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碩濟
⊙ 53세. 연세대 법학과 졸업.
⊙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등단.
⊙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수상.
⊙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재미나는 인생》 《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노래》,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아름다운 날들》 《인간의 힘》, 산문집 《소풍》 《칼과 황홀》.
⊙ 53세. 연세대 법학과 졸업.
⊙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등단.
⊙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수상.
⊙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재미나는 인생》 《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노래》,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아름다운 날들》 《인간의 힘》, 산문집 《소풍》 《칼과 황홀》.
약속 시간보다 미리 도착해 2층의 구석 자리를 잡아 두었는데, 어떤 무리가 쑥 들어와서 두 테이블 건너에 자리를 잡는다. 차를 주문하는 것도 잊은 듯 앉자마자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 놓고 감정과 이성이 넘나드는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거친 그들의 목소리가 아기자기하게 들려주는 작가의 음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순간, 소설가에게 따라다니는 기이한 현상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실종사건이 소설의 실마리이다. 실종자 황만근은 좀 모자란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실종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그의 부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가 몰던 경운기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야 그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보다 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을 사람들은 깨닫는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갔을까? 전날 밤 술자리에서 이장이 넌지시 지시한 대로 농민궐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홀어머니가 먹고 싶다는 고등어를 사 오려고 읍내로 갔다.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은 길을 홀로 떠난 선각자처럼.
그가 사는 집성촌 농촌마을은 우리 사회의 축소된 공간이다. 알고 보면 그는 끝까지 도덕적인 인간으로 살았다는 것. 작가는 그 사실을 들어 보라고 한다.
그의 소설을 읽고 웃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나는 인간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 상태일 때, 당장 성석제 작가의 소설 책장을 넘기라고 하고 싶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에게는 속수무책이다.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 통쾌하고 유쾌하고 상쾌하기까지 하다. 타인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헤쳐 내고 있지만, 객관적 시선과 따뜻한 이해가 숨 쉬고 있다. 그것이 그의 이면이다.
경기도 이천 농촌마을에 산 경험이 소설의 자양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선생님 고향인 상주가 배경인가요.
“지리적 환경이죠. 사투리는 그쪽이 조금 들어갔어요. 저수지나 앞에 두르고 있는 산이라든지. 90년대 초반쯤에 경기도 이천 농촌 마을에 작업실을 두고 산 적이 있어요. 몇 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거기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막걸리도 많이 마셨죠. 그 농촌 마을, 사람들의 문화에 동화되면서 느꼈던 것들이 한동안 소설을 쓰는 데 큰 자양분이 됐어요. 저 같은 사람은 농부들의 눈에 이질적인 존재이죠. 그들 눈에 보이는 글쟁이는 백수나 다름없겠죠. 황만근이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부터 봐 온 농촌 공동체 내의 이색적인 인물의 연장이자 작업실이 있던 마을 사람도 투영되어 있고 우리 사회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죠. 《내 고운 벗님》 같은 소설도 그 무렵 쓴 소설입니다.”
—도덕적인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주는 소설입니다.
“저한테는 전형적이라는 것이 별로 없어요. 도덕, 관습, 가치관 이런 것들은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언제든지 바뀌는 거니까요. 어떤 사람이 어떤 도덕률, 가치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도덕률이 달라질 수 있고 가치관이 달라진다는 거죠. 저는 사람들 사이에 고정불변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유동적인 존재죠. 자연에든 인간에든 도덕과 같은 질서가 있다면, 유일한 질서는 ‘자연과 인간은 변화한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농촌에서 빚보증을 세워 놓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든지 다른 사람 빚보증을 서 줬다거나 하는 이면의 이유가 있는 거죠. 단순히 그 사람만 나쁘다고 단죄할 수가 없어요.”
—황만근은 실제 롤모델이 있습니까.
“농촌공동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좀 모자란 사람이죠.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멸족이 되었는지 그나마 잘 볼 수 없는, 그런 유형의 인물은 농촌 같은 지역 공동체에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죠. 옛날 설화부터 그런 인물들이 많아요. 어리석지만 사실 지혜로운 사람, 가령 서애 유성룡에게 어리석은 삼촌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었고, 사람을 알아보는 특별한 눈이 있었다 하는 식이 되는 거죠. 90년대부터 농촌 마을에 대출 맞보증으로 서로가 서로의 목을 죄는 식의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선량한 사람들이 대거 생겨났는데 원인이 뭔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아무도 답을 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현실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바보 같은 사람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치유방법을 알고 있는 거죠. 원인에 대해서도.”
—작중에서 황만근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독특한 행동으로 묘사되는데, 한 예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바깥 마루에서 잠을 자는 게 있습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작중 주인공이 사는 집은 제대로 지어진 집이 아니죠. 되는 대로 재료를 가져다 기술도 없이 얼기설기 지은, 오막살이 같은 그런 집이에요. 문명화가 덜된 농촌 마을에 있던 행랑채 같은 구조이죠. 담도 대문도 마당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집이라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묘한 집. 그런 집이 동네 바깥쪽, 경계에 가까운 곳에 있고 그 집에 사는 인물 역시 사람들 인식 범주 바깥에 있는 방외적인 인물이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조차 방이 아닌 마루에서 생활하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설정이 설득력 있게 인물의 성격을 표상하느냐 하는 그런 겁니다. 가설의 공간, 가설의 인물이라는.”
잘 모르는 분야에서 소설적 영감을 얻을 때도

—조선시대 양반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집성촌에 관한 얘기가 꽤 있는 소설이 많아요.
“십수 년 전 《인간의 힘》이라는 장편소설을 썼는데 조선 중기 인물을 다루다 보니 그 당시 사회, 양반에 대해 모르고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게 됐는데 그게 감자덩굴 같아서 하나를 캐면 계속 따라 올라왔어요. 양반사회의 혼맥과 인맥이라든지, 서신을 왕래하고 서로에 대해 평가한 것이라든지, 그런 부분을 소설에 반영했어요. 영남 북부지역은 안동을 중심으로 해서 가문과 양반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강한 데지요. 실제로는 조선 중기 이후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당상관 이상 벼슬을 한 사람의 비율이 아주 낮아요. 열 명 중 한 명도 안 될 거예요. 지금처럼 수도권 인구 집중이 없는 상태에서 그 정도이니 서울 사람들이 벼슬을, 양반 지위를 거의 다 차지해 버린 거지요. 지방에서는 몇 대에 한 번 양반이 날까 말까 한 거예요. 삼대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면 양반이 아니라는 식의 엄밀한 정의에서 보면 지방의 사족은 대부분 양반이 아닌 거지요. 그런데도 한사코 조상 중 몇 사람이 벼슬을 지냈다는 것에 기대어 ‘나는 양반’이라는 프라이드를 갖고 살아가는 게 사람이죠. ‘이 양반아, 저 양반아’ 하고 서로를 부르고 말이죠. 그거라도 있어야만 살겠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한 거죠. 충분히 이해할 만해요.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니까.”
—양반의식이 심한 사람도 있잖아요. 깔보거나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그게 참을 수 있는 범위까지죠. 나는 왕족 출신이라 해서 왕이 없는 현대에서 상대가 평민 출신이니까 그 사람을 깔본다면 정상은 아니죠. 지속적으로 심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병자라고 하죠. 약간 자기의 존재가치를 높일 만한, 잘생겼다든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잘했다든지 키가 좀 크다든지, 그래 봤자 몇 센티미터 차이지만, 그런 여러 가지 속성이 있겠죠. 우리가 용납하고 재밌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차이는 괜찮아요. 그게 지나쳐서 많은 사람이 이해되지 못할 그런 행태나 언행을 보인다면 그게 문제죠. 그런 사람을 일러서 사회화가 아직 덜됐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회화가 잘된 인물이 모두 훌륭하다는 뜻은 아닙니다.”(웃음)
—현대문학상 수상작 《내 고운 벗님》은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남자들의 관심사인 낚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남자들의 이야기인데, 낚시를 좋아하세요.
“해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우연히 낚시를 하러 간 적이 두어 번 있는데, 한 30분 앉았다 왔을 거예요. 물론 아무 것도 못 잡았죠. 그런데 그때 낚시꾼들이 하는 얘기가 무척 재미가 있었어요. 아마도 낚시에 대해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재밌게 들린 것 같아요.”
—30분을 앉아서 낚시꾼 이야기를 듣고 소설적 영감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한 편이 아니라 여러 편이 나왔죠. 《내 고운 벗님》에 다 쓰지는 않았지만, 다른 작품에 변형이 돼서 들어갔어요. 사냥에 대해서도 쓴 게 있는데 사냥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내가 재미있어 하면서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소설에는 그런 식의 것들이 많아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친구들, 법조계·세무 공무원·교사 등등 다양한 전문 직업군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세계 이야기를 심상하게 말하는데, 아 이건 재밌겠다 하는 그런 것들이 얻어걸리는 거죠. 그런 걸 가지고 쓰는 거예요. 낚시와 사냥이라는 도구, 그런 건 인간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회적 존재인가를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선생님 본인도 쓰면서 웃을 때가 많은가요.
“저는 웃을 수가 없지요. 사진을 찍을 때 내가 먼저 흔들리면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누가 썼지 하면서 좀 웃을 때가 있죠. 내 기억력이 이렇게 형편없나 하고 실소할 때도 있고.”
—《내 고운 벗님》에서 낚시터의 네 남자 중 어떤 성격하고 가장 가까운가요.
“글쎄요. 저는 작가로서 네 사람의 캐릭터를 다 바라봐야 하니까 어느 편에 가까울 수는 없어요. 네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기도 해요. 한 사람이 썼으니까요. 한 사람이 어느 때는 이럴 수 있고, 어느 때는 저렇게 하고. 그런 정도죠.”
소설 쓰면서 인간이 多層的 존재라는 사실 알아
—소설의 캐릭터는 주변인에서 찾는 편입니까.
“주변인은 거의 없어요. 아는 사람을 가지고 쓰면 내가 재미가 없어요. 그 사람이 들어와서 자꾸 방해를 하기 때문이죠.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개연성에서 대개 출발하는 거죠. 그 사람이 어떤 언행을 할지 궁금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에서 쓰는 것이 재밌어요. 저도 재밌고 보는 사람도 재밌는 거죠. 그 의외성은 많은 경우가 우연에서 나오는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문명이며 과학이라는 것은 우연성을 배제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죠. 그런데 문학이 과학은 아니거든요. 인생도 과학이 아니고요. 저는 되도록 인공적인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천연에 가까운 우연성을 소설로 보여주고 싶어해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소설을 쓰고 완성을 하고 마감을 지키지만 의식적으로 한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요. 소설 쓸 때 이 부분에 이런 장면을 배치하고 이 인물은 여기다 갖다 놓고, 이런 말을 하게 하고 여기서 복선을 깔고 이런 식이 아니고, 소설을 걸림 없이 쓸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의 전도체로 나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어떤 에너지가 나를 지나가는 동안 나는 소설을 쓰는 거죠. 소설을 쓰기 전에 그런 상태로 나를 만드는 것, 그게 나한테는 중요합니다.”
—소설 속 인물은 아무리 문제적인 인물일지라도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데, 실제 본인의 성격에 대해 남들은 어떻게 말하나요.
“남들은 일단 재미없다고 하죠.(웃음)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 보니 이야기를 정말 재미없게 한다, 아예 말을 잘 못한다, 무뚝뚝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데, 소설 쓰기 전부터 알아 오던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이 다 재밌어요. 살아가는 방식이나, 살면서 부딪치는 사건도 다 흥미로워요. 저에게는 그런 친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이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를 않아요. 그들에 비하면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 같아요. 그들과 만나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이런 얘기가 있었고, 그런 얘기를 하지요. 제가 그 대화에 끼려고 하면 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네 얘기는 재미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해요. 저는 자기들 얘기를 들어 주어야 한대요. 그리고 재미있었던 만큼 술값을 내는 역할을 하라는 거죠.”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을 때도 듣기만 하라고 말하던가요.
“당연하죠. 너는 들어 주는 역할이다 이겁니다. 저야 고맙지요. 천성적으로 말을 먼저 하기보다는 잘 들어 주는 편이 더 편하거든요. 그런 자리에서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원고료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재미없다고 하는 거겠죠. 듣다 보면 쓸 거리가 많아지고 배터리가 충전되는 기분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장 그 이야기를 가지고 쓰지는 않지만, 1년 지나고 5년 지나고 10년 지나고 30년 지나고 하면 어느 새 그게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친구의 일화가 씨앗이 돼서 다른 소설을 낳기도 하고 그래요.”
—소설 속에서 우리 사회의 도덕주의자에 대한 펀치와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닌데요. 조심해야 할 것은 특정한 개인을 짐작하게 하는 그런 단서들이 소설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거죠. 소설은 한 개인의 전기가 되어서도 안 되고 개별적인 인간을 평가하는 도구도 아니니까. 제가 바라는 바도 아니고요. 소설 쓰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이면에 추악하거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면이 있다는 걸 자주 발견하죠. 그렇다고 그걸 폭로하고 특정인을 끌어내리고 재미있으라고 전시하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없어요. 글로써 무엇을 고발한다든지 어떤 사람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거죠.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죠. 평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도 그 이면에는 다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어요. 글 쓰는 사람의 버릇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덕망 있는 위치를 가진 사람들 혹은 사회 지도층, 예를 들어 스승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면이 뭘까 궁금해하긴 하죠.”
—사람의 이면은 주로 어떤 모습입니까.
“저는 사람을 정말 좋아했어요. 20대에 특히 그랬어요.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매력이 느껴지는 상대에 대해서는 매혹됐어요.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신적인 아우라 같은 것을 느끼곤 했어요.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을 두근거리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죠. 그러다가 30대 중반 이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는 서서히 그런 매혹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인간은 굉장히 다층적인 존재이죠. 인간에게 나이 수만큼의 인격이 있을 거라고, 가령 열 살짜리는 그 안에 열 개의 인격이 있다, 천수관음의 손처럼 인간에게도 천 개의 인격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떤 위대한 사람도, 괴테나 간디 같은 사람도 내면에는 젖먹이가 있고, 기저귀를 차고 다니던 시절이 있는 거고, 소년이 있고, 평생 가도 절대 안 변하는 모습이 있는 거죠. 어느 때는 그 사람에게 어머니의 몸에서 빠져나올 때의 자아가 튀어나오기도 하고요. 그래야 숨을 쉴 수가 있으니까요. 성스럽기도 하고 신적인 존재에 가까워진 사람도 있지요. 밑바닥, 아니 아득한 지하에서 하늘, 우주까지 아우르는 게 인간이고 인간의 다채로운 면이 소설을 쓰게 하는 거죠.”
詩로 등단해 소설가로 변신
—그럼 소설 속에 영원한 성인군자는 없는 거겠네요.
“그건 죽은 사람이죠. 죽으면 성인이 될 수 있죠. 요즈음은 쉽게 풀어 쓰는 논어 같은 게 있죠. 부처도 사람이다 하는 식의 접근법도 있고. 처음부터 태어나기를 성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전기가 말해 주지요. 예수도 석가도 광야에서의 번민과 방황, 고된 수행 끝에 성인이 된 거죠. 그렇다고 그런 과정이 그 사람을 격하시키는 것은 아니죠.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고 성인처럼 될 수가 있어요. 예전에는 성인은 성인이라는 식의 도그마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는데 현대인은 다르죠.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 이하에서부터 인간 이상까지 걸쳐져 있는 특이한 존재죠.”
—문명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고 있지 않나요.
“과학문명이 지식과 인권, 민주화에는 많이 기여했죠. 자기가 얻고자 하면 그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통로가 마련되어 있죠. 반면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이 줄여 놨어요. 귀찮거든요. 찾아보고 읽고 해석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하거든요. TV나 인터넷, 스마트폰을 통해 거의 모든 걸 보고 들을 수 있으니까요. 섭취하기 쉽도록 가공하고 달콤한 맛에 그럴듯한 향을 더한 인스턴트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면서요. 과학문명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정신문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문명과 문화는 다른 거죠. 문화는 개개인이 참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고 문화에 의해 스스로도 변모합니다. 이제는 문명이 문화를 구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문명이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어요. 미래에는 씹는 것도 귀찮아서 주스만 마시고 비타민 정제 같은 것만 먹고 해서 뼈와 근육도 퇴행하고 육체는 뚱뚱한 아기처럼 되고 정신 역시 무능력한 비만아가 되어 갈 수 있어요. 그게 다 문명의 폐해죠.”
—법대를 졸업하고 어떤 동기로 작가(소설)의 길을 선택했나요. 고시 본 적 있나요.
“아니요. 본 적 없습니다. 법과를 간 건 거의 우연이었어요. 법학 공부를 해서 입신을 한다거나, 직업을 그쪽 분야로 가겠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대학 다닐 때 지향했던 것은 교양 있는 시민이었어요. 그러다가 친구들 덕분에 시를 쓰게 됐지요. 주변에 시 쓰는 선후배가 많아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문학 서클에 들어가서 시 공부를 했어요.”
—시로 등단했는데 어떻게 소설을.
“86년에 등단해서 91년도에 첫 시집을 냈어요. 그리고 94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 시집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제 속에 시로 쓸 수 없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게 있어서 그걸 정리하려고 했지요. 그게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되고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책을 내게 됐죠.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라는, 제 이름 뒤에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나는 소설을 쓸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요. 그 당시 창간한 지 오래지 않은 계간지 《문학동네》의 주간이 소설 청탁을 해 볼 만하겠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청탁을 해 왔는데, 그때 쓴 소설이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라는 단편소설이었어요. 그 소설을 보고 다른 잡지사에서 또 청탁을 해 온 거죠. 또 다른 잡지사, 또 다른 출판사 이런 식으로 청탁이 이어졌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 쓴 소설로 97년인가에 첫 창작집을 냈어요.”
—전업작가가 된 건가요.
“그때는 청탁이 너무 많이 와서 쓰느라고 너무 바빠서, 무엇이 문학이고 무엇이 소설이고 무엇이 소설가로 사는 길인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어요.”
—소설은 주로 어느 시간에 쓰나요.
“저는 밤에는 잘 안 씁니다. 소설을 쓰면서 밤을 새운 적이 평생 한두 번 있었을까. 태어나서 밤을 새워 본 게 지금까지 손에 꼽을 정도예요. 술 마시다 밤을 새워 본 적도 없어요. 그전에 직장 다닐 때 술을 마시다 깜빡 졸았는데 깨 보면 다 가고 혼자 영업 끝난 자리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 경험이 몇 번 있고 나서는 무조건 잠이 오기만 하면 사라집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무슨 일을 하다가도 견디지를 못해요. 그래서 별명이 신데렐라예요. 성이 신씨가 아니라서 성데렐라고도 하죠.(웃음) 낮에 주로 쓰지요.”
개그콘서트? 다른 사람이 웃을 때 난 웃지 않는다
—인간을 볼 때, 만났을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까.
“보고 싶은 건 지갑인데 (웃음) 잘 안 보여주더라고요. 사람을 보면 전반적으로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죠. 그게 다예요. 그걸 굳이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를 받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죠. 뭘 먼저 보는 게 아니고 오감, 육감으로 파악하는 거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최근 출간 계획은 있나요.
“여름부터 장편 연재를 시작할 거고, 중단편 모음집이 나옵니다.”
—주인공보다 부주인공이 더 돋보이는 경우가 많던데요.
“정답을 한마디로 줄이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때그때 달라질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는데, 한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봤자 그 사람이 알아지지 않는다는 거겠죠. 소설도 마찬가지죠. 친구들에 대해서 묘사를 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주는 것이 될 수 있죠. 그게 소설을 재미있게 하고 쓰는 나 스스로도 지루하지 않지요. 주인공의 입과 생김새보다는 타자들의 입과 눈을 통해서 주인공에 대해 말하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생동감이 있어요.”
—성석제 작가에게 쏟아지는 호평과 찬사는 소설이 재밌다입니다. 찬사 외에 비판을 받아 본적도 있겠죠, 물론.
“있죠. 대표적인 비판은 ‘재미만 있다’죠. 평론적 시각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당연하고요.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재미도 없다’가 되면 어떻게 해요. 최악의 평은 재미도 없다일 거예요.”
—개그콘서트를 자주 봅니까. 선생님 소설 캐릭터를 많이 참고할 것 같아요.
“이따금 보기는 하는데 남들이 웃을 때 나는 별로 안 웃어요. 코드가 다른 것 같아요. 거기에는 어떤 말이나 몸이 보여주는 유머가 있고, 그게 내가 쓰는 문장하고는 다른 거죠. 문장은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시차와 화법의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요.”
—《소풍》 《칼과 황홀》처럼 음식에 관련한 산문집도 냈는데 음식에 대한 관심은 원래 많은가요.
“다른 산문집이나 소설에도 음식 관련 이야기가 꽤 있어요. 나라는 사람을 세상과 접촉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채널이 음식이니까요. 다행이죠. 내가 세상과 만나고 알아 가는 채널이 종교라든가, 계단 오르기라든가 했으면 재미가 덜했을 것 같아요. 굉장한 음식점을 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그런 음식들이 많죠.”
—독특한 미각이 있어 보여요.
“요리사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진 건 아니고요 어릴 적부터 입이 짧았어요. 스물 몇 살 때까지도 육식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먹게 된 다종 다양의 음식이 정말 맛있는 거예요. 아직도 못 먹어 본 게 많아요. 작년에 제가 먹은 쇠고기의 총량이 한 2kg 정도 될까요. 대구에서 구이를 먹었는데 평생 처음 맛보는 것 같은 황홀한 맛이었어요. 평소에 쇠고기를 자주 먹었다면 그런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겠죠. 제 입맛은 장하고 많이 결부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간장·된장·고추장 할 때 말하는 장이죠. 요즘 좋아하는 건 고추예요. 동남아에서 생산하고 중국 음식에도 넣는 아주 작은 고추요. 얼마 전에 다녀온 라오스에서는 ‘칠리’라고 부르던데 따끔하게 매우면서도 뒤끝이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