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주기 다가오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家長의 부재 실감 못해
⊙ “늘 둘이 함께 건강검진 받았는데, 오늘은 혼자 누워 내시경 받으려니 눈물이 나데요”(장옥자 여사)
⊙ ‘鐵人’이었지만 감성 풍부했던 사람, 특히 미각 뛰어나 이병철 회장이 신라호텔 오픈 때 식당 음식
총점검하게 해
⊙ 고승덕 변호사(딸 박유아씨의 前 남편)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공천 문제는 알려진 것과 달라
⊙ “늘 둘이 함께 건강검진 받았는데, 오늘은 혼자 누워 내시경 받으려니 눈물이 나데요”(장옥자 여사)
⊙ ‘鐵人’이었지만 감성 풍부했던 사람, 특히 미각 뛰어나 이병철 회장이 신라호텔 오픈 때 식당 음식
총점검하게 해
⊙ 고승덕 변호사(딸 박유아씨의 前 남편)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공천 문제는 알려진 것과 달라

- 고 박태준 전 회장은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돼 있다. 박 전 회장의 부인 장옥자 여사는 장례 이후 지금껏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다. 묘소 앞에는 포스코 측에서 천막과 테이블을 설치해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런데 아직도 ‘시묘살이’ 풍습을 지키는 여인이 있다. 지난해 12월 13일 타계한 고(故) 박태준(朴泰俊·이하 직책 생략) 전(前) 포스코 명예회장의 부인 장옥자(張玉子) 여사다. 그이는 장례를 치른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 9월 말 박태준의 묘소가 있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추석이 코앞인데도 얼굴이 따가우리만치 햇볕이 강한 날이었다. 현충원에서 박태준 묘소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묘소 앞에 흰 천막이 설치돼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현충원 입구에서 만난 자원봉사자들이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주었다.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돼 있는 박태준 묘소는 만개한 양란(洋蘭)과 싱그러운 화초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 안에는 9월 20일 대선(大選) 출마를 선언하고 참배한 안철수(安哲秀) 후보의 조화도 있었다. 포스코 사외이사를 지낸 안 후보는 평소 박태준을 존경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묘소 앞 비석에는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글귀는 ‘한국의 카네기’로 불렸던 박태준의 생활신조였다.
도시락 먹으며 남편의 영혼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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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옥자 여사가 남편 박태준 전 회장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상석에는 박 전 회장이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 한 잔을 놓았다. |
50대 초반의 사내가 참배객을 맞듯 정중하게 기자를 맞이했다. 천막 안 그늘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돼 있고, 곱게 차려입은 초로의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사내는 신분을 밝히는 기자에게 “사모님은 오늘 병원에 들렀다 오기로 해 여느 때보다 늦을 것 같다”고 알려줬다.
사내의 이름은 전창식(全昌植). 요리사 출신이라는 그는 “20대 후반에 포스코 영빈관에 근무하면서 박 전 명예회장과 인연을 맺었고, 존경하는 마음에 지금껏 따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묘소에는 장 여사와 마찬가지로 장례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출근하듯 들르고 있다고 했다.
“사모님께서는 보통 매일 오전 10시30분쯤 오셔서 오후 2~3시쯤 귀가하십니다. 오늘은 건강검진이 있는 날이라 좀 늦으시네요. 저 두 분은 포스코 부인회 회원들이십니다. 총 100명에 이르는 부인회 회원들은 조를 짜서 번갈아 가며 이곳에 오십니다.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이곳에서 사모님과 함께 점심을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가시죠. 매주 금요일에는 포스코 계열사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이곳을 찾고 있고요.”
장옥자 여사는 지난 여름의 폭염과 태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묘소를 지켰다고 한다. 이곳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장 여사를 돌보고 묘소를 관리하는 이는 전창식씨만이 아니다. 황종현(黃宗賢) 전 포항스틸러스 부사장 겸 축구단 단장도 거의 매일 오고 있다. 황 전 부사장은 부인 엄신애씨와 늘 동행한다고 한다.
그 밖에 황경노(黃慶老) 전 포철 사장, 안병화(安秉華) 포철동우회 회장 등이 주기적으로 묘소를 방문하고 있다. 평일에는 초·중·고 학생들이 역사인물 탐방을 위해 찾고 있기도 하다. 전창식씨는 “장례 이후 이곳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포철 부인회에서 순번 정해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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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준 전 회장의 묘소는 양란과 갖가지 화초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가서인지 안온하면서도 정갈하게 느껴졌다. |
참배를 마친 장 여사에게 인사를 건네니 “나 좋아서 하는 일이니 취재는 하지 말고 우리랑 같이 식사나 하고 가라”며 웃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곱고 우아해 보였고, 허리도 꼿꼿했다. 가까이서 본 장 여사는 키가 상당히 컸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오늘 건강검진이 있는 날이라 병원에 다녀오는 길인데, 옆에 애들 아빠가 없으니까 눈물이 나데요. 항상 둘이서 함께 건강검진을 받았기 때문에 내시경을 할 때는 무심결에 옆 침상을 봤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어야 할 아빠가 없는 거예요. 떠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솔직히 애들 아빠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장 여사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이가 눈물을 감추려는 듯 갑자기 “시장하겠다”며 집에서 싸 온 떡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그러자 부인회에서 온 두 여인이 “오늘은 샌드위치를 준비했다”며 다양한 모양의 샌드위치로 점심을 차렸다. 한 사람은 고 송기오(宋基五) 전 포항제철 뉴욕소장 부인 권인자(權仁子)씨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호경(李鎬京) 전 포항강재 사장 부인 안경숙씨였다.
―두 분 금실이 유난했던 모양이지요.
“애들 아빠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지요. 생전에 ‘임자, 우린 나중에 저세상에 갈 때도 함께 가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옆에 있던 딸(차녀 박유아)이 ‘아버지 그건 안 돼요, 엄마가 억울해요’라고 말했지요. 딸은 제가 남편보다 세 살이나 아래고, 고생을 많이 했으니 아빠보다는 좀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 소리를 들은 애들 아빠는 그저 씩 웃곤 했습니다.”
장 여사의 음성은 느리고 나직했다. 신경 써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었다.
―함께한 세월이 50년이 넘으니 한두 번쯤 부부싸움은 했겠지요.
“우린 평생 다퉈 본 적이 없습니다. 애들 아빠가 내 감정 상태를 보고 알아서 조심했기 때문이지요. 애들 아빠는 내 기분 상태가 좋지 않다 싶으면 아이들에게도 ‘오늘 엄마 기분이 좋지 않으니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며 미리 주의를 주곤 했습니다.”
맞선 때 육사 생도 숫자를 묻자 “군사기밀”이라며 말 안 해
―굉장한 애처가(愛妻家)였던 모양입니다.
“애처가라기보다 신사였지요. 애들 아빠는 ‘여자에게는 직위가 있나 명예가 있나 오직 남자 하나 보고 시집 오는 건데,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그 여자를 이기려 하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자라고 얕보거나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어요. 저에게도 평생 경어를 썼지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항상 저 먼저 내리라고 하고, 횡단보도에서는 본인이 차가 오는 쪽에 서서 저를 에스코트하며 건넜지요. 어쩌다 제가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갈라 치면 ‘조심하라’며 가로막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생일선물을 잊지 않고 챙기던 세심한 분이기도 했고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저희 고모부가 애들 아빠의 8촌뻘 되는 친척이었습니다. 그 고모부 주선으로 선을 보게 되었지요. 애들 아빠는 당시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최연소 교무처장으로 육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저는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후 집에서 신부수업을 하고 있었지요. 애들 아빠가 스물일곱, 제가 스물넷이었습니다.”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키가 크고 피부가 유난히 희어서 서양인 같았어요. 군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부산의 저희 집으로 직접 찾아왔는데, 여동생이 먼저 보고는 ‘언니, 이번에는 키가 큰 남자야’라고 말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제가 그 시대 여자 치고 키가 큰 편이라 앞서 선을 본 남자들은 저보다 작았거든요.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둘이 앉아 나눈 첫 대화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제가 ‘육사에는 생도가 몇 명이나 됩니까?’라고 물으니 애들 아빠가 ‘군사기밀이어서 알려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지요.”
집안끼리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두 사람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54년 12월 식을 올린 두 사람은 육사 교무처장 관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당시 박태준은 관사가 아니었으면 신접살림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장교였다. 그는 결혼 후 장 여사에게 “나는 나라에 바친 몸이니 집안 살림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혼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육사 교무처장으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관사가 있고, 전화와 차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국방대학 책임교수로 차출돼 관사를 나가게 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국방대학이 있는 수색 부근에 방을 얻어야 하는데 손에 있는 돈이라곤 육사에서 송별금으로 준 1만원이 전부였어요. 그 돈을 보증금으로 단칸방을 하나 얻어 살았습니다. 매달 1000원씩 삭감하는 조건이었지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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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박태준 전 회장의 팔순 당시 부부가 축하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있다. |
―막강한 자리로 옮겼으니 생활형편은 많이 폈겠네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단장급 인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리인데도 원리원칙을 칼같이 지키는 양반이라 월급 이외에 생기는 게 전혀 없었어요. 애들 아빠에게 잘보이려고 저희 집에 찾아왔던 분들이 사는 형편을 보고 놀라서 그냥 돌아갔을 정도입니다. 저희 집 건너에 살던 병참과장 집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인데, 인사과장 집은 월세 단칸방이니 놀랄 만도 했지요.”
박태준 부부가 월세에서 벗어나 전셋집을 얻은 것은 1961년 미국 연수를 마치고 난 다음이고, 내 집 마련을 한 것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던 1964년 대일청구권 자금을 얻기 위해 일본 특사로 파견될 무렵이었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오랫동안 군 요직에 있었고, 중대한 일을 하면서도 집 한 칸 없는 박태준이 안타까워 집을 사라며 하사금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 장만한 집이 북아현동에 있던 집이었습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내 집이었지요. 전세금까지 보태 산 집이고, 36년 동안 우리 식구들의 손때가 묻은 집이지만 2000년 14억5000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중 10억원은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고, 나머지 4억5000만원으로 전세를 구하다 둘째딸이 미국에 가면서 두고 간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죠. 애들 아빠는 줄곧 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원리원칙에 철저하고 자신에게 엄격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지요. 돌아가시고 난 후 포스코 주식이 하나도 없다는 말에 세상이 깜짝 놀랐을 정도로 청렴결백했습니다.”
박태준은 2001년 흉막섬유종으로 폐에 생긴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미국에서 받았다. 하지만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했고, 2011년 겨울 폐부종 증세가 악화돼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임종을 지킨 장 여사는 의식이 없는 남편을 붙들고 “당신은 좋은 아버지였고, 좋은 남편이었고, 국가를 위한 애국자였다고 말하며 조용히 떠나보냈다”고 말했다.
보험 리베이트 받자 포철 장학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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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4·13 총선 투표장에서 박태준 전 회장 부부가 나란히 투표를 하고 있다. |
“얼마 전 청암장학재단 해외유학생 출신 모임 회원들이 참배하고 갔습니다. 모두 일류대학 교수나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그분들을 보니 회사 장학재단(현 포스코 청암재단) 설립 당시 장학기금을 만들게 된 일화가 하나 떠오르더군요.”
―박정희 대통령과 관계된 일화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회사(포철) 설립 초기 각종 장비를 들여오는데 보험가입이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보험을 들었더니 당시 돈으로 6000만원 정도의 리베이트가 있더군요. 관리이사는 이 돈을 각하께 정치자금으로 드리자고 했습니다. 애들 아빠가 그 돈을 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지고 가서 ‘각하, 건설회사를 하니 이런 돈도 생깁니다’라며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그래, 그러면 다른 데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고, 애들 아빠는 ‘각하 그걸 따지시면 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며 난색을 표했지요.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받은 돈을 슬그머니 애들 아빠 쪽으로 밀면서 ‘임자 마음대로 하게, 부인한테 주든지 직원들과 나누든지, 그도 아니면 술을 마시든지’라고 했습니다. 애들 아빠는 그 길로 회사로 돌아와 이사회를 소집했고, 그 돈을 전액 사내 장학기금으로 돌렸지요. 대한민국 최초의 사내장학회가 결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장학금 덕분에 포스코 직원 자녀들은 등록금 부담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또한 우수 인재들은 해외유학 혜택을 보기도 했다. 당시 국내 기업 중 해외유학 장학금을 주는 회사는 (주)선경이 유일했다. 선경은 해외유학 장학금을 월 생활비조로 500달러씩 지원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그보다 많은 600달러씩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장 여사는 “우리 5남매 중에는 단 한 명도 장학금을 받은 아이가 없다”며 “애들 아빠는 ‘나는 내 자식에게 주려고 장학금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 야속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 “삼성중공업 경영하라”고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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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조정래씨는 박태준 전 회장이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이 지낸 측근 중 한 사람이다. 말년에는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
“1977년인가, 이 회장님께서 ‘영일만의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며 포항에 내려오셨어요. 이 회장님은 포철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보곤 ‘이런 공기업은 처음 봤어. 이 회사는 박 사장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경영하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곤 포철이 공장보다 먼저 건립한 연수원을 한 바퀴 둘러보시더니 ‘박 사장, 고생 많았네. 나 여기 온 기념으로 선물 하나 해 주고 싶은데 뭐가 좋겠어?’라고 물었어요. 애들 아빠는 ‘다른 건 필요 없고 장학금이나 좀 주시지요’라고 답했고, 이 회장님께서는 흔쾌히 1000만원을 내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병철 회장과는 인연이 깊었죠.
“이 회장님이 애들 아빠를 참 사랑했어요. 능력을 깊이 신뢰하기도 했고요. 삼성 사장단을 모아 놓고 ‘박 사장과 가끔 식사를 하면서 배우라’고 하달했을 정도입니다. 삼성에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애들 아빠를 불러 자문을 구하곤 했지요. 이 회장님은 그릇이 큰 분이었습니다.”
―사업가로서 그릇이 컸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요. 1980년대 중반쯤인가, 애들 아빠는 삼성 임원회의에도 참석하곤 했어요. 그 무렵 이 회장은 삼성중공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거든요. 어느 날 이 회장은 애들 아빠를 부르더니 ‘박 사장 나랏일은 그만하면 됐어. 내가 앞으로 5년 동안 매해 300억씩 도와줄 테니 삼성중공업을 자네가 맡아서 경영하게’라고 말했습니다. ‘나이 들어 언젠가 포철에서 물러나면 뭘 할 것인가’라고 하면서요. 포철 퇴직 후 애들 아빠의 여생까지 걱정한 배려였습니다.”
2004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박태준 자서전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의 엄청난 제안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랬다.
“마음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광양(광양제철소)을 시작했습니다. 광양까지 완수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욕심은 나지만 포철에 쏟아야 할 힘도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이어진 이병철 회장의 답변도 걸작이었다.
“참 아름다운 대답이다. 그래, 자네답다. 자네가 고맙다.”
부인회 결속력 남편들 못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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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옥자 여사가 포스코 부인회 회원들과 함께 박태준 전 회장 묘소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
“사모님도 회장님 못지않게 대단하신 분입니다. 포철 부인회를 결성하고, 독신자를 위한 김장이며, 고아원·양로원 봉사활동을 앞장서서 이끄셨죠.”
기자가 흥미를 보이자 권씨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저는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남편이 1976년 포철 이사로 이직하면서 포항에 내려오게 되었어요. 관사에 도착한 날이 마침 김장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 양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배추 2만 포기가 쌓여 있었습니다. 더 놀란 것은 힘이 장사인 듯한 어떤 여자 분이 높다란 김치 저장고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함지박 가득 든 김치를 붓는데, 그분이 사장 부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모님은 무슨 일을 하든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 때문에 임직원 부인들이 사모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지요.”
포스코 부인회는 지금도 결속력이 그 어떤 단체보다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이호경 전 포항강재 사장 부인 안경숙씨는 “사모님은 부인회를 결성해 한가족 운동을 펼쳤다”며 “수십 년을 같은 단지에서 지내다 보니 우리는 모두 한식구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가 사라진 지금도 회원들 애경사가 있을 때면 달려가 내 일처럼 챙겨 전문 용역회사 직원들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장 여사는 힘이 부치는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이에게 박태준의 유별난 자식 사랑에 대해 묻자 “그 이야기는 딸에게 직접 들으라”며 사양했다. 장 여사가 말한 딸은 차녀인 박유아(朴裕雅)씨였다.⊙
딸 박유아씨 인터뷰
“아버지는 ‘영원한 내 편’이었다”
얼마 후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박유아씨를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박씨는 박태준의 1남4녀 중 차녀(次女)다. 그녀는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1984년 고승덕(高承德) 전 국회의원(現 고승덕법률사무소 변호사)과 결혼했으나 2000년대 초 합의이혼했다. 현재는 고 전 의원과 사이에 낳은 남매를 키우며 재미(在美)화가로 뉴욕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난 9월에는 서울 삼청동에서 자신의 20번째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어머님이 매일 현충원에 나가 아버님 묘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연로하신데, 괜찮을까요.
“자식으로서 걱정돼 만류했습니다만 ‘1년만 하겠으니 누구도 잔소리하지 말라’고 하세요. 49재까지는 저도 따라다녔습니다. 매일 참배객 맞고 아버지와 얘기 나누며 점심도 먹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시죠. 워낙 사이가 좋았던 분이라 상실감이 클 텐데, 그나마 묘소에 나가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우울하게 집 안에만 있는 것보다는 건강에도 좋을 것 같고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평생 긴장의 대상이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요. 집에서도 늘 화장이며 머리 손질을 하고 계셨죠. 시장에 갈 때도 수트를 입고 가시던 분입니다. 집 안에서는 그냥 편하게 잠옷 바람으로 돌아다닐 법도 한데, 언제나 정돈된 모습만 보였죠.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지나쳐 늘 긴장된 상태로 사셨던 것 같아요. 그 긴장의 대상이 어느 날 사라졌으니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그 허탈감을 묘소에 나가는 것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죠.”
―부모님 금실이 유난했다면서요.
“부부가 평생을 살면 덤덤해질 법도 한데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사이가 좋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아요. 제가 분석해 보건대, 그건 아마 많이 떨어져 살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가 워낙 바쁘셔서 엄마는 늘 기다리며 사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잠깐이라도 같이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YS정권 당시 아버지가 일본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셨잖아요. 사실 비극적인 상황인데도 엄마는 ‘너희 아빠와 이렇게 매일같이 밥 먹고 손 잡고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내가 언제 가져 봤느냐’며 좋아하셨습니다.”
말년에 소설가 조정래 부부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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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녀 박유아씨의 이화여대 졸업식에 함께한 박태준 전 회장 부부. 1남4녀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바쁜 와중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
“유머가 넘치고 한없이 자유로운 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뜻은 ‘사고의 자유’를 말하죠. 아버지는 어려움을 많이 겪은 그 세대 특유의 틀이 없는 분이세요. 보통 틀이 있는 분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상대 이야기가 자기 안의 틀에서 벗어나면 당황하거나 노여워하시잖아요. 제 경험으로는 틀이 있는 어른들의 경우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면 아예 듣지 않거나 딴청을 피우더라고요. 그래서 대화하기가 힘든데, 저희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늘 열려 있어서 모르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면 더욱 더 호기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시곤 했죠.”
박씨는 아버지가 ‘열려 있다’는 것의 단적인 예로 소설가 조정래(趙廷來) 씨와의 우정을 꼽았다. 6·25 참전용사였고, 무공훈장까지 받은 아버지가 과거 빨치산 소설가로 낙인찍혀 있던 조정래씨와 친구가 된 데는 그만큼 아버지의 영혼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정래 선생과는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편하게 술잔을 나누며 속 얘기를 털어놓은 몇 안되는 지인 중 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년에 조정래 선생님 내외와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셨어요. 저도 몇 번 따라갔는데, 너무 좋았어요. 두 분 대화가 다채롭고 풍부해서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정신적으로 살이 찌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철강왕’ 이면에 감성적인 부분이 있었군요.
“‘철강왕’ 이미지에 가려져서 그렇지 굉장히 감성적인 분이셨어요. 특히 술에 취하면 노래를 즐겨 부르셨죠. 그것도 감정이입이 돼 노래를 아주 맛있게 불렀습니다. 1980년대 5공이 시작되면서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정치인의 길을 걷게 돼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당시 저는 갓 입학한 대학 신입생이었죠. 아버지는 기분 좋게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저를 불러 같이 노래 부르고 놀자며 어렸을 적 일본에서 배운 노래로 흥을 돋우곤 하셨습니다.”
박태준은 탁월한 미각(味覺)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음식 맛을 보곤 재료의 신선도를 정확히 짚어 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병철 회장이 신라호텔 오픈 당시 특별히 박태준 회장을 불러 호텔 내 식당의 맛을 최종 점검하게 했다고 한다. 박씨는 “아버지가 신라호텔에 떴다고 하면 각 식당의 주방장들이 숨을 못 쉴 정도로 긴장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노래와 미각뿐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박유아씨에 따르면 박태준의 어린 시절 꿈은 건축가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도 건축과와 기계과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가 건축과를 포기하고 기계과로 마음을 굳힌 것은 당시 조국의 상황이 건축보다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박씨는 “아버지는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린 분이었다”며 “내가 엉뚱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 남편 고 변호사와는 무슨 일이
―박유아씨는 언제부터 화가를 꿈꾸었습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중에 크면 미대에 갈 것’이라고 노래를 불렀어요. 식구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요. 특히 아버지는 그런 저를 예뻐했어요.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곤 했습니다. 저희 형제가 다섯인데, 이상하게도 제가 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많은 편이에요.”
―기억나는 추억이 있습니까.
“많지요. 그중에서도 명동 유네스코 빌딩에 있던 아버지 사무실에 찾아가 그림 그리며 놀던 일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마 아버지가 대한중석 사장으로 계시던 때였을 거예요. 저는 책상 위에, 아버지는 의자 위에 앉아 회사 이름이 새겨진 메모지에 서로의 얼굴을 그리며 놀곤 했지요. 어른이 된 후 짚어 보니 그 시절 아버지는 적자였던 대한중석을 흑자로 전환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더군요. 그 바쁜 와중에 찾아온 딸을 귀찮아하지 않고 놀아 주던 분이 바로 저희 아버지입니다.”
박씨는 대입시험을 앞둔 1979년 예비고사를 보던 때의 일화도 들려주었다. 그해에는 서울 지역의 경우 예비고사장 편성이 잘못돼 미아리 쪽 학교에 집중됐다. 그 때문에 교통체증으로 지각생이 속출했다고 한다.
“그날 아침 저도 아버지 엄마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미아리에 있는 한 학교로 향했어요. 그런데 미아리고개 부근에서 차가 막혀 꼼짝을 않는 거예요. 입실 시간이 점점 다가오니까 엄마는 ‘어떻게 하느냐’며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때 상황파악이 빠른 아버지가 ‘내려’ 하더니 제 손을 잡고 마구 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미아리고개를 넘으니 교통상황이 한결 나아 택시를 잡아타고 입실 직전 겨우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판단력 덕분에 지각을 면한 것이지요.”
―누구보다 바삐 살아온 분인데, 자식들의 학사(學事)를 모두 챙겼나 봅니다.
“해외출장 같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저희 형제들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을 빠지지 않고 챙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쁘셨겠어요. 어른이 되고 보니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으로서 항상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버님이 자민련 총재로 있을 당시 고승덕 전 의원의 정계진출을 막는 바람에 부부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고 변호사가 국민회의 공천을 신청한 2000년 이전부터 저는 그 사람과 별거 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군요. 얼마 전 인터넷 위키피디아에서 우연히 고 변호사 프로필을 보니 ‘부인인 박유아와는 사이가 좋았으나 장인인 박태준이 정계진출을 막아 이혼하게 되었다’고 소개돼 있더군요. 혼자서 웃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부가 사이가 좋은데 별거를 하겠어요.”
―그렇다면 아버님이 고 변호사의 정계진출을 막았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란 얘기인가요.
“당연하죠. 당시 고 변호사는 국민회의에 공천신청을 했고, 아버지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연합하면서 공천을 협의하게 돼 고 변호사의 공천신청 사실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죠. 아버지는 깜짝 놀라 ‘누가 신청했다고?’라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곤 미국에 있는 저에게 ‘당 총재로서 내가 입장표명을 해야 하니까 네가 결단을 내려라’라며 전화를 하셨죠. 고 변호사와 제가 ‘나가야 하니 귀국해서 도와라’와 ‘싫으니 나가지 마라’며 옥신각신할 때였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저는 귀국해서 선거운동 도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알았다’고 하셨죠.”
“아버지 생각의 5분의 4는 조국”
―딸들은 보통 아버지를 닮은 사람과 결혼한다는데….
“아버지 같은 남자를 고르기엔 저희 자매들의 결혼이 너무 빨랐습니다. 세상 밖에 어떤 남자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남자들은 모두 아버지 같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선택을 한 거죠. 그게 좋은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딸들의 맹점(盲點)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아요. 멀리 떨어져 살아서 그렇기도 하고, 늘 마음으로 대화하며 살아 버릇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영원한 내 편’이 없어졌다는 사실에는…”
―손녀는 ‘할아버지 박태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버지 없이 자란 제 딸한테 할아버지는 온 세상이었습니다. 유난히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제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5분의 4는 조국 근대화이고 나머지 5분의 1이 아버지였습니다. 아마 내 딸에게 할아버지는 5분의 1이 대한민국이고, 나머지 5분의 4가 할비야(손자들이 외할아버지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일 겁니다.⊙















































