년위원회의 대표였던 이 전 총재는 7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투쟁보다는 제도권 내의 활동이 대부분이었고, 투쟁은 모두 사무총장인 최 전 장관의 몫이었다.
최 전 장관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가장 심한 고문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하다. 최 전 장관은 자서전에서 각목 구타는 물론 얼굴에 물을 붓는 물고문, 전기봉으로 몸을 지지는 전기고문, 사람을 매달아 놓고 주리를 트는 ‘통닭구이’ 등 여러 차례 다양한 종류의 고문을 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원 여사는 “유신 이후 야당 국회의원일 때 당한 고문은 그 전에 비하면 그나마 약한 편이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의원이 되기 전엔 더욱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다 잡혀가거나 고문당한 건 아니에요. 이 양반만 툭하면 어디론가 끌려갔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에 지쳐 실신했다가 깨어 보면 의사가 옆에서 혈압을 재고 있었다고 해요. 딱 죽지 않을 만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는 겁니다.
한번은 집에 왔는데 아예 걷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싫은 소리를 했죠. ‘다른 사람들은 다 수월하게 정치를 하는데 왜 당신만 그러냐’고. 그랬더니 4·19 때 죽어가던 친구와 후배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린대요. ‘최형우 너만 믿고 간다’고 했는데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는 거예요. 밤에 자다가 소리 지르며 일어나기도 하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답답하다며 창문을 활짝 열기도 해요. 딱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해서 뭐라고 하면 그 소리가 들려서 그랬다고…. 처음 정치를 시작한 이유도 친구와 후배들의 그 말 때문이었는데, 평생 그 말이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하더군요.”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2년여간 부부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한 끝에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최 전 장관은 신민당 후보로 울산 울주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나이는 만 36세. 신민당에서는 최 전 장관을 포함해 30대 의원 3명(울산 울주 최형우, 부산 동래양산 신상우, 경남 함안의령 조홍래)이 탄생하며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신민당은 89석을 얻어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113석)을 바짝 뒤쫓았다.
당시 여당 후보는 정권의 실세였던 이후락(李厚洛)의 지원을 받은 것은 물론 동생이 부산지검장으로 근무하는 등 선거 경험과 조직, 자금 등이 최 전 장관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 공화당 후보를 꺾으면서 최 전 장관은 중앙정치권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된다. 다만 초선 국회의원 생활은 1년여에 그쳤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1972년 10월 17일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유신은 최 전 장관의 가족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아이 셋을 키우던 원 여사가 정보기관에 끌려간 것이다. 정치인의 부인이 정보기관에 잡혀가 15일간 감금되다니, 요즘 세대는 상상하기 힘들 터다. 원 여사는 한숨을 쉬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 다음 날 남편은 바로 정보기관에 잡혀갔지요. 우리 지구당 당원들도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한지, 사무실 칠판에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렸다’라는 글을 써놓고 문을 닫았습니다. 정치 활동이 완전히 금지됐으니까요. 그런데 울산 시내에 삐라(전단)가 돌기 시작했는데, 최형우가 유신헌법과 비상계엄에 반대하며 삐라를 뿌렸다고 정권 쪽에서 소문을 낸 거예요. 당사자는 잡혀가고 당원들도 다 집에 갔는데 말이 됩니까. 이후락 쪽에서 당원들 잡아갈 구실을 만들려고 자작극을 벌인 거죠. 지구당 조직부장(심완구 전 울산시장)부터 줄줄이 저한테 연락이 오기에 친정 오빠집에 2명, 이모집에 2명, 친구집에 2명 이런 식으로 숨겨줬습니다. 결국은 다 잡혀갔는데 저는 ‘은닉죄’에 해당한다며 저도 잡아가겠다고 온 거예요.”
‘부일공사’에서
당시 원 여사는 돌도 되지 않은 둘째 아들을 업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고열까지 나는 상태였다. 정보기관원들에게 “아이를 놓고 갈 수는 없지 않으냐, 제발 친정 엄마가 오실 때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다. 친정 어머니가 도착하자마자 원 여사는 버스에 실려 부산 모처로 끌려갔다. 당시 사람들은 부산의 중앙정보부 조사실을 ‘부일공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는데 군용담요 한 장을 주고 시멘트 바닥에서 자라고 하더군요. 저한테는 젊은 군인 한 명이 감시역으로 붙었어요. 대학에 다니다 군대에 온 학생인데 제가 누군지 알고 부탁할 것 있으면 하라고 하더라고요. 집에 전화해서 아이 안부도 전해주고 여러모로 고마웠지요. 갑자기 끌려와서 아무 정신이 없었는데 그 학생이 ‘저쪽에 사모님네 당원들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조직부장 등 당원들하고 친정 오빠 등등 제가 숨겨줬다 잡혀간 10여 명이 다 거기 있었어요. 그분들은 ‘어떻게 여자까지 잡아오느냐’며 울부짖고 저도 펑펑 울었지요.”
원 여사는 15일간 ‘부일공사’에 갇혀 그곳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남자 당원들은 고문을 당했고, 저에겐 하루 종일 글을 쓰게 했어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똑같은 글을 매일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2주 이상을 잡혀 있다가 국민투표(편집자주-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 국민투표) 전날 내보내더라고요. 남자들은 그대로 두고 저만 보내주는데 그 사람들 생각하면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잖아요. 남편을 많이 도와주던 친한 친구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빌렸지요. 당원들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쌀 한 가마니씩 사주고 오는데 한 집 부인이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라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그러고 집에 오는 버스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집에 오니 남편이 자기도 오늘 나왔다며 집에 와 있더라고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울고 나니 당원들이 너무 걱정이 되는 겁니다. 남편은 백방으로 뛰면서 방법을 찾고 저는 애 업고 당원들 면회 가서 사식비 넣어주고요. 정말 이 나라 민주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유신 체제에 저항하다
1972년 말 유신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듬해 실시된 9대 총선에서 최 전 장관은 재선(再選)에 성공한다. 유신 정권의 야당 의원들에 대한 핍박은 더 심해졌다. 고문도 여전히 자행됐다. 원 여사는 “하루는 (최 전 장관이) 코리아나호텔에서 사람을 만나는데 정보기관원들이 양팔을 덥석 잡고 끌고 가려고 했어요. 호텔 직원들이 놀라서 말리는데 그 사람들이 그런다고 그만두겠습니까. 직원들이 다칠 것 같은 상황이 되니까 ‘내가 스스로 가겠다’며 그 사람들을 따라갔어요. 정보기관에서는 허구한 날 YS의 자금과 조직을 밝히라며 고문을 당했습니다.”
최 전 장관은 1975년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한다. “허위 자백을 강요당하는 갈릴레오를 더 이상 한 사람이라도 만들지 않아야 한다”며 고문 행태를 낱낱이 밝힌 회견문을 발표했다. 몽둥이 구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등 고문 내용은 각 언론에 상세하게 소개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심이 요동치면서 최 전 장관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에 대한 유신 정권의 압박은 더 심해졌다. 압박과 회유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했다. 원 여사의 얘기다.
“1979년 10월이었어요. 10·26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지요. 이후락씨가 보따리에 돈 5억원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이후락이 왔다니까 남편이 다락방에 숨었어요. 제가 나가서 안 계시다고 하니까 며칠 후 또 왔고,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어요. 회유 수단을 갖고 올 줄은 짐작했지만, 솔직히 실감이 안 나는 액수여서 할 말도 없었지요. 당연히 받지 않았는데 그 후 핍박이 더 심해질까 봐 겁이 나더라고요. 언제 끌려갈지 몰라 솜바지저고리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차지철에게 돈 받지 않은 유일한 야당 당직자
그러나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바뀌었다. 최 전 장관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은 10·26으로 군부 정치가 종식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같은 해 12·12사태, 이듬해 5·17 조치가 이어지면서 정치 활동이 금지됐다. 김영삼 가택연금, 김대중(金大中) 사형선고, 김종필(金鍾泌) 보안사령부 감금 등이 이때 일어난 일이다. 최 전 장관은 김동영 전 장관 등과 함께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정치 규제를 받았다. 정치 규제는 1984년에야 해제됐다.
원 여사는 당시를 “당장 먹고살기가 막막한 처지였다”고 회고했다. 정치 규제로 여당과 유사여당만이 출마할 수 있었던 11대 총선에는 출마를 아예 할 수 없었고, 그동안 받아온 의원 월급도 후원금도 끊기고 나니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다.
“10·26 이후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사무실 서랍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준 명단이 나왔어요. 야당에서 당직을 가진 의원은 다 들어가 있었는데, 그중 유일하게 이름이 빠진 사람이 최형우 당기위원장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름도 모르는 국민들이 집으로 쌀이니 된장, 고추장 같은 것들을 보내줬어요. 정말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이 많고 정의롭구나라는 생각에 울컥했지요. 제대로 정치를 잘해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규제가 해제된 1984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연합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최 전 장관은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민추협을 기반으로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1985년 2·12 12대 총선에서 67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지만, 최 전 장관은 7만6000여 표를 획득하고도 낙선하게 된다. 최 전 장관 부부는 부정선거 소송에 나섰지만 5공 치하에서 의미 없는 일이었다. 12대 총선에서 낙선한 최 전 장관은 13대 총선(1988년)을 앞두고 지역구를 부산 동래(현재 연제구)로 옮긴다. 울산에서 네 번의 선거를 치러낸 원 여사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 가꿔놓은 지역구인데 옮기느냐고 하소연을 했어요. 그런데 YS를 대통령 만들려면 부산에서 조직을 일구고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겁니다. 1987년 대선에서 YS가 낙선하고 나서 느낀 바가 많았던 것 같아요.”
최 전 장관은 부산에서 내리 3선(13~15대)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3당 합당 거부
1990년 1월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이 되는 3당 합당이 이뤄졌다. 통일민주당 원내총무였던 최 전 장관은 처음에는 민자당행을 거부했다.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해왔는데 어찌 군부 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냐는 입장이었다. YS가 몇 차례 설득에 나섰지만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았다.
“김영삼 총재는 물론 손명순 여사도 여러 번 전화를 하셨어요. ‘최형우는 당연히 온다고 생각했다, 안 오면 누굴 믿고 정치를 하냐’고요. ‘군부 세력과 손잡는 건 괴롭지만 그런 고생도 해야 우리가 정권을 잡고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설득하셨죠. 그래도 상당 기간 안 들어가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노태우 이 패거리에게 우리가 전부 손들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들어오라고 애원하고 부탁할 때까지 버틸 테니 모른 척해달라’고 YS한테 얘기했다고요.”
한참 후 민자당에 합류한 최 전 장관은 1991년 7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으로부터 정무장관으로 임명받는다. 청와대와 여당의 가교 역할을 하는 정무장관직을 받아들인 것은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 때문이었다. 원 여사는 이때 최 전 장관의 마음고생이 컸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하루는 박철언, 하루는 박태준 이런 식으로 누굴 후계자로 세울지 늘 저울질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YS 쪽으로 기울게 하려고 어찌나 애를 썼는지….
노태우 대통령이 어느 날 이런 말도 했다고 해요. ‘전두환에겐 장세동이, 김영삼에겐 최형우가 있는데 나에겐 그런 사람이 없다’고요. 외롭다고 하기에 ‘각하, 제가 있지 않습니까’라면서 ‘이후에 보호해줄 사람이 없으면 내 힘으로라도 보호해드릴 테니 나를 믿고 김영삼을 후보로 내십시오. 그래야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됩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라고요. 박철언 장관에게도 ‘시대의 흐름은 YS다, YS가 대통령 한 번 하고 나면 다음번엔 꼭 도울 테니 이번엔 YS로 가야 한다’고 수차례 설득했다고 해요.”
공직자 재산 공개 등 도입
마침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돼 14대 대통령이 됐다. 언론의 관심은 민주산악회 회장이며 전국의 조직을 규합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최 전 장관이 어떤 자리를 맡느냐에 쏠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최 전 장관에게 “군부의 잔재가 남아 있는 대한민국 정부 구조를 문민정부의 새 틀로 짜달라”며 제58대 내무부 장관(재임·1993.12~1994.12)에 임명한다. 모든 제도를 민주적으로 바꿔달라는 요구였다.
정보화 위해 앞장서
1년간의 장관 재직 기간 동안 최 전 장관은 공직자 재산 공개, 119구급대 신설, 공무원에 대한 경영마인드 교육, 전국 행정기관 정보화 시스템 도입, 공무원 정시 퇴근제도 확립 등 문민정부 내치(內治)의 틀을 만들었다.
원 여사는 정치인 최형우가 행동대장, 강성 정치인의 이미지만 부각됐던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다들 최형우라면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이라고만 아는 경우가 많아요. 박정희 대통령 때 정보기관에서 최형우는 ‘머리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렸거든요. 정보화에 앞장섰다는 점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어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지금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게 지론이었습니다. 미국 방문 시 미래학자와 IT 관련 기업인들을 만나 크게 감명받고 책을 쓰기도 했지요.”
최 전 장관은 저서 《정보화 세계의 영웅들》(1996년, 미래사)을 펴냈다. 책은 최 전 장관이 미국 방문 때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빌 게이츠, 스콧 맥닐리 선마이크로시스템즈 사장, 자바(JAVA) 개발자인 제임스 고슬링 등을 만나 대담(對談)한 내용을 담았다.
정보화를 중시했던 최 전 장관은 내무부 장관으로 일하며 전국 행정기관, 지자체는 물론 경찰 및 소방조직에도 정보화를 도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이 잘 몰라도 자신이 믿는 사람의 말은 끝까지 믿고 밀어주는 성격이었죠. 아랫사람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맞는 말이라면 바로 받아들이는 게 장점이었어요. 그때 정보화의 틀을 만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정보화는 지금보다 상당히 늦어졌을 겁니다.”
1993~1994년 1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후 물러난 최 전 장관은 본격적인 차기 정권 창출에 나선다. “5년으로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민주화할 수 없고 최소 10년은 필요하다”는 지론이었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특별히 건강이상에 관한 징조가 없었다고 했다.
‘청와대 7인방’과의 갈등
“워낙 건강체질이었고 혈압 등 수치도 높지 않았어요. 문제는 너무 바쁘고 스트레스가 컸다는 거예요.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으니 안 갈 수도 없고…. 제가 사무실 비서들한테 제발 스케줄 좀 줄이라고, 이러다 사람 죽겠다고 여러 번 얘기했어요. 그래도 본인이 못 줄이더라고요. 찾는 사람이 많은데 거절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근데 이때만 과로나 스트레스에 시달린 게 아니고 민자당 사무총장, 내무부 장관, 여당 의원으로 일하면서 오히려 야당 시절보다 스트레스가 더 많았어요. 야당은 지적하고 투쟁하는 게 일이지만 여당과 장관은 대한민국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잖아요. 또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권이다 보니 민정계, 공화계의 견제도 심했고요. 민주산악회 회장으로 전국 조직도 계속 관리해야 했죠. YS 정권 들어 약 5년간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을 하다 보니 결국 쓰러진 이유도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형우 전 장관이 쓰러지기 며칠 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대선) 후보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대표로서 당을 추스르라”는 메모를 김무성 의원을 통해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최 전 장관이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원 여사는 어떻게 생각할까.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신 취지는 이해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불러 얘기하셨다면 놀라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그걸 왜 김무성 의원이 전달했을까요? 그래서 (최 전 장관이) 화를 많이 냈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의 전적인 뜻이 아니었다는 거죠. 김현철씨도 인터뷰에서 세간의 오해와 달리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김무성 의원 혼자 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요. 쓰러진 후 김무성 의원이 서울대병원으로 병문안을 왔기에 제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자신은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하는데 제 심증으로는 당시 청와대 7인방(편집자주-이원종·김무성·홍인길·강삼재·김현철 및 김현철 측근 2명을 일컫는 말. ‘문민정부 7인방’으로도 불림)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해요.”
원 여사의 말대로 7인방이 일을 꾸몄다면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원 여사는 당내 최대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최 전 장관이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견제하려 했다고 짐작했다. 최형우 같은 강한 성격의 후보보다는 ‘말 잘 듣는’ 후보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7인방’은 학자 출신 후보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당대표를 민정계에 내줄 수 없다는 명분으로 최형우가 당대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어요. 결국 스스로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포기했고, 정권 재창출을 위해 적합한 후보를 선출하고 밀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독일병원, “뇌졸중 아니라 의료사고에 가깝다”
최형우 전 장관은 서울대병원에서 3개월여 치료에 집중했지만 큰 차도가 없었다. 주변인들은 의료 선진국에서 치료받을 것을 권하며 다양한 정보를 주었고, 원영일 여사는 뇌수술 분야에서 권위 있는 병원이 있는 독일 마인츠로 향했다. 독일 의료진은 최 전 장관의 상태를 보며 “뇌졸중이 아닌 경동맥박리로 뇌에 피가 공급되지 못하면서 뇌경색이 일어난 것이며, 골든타임인 6시간 이내 수술했으면 회복할 수 있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원 여사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원 여사는 “이제야 말할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서울대병원에 대한 원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독일에서는 이건 의료사고에 가깝다고 해서 의료사고소송가능 기한인 5년 내내 고민을 했어요.”
독일에 머물던 최형우 전 장관과 원영일 여사는 “중국에 관련 명의(名醫)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중국 상하이의 한 병원으로 이동했다. 대선이 임박한 시점이었고 이회창, 이인제, 이수성 등 대선 주자들이 병문안을 왔다. 원 여사는 모두가 남편을 이용만 하려는 것 같아 화가 났는데, 그 와중에 최 전 장관은 대선 전에 빨리 귀국해야 한다는 뜻을 표현하며 원 여사를 재촉했다고 한다. 남편의 뜻에 따라 함께 귀국한 원 여사는 제주, 경주, 강원도 등 전국의 용하다는 의사와 민간요법은 다 찾아다녔다. 쓰러진 지 5년이 지났을 때는 몸이 상당히 회복돼 외출을 할 수 있게 됐고, 간단한 인사말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26년의 간병 생활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친정 5남매, 시댁 9남매가 번갈아 매달려 간병을 했고, 간병 기간이 10여 년을 넘어서자 체력적 한계에 달한 원 여사는 미국에 거주 중인 두 아들에게 “둘 중 하나는 귀국해 엄마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연락했다. 미국에서 사업으로 기반을 마련한 작은아들이 모두 접고 귀국해 현재 최 전 장관 자택 인근에 살고 있고, 한국과 미국에서 화랑을 운영했던 큰딸이 현재 부모와 함께 살며 간병을 돕고 있다. 큰아들은 미국에 거주 중이며 작은딸은 최 전 장관이 독일에서 치료받을 때 인연을 맺은 의사와 결혼해 독일에서 살고 있다.
‘장한어머니상’ 받은 원 여사
26년간 남편을 지켜온 원영일 여사는 최근 국가 유공자 가족 중 선정되는 ‘장한어머니상’을 받았다. 오랜 기간 남편을 간병하고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가 싶더니 돌연 쓰러진 가장을 바라보아야 했던 가족의 심정은 기자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민주화와 문민정부의 기틀을 닦은 최 전 장관과 그 가족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상이 필요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화와 문민정부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IMF외환위기 사태로 저평가돼 있듯 YS와 관련된 인물들도 저평가된 것은 아닌가라는 안타까움도 있다.
원 여사의 바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민주화 세대를 기억해주고 그들의 뜻을 이어 살기 좋은 나라를 이어가는 것이다. 한평생 남편과 함께 정치에 몸담았던 원 여사는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양극화가 심해진 작금의 정치 상황이 안타깝다며 최 전 장관과도 같은 의견을 자주 교환한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이념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상생(相生)의 정치를 해나갔으면 합니다. 정치는 대립이 아닌 파트너십이에요. 여야가 서로 양보하고 협의해야 나라가 평온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쓰러진 사건은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인 최 전 장관은 한나라당의 최대 지분을 보유한 당내 1인자였고, 차기 대권 유력 후보로 불렸다. 그가 여당 대선 후보로 나섰다면, 또는 당대표를 맡아 조직을 철저히 관리하고 민주계와 민정계를 아우르며 대선을 치렀다면 여당 후보(한나라당 이회창)가 야당 후보(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일각에서는 최 전 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대선 불출마 요구를 받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족들은 “오랜 야당 정치 활동과 고문으로 몸이 약해진데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늘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려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26년간 집에서 간병
![]() |
지난 9월 19일 울산지역 정·관·재계 인사들이 최형우 전 장관의 자택을 찾았다. 왼쪽부터 안효대 울산시 경제부시장, 이윤철 울산상공회의소 회장, 이채익 국민의힘 울산시당위원장, 김두겸 울산시장, 김기환 울산시의회 의장. 사진=최형우 |
기자는 경기 성남 위례신도시의 최형우 전 장관 자택을 두 차례 찾아 8시간여에 걸쳐 인터뷰를 가졌다. 최 전 장관과 부인 원영일(元英一·82) 여사, 장녀 최은지(崔銀智·56)씨가 함께했다. 최 전 장관은 천천히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최 전 장관은 지난해 입은 낙상 때문에 실내에서도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짧은 말과 인사는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인터뷰 자리를 쭉 지키지는 못했지만 종종 이야기에 반응하기도 했다.
일단 근황을 물었다. 최 전 장관은 1997년 쓰러진 후 말은 원활하게 못했지만 신체적 기능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식사를 하고, 행사 참석과 산책 등 외출도 자주 했다. 지난 2015년엔 김영삼 전 대통령 상가(喪家)를 찾아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이후에도 가끔 외출을 하곤 했지만 낙상 후 외출을 잘 하지 못하게 되면서 몸과 마음이 다소 약해진 것 같다고 설명한 원 여사는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르겠다”며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형우는 누구인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며 김영삼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을 맡으며 정권의 2인자로 불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람들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우(右)형우, 좌(左)동영’이다. 조직은 최형우 전 장관이, 자금은 김동영 전 정무장관이 담당해 김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동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1960년 4·19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대표로 시위에 앞장서면서 정치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1968년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와 함께 4·19 및 6·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3선 개헌 저지에 앞장섰다.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 소속으로 고향인 울산 울주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8~10·13~15대까지 총 6선(選)을 했다. 1990년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최 전 장관은 사무총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정무장관을 맡아 민정당 출신 김윤환 전 의원 등과 함께 정치권 내부 화합과 조율 등 정무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민주산악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YS의 조직을 관리하는 등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내무부 장관을 맡아 문민정부의 개혁에 앞장섰다. 1996년 총선에서 6선 고지에 오르며 유력 대권 주자로 떠올랐지만, 1997년 3월 갑작스럽게 쓰러진 후 2023년 현재까지 와병중이다. |
최형우의 정치적 동지 원영일 여사
원영일 여사는 최형우 전 장관의 ‘정치적 동지’였다. 기자들은 정치인 최형우에 대해 과묵하고 꼿꼿한 최 전 장관의 이야기보다 그의 모든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원 여사의 이야기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
원 여사가 겪은 우여곡절은 여느 정치인 아내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하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대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지만, 결혼 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음식 장사에 뛰어들어 남편의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남편이 정보기관에 수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2주 이상 감금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또 중앙정치무대에서 활약하는 남편을 대신해 지역에서 선거운동에 앞장서면서 네 아이(2남 2녀)를 키워냈다.
1997년 남편이 쓰러진 후에는 치료를 위해 해외와 국내를 가리지 않고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물론 민간요법까지 안 해본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이 많을 리도 없었고, 국회의원 연금도 관련법 개정으로 없어지면서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면서 주간에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지만, 그동안의 간병은 오롯이 원 여사의 몫이었다.
원 여사는 남편을 요양원에 보낼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걸 싫어해 간병인도 쓸 수 없었지요. 그리고 쓰러진 후 몇 년 후부턴 상당히 회복이 됐고 의사소통도 되니 집에서 잘 모시면 더 회복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장녀 은지씨는 “26년 내내 어머니는 아침엔 죽과 반찬, 점심과 저녁은 8첩반상을 아버지께 차려드린다”고 했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결혼식
![]() |
2016년 9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의 부인 원영일 여사가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최형우 |
“예식장은 좁으니 학교 강당을 예식장처럼 꾸며서 하자는 거예요. 결혼식에 사람이 얼마나 오느냐를 봐야 자기가 정말 정치를 할 재목인지 판단할 수 있다면서요. 사람은 엄청나게 많이 왔지요.
답례품이 모자라서 나중에 보내드리겠다고 명함을 걷기도 했어요. 결혼식이 끝나고 자신감을 갖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기로 했지요.”
문제는 돈이었다. 최 전 장관은 “자금만 좀 있으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을 텐데”라며 고민에 빠졌고, 원 여사도 이런 남편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지인의 식당 개업식에 초대받아 가게 된다.
“무교동 소금구이집이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보니 장사가 너무 잘되는 거예요. 카드도 없던 시절이라 현찰장사인데다가 고기와 술을 파니 단가도 높고 거의 돈을 쓸어 담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습니다. 주인 부부 중 남편은 정치 지망생이고 부인은 음대를 나왔는데 남편 뒷바라지하려고 식당을 차렸더라고요. 저 사람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하겠냐 싶어서 당장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죠.”
원 여사가 자리 잡은 곳은 광화문 조선일보사 옆 작은 2층 건물이었다. 바로 옆에 과학기술처병원(현재 노원구로 이사한 원자력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언론사와 가까이 있어 장사가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새로 문 여는 식당은 자신 있는 한 가지 음식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판단한 원 여사는 당시 유명한 갈빗집 ‘조선옥’의 주방장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젊은 부인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인 주방장은 개업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수하고 주방장도 추천해줬다.
식당은 대성공이었다. 점심메뉴로 내놓은 갈비탕은 일찌감치 다 떨어져 못 파는 경우가 허다했고, 저녁에는 언론인들을 비롯해 그들의 취재원까지 문전성시를 이뤘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에게 “(선거를) 딱 한 번만 물심양면으로 돕겠다, 당선이든 낙선이든 (식당은) 이번까지만 한다”고 말했다.
원 여사 덕에 금전적인 부담은 덜었지만 정치인 최형우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9년 최 전 장관은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와 함께 1968년 4·19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3선 개헌 반대 투쟁 청년대표도 맡아 3선 개헌(1969년)을 저지하기 위해 앞장섰다. 당시 범청년위원회의 대표였던 이 전 총재는 7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투쟁보다는 제도권 내의 활동이 대부분이었고, 투쟁은 모두 사무총장인 최 전 장관의 몫이었다.
최 전 장관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가장 심한 고문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하다. 최 전 장관은 자서전에서 각목 구타는 물론 얼굴에 물을 붓는 물고문, 전기봉으로 몸을 지지는 전기고문, 사람을 매달아 놓고 주리를 트는 ‘통닭구이’ 등 여러 차례 다양한 종류의 고문을 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원 여사는 “유신 이후 야당 국회의원일 때 당한 고문은 그 전에 비하면 그나마 약한 편이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의원이 되기 전엔 더욱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다 잡혀가거나 고문당한 건 아니에요. 이 양반만 툭하면 어디론가 끌려갔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에 지쳐 실신했다가 깨어 보면 의사가 옆에서 혈압을 재고 있었다고 해요. 딱 죽지 않을 만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는 겁니다.
한번은 집에 왔는데 아예 걷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싫은 소리를 했죠. ‘다른 사람들은 다 수월하게 정치를 하는데 왜 당신만 그러냐’고. 그랬더니 4·19 때 죽어가던 친구와 후배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린대요. ‘최형우 너만 믿고 간다’고 했는데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는 거예요. 밤에 자다가 소리 지르며 일어나기도 하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답답하다며 창문을 활짝 열기도 해요. 딱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해서 뭐라고 하면 그 소리가 들려서 그랬다고…. 처음 정치를 시작한 이유도 친구와 후배들의 그 말 때문이었는데, 평생 그 말이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하더군요.”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2년여간 부부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한 끝에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최 전 장관은 신민당 후보로 울산 울주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나이는 만 36세. 신민당에서는 최 전 장관을 포함해 30대 의원 3명(울산 울주 최형우, 부산 동래양산 신상우, 경남 함안의령 조홍래)이 탄생하며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신민당은 89석을 얻어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113석)을 바짝 뒤쫓았다.
당시 여당 후보는 정권의 실세였던 이후락(李厚洛)의 지원을 받은 것은 물론 동생이 부산지검장으로 근무하는 등 선거 경험과 조직, 자금 등이 최 전 장관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 공화당 후보를 꺾으면서 최 전 장관은 중앙정치권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된다. 다만 초선 국회의원 생활은 1년여에 그쳤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1972년 10월 17일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유신은 최 전 장관의 가족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아이 셋을 키우던 원 여사가 정보기관에 끌려간 것이다. 정치인의 부인이 정보기관에 잡혀가 15일간 감금되다니, 요즘 세대는 상상하기 힘들 터다. 원 여사는 한숨을 쉬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 다음 날 남편은 바로 정보기관에 잡혀갔지요. 우리 지구당 당원들도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한지, 사무실 칠판에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렸다’라는 글을 써놓고 문을 닫았습니다. 정치 활동이 완전히 금지됐으니까요. 그런데 울산 시내에 삐라(전단)가 돌기 시작했는데, 최형우가 유신헌법과 비상계엄에 반대하며 삐라를 뿌렸다고 정권 쪽에서 소문을 낸 거예요. 당사자는 잡혀가고 당원들도 다 집에 갔는데 말이 됩니까. 이후락 쪽에서 당원들 잡아갈 구실을 만들려고 자작극을 벌인 거죠. 지구당 조직부장(심완구 전 울산시장)부터 줄줄이 저한테 연락이 오기에 친정 오빠집에 2명, 이모집에 2명, 친구집에 2명 이런 식으로 숨겨줬습니다. 결국은 다 잡혀갔는데 저는 ‘은닉죄’에 해당한다며 저도 잡아가겠다고 온 거예요.”
당시 원 여사는 돌도 되지 않은 둘째 아들을 업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고열까지 나는 상태였다. 정보기관원들에게 “아이를 놓고 갈 수는 없지 않으냐, 제발 친정 엄마가 오실 때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다. 친정 어머니가 도착하자마자 원 여사는 버스에 실려 부산 모처로 끌려갔다. 당시 사람들은 부산의 중앙정보부 조사실을 ‘부일공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는데 군용담요 한 장을 주고 시멘트 바닥에서 자라고 하더군요. 저한테는 젊은 군인 한 명이 감시역으로 붙었어요. 대학에 다니다 군대에 온 학생인데 제가 누군지 알고 부탁할 것 있으면 하라고 하더라고요. 집에 전화해서 아이 안부도 전해주고 여러모로 고마웠지요. 갑자기 끌려와서 아무 정신이 없었는데 그 학생이 ‘저쪽에 사모님네 당원들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조직부장 등 당원들하고 친정 오빠 등등 제가 숨겨줬다 잡혀간 10여 명이 다 거기 있었어요. 그분들은 ‘어떻게 여자까지 잡아오느냐’며 울부짖고 저도 펑펑 울었지요.”
원 여사는 15일간 ‘부일공사’에 갇혀 그곳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남자 당원들은 고문을 당했고, 저에겐 하루 종일 글을 쓰게 했어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똑같은 글을 매일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2주 이상을 잡혀 있다가 국민투표(편집자주-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 국민투표) 전날 내보내더라고요. 남자들은 그대로 두고 저만 보내주는데 그 사람들 생각하면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잖아요. 남편을 많이 도와주던 친한 친구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빌렸지요. 당원들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쌀 한 가마니씩 사주고 오는데 한 집 부인이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라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그러고 집에 오는 버스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집에 오니 남편이 자기도 오늘 나왔다며 집에 와 있더라고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울고 나니 당원들이 너무 걱정이 되는 겁니다. 남편은 백방으로 뛰면서 방법을 찾고 저는 애 업고 당원들 면회 가서 사식비 넣어주고요. 정말 이 나라 민주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유신 체제에 저항하다
![]() |
최형우 전 장관이 2015년 11월 23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며 오열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최 전 장관은 1975년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한다. “허위 자백을 강요당하는 갈릴레오를 더 이상 한 사람이라도 만들지 않아야 한다”며 고문 행태를 낱낱이 밝힌 회견문을 발표했다. 몽둥이 구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등 고문 내용은 각 언론에 상세하게 소개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심이 요동치면서 최 전 장관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에 대한 유신 정권의 압박은 더 심해졌다. 압박과 회유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했다. 원 여사의 얘기다.
“1979년 10월이었어요. 10·26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지요. 이후락씨가 보따리에 돈 5억원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이후락이 왔다니까 남편이 다락방에 숨었어요. 제가 나가서 안 계시다고 하니까 며칠 후 또 왔고,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어요. 회유 수단을 갖고 올 줄은 짐작했지만, 솔직히 실감이 안 나는 액수여서 할 말도 없었지요. 당연히 받지 않았는데 그 후 핍박이 더 심해질까 봐 겁이 나더라고요. 언제 끌려갈지 몰라 솜바지저고리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차지철에게 돈 받지 않은 유일한 야당 당직자
![]() |
최형우 전 장관 등 민추협 회원들이 1994년 5월 민추협 창립 10주년 기념 모임을 갖고 있다. 사진=조선DB |
원 여사는 당시를 “당장 먹고살기가 막막한 처지였다”고 회고했다. 정치 규제로 여당과 유사여당만이 출마할 수 있었던 11대 총선에는 출마를 아예 할 수 없었고, 그동안 받아온 의원 월급도 후원금도 끊기고 나니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다.
“10·26 이후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사무실 서랍에서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준 명단이 나왔어요. 야당에서 당직을 가진 의원은 다 들어가 있었는데, 그중 유일하게 이름이 빠진 사람이 최형우 당기위원장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름도 모르는 국민들이 집으로 쌀이니 된장, 고추장 같은 것들을 보내줬어요. 정말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이 많고 정의롭구나라는 생각에 울컥했지요. 제대로 정치를 잘해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규제가 해제된 1984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연합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최 전 장관은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민추협을 기반으로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1985년 2·12 12대 총선에서 67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지만, 최 전 장관은 7만6000여 표를 획득하고도 낙선하게 된다. 최 전 장관 부부는 부정선거 소송에 나섰지만 5공 치하에서 의미 없는 일이었다. 12대 총선에서 낙선한 최 전 장관은 13대 총선(1988년)을 앞두고 지역구를 부산 동래(현재 연제구)로 옮긴다. 울산에서 네 번의 선거를 치러낸 원 여사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 가꿔놓은 지역구인데 옮기느냐고 하소연을 했어요. 그런데 YS를 대통령 만들려면 부산에서 조직을 일구고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겁니다. 1987년 대선에서 YS가 낙선하고 나서 느낀 바가 많았던 것 같아요.”
최 전 장관은 부산에서 내리 3선(13~15대)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3당 합당 거부
![]() |
최형우 전 장관은 4당 체제에서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로 활약했다. 1988년 9월 한자리에 모인 4당 원내총무(김원기 평민당, 김윤환 민정당, 최형우 통일민주당, 김용채 공화당). 사진=조선DB |
“김영삼 총재는 물론 손명순 여사도 여러 번 전화를 하셨어요. ‘최형우는 당연히 온다고 생각했다, 안 오면 누굴 믿고 정치를 하냐’고요. ‘군부 세력과 손잡는 건 괴롭지만 그런 고생도 해야 우리가 정권을 잡고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설득하셨죠. 그래도 상당 기간 안 들어가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노태우 이 패거리에게 우리가 전부 손들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들어오라고 애원하고 부탁할 때까지 버틸 테니 모른 척해달라’고 YS한테 얘기했다고요.”
한참 후 민자당에 합류한 최 전 장관은 1991년 7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으로부터 정무장관으로 임명받는다. 청와대와 여당의 가교 역할을 하는 정무장관직을 받아들인 것은 YS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 때문이었다. 원 여사는 이때 최 전 장관의 마음고생이 컸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하루는 박철언, 하루는 박태준 이런 식으로 누굴 후계자로 세울지 늘 저울질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YS 쪽으로 기울게 하려고 어찌나 애를 썼는지….
노태우 대통령이 어느 날 이런 말도 했다고 해요. ‘전두환에겐 장세동이, 김영삼에겐 최형우가 있는데 나에겐 그런 사람이 없다’고요. 외롭다고 하기에 ‘각하, 제가 있지 않습니까’라면서 ‘이후에 보호해줄 사람이 없으면 내 힘으로라도 보호해드릴 테니 나를 믿고 김영삼을 후보로 내십시오. 그래야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됩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라고요. 박철언 장관에게도 ‘시대의 흐름은 YS다, YS가 대통령 한 번 하고 나면 다음번엔 꼭 도울 테니 이번엔 YS로 가야 한다’고 수차례 설득했다고 해요.”
공직자 재산 공개 등 도입
마침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돼 14대 대통령이 됐다. 언론의 관심은 민주산악회 회장이며 전국의 조직을 규합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최 전 장관이 어떤 자리를 맡느냐에 쏠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최 전 장관에게 “군부의 잔재가 남아 있는 대한민국 정부 구조를 문민정부의 새 틀로 짜달라”며 제58대 내무부 장관(재임·1993.12~1994.12)에 임명한다. 모든 제도를 민주적으로 바꿔달라는 요구였다.
내무부 장관 최형우는 무슨 일을 했나 제58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최형우 전 장관은 재직했던 1년간 김영삼 대통령의 당부를 받아 대한민국 정부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역할을 했다. 취임 일성으로 현장행정을 강조했고 탁상행정이 아닌 현장행정을 통한 개혁을 다짐했던 최 전 장관은 모든 민생 문제에 대해 현장 파악을 최우선으로 했다. 당시 새롭게 시행된 민생과 관련한 정책은 ▲전국의 공중화장실 환경 개선 ▲신호등에 시각장애인용 소리신호 신설 ▲서울 상수도 수질 개선 등이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전국 고속도로 화장실 변기는 대부분 ‘화변기’라 불리는 쪼그려 앉는 방식의 변기였다. 전국 여러 곳의 고속도로 화장실을 둘러본 최 전 장관은 이를 100% 양변기로 교체하고 휴지를 의무적으로 비치하도록 했다. 전국의 신호등도 장애인을 위한 소리신호를 추가했고, 서울의 상수도 오염 현상이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개선했다. 이들 정책에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됐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일이라면 예산을 아끼지 마라”고 당부한 덕에 가능했다. 최 전 장관은 울산광역시 승격 등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역 주민들의 생활 편의성을 높였고, 대국민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근무 환경도 개선했다. 내무부 공무원들에게 “퇴근시각을 철저히 지키고, 야근 대신 자기계발에 힘쓰라”고 당부해 ‘칼퇴근’ 문화가 정착됐다. 경찰이 10년 근속하면 자동으로 승급할 수 있도록, 또 소방관이 순직하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했다. 또 119가 화재 신고뿐만이 아니라 구급 신고도 겸하도록 했다. 최 전 장관은 전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권익이 신장돼야 한다는 점에도 관심이 컸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여성 시장(市長)이 탄생한 시점도 이때다. 1994년 관선 시장으로 임명된 전재희(全在姬) 시장은 시민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인기를 얻으면서 여성 시장 시대를 열었다. |
정보화 위해 앞장서
1년간의 장관 재직 기간 동안 최 전 장관은 공직자 재산 공개, 119구급대 신설, 공무원에 대한 경영마인드 교육, 전국 행정기관 정보화 시스템 도입, 공무원 정시 퇴근제도 확립 등 문민정부 내치(內治)의 틀을 만들었다.
원 여사는 정치인 최형우가 행동대장, 강성 정치인의 이미지만 부각됐던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다들 최형우라면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이라고만 아는 경우가 많아요. 박정희 대통령 때 정보기관에서 최형우는 ‘머리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렸거든요. 정보화에 앞장섰다는 점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어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지금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게 지론이었습니다. 미국 방문 시 미래학자와 IT 관련 기업인들을 만나 크게 감명받고 책을 쓰기도 했지요.”
최 전 장관은 저서 《정보화 세계의 영웅들》(1996년, 미래사)을 펴냈다. 책은 최 전 장관이 미국 방문 때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빌 게이츠, 스콧 맥닐리 선마이크로시스템즈 사장, 자바(JAVA) 개발자인 제임스 고슬링 등을 만나 대담(對談)한 내용을 담았다.
정보화를 중시했던 최 전 장관은 내무부 장관으로 일하며 전국 행정기관, 지자체는 물론 경찰 및 소방조직에도 정보화를 도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이 잘 몰라도 자신이 믿는 사람의 말은 끝까지 믿고 밀어주는 성격이었죠. 아랫사람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맞는 말이라면 바로 받아들이는 게 장점이었어요. 그때 정보화의 틀을 만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정보화는 지금보다 상당히 늦어졌을 겁니다.”
1993~1994년 1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후 물러난 최 전 장관은 본격적인 차기 정권 창출에 나선다. “5년으로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민주화할 수 없고 최소 10년은 필요하다”는 지론이었다. 원 여사는 최 전 장관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특별히 건강이상에 관한 징조가 없었다고 했다.
‘청와대 7인방’과의 갈등
![]() |
1996년 신한국당 한 행사에 참석한 당시 대권 주자들. 두 번째 줄에 박찬종, 최형우, 이회창, 이만섭 의원이 있다. 사진=조선DB |
최형우 전 장관이 쓰러지기 며칠 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대선) 후보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당대표로서 당을 추스르라”는 메모를 김무성 의원을 통해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최 전 장관이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원 여사는 어떻게 생각할까.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신 취지는 이해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불러 얘기하셨다면 놀라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그걸 왜 김무성 의원이 전달했을까요? 그래서 (최 전 장관이) 화를 많이 냈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의 전적인 뜻이 아니었다는 거죠. 김현철씨도 인터뷰에서 세간의 오해와 달리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김무성 의원 혼자 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요. 쓰러진 후 김무성 의원이 서울대병원으로 병문안을 왔기에 제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자신은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하는데 제 심증으로는 당시 청와대 7인방(편집자주-이원종·김무성·홍인길·강삼재·김현철 및 김현철 측근 2명을 일컫는 말. ‘문민정부 7인방’으로도 불림)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해요.”
원 여사의 말대로 7인방이 일을 꾸몄다면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원 여사는 당내 최대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최 전 장관이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견제하려 했다고 짐작했다. 최형우 같은 강한 성격의 후보보다는 ‘말 잘 듣는’ 후보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7인방’은 학자 출신 후보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당대표를 민정계에 내줄 수 없다는 명분으로 최형우가 당대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어요. 결국 스스로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포기했고, 정권 재창출을 위해 적합한 후보를 선출하고 밀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독일병원, “뇌졸중 아니라 의료사고에 가깝다”
![]() |
YS 정권의 2인자였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 활짝 웃고 있다. 27년째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사진=조준우 기자 |
“서울대병원에 대한 원망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독일에서는 이건 의료사고에 가깝다고 해서 의료사고소송가능 기한인 5년 내내 고민을 했어요.”
독일에 머물던 최형우 전 장관과 원영일 여사는 “중국에 관련 명의(名醫)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중국 상하이의 한 병원으로 이동했다. 대선이 임박한 시점이었고 이회창, 이인제, 이수성 등 대선 주자들이 병문안을 왔다. 원 여사는 모두가 남편을 이용만 하려는 것 같아 화가 났는데, 그 와중에 최 전 장관은 대선 전에 빨리 귀국해야 한다는 뜻을 표현하며 원 여사를 재촉했다고 한다. 남편의 뜻에 따라 함께 귀국한 원 여사는 제주, 경주, 강원도 등 전국의 용하다는 의사와 민간요법은 다 찾아다녔다. 쓰러진 지 5년이 지났을 때는 몸이 상당히 회복돼 외출을 할 수 있게 됐고, 간단한 인사말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26년의 간병 생활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친정 5남매, 시댁 9남매가 번갈아 매달려 간병을 했고, 간병 기간이 10여 년을 넘어서자 체력적 한계에 달한 원 여사는 미국에 거주 중인 두 아들에게 “둘 중 하나는 귀국해 엄마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연락했다. 미국에서 사업으로 기반을 마련한 작은아들이 모두 접고 귀국해 현재 최 전 장관 자택 인근에 살고 있고, 한국과 미국에서 화랑을 운영했던 큰딸이 현재 부모와 함께 살며 간병을 돕고 있다. 큰아들은 미국에 거주 중이며 작은딸은 최 전 장관이 독일에서 치료받을 때 인연을 맺은 의사와 결혼해 독일에서 살고 있다.
63년 만에 4·19 유공자 인정받은 최형우 “문재인 정부 시절 보훈처, 4·19 유공자 신청 거부” 최형우 전 장관은 1960년 4·19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대표로 참여했다. 그러나 최 장관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원 여사의 말이다. “역사적 현장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 왜 그걸 보상받아야 하느냐고 하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비서진도 다른 분들처럼 신청하고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남편이 계속 못 하게 했어요. 그 후에도 여러 번 권했는데 답은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투병이 길어지니까 몸도 마음도 조금씩 약해지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나이를 계속 먹다 보니 갈 날이 멀지 않음을 느끼고 그 후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원래는 선산(先山)으로 가겠다고 했었지만요. 4·19 유공자가 되면 4·19묘지로 갈 수 있고 그게 민주화에 평생을 바쳐온 남편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신청을 하자고 물어봤더니 그러라고 해서 서류를 갖춰서 신청했어요.” 그러나 최 전 장관의 4·19 유공자 신청은 보훈처에서 거절당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다. 이유는 ‘서류 미비’였다. 원 여사는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최형우가 4·19 때 동국대 대표로 앞장선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4월 19일에 동국대생들이 바로 경무대로 쳐들어갔잖아요. 좌파 정권에서 신청한 게 잘못이었을까요. 안 그래도 나라가 망가져가는 것 같아서 울분이 터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원 여사와 가족들은 정권이 바뀐 후인 작년에 그를 평소 존경했다는 언론인(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도움을 받아 각종 보도자료를 확보해 신청서를 넣었고, 최 전 장관은 올해 4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
‘장한어머니상’ 받은 원 여사
26년간 남편을 지켜온 원영일 여사는 최근 국가 유공자 가족 중 선정되는 ‘장한어머니상’을 받았다. 오랜 기간 남편을 간병하고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가 싶더니 돌연 쓰러진 가장을 바라보아야 했던 가족의 심정은 기자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민주화와 문민정부의 기틀을 닦은 최 전 장관과 그 가족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상이 필요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화와 문민정부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IMF외환위기 사태로 저평가돼 있듯 YS와 관련된 인물들도 저평가된 것은 아닌가라는 안타까움도 있다.
원 여사의 바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민주화 세대를 기억해주고 그들의 뜻을 이어 살기 좋은 나라를 이어가는 것이다. 한평생 남편과 함께 정치에 몸담았던 원 여사는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양극화가 심해진 작금의 정치 상황이 안타깝다며 최 전 장관과도 같은 의견을 자주 교환한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이념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상생(相生)의 정치를 해나갔으면 합니다. 정치는 대립이 아닌 파트너십이에요. 여야가 서로 양보하고 협의해야 나라가 평온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