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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李仁浩 교수가 말하는 ‘탄생 200주년 맞은 칼 마르크스가 역사와 현실에 미친 영향’

“문명사회 不文律을 다 때려 부수는 게 진보인 양 착각하게 만든 게 가장 큰 잘못”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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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 체제는 多數의 이름을 빌려 少數 독재 하는 이중적 구조, 국민을 선전과 선동으로 속이면서 이끌어나가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어”
⊙ 이승만, “기업인을 적대시하고, 국가를 약화시키고, 모든 재산을 共有하는 식으로 하면, 발전 동력·창의력이 나올 데가 없다”
⊙ “사람들을 속이고, 역사를 정치도구화하는 건 스탈린이 하던 짓”

李仁浩
1936년생. 서울대 사학과·美웰즐리대 사학과 졸업, 美하버드대 사학박사 / 고려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駐핀란드대사, 駐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명지대 석좌교수, KAIST 초빙석좌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KBS이사장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조선일보DB
  올해는 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라인란트의 트리에에서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헨리에타 마르크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칼 마르크스-그의 생애와 시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19세기 사상가 중에 칼 마르크스만큼 인류에게 직접적이고 체계적이며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 그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추종자들에게 지적・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때 유럽에서는 위대한 대중적 영웅들과 순교자, 로맨티스트 등 전설적인 인물들이 그들의 삶과 언어를 통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혁명적 전통을 창조한 민주적 민족주의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대중적 영향력은 그 황금시대에서조차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을 정도로 강력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소련・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나 드디어 완전히 ‘역사의 관(棺)’ 속으로 들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2008~2009년의 글로벌 금융・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마르크스는 다시 부활했다. 멀리 다른 나라들까지 갈 필요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 혹은 그 ‘한국적 변태(變態)’인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정부와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이인호(李仁浩・82)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난 것은 마르크스가 세계사와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한국 현실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많은 국민은 이 교수를 최초의 여성 대사(주핀란드대사, 주러시아대사)로, 전 KBS 이사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원래 러시아 지성사(知性史)를 전공한 서양사학자였다. 1980년대 초 그가 번역한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지식인과 저항》 등은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이후에는 북한인권운동 및 좌(左)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야당 성향 KBS 이사진을 교체하려는 정권 및 노조(勞組)의 시도에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KBS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간의 고초로 인해 심신(心身)이 많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됐는데, 82세의 노(老)교수는 여전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매력
 
칼 마르크스 (1818~1883).
  ― 금년이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입니다.
 
  “역사에 직접 미친 영향으로 보면, 마르크스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라고 볼 수 있어요. 마르크스의 사상이 철학적으로, 진리로서, 위대하다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이 전 세계 역사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 마르크스의 사상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노동하는 힘없는 다수(多數)가 평등하게 인간답게 사는 세계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理想)이 가장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영향력이 컸던 것이죠.”
 
  ― 마르크스 이전에도 여러 형태의 유토피아주의 같은 게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처럼 지속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마르크스가 특히 호소력이 강했던 이유는 뭘까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내지 산업화 초기, 즉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진통이 가장 컸을 때,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내세웠어요. 이전의 농업시대에는 가난해도 집단(공동체) 내에서 어느 정도 서로 보호해 가면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산업화 초기는 인간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심리적으로 소외(疎外)당하면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의 소외라는 게 피부로 느껴지던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이론과 현실의 배합이 강렬했던 거죠.”
 
 
  레닌주의로의 변질
 
레닌과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를 후진적 러시아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크게 변질시켰다.
  ― 같은 유럽에서도 각 나라마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게 달랐지요.
 
  “마르크스의 조국이었던 독일에서는 마르크스 이론가들이 정치실험을 하지만 결국은 사회가 혁명적으로 변하는 것보다는 차츰차츰 수정주의적으로 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변화해 가는 것이 이롭다는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사회민주주의지요. 반면에 ‘역사는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자기모순이 발생하면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 공산주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객관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여건이 되지 않는 러시아·중국 같은 후진국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달리 자본주의 후진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이유가 뭘까요.
 
  “기득권층을 무너뜨리면 현재 억압받고 있는 가난한 다수가 권력을 쥐게 된다는 주장이 정치·경제 후진국에서 그만큼 더 잘 먹혀들어 간 거지요. 마르크스도 죽기 전에 자기 이론대로라면 러시아 같은 나라가 혁명이 일어날 객관적인 여건은 안 되지만 혁명이 성공할 현실적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는 걸 인식하고 자기 이론을 수정해야 하는지 고민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 왜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요.
 
  “레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금융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어 극소수의 부르주아를 뒤엎고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인데, 산업화 초기 단계에 있던 러시아에서는 그걸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객관적 상황이 무르익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어 시민의식이 생기기를 기다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조급했던 거지요. 레닌은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농민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반발심을 혁명적 에너지로 동원하려고 도농(都農)동맹을 고안해 냈습니다. 레닌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소위 의식 있는 ‘혁명적 아방가르드 인텔리겐치아’가 노동자·농민의 이름을 빌려서 혁명을 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변형한 것입니다.” 이인호 교수는 “그 바람에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린 공산주의 혁명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게 됐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마르크스가 말한 기본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수의 이름을 빌리지만 실은 소수가 독재를 하는 이중적 구조, 국민을 선전과 선동으로 속이면서 이끌어나가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1당 독재로 끝나지 않고 그 가장 추악한 형태인 1인 독재로 가버렸지요.”
 
 
  이승만의 공산주의 비판
 
  ― 마르크스주의는 일제(日帝)하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레닌은 계급투쟁뿐 아니라 민족모순이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피(被)압박민족의 해방을 주장합니다. 봉건주의를 타파하는 동시에 민족해방을 하는 데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는 굉장히 매혹적인 이념이었지요. 그때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이론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의 이상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 이승만 박사가 1923년 《태평양잡지》에 기고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은 지금 봐도 정말 명쾌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결함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저마다 능력과 추구하는 목표가 다양하다는 걸 몰랐어요. 인간을 순전히 경제적 동물로 보고 경제적으로만 풍족해지면 욕심이 없어진다고 했죠. 그건 정말 터무니없이 잘못된 가정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마르크스가 놓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박사는 ‘자본가·기업인을 적대시하고, 지식인들을 홀대하고, 종교를 박해하고, 국가를 약화시키고, 모든 재산을 공유(共有)하는 식으로 하면, 발전 동력·창의력이 나올 데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소련의 실험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 아서 쾨슬러나 앙드레 지드 같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소련 공산주의에 열광하고 있을 때에, 이 박사는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지요.”
 
  ― 그런 통찰력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승만 박사가 동양의 학문적 전통, 한국인으로서 체험한 비애(悲哀) 위에 서양 학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박사는 인간성의 본질,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상머리에서 이론을 만들어낸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 해방 후 남한 주민들의 70~80%가 우리가 독립 후 지향해야 할 체제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원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70~80%라는 건 과장인 것 같지만, 여운형(呂運亨) 정도의 중도(中道)노선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계공산주의운동이 코민테른을 통해 나오지만 실제로는 모스크바가 자기네 국가이익을 위해 주도하는 세계운동이고, 그 지령을 받는 한 공산주의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애국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몰랐습니다. 반면에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은 소련공산당의 지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한, 공산주의 세력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주독립을 향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죠.
 
  어느 나라에서나 일단 공산당에 가입하면 모든 걸 당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철칙(鐵則)입니다. 소련·동구가 무너질 때에도 공산당 당적(黨籍)을 버리지 않았던 영국의 공산주의자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같은 사람도 그걸 인정합니다. 그는 ‘공산당원이 되면 사생활에서 어떤 여자와 사귀느냐 하는 것도 당의 명령에 따라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죠.”
 
 
  이승만과 스탈린의 대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국사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뀌었다.
  ― 김구 선생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가 ‘민족’이라는 가치에 매몰됐었기 때문일까요.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거죠.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구를 완전히 장악하고 냉전(冷戰)이 시작됐다는 것, 김일성은 완전히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사람이라는 걸 간파하지 못한 거죠.
 
  반면에 이승만 박사는 북한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임시정부 같은 게 수립됐으니 우리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어서 대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걸 두고 지금 저쪽에서는 이승만의 정읍발언 때문에 분단이 됐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이 박사가 끌어낸 것이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입니다. 그대로 됐으면 우리는 선거를 통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어요. 그걸 거부한 게 소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 공산주의 체제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게 부정적이었죠.”
 
  이인호 교수는 “공산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1945~1953년 세계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은 이승만과 스탈린의 대결이었다”면서 “한반도 남쪽마저 스탈린에게 먹히느냐 마느냐 하는 힘든 대결에서 이승만이 승리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한반도 북쪽에는 ‘당(黨)이 모든 걸 해줄 테니까 당에 복종하라’고 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지만, 이승만 박사는 ‘국가가 모든 걸 해주지는 못하지만 개인을 해방시켜 줄 테니 각자 자기가 힘낼 수 있는 대로 뛰어라, 대신 국가는 기본 인프라와 교육을 제공해 주겠다’고 하는 체제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남과 북이 원래는 같은 체제였는데, 우리는 있는 힘을 다 쏟아 여기까지 온 거고, 북한은 있던 힘이 억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런 차이가 나게 된 것이죠.”
 
 
  “역사를 정치도구화하는 건 스탈린이 한 짓”
 
  ― 지금 정부는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은 유일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빼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문구가 어떻고 하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인간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가장 악랄한 점이 바로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역사를 정치도구화하는 건 스탈린이 하던 짓이에요.”
 
  ― 4·3 제주폭동 등에 대한 평가도 흔들리고, 6·25가 남침이라는 사실조차 가르치지 않게 될 모양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실제로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알아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자기들 소견에 맞추어서 역사를 조작하는 유혹에 빠지고 있는 건 문제입니다. 현실공산주의가 역사를 왜곡해서 정적(政敵)을 죽이는 걸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는데, 이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마르크스주의건, 자유민주주의건 간에 지적(知的) 판단력, 도덕적 정직성이 모든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어도, 과거에 일어난 일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왜곡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체제’라고 하는 북한의 논리에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 대통령이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걸 보니,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은 아주 썰렁하게 지나가게 생겼습니다.
 
  “지나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지워버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대통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임시정부와 국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건 독재 중의 독재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 이른바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리고 공무원·군인·법조인·교사 이런 사람들조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 보면 대한민국은 그간의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결국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 실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최순실 사태니 뭐니 해서 멀쩡한 대통령을 탄핵이라는 형식을 빌려 불법으로 몰아낸 거 아니에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정도로 국가를 해치는 일을 한 게 있나요? 없잖아요?
 
  이건 헌법재판관을 비롯한 지식인 계급이 사리(私利)를 위해서 국가를 배반한 거예요. 스페인의 정치학자 오르데가 이 가제트가 말한 ‘지식인의 배반’이 벌어진 거죠.”
 
 
  ‘지식인의 배반’
 
  ―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정말 공허한 이론을 가지고 대중을 오도(誤導)하고 있어요. 지금도 시장 같은 데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 우리가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지 다들 인정해요. 자기들이 직접 체험했으니까…. 불과 반(半)세기 동안에 이렇게 형편이 달라지는 나라가 세상에 별로 없는데, 그걸 전부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어요.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이 학생운동 같은 데서부터 침투하기 시작해서 국민들의 의식을 교란시킨 겁니다. 우리가 너무 경제발전과 정치에 취해서, 지하를 통한 세뇌(洗腦)공작, 특히 역사교육을 통한 세뇌공작에 당한 거죠.”
 
  이 교수는 “이렇게 된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부의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가 지식인을 군인 다루듯이 힘으로 억압하려 하면서 연구소에서조차 공산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우매한 반공정책을 편 것입니다.”
 
  ―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도 있지 않았을까요.
 
  “반대세력 역시 박정희 시대에는 ‘군사독재 타도’만 외치면 모든 게 되니까 공산주의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 않았어요. 그게 역작용을 일으켜서,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져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전개되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운동이 주사파(主思派)의 소굴이 되어 버렸어요. 그만큼 우리나라 지식계가 세계와 동떨어져서 역사에 대한 이해도, 진정한 지식인으로서의 양식과 양심도 저버린 세력이 되어 버렸어요. 특히 역사학계는 완전히 파산했어요, 파산!”
 
  이인호 교수는 1990년경 경험한 일을 이야기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한창 진척시키고 있던 1990년경, 고르바초프의 이론가였던 바짐 메드베데프를 서울대로 초청, 강연을 마련했어요. ‘고르바초프의 오른팔’이 왔다고 하니 운동권 학생들도 많이 들으러 왔어요. 한 학생이 ‘소련이 세계사회주의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어떻게 그 사명을 저버리고 다른 쪽으로 간다고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더군요. 나중에 메드베데프는 웃으면서 ‘당신 나라 학생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면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지 말 걸 그랬다’고 하더군요.”
 
 
  혁명 前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민
 
이인호 교수가 1980년대 초 번역했던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 젊은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거나 관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전혀 없었지요. 6·25가 났을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어요. 아버지는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도망쳐 나와서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숨어서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부역 당하고, 온 가족・친척이 수난당하는 것을 봤어요. 계급투쟁 이론을 적용해서 소위 유산층(有産層)에 속하는 사람들을 다 인민의 적(敵)으로 취급하는 것, 완장 찬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고 다니는 걸 보면서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 미국에서 러시아 지성사를 공부하셨지요.
 
  “미국 웰즐리대학에 유학 중이던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위성을 발사하자 충격을 받은 미국은 러시아 연구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웰즐리대학에서도 러시아 지성사 강좌가 개설됐는데, 들어보니까 너무 재미있더군요. ‘어떻게 하면 서구를 따라잡으면서도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던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민이 바로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아, 내가 이걸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1980년대 초, 러시아혁명 전야(前夜) 러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을 담은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을 번역, 소개했다. 이 교수가 말하는 이 책의 내용 몇 구절을 보면, 마치 오늘의 한국 사회를 예견하는 듯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잘못된 정치체제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권력에 의해 압살(壓殺)당하고 나면, 어린애들이 나서서 사회의 구세주(救世主) 역할을 자임한다. 이들은 인생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면서도 구세주의 역할, 독선(獨善)에 빠진다. 젊은 나이에 한창 공부를 하고 사물을 직시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문제가 심각하고, 결국 ‘어린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의(正義)에 대한 갈구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진리와 정의를 혼동해서, 정의의 이름 아래 진리를 쉽게 무시한다. 말하자면 정의감에 솔깃하게 들리면 거짓도 쉽게 받아들인다.”
 
  “악법(惡法)과 오랫동안 싸우다 보니까 법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른다. 법이라는 것이 있어야 인간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인데, 악법을 거부한다고 법 자체를 등한시한다.”
 
  “사회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개인이 도덕적으로 인격을 연마하고 자기 수련을 해야 하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혁명가가 되는 사람의 동기를 보면,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특권(特權)을 다 버리고 전체를 위해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反)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입장에서, ‘이 사회가 뒤집혀야 내가 기회가 있다’고 해서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극(極)에서 극이지만, 혁명지상주의(革命至上主義)라는 전제 아래서 힘을 합쳐 일한다. 그래서 혁명이 성공했을 때, 누가 권력을 잡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쪽이 잡지,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
 
 
  ‘역사의 당위성’에 대한 믿음이 낳은 독선
 

  실제로 이인호 교수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이 혁명 전야에 고민했던 문제들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몸으로 체험했다.
 
  ― KBS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이 정권 출범 이후에 험한 일을 많이 당하셨지요.
 
  “계급투쟁론과 역사발전단계론을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의 당위성(當爲性)’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공산주의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걸 향해서 움직이는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 ‘역사의 당위성’을 거부하는 세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대시해도 된다고 봅니다. 본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혁명이론이라고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인간을 오히려 도구화하고 개인의 도덕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혁명을 위해서는 심지어 살인도 정당화된다고 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집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나 그와 유사한 극단적인 좌파혁명 이론들이 나타내는 가장 부정적인 증상이죠.”
 
  ― 마르크스주의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횡포 가능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 하는 점을 경고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긍정적인 면이라고 봐요. 물론 영국의 선거법 개혁, 근로시간 규제 등에서 보듯이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자유주의 사회에도 자체 수정 기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라는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나오면서 그런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됐습니다. 독일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이 그 예(例)죠.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일정 정도 기여한 것은 확실합니다. 또 현실사회주의(소련)가 나치즘, 파시즘을 패배시키는 데 기여한 것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 이익의 작용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말입니다.”
 
  이인호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다는 얘기도 꼭 써달라”면서도 “나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컸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사회가 문명사회로 진화하면서 생긴 여러 가지 불문율(不文律)들이 있습니다. 그걸 지켜야 인간답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불문율로 지켜오는 걸 다 때려 부수는 게 진보이고 발전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문재인 정부도 사회발전을 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건설한 쪽은 다 부정적으로 얘길 하고, 그걸 치받고 올라온 사람들만 큰일을 한 것같이 하잖아요? 그런 사회가 어떻게 발전을 하겠어요? 파괴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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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허    (2018-05-25)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1
이인호교수님의 글은 적확하다. 늘 이분 글을 정독해서 읽는데, 혼동된 개념들을 쉽고 명쾌하게 이해가 되게 말씀하신다. 비겁한 지식인들, 우매한 지식인들의 귀감이 된다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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