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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소신(所信)도 나라를 망친다 〈3〉 앨저 히스

죽는 날까지 ‘매카시즘의 희생자’로 행세한 ‘아주 탁월한 스파이’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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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 졸업한 엘리트… 대공황의 비참함 보면서 공산주의자인 아내의 영향으로 좌경화돼
⊙ 얄타회담 당시 미국의 전략 담은 〈블랙북〉 관리하면서 소련에 정보 누출
⊙ 전향한 공산주의자 휘태커 체임버스의 고발로 정체 탄로나… 44개월간 위증죄로 복역
⊙ 출옥 후 42년간 ‘매카시즘의 희생자’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무죄 강변
⊙ 구(舊) 공산권 문서, 베노나 문서 등 공개로 소련 간첩이었다는 사실 드러나
1948년 미국 하원 미비활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선서하는 앨저 히스. 그는 자신이 소련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위증죄로 복역했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 박사는 존 스태거스 및 제이 제롬 윌리엄스와 함께 국무부를 방문하여 앨저 히스와 스탠리 혼벡을 만났다. 히스는 코델 헐 국무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이었고, 혼벡은 극동문제 책임자였다. 이 박사는 미국이 나치 지배하의 유럽에서 망명정부들에 주고 있는 수준의 국가 인정과 지원을 한국 정부에도 부여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히스는 이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했다. 미국 정부는 이 박사가 실제로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종전 후에 미국의 관리들이 실시할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단서를 붙여 대한민국을 인정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이 제안에 히스가 난처한 듯 침묵을 지키자, 이승만은 그렇게 서둘러 인정해 주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무역의 출구로 한국의 부동항(不凍港)들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50년이 넘도록 계속 그 방도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킨 후 먼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한반도에 진출해 한국을 강점할 것이라고 이승만은 단언했다.
 
  히스는 전시(戰時)의 주요한 동맹국 중의 하나인 나라(즉, 소련)에 대한 공격을 조용하게 앉아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이승만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한국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일본의 항복 후에나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이승만의 말처럼 미국이 소련의 기본정책에 반하는 어떤 종류의 사전(事前) 행동도 취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은 분명했다.
 
  이승만은 국무부를 떠나면서 히스가 러시아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한 젊은이, 그것도 세계문제에 대해 아무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미국의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의 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의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1942~1960) (원제 Syn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에 나오는 얘기다.
 
  이승만이 만났던 ‘애송이’ 앨저 히스(Alger Hiss·1904~1996)가 당시 미국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앨저 히스는 단순히 ‘세계문제에 대해 아무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히스가 러시아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앨저 히스는 러시아, 즉 소련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아내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다
 
  앨저 히스는 1904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 살 때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자살했다. 히스는 어머니와 숙모 슬하에서 자라났다. 3남 2녀 중 넷째였던 히스는 공부 잘하고 잘생기고 매너 좋은 아이로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자라났다.
 
  히스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명문 존스 홉킨스 대학을 나와 하버드 로스쿨로 진학했다. 하버드 재학 시절에는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 편집장을 지냈다. 명망 높은 이 잡지의 편집장 자리는 이후 법조계에서의 성공을 담보해 주는 보증수표였다. 졸업을 앞두고 펠릭스 프랑크퍼터(후일 연방대법관 역임) 교수는 히스를 올리버 웬델 홈즈 연방대법관의 비서로 추천했다. 프랑크퍼터 교수나 홈즈 대법관 모두 미국 사법사(司法史)에 큰 획을 그은 거물들이었다. 홈즈의 비서를 지냈다는 경력은 일류 로펌(Law Firm)으로 스카우트되는 지름길이었다. 법조계에서 히스의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이때 히스의 인생행로가 확 바뀌었다. 작가이자 예술사가(藝術史家)였던 프리실라 홉슨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프리실라는 아이까지 딸린 연상의 이혼녀였다. 그때까지 성적(性的)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인생을 망친 형 보슬리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금욕적인 생활을 해 오던 히스는 프리실라에게 푹 빠졌다. 히스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29년 프리실라와 결혼했다.
 
  프리실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혐오하면서 소련식 통제경제 체제만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공산주의자였다. 마침 당시 미국에서는 대공황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뉴욕의 대형 로펌에 취직한 히스는 매일같이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됐다. 프리실라는 히스에게 빈부(貧富)격차, 실업문제 등과 같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 영향으로 히스는 노동자·농민 문제를 주로 다루는 변호사단체인 국제법률가협회에 가입했다. 여기서 히스는 하버드 출신인 리 프레스먼을 만났다. 프레스먼은 미국공산당 당원이었다. 대공황의 와중에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좌경화(左傾化)했다는 점에서 히스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5인방’(《월간조선》 2018년 4월호 참조)과 흡사하다. 또 아내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됐다는 점에서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경우와 비슷하다.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제3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루스벨트는 대공황 극복을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경제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1933년 히스는 농업조정국(AAA)의 법률자문관이 됐다. ‘뉴딜보이(New Deal Boy)’가 된 것이다. 농업조정국은 생산량을 조절해 주요 농축산물 가격을 상승시켜서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하지만 농업조정국의 사업은 농장주들은 물론 소비자들의 반발에 부딪쳤고, 위헌(違憲)시비가 일었다. 히스가 하는 일은 이런 위헌 시비에 대해 법률적 조언을 해 주는 것이었다. 야당인 공화당을 비롯한 반(反)루스벨트 세력은 뉴딜정책을 좌초시키기 위해 농업조정국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농업조정국의 활동도 지지부진해졌다. 혹자는 히스가 단순히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주의 동조자를 넘어 소련의 간첩이 된 것은 이 시기에 느낀 좌절감 때문이라고도 한다.
 
  농업조정국 시절 히스는 농무부 자문관 해럴드 웨어가 이끄는 토론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다. 미국공산당 당원이었던 웨어는 이렇게 구축된 인맥(人脈)을 소련을 위한 간첩망으로 변모시켰다.
 
  1934년 히스는 군수(軍需)산업 분야의 문제점들을 조사하기 위한 상원의 특별위원회(나이위원회)에서 일하게 됐다. 이듬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해럴드 웨어의 뒤를 이어 소련 간첩망을 관장하게 된 조지프 피터는 미국의 군사 관련 정보들을 캐내기 위해 히스를 포섭했다. 조지프 피터는 소련군 참모본부 정찰총국(GRU)과 연계되어 있는 간첩이었다.
 
  히스 가정환경과 성격도 그가 소련의 간첩이 되는 데 일조했다. 자살한 아버지와 누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죽은 형을 둔 히스는 프리실라와 결혼하면서 어머니와도 멀어졌다. 그는 아이비리그 출신이었지만, 출신 배경과 성격 때문에 아이비리그의 엘리트 문화에 쉽게 녹아들지 못했다. 그가 프리실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거니와, 더 나아가 히스가 비밀스럽고 모험적인 스파이 세계에 빠져드는 것으로 그런 소외감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얄타 회담
 
얄타회담 당시의 앨저 히스(원안)는 미국의 대소전략이 담긴 〈블랙북〉을 관리했다.
  193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농업조정국의 존립 근거였던 농업조정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해 9월 히스는 국무부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히스는 프랜시스 세이어 국무부 차관보의 특별보좌관, 스탠리 혼벡 극동국장의 보좌관, 국무부 특별정치사무국 부국장·국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특별정치사무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질서를 설계하고 국제연합(UN)의 출범을 준비하는 기구였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수상 겸 공산당 서기장,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만났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의 유럽 질서, 특히 동유럽 문제를 결정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이 참여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히스는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과 함께 이 회담에 참석했다.
 
  얄타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제임스 번스 전쟁동원국 국장(후에 국무장관 역임)이 루스벨트에게 “회담의 합의 내용을 조약으로 규정할 경우 상원의 비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민하던 루스벨트는 앨저 히스를 불러오라고 했다. 평소 루스벨트는 히스를 ‘변호사의 변호사’라고 할 정도로 총애했다. 루스벨트와 스테티니어스 장관, 히스는 머리를 맞대고 대응방안을 궁리했다. 해결방안을 찾아낸 사람은 루스벨트였다. 그는 “얄타 합의를 조약이라고 하지 말고 ‘성명(statement)’이라고 하자. 이 성명서 안에서 ‘우리가 합의를 보았다’고 표현하자”고 제안했다. 히스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겠다”고 자문(諮問)했다. 말은 ‘성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약과 다름없는 구속력을 갖는 성명이었다. 이런 자리에 히스가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후 히스는 유엔 임시 사무총장을 맡아 유엔 창설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유엔헌장 초안(草案)을 작성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안보리 상임이사국, 5대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이라는 제도를 고안해 낸 사람이 바로 히스였다. 히스는 후일 국무부 장관이 되는 딘 애치슨 차관보 등의 총애를 받았다. 히스의 전도는 양양해 보였다. 차관보, 차관, 더 나아가 장관 자리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46년 말 히스는 돌연 국무부를 떠났다. 딘 애치슨, 존 포스터 덜레스 등이 그에게 카네기재단 이사장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휘태커 체임버스의 등장
 
히스를 간첩으로 고발한 휘태커 체임버스.
  히스가 국무부를 떠나게 된 것은 미 연방수사국(FBI)이 그에 대한 내사(內査)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의 소련 간첩망을 운영하던 엘리자베스 벤틀리라는 여간첩이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1945년 가을 FBI에 자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녀가 넘긴 미국 정부 내 간첩명단 중에는 앨저 히스와 재무부 차관보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들어 있었다. 같은 무렵 캐나다 주재 소련대사관 서기 이고르 구쳉코가 캐나다 공안당국에 자수했다. 그가 제공한 자료에도 히스의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보다 10년 전에 미국 내 소련 간첩망에 대해 경고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타임(Time)》 편집자 휘태커 체임버스(1901~1961)였다. 체임버스는 전 미국공산당원이자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1930년대에 히스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1901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3류 언론인의 아들로 태어난 체임버스는 컬럼비아대학교 재학 시절 공산주의를 접했다. 1925년 미국공산당에 입당했고, 1932년 공산당 지하조직에 들어갔다. 1933년에는 소련으로 들어가 간첩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이후 체임버스는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대중(The Mass)》 같은 좌파 매체에서 활동했다.
 
  미국에서 체임버스를 관리한 인물이 앞에서 말한 조지프 피터였다. 피터는 체임버스를 해럴드 웨어의 조직, 즉 ‘웨어 그룹’에 가담시켰다. 체임버스는 ‘조지 크로슬리’라는 가명(假名)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정부에 침투해 있는 미국인 간첩들과 소련 정보기관 간의 연락을 맡았다. 히스가 습득한 정보를 받아서 뉴욕에 있는 소련 간첩 바이코프에게 전달한 사람도 체임버스였다. 체임버스는 ‘밥(Bob)’, ‘칼(Carl)’ 등의 암호명도 사용했다.
 
  하지만 체임버스는 점차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37년에 이르러 체임버스는 공산당 활동을 조용히 접고 《타임》에 서평 전문 기자로 들어갔다. 1938~1939년 소련의 스탈린이 대숙청을 감행했다. 체임버스와 관계를 맺었던 소련 정보요원들도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는 소식이 끊어졌다. 공산주의의 잔인함을 실감하게 된 체임버스는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을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1939년 8월 소련의 스탈린이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맺은 것도 소련에 대한 그의 환멸을 부추겼다.
 
 
  실패한 고발
 
  전(前) 소련 정보요원 슈메카 진스베르크(암호명 발터 크리비츠키)도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소련군 정찰총국(GRU)과 내무인민위원부(NKVD. KGB(국가보안위원회)의 전신)에서 근무했던 진스베르크는 그의 절친한 동료가 대숙청 와중에 처형되자 전향한 인물이었다.
 
  체임버스는 1939년 말 친구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국 내 소련 간첩망에 대해 고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백악관 안보보좌관 겸 국무부 차관인 아돌프 A. 벌이었다. 체임버스는 소련 간첩들이 국무부를 비롯한 미국 정부 요소요소에 침투해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여기서 체임버스는 실수를 했다.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자기가 아는 간첩들의 실명(實名)을 적시(摘示)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경고는 두루뭉술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분위기 속에서 벌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1942년 FBI가 체임버스를 찾아왔다. 이때도 체임버스는 자기가 아는 간첩들의 실명을 분명하게 대지 않았다. 당연히 FBI는 더 이상 조사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슈메카 진스베르크도 FBI에 “NKVD(KGB) 핵심 요원이 미국 국무부 고위층에 침투해 있으며, 소련은 그와는 별도로 31명의 정예요원을 미국 정부 요소요소에 박아 놓았다”고 제보했다. 그는 61명의 NKVD 정보제공자들이 영국에서 암약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5인방’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정보도 제공했지만, 영국 정보기관은 그들의 신원을 밝혀 내는 데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 실망한 진스베르크는 자살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 됐다. 루스벨트 정부는 소련에 무기를 대여해 주는 등 친소(親蘇)정책을 폈다. 해리 홉킨스, 애브럴 해리먼 등 친소적 인사들이 득세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체임버스도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비미활동위원회
 
히스사건을 계기로 ‘스타정치인’이 된 리처드 닉슨.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과 협력해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해 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해리 홉킨스, 애브럴 해리먼, 앨저 히스 등이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소련은 자기들의 영향권 아래 들어온 동구권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는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 공산주의의 확산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선언했다. 냉전(冷戰)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발맞추어 미국 하원은 비미(非美)활동위원회(the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HCUA)를 만들었다. 공산주의자들 및 그 동조자들이 정부기관 등 미국 각계각층에 얼마나 침투해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조직이었다.
 
  비미활동위원회는 1948년 7월 엘리자베스 벤틀리를 소환한 데 이어, 다음 달에는 휘태커 체임버스를 불러냈다. 의원들과 실무 협의를 하는 자리에서 체임버스는 앨저 히스가 자기에게 국무부 기밀문서들을 누출한 소련 간첩이었다고 발언했다. 지난 수년간 미국 외교정책을 주도해 온 전직 국무부 고위관리가 간첩이라는 증언에 의회는 발칵 뒤집혔다.
 
  이 소식을 접한 앨저 히스는 펄펄 뛰었다. 그는 휘태커 체임버스가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소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1948년 8월 7일 열린 비미활동위원회 청문회가 열렸다. 캘리포니아 출신 하원의원 리처드 닉슨이 청문회를 주도했다. 닉슨의 질문에 답하면서 체임버스는 1930년대에 자신은 히스와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체임버스는 당시 두 사람의 행적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닉슨은 히스를 불러 1930년대 그의 행적들을 말해 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진술을 대조해 보니,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닉슨은 두 사람을 대질(對質)신문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계속 추궁을 받자 히스는 “1930년대에 ‘조지 크로슬리’(휘태커 체임버스의 가명)라는 사람을 알고 지냈는데, 휘태커 체임버스와 닮았다”면서도 “1936년 이후 그와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체임버스는 히스가 밤에 아내 프리실라에게 국무부 기밀문서들을 갖다 주면 프리실라가 이를 가정용 타이프라이터로 쳐서 사본(寫本)을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히스는 체임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 보라”고 했다. 이 말에 열 받은 체임버스가 “당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받아치자, 히스는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1948년 11월 4일 체임버스는 재판정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라고 말했다. 체임버스 측은 물증(物證)도 제시했다. 히스가 국무부 기밀문서들을 적은 육필 메모들과 프리실라가 타이핑한 문서 등을 찍은 마이크로필름이었다. 체임버스는 이 필름들을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넣어 자기 농장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 문서들은 ‘호박 문서’라고 불리게 됐다. 히스의 변호사들은 프리실라가 사용했던 타이프라이터를 증거로 제출했다. 감정 결과 체임버스가 제출한 타이핑한 문서들은 이 타이프라이터로 작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위증죄 재판
 
  결국 히스가 체임버스를 모른다고 했던 것과 국무부 기밀문서를 누출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게 거짓말로 드러났다. 의회는 히스를 위증죄(僞證罪)로 고발했다. 간첩죄의 소멸시효는 이미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이 일로 초선 하원의원이던 닉슨은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되면서 ‘반공(反共)의 기수(旗手)’로 주목받게 됐다. 4년 후 닉슨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 부통령이 됐다.
 
  1949년 5월 31일 히스의 위증죄 사건 재판이 시작됐다. 법정에 선 히스와 체임버스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얼굴도 잘생기고 능변인 히스는 한눈에 봐도 믿음이 가는 엘리트 관료였다. 반면에 체임버스는 얼굴에 살이 찌고 땅딸막하고 차림새가 단정치 못한 데다가 말주변도 부족해 ‘루저(loser)’ 같은 인상을 주었다. 체임버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부도덕성, 거짓말, 그리고 공산주의자로서 조국을 배신하려 했던 사실 등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히스에 대한 증언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역설했다. 히스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7월 8일 대심은 기소 찬성 8명, 반대 4명으로 평결했다. 기소를 하려면 만장일치의 찬성이 있어야 했다.
 
  미국 정부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검사는 히드 매싱이라는 전향한 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매싱은 1930년대에 히스가 간첩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조직원이던 국무부 직원 노엘 H. 필드를 빼 가려 했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히스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히스는 감형되어 1951년 3월부터 44개월간 복역한 후 1954년 11월 출감했다.
 
 
  히스의 투쟁
 
토니 히스가 쓴 《드디어 웃다》.
  1952년 휘태커 체임버스는 회고록 《증언(Whitness)》을 썼다. 이 책에서 체임버스는 1930년대에 국무부, 재무부, 표준국 등에 침투해 있던 소련 간첩망에 대해 서술하면서 국무부에서 일하던 정보제공자들 가운데 최고는 히스였다고 술회했다. 공산주의자가 됐다가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에서의 인간적 고뇌 등이 잘 녹아 있는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을 받고 깊은 감동을 받은 사람 중에는 당시 영화배우조합 회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있었다.
 
  앨저 히스도 1957년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냈지만, 반공적이던 시대 분위기, 무미건조한 내용 때문에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히스는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했다. 연금도 박탈당했다. 세상의 눈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는 아내 프리실라와도 소원해졌다.
 
  하지만 앨저 히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련의 간첩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소련으로 도망쳐 버림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몸으로 입증한 ‘케임브리지 5인방’의 킴 필비, 가이 버제스, 도널드 매클린 등과는 달리, 히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은 매카시즘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히스가 명예회복 운동에 나섰다는 말을 들은 체임버스는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부정해 세상을 속이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라는 얘기였다.
 
  그런 상투적인 수법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1956년 프린스턴대학교의 한 동아리는 히스 초청 강연을 열었고, 프레드 J. 쿡은 《앨저 히스의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책에서 히스를 CIA와 FBI의 음모의 희생양으로 묘사하면서 그를 ‘미국의 드레퓌스’라고 미화했다.
 
  1960년대가 되자 세상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흑인민권운동, 베트남전쟁,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 등에 힘입어 ‘진보의 시대’ ‘리버럴의 시대’가 온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등 신좌파(新左派) 단체들이 대학가를 장악했다. 히스는 대학가의 단골 초청연사가 됐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시대의 희생양’으로 포장했다. 월남전의 좌절 속에서 히스는 잘 팔리는 정치상품이었다. 마치 1980년대 이후 한국 대학가에서 ‘냉전시대 마녀사냥에 희생된 양심적 지식인’ ‘통일운동가’로 포장된 좌익수(左翼囚) 출신자들을 강사로 즐겨 초대했고, 그들의 삶을 미화한 소설이나 수기가 인기를 끌었던 것과 흡사하다.
 
  대학가의 인기강사가 되면서 히스의 생활도 폈다. 그의 연금을 박탈했던 법이 위헌판결을 받으면서 밀렸던 연금도 한꺼번에 돌려받았다.
 
  아마 1974년은 히스에게 가장 행복한 해였을 것이다. 비미활동위원회에서 그의 이력을 끝장냈던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下野)했기 때문이다. 닉슨이 나락으로 추락할수록 히스의 명성을 솟아올랐다. 1975년 히스는 변호사 자격을 회복했다. 1976년에는 히스의 주장, 그를 변호하는 주장들을 집대성한 존 C. 스미스의 《앨저 히스의 진실 이야기》가 나왔다. 히스는 1977년 자기 아들 토니 히스를 부추겨 자기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디어 웃다》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에서부터 득의에 찬 히스의 기분이 느껴진다.
 
 
  레이건, 체임버스에게 자유메달 추서
 
  하지만 아직 히스가 웃을 때는 아니었다. 1978년 알렌 와인스타인이라는 역사학자가 《위증(Perjury)》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와인스타인은 히스가 1940년대 초 이후 공산주의자나 소련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고 1945년에 이르러 그런 의심이 심해졌음을 보여주는 FBI와 국무부의 자료 등을 제시하면서, 히스가 소련 간첩이었고 위증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와인스타인은 당초 히스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겨 주기 위해 그에 대한 조사에 나선 학자였다. 그는 10년간에 걸쳐 FBI 등의 방대한 자료들을 입수해 검토하고, 멕시코와 소련을 드나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 와인스타인은 히스가 간첩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위증》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네이션》지의 편집인 빅터 네이버스키는 ‘앨저 히스에게 불리한 것을 입증하지 못한 사건’이라는 글을 써서 와인스타인을 비판했다.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히스는 자신에 대한 위증죄 판결을 번복하기 위해 재심(再審)을 청구했다. 1982년 연방지방법원은 히스에 대한 재판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신청을 기각했다. 연방항소법원과 연방대법원도 이를 확인했다.
 
  1984년 3월 히스는 또 한번 타격을 입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1961년 세상을 떠난 휘태커 체임버스에게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賞)인 대통령자유메달을 추서(追敍)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레이건은 체임버스에 대해 “역사에 의해 옳다는 것이 증명된 사람”이라고 치하했다. 이보다 앞선 그해 2월,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모교인 유레카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체임버스가 ‘공산주의를 버린 날’을 상기하자”고 강조하면서 “체임버스의 이야기는 국가통제에 대한 한 세대의 각성과 영원한 진실들과 근본적인 가치들의 복귀를 대변한다”고 말했었다. ‘호박 문서’가 발견됐던 체임버스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됐다.
 
 
  헝가리에서 발견된 노엘 필드의 진술
 
《위증》의 저자 알렌 와인스타인.
  앨저 히스의 굴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냉전이 해체되면서 구(舊)소련 및 동구의 기밀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 헝가리 사학자 마리아 슈미트는 헝가리 비밀경찰 파일에서 노엘 H. 필드에 관한 기록을 발견했다. 노엘 필드는 히스의 두 번째 위증죄 재판에서 검찰측 증인 매싱이 언급했던 국무부 직원으로 1949년 헝가리로 망명했던 사람이었다. 노엘 필드가 망명 직후 헝가리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남긴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1935년 여름, 히스는 나를 소련을 위한 간첩으로 포섭하려 했다. 히스의 이야기에서 그가 소련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체임버스는 히스의 지도원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히스의 위증죄 재판에서 체임버스나 매싱이 한 진술이 맞았던 것이다. 한편 1985년 영국으로 망명한 전 KGB 간부 올렉 고르디에프스키는 1991년 크리스토퍼 앤드류와 함께 쓴 《레닌에서 고르바초프까지 KGB 해외 작전의 내부 이야기》라는 책에서 히스가 1930년대뿐 아니라 1940년대에도 소련을 위해 첩보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히스도 반격을 도모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구(舊)소련 기밀문서들을 서방학자들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자 히스는 1992년 8월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자 구 소련문서 관리책임자였던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과 관련된 문서 혹은 자신이 소련을 위해 돈을 받고 일했던 간첩(paid agent)임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는지 타진했다. 볼코고노프는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을 위한 정보원으로 일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 왔다. 1992년 10월 29일 히스는 기자회견을 열어 볼코고노프가 보내온 답신을 공개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ABC, NBC, CBS 등 미국 유수의 언론들은 ‘앨저 히스가 반(半)세기만에 누명을 벗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위증》의 저자 와인스타인은 즉각 반격했다. “그는 볼코고노프는 KGB(국가보안위원회·1930~1940년대의 NKVD) 관련 문서만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며, 히스는 KGB가 아니라 GRU(소련군 정찰총국)를 위해 일했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에서 와인스타인과 만난 볼코고노프는 “나는 이틀 동안 KGB문서의 일부만을 살펴보았으며, 히스의 대리인인 존 뢰벤탈이 ‘히스는 단지 평화롭게 죽고 싶을 뿐’이라면서 그런 발표를 해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사안의 중요성을 모르고 경솔하게 발표했다”고 실토했다.
 
 
  KGB 요원들의 증언
 
얄타회담 후 모스크바에서 ‘알레스(히스)’와 만난 것으로 알려진 안드레이 비신스키 소련 외무차관.
  1995년에는 전직 소련 정보부원인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특수임무》라는 책이 나왔다. 거기에는 얄타회담 당시 히스의 행적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은밀한 관계를 구축했던 관리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앨저 히스로서, 그는 미국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나는 히스가 해리 홉킨스(루스벨트 대통령의 최측근 보좌관-기자 주)의 지시하에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다. 대화의 와중에 히스는 오만스키와 그 뒤 리트비노프에게 미국의 공식적인 태도와 계획들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소련 정보부에 협력하는 우리 정보제공자는 물론 미국 내에서 우리의 활동적인 정보활동가들과 아주 친근하게 지낸다. 히스는 우리에게 미국인들이 유럽에서 거래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정보제공자라고 인식한 신원조회가 있었다. 우리의 인물 목록에 히스는 소련의 국익에 아주 동정적이고 미국과 소련의 기관들 간의 전후(戰後) 협조를 강력히 지지하는 인물로 확인되었다. … 나의 옛 동료에 의하면 히스는 1930년대 초기와 중기에 워싱턴에서 암약하는 실버마스터간첩세포(농업조정국에 근무하던 러시아 출신 네이선 그레고리 실버마스터가 만든 간첩망. 라칠린 커리 백악관 고문, 해리 덱스터 화이트 재무부 차관보 등이 포섭되어 있었음)를 위해 일하는 기밀정보제공자였다고 한다.〉
 
  《위증》의 저자 와인스타인도 전 KGB요원인 알렉산드르 바실리에프와 함께 《귀신이 붙은 나무; 스탈린 시대에 미국에서의 소련 첩보활동》이라는 책에서 ‘KGB 파일 No.13173’이라는 문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소련에 포섭된 해롤드 글래서(암호명 루블)가 소련 영사이자 미국 내 소련 첩보 총책인 아나톨리 고르스키에게 보낸 문건이다.
 
  〈어느 FBI 요원이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에게 그들 직원 중 한 명이 손가방으로 한 무더기의 문서를 뉴욕으로 운반하는 것을 목격했었다고 알렸다. 그 후 그 문서들은 24시간 내에 워싱턴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문서들 중에는 정세보고서와 중요한 전문들이 들어 있었다. 그 문서들의 성격으로 판단해 보건대, 단지 3명만이 그 문서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알레스(Ales)’이다. … 스테티니어스에 의하면, FBI 요원은 그에게 문서들을 활용한 그런 작전들이 이미 18개월 동안 진행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문서들이 인출됐다. … 이 문제에 대해 (히스와) 대화를 마치면서, 스테티니어스는 “나는 귀하가 그에 연루된 인물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르스키는 1948년 작성한 메모 〈미국에서의 실패들 (1938~1948)〉에 ‘칼(Karl)그룹’에 속한 21명의 간첩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메모는 전 KGB 요원 바실리에프가 베껴 두었다가 《귀신이 붙은 나무; 스탈린 시대에 미국에서의 소련 첩보활동》에 소개했다.
 
  〈1. 칼(Karl) - 휘태커 체임버스. 전 《타임》 편집장(혹은 부편집장), 배신자.
  2. (생략)
  3. 레너드(Leonard) -앨저 히스, 전 국무부 직원
  4. 주니어(Jinior) - 도널드 히스, 전 내무부 직원〉
 
  도널드 히스는 앨저 히스의 동생이었다. 형은 동생마저 소련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베노나 문서
 
‘알레스(Ales)’의 이름과 행적이 언급된 베노나 문서. ‘알레스’가 1935년부터 소련 정보기관을 위해 일해온 사실, 얄타 회담 이후의 행적을 기술하고, ‘알레스’가 ‘아마도 히스’일 것이라는 각주가 달려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알레스’라는 암호명은 1995년 7월 미국 정부가 공개한 베노나(Venona) 문서에서도 나타난다. 베노나 문서는 국가안보국(NSA)이 1942~1946년 소련의 전문(電文)을 감청(監聽), 해독(解讀)한 것들을 말한다. 특히 1945년 3월 30일자 전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얄타 회담 이후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한 소련 인사(알레스는 그가 비신스키 동지로 알고 있다)가 알레스와 접촉한 것으로 전해지며, 또한 군사이웃들(소련군 정찰총국 GRU를 지칭하는 은어-기자 주)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감사 표시와 그 밖의 것들을 전달했다.〉
 
  소련 외무차관 안드레이 비신스키가 얄타회담 이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미국 인사 ‘알레스’를 만나 GRU의 감사 인사를 전했다는 이야기다. 《베노나; 미국에서 소련 첩보행위의 해독》이라는 책을 쓴 존 얼 헤인즈와 하비 클레어는 얄타회담 이후 남은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국무부 관료는 모두 4명이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 프리먼 매튜스 유럽국장, 와일더 푸트 국무장관 언론보좌관, 그리고 앨저 히스였다. 히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이념성향이나 간첩활동과 관련해 어떤 종류의 의심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알레스’는 히스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비신스키는 무엇에 대해 ‘알레스’, 히스에게 감사한 것일까? 미국 국방정보국(DIA) 정보분석관 출신 크리스티나 셀턴의 《앨저 히스; 왜 그는 반역을 선택했나》에 그 단서가 나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얄타회담 당시 히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 처칠과 논의할 주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정리한 〈블랙 북〉을 관리했다고 한다. 얄타회담에 임하는 미국측 전략이 고스란히 소련측에 노출됐다는 얘기다.
 
  앨저 히스는 소련에 유리하도록 루스벨트에게 필요한 정보를 차단하기도 했다. 소련은 대일전(對日戰) 참전 대가로 일본령 쿠릴열도와 사할린의 할양을 원하고 있었지만, 미국 국무부는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히스는 이런 국무부의 입장을 루스벨트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쿠릴열도와 사할린을 점령하겠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용인했다. 소련 붕괴 후 소련 문서보관소에서 소련이 쿠릴열도와 사할린을 차지하는 데 반대한다는 내용을 담은 미국 국무부 기밀문서가 발견됐다. 히스가 이 문서를 루스벨트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소련에 넘겨주었다는 얘기인 셈이다.
 
  흔히 얄타회담 당시 병약한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녔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NSA와 FBI도 베노나 문서에 등장하는 ‘알레스’라는 암호명의 인물에 대해 ‘아마도 앨저 히스(probably Alger Hiss)’라고 각주를 달아 놓았다. 베노나 문서 중 1943년 9월 28일자 전문에는 아예 ‘히스(Hiss)’라는 실명이 등장한다.
 
 
  히스의 유산
 
히스(Hiss)의 이름이 언급된 베노나 문서.
  베노나 문서가 공개되면서 히스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확정됐다. 다만 일부 좌파 내지 리버럴 인사들은 여전히 히스가 무고하다는 주장을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앨저 히스는 1996년 11월 15일 92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미국 언론들의 보도는 엇갈렸다. ABC방송 앵커맨 피터 제닝스는 “KGB문서는 히스의 무죄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워싱턴포스트》의 바트 번즈는 “비록 히스가 죽을 때까지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결코 그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했다.
 
  히스가 구체적으로 소련에 어떤 정보들을 넘겼는지, 그로 인한 피해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케임브리지 5인방’의 경우처럼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얄타회담 당시 그의 역할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아니었다면 대일전 참전을 빌미로 미국이 그렇게 소련에 양보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유럽이 전후 40여 년 동안 공산치하에서 신음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국무부 고위 관료로서 그가 전후 국제질서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앨저 히스는 자신이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42년간 치열하게 ‘무죄 투쟁’을 벌임으로써 무엇이 애국이고 무엇이 반역인지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조지 윌은 《워싱턴포스트》에 이렇게 썼다.
 
  〈앨저 히스가 교도소에서 44개월을 보냈고, 남은 생애 42년을 자기가 결백하다는 픽션에 대한 그의 괴상한 충성심이란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 히스가 전체주의의 유혹에 무조건 굴복함에 따라 히스의 추종자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히스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진보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자에게 그들의 신념을 붙들고 늘어짐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미국 좌파의 도덕적 파산을 앞당기게 되는 지적 타락으로 빠져들었다.〉
 
  베노나 문서의 공개도 ‘히스 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히스가 죽었을 때, 국내의 한 신문도 “미국 매카시즘(극단적인 반공주의)의 대표적 희생자인 앨저 히스가 15일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히스가 죽었을 때, 에반스 토머스는 《뉴스위크》에 “히스는 ‘아마도 소련 간첩’이었다”면서 “자기의 무죄를 강변하면서 ‘끝까지 기만하려 했던’ 아주 탁월한 스파이였다”고 평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앨저 히스’들이 득실득실하다. 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김일성주의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공산혁명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민주화운동’이고 ‘통일운동’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어쩌면 이 정부의 통일·외교·안보라인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 과정에서 얄타에서의 히스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기의 신념에서 우러나서 말이다. 오늘 앨저 히스를 되돌아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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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포리    (2018-05-07)     수정   삭제 찬성 : 20   반대 : 18
소련 간첩이었던 엘저 히스에 대한 이야기, 감사히 읽었습니다. 말미에 적은 대로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엘저 히스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 북한이 붕괴되고 북한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 한국판 엘저 히스가 다 까발려질 것입니다.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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