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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한국영화사에 ‘다시 없을 傳說’ 신영균

“남 험담 못 하는 ‘상남자 스타일’의 남성 매력 아이콘”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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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 예명 申一天으로 연극무대서 활약
⊙ 배우는 우선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소리쳐
⊙ 머슴 役과 임금 役… “어느 쪽이 더 내 몸에 맞는 역인지 지금도 결론 못 내”
⊙ “늘 대본을 끼고 살아. 연기 중에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 인생작 10편… 〈연산군〉 〈빨간 마후라〉 〈대원군〉 〈남과 북〉 〈갯마을〉 〈상록수〉 〈5인의 해병〉 〈달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한번〉

申榮均
1928년생. 서울대 치과대학 졸업. 서강대 명예문학 박사 / 해군 대위 전역(군의관), 동남치과 개업, 영화 〈과부〉(1960)로 데뷔. 작품 300여 편에서 주연으로 활약 /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15·16대 국회의원 역임 / 대종상 남우주연상(3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3회),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자상(2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2회) 수상 / 現 신영문화예술재단 명예이사장
사진=조준우
  한국영화사에 그만 한 인물이 다시 없을지 모른다. 신영균(申榮均),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70년대를 활활 불태운 배우다. 한국영화의 마지막 자존심, 연기력을 갖춘 정통파 배우다. 배우 신성일(申星一)을 알랭 들롱과 비교한다면 그는 한국의 말론 브랜도, 존 웨인이다.
 
  그는 배우(actor) 그 이상의 스타(star)다. “신성일·김진규(金振奎)·최무룡(崔戊龍)과는 다른 외모로, 장동휘(張東輝)·박노식(朴魯植)·허장강(許長江)과는 다른 아우라”로 당대 최고 스타가 되었다.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타는 여왕벌처럼 초인격적인 로열젤리를 흡수하여’ 배우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설령 배우는 죽어도 스타는 죽지 않는다. 불멸이다. 대중을, 관객을 한갓 비굴한 노예로 부리는 거대한 독재자다. 신영균은 1960년대 수많은 군왕(君王)으로 출연했을 만큼 상남자 스타일의 왕 중 왕이자 한국영화 ‘남성 매력’의 아이콘이었다.
 
  다른 스타들처럼 스캔들에도 휩싸일 법한데 그 흔한 루머조차 없었다. 아내 김선희(金善姬·87) 여사가 늘 지근에서 매니저 역을 맡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적 품성이 몸에 뱄기 때문이리라. 죽기 살기로 영화를 했으니 어쩌면 영화가 그의 신앙일지 모른다.
 
  ‘인간 신영균’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취재해온 대한언론인회 김두호 이사(‘인터뷰365’ 발행인)를 만났더니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지미(金芝美) 배우가 제게 배우 신영균의 장점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서슴없이 ‘남 욕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답하자, 그녀는 ‘맞아, 맞아요. 그 양반 입에서 남의 험담 들어본 사람이 없다’면서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정답임을 인정했어요.”
 
  배우 엄앵란(嚴鶯蘭)씨의 회고에 따르면 “(신영균은) 다른 사람들이 잡담할 때 혼자 대본만 읽고, 영화 밖에선 목사님”이었다.
 
 
  첫 대사가 인생을 바꾸다
 
신영균의 회고록 《엔딩 크레딧》.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스토리인 영화 〈화조〉(1978) 이후 영화배우로선 사실상 은퇴했다. 이후 사업가,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금호극장·명보극장을 인수했고, 우리나라 4대 제과인 명보제과를 운영했다. 국내 최초의 개인 볼링장을 차렸고, 부동산임대업·한국맥도날드·부티크 호텔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8년간 정치 일선에서 뛰었다. 그러더니 2010년 제주 신영영화박물관과 명보아트홀을 사회에 기부했다. 기부 규모가 500억원이 넘는다.
 
  기자는 이 ‘전설’을 만나기 위해 인터뷰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난해 10월에 나온 회고록을 서점에서 일찌감치 구입했고 사인을 받으리라 결심했다. 지난 2월 5일 서울 명보예술극장 뒤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빨간 마후라’의 신영균이 저 멀리서 빨간 넥타이를 매고, 빨간 행커치프를 꽂고서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이기에 잠을 설쳤어요.”
 
  영화평론가 전찬일이 “90대인 그가 ‘아직도 연기를 꿈꾼다’고 했다”고 한 말이 사실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한 첫 대사도, 어느 영웅의 서사시처럼 드라마틱하다. 신영균은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한 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닌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당시 크리스마스 성극(聖劇)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본어 대사를 잊을 수 없었다.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모두 여기에 좀 와 봐. 작은 개미가 자기보다 더 큰 벌레를 등에 지고 간다.”
 
  ― 처음 소화했다는 첫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회고록에서도 밝혔는데 이 한마디 대사가 내 운명을 바꾼 것 같아요. 어린 생각에 ‘작아도 강하면 큰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감명을 받았지. 이 대사를 외우며 자그마한 소년이 한국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게 됐으니까요.”
 
  신영균의 충무로 공식 데뷔작은 1960년 11월 5일 조긍하(趙肯夏· 1919~1981) 감독의 〈과부〉다.
 
  영화 포스터엔 ‘여불사이부(女不事二夫)의 죄의식 속에 더듬는 정염과 절망의 세계!’라고 써 있었다. 서울대 치대를 나와 치과의사로 개업한 그는, 들끓고 있던 ‘딴따라’ 기질을 주체할 수 없어 의사 가운을 벗고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만 서른두 살 늦깎이 신인배우가 첫 영화 출연부터 주연이 된 것이다. 물론 고교와 대학 시절부터 연극으로 기본기를 닦은 상태였다.
 
‘申一天’과 서울대 연극부 시절
 
  레슬링 웰터급 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
 
  이미 신영균은 고등학생(한성고) 때 극단 청춘극장 오디션에 합격해 배우로 활약했다. 처음엔 잔심부름을 하거나 창을 들고 서 있는 엑스트라가 고작이었다. 연극 〈대원군〉에서 겨우 단역을 맡았지만 그의 포부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아니더라도 주연급인 김아지 역할(양반 계급에 반기를 든 상놈)을 따내고 싶었다. 연극 단장이 머무는 옆방에서 큰 소리로 김아지 대사를, 홀로 거울 앞에서 연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우연찮게 김아지 역을 맡은 배우가 병이 나자 하늘이 기회를 주었다.
 
  이후 김춘광 단장이 ‘신일천(申一天)’이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과부〉로 스크린에 데뷔하기 전까지 그는 신일천으로 연극 활동을 했다.
 
  그는 고교 시절 신설동 집 근처에 있던 종로 YMCA 레슬링 도장을 다녔는데, 아마추어 대회에서 웰터급으로 2년 연속 우승할 만큼 체력이 단단했다. 지금까지 나름 단단한 체형을 유지하는 것도 그때 단련한 레슬링 덕이 아닐까.
 
  ‘대본 외우듯’ 공부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한 점도 놀랍다. 암기과목은 그렇다 쳐도 수학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대학에 들어가서도 단과대 연극반을 하나로 합친 ‘서울대 연극부’를 만들기도 했다.
 
  임금 전문 배우
 
영화 〈연산군〉은 개봉된 지 올해로 60년이 된다. ‘사극=신영균’이란 도식을 완성한, 신영균에게 뜻깊은 영화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은 그의 출세작이다. 제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첫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 덕에 시쳇말로 ‘벼락스타’가 됐다. 연산군은 이후 ‘사극(史劇)=신영균’이란 등식을 만들어줬다.
 
  이후 〈폭군 연산〉(1962), 〈강화도령〉 (1963), 〈달기〉(1964), 〈대원군〉(1968), 〈세종대왕〉(1970), 〈세조대왕〉(1970) 등 임금 전문 배우가 됐다.
 
  ― 그러고 보니 〈연산군〉이 개봉된 지 올해로 딱 60년입니다. 당시 사극이 인기 있던 이유는 뭘까요.
 
  “영화의 주제나 작품 형식이 하나의 유행을 탈 때는 두 가지 동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특정 작품이 관객 동원에 크게 성공하고 호평을 받으면 비슷한 장르와 주제의 작품이 쏟아져나오죠. 또 심의 검열을 주도하는 정부기관의 규제를 피해 또는 혜택을 염두에 두고 제작 경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내가 〈연산군〉으로 성공한 시기 사극류가 제작 경향을 주도하였지만 이어서 멜로 애정물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 첩보 액션오락 영화가 주류를 이룰 때도 있었지요. 한때 독립군 활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거나 반공영화가 외국 영화 수입쿼터를 염두에 두고 경쟁적으로 제작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 초기 작품에서는 상남자 스타일의 연기를 많이 했는데… 원래 성격은 어떠셨나요. 임금 역할과 노비 역할 중에서 어느 역할이 더 편한가요.
 
  “영화배우가 되기 전 연극배우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잖아요. 그러니 남자답고 파워풀한 무대 연기가 초기 영화 배역에서도 내 몸에 맞는 캐릭터가 되었고, 작품에서도 주목받았죠. 데뷔 작품인 〈과부〉에서 머슴 역, 〈연산군〉에서는 타이틀 롤인 왕으로 출연해 초기에 양극의 배역을 연기했지만, 어느 쪽이 더 내 몸에 맞는 역인지 지금도 결론을 못 내고 있어요.
 
  어느 쪽이든 관객의 갈채를 많이 받는 쪽이 내가 보람을 느끼고 애정을 갖는 쪽으로 생각됩니다.”
 
 
  “배우는 타고난 재질보다 후천적 자질·감각이 더 중요”
 
배우 신영균과 그의 아내 김선희 여사.
  ― 자신의 ‘배우론’이 궁금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배역 인물로 승화하지 않으면 직업정신에서 결격사유가 되지요. 목회자는 기도 중에 죽는 것이 가장 성스럽다고 생각한다는데 나는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면서 연기 중에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어요.
 
  배우는 배역에 함몰되지 않으면 좋은 연기, 관객에게 리얼리티를 전달하지 못합니다.”
 
  ― 배우의 조건 중에서 ‘등장인물이 지닌 내적 진실의 표현 능력’을 중시한다고 합니다. 연기와 인격의 상관관계는.
 
  “연기자의 인격은 가장 먼저 연기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배역 인물의 내적 진실도 가식을 보이지 않고 그려내야 감동을 받고 평가를 받습니다. 배역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배역의 역할은 겉돌게 됩니다.
 
  배역 인물로 살아날 때 배우의 품격도 돋보이고 배우의 인격도 돋보입니다.”
 

  ― 배우가 무대(스크린) 위에서 얻는 행복이나 기쁨은 어떤 것인가요. 배우가 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요. 배우의 감성은 선천적인 가요, 후천적인가요.
 
  “관객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직업이 배우입니다. 배우에게 박수갈채보다 더 듣기 좋은 소리는 없습니다. 배우는 타고난 재질도 있어야 하지만 후천적인 직업정신, 즉 연습과 노력에 의한 후천적 자질과 감각이 더 중요해요.”
 
  ― 원래 술, 담배는 못 하나요? 취미는 무엇입니까. 잡기(雜技)가 궁금합니다. 외람되지만, 짠돌이·구두쇠 이미지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가족·운동의 3박자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해왔던 것 같아요. 술과 담배, 갖가지 즐길 수 있는 잡기를 즐기면 그 3박자가 엇박자가 되어 심신이 고달파지고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못합니다. 생활이 불규칙해지고…. 그럼 사는 게 힘들어집니다.
 
  나의 교훈은 힘들게 살아가는 선배 동료들의 실패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는 노력이 지금까지 길을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구두쇠다’ ‘인색하다’는 말을 듣습니다만, 아끼고 검소하지 않으면 절대로 재산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써야 할 돈을 쓰지 않고 남에게 부담을 준다거나 분수에 맞지 않은 처신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이런 생각이 스스로 훌륭하게 살아왔다는 자화자찬이 아닙니다. 나도 부족하고 못난 점이 많지만 옳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을 뿐입니다. 어머님이 일깨워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인간 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머니 신순옥 여사 이야기
 
어머니 신순옥 여사와 신영균 가족.
  이 대목에서 어머니 신순옥 여사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신영균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필대리의 작은 마을이다. 1928년 11월 6일, 아버지 신태현(申泰賢)과 어머니 신순옥(愼順玉·1902~1972)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네 면장이자 소학교 이사장이었는데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어린 그의 눈에도 꽤나 늠름해 보였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30대 초반에 홀로 된 어머니는 어린 삼남매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하였다.
 
  “영균아, 너는 절대 탈선하지 마라. 교회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평생 술·담배를 멀리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충무로에서 셋방살이할 때부터 아들과 같이 살던 어머니는 1972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다음으로 어린 시절 우상이자 연기 멘토는 누굴까. 놀랍게도 〈아리랑〉 (1926)의 나운규(羅雲奎·1902~1937)와 〈마부〉(1961)의 김승호(金勝鎬·1918~1968)를 꼽는다.
 
  “나운규라는 인물은 한국영화와 영화인들의 뿌리와 같습니다. 나와 모든 배우들이 가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우상과 같습니다. 나는 영화 〈아리랑〉을 수없이 보고 자랐으니 그 천재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교본처럼 남아 있습니다.”
 
  ― 김승호의 연기는 어떤 점에서 남달랐습니까.
 
  “열 살 위인 김승호 배우를 연극무대에서 활동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영화에서도 〈마부〉(1961)와 〈나그네〉(1961), 〈서울의 지붕밑〉(1961) 등에서 부자(父子)로 출연했죠. 물론 제가 아들로요.
 
  그분 몸짓에는 꾸밈이나 과장이 없으면서도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사람 같았어요. 자연스러운 애드리브도 인상적이지만 관찰력이 뛰어났어요. 〈마부〉에서 마차에 깔려 다리를 다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다리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찾아 그들이 한쪽 다리로 어떻게 걷는지 연구했다고 하죠.
 
  젊은 제 눈에 김승호 배우는 한마디로 ‘연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 ‘연기에 신들린 배우’로 보였습니다. 신상옥(申相玉·1926~2006) 감독이 영화감독으로 온몸을 불사르며 산 영화인이라면, 김승호 배우는 연기에 자신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영화인으로 서슴없이 꼽을 수 있습니다.”
 
 
  “준비와 예열이 없는 도약과 폭발은 존재할 수 없다”
 
  ― 신상옥 감독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영균은 수도꼭지예요. 우는 장면에서 열 번 NG가 나면 다시 찍어도 열 번을 모두 진짜 울어요.” 혹시 지금도 가능하십니까.
 
  “하하하, 연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나 자신도 지금 그런 반응이 나타날지 모르겠군요. 배역이 주어지면 지금이라도 한번 실연해보고 싶군요.”
 
  역시 대(大)배우다운 답변이었다.
 
  ― 우는 연기, 비극적 캐릭터 연기의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다소 느슨한 질문이었는데 그는 정색을 하며 답했다.
 
  “우는 연기에 무슨 노하우란 게 없습니다. 배역 인물로 내가 바뀌면 그 인물의 감정이 내 몸에서 저절로 표현되어야 하고 우러나오는 게 연기입니다.
 
  그게 배우의 직업적인 역량입니다. 내가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을 받았을 때 갑자기 등장한 혜성 같은 배우로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연기력을 키워온 준비된 배우였지요. 어쩌다 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작심하고 철저히 연기 공부를 하고 체험하며 그 영예를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신영균은 “상식을 벗어난 진실은 없다. 준비와 예열이 없는 도약과 폭발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어떻게 해야 대본과 시나리오 분석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대본을 철저히 암기합니다. 후시(後時) 녹음으로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는 시절에도 시나리오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을 기억해야 연기가 나옵니다. 분석은 시나리오 공부 열심히 하면 저절로 나오죠.”
 
  1960년대 신영균은 ‘대사 외우는’ 배우로 유명했다. 밤잠을 미뤄가며 대사를 외웠다. 당시 겹치기 출연에 익숙한 배우들은 프롬프터를 보면서 연기를 했다. 또 동시녹음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어서 입만 벙끗 해도 됐지만 신영균은 달랐다.
 
  “나는 굉장한 노력파인데, 차로 이동할 때나 쉬는 시간에도 늘 대본을 끼고 살았어요. 누가 물으면 ‘대사를 외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연기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죠. 실제 그러니까….
 
  당시만 해도 주연급 배우는 한 해 수십 편의 작품에 겹치기 출연을 했잖아요. 그렇다 보니 대본 외우는 게 쉽지 않아 스태프들이 읽어주는 대로 연기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무엇보다 1960년대 초에는 동시녹음이 불가능했기에, 촬영 후 성우들이 별도로 대사를 더빙했어요. 대사와 배우의 입 모양이 맞지 않을 때가 일쑤라, 나는 어지간하면 직접 녹음을 고집했죠. 시나리오를 철저히 파악하고 대사를 100% 외운 상태에서 연기해야 실감이 나죠.”
 
 
  배우는 우선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2013년 7월 1일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연 배우 신영균이 영화 속 배경인 경기도 수원 공군제10전투비행단을 방문, F-5 전투기에 탑승하고 있다.
  ― 아니, 대사는 지독하게 외우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고작 두 곡(‘미워도 다시한번’ ‘빨간 마후라’)밖에 안 됩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하하하. 가사를 다 못 외우고 있다 뿐이지, 알고 있는 음악이 나오면 흥얼대며 부르는 노래가 많습니다. ‘황성옛터’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등 좋아하는 노래가 많아요. 그러나 마이크를 잡으면 흘러나오는 자신 있는 노래가 ‘빨간 마후라’와 ‘미워도 다시한번’ 등 내 영화 작품의 주제곡들입니다.”
 
  그제야 수긍이 갔다. 신영균의 굵고 중후한 목소리는 남성미가 넘친다. 연극무대에서 기초를 닦은 그는 〈연산군〉과 〈빨간 마후라〉 등 주요 작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고집했을 정도.
 
  ― 신영균 배우만의 발성법이 궁금합니다. 목소리 음량, 목소리 명석도, 억양, 포즈(사이), 템포, 리듬, 호흡, 토운 등 자신만의 발성법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나는 고향이 황해도지만 일찍 서울로 옮겨와 표준말로 성장한 덕분에 연극이든 영화든 사투리 억양이 없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특별히 나 자신만의 목소리 표현에 따른 기교나 기술적인 노하우는 없습니다. 주어진 배역의 성격과 감정 표현에 맞는 목소리를 구사하는 것이 직업적으로 몸에 밴 것 같습니다.”
 
  다소 밋밋한 답변이지만 그의 회고록에는 이런 사연이 등장한다.
 
  〈틈나는 대로 나는 동네 뒷산이나 남산에 올라가거나, 아무도 없는 텅 빈 창고에 들어가 발성 연습을 했다. 배우는 우선 울림통이 커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며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일본 사무라이 액션영화를 보고 나서는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郞) 같은 일본 배우들의 칼싸움과 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다. 주먹구구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루 연습을 끝내고 나면 가슴 벅찬 성취감마저 느꼈다.〉(48~49쪽)
 
  하지만 연극과 영화의 발성법은 엄연한 차이가 났다. 아무래도 연극은 동작이 크고 발성이 우렁찰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이다.
 
  “데뷔작 〈과부〉를 찍을 때 조긍하 감독으로부터 ‘과장된 발성과 몸짓’을 자주 지적을 받았어요. 연극배우 시절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자꾸 카메라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일쑤였죠. 조 감독은 ‘동작과 목소리를 좀 더 자연스럽게 하라’고 주문했어요.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익히는 수련기라고나 할까.”
 
 
  ‘3대 인생작’…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한번〉
 
영화 〈빨간 마후라〉의 한 장면. 배우 신영균이란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킨 영화다.
  신영균은 ‘3대 인생작’으로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한번〉을 꼽았다.
 
  사실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 (1964)는 한국전쟁이 낳은 찬란한 유산이다. 1952년 평양에서 10km 떨어진 승리호 철교 폭파작전에 투입됐던 유치곤(兪致坤·1927~1965) 장군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빨간 마후라〉가 명보극장에 처음 개봉됐을 때 극장 앞에 늘어선 줄이 을지로까지 이어졌죠. ‘암표’의 기원이 된 영화예요. 관객수 25만명으로 당시 서울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서울 사람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영화를 본 셈이죠.
 
  또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은 ‘카리스마 연기자’ 신영균을 탄생시킨 영화이고 〈미워도 다시한번〉(1968)은 한국영화사에서 특기할 기록을 남겼는데 히트작 연작물의 효시가 됐지요.”
 
1968년 대히트를 쳤던 문희, 신영균 주연의 최루성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한번〉. 과거 북한 김정일이 이 영화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1981년 변장호(卞張鎬) 감독이 〈미워도 다시한번 ’80〉 〈제2부 미워도 다시한번〉을 내놓았고, 2002년에는 원조 연출자인 정소영(鄭素影) 감독이 〈미워도 다시한번 2002〉를 선보였다. 30년 넘게 시리즈의 생명력이 유지된 셈이다.
 
  “이 3개 작품은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분류되는 1960년대 사극과 멜로드라마의 대표 작품입니다. 모두 엄청난 관객들의 갈채를 받은 흥행 영화입니다. 수백 편의 출연 작품이 있지만 일생을 두고 내 이름과 함께 붙어 다니는 작품들이니 어쩔 수 없이 앞머리에 올릴 수밖에 없어요.”
 
  〈빨간 마후라〉 촬영 당시 지금처럼 특수촬영 기법이 없었다. 신상옥 감독은 주인공 나관중(신영균 분)이 전투기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던 장면에서 정말 실탄을 썼다. “총알이 그의 머리를 스쳐 조종석 앞 유리를 뚫고 지나가는 명장면이 완성됐다”고 한다.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연기를 해야 좋은 배우로 평가받던 시절이 1960년대였습니다. 연기 도중 죽는 것을 영예롭다고 믿었죠.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어요. 상처로 생긴 흉터가 아직껏 여기저기 남아 있어요.
 
  〈빨간 마후라〉는 사격 장면이 많은데 엔딩 때는 실제 실탄을 사용했고 배우는 스턴트맨 없이 위험한 연기를 감당해야 했지요.”
 
  김기덕(金基悳) 감독의 〈5인의 해병〉(1961)도 실탄이 날아다니는 위험한 장면을 찍으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5인의 해병〉 촬영 당시 전투장면을 실감나게 한다며 진짜 폭탄을 터뜨렸다고 한다. 또 강변 모래사장에서 배우들을 뛰게 한 다음 뒤에서 실탄 사격을 가했다.
 
  “그때 같이 뛰던 곽규석(郭圭錫)과 최무룡, 황해(黃海), 박노식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만 남았네요.”
 
 
  ‘키스신’에 얽힌 이야기
 
  ― 당시 키스신을 찍을 때 입술에 셀로판지를 왜 붙입니까.
 
  “비록 연기라 해도 남녀간 접촉을 조심스러워 하던 시절이었어요. 보수적인 관념의 예의가 따랐고, 영화가 검열 규정을 지켜야 하던 시절이었죠. 예민한 부위의 신체 접촉 땐 그런 장치물을 활용했어요. 그야말로 ‘뽀뽀’ 형식만 갖추는 데도 민감한 화젯거리가 됐지요.”
 
  〈빨간 마후라〉가 히트할 당시 배우 윤인자(尹仁子)와 키스신이 화제가 됐다. 뜻밖에 그녀는 (키스) 흉내만 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의 입안에 혀를 쑥 밀어넣었다. 신영균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는 바람에 NG가 나고 말았다고 한다.
 
  ― 어떻게 된 겁니다.
 
  “하하하, 장난을 친 거죠. 신상옥 감독이 ‘컷’도 외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요. 그러더니 아내 최은희(崔恩喜·1904~1984)를 불러 ‘최 여사, 당신은 집에 가서 연탄이나 갈지?’라고 했어요. 키스 연기에서 윤인자가 낫다는 거지요, 하하하.”
 
  윤인자는 한국영화사에 최초의 키스신과 누드신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형모(韓瀅模)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서 입술에 셀로판지를 붙인 키스신이 처음 등장하는데 그 배역이 윤인자다. 한국영화사에 등장한 최초의 키스신이었다.
 
  “회고록에도 썼는데요, 윤인자씨는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한번 보여주자’ 생각했다고 해요. 나는 짓궂은 장난에 당한 꼴이 됐지. 이후 그녀가 종종 나를 놀렸어요.”
 
  ― 어떻게요.
 
  “신영균씨가 원래 거칠었는데, 입 한번 맞춰줬더니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며 나긋나긋해졌다는 식으로…. 하하하.”
 
  회고록에서 신영균은 윤인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윤(인자)씨는 충무로의 군기반장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표현을 옮기면, ‘호랑이 짓거리’를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낸 구술록에서 그는 “엄앵란이도 내가 들어가서 있으면 신발 바로 놓고, 내가 숟갈 든 다음에 숟갈을 들었어. (내게) 귀싸대기 안 맞은 여배우가 없었지. 그 대신 우리 선배들한테는 깍듯이 해드렸어. 그렇게 해서 기강을 잡았지”라고 서슴없이 털어놓았다.〉(31쪽)
 
  ―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인생작 10편’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연산군〉 〈빨간 마후라〉 〈대원군〉 〈남과 북〉 〈갯마을〉 〈상록수〉 〈5인의 해병〉 〈달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한번〉 시리즈 등의 작품이 먼저 떠오릅니다. 모두 화제를 남긴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우로 기억에 남는 사연도 많이 간직한 영화들입니다.”
 
 
  인생작 10편은…
 
1971년 3월 제8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인기남우상을 수상한 신성일, 신영균, 남궁원(왼쪽부터).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1965)은 분단의 상처를 다룬 영화다. 북한 인민군 소좌 장일구(신영균 분)는 6·25 때 헤어진 아내 고은아(엄앵란 분)를 찾기 위해 귀순한 인물이다. 남한 이해로 대위(최무룡 분)는 고은아의 현재 남편이다. 장일구는 정보참모(남궁원 분)에게 인민군의 주요 정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아내와 다시 만나지만, 남편이 이미 죽은 줄로 생각한 아내는 이 대위의 아이를 배 속에 가진 상태다.
 
  세 남녀의 기구한 운명을 담은 이 영화는 개봉 당시 10만이 넘는 관객이 들었고, 그해 대종상 각본상(한운사)과 청룡영화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최무룡) 등을 받았다. 가수 곽순옥이 부른 영화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인기도 대단했다.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찾기〉에서 패티김이 다시 불러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신영균이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첫 영화가 〈상록수〉(1961)다. 이 영화로 신영균은 그해 제9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아시아영화제는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번갈아 개최되었는데 그해 개최국이 한국이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 영화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고, 최우수작품상 등은 직접 시상하기도 했죠. 그 후 나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씨와 함께 종종 청와대에 초청받아 박 대통령 내외와 식사를 했어요.”
 
  박 대통령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신영균씨, 수고했어요. 〈상록수〉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우리나라도 농촌을 개발해야 잘사는 나라가 될 겁니다’라고 말했죠.”
 
  1970년대 시작된 국가 재건 프로젝트인 ‘새마을운동’은 박 대통령이 영화 〈상록수〉를 보고 감동받아 구상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영균은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수용(金洙容) 감독의 영화 〈갯마을〉(1965)도 신영균의 뇌리에 박힌 영화다. 오영수(吳永壽)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남편을 바다에 빼앗기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갯마을 아낙들의 애환을 담았다. 여우 고은아(高銀兒)는 당시 스무 살 신인으로 고작 두 번째 출연작이었다.
 
  “〈갯마을〉은 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문예영화였어요. 나는 이 영화에서 지나친 욕망으로 스스로 파멸해가는, 제법 수위가 높은 마초 연기를 시도했죠. 온몸이 땀으로 흥건한 두 남녀 옆으로 바닷가 포말이 겹치는 장면이 지금도 선합니다.”
 
 
  ‘러브신’과 프로 정신
 
1967년 제5회 청룡영화상 인기상에 빛나는 남녀 베스트6. (왼쪽부터) 윤정희, 신영균, 남정임, 엄앵란, 김지미, 김진규씨.
  ― 1960~1970년대에 세계 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입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영화와 가요가 대중문화의 양대 기둥이었습니다. 그중 영화는 연간 200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 때마다 스타들이 쏟아져나와 화려한 조명을 받았죠.
 
  라디오 시대가 끝나고 흑백TV가 나오면서 방송 드라마가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TV는 1980년대 컬러시대로 접어들면서 눈길을 받았으므로 영상시대의 모체인 영화 전성기는 영화배우들의 전성기이기도 했어요.
 
  그러나 스타 시스템의 주인공인 배우들의 인기 관리나 활동 스케줄 관리는 지금처럼 전문 기업형 소속사가 없이 개인 매니저나 가족들이 맡아 화려한 시선 이면에는 고충의 일화도 많았습니다.”
 
  ― 여배우 이야기를 안 들 수가 없는데 만약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 다시 호흡을 맞출 수 있다면 누구와 연기하고 싶은가요.
 
  “가끔 기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운 고민을 합니다. ‘수많은 작품의 파트너 중에 누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에 특정 인물을 꼽기란 힘들어 대충 나와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최은희, 김지미, 황정순(黃貞順), 문정숙(文貞淑), 주증녀(朱曾女), 윤인자, 엄앵란, 윤정희(尹静姬), 문희(文姬), 전계현(全桂賢) 배우들의 이름을 쉽게 떠올립니다.
 
  지금 다시 누구와 연기를 하고 싶은가의 질문은 작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지적하기 어렵습니다.”
 
  ―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문희·윤정희·남정임) 중에 호흡이 가장 잘 맞은 배우는 누구일까요? 대표작을 꼽아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영화사에서 대표적인 멜로드라마로 꼽히는 〈미워도 다시한번〉의 배우 문희씨를 나를 알고 있는 분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지만 시대가 바뀌어 리메이크된 작품도 크게 성공한 영화가 〈미워도 다시한번〉입니다.”
 
  ― 여배우 성공요건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배우는 눈이 또 하나의 얼굴입니다. 눈에서 나오는 눈빛으로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는데 배우 문희의 눈은 단연 돋보이는 명배우의 보고(寶庫) 같아요. 절묘한 선을 지키며 분위기를 이끌어냅니다.”
 
  ― 영화 속 수많은 여배우의 남편이자 연인이었는데 영화와 일상을 엄격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러브신’ 장면할 때 실제 연인처럼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합니까.
 
  “훌륭한 연기력의 배우는 연기를 연기로 나타내지 않고 실제 사건의 주인공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의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리얼리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건 비록 카메라가 돌고 있지만 순간적인 감정의 몰입을 위해서는 연인처럼 열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데, 그럴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어요. 연기가 끝나면 꿈에서 깨어나듯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기품 있는 배우가 가져야 할 프로정신이죠.”
 
아! 배우 윤정희
 
  “영화를 다시 찍게 된다면 상대역 1순위”
 
1973년 제10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서 남녀주연상을 받고 기뻐하는 신영균과 윤정희.
  신영균의 회고록에 배우 윤정희씨에 대한 긴 추억이 담겨 있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배우 중 “죽는 순간까지도 배우일 단 한 사람”으로 윤정희를 꼽는다. “영화를 다시 찍게 된다면 상대역 1순위”도 수많은 여배우 중 윤정희다. 그녀가 출연한 이창동 감독의 〈시(詩)〉(2010)가 큰 반향을 얻은 뒤 신영균은 이 감독에게 “둘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신영균이 영화배우로서 출연한 마지막 작품 〈화조〉(1979년 개봉)에 윤정희가 나온다. 1978년 3월, 김수용 감독과 그는 촬영차 프랑스로 향했다. 당시 윤정희는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파리에서 둥지를 튼 상태였다. 다음은 회고록에 실린 글 일부다.
 
  〈…영화 〈화조〉를 찍으면서 윤(정희)씨의 파리 신혼집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나무 계단을 오르니 방이 하나 나왔는데, 백건우의 피아노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뿐 침대조차 없었다. 신혼시절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소박한 그들 부부의 성격이 묻어났다.…〉(196쪽)
 
  신영균의 말이다.
 
  “우리 부부와도 평소 가깝게 지내던 터라 두 사람이 서울에 올 때는 자주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어요. 최근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려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서로가 큰 나무 같은 그늘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즐거웠던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500억원대 사재를 내놓은 이유
 
2014년 12월 31일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배우 신영균이 한국영화인총연합회·한국영화배우협회·한국영화인원로회 3개 단체로부터 ‘자랑스러운 영화인’으로 선정받아 대형 기념백자를 헌정 받았다. 이날 신씨가 헌정 받은 백자는 도예가 조규영씨의 작품이다.
  ― 매니저 역할을 아내가 맡으셨는데,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으신 거죠? 대개의 배우가 사생활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내가 활동하던 시기는 지금처럼 배우들이 소속된 전문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없고 개별적으로 매니저를 두고 활동하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주로 여배우들은 어머니가 보호자 겸 매니저 역을 맡았는데, 나는 아내가 내조에 외조까지 해서 좋은 점이 많았어요. 철야 촬영이나 장기간 외박을 하게 되면 식사나 의상 준비, 대외적인 일정과 활동 섭외 등 매니저들이 할 수 없는 건강관리 일까지 편하게 뒷바라지를 해주어 연기 활동을 효율적이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어요.
 
  사생활도 눈총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아까운 연기자들이 사생활 문제로 고민하거나 활동을 중단하는 사태도 많았던 시절이라 그런 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느끼며 살았어요.”
 
  ― ‘정치인 신영균’ ‘국회의원 신영균’, 지금도 잘한 선택이신 거죠.
 
  “잠시 의사로 적을 두기도 했지만 일생을 영화배우로 살았습니다. 국회의원 하고 정치 한 이력이 있지만 연기 활동을 하다가 영화인 단체와 예술인 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이어서 영화를 비롯한 예술인들의 권익을 위한 정치활동을 한 것이니 모두 영화배우라는 직업인의 연장선으로 보면 됩니다. 국회에 있을 때도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전문성 정책 분야가 문화 분야였습니다.”
 
2011년 12월 26일 오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안성기(왼쪽부터), 예술인상을 수상한 배우 김혜자, 신영균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2010년 충무로 시대를 상징하는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재를 한국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습니다. 그런 기부를 결정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명보아트홀은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로 서울 명동에 인접한 금싸라기 땅이다. 2004년까지 영화관으로 운영하다가 현재는 명보아트홀 등이 입주해 복합문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제주 서귀포 해안 경승지 3만 평(9만9173m2) 터에 세운 신영영화박물관은 1999년 설립됐다. 한국영화 100년의 세월이 전시된 공간이다.
 
  “그 같은 결정을 한 데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위해 주는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소중한 재산 중 명보아트홀 부동산을 인재 육성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는 것을 기꺼이 동의해 순식간에 결정하고 발표한 일이었습니다. 벌써 10년이 되어 지난 연말 내가 설립한 재단의 사업 중 하나인 제10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 때 10주년 백서를 보았는데 새삼 10년 발자취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은 ▲영화 및 연극인 자녀 장학금 지원사업 ▲단편영화 사전제작 지원사업 ▲아름다운예술인상 ▲어린이 영화체험교육 ▲영상작가교육원 창작지원금과 아시아나단편영화제, 한국영화배우협회 원로배우 복지기금, 남원 꿈빛 어린이 영화제 등을 지원·후원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 남기고 싶어”
 
사진=조준우
  ― 100세 건강 비결과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특별히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젊은 시절 당뇨 진단을 받아 그에 대한 식생활에 신경을 쓰고 헬스클럽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밤샘 촬영이 다반사였잖아요. 출출해 초콜릿을 많이 먹다가 당뇨에 걸렸죠. 이후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지요.
 
  만보기를 차고 걷는 운동도 꾸준히 하는데, 어느 글을 보니 4000보를 걸으면 우울증이 사라지고, 5000보를 걸으면 치매와 심장질환이 예방된다고 해요. 7000보를 걸으면 골다공증과 암, 8000보를 걸으면 고혈압과 당뇨, 1만 보를 걸으면 각종 대상증후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이 걸을수록 좋아요.”
 
  신영균은 1978년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와 멀어졌지만 아직 그에게 남은 영화의 꿈이 있다.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노인과 바다〉(1958) 같은 영화 한 편을 꼭 남기고 싶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년의 정점을 찍을 작품이었으면 합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영원한 현역으로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잖아요. 연기도 나이에 맞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혹시 아나, 칸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을 수 있을지….”⊙
 
단답형 질문 10가지
 
  ― 일부러 찾아가 먹는 음식이나 식당이 있으시다면.
  “명동 호텔28의 딘타이펑의 만두요리와 조선호텔 ‘나인스 게이트’ 양식당 (1주일에 3, 4번 오찬)”
 
  ― 최근작 한국영화 중 기억할 만한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해 화제의 작품은 대부분 보고 있다.”
 
  ― 당장 1억원이 생기면.
  “공돈에 관심 없다. 복권을 산 적도 없다. 노력의 대가 없이 굴러 들어온 돈이라면 기꺼이 좋은 일에 쓰겠다.”
 
  ―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는.
  “〈신라의 달밤〉이나 〈황성옛터〉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한번〉이 자신 있는 18번이라 그걸 부를 수밖에.”
 
  ― 우울한 기분이 들 때 하는 일은.
  “성경을 본다.”
 
  ― 기억에 남는 스승이 있다면.
  “서울대 치대 교수 김용관 박사.”
 
  ― 코로나19 시대, 영화계를 살릴 비책이 있다면.
  “걱정이다. 텅 빈 영화관 관객석이 언제 되살아날지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내일이 불안하다. 그러나 옛말을 믿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이 있는데 영화가 어떤 방법으로든 관객들의 사랑받는 문화로 인기를 회복할 날이 올 것이다.”
 
  ―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싶으신 일은.
  “나의 직업 영화배우는 아마 타고난 선천적인 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다시 태어나도 아마 영화 쪽으로 발길이 갈 것 같다.”
 
  ― 요즘 배우 중에서 연기 좀 한다고 할 만한 배우는.
  “안성기·송강호·이병헌 등을 모두 좋아하고 사랑한다.”
 
  ― 최근 몇 년 사이 감명 깊게 읽으신 책은.
  “김동연 전 부총리의 저서를 보며 모처럼 감동의 눈물이 나왔다. 그의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에 나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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