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 뉴라이트 계열의 B급, C급 평균 이하 일꾼만 써”
⊙ “이명박 정권은 성공한 정부. 그래도 100점 만점에 70점”
⊙ “나는 빈민 목사. 지식인이나 주류사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지 않았다”
⊙ 동두천 소요산 일대에 인터넷 중독 치유 대안학교 설립 준비 중
金鎭洪
⊙ 72세. 계명대 철학과,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계명대 명예철학 박사,
미국 킹대 명예신학 박사.
⊙ 청계천 활빈교회 목사, 두레교회 담임목사, 계명기독학원 이사장,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역임.
현재 두레공동체운동본부 대표.
⊙ “이명박 정권은 성공한 정부. 그래도 100점 만점에 70점”
⊙ “나는 빈민 목사. 지식인이나 주류사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지 않았다”
⊙ 동두천 소요산 일대에 인터넷 중독 치유 대안학교 설립 준비 중
金鎭洪
⊙ 72세. 계명대 철학과,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계명대 명예철학 박사,
미국 킹대 명예신학 박사.
⊙ 청계천 활빈교회 목사, 두레교회 담임목사, 계명기독학원 이사장,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역임.
현재 두레공동체운동본부 대표.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무허가 판잣집을 개조해 스스로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활빈교회’를 세웠던 빈민 목사다. “젊어선 빨갱이, 환갑이 지나선 꼴통 소리를 듣게 됐다”고 웃지만, “신념에 따라 살았으니 나는 행운아”라고 말한다.
“서른 살 때는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 빈민목회를 하며 넝마주이를 했고 마흔에는 화성시 남양만 간척지로 귀농해 교회를 세워 농민 사역을 했어요. 쉰을 넘어서는 공동생산·공동소유를 실천한 ‘두레마을’ 공동체 운동으로, 60대 때는 경기도 구리에 두레교회를 세웠고 한편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실천, 사회참여에 나섰다가 나이 70에 모두 내려놓고 동두천에 정착, 인생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곳에서 5단계로 이어진 제 인생의 피날레를 장식하려 합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요즘 다시 분주하다. 동두천 소요산과 숲속 일대 6만6000m²에다 인터넷 중독에 빠진 아이들을 치유하는 학교 설립을 준비 중이다. 교명(校名)은 ‘숲속창의력학교’.
일단 대안학교 형태로 시작하지만, 학력인증 학교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기자는 지난 3월 27일 오후 동두천에서 그를 만나 근황을 들었다.
“70세에서 80세에 이르는 10년을 내 생애에서 ‘최고의 황금기 10년’으로 살자고 다짐하고 있어요. 80세까지 열심히 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야지요. 우리는 신앙이 확실해서 천국이 예약돼 있으니까, 해피엔딩이지요. 어쨌든 해피엔딩이지요.”
긴급조치 위반과 성령체험
![]() |
| 한나라당 대선후보 시절인 2007년 11월 7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뉴라이트 전국연합 창립 2주년 행사에 참석, 김진홍 상임의장,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선후보와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
김진홍 목사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인명진(印名鎭)·이해학 목사와 함께 1974년 1월 수감돼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2월 특사로 풀려났다. 거의 40년 만에 신원(伸寃)이 풀린 것이다.
“민주화에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흐뭇합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위헌 결정이 났다고 제 삶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만 흐뭇하더군요. 그때 제 나이 34세였어요. 신앙인으로서 유신헌법이나 긴급조치가 민주주의의 기본인 인권,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말했던 시절이었어요. 정치적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김 목사는 “유신이 비민주적이었으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은 인정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박 대통령은) 안보와 경제 분야에 탁월한 업적이 있지요. 그렇다고 인권과 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훼손할 수는 없어요. 저는 감옥생활을 하며 성경을 깊이 읽었고 성령체험도 했어요. 감옥 덕을 크게 봤어요.”
—성령체험이라니요.
“1974년 1월 17일 구속돼 서울구치소로 넘어갔어요. 그해 2월 23일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저는 그날이 찾아오면 온종일 금식합니다. 올해도 23일 하루를 금식하며 그날 받았던 은혜를 되새겼어요.”
그해 2월 23일은 유달리 추웠다고 한다. 추위에 견디지 못한 그는 뛰다가 걷다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문득, 성경 속에서 ‘불’ 글자를 찾으며 추위를 견디려고 생각했다. 맨 처음 찾은 ‘불’ 자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가 호렙산 기슭에서 양떼를 돌보는 동안에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고 거기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장면이었다. 그렇게 ‘불’ 자를 찾아 나가다가 누가복음 12장 49절을 읽고 놀랐다.
‘내가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그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리오.’
“이 구절을 읽고서부터 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제가 너무 추워 견딜 수가 없으니 저에게 불 좀 던져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그다음 ‘불’ 자를 찾았을 때 어느 순간 온몸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고 마룻바닥을 짚어 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룻바닥이 마치 온돌방이 된 것처럼 따뜻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불로 0.7평 독방에 와 계심을 느끼며 방 모퉁이를 돌며 절하고, 감사기도를 드렸어요.”
“어떻게 평생 질문만 하고 살 것인가?”
—지금까지 성경을 몇 번 읽었나요.
“대충 100번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면 외울 수준 아닌가요.
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의 존재를 느끼거나 깨닫는 과정은 어떻게 해서 생기나요. 깨달음은 신이 주는 것인가요. 자신이 찾아야 하는가요.
“불교에서는 개안(開眼)이라고 부르는데, 끈질기게 집중해서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신의 인자하심과 찾아가는 이의 선택과 집중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깨달음의 지점이지요. 그냥 (신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깊이 몰입할 때, 위로부터 은혜와 내가 찾는 것이 만나는 지점이 깨달음의 자리이죠.”
—노력하면 반드시 주시나요.
“그렇죠. 누가복음 11장 13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너희가 구하면 마땅히 준다’라고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집중해서 구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순수해야 하고, 집중해야 하며,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이런 몇 가지 조건이 합쳐져서 종교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돼요.”
김 목사는 자신의 신앙이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했다. 대학시절, 철학도였던 그는 “많은 방황을 겪었고 신을 만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뒤였다”고 했다.
“모태(母胎)신앙인의 많은 수가 대학시절을 거치며 고민하고 방황하다 신을 못 만나고 세상으로 나가 버립니다. 저 역시 그런 위기를 겪으며 대학시절 정신적 방황도 하였지요. 심리학자 에릭슨이 말하는 ‘정체성의 위기’였던 셈이지요. 저는 행운아였어요. 많이 방황했지만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돼, 제가 믿는 바에 인생을 투자할 수 있었으니까요.”
김 목사는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년 뒤인 1969년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다른 과도 많은데 왜 철학과에 입학했습니까.
“철학과에 입학할 때는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당시엔 철학을 전공한 작가들이 많았어요. 철학이라는 학문은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입니다. 그 시절 고민하던 주제가 ‘어떻게 평생 질문만 하고 살 것인가’였어요. 철학에는 정답이 없잖아요.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질문의 답을 찾게 돼 성직자가 된 것이죠. 제 인생 최상의 선택이었어요.”
그는 “철학과에 입학해 방황하는 과정을 겪었던 것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철학과에 입학해 지적·논리적 사고 훈련이나 글쓰기 훈련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 소흥렬(蘇興烈) 교수님이 철학과에 계셨는데, 그분을 만나 ‘철학함이 무엇인가’ 하는 인식이 열렸어요. 그 덕에 지금도 원고 없이 설교합니다. 매일 아침 22만명의 네티즌 독자에게 보내는 ‘아침묵상’ 편지도 거의 수정 없이 씁니다. 스승을 잘 만난 덕이지요.”
어차피 인생은 고생. 意味에 충실해야
![]() |
| 1960~70년대 서울 청계천변 불량 주택가 모습. 김진홍 목사는 대통령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거지와 철거민, 넝마주이에게 신앙을 전파한 노동자 목사다. |
“공자는 당대의 최고 석학 3000명을 제자로 거느렸어요. 요즘 말로 정치학 박사, 경제학 박사급 3000명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왕족 출신이어서 그를 따랐던 제자 중에는 왕족, 귀족 출신이 즐비했어요. 그런데 예수는 달랐어요.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어부였고, 마태는 세금을 거두던 세리(稅吏)였어요. 당시 세리는 만인의 손가락질 받던 3D 업종이었습니다. 그런 젊은이 12명을 제자로 삼아 위대한 전사들로 바꾸었어요.”
김 목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학벌 좋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본질적인 삶을 사는 데 지장을 줄 수도 있어요. 자기 지식에 안주하고 자기 출신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는 본질에 접근하는 구도자적인 가능성으로 사람을 택하셨지요. 제자들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순수하고, 예수님께 헌신할 수 있었어요. 저도 지식인이나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대통령이 친구고, 오피니언 리더 중에 목사님을 좋아하는 분도 많잖아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는 청계천 빈민가에 뛰어들어 ‘활빈교회’를 세웠으나 판자촌 철거계획이 발표되자 철거민 중에서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한 세대들로 귀농개척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경기도 화성시 소재의 남양만 간척지에 집단 귀농한 것이 남양만 두레마을의 시초를 이뤘다. ‘두레’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한 마을의 성인 남자들이 협력하며 농사를 짓거나, 부녀자들이 서로 길쌈을 하던 공동 노동조직을 말한다.
“제가 두레 이름을 떠올린 것은 1974년 감옥에 있을 때였어요. 저는 정치범으로 독방에 있었는데, 가끔 일반 죄수방에 합방을 시켜 주더군요. 스킨십을 발휘해 죄수들과 형제처럼 지냈어요. 가진 것 다 내놓고 공동체로 지내니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사실, 감옥 내에서조차 빈부차가 심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는데, 제가 먼저 내놓으니까 분위기가 달라져요. 그래서 출옥 후 더불어 사는 공동체 마을을 만들게 됐어요.”
—당시 간척지 풍경이 어땠나요.
“소금땅에 죽기 아니면 살기였죠. 가진 것 없지만 땀 흘려 농사짓고 사람답게 살자고 했어요. 무식하니까 용기있다고…, 그래서 달려든 것이죠. 그래도 좋았어요.”
![]() |
| 김진홍 목사가 세운 청계천 활빈교회 모습. |
“김호열 목사가 꾸려 가는 지리산 두레마을은 아직 전통을 지키고 있지만, 저는 수정 공동체라고 할까요? 초대 교회의 공동체성에 부합하되 변화를 준 겁니다.”
김 목사는 “150명 식구가 공동체를 이뤘지만, 적자만 났다. 내 것 네 것이 없으니 아무도 몸을 던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경험을 통해 ‘성장 속에는 분배가 들어 있지만, 분배만 앞세우면 성장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보수적 가치에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매월 2000만~3000만원의 적자를 메우느라 발이 부르트게 뛰어다녔어요. 그래서 수정된 공동체 운동을 생각했어요. 공동체 목표 3가지(예수님이 이장이다, 사랑의 본원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에 충실하되 능력 있는 이는 우대하고 게으른 이에겐 혜택을 덜 주도록 했어요. 일종의 동기부여를 위해서죠. 물론 순수한 형태의 공동체 마을도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그런 공동체 정신이 있어야 하죠. 그러나 한국교회는 공동체 정신을 잃었어요. 삶의 형태가 성경에서 이탈한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고쳐져야 해요.”
김 목사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철학적으로 말해 ‘본질’에 충실할 때, 신앙적으로 말해 자기 사명에 헌신할 때, 고생은 전혀 문제가 안 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로 볼 때, 의미지향적인 삶을 살면 성공한 것이지요. 의미라는 것이 본질이니까. 그 점에서 저는 충실했다고 봐요. 빗나갔다가도 제자리에 돌아오고 ….”
—삶의 본질은 하나인가요, 사람마다 다른가요.
“자기 삶의 본질은 스스로 체득해야지요. 몸으로 깨달아야 하지요. 저는 성경에서 찾았지만 어떤 이는 불도에서 찾고, 정약용 선생은 목민 정신에서 찾았습니다. 다양하지만 자기가 찾은 길이 본질을 추구할 때, 철학에서는 리얼리티에 충실할 때, 요즘 말로 콘텐츠에 충실할 때, 자신의 삶이 뿌듯하고 흐뭇하게 느껴지지요. 어차피 인생이란 고달프잖아요. 배고파 고생하는 사람도 있지만 너무 먹어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하는 분도 있어요. 어차피 인생은 고생입니다. 그 고생에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그 ‘의미’에 삶이 결판납니다.”
—결과론적으로 목사님의 삶은 성공한 것이죠.
“성공한 삶이라고 자평합니다. 만으로 72살인데 평생 시행착오도 많았고, 자동차 헛바퀴 돌 듯 엉뚱한 짓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아주 해피해요. 지금이 제일 안정되고 행복해요.”
“이명박 정권 탄생에 긍지 가져”
![]() |
| 2008년 5월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취임 인사를 하는 김진홍 목사. 김 목사는 17만명에 달하는 보수우파 최대 단체인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아 정권교체에 앞장섰다. |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시작됐나요.
“같은 크리스천이고 나이도 1941년 동년배지요. 20여 년간 친구처럼 지냈어요. 말을 놓지는 않지만, 목요일마다 기독교 실업인 모임을 하며 만났어요. 그 모임의 초대 회장이 이 대통령이었어요. 저는 성경 선생으로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분은 열심이고 정직하고, 깨끗한 분인데 국민한테 전달된 이미지는 그렇지 못해 아쉬워요.”
—이명박 정부 5년의 공과(功過)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나요.
“이명박 정권 탄생의 일익을 담당한 것에 긍지를 가집니다.”
—지분이 있다는 것이죠.
“나름 역할을 했다고 봐요. 지금은 이명박 정권이 저평가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높아질 것이라 봐요. 물론 아쉬움은 있지요.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 전 대통령이) 경제계에 오래 계셔서, 사상성이나 고뇌, 본질추구가 약한 데서 오는 약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보수운동 안 해도 되나요.
“이명박 정권 탄생으로 국가적 위기는 넘어섰다고 봐요. 그러니까 한국은 체제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이승만 대통령과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다고 봐요. 그 확실한 승리 분기점이 이명박 정권 때라는 것이죠. 지금 안보위기가 심각하지만, 고비를 넘기면 안정권에 들어갈 것으로 봅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 좌파정부가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인가요.
“이명박 정권이 기초를 잡아 놔서 박근혜 정부가 평년작만 하면, 다음 정권에서 진보・좌파세력이 들어와도 우파적인 기틀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저안정권에 들어왔다고 봐요.”
—박근혜 정부는 중도정부인가요, 보수정부인가요.
“철저한 보수정부이지요.”
—박근혜 정부의 이념이 보수로 보이나요.
“대통령 주위에 있는 사람이 보수출신들이죠. 저는 좀 더 중도보수로 방향을 틀었으면 생각하지요.”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에 자주 갔습니까.
“자주 갔었는데, 갈 때마다 호텔에서 배달한 스테이크가 식사로 나왔어요. 저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어요. 그냥 청와대 뒤뜰에 둘러앉아 막걸리 한 통 사다 놓고 삼겹살 구워 먹으며 머리를 맞대야 신바람이 납니다. 그런 웨스턴 스타일은 민중적이지 못하잖아요. 요즘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식일 것 같아요. 토론이나 참여가 너무 약하지 않나요? 그것은 정치공학적으로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쉬워요. 목회를 하다 보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반대자를 그냥 두고, 찬성하는 사람이 세를 이루어 그것을 묻히게 하면 됩니다.”
“뉴라이트 이제 필요 없다”
—이젠 세월도 흘렀으니 뉴라이트 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뉴라이트 운동은 당시 꼭 했어야 했던 운동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탄생하고 보수적 가치를 보편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의 좌편향 메인스트림을, 정통보수에서 새로운 보수로 흐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보람을 느끼지만, 조직으로서 뉴라이트는 이제 필요없다고 봅니다.”
—다 이뤘다는 뜻인가요.
“다 이루진 못했지만, 소임을 다했다고 봅니다. 뉴라이트 옛 동지들이 복구하자는 권유가 있었지만, 조직으로서 뉴라이트는 임무를 완수했다고 했어요. 다시 뭘 만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김 목사는 “다 끝났다. 지금은 실체가 없다. 회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며 여러 차례 강조했다. 과거 그는 “운동의 문호는 넓게 개방하되, 중심은 좁아야 한다”며 뉴라이트 운동에 전념했지만, 이명박 정부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저는 본질적으로 종교인이니까. 종교와 정치의 확실한 구분이 있어요. 나무로 보자면 종교는 뿌리고, 정치는 가지, 그 열매가 국민의 행복인 셈이죠. 종교인이 너무 정치현장에 나서는 것은 안 좋다는 생각입니다. 뉴라이트 운동도, 유신반대 운동도 뿌리를 튼튼하게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도 3년 하고 물러났어요. 이 대통령도 몇 가지를 (자리를) 제안했지만 저는 제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변절자라고 욕을 많이 먹었죠?
“많이 섭섭해하더라고요. 20대에 진보 아닌 사람이 바보고, 40대에 보수 아닌 사람도 바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50~60대에 보수를 선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우스갯소리로 ‘평생 진보’는 지능 문제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어요.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20대 때 진보하면 평생 진보의 길을 가야 한다고, 진보에서 보수로의 발전적 전환을 무슨 변절한 것으로 얘기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어요.”
뉴라이트 운동 이전만 해도 두레마을 후원자가 1만2000명이 넘었지만 이후 수천 명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진보진영과 호남 쪽 후원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해를 한 것입니다. 정치하는 것으로, 변절했다고 …. 그렇다고 안 할 수 없었어요. 선택이니까 …. 참 많이 아쉽지요. 그래도 저는 소신껏 살았습니다. 이 시대, 소신껏 살기가 어렵잖아요.”
“제대로 된 일꾼은 이명박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 |
| 2009년 7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44주기 추모식에서 김진홍 목사는 “대한민국의 성장 기초는 이승만 박사의 노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
—그분들이 뉴라이트의 소명에 충실했다고 봅니까.
“이명박 대통령 책임도 있는데요, 뉴라이트 계열의 일꾼 중에 특A급은 제자리에 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B급, C급 일꾼, 그러니까 평균 내지 평균 이하의 일꾼들이 청와대에, 각 분야에 들어갔었습니다. 대통령의 인사에 문제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참여를 못했어요.”
—바로잡으려 어떤 노력을 했나요.
“인사는 대통령 문제니까 ….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은 대책이 없더라고요. 대통령 딱 되고 나니 …, 토론문화가 없으니까 ….”
—이상득(李相得) 전 의원이나 최시중(崔時仲)씨도 전부터 잘 알았나요.
“그렇지요.”
—정권 말기에 영어(囹圄)의 몸이 돼 안타까워요.
“감옥도 우리처럼 30대에 살고 끝내야지 70대에 살면 참 …, 불행이지요.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을 쓴 책임도 대통령에게 있지요. 뉴라이트 사람들은 처음부터 반대했어요. 형님(이상득)은 주일 대사로 보내서 역할을 잘하시게 하다가 정권 말 때 불러야 한다고 권했지요.”
—당시 대통령도 그럴 생각이었죠?
김 목사는 “네. 하여튼, 이상득 최시중씨 스스로 택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요”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다른 정권에 비해 부정한 건수나 액수가 작지만 아쉬워요. 이 대통령이 깨끗하게 (집권)했지만 옥에 티가 생긴 것이지요. 그리고 사저 문제도 그래요. 지금도 이해를 못 해요. 뭐가 그리 복잡한가요?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그걸 수습하는 게 정치적 역량 아닌가요?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열린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아쉬워요.”
이명박 정부 출범에 공을 세웠던 뉴라이트 운동은 이후 MB 정권과 유착하면서 선명성이 떨어졌다. 뉴라이트가 보수혁신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보수의 혁신보다 노무현 정권과 그 주변세력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었고, 노무현 정권이 몰락하자 표적(標的)을 잃으며 같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김 목사는 “일리 있는 얘기”라며 “뉴라이트 운동이 가치관 운동으로 승화됐으면 좋았을 것을 정권교체에 너무 치중하지 않았나. 정권이 교체되고 나니 목표가 없어진 것처럼 운동의 강조가 그렇게 됐다”고 토로했다.
한국 보수세력의 저변이 너무 약하다
![]() |
| 2011년 10월 2일 활빈교회 40주년 기념 예배에서 김진홍 목사가 기도하고 있다. 1971년 10월, 청계천 빈민촌에 ‘활빈교회’를 개척하고, 가난한 이웃의 벗이 되었다. |
“당연하지요.”
—어떤 식으로요.
“새누리당이 좋은 보수당이 되도록 시민단체 쪽에서 역할을 해 줘야 하는데, 이명박 정권 때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가 시민단체를 못 살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정권에도 그 분위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요. 시민운동이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상생하도록 뒷받침해야 하는데 뿌리를 못 내렸어요.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시민운동이 좌파로 휩쓸렸고 그 이후로는 보수정권에 휩쓸렸고 …. 나도 (뉴라이트 운동을) 3년간 했지만 국민 가치관 운동으로, 개혁보수 운동으로 뿌리내리는 데는 열매를 못 거뒀지요.”
몇 해 전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에서 물러나고 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시민운동으로 영역을 넓힐 생각이었을까.
“시민운동 하는 이들을 뒤에서 받쳐 주려 맡았는데, 헌신하는 일꾼들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더라고요. 제가 한계를 느꼈어요. 아, 이것은 안 되겠다. 신진들이 포진해 운동답게 해야 하는데, 한국 보수세력의 저변이 너무 약하구나 하고 절감했습니다. 가능성은 있는데, 이것을 활성화할 수 있는 중간층이 없어 아쉬워요.”
—시민단체협의회는 현재 제대로 가동이 되나요.
“그런대로 유지되지만 별 영향력을 못 미쳐요.”
—19대 국회에 뉴라이트 출신 국회의원이 거의 없지요?
18대 국회에서는 김성회·장제원·신지호·조전혁·박영아 의원 등이 대표적인 뉴라이트 인사들이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대부분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한반도선진화재단 출신의 나성린(羅城麟) 의원이 뉴라이트로서 유일하게 입성했다.
“많이 아쉽지요. 10명 정도는 있어서 뛰었어야지 …. 그건 국가적으로 안 좋아요.”
김 목사는 이 전 대통령을 조만간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명박 정권 5년이 성공인가요, 실패인가요.
“성공이지요. 한 70점 정도? 국위를 높였고 경제를 선방했으니 성공이지요.”
—70점이란 얘기에 이 전 대통령이 좋아할까요, 섭섭하게 생각할까요.
“대통령은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고, 국민은 너무 준다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황금어장”
김진홍 목사는 오는 9월 대안학교(代案學校) 성격의 ‘두레마을 숲속창의력학교’ 설립을 준비 중이다. 동두천 소요산 기슭 2만평의 산골짜기에 터를 잡아 가고 있다. 그는 “일반학교가 아니다.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에 걸린 아이들, 학교폭력에 상처받은 아이들, 이런 청소년들을 위해 세워지는 학교”라고 설명했다. ‘사랑, 자연, 놀이(노동), 창의력 증진’이 교육목표다. 2년 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며 이 학교를 구상했다고 한다.
“주위 분들이 (은퇴한 뒤에) 실버타운을 하라고 권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노인들끼리 모여 뭘 하나요? 기왕이면 젊은이를 위해, 망가지고 병든 청소년을 치유하고 사회에 복귀시키는 운동이 더 보람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학교가 준공되면 인터넷과 게임, 스마트폰 등의 각종 미디어에 중독된 학생들이 입학해 기숙사에 살며 교육받게 된다.
“인터넷에 중독된 애들이 1만~2만명이 아니고 200만명이 된다고 해요. ‘여기가 황금어장이다. 여기에 올인하자’고 해서 뛰어들었습니다. 밋밋하게 ‘인터넷 중독 치유학교’라고 하면 오는 아이들이 부담 되잖아요. 그래서 숲속창의력학교라고 지었어요. 아이들을 치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창조적 인재로 동기 부여해 가정과 사회로 돌려보내자는 취지입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청소년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먼저 스마트폰을 거둬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심하게 중독된 학생은 명현 현상이 일어나 안절부절못하지요.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눈은 어디로 봐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모습이 측은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나무와 곤충과 대화하고, 놀이와 노동으로 땀을 흘리며 인터넷이나 게임이 아닌 다른 일에 자기성취를 이룰 수 있음을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교사진은 하버드대학원, 코넬대, 컬럼비아대, 뉴욕대학, 독일 쾰른예술대학, 프랑스 파리음악아카데미 출신의 교사와 강사라고 한다. 또 인터넷 중독치료를 전공한 4명의 석·박사와 상담사, 청소년 지도자들이 참여한다.
“한국, 이제 인터넷 중독 치유 강국이 돼야”
오는 9월 중학교 1~2학년 과정 학생 각 70명을 신입생으로 선발할 예정이다. 우선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해 점차 대상을 넓혀 나갈 계획. 그는 “첫 1년 과정은 인터넷 중독 치유에 주력하고 2년째는 감성교육, 감성지수(EQ)를 높이는 교육에 치중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할 생각”이라고 했다.
“3년째는 중등교육 과정을 1년간 집중해서 가르칩니다. 중학교 교육과정은 1년만 집중해서 가르치면 다 끝낼 수 있어요. 고등학교 과정은 1년 반만 집중하면 됩니다.”
이 학교는 3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인터넷 모바일에 중독된 아이들이 대상이다. 둘째, 학생은 전국에서 선발한다. 셋째는 학교 질(質)을 세계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것이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인 만큼 중독에도 강국이 됐어요. 마찬가지로 치유강국이 돼야 합니다. 4~5년 뒤에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학생들을 받아 치유할 계획입니다. 제 아들도 교사로 참여합니다. 코넬대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려는 것을 제가 잡았어요. 교사 수준도 높아요. 교사 1명에게 연구실을 주고 자기연구물을 출판해 주려 합니다. 해외연수도 보낼 생각이에요. 대학교수만큼 월급은 못 줘도 그만한 예우를 해 줄 생각입니다. 학생 10명당 교사 1명이 목표입니다.”
지난 2월 26일 김 목사는 대구 달성군에 있는 목단(牧丹)교회를 찾았다. 목단교회는 청계천 빈민선교를 하기 전 그의 첫 목회지다. 신학교에 가기 전 목회자가 없는 시골교회에 가서 먼저 봉사를 하라는 권유를 받고 부임한 교회였다. 꼭 46년 만의 방문이었다.
“46년 전 열심히 농장을 찾아다니며 일손을 돕곤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처녀 총각이던 교인들이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있더군요. 세월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어요. 많은 분이 이미 하늘나라로 갔기에 좀 더 일찍 찾을 걸 그랬어요.”
그는 돌아오는 길에 ‘초심을 되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46년 전 목회 일을 시작하던 때의 기도를 떠올렸어요. ‘입으로, 머리로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가슴으로, 몸으로 섬기는 목자가 되겠다’고 했던, 그리고 ‘교인들만의 일꾼이 아니라 마을과 주민들의 머슴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그 초심을 되찾게 해 달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