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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념이 나라를 망친다

선전선동의 달인 요제프 괴벨스

“언론은 ‘정부의 손안에 있는 피아노’… 정부가 연주해야 한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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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베를린은 센세이션(흥분·사건)을 필요로 한다”
⊙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다”
‌⊙ “거리를 정복할 수 있다면 대중을 정복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을 정복하는 자는 국가를 정복한다”
‌⊙ “민주주의가 자신의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자신을 섬멸할 무기를 스스로 쥐여준다는 사실은, 언제나 민주주의가 가진 최고의 난센스이다”
‌⊙ “방송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속한다. 우리는 방송이 우리의 이념에 복무하도록 할 것이다”
선전선동의 달인이었던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 당해 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의 것이라고 흔히 회자(膾炙)되는 말들이다. 보는 순간 무릎을 치고 싶어질 정도로 선전선동의 요체(要諦)를 잘 보여주는 명언(名言)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괴벨스가 이런 말들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괴벨스의 이름을 갖다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괴벨스가 이런 말들을 한 장본인으로 꼽히는 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보여준다. 괴벨스라면 이런 소리를 하고도 남을 뻔뻔스러운 선전선동의 귀재(鬼才)라는 평가 말이다.
 
 
  공부 잘하는 장애아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는 우리가 ‘독일인’이라고 할 때 흔히 떠올리는 미덕들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독일인이었다. 공장 급사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는 근면 성실함 하나로 사무원과 경리를 거쳐 나중에는 공장 지배인으로까지 승진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른바 ‘프티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괴벨스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심과 충성심, 애국심, 의무감은 왜곡되어 히틀러에 대한 맹종이 됐다. ‘프티부르주아’로서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주의에 대한 친근감과 극렬한 반(反)유대주의로 이어졌다.
 
  이에 못지않게 괴벨스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신체적 콤플렉스였다. 네 살 무렵 괴벨스는 골수염에 걸려 만곡족(彎曲足·내번족[內飜足], 연곡족[攣曲足], 곤봉발이라고도 함)이 됐다. 이런 신체적 결함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위로부터 동정 어린 시선, 혹은 놀림을 받으며 자라났다.
 
  어린 괴벨스는 그러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바로 공부였다. 그는 반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 중 하나였다. 한국의 많은 부모가 그렇듯 하층 계급 출신인 괴벨스의 부모는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괴벨스의 학업을 열심히 지원했다.
 
  학창 시절 괴벨스는 연극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효과적인 대사와 동작, 몸짓을 구사할 줄 알았다. 공상과 자만심에 빠져 있던 괴벨스는 일상생활에서도 늘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행동했다. 훗날 선전선동의 대가(大家)가 될 자질을 이때부터 드러냈던 셈이다.
 
 
  좌절하는 청춘
 
  괴벨스가 고등학교(김나지움)에 다니고 있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괴벨스의 선배와 친구들은 기꺼이 전선(戰線)으로 달려갔다. 젊은 애국자 괴벨스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다리의 장애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1917년 괴벨스는 아비투어(대학입학시험) 독일어 작문시험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덕분에 괴벨스는 동기들을 대표해 졸업연설을 했다. 애국적 열정으로 가득한 연설이었다. 연설이 끝난 후 교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유감스럽게도 웅변가의 재능은 갖추지 못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장은 사람을 크게 잘못 본 셈이다.
 
  괴벨스는 본 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시절 괴벨스는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 안카 슈탈헤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안카와 만나는 내내 괴벨스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자조(自嘲)했다.
 
  “나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자 추방민, 단지 잠시 체류를 허가받은 자이다. 이러한 처지는 내가 다른 자보다 성적이나 지적(知的)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자들이 아버지 주머니에서 흥청망청 꺼내 쓰는 돈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안카와 괴벨스는 결국 헤어졌다. 괴벨스는 ‘돈이 제일인 더러운 세상’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읽은 것도 이때였다. 슈펭글러를 통해 괴벨스는 자기가 사는 시대를 ‘영혼이 없는, 물질의 시대’라고 인식했고,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이 시기는 청년 괴벨스에게뿐 아니라 독일인 모두에게 좌절의 연속이었다. 독일은 패전(敗戰)했다. 혁명으로 제정(帝政)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에 자극받아 혁명을 꾀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극우(極右) 세력은 퇴역군인들로 자유군단(의용군)을 조직해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독일에 과중한 배상금을 강요한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괴벨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급하고 무의미한 군중의 혼돈 속에서 사람들이 다시 지도자와 힘을 찾아 절규할 때가 올 것이라고 너 역시 믿지 않는가? 우리 이때를 기다리자. 끊임없이 정신을 연마하여 이 싸움을 준비하자.”
 
  괴벨스는 1921년 11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낭만주의 극작가 빌헬름 쉬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괴벨스 박사’가 된 것이다.
 
  괴벨스도, 그의 부모도, ‘박사’가 되기만 하면, 탄탄대로가 열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패전 후의 극심한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 ‘박사’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옛 애인 안카의 주선으로 드레스덴은행에 취직했지만, ‘박사님’은 돈이나 세는 은행원 생활이 성에 차지 않았다. 불과 8개월 뒤 그는 해고됐다. 그는 금융자본주의와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독문학을 전공하고 몇 차례 크고 작은 언론에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는 ‘괴벨스 박사’는 자신에게 맞는 직장은 언론계라고 생각했다. 그는 《베를리너 타게블라트》 등 여러 언론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지원했던 언론사 대부분이 유대인 소유였다. 괴벨스는 자기가 언론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독일인의 문화·정신의 영역’까지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고등 룸펜’으로 전락한 ‘괴벨스 박사’는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았다. 자신은 고유의 견해, 용기, 인격, 개성을 가진 훌륭한 시민이었다. 그런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돈만 아는 더러운 세상’에서 자기가 소외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선동가 괴벨스’의 등장
 
  좌절의 시기를 살면서 괴벨스는 “고난의 시기에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우리의 본질과 다른 낯선 요소들에 맞서 독일 혼(魂)의 대응이 나타날 것”을, “새로운 물결을 일으켜 이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새로운 시대로 가는 길을 여는 강력한 천재”의 등장을 갈망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앞에 그런 존재가 나타났다. 아돌프 히틀러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나치당을 동원, 바이에른 주정부 요인들이 회동하고 있던 뮌헨의 뷔르거브로이 맥주홀을 점거하고, 새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 어설픈 쿠데타는 이틀 만에 진압됐다. 히틀러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됐다. 히틀러는 법정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피력하는 연극무대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요새에 수감됐다. 바이마르공화국에 절망하고 있던 많은 독일인은 혜성처럼 나타난 이 ‘애국자’에게 열광했다. ‘괴벨스 박사’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무렵 독일 곳곳에서는 바이마르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나날이 대두하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우익 세력들이 대두하고 있었다. 괴벨스는 고향 라인란트 지역에서 나치 성향인 대독일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8월 한 우익집회에서 괴벨스는 연설을 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영혼을 상실한 물질주의 세계’와 유대인과 볼셰비키를 싸잡아 비난했다. 청중은 열광했다. 그해 10월 괴벨스는 《민족의 자유》라는 조그만 극우 주간지의 편집인이 됐다. ‘선동가 괴벨스’가 데뷔한 것이다. 이 신문에 쓴 글에서 괴벨스는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문제점을 제법 날카롭게 비판했다.
 
  〈민주주의 지도자는 대중의 자비에 의존하는 자이다. 그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그리고 되풀이해서 천박한 대중의 본능에 아부해야 한다. 그는 그날그날을 위해서 일할 뿐 시대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활동은 당을 위한 것이지,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일시적인 성과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불만에 찬 유권자들에게 버림받는다.… 그래서 그는 한순간의 성과만을 좇으면서 자신의 민족을 민족적 타락으로 이끌어간다. 다른 한편 그는 돈과 사업을 지배하는 세력에게 삽시간에 확실하게 종속된다. 그렇다. 그는 이러한 세력과 손을 잡고서야 일신의 영달을 이룰 수 있다.〉
 
 
  히틀러와의 만남
 
1925년 이후 히틀러에게 매료된 괴벨스는 결국 히틀러와 운명을 같이했다.
  1924년 12월 석방된 히틀러가 나치당 재건에 나섰다. 괴벨스는 이듬해 2월 북독일나치당에 입당했다.
 
  당시 나치당은 이념적으로 ‘잡탕정당’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라는 당명(黨名)부터가 극우적 요소(국가)와 극좌적 요소(사회주의, 노동자)를 내포하고 있었다. 당원들도 왕당파·국가주의자·민족주의자·군국주의자들부터, 사유재산제 폐기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꿈꾸는 사회주의자들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북독일나치당의 지도자 그레고르 슈트라서는 나치당 내 좌파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히틀러의 라이벌이었다. 스스로를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괴벨스 박사’도 당내 좌파 세력의 일원이었다.
 
  이때 히틀러는 온건·합법 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세력과 자본가 계층에 접근했다. 한때 ‘독일공산주의자’를 자칭할 정도로 좌파급진 노선을 취하고 있던 괴벨스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괴벨스는 《국가사회주의서한》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히틀러의 우경(右傾) 노선을 비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히틀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이때 히틀러가 괴벨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1925년 11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히틀러는 괴벨스와 만났다. ‘괴벨스 박사’는 ‘보헤미아 상병(히틀러의 별명)’의 마력(魔力)에 속절없이 넘어갔다. 일기에서 괴벨스는 이렇게 썼다.
 
  “이 남자는 왕이 되는 데 필요한 덕목을 남김없이 갖추었다. 타고난 호민관이며, 떠오르는 독재자이다.”
 
  1926년 4월 8일, 히틀러는 괴벨스를 나치당의 본거지인 뮌헨으로 초청했다. 이때 괴벨스는 독일 북서부인 루르대관구를 이끄는 3인 지도부 중 한 명이었다. 히틀러는 역(驛)으로 자신의 전용차를 보내주었다. 거리 곳곳에는 ‘괴벨스 박사’의 방문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히틀러의 주선으로 괴벨스는 나치의 성지(聖地) 뷔르거브로이 맥주홀에서 2시간 동안 연설했다. 연설을 마치자 히틀러는 괴벨스를 포옹했다.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나는 행복했다.”
 
  ‘괴벨스 박사’는 완전히 전향(轉向)했다. 히틀러의 역사적 소명(召命)을 확신한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했다.
 
  1929년 발표한 자전적(自傳的) 소설 《미하엘》에서 말했듯이, 괴벨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였다. 괴벨스가 히틀러를 ‘퓌러(Fu‥hrer·지도자)’라고 칭한 것도 이러한 신앙심(?)의 발로였다. 흔히 ‘총통’이라고 번역되는 ‘퓌러’라는 말은 후일 히틀러의 공식 칭호가 됐다.
 
 
  베를린 입성
 
  1926년 10월 히틀러는 괴벨스를 ‘베를린대관구’ 관구장(管區長)으로 임명했다. 사실 나치당에 베를린은 험지(險地)였다. 독일은 예나 지금이나 북부 프로이센과 남부 바이에른 간의 지역갈등이 심한 나라다. 바이에른에서 태동한 나치당은 베를린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베를린 정치의 주도권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쥐고 있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의 《대중심리》를 깊이 연구한 괴벨스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중의 눈에 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베를린은 센세이션(흥분·사건)을 필요로 한다. 이 도시는 센세이션을 먹고산다. 그리고 이를 소홀히 하는 정치선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괴벨스는 베를린대관구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1월 14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준(準)군사조직인 나치돌격대를 동원해 노이쾰른 지역에서 정치선전 시위를 벌인 것이다. 노이쾰른 지역은 공산주의자들의 아성(牙城)이었다. 자신들의 안방을 침범당한 공산주의자들은 격분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곤봉과 몽둥이가 난무하고, 피가 튀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신문은 ‘하켄크로이츠 대(對) 소비에트 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괴벨스는 주장했다.
 
  “거리를 정복할 수 있다면 대중을 정복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을 정복하는 자는 국가를 정복한다.”
 
  노이쾰른에서의 가투(街鬪·가두투쟁)는 나치가 아직 베를린에서 약자(弱者)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괴벨스는 당분간은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괴벨스는 우선 선전선동요원의 양성에 나섰다. 노이쾰른 사건 이틀 후인 11월 16일 베를린대관구 부설 웅변학교를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파시즘과 볼셰비즘이 태어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위대한 웅변가들, 위대한 언어의 예술가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설가와 정치가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
 
  괴벨스는 선전선동을 위해서는 ‘이념’이 필요하며, 그 이념을 매우 압축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는 유명한 말이 정말 괴벨스가 한 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괴벨스가 그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여러분은 한 권의 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수백만명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수백만명은 복음(福音)을 위해서라면 죽기를 각오할 것이다.”
 
  괴벨스는 당원들을 ‘복음을 위해서라면 죽기를 각오할 수 있게’ 단련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인 ‘붉은 베딩’이라는 곳에서 대규모 집회를 여는가 하면, 걸핏하면 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폭력투쟁을 벌였다. 괴벨스는 빈약한 체구의 장애인이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갔다. 괴벨스의 평전을 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괴벨스는 청중에게 이른바 ‘이념’의 숭고한 점을 전달하고 그들을 신자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치즘은 그들에게 (머리가 아닌) 심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치즘이 다른 정치 노선보다 탁월해 보일 뿐 아니라, 물질주의적이고 차갑다는 판결을 받는 대도시의 세계에서 확연히 눈에 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벨스가 조직한 선전 집회들은 항상 청중의 감정과 본능에 호소했다.〉
 
 
  낙인찍기와 시체팔이
 
괴벨스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된 돌격대 소위 호르스트 베셀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괴벨스는 선전선동을 위해 《공격》이라는 신문도 발행했다. 이 신문은 ‘활기차고 공격적이면서도 단순하고 민중적 스타일’을 지향했다. 괴벨스는 이렇게 설파했다.
 
  “여기서 글과 그림의 목표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박차를 가하고 불을 지르고 몰아가는 것이다.”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모호하지 않고 오해가 없어야 하며 목표가 뚜렷하고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독자의 모든 사고(思考)와 정서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괴벨스는 ‘낙인찍기’ 수법에도 능했다. 이는 그 자신이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는 충직한 경찰공무원인 베를린 경찰청 차장 베른하르트 바이스를 ‘유대인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어 공격했다. 그는 바이스에게 ‘이지도르’라는 별명을 붙이고, 만화와 칼럼, 책을 통해 끈질기게 비방했다. 바이스는 여러 차례 소송을 걸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찰청 차장이 놀림감이 되면서 공권력의 권위도 함께 실추됐다. 결국 바이스는 나치가 집권하기 직전,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우리나라 좌파들이 많이 쓰는 ‘시체팔이 투쟁’도 괴벨스가 많이 쓴 선동수법 중 하나였다. 괴벨스는 공산주의자들의 가투에서 희생자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을 ‘순교자(殉敎者)’로 치켜세우고,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적 폭력을 맹비난했다. 물론 나치의 폭력은 싹 시렁에 얹어두고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르스트 베셀이었다. 돌격대 소위로 공산주의자들과의 가투에 앞장섰던 베셀은 1930년 1월 중순 공산주의자들의 습격을 받아 중태에 빠졌다. 괴벨스는 사건이 일어난 후 매일같이 베셀의 용태를 당 기관지에 실었다. 40여 일 후 베셀이 죽자 괴벨스는 그를 ‘제3제국의 새로운 순교자’로 추앙했다. 호르스트 베셀이 생전에 지은 ‘깃발을 높이 들어라’라는 노래를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널리 퍼지게 한 것도 괴벨스였다. 이 노래는 나치 집권 시절 사실상 국가(國歌)처럼 널리 불렸다.
 
  괴벨스는 문명의 이기(利器)들 또한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1932년 3월 대통령 선거전에서 괴벨스는 편지봉투에 들어가는 미니 사이즈의 히틀러 연설음반 5만 장을 제작해서 뿌렸다. 또 10분 분량의 히틀러 선전 영화를 만들어 전국의 극장이나 광장에서 상영하도록 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하루에도 몇 개 도시에서 연설을 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이 당시 독일에서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괴벨스는 이러한 선전을 통해 독일 국민들에게 “퓌러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우리는 의회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괴벨스의 이런 노력은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28년 5월 총선에서 괴벨스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에게 얹혀사는 낭인(浪人)이었던 그가!
 
  하지만 괴벨스는 자신에게 이런 멋진 기회를 준 바이마르 체제에 감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국회의원이 된 직후, 괴벨스는 자신의 기관지인 《공격》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의회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를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제국의회의 구성원이 아니다. 나는 면책특권 보유자이자, 무임승차권 보유자일 뿐이다. 면책특권 보유자는 ‘바이마르 체제’를 모욕하고, 공화국은 월 750마르크의 봉급으로 답례한다.”
 
  괴벨스는 면책특권을 비롯한 국회의원의 특권을 악용해 체제를 파괴하려 드는 자들의 원조(元祖)였던 셈이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자들이 있다.
 
  1929년 10월 발생한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은 나치 집권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나치는 1932년 총선에서 원내(院內) 제1당으로 올라섰다. 나치당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이 국회의장이 됐다. 그해 12월 다시 치러진 총선에서 나치당은 득표율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1933년 1월 30일, 드디어 히틀러가 총리가 됐다. 나치당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측근들, 나치를 얕잡아 본 보수 정치가들 간의 흥정과 협잡의 결과였지만, 일단은 민주헌정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합법적’인 집권이었다. 괴벨스는 후일 이렇게 비웃었다.
 
  “민주주의가 자신의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자신을 섬멸할 무기를 스스로 쥐여준다는 사실은, 언제나 민주주의가 가진 최고의 난센스이다.”
 
 
  “지금 숫자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총리가 된 히틀러는 안정 다수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3월 5일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2월 27일 밤, 국회의사당에서 불이 났다. 머리가 모자라는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마리우스 반 데어 루베라는 청년이 범인으로 체포됐다. 실은 나치돌격대가 저지른 자작극(自作劇)이었다. 나치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기도라고 주장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사건 다음날 ‘국민과 국가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괴벨스는 《공격》을 통해 이렇게 떠들었다.
 
  “독일 민족이여, 이제 일어나라! 일어나서 판결을 내려라! 3월 5일 이 세계의 붉은 역병(疫病)에 대해, 국민의 이름으로 신(神)의 재판이 시작될 것이다! 히틀러는 행동할 것이다! 히틀러는 행동할 것이다! 그에게 전권을 부여하라!”
 
  총선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은 못 되었다. 경찰과 돌격대가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 가운데 치러진 선거였지만, 나치는 43.9%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괴벨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대체 지금 숫자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국가와 프로이센의 지배자이다. 다른 자들은 모두 타격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있다.… 독일이 깨어났다.”
 
 
  선전부
 
  괴벨스는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답을 받게 됐다. 1934년 3월 14일 신설된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중앙정부의 각료급 지위로 선전·공보 담당 부서가 설치된 것은 세계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었다.
 
  1933년 3월 16일 35세의 장관은 기자들과의 첫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국민들은 일치단결하여 사고하고, 일치단결하여 반응하며, 정부에 적극 동조하고 복무해야 한다.”
 
  괴벨스는 “그들이 우리에게 빠져들 때까지 개조하는 것”이 선전부의 목표라고 공언했다. 괴벨스에 대한 평전을 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는 이렇게 썼다.
 
  〈이 정부가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있다면, 장기적으로 52%의 지지층을 가지고 나머지 49%를 억누르는 데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그다음 과제로 나머지 48%의 지지마저 획득하려 할 것이다.〉
 
  괴벨스가 지향하는 사회는 개인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지는 손톱만큼도 주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였다.
 
  괴벨스는 참담했던 젊은 시절부터 구(舊)질서와 기성세대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그는 “어제의 인간들은 내일을 예비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방을 청소하듯이 인간들도 청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괴벨스는 선전부를 기존의 관료주의에 물들지 않은 20~30대 젊은이들로 채웠다. 선전부의 선임 부서인 선전국 국장 빌헬름 해거르트, 통신사들을 강제합병해서 만든 독일통신사(BND) 편집국장 알프레트 잉게마르 베른트, 국가방송사 사장 오이겐 하다모프스키는 28세였다. 베른트는 후일 ‘롬멜 신화(神話)’를 만든 주역이 된다.
 
  괴벨스의 참모들은 대개 괴벨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1920년대 혼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실업(失業)의 쓴맛을 보다가 나치운동에 몸담게 된 젊은 엘리트들이었다. 괴벨스는 그들이 관료로서의 실무 능력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이념이고 당성(黨性)이었다.
 
 
  언론장악
 
  국민들을 전체주의 국가가 원하는 틀로 주조(鑄造)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언론장악’이었다. 괴벨스는 “언론은 ‘정부의 손안에 있는 피아노’가 되어 정부가 연주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괴벨스는 그럴 경우 언론이 재미없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한 해법도 제시했다. “언론이 기본 원칙에서는 일치해야 하지만 뉘앙스는 다양해야 한다.”
 
  괴벨스의 언론장악은 ‘획일화’라는 말로 표현됐다. 먼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후 공포된 대통령 긴급조치에 따라 좌파 언론들과 유대계 언론사들이 폐쇄됐다. 영국의 《타임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230년 역사의 《포시셰 차이퉁》은 1934년 4월 폐간됐다.
 
  통신사들은 독일통신사(BND)로 통합됐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의 도조 히데키 정권이 통신사들을 도메이(同盟)통신으로 통합한 것이나 전두환 정권이 통신사들을 연합통신으로 합친 것은 이를 본뜬 것이다. 히틀러의 첫 내각에 경제장관 겸 농업장관으로 입각(入閣)했던 국가인민당 당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도 자기 소유의 통신사 텔레그라펜우니온을 빼앗기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나치 정권은 ‘편집인법’을 제정, 그때까지 신문·잡지의 발행인이 지던 책임을 편집인도 나누어지도록 했다. 이를 통해 국가가 편집권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려면 선전부 문화원(文化院) 산하 언론원(言論院) 회원이 되어야 했다. 언론원 회원이 되려면 ‘정치적 신뢰성’과 ‘아리안 인종’임을 입증해야 했다.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나치 집권 초기부터 유대인들은 언론사에서 쫓겨났다. 괴벨스의 눈 밖에 난 언론인들은 언론원이 작성하는 언론인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언론을 연주하는 역할을 맡은 곳은 선전부 언론국이었다. 언론국은 매일 정오 언론사 회의를 소집해 ‘방향설정’을 하달했다. ‘보도지침’을 내린 것이다. ‘방향설정’은 활자 크기와 기사에 사용할 단어와 그 뉘앙스, 기사의 분위기까지 지시했다.
 
  괴벨스는 당시 세상에 등장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라디오의 중요성에도 주목했다. 그는 “라디오만이 국민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괴벨스는 ‘국민수신기’라는 이름의 염가형 라디오를 제작, 보급했다. 국민들은 이 라디오를 ‘괴벨스의 주둥이’라고 불렀다.
 
  괴벨스는 방송장악 의도를 대놓고 천명했다.
 
  “우리는 결코 숨기지 않는다. 방송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방송이 우리의 이념에 복무하도록 할 것이다. 방송에서는 그 어떤 다른 이념에 대해서도 발언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공격》지에 쓴 글에서 “비판은 오로지 수용소로 가는 것을 겁내지 않는 자들에게만 허용된다”고 위협했다.
 
 
  상징 조작
 
1933년 3월 21일 포츠담 국회 개원식에서의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新舊독일의 만남과 계승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괴벨스가 연출한 것이다.
  괴벨스는 상징 조작에도 능했다. 그 첫 작품은 1933년 3월 21일 열린 국회 개원식이었다. 행사는 독일인들의 국가적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잠들어 있는 포츠담의 가르니송교회에서 열렸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훈장을 주렁주렁 단 과거 독일제국 시절의 원수(元帥)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연미복 차림의 총리 히틀러는 그 앞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했다. 히틀러는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 과거에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연설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힌덴부르크로 상징되는 영광스러운 옛 독일과 히틀러로 상징되는 젊고 힘찬 새 독일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았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나치돌격대가 그동안 거리에서 자행했던 야만스러운 폭력과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천명한 반유대주의와 대외침략노선을 잊어버렸다. 포츠담에서의 행사가 있은 지 이틀 후인 3월 23일, 전권위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회의 입법권이 행정부로 넘어갔다.
 
  그 직후 왕년의 자칭 ‘독일공산주의자’ 괴벨스는 노동절인 5월 1일을 국경일로 선포하는 법률안을 제안, 통과시켰다. 노동절이 국경일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노동자들은 나치당이 그 이름처럼 ‘노동자당’임을 확인하면서 축제를 즐겼다. 그 다음날 전국의 모든 노조(勞組)는 해산되고, 노조 지도자들은 강제수용소로 처넣어졌다.
 
  자신의 부서를 선전부가 아닌 문화부로 이름 짓기를 바랐던 하이델베르크 대학 문학박사는, 독일을 문화적으로 야만의 시대로 후퇴시켰다.
 
  1933년 5월 10일 밤, 괴벨스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건너편 광장에서 ‘비(非)독일적 도서’ 2만 권을 불태우는 분서(焚書) 행사를 주관했다. 1937년에는 뮌헨, 이듬해 2월에는 베를린에서 퇴폐미술전시회라는 것을 열었다. 샤갈, 클레, 코코슈카 등의 작품들이 전시됐다. 퇴폐 미술작품이라는 이유로 공공미술관에서 철거되거나 몰수된 작품 6000여 점 가운데 5000여 점은 1939년 3월 베를린 소방본부 마당에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졌다. 약간의 작품은 외국으로 팔려 나가 보존될 수 있었다.
 
  괴벨스는 권력의 단맛도 놓치지 않았다. 선전장관으로서 그는 영화의 기획, 연출, 배역선정, 배급 등에 대해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권력을 이용해 그는 수많은 여배우와 염문(艶聞)을 뿌렸다. 괴벨스는 한때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리다 바로바에게 푹 빠져 아내 마그다와 이혼하려고까지 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이혼할 경우, 당신의 정치 경력은 끝장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권력과 애인 사이에서 괴벨스는 권력을 선택했다.
 
  괴벨스는 막대한 국가예산을 들여 자신의 저택과 별장을 짓게 하는 등 나랏돈을 물 쓰듯 했다. 그는 이를 자신이 평생 국가를 위해 헌신한 데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가짜 뉴스’ 생산
 
  괴벨스는 히틀러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히틀러 집권 초기에 그는 나치의 침략 야욕을 은폐하는 데 앞장섰다. 1934년 9월 말 괴벨스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다. 그는 국내에서 정치투쟁을 할 때와는 달리 온건하고 세련된 언행으로 국제외교가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괴벨스는 회의를 취재하러 온 각국 언론인들 앞에서 〈나치 독일, 그리고 평화를 위한 나치 독일의 과제〉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새로운 독일이 미래의 팽창정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주장은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돕기 위해 괴벨스는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히틀러가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병합하려 했을 때, 독일 국민들은 수데텐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끔찍한 만행에 대한 보도들을 듣고 격분했다. 그 ‘만행’이라는 것은 괴벨스의 참모 베른트가 지도와 주소록, 인명록을 보면서 내키는 대로 짜깁기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괴벨스의 선전활동은 영국·프랑스 등에 수데텐이 ‘분쟁지역’이며, 이 문제를 독일에 유리하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뮌헨협정으로 나치 독일이 수데텐 지방을 손에 넣게 됐을 때,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치 대장은 괴벨스에게 “이번에는 무기가 말할 수 없었다”면서 괴벨스의 무기인 언론과 선전이 승리를 가져왔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왔다.
 
  1940년 봄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을 앞두고 괴벨스는 미국 국무부 차관보 섬너 월레스와 프랑스 총리 폴 레이노가 중부유럽 지도를 앞에 놓고 독일 분할을 획책하고 있는 그림을 유포했다. 네덜란드·벨기에 침공을 앞둔 시점에는 신문·방송을 통해 “독일은 두 나라에 대해 어떠한 공격 의사도 없다”고 보증했다.
 
  프랑스·영국과의 전쟁 때에는 선전용 지하방송국들을 만들었다. 이 방송들은 적군에게 탈영을 권유하고, 국민에게 염전(厭戰) 분위기를 전파시켰다. 이 방송국들은 마치 프랑스나 영국 내에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북한의 대남선전방송 ‘통혁당(후에 민민전, 반제민전으로 개칭)의 목소리’ 방송이 해주에 있음에도 한국 내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괴벨스 자신이 직접 ‘가짜 뉴스’의 생산과 전파(傳播)에 나섰다. 그는 나치당 기관지 《민족의 파수꾼(푈키셰 바오바흐터)》지에 〈크레타의 예(例)〉라는 글을 기고했다. 독일 공수부대가 맹활약했던 크레타 전투를 소개하면서, 공수부대를 앞세운 영국침공작전이 추진되고 있음을 시사(示唆)하는 기사였다. 신문이 베를린 시내에 배포된 후, 괴벨스는 이 신문들을 서둘러 압수했다. 독일에 있는 외국 특파원들은 괴벨스가 실수로 천기(天機)를 누설했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관심이 독일의 영국 침공으로 쏠렸다. 하지만 침공을 당한 것은 영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반유대주의 선동
 
  전쟁이 시작되면서 괴벨스는 권력 핵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칼이 설치는 시대에 펜이 설 자리는 좁아진 것이다. 괴벨스는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원래 괴벨스는 나치 정권 내에서도 가장 강경한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나치 집권 초부터 언론을 이용해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분노를 조장하고, 유대인 박해를 선동했다. 베를린대관구장으로서 괴벨스는 베를린을 ‘유대인 없는 도시’로 만들겠다며, 유대인을 베를린 밖으로 추방했다.
 
  1938년 11월 7일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 외교관이 유대인 청년에게 암살당하자, 괴벨스는 방송을 총동원해 유대인 박해를 선동했다. 이 선동으로 11월 10일 독일 전역에서 돌격대와 히틀러유겐트 대원들이 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유대교회)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2만여 명 이상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괴벨스는 외국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대인들의 머리털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괴벨스는 이 전쟁이 ‘유대 국제 금융자본의 음모’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처칠과 루스벨트는 유대 국제 금융자본가들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젊은 시절의 사회주의적 열정이 묘하게 뒤틀려 부활한 셈이다.
 
 
  총력전
 
소년병을 격려하는 ‘총력전전권위원’ 괴벨스. 괴벨스는 총력전을 주창해 독일 국민들을 마지막 고난으로 몰아넣었다.
  1943년 2월 1일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이끄는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했다. 괴벨스는 독일군이 영웅적인 항전 끝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배했다고 선전했다. ‘항복’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후 전세(戰勢)가 급격하게 기울자 괴벨스는 총력전(總力戰)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히틀러는 세계를 상대로 하는 대전쟁을 일으켜 놓고서도 민심을 고려해 전면적인 전시(戰時) 체제 돌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베를린의 체육궁전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괴벨스는 참석자들 앞에서 “그대들은 총력전을 원하는가?”라고 포효(咆哮)했다. 그가 “자, 민족이여, 일어서라! 폭풍이여, 몰아쳐라!”라고 외치자, 장내는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독일인들은 정말 자신들의 문명이 야만적인 동방 볼셰비키의 침략 앞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기들이야말로 서구 문명의 수호자라고 확신하고 분기(奮起)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44년 7월 25일 히틀러는 괴벨스를 총력전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군대에 가지 않은 16~60세의 모든 남성을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의 민병대로 편성해 전장(戰場)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괴벨스의 총력전은 고통스러운 최후를 연장하는 나치의 마지막 단말마(斷末魔)였다.
 
  마침내 종말이 왔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총통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 죽기 전 히틀러는 자신의 사후(死後)에 독일을 이끌어나갈 정부의 총리로 괴벨스를 지명했다. 평생 자신을 맹종(盲從)해 온 데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총통 관저 지척까지 소련군이 육박해 온 상황에서 ‘괴벨스 총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5월 1일 괴벨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독살(毒殺)한 후 자기들도 독약 앰풀을 깨물었다. 나치 친위대원들이 괴벨스 부부의 시신 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유서에서 괴벨스 부부는 “총통과 국가사회주의가 사라지면 이 세계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나름 자기 신념에 따라 살다가 그 신념을 위해 죽은 셈이다. 그 신념은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악한 신념이었다.
 
 
  괴벨스는 살아 있다
 
  1930년대 말 베를린에서 특파원으로 일했던 미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전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제3제국의 흥망》에서 괴벨스의 선전선동이 가져온 후과(後果)에 대해 이렇게 기술(記述)했다.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거짓말과 검열당한 신문과 라디오에 의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넘어 가는가를 몸소 경험했다.…
 
  나치스로부터 나오는 정보에 처음부터 불신을 가지면서도, 몇 해 동안 계속 왜곡된 먹이를 주면 그것이 사람들의 정신에 어느 정도 깊은 인상을 주고, 가끔 오해로 이끌려 가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마음이 뜨끔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몇 해 동안 살아보지 못한 자로서는, 그 제도의 계산된 선전의 무서운 영향을 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가끔 독일인의 가정, 사무소에서 때로는 음식점, 맥주홀, 카페에서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얼핏 보기에 교육도 받았고 총명한 것 같은 사람으로부터 아주 야만스러운 말을 들었다. 그들이 라디오에서 들었거나 신문에서 읽었던 망언(妄言)을 그대로 받아 되풀이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경우 정해놓고 맛보게 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며, 마치 전지전능한 신을 모독한 것처럼 오싹 몸서리치게 하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인생의 모든 사실을, 히틀러와 괴벨스가 진실을 무시하고 다듬어 놓은 사람과 교제하려고 시도하는 것까지도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알았다.〉
 
  괴벨스는 죽은 후 총통 벙커의 폐허 속에서 숯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감성적인 이벤트와 왜곡된 통계로 국민들을 호도(糊塗)하는 위정자(爲政者)의 참모들, 인터넷 댓글 프로그램으로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 거짓말과 폭력을 일삼는 노조를 앞세워 공영방송을 장악한 권력, 방송을 통해 자기들의 비뚤어진 정치이념을 여과 없이 전파하면서도 그걸 ‘방송정상화’라고 우겨대는 방송노조, ‘적폐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직원들을 학살하듯 거리로 내모는 투사 출신 방송사 사장들, 망가져 가는 경제나 김정은 정권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관영 언론들, ‘가짜 뉴스’로 대중을 선동해 거리로 내모는 방송 PD들, 획일화된 주제의 정치성 영화만을 양산해 내는 영화인들의 의식 속에 괴벨스는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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