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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의 품격

‘영원한 젊은 오빠’ 배우 임하룡

“좋은 배우? 착해야 한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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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작 〈웰컴 투 동막골〉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의 길로 들어서
⊙ 개그맨 전유성·김학래 만나 인생 경로 변해
⊙ “임하룡은 좋은 배우다. 어시스트 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코미디언 심형래)
⊙ “좋은 친구 같은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배우 임하룡(본명 林瀚龍·66)은 더는 희극인이 아니다. 책가방을 옆에 끼고 빨간 양말을 신은 채 다이아몬드 춤을 추던 코미디언 시절은 추억처럼 아스라하다.
 
  그에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안긴 〈웰컴 투 동막골〉(2005)에서 “네레 아버지 돼 보면 기 마음 알끼다”던 북한군 하사 ‘장영희’의 정겨운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겁은 많지만 큰형 같은, 넉넉한 아버지 같은 연기였다. “네레 몇 살이가? 삼촌이라 부르라” “기칼라고(총을 쏘려고) 했는데 사실은 총알이 없었어야. 하하하” 웃던 그의 연기는 ‘임하룡의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았다. 사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앞서 2002년 연극 〈웰컴 투 동막골〉로 무대에 섰던 기억도 난다.
 
  임하룡은 앞서 〈엑스트라〉(1998), 〈얼굴〉(1999), 〈묻지 마 패밀리〉(2002), 〈아는 여자〉(2004), 〈범죄의 재구성〉(2004) 등에서 감초 같은 단역으로 코미디가 아닌 정통 연기를 타진하더니 〈웰컴 투 동막골〉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의 길로 들어섰다. MBC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2006), 영화 〈원탁의 기사〉(2006), 〈맨발의 기봉이〉(2006) 이후 조연으로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이웃사람〉(2012)에서는 사체가 담긴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사 간 ‘102호 남자’를 의심하는 가방가게 주인으로 분(扮)했다. 섬뜩한 ‘102호 남자’ 김성균(류승혁 역)과 조폭 건달 마동석(안혁모 역)만 있었다면 살벌했을 영화가 임하룡이 있어 풍성했다고 할까.
 
  SBS 아침드라마였던 〈청담동 스캔들〉 (2014~2015)에서는 여우(女優) 유지인 (최세란 역)의 남편이자 돈 많은 대기업 회장 ‘남재복’으로 분했다. 남한텐 인색하지만 가족에겐 끔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김혜선(강복희 역)의 도와달라는 청을 거절하며 소리치던 임하룡의 임팩트 있던 대사가 떠오른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오셨네. 내 와이프와 주나, 현수를 건드려 놓고 살려달라? 천륜을 끊어 놓으려고 내 가족을 가지고 놀았으면서 도와달라? (버럭 고함과 함께 탁자를 손으로 치며) 당신은 내가 허수아비로 보여? 뭐해, 이 인간 끌어내.”
 
  그는 허수아비 같은 조연이 아니라 주연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선 굵은 조연이었다.
 
  jtbc 드라마도 기억에 남는다. 〈욱씨남정기〉(2016)에서 고지식하지만 사람 좋은 전직 교사 출신 아파트 경비원이던 임하룡은 아들과 손자 탓에 마음고생이 심하지만 가족을 돌보기 위해 무진장 애쓰는 아버지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연극도 하고, 뮤지컬도 하니 직업(코미디언)을 바꾸었느냐고 묻지만 같은 뿌리다. 코미디도 연기고 영화와 연극도 다 연기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팬티를 팔든 겉옷을 팔든 옷 장수는 옷 장수 아닌가”다.
 
 
  1976년 첫 연극 〈포기와 베스〉… 출연료 1만원에 초대장 20장 받아
 
임하룡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준 2005년작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
  충북 단양이 고향인 임하룡은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2년생으로 서울 중동중, 충북 제천고(서울 장충고에서 1년을 다녔다)를 거쳐 한양대 연극영화과 71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2년을 다니다가 중퇴했어요. 집안이 어려워져서… 장학금을 못 받아서….”
 
  ― 얼마나 어려웠는데요.
 
  “봉지쌀도 못 살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아버지, 어머니가 동시에 아프셔서 제가 안 움직이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어요.”
 
  사실 그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배우 허장강을 동경해 액션배우를 꿈꿨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만화방과 극장을 전전하던 학창시절, 춤 추고 배우 흉내 내는 게 낙이었다.
 
  “군(최전방 하사관)에 갔다 와서 대학을 그만두고 1976년 극단 가교에서 연극배우로 처음 무대에 섰죠. 〈포기와 베스〉라는 작품이었어요. 제 기억으로 출연료 1만원에 초대장 20장을 받았는데 그게 밥벌이가 되겠어요? 시험을 쳐서 관광회사 가이드로 취직했죠. 그런데 회사에서 저더러 관광객을 모아서 가이드를 하라는 거예요. 영업에 자신이 없어서 그만뒀어요. 수금사원으로 취직한 적도 있는데 수금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습니다. 물건값 받으러 갔다가 판 물건 도로 가져가라는 말만 듣고 그날로 그만뒀어요. 학벌도 없었으니 직장을 잡으려 해도 도저히 안 됐어요.”
 
  밥벌이가 너무 절실해 아르바이트로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조수 겸 사이코드라마 ‘배우’로 4년간 환우들과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 연기가 그럴듯했던지 임하룡을 같은 환우로 착각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밤무대 사회자로 취직하면서 인생 경로가 바뀌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정통 나이트클럽보다 값싼 안주와 술을 먹는 주점이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였어요. 막걸리도 팔고, 낙지볶음도 팔고…. 그런 곳에서 밤무대 MC를 했죠. 무명 밴드와 곡명(曲名)을 소개하는 일이었어요. 그때 전유성·김학래씨를 만난 게 제 인생을 바꾸었어요. 또 막막하던 시절, 일자리를 구해준 임진규・손철・하철씨도 잊을 수 없어요.”
 
  1970년대 명동 쉘부르를 돌아 무교동에 들어서면 버스 정류장 옆에 ‘꽃잎’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명동의 쉘부르, 이브 음악감상실과 무교동 ‘꽃잎’으로 몰려들었다. 어느 곳에 앰프를 새로 들여놨다고 입소문이 나면 그쪽으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통기타 라이브 레스토랑 ‘꽃잎’은 전유성이 연예부장을 맡았고 임하룡, 김학래가 DJ로 인기가 많았다.
 
  “김학래가 두 살 아래지만 지금도 친구처럼 지냅니다. 그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나이 따질 개재는 아니잖아요. 하하하. 전유성 선배 소개로 라디오(1978년)도 하고, 서른 되던 1981년 KBS 특채로 개그를 하게 됐어요. 전유성·김학래씨를 만난 게 ‘개그맨’이란 타이틀을 붙인 계기가 됐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탤런트 시험도 두 번 쳐서 떨어졌어요. 그땐 대개 주연급 탤런트를 뽑았는데 외모가 일단 출중해야 하던 시절이었어요. 이 얼굴로는… 하하하… 탤런트 시험 같이 봤던 이가 김영철·길용우씨였어요. 이분들, 인물 좋잖아요. 개성도 있고.”
 
 
  심형래와 콤비 플레이로 주목… 각종 유행어 창조
 
1991년 KBS 코미디 대상 피로연에서 임하룡과 전유성, 최양락, 장두석(왼쪽부터).
  임하룡은 1981년 KBS 코미디언으로 특채돼 방송에 데뷔했다. 동료 개그맨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탓에 우스꽝스런 분장을 할 때는 무척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실제 성격은 TV 화면과 달리 내성적이란다.
 
  87년 KBS2 코미디프로 〈쇼 비디오 자키〉의 ‘도시의 천사들’ 코너에서 조직 폭력배의 보스 ‘쉰 옥수수’ 역으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당시 “이 나이에 내가 하리~”라는 극 중 대사가 유행어가 됐다. 그 외에도 “일주일만 젊었어도!” “쑥스럽구먼” “젊은 오빠” “뭐, 필요한 거 없수?” “없음 말고” 같은 따끈따끈한 유행어를 창조(?)했다.
 
  “이름이 나게 된 계기는 심형래를 만나면서입니다. 심형래가 당시 어린이들한테 우상이어서 같이 출연하며 제 이름이 더불어 회자되더라고요.”
 
  심형래는 임하룡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임하룡은 좋은 배우다. 어시스트 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제가 (심형래보다) 여섯 살 많아요. 꼬박꼬박 존대하느냐고요? 그럼요. 아무래도 제가 한참 선밴데. 데뷔 때부터 콤비로 꽤 각인이 되다가 나중에 전유성·김정식·이홍렬씨 등과도 콤비 플레이를 많이 했죠.”
 
  심형래와 임하룡은 인기 코미디 코너의 단짝이었다. ‘변방의 북소리’에서 바보 병사 심형래에게 당하는 장군이 임하룡이었다. ‘X특공대’에서는 얼간이 부하가 심형래, 그는 특공대장을 맡았다. 임꺽정을 패러디한 ‘임걱정’이란 코너에서는 임하룡이 임걱정, 그를 골탕 먹이는 부하가 심형래였다. ‘내일은 챔피언’에서는 복싱관장 임하룡과 연습생 심형래가 시청자의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 개그맨 시절, 배구로 치면 스파이크보다 토스를 많이 했어요.
 
  “누구를 받치고, 안 받치고를 떠나 각자가 역할을 맡은 겁니다. 제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죠. 어떨 때는 심형래가 저를 받쳐줄 때도 있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입장이었죠. 배구에서 세터 역할처럼 계속 띄워줄 수는 없죠. ‘추억의 책가방’ ‘도시의 천사’ 같은 코너는 제가 주도해서 웃기려 했죠.”
 
임하룡은 1991년 KBS2 〈유머 일번지〉의 ‘추억의 책가방’에서 맡았던 날라리 고등학생 ‘해룡’ 역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에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코미디 프로는 ‘하룡서당’이었다. 그가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역이라고 할까.
 
  “처음에 PD가 코너명을 ‘갑자서당’(그해가 갑자년이어서)으로 정했는데 제가 만화 〈와룡서당〉을 읽고 나서 ‘하룡서당’으로 바꿔버렸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미술 하는 분께 찾아가 ‘내가 책임지겠다. 하룡서당으로 고쳐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첫 회부터 ‘하룡서당’이 재미있었어요. 운도 좋았던 게 ‘지구를 떠나거라~’는 유행어를 만든 김병조씨의 일밤(MBC 일요일일요일밤에)이 끝나고 광고가 나올 때쯤 채널을 돌리면 ‘하룡서당’을 했어요. 그러니 ‘하룡서당’이 뜰 수밖에 없었죠.”
 
  또 가장 기억에 남는 역은 1991년 KBS2 〈유머 일번지〉의 ‘추억의 책가방’에서 맡았던 날라리 고등학생 ‘해룡’ 역이었다.
 
  “가수 강수지가 예쁜 여학생으로 나왔는데 거기서 나온 유행어가 ‘안녕하셔요?’예요. 불량학생이 모범학생처럼 구는 말이죠. 이마에 분필을 테이프로 붙였는데 그 시절 선생님이 조는 학생에게 분필을 던졌잖아요. 분필이 이마에 꽂힌 걸로 설정했죠.”
 
  스포츠 머리 가발을 쓰고 교복 안에 폴라 티셔츠를 입고 나와 다리를 연신 건들거린 ‘추억의 책가방’은 그에게 자서전 같은 코너였다. 유난히 눈에 띄던 빨간 양말도 임하룡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나중 미국의 전설적인 밴드 C.C.R의 히트곡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의 멜로디만 따온 가요 〈추억의 책가방〉을 앨범으로 낸 적이 있다. 가사는 이렇다.
 
  ‘나팔바지 빨간양말 납작한 책가방을 옆에 끼고 트위스트 다이아몬드 스텝 따라 빡빡머리 향수가 있는 곳. 촌스런 모습이지만 낭만이 있었지. 예! 너와 나의 책가방 속 추억 꾸벅꾸벅 수업시간 아슬아슬 방과후엔 극장 구경 우정을 나누던 그 빵집.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실까.’
 
 
  영화 〈슈퍼 홍길동〉 시리즈 탄생의 주역?
 
1988년 김청기 감독의 〈공초도사와 슈퍼 홍길동〉에서 임하룡은 ‘공초도사’로 인기를 끌었다.
  임하룡은 1991년 코미디언 중에서 처음으로 프리 선언을 해서 공중파 방송 3사에 모두 출연할 만큼 인기가 있었다.
 
  “KBS 〈폭소대작전〉, SBS 〈기쁜 우리 토요일〉, MBC 〈오늘은 좋은 날〉 등 3개 방송사 코미디 프로를 다 했던 시절도 있었어요. 데뷔 후 20년 동안은 한 주도 안 쉬고 일중독에 걸린 것처럼 일했었죠. 중간중간에 쇼 프로 MC도 봤는데 〈쇼 토요특급〉이라고, 배우 고현정씨랑 같이 사회도 보고 〈쇼 비디오자키〉에서 MC도 했어요.”
 
  ― 20년간 그렇게 일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나요.
 
  “방송 출연료는 배우들 간에 큰 차이가 없었어요. 그땐 야간업소에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저축상도 받았어요. 1985~95년 10년간 황금기라고 할까요?”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고 할까. 2000년 KBS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을 끝으로 코미디 무대를 떠나야 했다.
 
  “방송사 개그 프로가 다 사라지고 그나마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 선생님 역할이 유일했는데 PD가 ‘후배들끼리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니 어쩌겠어요. 그만둬야지.”
 
  그는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 선생처럼 콩트 코미디의 대(代)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지만 후배의 길을 막을 순 없었다.
 
  “연극을 한번 제작하고 싶었어요. 장진 감독을 만나 연극 제작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제작은 돈 문제가 따라다니니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부탁하면서 장진 감독이 연출한 연극 〈웰컴 투 동막골〉에 출연하게 됐어요.
 
  연극이 끝난 뒤 3년이 지나 동명(同名)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역시 연극과 같이 북한군 ‘장영희’ 역으로 출연했죠. 영화는 박광현 감독이 맡았는데 앞서 옴니버스 영화 〈묻지 마 패밀리〉에서 박 감독이 연출한 ‘내 나이키’에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어요.
 
  코미디언에겐 선입견이 있잖아요. 웃기니까…. 진지한 맛이 없어 보여 (연극이나 영화에) 잘 안 쓸려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연극, 영화에서 진지한 연기를 한 덕인지, 〈범죄의 재구성〉이나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은 영화에서 큰 역은 아니지만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후 임하룡은 조연과 단역으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면서 정통 연기 배우로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임하룡은 틈틈이 영화에 출연했다. 1984년 남기남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철부지〉에서 개그맨 이성미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다. 또 1988년 김청기 감독의 〈공초도사와 슈퍼 홍길동〉에서 그는 ‘공초도사’로 인기를 끌었다.
 
  “그땐 개그맨이 인기가 있으면 어린이 영화를 만드는 시절이었는데 〈철부지〉는 저하고 이성미씨가 주인공인데, 영화를 너무 슬프게 만들었어요. 하하하. 그래서 심형래를 급조해서 요소마다 웃기는 포인트를 넣어, 이게 웃기는 영화인지, 울리는 영화인지 애매하게 됐어요.
 
  〈공초도사와 슈퍼 홍길동〉의 원래 제목은 그냥 ‘홍길동’이었어요. 제가 영화 제목에 ‘공초도사’를 넣자고 우겨서 그런 제목이 만들어졌어요. 그게 히트가 돼서 다음부터 무슨 무슨 도사와 홍길동이 시리즈가 됐어요.”
 
  이후 ‘홍길동’ 시리즈는 모두 9편 가까이 제작됐는데 영화 제목이 기발하고 재미있다. 〈짬뽕 홍길동〉 〈부채도사와 홍길동〉 〈그림도사와 홍길동〉 〈뚱녀도사와 홍길동〉 〈홍길동 도사학교〉 〈홍길동 대 터미네이터〉 등이다.
 
  임하룡은 1999년에도 조재현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얼굴〉에서 동네 건달 ‘고형석’으로 출연했다. 개그맨이 진지한 조폭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이 화제였다. 그는 “그때만 해도 악역을 하니 피식 웃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희극배우라는 선입견을 지우면 인상 깊은 연기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신병원, 사이코드라마 ‘배우’로 연기수업
 
영화 〈이웃사람〉(2012년)에서 임하룡은 가방가게 주인으로 출연했다. 사체가 담긴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사 간 ‘102호 남자’를 의심한다.
  임하룡은 리액션이 좋은 배우다. 순발력이 좋다는 얘기다. 극 중 애드리브를 자주 구사하는 편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애드리브를 해도 극 흐름을 깨면 안 돼요. 적재적소에 양념 같은 단어로 표현하죠. 어떨 때는 준비해서 하기도 해요. 영화 〈이웃사람〉에서 가방가게 주인이 저였는데, 손님에게 받은 수표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와요. 주민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니 손님이 ‘왜요?’라고 묻는데 제가 애드리브로 ‘왠지 알고 싶어요’라고 했어요. 양념처럼 재미있으니까 감독도 허락했죠.
 
  CF에서도 애드리브를 친 적이 있어요. 즉석 짜장 ‘짜스면’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제가 쿵후도장의 관장인데 ‘짜스면’을 달라는 제자들의 청을 거절하며 ‘달랠 걸 달래야지?’ 그랬거든요. 대본에 없던 말이에요.”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애드리브도 있고, 순간적으로 만든 애드리브도 있다”며 “비율은 즉흥적인 애드리브가 더 많다”고 했다.
 
  ― 리액션이 좋은 배우가 되려면.
 
  “글쎄요. 과거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1970년대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사이코드라마 ‘배우’로 일한 적이 있어요. 김유광 박사 밑에서 조수 노릇을 하며 투잡(two job)을 뛸 때였어요. 환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야 했고 대사는 애드리브로 해야 했죠. 심리적 흐름에 따라 극을 만들어야 했으니 꽤 많은 연기 연습이 됐던 것 같아요.”
 
  ― 드라마와 코미디의 리액션은 다른가요.
 
  “코미디언은 상대가 웃길 때 자기 웃길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상대 반응을 놓치기 쉽죠.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 연기의 리액션은 상대 얘기에 반응하면서 감정 표현을 해야 하니 딴생각, 예를 들어 제 대사만 생각해선 극의 흐름을 놓치기 쉬워요. 코미디 리액션은 말로 애드리브를 하는 것이 많지만 아무래도 (영화와 연극의) 연기는 감정과 표정이 같이 들어가야 하니까 다르죠.
 
  과거엔 ‘나’를 벗어날수록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어요. 모습을 과장하고, 순간 돌변하고, 망가지기도 하고요. 근데 영화와 연극은 철저히 나 자신과 캐릭터를 일치시켜야 진실된 연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 임하룡도 연기가 어렵습니까.
 
  “연기에 100%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연기하는 저도 만족하고, 관객도 만족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참 묘해요. 진짜 괜찮은 연기를 했는데, 주위에서 ‘왜 그리 어색해?’ 그러거든요. 그리고 제가 볼 때 연기가 별로인데 ‘와! 연기 좋았어’ 그래요. 정말이지 정답이 없어요.
 
  연기는 주연, 조연이 따로 없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현장에 충실한가가 관건이죠. 연기는 앙상블을 잘 이뤄야 해요. 혼자 튀면 잘 못하는 연기라 봅니다.”
 
  임하룡은 2003년 뮤지컬 〈풀 몬티(The Full Monty)〉에 무뚝뚝한 ‘흑인 호스’로 출연, 전라 연기를 한 적이 있다. 〈풀 몬티〉는 실업을 극복하기 위해 스트립쇼에 나서는 영국 노동자 이야기다. 다른 출연자들이 옷을 안 벗기에 그가 제일 먼저 솔선수범(?)으로 벗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벗었지만 완전히 벗진 않았어요. 살색 T팬티를 입었어요. 왜 먼저 벗었냐고요? 나이 먹은 사람이 벗어야, 다른 사람이 벗을 것 같아서요. 초연을 마치고 앙코르 공연 때는 저 대신 정준하씨가 투입됐어요. 무대와 객석 사이가 너무 가까워 노출이 다 되니까 못하겠더라고요.”
 
  ― 후회는 안 되세요.
 
  “후회는 안 했는데… 언제 기회가 오면 다시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풀 몬티〉가 우리나라 실정하고 잘 안 맞아. 남자가 스트립쇼하는 게… 하하하.”
 
  ― 연기 변신을 위해 누드 신을 찍으면 벗을 생각은.
 
  “극 중 벗어야 하는데 일부러 안 벗는 것은 없어요. 벗어야 할 때는 벗죠. 그런데 제가 벗었을 때 관객 입장에서 추해 보이면 안 되잖아요.”
 
  ― 그럼, 몸을 만드셔야죠.
 
  “하하. 몸 만드는 생각은 항상 하고는 있는데 식탐이 많아서….”
 
  뮤지컬 〈풀 몬티〉에 출연할 당시 그는 공연하다가 틈만 생기면 푸시업을 해서 가슴 근육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연, 조연 따지기보다 어느 분야에서든 잘하고 싶어요”
 
2009년작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여자 대통령 고두심의 남편으로 출연했던 임하룡.
  ― 좋은 연기란 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인가요.
 
  “아무래도 진실한 연기처럼 보여야 해요. 가짜로 보이면 공감이 안 되죠. 제가 지적(知的)인 연기를 하려 해도, 걸음걸이에서 ‘날라리’ 같은 느낌이 나요. 걸음걸이가 디테일하게 진지해져야 되는데… 하하하. 제 감정만 믿고 가도 너무 티가 나더라고요.”
 
  ― 자신을 틀 속에 가두시는 것은 아닌가요.
 
  “아뇨. 제가 (학창시절) 춤을 많이 춰서 제 걸음이 좀 날려요, 날려.”
 
  ―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 차이는.
 
  “영화는 한 번 찍은 뒤 모니터로 보고 다시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요. 드라마는 사실 바빠요. ‘쪽대본’ 나오면 정신없이 빨리 찍어야 해서 100% 준비해야 되는데, 영화는 좀 비워놓고 가도 감독과 상의해서 새롭게 연기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드라마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 배우에게 필요한 자질은.
 
  “착해야 될 것 같아요.”
 
  그는 “착하지 못하면 배우가 되는 길이 힘들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감성 연기를 하려면 착한 역에서부터 악역까지를 모두 소화해야 하는데 견뎌내려면 착해야 해요. 착하지 않으면… 힘들죠. 착하지 않으면 동료들하고도 힘들게 돼요. 한순간 잘될지 몰라도 언젠가는… 착하지 않으면, 도태되니까. 착해야 오래 남는 연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주위에 평이 좋아야 같이하려 하잖아요.”
 
  ― 그러고 보니, 주위 경조사를 다 챙겨 ‘경조사의 내비게이션’이라고 하대요.
 
  “그건 정형돈이 웃기려고 한 말이에요. 사실은 자주 못 가요. 저도 인간인데… 어떻게 다 가요. 웬만하면 가려고 하지요. 기왕이면, 제가 좋아서 가는 경우도 많고….”
 
  ― 주례는요.
 
  “주례를 많이 못 서줬어요. 제겐 주례가 제일 힘들어요. 하기가 싫어요. 남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라고 해야 되잖아요. 제가 하기 싫은 게 주례, 강의… 이런 것이에요. 강의 요청도 많이 받는데 안 해요. 저는 제가 편한 일을 해야 해요. 이쪽이 당기면 이쪽으로 가야 해요. 어떻게 보면 편한 길만 찾아갔다고 할 수 있지만 제 마음이 불편하면 못 해요. 사실은 생활이 힘들 때도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했어요. 사람들이 ‘네가 배가 불러 그렇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힘들 때도 하기 싫으면 못 했어요. 수금사원보다 야간업소 MC가 더 좋은데 어떻게 해요?”
 
  임하룡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자중자애(自重自愛)’다. 선친이 그에게 물려준 인생의 좌표이기도 하다.
 
  “저는 지금껏 해야 할 것, 안 해도 될 것을 구분해 왔어요. 어쩌면 너무 조심스레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성격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걷는다’가 아니라,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안 건넌다’예요. 하하하.
 
  과거에는 웬만한 홈쇼핑 출연이나 CF 광고도 거절했어요. 이미지에 안 맞다 싶으면 안 했죠. 물론 마음속으로 진짜 연기 변신을 하고픈 생각도 듭니다. 나이 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말이죠.”
 
  ― 어떤 배우로 기억되길 원하세요.
 
  “예전에는 코미디 맥을 잇는 희극인이 되고 싶었는데, 나이 먹어 생각하니 그냥… 좋은 친구 같은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저는 배우로서 한길을 팠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코미디언, 연극배우, 영화배우, 뮤지컬 배우로 일했다고 인식하겠죠. 저는 다 같은 연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직업이 어떤 배역을 선택하기보다, 감독이나 연출자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니… 직접 제작하기는 힘들고….”
 
  ― 어느 배우든 연기에 앞서 오랜 기다림을 거쳐야 하는가 봐요.
 
  “그러기 위해선 건강해야 해요. 건강하지 못하면 불러줘도 못하니까. 그래서 보면, 건강하신 분들이 오래 롱런하세요. 송해 선생님도 그렇고, 이순재 선생님도 그렇고 다들 건강하시니까 오래 하시죠.
 
  주연, 조연 따지기보다 어느 분야에서든 잘하고 싶어요. 얼굴은 늙어가지만 젊게 살고 싶은, 영원한 젊은 오빠로 계속 남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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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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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7-11-15)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나는 그중에서 추억의 책가방이 제일 기억남는 코미디였지!!!! 거기서 해룡역으로 나와서 건들건들하게 행동하는 연기를 보면 넘넘 웃겼다는....!!!! 그다음에는 청춘아 돌려다오인가 임하룡씨가 노인역으로 분장했을때 이 어록이 제일 기억남는다. 1년만 젊었어도!!!! 그옆에 있는 코미디언분은 누가 할소리!!!! ㅋㅋㅋㅋㅋㅋ
  박윤수    (2017-11-03)     수정   삭제 찬성 : 3   반대 : 2
대한민국 코미디/영화배우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임하룡 선생님 이미 희극계 족보에 한획을 크게 그으신분이고
정말 배울점이 많은 제생애 최고 롤모델 선생님이십니다...
젤로라는 가게도운영하시는걸로 아는데 꼭 한번 들려서
맛있는안주와 술 먹으러 놀러가겠습니다^^ 제이름 기억해주세요
정말 진작 뵙고싶었었는데... 보는순간 감격과 영광이 함께할것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구 무병장수 오래도록 저희옆에서 환한미소 밝혀주세요 사랑합니다 선생님..!
  박혜연    (2017-10-28)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2
영원한 젊은오빠 임하룡아저씨!!!! *^^*******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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