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과 먹으로 사진보다 더 사실적 實景 山水畫의 길 열어
⊙ 藝高 시간강사 하며 9년간 소묘 가르친 것이 도움돼
⊙ 국내 미술계 흐름에 역행하며 주류에 합류하는 아이러니한 작품 활동 전개
崔令杰
⊙ 45세.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同 대학원 졸업. 계원예고, 숙명여대, 이화여대 강사.
⊙ 대한민국 미술대전 구상 부문(2001, 2002), 중앙미술대전(2002), 단원미술대전(2002) 수상.
개인전 6회.
⊙ 藝高 시간강사 하며 9년간 소묘 가르친 것이 도움돼
⊙ 국내 미술계 흐름에 역행하며 주류에 합류하는 아이러니한 작품 활동 전개
崔令杰
⊙ 45세.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同 대학원 졸업. 계원예고, 숙명여대, 이화여대 강사.
⊙ 대한민국 미술대전 구상 부문(2001, 2002), 중앙미술대전(2002), 단원미술대전(2002) 수상.
개인전 6회.
물론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가 그린 실경 산수화가 있지만 최영걸의 것과는 다르다. 전통 산수화는 명승지의 절경을 그리되 지조·절개 같은 사의(寫意)를 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실 최영걸의 그림은 포토 리얼리즘의 수준에 가깝다. 다만 사진처럼 포착하되 기계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감각과 정서까지 긴박하게 추적한다고 할까?
그렇다고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대부의 근엄하고 으스대는 시각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위치와 눈높이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산과 나무, 돌과 바위, 집과 돌담이 하나가 되게 한다.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다.
이런 최영걸의 그림은 국내 동양화단에서 별스럽게 보인다. 그를 둘러싼 많은 호불호(好不好)가 그렇다. “사진과 뭐가 다르냐”는 혹평과 “사진 이상의 감동”이라는 찬평이 엇갈린다. 국내 보기 드문 전업작가로 10여 년째 그림을 그리며 엇갈린 편견도 점점 무뎌지고 있다. 미술평론가 하계훈은 “최영걸은 요즘 우리 미술계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미술계의 주류에 합류하는 아이러니한 작품 활동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역설적이게도 국내보다 해외에서 그의 그림을 더 많이 찾는다. 세계적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가 홍콩에서 개최하는 경매에 매년 작품을 소개하고 거래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작가다. 그런 해외 반응이 역(逆)으로 국내 화단에 소개되면서 최영걸을 주목하게 했다. 이젠 “최영걸이 누구냐”는 말 대신 “최영걸의 밀도와 정밀성이 어디까지 갈까” 하는 기대가 더 많다. 기자는 화가의 그림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월 말 경기 용인 수지에 있는 작업실로 향했다.
관념이 중시되던 서울대 학풍
상가 건물 1층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초라했다. 작업실 옆집은 작은 건축회사가 쓰고 있었다. 낡은 트럭이 서 있고 작업모를 쓴 인부들이 수시로 오갔다. 그 건물에 산수화를 그리는 화가가 ‘숨어’ 산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평 되는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조금 오한이 느껴졌다. 기자가 오기 전에 급히 도시락을 먹었다는데 음식물 냄새는 없었다. 뭘 먹었을까. 그는 “한겨울에 작업실을 비워달라고 해서 급히 이곳으로 옮겼다. 누가 오면 창피하다”고 했다. 작업실 한쪽에는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서설(瑞雪)>이라는 작품이 놓여 있었다. 화가의 눈길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는 듯했다. 오로지 붓과 먹으로 그린 200호 사이즈(259.1×193.9cm)의 큰 그림인데 흑백의 색감이 눈 덮인 시원(始原)의 감동을 느끼게 했다.
—눈(雪)이 쌓인 부분은 흰색으로 칠했나요.
“아뇨. 양화(洋畫)처럼 흰색을 칠하면 더 쉬울지 모르죠.”
흰색은 그냥 한지 빛깔 그대로였다. “그림에서 흰 부분은 그냥 남기는 부분이다. 서양화는 흰색을 칠하는데, 남기는 것보다 칠하는 게 더 쉽다”고 했다. 산하(山河)를 덮은 눈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작품 제목이 ‘서설(瑞雪·상서로운 눈)’이라고 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진보다 더 실감나는, 붓과 먹으로 수많은 선과 획이 이뤄낸 풍광은 오래 공을 들인 노작(勞作)의 결과였다. 그의 그림은 묘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점점 그 세부의 붓질과 색채의 정밀함에 다시 한 번 그림의 부분과 전체를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술은 다른 장르에 비해 사전지식이 없어도 공유가 가능한 장르잖아요. (외국)문학은 번역을 거쳐야 하고, 음악도 노랫말이라는 제약이 있지만 미술은 그런 게 필요 없는 매체인데, 동양화를 전공하다 보니 한계가 있었어요. 제 스승들은 한국화의 우월함을 강조하셨는데, 서양인도 공감하게 만드는 작업은 잘 안 하셨어요.”
그는 인터뷰 도중 “제가 지닌 재능을 끌어내 줄 스승이 계셨으면 좀 더 일찍 작업을 시작했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털어놨다. 대학시절(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학풍(學風)은 사물의 묘사보다 관념을 중시하는 문인화(文人畫)의 전통이 지배하고 있었다.
붓과 먹으로 고밀도(高密度)의 자연을 그리겠다는 최영걸의 작업을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 미대 대학원 진학도 불가능했고. 졸업 전시회도 구상화를 추상화로 고쳐 가까스로 참여할 수 있었다.(대학원 진학은 스승들이 모두 정년퇴직한 2005년에야 이뤄졌다고 한다.)
“제 이름이 조금씩 알려질 때, 은사 한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바다 그림은 네가 국내 최고야. 열심히 하니 보기 좋더라’는 겁니다. 그날 저는 서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스승에 대한 권위가 그런 것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맞닥뜨렸던 반응하고 너무 달랐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당시 끌어주시진 않았지만 뒤에서 묵묵히, 언젠간 제 길을 갈 것이란 기대감은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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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설(瑞雪)> 259.1×193.9cm, 한지에 수묵담채, 2013년. |
소묘 가르치는 입시전문 강사
1993년 대학을 졸업한 최영걸은 화가의 길을 접었다. 그렇다고 붓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계원예고에서 13년 동안 시간강사로 일했다. 또 강남에서 화실을 운영하며 입시(入試) 위주의 그림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대학원에 진학해 그림을 계속할 용기가 없었어요. 필기시험에서 떨어졌으면 모를까 면접에서 낙방했으니 다시 도전해 볼 여지가 없었어요. 스승이 버티고 있는 한 제 그림세계를 드러내긴 불가능했으니까요. 이후 미대 입시과목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동양화 대신 소묘 선생으로 9년간 일했어요. 실은, 그게 도움이 됐어요.”
디테일한 정밀묘사는 강사로 9년간 소묘를 가르치며 습득한 것이다. 소묘는 채색을 하지 않고 주로 단색 선으로 그린 회화표현을 말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선생도 느는 법입니다. 기본적인 묘사력은 그렇게 연마한 것이죠. 가르치다 보니 제 실력도 좋아지고 그 상태에서 나중 붓에 대한 감각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작품 활동은 안 했나요.
“거의 안 했죠. 제 그림이 하찮고, 가치없다는 생각에 자꾸 위축됐어요. 그래서 아이들만 열심히 가르쳤죠.”
—스승에 대한 섭섭함이 컸나 봐요.
“대학 은사가 동양화단의 거목이셨어요. 당연히 자신의 예술세계를 후학들에게 지도하셨어요. 이분이 보기에 제 재능은 이해가 안 되는 쪽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기초적으로 그림을 풀어가는 것이 부족했고, 열정이 있었다면 (스승의) 칭찬을 못 받아도 제 갈 길은 간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어렸던지 제 길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어요.”
입시결과가 좋아 수험생 사이에 족집게로 통했다. 시간강사는 순수한 미술교사와 다르다. 학생지도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입시성과에 대한 평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성가(聲價)가 한창 높을 무렵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입시에 대거 낙방한 것이다.
“그해(2000년) 소묘를 가르친 제자들이 한 명도 합격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 적이 없었어요. 말도 안 되는 애들까지 맡아 합격시켰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됐어요. 최선을 다해 가르쳤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거 봐, 잘난 척하더니…’ 하는 시선에 상처도 받았어요. 아예 그만둘 생각까지 했어요.”
—뭘 할 생각이었나요.
“다 알아봤어요. 장사를 할까도 생각했는데 경험도 없고 이민(移民) 생각까지 했어요. 그동안 그림작업을 쭉 해왔으면 모를까 전업작가로 나가는 일도 불가능해 보였어요. 미술품 복원하는 일을 다시 배워 그쪽 일을 할까도 생각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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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송도(老松圖)> 127.5×227.5cm, 한지에 수묵담채, 2012년. |
다시 붓을 잡다
그때 그는 자신의 재능을 두고 기도한 일이 생각났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신이 재능을 주셨으면 써먹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다시 붓을 잡겠다고 하니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서울 미대 1년 후배인 아내의 반대가 제일 컸다.
“아내 말이 ‘주변에 전업작가로 살아가는 이가 있으면 얘기해 달라’는 겁니다. 제 앞뒤로 10년 선후배를 더듬어 보니 교수가 된 이들 빼고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물러설 데도 없고, 애는 커가고… 주변의 응원이 없다 해도 귀를 닫고 내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그땐 강했어요.”
상가건물 지하에 있던 대학 회화과 선배의 작업실 한쪽을 빌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막상 그리려니, 그릴 줄 아는 게 없더군요. 손을 놓은 지 너무 오래됐어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 해보자’고 도전을 시작했죠.”
2000년부터 다시 붓을 잡아 2003년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 2년 반을 계속 연습만 했다. 물론 예고 출강은 계속 했지만, 더 이상 대입(大入)반은 맡지 않았다.
—학교에서 입시반을 안 맡겼나요, 본인이 안 맡았나요.
“반반이죠. 저도 부담스럽고, 학교 측도 좀 그렇고.”
시련은 역설을 수반하는 법이다. 나락에서 일어서기 위해선 곰삭은 시간이 필요했다.
“잠자고 출강하는 시간 빼고는 작업에 매달렸어요. 하루 10시간 이상 그리다 보니 손가락에 관절염이 왔어요. 지하작업실이어서 습기가 많아 관절을 퉁퉁 붓게 했어요. 하도 아파 (작업실을) 지상으로 탈출했어요.”
—첫 개인전 반응은 어땠나요.
“2003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반응이 그저 그랬어요.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대학교수로 계신 동문 선배님 몇 분이 일부러 지방에서 제 그림을 보러 오셨어요. 제가 미리 보낸 그림 팸플릿이 인상적이었나 봐요. 방명록에다 ‘이런 작업을 하는 후배가 있어 힘이 된다’는 말에 용기가 생겼어요. 서울대 학풍이 지배하던 그림이 아니니까요. 그런 반응 때문에 힘이 났어요.”
사진보다 더 세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성격이 진득해야 한다. 마음이 급해서는 절대 그릴 수 없다. “제 그림을 본 이들이 ‘화가가 약간 정신병자는 아닐까. 편집·강박증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실제로 그런 반응까지 계산하고 그린다. 그것이 제 회화관(繪畫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영걸은 점점 동양의 재료와 서양화의 정밀 묘사를 더하는 그림세계로 나아갔다. 카메라로 담기 어려운 상당한 광각(廣角)의 시야를 한 화면에 재구성시켰다. 바느질할 때 바늘로 한 땀 한 땀을 떠가듯이 최영걸은 세필(細筆)을 바늘 삼아 화면을 한 땀 한 땀 떠갔다. 한줌의 흙, 꽃잎 하나, 나무껍질의 표정 등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이 그만의 장기(長技)가 됐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씨는 그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최영걸은 대상을 정확하게 관찰한 다음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정치(精緻)하게 옮겨냅니다. 피부의 각질, 조그만 솜털 하나하나도 빼먹지 않은 초상화처럼 들판에 떨어진 지푸라기 하나, 봄볕을 맞으며 올라온 새싹 하나하나를 지나치지 않고 화면에 실어내죠. 대단한 관찰력이자 놀라운 표현력이 아닐 수 없어요.”
그가 주로 쓰는 먹(墨)과 한지는 매우 다루기 어렵다. 먹은 양(陽)과 음(陰)의 변화를 표현하기엔 적절하지만 광선, 즉 양광(陽光)과 음광(陰光)의 변화를 그리기엔 적합하지 않다. 한지라는 재료 역시 수정이 불가능하다. 그는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통해 표현의 요령을 점차 채득해 갔다.
—나중에 아내도 전업의 길을 이해하던가요.
“점차 이해를 했어요. 저는 어떤 미술 평론가가 제 그림이 좋다고 해도 아내의 칭찬이 가장 좋아요. 미대 후배인 아내도 그림에 대한 열정과 꿈이 있어요. 그런 꿈을 남편이 한다고 하니 처음엔 미심쩍은 눈으로 보다 지금은 많이 응원하죠.”
—그림으로 밥은 먹고살겠구나 생각한 것은 언제쯤인가요.
“글쎄요, 세 번째 개인전(2005년)을 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해요. 저를 프로모션 하는 분도 없었고, 혼자서 미술담당 기자를 찾아가 도록(圖錄)을 전하며 부탁 인사하고, 여기저기 인사동 화랑을 순회하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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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飛上)> 117×196cm, 한지에 수묵담채, 2010년. |
홍콩 미술품 옥션의 스타작가
최영걸 화가는 세계적 미술품 경매회사인 ‘크리스티’가 홍콩에서 개최하는 옥션의 ‘스타작가’로 통한다. 2005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처음 작품을 낸 뒤 지금까지 국내 출품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출품 수와 높은 낙착률을 기록했다. “40여 차례의 경매에서 딱 한 번 유찰(2007년 11월)했을 뿐 모두 낙찰됐다”는 것이다. 2008년 가을 금융위기 당시 다른 작가의 낙찰률이 40% 이하로 곤두박질칠 때도 그는 늘 추정가 이상으로 낙찰됐다. 작년 11월 100호(162.2×130.3cm) 크기의 소나무 그림 한 점과 작은 그림 네 점을 합쳐 1억원이 넘게 팔렸다.
“국내에도 좋아하는 분이 계시지만 글쎄요, 해외 반응이 더 적극적인 것 같아요. 그래서 서운하기도 해요. 판매가도 해외 판매가가 국내보다 두 배 이상이죠.”
—홍콩 경매시장에는 작가라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나요.
“아뇨. 홍콩 크리스티가 개최하는 ‘아시아 컨템포러리아트’ 옥션의 경우 스페셜리스트가 작품을 고릅니다. 그 사람의 안목이 출품을 결정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출품하는 것과 함께 얼마에 낙찰되는지도 중요해요. 지금은 거품이 걷혀 잘되는 작가만 잘되는 경향이 있어요.”
—비결이 뭡니까.
“신(神)이 그 사람(홍콩 크리스티 아시아디렉터 에릭 창) 눈에 콩깍지를 씌웠나 봐요. 제 그림보다 훨씬 멋진 그림이 많은데도 말이죠.”
최영걸은 “날이 갈수록 그림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림이 인기가 있으면 작품 수가 많아집니다. 처음엔 혼자 하다가 조수를 두고 양(量)을 늘리게 돼요. 그러면 고르게 질(質)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요. 작은 음식점에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많아지고, 덩달아 종업원 수가 많아지고, 가게도 넓어지는데 그러다 보면 맛이 예전만 못한 경우가 많잖아요.
제 그림을 찾는 수요가 늘면, 양을 늘리는 게 작가의 일반적 행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을 많이 벌게 되고 더 유명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전 작품 질이 우선이라 생각해요. 남들은 저더러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벌었겠다고 하지만, 수입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요. 그림 가격은 올라갔지만 그림 양이 줄어들었으니까요. 질을 높이려면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해요.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작가의 행보와 역행하는 셈이죠. 저는 화가는 그림이 좋아야 하고, 식당은 맛이 생명이라 생각해요. 날이 갈수록 그림이 좋아진다는 말을 듣는 게 제 꿈입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자크루이 다비드의 거대한 작품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다비드의 조수가 그렸다고 한다. 다비드는 화가가 아니라 ‘미술감독’이라 해야 옳다. 모든 대가의 뒤에는 그들을 도운 ‘숨은 손’이 있다는 사실은 틀린 말이 아니다.
—아직 젊잖아요.
“젊죠. ‘홍콩 크리스티’ 부사장인 에릭 창(Eric Chang)이 제게 이렇게 그려달라, 저렇게 그려달라 요구하지 않아요. 그는 제 작업이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하려 경매시장에 새 작품을 선보이고 낙찰되는 것으로 (변화를) 시험하려 해요. 다행히 국내 작가 중 가장 많이 거래되고 가격의 부침이 없어요. 저와 함께 참여했던 작가들은 언제부턴가 출품을 안 해요. 결과가 안 좋아서가 아니라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저는, 멈춰서서 우려먹으면 끝장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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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걸의 수묵담채화 <가을사랑> 111X159cm, 2012년. |
화가의 가슴과 손이 좋아야 한다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 중 전업작가 수는 얼마나 될까.
“진짜 전업(專業)은 통틀어 너덧 분 정도예요. 그림 그리는 분 대개가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있어요. 작업실, 작업도구, 노후까지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림 하나만으론 살 수 없죠. 화가가 한 해 7000만~8000만원의 수익을 내려면 그림을 두 배는 팔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화랑(畫廊)이 판매가의 반을 가져갑니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낙찰돼도 제 배당은 35%예요.
OECD 국가 중 한국이 가장 작가가 살기 어려운 나라라고 해요. 국내 작가 중 아무리 유명세를 타는 분이 있어도 몇 년 떴다가 사그라지는 것은 그만한 저변(底邊)이 없기 때문이에요. 제 그림은 대개 해외에서 거래됩니다. 한국에서 구매하는 이도 중국계 외국인이 많아요.”
그는 2003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지금까지 6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번 개인전(2011년 8월)은 3년 만에 연 것이었어요. 그림 양으로 보면 1년이나 늦어도 2년에 한 번은 전시회를 열 수 있지만 그림을 그렇게 모을 수 없어요. 생활을 위해 팔아야 하니까요.”
그는 작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림 그리는 게 힘들고 지겨워졌었다”고 한다. 요즘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있다.
“화가는 그림을 파는 게 아니라 화가의 생각을 파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것이 조형이라는 틀로 구현돼 나와요. 그러면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뭘까요? 서양화는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유명작가의 사생활을 보세요. 그러나 동양화는 자기 삶과 작업이 일치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제 안에 추악한 내면이 있을 수 있지만, 끊임없이 버리려 노력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 합니다. 아름다운 곳을 찾아 그 느낌을 타인과 공유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제 안에 더러움이 득시글득시글한데 아름다움을 전달하겠다는 것은 가식입니다.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선 화가의 가슴과 손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그게(내면이) 갖춰지면,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도 자연스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 전반의 가장 큰 목표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언젠가 신 앞에 서서 ‘애썼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이게 뭐냐. 치워 버려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술가의 길이 좋은 사람 되는 것만으로 가능할까요.
“예술은 인간 다음이지, 인간을 넘어선 예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삶의 한 분야, 해야 할 천직이 작가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갈 뿐입니다. 인간과의 관계나 다른 일이 어그러지면서까지 그리고 싶지 않아요. 예술지상주의자가 들으면 ‘너 때문에 예술이 안 된다’고 할지 모르나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추악한 사람이 그리면, 흉한 향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인간이 돼야 그림도, 감동도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그림이 여태 지지부진한지 모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